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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지 점프를 하다 - 할인판
김대승 감독, 이병헌 외 출연 / 엔터원 / 2007년 7월
평점 :
품절
번지 점프'를 하다 : 첫눈에 반하는 사랑은 허구'다.
언캐니는 프로이트'의 주요 개념이다. un-canny의 독일어'인 un-heimlich'에서 un-은 접두사로 형용사, 부사, 명사에 붙어서 " 반대, 부정 " 을 뜻한다. 우선 이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heimlich의 뜻을 알아야 한다. < heim > 은 < house > 다. 집'이란 뜻이다. 이 세상에 집'보다 편한 곳이 어디에 있는가 ! 낡은 쇼파'에 누워서 리모콘으로 티븨를 보며 사타구니'를 긁을 수 있지 않은가 ! 똥구멍을 긁는다고 해서 누가 뭐라 할 사람도 없다 ! 그래서 heimlich 은 " 편안함, 익숙한, 친숙한 " 이라는 뜻으로 이어진다. 여기에 접두사 un-이 붙어서 < 기괴한 > , < 두려우면서 동시에 낯선 ( 것, 곳 ) > , < 악마적이면서 소름끼치는 것(곳) > 으로 확장된다. 그러니깐 heimlich와 unheimlich는 서로 상극이다. 반대말이다.
그런데 꼭 그렇지만은 않다. heimlich 는 편안함'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 알 수 없는 > , < 위험한 > 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이 두 단어'는 반대말이면서 비슷한 말'이기도 하다. 이 지점에서 프로이트는 반의어/反義語는 곧 동의어/同義語'라는 사실을 유추해 낸다. < 反 = 同 > 라는 황당한 공식'을 주장한다. uncanny와 canny는 같은 뿌리다 ! 프로이트는 대동강 물을 팔아먹은 김삿갓'보다 더 하면 더 했지 못한 놈'은 아닌 것 같다. 그런데 프로이트'의 이 주장'은 맞는 말이다. 로보트'를 바라보는 현대인의 심리'는 정확히 " 언캐니 " 개념과 부합한다.
인간을 닮은 초기 로보트 아시모'를 볼 때 사람들은 이 로보트에 깊은 호감'을 드러낸다. 하는 짓이 얼마나 귀엽나 ! 하하하, 호호호. 여기서 사람들이 이 로보트'에게 호감을 보이는 이유는 인간 흉내를 내는 로보트'가 장난감처럼 어설프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로보트의 외양이 점점 인간을 닮아가면 호감은 급격하게 불쾌함'으로 변한다. 인간과 로보트의 구별이 모호해지면 그때부터 사람들은 공포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실사 인형'이다. 인간과 똑같이 생긴 인형은 어딘지 모르게 불길하다 ! 바로 이 감정이 언캐니'다.
우리가 인간을 닮은 로봇이나 인형에게서 공포를 느끼는 이유는 매우 익숙한 얼굴이기 때문에 그렇다. 기괴함'이라는 심리 상태의 중심에는 " 익숙한 " 이 자리잡듯이 말이다. 우리가 귀신을 무서워하는 이유는 귀신이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더 나아가 그 귀신은 내가 알던 사람일 때 더 두렵다. 아빠와 단 둘이 사는 사춘기 여고생이 집에 왔더니 처음 보는 여자'가 자신이 엄마라며 천연덕스럽게 연기하는 것보다 더 무서운 상황은 담임 여선생이 자신을 엄마'라고 주장할 때이다. 그렇지 않은가 ?
영화 < 번지 점프를 하다 > 는 " 언캐니 " 에 대한 이야기이다. 주인공인 이병헌'은 어느 날 자신이 쓰고 있는 우산 속으로 들어온 이은주와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멜로라는 장르는 어긋남'이 기본'이다. 이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이은주는 이병헌을 만나러 가는 길에 교통 사고'로 죽는다. 그 아픈 트라우마'가 서서히 잊혀질 때인 십 몇 년 후, 교사'가 된 이병헌은 제자에게서 익숙한 클리쉐와 오브제'를 목격하게 된다. 그것도 남자 제자에게서 말이다. 십 몇 년 전에 그녀가 좋아했던 쇼스타코비치 왈츠는 제자의 핸드폰 벨 소리로 환기 되고, 숟가락과 젓가락에 대한 농담은 제자의 질문과 겹쳐진다. 그리고 그녀가 아끼던 라이터는 제자가 가지고 있다. 최민식이 교사 역을 연기했다면 " 너, 누구야 ? " 대신 " 누구냐, 넌 ?! " 이라고, 보다 마초적으로 말했을 것이 분명하다.
