나, 정현이에요 !
메일 하나가 도착했다. 메일 제목은 “ 오빠, 나야 ! 그때 술집에서... ” 다. 여자랑 술집에서 술을 마신 기억이 나서 혹시나 하고 클릭한다. “ 실시간 화상 채팅 ! 화끈한 CSI 미녀들이 머리, 어깨, 무릎, 발, 무릎, 발가락까지 당신을 핥아드립니다. 클릭, 클릭, 클릭 ! ” 아, 신발 ! 우리는 어떤 서사’가 숨어 있는 것일까, 라는 단순한 호기심 때문에 메일을 열어보게 된다. 스팸 발송자‘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 오빠 " 라는 호칭은 다른 인칭대명사'와는 달리 반드시 친숙한 개인적 서사'를 담보'로 한다. 이 개인적 서사는 은밀한 추억과 음탕한 호기심'을 자극시킨다. 자기를 오빠라고 부른 수 많은 여자를 떠올린다. 그래서 우리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클릭 한다. 하지만 이 짓을 몇 번 반복하면 더 이상 속지 않는다. 이때 등장한 이름이 바로 " 정현 " 따위'의 이름이다.
" 오빠 " 에게 속은 우리는 “ 나... 정현이에요. ” 라는 제목으로 발송된 스팸에도 속는다. 골방 은둔자’가 아니라면 주변에 정현‘이라는 이름을 가진 친구 하나는 있게 마련이지 않은가 ! 생각해 보면, < 정현 > 이라는 이름만큼 광범위한 이름도 없다. 여자 이름이기도 하고 남자 이름이기도 하니깐 말이다. < 오빠 > 라는 제목이 성적인 도발'을 상상하게 만드는 이름이라면, < 정현 > 이라는 이름은 사랑을 고백하지 못하고 애틋한 감정으로만 남은 순수한 사랑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러니깐 정현'은 내가 알지 못하고 지나갔던, 나를 좋아했던 어떤 이름처럼 들린다. 메일 속엔 어떤 내용이 숨겨져 있을까 ? 그런 마음으로 클릭 한다. 그리고는 매우 빠르게 내뱉는다. " 아, 시부랄 !! "
그러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왜 이런 제목으로 발송된 메일을 클릭하게 될까 ? < 50년 무담보 무이자 대출 상담 > 이라는 제목에는 꿈쩍도 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결국 나는 자본주의 사회‘는 서사의 과잉’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 무담보 대출 > 이라는 제목으로 발송된 메일은 거들떠도 안 보면서 < 기억할지 모르겠네요 ? 저... 정현이에요. > 라는 제목에는 한 번쯤 클릭하게 되는 심리‘는 메일에 서사’가 있을 거란 생각 때문이다. 정현?! 뇌하수체는 빠르게 회전한다. 초등학교 동창 정현, 중학교 동창 정현, 대학교 동창 정현, 우연히 만난 정현, 후배 정현, 예쁜 정원, 씩씩한 정원, 원나잇스탠드한 정현, 술자리에서 만난 정현, 그리고 내 친구의 아내 정현 ?!!!!!!
반면 < 무담보 대출 > 이라는 제목의 메일‘은 검토하지도 않고 도착 즉시 바로 삭제하는 이유는 그 메일 속에 서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이야기, 사연, 서사에 끌리는 유일한 동물이다. 소설과 영화가 잘 팔리는 이유이다. 하지만 서사‘가 소설이나 영화에만 쓰이는 고급 기술이라고 생각하면 안된다. 서사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를 축소하면 개인의 사연‘이 된다. 사연이 모이고 모여서 탄생하게 된 것이 바로 서사'다. 대중이 < 나는 가수다 > 의 임재범에게 열광했던 이유는 < 무림을 떠난 자객의 귀환이라는 서사 > 때문이었다. 이 서사는 그동안 힘들게 살았습니다, 라는 임재범의 사연과 겹치면서 상승 작용을 한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
서사는 상품 가치‘가 있다. 자본주의 사회’는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티븨 광고’란, 이미지가 팔 할이지만 동시에 서사도 팔 할을 차지한다. 내가 보기엔 이미지는 서사를 압축한 극단적 예이다. 알툴즈로 빡빡 눌러서 빵빵하게 만들어 놓은 것이 바로 이미지'다. 그래서 나는 서사와 이미지'는 서로 다른 영역이라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광고에서 이승기‘가 냉장고 속에 있는 김치를 먹으며 엄마’를 생각할 때, 엄마라는 이미지'는 소비자의 뇌속에 박힌 후, 알툴즈 압축풀기'를 진행한다. 엄마의 서사'가 주르륵 나열될 때마다 눈물도 주루륵 ! 대한민국 사회에서 < 엄마 > 라는 이미지'를 자주 파는 이유는 어머니'라는 이미지'에는 이미 매우 강력한,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신파와 서정'을 깔고 있기 때문이다. 즉각적인 연상작용이다. 그래서 광고주는 물을 팔 때도 엄마를 팔고, 소설을 팔 때도 엄마를 판다. 때론 아빠도 팔고, 아들도 팔고, 아내도 판다.
