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해당한 책'과 읽은 여자'는 반드시 흔적을 남긴다.
작년까지만 해도 근근이 살림을 이어가던 동네 헌책방'이 문을 닫았다. 칠순을 훌쩍 넘긴 주인은 평소에도 자주 가게'를 닫아두는 편이어서 그려려니 했는데, 올해부터 닫힌 문은 열리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단골이어서 몇 시간 동안 뒤적이다가 달랑 책 한 권 사고 나와도 눈치'를 주는 일 없었다. 오히려 8월 한여름에도 뜨거운 커피'를 무작정 주시는 통에 땀을 뻘뻘 흘렸던, 기분 좋은 추억만 남은 곳이다. 아쉽다, 정말 아쉽다.
헌책방은 절판된 책들이 모여 있는 < 만남의 광장 > 이었다. 엘리어티 카네티의 눈부신 걸작인 < 구제된 혀 > 를 발견한 곳도 헌책방'에서 였고, 하서세계문학전집' 시리즈 가운데 하나인 < 재코올의 날 > 도 이곳에서 발견한 책이었다. " 재코올 " 이라는 외래어 표기법이 말해주듯이 1970년대 출간된, 세로쓰기 방식의 책'이다. 이 책은 내가 간직한 보물 1호 ! 하드커버에 사철방식으로 만들어졌는데 무척 견고하다. 한마디로 < 책' > 답다. 겉모습만 화려한 요즘 책이 그냥 커피라면,
이 오래된 낡은 책은 티오피'다. 본새를 중요시하는 나에게는 오가피'다. 황변 현상으로 인한 옅은 갈색 종이'는 오히려 눈의 피로를 막는다. 그에 비해 요즘 책은 중성지를 사용해서 지나치게 밝다. 더군다나 빛에 반사가 되어 번들거려 눈이 나쁜 사람은 시력 잃기 딱이다. ( 70년대에는 산성지를 사용했다고 한다. 산성지는 빛에 노출이 되면 황변 현상이 중성지에 비해 높게 발생한다고 한다. 하지만 그리 염려할 것은 못된다. 산성지로 만들어진 책은 수명이 500년이란다. 굳이 밝기를 위해서 비싼 중성지를 사용할 필요가 있을까 ? )
그뿐인가 ! 사철방식이 아닌 제본으로 만들어진 책은 읽다 보면 가뭄에 땅이 갈라지듯 가운데가 쩍 하고 갈라져서 마음 놓고 펼치지도 못한다. 그 악명 높은 출판사 동문선의 책 상태'는 역대 최강이다. 아, 모세의 기적은 이런 데에서 이루어지라고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일단, 이번 글은 책 상태'에 대한 갑론을박이 아니니 다음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우선 여기서 접기로 한다.
헌책'을 구입하게 되면 종종 책 속지(?)에 적힌 메모를 보게 된다. 책 주인이 읽기 전에 혹은 읽은 후의 감상을 짧게 적은 문장들이다. 현대적 감각으로 말하자면 < 100자평 > 이다. 그런가 하면 책을 상대방에게 선물하면서 남긴 메모도 보인다. 이 글들을 읽다 보면 의외'로 재미있다. 그래서 준비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낡은 책 가운데, 메모가 적힌 내용들이다.
1.
*** 선생님께. 10년 만에 책이 나왔습니다. 게으른 본인 탓입니다. *** 드림.
- *****, ** 출판사
이 책'에 적힌 메모를 읽고 나서 10분 동안 웃었다. 책은 판매용이 아닌 증정본이다. 이 평론집을 쓴 A 교수가 B 교수에게 증정한 책'이다. 책을 증정할 정도'라면 얕은 관계는 아닐 터인데, B 교수는 이 책을 버린 모양이다. 두 분 다 문학평론가인데, 둘 다 인지도가 높다. 한국 문단, 삭막하구나 ! 10분 동안 웃었다.
2.
우리는 그것의 의미를 파악할 수 없다. 우리가 그것을 분석하는 것은 가히 신을 믿는 것처럼 맹목적이다. 그것은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작동하는 것이다. 그것은 거기에 존재하며 언제나 작동하고 있지만 그것은 표상하지 않으며 다만 기능하고 있을 뿐이다. it
- 앙띠오이디푸스, 민음사
3.
이 책을 보며 방긋 웃고 있을 너를 상상하며
- 반 고흐, 열화당
4.
to. ** 나에게 사랑에 대한 다른 시각을 심어준 책. 용기를 준 책. 이 책이 지금 너에게 큰 힘과 용기를 줄거라 믿는다. 항상 밝은 모습. 긍정적 사고 잃지 말자. 사랑해. p.s 늘 항상 똑같이 !! 2010.4. ** 이가.