이병헌은 혼란에 빠진다. 이 지점에서 잘난 척 한 번 하고 넘어가자 ! 제자'의 에티튜드'는 죽은 애인의 에티튜드와 겹친다. 그러니깐 제자의 에티튜드는 자꾸 익숙한 것에 대한 데자뷰'를 만들어낸다. 낯익은 것이다. 어쩌자고 저 새끼는 내 죽은 애인을 모방하는 것일까 ? 더군다나 불알 달린 수컷이 아니었던가 ! 결국 제자가 재현해내는 낯익은 행위는 이병헌에게는 매우 낯선 행위'가 된다. canny에서 uncanny를 목격하는 것 ! 그것이 바로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서사 구조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 이러한 내용은 SF 소설인 < 솔라리스/ 램 > 에서도 다룬다. 끝내주는 소설이다 ! ) 이 영화는 죽은 여자가 남자 제자로 환생한다는, " 아, 어쩌란 말이냐 ! " 류의 엇나간 퀴어 멜로의 형태를 취했지만, 사실은 언캐니'에 대한 이야기'다.
첫눈에 빠진 사랑은 본질적으로 위험한 허구'다. 당신이 첫눈에 누군가와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착각일 뿐이다. 처음 본 남자에게 끌리는 것이 아니라 익숙한 얼굴이지만 그 사실을 모를 뿐이다. 인간은 자신의 얼굴을 닮은 사람을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것은 이미 실험을 통해 증명되었다. 실험 내용은 이렇다 1 ) : 실험 참가자에게 다양한 이성 사진'을 보여준 후 가장 매력적인 사진 한 장'을 뽑으라고 한다. 여기엔 함정이 하나 있다. 10장의 사진 중 한 장은 실험 대상자인 얼굴을 포토샵으로 약간 수정해서 성별'만 바꾸어 놓는다. 물론 실험 대상자'는 이 얼굴이 자신의 얼굴이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이 실험 결과에서 그들은 가장 매력적인 이성 사진으로 누구를 선택했을까 ? 놀라지 마시라. 거의 대부분은 자기 얼굴을 수정한 얼굴을 뽑았다. " 음... 그러니깐, 음... 그게.. 딱히 예쁘지는 않은데... 음, 그게.. 에헴.. 흠흠. 그냥... 편안한 얼굴이어서 좋아요 ! " 그렇다, 그들은 도발적이며, 섹시하고, 치명적으로 아름다운 얼굴을 뽑는 것이 아니라 어디서 많이 보았는데 잘 생각은 안나는, 그냥 평범한 이성의 얼굴을 선택한다. 자기 얼굴이라는 것을 모르고 말이다. 이처럼 첫눈에 호감을 가지는 이성'은 뭔가 언캐니'적인 존재다. 어디서 본 익숙한 얼굴이지만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심장이 뛴다. 그런데 우리는 어쩌면 이 심장이 뛴다는 사실을 착각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기괴하고, 두렵기 때문에 심장이 뛰는 것인데, 우리는 이것을 사랑 때문에 뛰는 심장이라고 착각하는 것은 아닐까 ?
실제로도 이런 실험이 진행된 적이 있다. 실험 내용은 이렇다 2 ) : 두 개의 실험군을 준비한다. A 상황은 는 남녀가 처음 만나는 미팅 장소'로 카페를 선정하고, B는 구름다리 같은 위험한 장소를 미팅 장소'로 선정해서 두 집단 간에 퍼지는 이성 호감도'를 조사하는 것이다. 결과는 위험한 미팅 미션을 수행한 B에서 서로 호감도가 높았다. 그 이유는 심장과 뇌'가 서로 따로 놀기 때문에 그렇다. 구름다리 위에서 만난 남과 여'는 두려움 때문에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인데, 뇌는 이 사실을 사랑 때문이라고 착각한다. 결국 B 집단에서의 이성에 대한 호기심'은 두려움 때문에 발생한 착각이다.
이처럼 사랑은 본질적으로 언캐니'이면서 동시에 자기애적 성향이 강하다. 영화 < 올드보이 > 에서 이우진/유지태와 누이인 이수아/윤진서'가 나른한 오후에 과학실에서 벌이는 근친상간' 장면은 기이할 정도'로 자기애'적이다. 영화 속 캐릭터 이수아'는 병적일 정도로 나르시즘에 빠져 있다. 그녀는 남동생과 근친상간'을 하면서도 거울로 자신의 황홀한 얼굴'을 바라본다. 결국 이 쾌락은 1인칭적 욕망이 만들어놓은 자위행위'이다. 스스 로에게 쾌락을 선사하는 수음'이다. 그녀 이름인 수아는 혹시 秀我'가 아닐까 ? 아름다울 수에, 자기 아 ! 이 이름을 곧이 곧대로 해석하면 자기애/ 나르시소스'가 된다. 나르시소스'가 자신의 아름다운 얼굴에 반해서 우물에 빠져 죽는 것처럼, 이수아는 다리 아래 물 속에 빠져 죽는다. 심지어 죽는 그 순간에도 수아는 동생 목에 걸려 있는 카메라로 아름다운 자기 얼굴을 찍고는 강에 빠져 죽는다.
