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안 아버스와 실비아 플라스 그리고 프리다 칼로'에게 빠진 이유도 마찬가지이리라. 그들은 아름다운 얼굴로 유혹하는 존재가 아니라 초라한 어깨로 유혹하는 존재였다. 앞에서 보면 보이지 않으나 뒤에서 보면 선명하게 보이는 것이 바로 둥근 어깨가 아니었던가. 내가 사랑했던 여인도 초라한 어깨를 가진 자'였다. 非급 존재증명자'들은 반드시 실패하게 된다. 그것이 그들이 가진 운명이다. 어쩌다 실패하게 되는 운명이 아니라 반드시 실패할 수밖에 없는 운명'은 그 필연성으로 인하여 아우라'를 얻는다. 참혹을 매혹으로 만드는 힘'이다. 다이안 아버스는 이런 말을 했다 : 길을 걷다가 누군가를 발견하게 되는 것, 그래서 눈에 띠는 것, 그것은 치명적인 매력이 된다. 치명적인 존재는 아름답다, 동시에 치명적인 존재는 독을 품는다. 인간이 非라는 한자와 생김새가 비슷한 지네'를 두려워하는 것은 지네'가 징그러운 벌레이기 때문이 아니다. 역설적이지만 아름답기에 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몸이 경직되고, 호흡이 가빠지고, 눈을 땔 수 없는 현상은 무섭기 때문이 아니라 첫눈에 반했기 때문이 아닐까 ? 두려움과 사랑은 동일하다. < 비성년열전 > 이라는 책 매우 좋다. 난, 틀린 적이 없다. 내 말을 믿어라.
- 非라는 문자가 좋다 中
은교와 롤리타
뇌 관련 책'을 꽤나 읽었다. < 뇌 신경 > 과 관련된 책'을 읽은 이유는 " 내 썩어빠진 정신머리와 갑자기 미친듯이 발광하는 승질머리 " 에 대해 스스로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컸기 때문이다. 나는 왜 평생 약에 의지해야 하는 것일까 ? 내가 삼킨 프로작'을 모았으면 책을 몇 권이나 살 수 있었을까 ? 어릴 때부터 작동된 신경 오류'는 과연 언제 폭발하게 될까 ? 너무 이른 나이에 조기성 치매'가 찾아오는 것은 아닐까 ? 한 여자를 사랑하고부터 먹던 약을 끊었다. 그 의지는 사랑의 힘이었고 사랑의 묘약이었다. 한때 나는 행복했고 조금 슬펐다. 여자가 말했다. " 우리 그만 헤어지자. 언제부터인가 당신을 보면 기쁘지 않아. 우울해 ! 끝이 보이지 않는 우물 같아. " 우리는 헤어졌다. 생각보다 끝이 보이는 위로는 담담했다. 컴컴한 터널은 끝에 가야 비로소 환해진다. (최승자)
약을 다시 먹기 시작했다. 지속적으로 자살 충동에 시달렸으나 여전히 살아남았다. 현대 뇌 신경 과학'이 밝혀낸 바'에 의하면 프로이트'는 엉터리 이론이다. 신경증'은 무의식, 억압 기제'에 따른 반응이 아니라 단순히 뇌 신경 물질이 과다 분비되는가 아니면 과소 분비되는가, 에 따른 증상이기에 상담 심리 치료보다는 약물 치료가 더 효과적이다. 물론 모든 신경증은 신경 전달 물질 때문만은 아니다. 하지만 신경 전달 물질의 과대/과소 분비'가 원인이 되기도 하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기분 조절 장애'도 호르몬 분비 탓이 크다.
어제 < 여행 카페 블라 ( 이곳 좋다, 추천한다. ) > 에서 간단하게 술을 마신 후 기분 좋게 헤어졌다. 호가든 3병을 마셨더니 발동이 걸린 것이다. 나는 사당 역'으로 넘어가서 술을 한 잔 더 하기로 약속을 했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갑자기 전철 안에서 눈물이 터졌다 ! 당황스러운 것은 승객이 아니라 나였다. 조절이 안 되는 것이다. 내가 우는데 우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너무 당황스러워서 땀을 닦는 척하면서 손수건으로 계속 눈을 가렸다. 감정 조절 시스템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부끄러운 마음에 다음 역에 내려서 화장실로 갔다. 문을 잠근 후, 가방을 열어 십자 드라이버'를 꺼내 뇌 뚜껑을 열었다. 뇌와 눈으로 이어지는 라인에는 이상이 없었다. 이상한걸......
