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딘스키 / 흰색 위에서
'흰색 위에서'에 대한 연구 /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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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딘스키의 < 흰색 위에 > 라는 작품이 있다. 당신이나 나나 이 그림이 벽에 거꾸로 걸려있다고 해도 알아채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 채 고개를 심하게 끄덕이며 감동한 듯 응시하는 척을 할 것이다. 하지만 누굴 탓하랴. 심지어 미술관 큐레이터'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림이 거꾸로 걸렸다는 사실을 모를 수도 있다. 뭐... 이런 추상화가 다 있나 ! 궁금한 나는 칸딘스키 예술론이라 할 수 있는 < 점,선,면 >을 읽었다. 읽었다 ! ( 읽었다기보다는 훑었다는 표현이 정확하다. ) 하지만 알 턱이 없다. 직선 하나 그어놓고 " 억제된 분위기는 최고도에 달하게 된다. " 라고 하니, 내게는 선문답 같은 것이다. 그렇다고 이 책이 가지는 가치'를 폄하하자는 것이 아니다. 내 그릇이 작을 뿐이다. 분명한 것 하나는 직선과 곡선이 서로 충돌하면서 이미지'를 생산한다는 점이다. 내가 보기엔 이 그림은 오선지 대신 캔버스에 그려진 악보처럼 보인다. 칸딘스키 그림은 시각적이기에 앞서 청각적이다. 공감각적이다.
칸딘스키의 < 점, 선, 면 > 보다는 < 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 > 가 접근이 용이하다. 이 책에서 칸딘스키'는 회화적인 요소를 음향적인 요소와 결합한다. 그가 이 회화론'에서 관심을 보인 것은 음악(음향)이었다. 바그너를 비롯하여 드뷔시,무소르그스키, 쉔베르크'에 대한 관심은 칸딘스키가 자신의 그림을 음악적인 것으로 이해했다는 단서를 제공한다. 이 책에서 흥미로운 점은 칸딘스키가 바라보는 노란색에 대한 감상이다. 옮겨본다.
노란색을 인간의 정신상태와 비교해 보면 그것은 광기를 색채로 표현한 거 같은 인상을 주지만, 우울증이라든가 심기증을 나타내는 것이 안라 발적적인 광포, 맹목적인 착란증, 광조 싱태를 나타내는 것이다... 힘을 완전히 소모할 때까지 무계획, 무제한으로 힘을 낭비한다.
- 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 p 78. 열화당
호앙 미로의 < 블루 연작 Ⅱ > 도 점과 선이 충돌할 때 발생하는 음향을 제공한다. 이 긴장'은 대립'으로 인하여 생긴 불안이다. 유채색'과 무채식'의 경계, 블루와 레드'의 경계, 우주와 존재의 경계. 가로와 세로의 경계. 그리고 점.선.면'들의 경계. 이 그림에서 검은 점'은 존재'이다. 삼백오십 센티미터'가 넘는 작품의 크기'가 더욱 더 존재'를 쓸쓸하게 만든다. 자박자박 눈 위'를 걷는 검은 발자국'처럼 존재'는 흔적을 남기고 소리'를 남긴다. 우주의 중심/블루'에 가 닿으려는 욕망'이 보인다. 검은 점'과 붉은 선'과 파란 면'이 대립 중'이다. 점.선.면'이 충돌한다.
" 노무현 정권이 황우석을 4번 타자로 내세웠다면, 김대중 정권이 야심차게 준비한 비장의 무기'는 심형래'였다. 그는 신지식인 1호였다. 이 작위 수여는 공룡 쮸쮸, 티라노의 발톱 그리고 용가리'에 대한 김대중'식 SF 오마쥬'였다. 그러니깐 김대중 정권'은 대형 고무 피규어 안'으로 사람이 들어가 공룡을 조종하는 특수효과'에서 희망을 본 것이었다. 이후 황우석이 자랑하는 코리안 젓가락 넘버원 기술'이 대국민 사기극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사기꾼 황우석은 몰락했지만 심형래'는 당당히 디워'로 성공했다. 태극기와 아리랑'을 BGM으로 깔면서 말이다.어찌 되었든, < 디워 > 는 성공했다. 100분 토론에서도 디워 논쟁'이 벌어진 것을 보면 심형래'는 성공한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우려할 만하다. 왜냐하면 심형래'는 오로지 피규어를 실물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이 목표였지, 영화'를 영화답게 만드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노래 연습'보다 안무'에 목숨을 거는 십떼 소년 소녀 율동단'과 닮았다. "
- < 당신, 내 쮸쮸바나 빨아랏 ! > 소율, 형설시공사 中
디워를 보면 칸딘스키'가 보인다.
< 디워 > 를 보지 않았다. 보지 않았다고 하는 편이 옳다. 왜냐하면 내가 두 눈 부릅뜨고 본 시간은 20분이 채 안되었기 때문이다. 정말 정신차리고 제대로 본 장면은 유감스럽게도 엔딩 크레딧'이 전부였다. 눈을 떴을 때....... 아, 아아아아 ! 아리랑이 흘렀다. 하지만 억울한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는 " 가짜 피규어 영화 오덕 " 이었다 !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내 취향은 봉준호 감독이 만든 똑똑한 괴물'보다는 심형래가 만든 멍청한 피규어 괴물'에 가까웠다. 얼마 전에 유선 티븨'에서 < 디워 > 를 방영하길래 다시 보았다. 아, 아아아아 재미있다. 읭 ?!