영화 제목 < 번지 점프를 하다 > 는 꽤 의미심장'하다. < 번지점프 > 는 두려움을 의미하고, < ~ 하다 > 는 그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사랑을 의미한다. 서로 상이하게 다른 영역이다. 하지만 사랑'이라는 감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두려움과 사랑은 동의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을 위해서라면 바닥으로 뛰어내릴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 " 108번 올빼미 뛰어내릴 수 있습니까 ? " 라고 군대 훈련소 조교가 외칠 때 당신은 당당하게 외쳐야 한다. " 108번 올빼미 하 ! 강 ! 준 ! 비 ! 끗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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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uncanny'를 조금 새로운 방식'으로 이해한다. un 과 canny' 사이에 빗금 ( / ) 을 치는 것이다. " un / canny " 이다. 여기서 un은 old이고, canny는 new이다. old는 썩은, 낡은, 끈적끈적한, 죽은, 과거'의 어느 시점'을 의미하고, new'는 싱싱한, 새로운, 살아 있는, 현재의 어느 시점'을 의미한다. 이 둘이 충돌할 때 언캐니'가 발생한다. 여기서 canny'는 candy' 다.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운다고 고백하는 씩씩한 젊은 청춘 말이다. 번지 점프'라는 영화 속에서 제자가 등장하는 도입부는 온통 젊은 제자의 육체가 얼마나 candy한가에 할애한다. 제자는 키도 크고, 농구도 잘하며, 여자에게 인기도 좋은 수컷이다. 여기에 우윳빛 하얀 속살은 게이'의 마음을 설레이게 할 만한 싱싱한 육체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 싱싱한 육체는 언캐니의 주체가 된다. 이 제자가 언캐니의 주체가 될 수 있었던 원인'은 제자의 육체/canny'에 죽은 여자/un과 붙어 있기 때문에 그렇다. 이 둘이 붙으면 언캐니'가 된다. 마르크스가 자본론 서문에서 " 산 자 / new는 죽은 자 / old '때문에 고통받는다 ! " 라고 지적한 것은 바로 언캐니'에 대한 언급이 아니었을까 ?
■ 이러한 공식'은 영화 < 올드 보이 > 에서도 적용된다. 간단하다. 빗금을 치면 된다. < old / boy > 다. 여기서 old = un이고, boy = canny'이다. 영화 < 올드 보이 > 에서의 기괴한 비극은 바로 두명의 boys (최민식, 유지태) 에 old'가 붙기 때문에 그렇다. 그들은 모두 과거의 어느 시점에 죽은 누이/여자'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현재는 과거의 악령에 사로잡힌 것이다. 이처럼 과거와 현실이 분리되지 못하고 붙어서 령'이 될 때 기괴해지는 것이다.
■ 소포클레스의 < 오이디푸스왕 > 도 빗금'으로 해결할 수 있다. < 오이디푸스 / 왕 > 이다. 오이디푸스 서사'는 얼핏 보기엔 과거의 령 때문에 비극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행동 때문에 발생한 비극'으로 보인다. 왜나하면 오이디푸스는 왕(라이오스 ) 를 살해함으로써 언캐니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이 살해'는 현재'가 아니라 오랜 과거'에 벌어진 일이다. 왜냐하면 아들이 아버지를 죽일 것이란 신의 신탁'은 오이디푸스'가 태어날 때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섹스를 할 것이라는 신의 주장은 이미 말하는 그 순간에 이루어진다. 신탁이란 강력한 것이다. 신은 미래의 어느 시점에 일어날 사건'을 폭로한 것이 아니라, 신은 말하는 순간 미래가 정해지는 것이다. 결국 신이 오이디푸스를 언급했기에 먼 미래와 오이디푸스가 아버지를 죽이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제목 < 오이디푸스 / 왕 > 에서 < / 왕 > 은 현재의 오이디푸스'를 의미한다. 왕'이라는 칭호는 결국 아버지를 죽였기 때문에 얻은 피의 왕관이지 않은가 ! 왕'이란 칭호는 현재 진행형이므로 살아 있는 육체다. 반면 오이디푸스'는 un'이다. 오이디푸스는 왕이 되기 이전인, 과거의 어린 오이디푸스'를 의미한다. 오이디푸스는 퉁퉁 부은 발'이라는 뜻인데, 그가 버려졌을 때 발이 퉁퉁 부은 채로 발견되었기에 지어진 이름이다. 여기서 우리가 착각하고 있는 것 한 가지 ! 오이디푸스'라는 이름은 부모인 이오카스테와 라이오스'가 지은 이름이 아니다. 그는 이름 없는 자'이다. 더군다나 부모로부터 사형 선고를 받지 않았나 ? 살아 있지만 죽은 것과 다름 없다. NOTHING이다. 오이디푸스'라는 이름은 이미 죽은 자'를 내포한다. 오디디푸스는 un이며 old이고, 왕은 canny이면서 boy'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