- 죽* **을 ** *** , 예담 출판사
살해당한 시체와 읽은 책은 공통점이 하나 있다. 둘 다 어떤 식으로든 증거를 남긴다는 점이다. 밑줄을 긋거나, 페이지를 접거나, 갈피 사이에 눌린 서표의 흔적이 있거나, 잘 말린 네 잎 클로버가 있거나 하는 식이다. 읽은 책은 반드시 흔적을 남긴다. 하지만 이 책은 읽은 흔적이 전혀 없었다. 특이하게도 이 책은 부록으로 음악 시디'가 첨부되었는데 헌책에 딸려온 cd는 개봉한 흔적'도 없었다. 그러니깐..... 여자는 남자가 선물한 책을 읽지 않고 팔아버린 것이다. 여자는 남자를 사랑하지 않는 모양이다. 그 남자는 알고 있을까 ? 여자가 아닌 수염 난 남자가 당신이 쓴 메모를 읽고 있었다는 사실을...
5.
안녕 ! 반갑다.
아마 이 글을 읽을 즈음이면 너는 헌책방에 있을 것이다. 예일여고 < 숨어 있기 좋은 책방 > 이겠구나. 내가 이 책을 그곳에 팔았거든. 네가 자주 다니던, 너의 집 근처 헌책방이잖아. 우리가 종종 가던 그 책방. 내 예상이 맞다면 너는 이 책을 발견하고는 기뻐할 거야. 왜냐하면 네가 그토록 찾던 그 책이었으니깐 ! ( 혹시 내가 찾던 사람이 아닌 분이 이 글을 읽고 있다면 이 책을 사지 말아주세요. 단 한 사람을 위해 쓰여진 러브레터이니깐 말이죠. ) 나... 누군지 알겠니 ? 애린이야. 한애린 ! 이제 기억나지 ? 그동안 난 몸이 아팠어.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다가 결국 졸업은 하지 못하게 되었어. 병원에서 6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았거든. 문득 네 생각이 나더구나. 나... 널 좋아했거든. 죽기 전에 널 찾고 싶었지만 이젠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추한 몰골로 널 만날 수도 없었을 뿐더러, 너의 소식을 접할 수도 없었어. 넌 감쪽같이 지상에서 사라졌더구나. 혹시 네가 그토록 가고 싶다던 페루로 떠난 것일까 ? 오랜 고민 끝에 이렇게 너에게 러브레터를 보낸다. 네가 좋아하는 책의 빈 속지에 말이다. 넌 내게 말했지. 이 세상 모든 편지지는 접어야 한다고. 접고 접어야 편지봉투 속에 들어간다고 말이지. 하지만 난 접지 않고도 너에게 띄울 수 있어. 지금처럼 ! 이 글을 발견했을 즈음이면 난 멀리 떠났을 거야. 헌책방이란 헌책방은 모두 뒤졌어. 전국을 돌아다녔지. 어렵게 얻은 책이다. 내가 너에게 주는 지상에서의 마지막 선물이다.
안녕, 나의 날개접은새 !
2002.4.01 애린
- 구제된 혀, 심설당
속초로 떠나기 전 책장 2개 분량의 책을 헌책방에 판 적'이 있다. 간직할 책과 팔 책을 분류했던 것이 아니라 그냥 모서리 책장에 있는 책'을 모조리 팔았다. 여비가 없어서 판 것은 아니었다. 와,신,상,담. 바늘 침대에서 잠을 자고, 쓸개를 먹는 심정으로 새롭게 시작하자는 의미에서였다. 책이 없는 텅 빈 책장은 일일이 못을 빼서 분리한 후 겨울에 장작으로 쓸 요량으로 창고에 쌓아두었다. 책장이 있던 자리엔 네 개의 꼭지점이 방바닥에 흔적을 남겼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표가 나는 법.
그날 밤 그 돈으로 술을 마셨다. 내가 지금 마시는 술은 내가 판 책이구나. 묘한 죄책감이 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내 아내가 몸을 팔아서 벌어온 화대'로 술을 마시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술에 취해서 책장 속에 꽂힌 책들을 보다가 엘리어트 카네티의 < 군중과 권력 > 에서 시선이 멈췄다. 아, 그래.... 엘리엇 카네티 ! 나는 빠르게 그의 저서 < 구제된 혀 > 를 찾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보아도 찾을 수가 없었다. 내가 무심코 팔아버린 책 속에 이 책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서점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책이라면 아쉽지 않은데 이 책은 1982년 심설당에서 나온 이후로 출판이 안 된 것으로 알고 있다. 구하기도 힘들 뿐더라 내게는 매우 뜻 깉은 사연이 있는 책이었다. 그런데 그만 이 책을 팔아버린 것이다. 책을 판 지 며칠이 지난 후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더니 다행히 책 분류 중이어서 보관 중이라는 메시지를 받았다. 그 책은 다시 내게로 돌아왔다. 내가 이 책을 구입하게 된 것은... 그러니깐, 5년 전 일이다.