심장과 눈으로 연결된 부분도 이상이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코와 눈으로 연결된 선을 살펴보았더니 단락이 된 상태였다. 그러니깐 단락으로 인한 오작동'인 것이다. 콧물을 흘려야 하는데 눈물을 흘린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눈에서 콧물이 흐른 것이다. 나는 눈물샘'으로 고이는 튜브를 떼어서 요도에 연결시켰다. 이제 주책없이 쏟아지는 눈물은 방광에 고일 것이다. 이리저리 고장난 뇌를 수리하다 보니 시간을 지체하여 약속 장소에 늦게 도착했다. A는 너그럽게 용서'를 했다. A는 맥주를 마셨고 나는 소주를 마셨다. 마셔도 취하지 않았다. 우리는 만나면 항상 하는 얘기'를 다시 지겹게 하기 시작했다. 나는 박범신의 < 은교 > 를 신랄하게 욕했다. 취하지는 않았으나 혀가 꼬여서 박범신을 자꾸 박병신'으로 발음했다. ( 개인적으로 박범신 작가'를 좋아한다. 박병신'은 조롱이 아니라 그날 내가 혀가 꼬여서 계속 그렇게 발음한 것이다. )
" 한국 남자 작가들이 웃긴 게 뭔 줄 아냐 ? < 하고 싶다는 욕망 > 을 교묘하게 < 창작에 대한 열정 > 따위로 포장을 한다는 거지. 그것은 창작에 대한 열정이 아니라 그냥 젊은 여자를 보고 꼴려서 하고 싶은 거야. 단순하지 ! 수컷 작가들은 무조건 여성을 인간 주체로 보는 게 아니라 창작을 위한 단순한 징검다리'로 본다. 윤대녕을 봐 ! 도시 생활에 권태를 느낀 주인공은 시골로 여행을 떠나고 거기서 묘령의 아가씨'를 만나서 섹스를 해. 닝기미, 재주도 존나 좋아서 무조건 원 나잇 스탠드'야 ! 이 과정을 통해서 주인공은 활기'를 얻어 ! 뻔한 서사지.
뻔하면 뻔뻔해지기 시작하는 거야. 여자가 피로회복제 박카스냐 ? 원기 회복 원기옥이야 ? T 머니 교통카드야 ? 충전하면 만사오케이 ? 김영삼도 보았다는 < 서편제 > 가 불편한 게 뭔 줄 아냐 ? 그것은 예술적 승화'가 아니라 존속살해지. 딸 눈을 멀게 하기 위해 독약을 탔다면 그것은 천벌을 받아야 할 죄이지 예술적 승화가 아니잖아. 이처럼 한국 남성 작가들은 여자를 징검다리, 박카스, 서울시 교통카드 티머니쯤으로 생각한다는 거야. 비평가들이란 새끼들은 이러한 남성 중심 서사에 대해 비판'을 하지 않아. 무조건 뮤즈 운운이야. "
A는 내게 그런 식의 논리라면 나보코보의 < 롤리타 > 도 비판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잠시 곰곰 생각에 빠졌다. 검지 손가락 버튼을 눌렸다. 논리적 헛점이 보일 때 해결책을 마련할 데이터'를 담당하는 기능을 한다. " 그렇지 않아 ! 전혀 다르지. 나보코프'는 어린 여자를 통해서 창작에 대한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이 아니야. 롤리타는 뮤즈가 아니야. 내가 이 작품이 위대하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는 이유는 욕망에 충실하기 때문에 그래. 험버트'는 롤리타를 " 서울시 교통카드 티머니 " 로 생각하지 않다. 사랑 자체이지 ! 그는 롤리타를 통해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롤리타를 통해 타락을 이야기하고 있는 거야. 그것은 순애보'이지..... 몰락의 순애보'야. "
나는 < 롤리타 > 를 처음 읽는 순간 사랑에 빠졌다. 롤리타, 내 삶의 빛이요, 내 생명의 불꽃, 나의 죄, 나의 영혼. 롤-리-타. 세 번 입천장에서 톡톡 치며 세 단계의 여행을 하는 혀끝. 롤.리.타. 이 절절한 고백이 아름다운 이유는 험버트의 끝없는 몰락 때문이다. 릴케는 말했다. " 우리가 그토록 아름다움을 찬미함은 아름다움이 우리를 멸시하기 때문이다. " 라고 말이다. 도끼는 도끼 자루'를 누가 잡는가에 따라 연장이 되기도 하고 혁명이 되기도 하며 흉기가 되기도 한다. 선한 것과 악한 것'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본성은 관계에서 만들어진다. 마치 목수가 잡으면 훌륭한 가구를 만드는 연장이 되지만, 살인자가 잡으면 무시무시한 흉기가 되는 것과 같다. 행복도 마찬가지다.
누군가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누군가는 불행해야 한다. 이 세상에 불행한 자가 단 한 명'도 없다면 행복한 자 또한 아무도 없다. 그러니깐 당신이 행복한 이유는 내가 불행하기 때문이다. 나는 당신에게 행복할 기회'를 주기 위해서 불행'을 선택했다. 내가 남긴 주저흔은 당신의 행복을 위해서이다. 비극은 행복한 사람을 위한 관용이었다. 그러므로 몰락한 자는 모두 박애주의자'다. 이타적 인간이다.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새벽 4시가 넘었다. 고양이'를 키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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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동 낡은 극장에서 < 분노의 포도 > 를 보고 나오다가 문득 철탑 노동자'를 생각한 적이 있었다. 바람은 낮은 데'에서는 울지 않고 높은 곳에서만 우는 짐승이다. 철탑 아래 나는 그 울음을 듣지 못하고, 철탑 위에 오른 노동자는 그 울음을 들었을 것이다. 아득해졌다. 이 추운 겨울 밤, 그들은 누구를 위해 싸우는 것일까 ? 흔들리는 철탑 위에서 그들은 얼마나 외로울까 ? 끝이 보이지 않는 몰락은 아름다우나 멸망을 위해 치닫는 몰락은 두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