그게 바로 자본주의다. 서사가 될 만한 것은 모두 판다. 신경숙이 < 엄마를 부탁해 > 를 통해서 현대인'이 불행한 이유는 엄마가 부재하기 때문이라고 징징거리며 말했지만 사실 현대인이 불행한 이유는 엄마가 부재하기 때문이 아니라 보살핌( 사회적 케어 시스템 ) 이 제도적으로 부재하기 때문이다. 즉, 엄마의 보살핌'을 의미하는 복지 시스템이 실종되었기 때문이다. 신경숙이 보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사회를 들여다보았다면 혈연적 엄마'보다는 제도적 엄마의 부재에서 불안을 읽어야 한다. 엄마'는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집 나간 엄마'가 돌아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까 ? 그럴 가능성은 없다. 내가 신경숙을 싫어하는 이유이다.
■ 웅진 코웨이 광고 :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란 소녀시대 윤아'는 자기 대신 < 코웨이 > 를 엄마에게 보낸다. 코웨이가 코쟁이 존웨인의 줄임말처럼 들린다. 정수기'를 마치 보디가드인 양 말하는 사기치는 농간을 보면, 포청천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만하다. 프로이트가 살아 있었다면 그는 다음과 같은 진단을 내렸을 것이다. " 지금 윤아는 인지부조화'에 따른 망상에 시달리는 편집증 환자입니다. 정수기'를 보디가드'로 착각한다는 사실은, 음... 매우 심각한 상태입니다. 입원치료가 불가피하군요. 그녀가 코웨이'를 존 웨인'으로 착각하는 이유는 아버지의 부재가 주는 트라우마'가 이 병의 원인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인 엄마가 아니라 아빠입니다. 그녀는 엄마를 부탁한다며 엄마에 대한 애정을 대중에게 어필하지만, 사실 그녀는 엄마를 증오하고 있어요. 자신이 사랑하는 아버지'를 빼앗아간 엄마를 증오하는 것이죠. 엄밀히 말하면 < 엄마를 부탁해 > 가 아니라 < 아빠를 부탁해 > 입니다. "
단언하건대, 상품은 서사‘가 함께 할 때 상승 작용을 한다. < 무담보 대출 > 이라는 제목의 스팸메일이 스팸 발송자에게는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하는 이유는 서사 없이 상품만 팔려고 했기 때문이다. 무담보 대출'이라는 제목에는 개인적 서사'가 부재한다. 수신자를 속이는 스팸이 작은 서사‘를 이용했다면, 대기업 광고’는 거대한 용량으로 당신에게 발송된 스팸 폭탄이다. 스팸 메일은 개인이 읽지 않고 삭제할 권리를 존중하지만 대기업 광고'는 선택의 권리'가 없다. 그러므로 티븨 광고는 스펨 메일보다 더 스펨하다 ! 광고’란 100% 가짜다.
김연아가 섬유유연제 샤프란으로 옷을 세탁한다고 광고하지만, 사실 김연아는 피겨 연습하느라 세탁기 돌릴 시간도 없다. 소비자는 김연아의 성공 스토리'에 신뢰를 보내고 그 신뢰가 상품에 투영되는 것이다. 그러니깐 광고 속 김연아가 샤프란을 선택했기 때문에 신뢰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가지고 있는 스토리 때문에 팔리는 것이다. 이야기'를 얻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보고, 듣는 행위이고, 다른 하나는 읽는 행위'이다. 월터 옹의 말을 빌리면 전자는 구술 문화에 속하고 후자는 문자 문화에 속한다. 여기서 김연아가 나오는 샤프란 광고를 보고 상품을 선택하는 사람은 구술적 인간'에 가깝고, 광고에 의지하지 않고 성분 분포'를 꼼꼼하게 따지며 기업의 사회 공헌도'를 고려하여 상품을 선택하는 사람은 문자적 인간'에 가깝다.
어느 것이 더 현명한 판단인가는 굳이 이 자리를 빌어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왜냐하면 광고 모델과 광고 상품은 개별적 물성'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광고 모델'이 다른 나라에 비해 기형적으로 높게 책정되었다는 사실'은 한국 소비자가 상품을 고를 때 광고 모델에 크게 의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깐 한국 사회는 구술 문화'에 속한다. 이러한 증후는 곳곳에서 나타난다. 대한민국은 드라마 왕국이면서 동시에 책을 읽지 않는 민족이다. 아쉽게도 월터 옹은 말한다. 구술 문화는 후진국형 문화이고, 문자 문화는 선진국형 문화'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