*
예일여고 헌책방에서 < 구제된 혀 > 를 발견했을 때, 나는 너무 기뻐서 소리를 질렀다. 이 책을 여기서 발견할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낡아서 누렇게 변해버린 종이를 넘길 때마다 종이가 바스러질까봐서 조심스레 책장을 넘겼다. 마치 비본을 보는 것처럼. 이 책을 헌책방에 내다 판 사람은 누굴까 ? 다행히 책 뒷장에 박힌 빈 속지'엔 책 주인이 쓴 메모'가 적혀 있었다. 내가 이 메모 편지를 읽었을 때는 이미...... 6년이 지난 후였다. 그러니깐 2007년이었다. 나는 흐르는 눈물을 닦고 책방 주인에게 책을 내밀었다. 주인이 나를 바라보았다. " 댁이 ***이요 ? " " 네에, 제가 곰곰생각하는발'입니다 ! 혹시 이 책을 판 사람 기억하세요 ? "
" 그럼... 기억하고 말고 ! 그 아가씨는 이 책은 주인이 따로 있다며 내게 당부를 했다오. 그리고 책 값도 이미 지불했어요. 잠시만... 그 아가씨가 두고 간 사진이 있었는데... 아, 여기 있구려 ! 사진을 주며 꼭 이 사람에게 이 책을 주라고 하더군. 언젠가는 올 거라고 하면서 말이지. 내가 그때의 일을 또렷이 기억하는 이유는 아가씨가 슬피 울어서 생각이 나오.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하지만 인연이 아니라고, 자신은 곧 먼 곳으로 떠난다고... 이 책은 이미 값을 지불했으니 그냥 가지고 가시구랴. 아픈 사랑 너무 오래 두지는 마시구랴. 사실 이 책 한 권 때문에 그동안 책방을 접지 못했다오. 무슨 사연이 있길래 그토록 슬피 우는가 호기심이 생겨서 이 책을 읽다가 그 아가씨가 쓴 메모를 읽었다오. 읽지 말았어야 했어...... 손님을 애타게 기다린 건 그 아가씨뿐만이 아니라오. 이 늙은이도 당신'을 기다렸소. 이젠 가게 문을 닫아야 할 것 같아. 요즘 어디 누가 헌책을 보나. 어디 가서 술이나 한 잔 합시다. 이제 손님 얼굴이 기억 나는구려. 아니, 그동안 왜 그렇게 발길이 뜸했소? "
*
그녀를 처음 만난 곳은 대입 재수 학원에서였다. 한 여자가 필기를 하지 못했다며 교재를 빌려달라고 했다. 바로 그 여자였다. 창백한 여자였다. 여자와 나는 문학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이 있어서 쉽게 친한 사이가 될 수 있었다. 우리는 종종 문학에 대하여 이야기하고는 했다. 엘리엇 카네티에 대한 이야기와 카프카와 그르니에'에 대해서 이야기했던 기억이 난다.
그녀는 우스갯소리'로 나중에 둘이 동업을 해서 헌책방을 열자고 했다. " 내 책과 네 책을 모으면 꽤 근사한 헌책방이 되지 않을까 ? " 그녀는 맑게 웃으며 말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말은 제안이 아니라 프로포즈'였다. 그땐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인연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할 말과 못할 말을 남겨둔 채 우리는 그렇게 잊혀졌다. 그런 그녀를 헌책방에서 다시 만난 것이다. 그녀가 하고 싶었던 말이면서 동시에 못할 말이었던 사랑 고백을 이제서야 듣게 된 것이다. 책이면서 동시에 연서인, 고백이면서 동시에 유서가 되어버린 책을. 나는 아직도 이 책을 간직하고 있다. 언젠가 내가 헌책방을 열면 가게 이름을 < 애린 책방 > 으로 하겠어. 잘 자라, 캄캄한 밤 하늘을 보면 종종 네 생각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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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 5'는 뻥이다. 에피소드 1에서 4까지는 뻥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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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aladin.co.kr/749915104/6272664 : < 모두 다 예쁜 말들 >과 < 만우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