심형래'는 인생 자체가 피규어였다. 스스로 팽귄 피규어와 똥파리 피규어 옷을 입고 연기를 했고, 그 덕에 가장 웃긴 코리안 코미디언'이 되었으니 그가 피규어 영화에 집착한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하지만 인간이 어설프게 짐승 흉내를 내는 것에 대한 자괴감 때문이었을까 ? 그는 가짜지만 진짜처럼 보이는 잘빠진 피규어'를 열망했던 것 같다. 생물을 원했던 것 같다. 같은 생선이어도 생물이 비싼 법이 아닌가. < 디워 > 는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조롱이 아니다. 촌스럽게 아리랑을 깔지만 않았다면 기립 박수를 보냈으리라.
영화 속 이무기는 움직일 때 지그재그 곡선으로 주행한다. 뱀이란 놈은 다리가 없기에 직선'은 불가능하다. ( 다리가 있었다면 직선을 선택했을 것이다. ) 그래서 선택한 달음박질이 곡선이다. 그러니깐 이무기는 직선을 버리고 곡선을 선택한 것이다. 원숭이가 꼬리를 버리고 인간이 된 것처럼 말이다. < 직선을 버리고 곡선을 선택한 좌표 > 는 그만큼 속도의 유실'을 감내해야 한다. 영화 < 디워 > 를 통해 내가 내린 결론은 < 곡선은 직선보다 느리다 > 라는 점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영화는 의외'로 재미있게 전개되었다. " 영화 < 디워 > 는 직선 때문에 사라질 운명에 처한 곡선이 환생하여 직선에게 복수를 하는 드라마야. 암, 그렇고 말고 ! " < 디워 > 영화 포스터를 보라 ! 옛것을 대표하는 이무기는 새것을 대표하는, 직선들의 총합으로 이루어진, 현대 초고층 건물'을 목 졸라 죽이는 이미지가 아닌가 ?
■ 뱀이 많은 지역에서는 전봇대가 원형이 아니라 직사각형으로 만든다고 한다. 둥근 전봇대는 뱀이 기어올라가기 때문이라고. 또 하나, 아일랜드에는 뱀이 없단다. 포사이스 단편 제목 가운데 하나가 < 아일랜드에는 뱀이 없다 > 이다. 이 단편, 걸작이다.
영화는 철저하게 직선과 곡선을 구별한다. 과거를 보여줄 때는 직선이 아닌 곡선 이미지'를 주로 사용한다. 건물들은 모두 둥근 능선'을 닮았다. 건물뿐만이 아니다. 둥근 물레방아, 우물, 굽이굽이 굽은 골목 등도 새심하게 배치한다. 의도적인 설정이다. 영화적 공간은 현재'를 직선으로 스케치하고 과거'는 곡선으로 배치했다. 곡선은 직선'보다 올드하고 느리다. 그리고 감성에 호소한다. 반면 직선은 차가운 이성에 호소한다. ( 심형래 감독은 장르적 특성을 고려하여 이무기를 곡선이 가지고 있는 치명적인 약점인 느린 속도'를 버리고 미사일 탄도 스피드로 재무장하여 직선으로 이루어진 도시를 파괴한다. ) 곡선은 직선을 응징하기 위해 귀환한 것이다. 결국 곡선과 직선은 전통과 현대의 충돌로 확대재생산된다.
생각해 보면, 현대 도시 문명은 곡선을 파괴한 직선의 군림이었다. 도시생태학적 관점으로 보자면 서울은 직선으로 만들어진 볼품없는 도시'다. 오세훈은 디자인 서울'이라며 혼자 열광했지만 생태학과 미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빵점에 가깝다. 오세훈이 한 것'이라고는 오리배도 아니면서 한강에 둥둥 떠다니는 가짜 섬을 만들거나 구불구불하던 종로 피맛골 골목'을 직선으로 펴는 것이 전부였다. 오세훈에게 명예훼손죄'로 씹힐까봐 " 오세훈이 한 것 " 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지만 사실은 " 오세훈이 한 짓 " 이라는 표현이 더 적확할 것이다. 직선은 스피드'다. 대한민국은 속도에 목숨을 건다. 이처럼 대한민국 도시 미학은 직선 미학'이다. 직선이 아닌 것은 가차없이 제거된다.
서울이라는 도시는 이제 곡선이 주는 느림의 미학'을 볼 수가 없다. 뱀의 주행 방향 같은 골목은 사라졌다. 사라진 곳에 우뚝 솟은 것은 아파트'다. 아파트란 본질적으로 가로 직선과 세로 직선이 만나서 공간을 만들고 동선을 만든다. 대한민국이 아파트 공화국이 된 이유이다. 점 A'에서 점 B'로 그어진 직선은 곡선, 탈선, 샛길이 배제된 최단거리'이므로 군더더기'가 없다. 빠르다. 하지만 조심해야 한다. 치명적인 것은 모두 직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기형도의 시어를 빌리자면 날렵한 것은 혐오스럽다.
자연계에서 곡선은 직선이 가지는 날뛰는 속도'를 지연시키는 브레이크 역할을 담당한다. 산길이 직선이 아닌 곡선으로 이루어진 까닭은 추락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속도를 버리는 대신 안전'을 얻는다. 자연적으로 생성된 길은 모두 곡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같은 이유로 강 상류와 하류가 지그재그 식 곡선으로 이루어진 까닭도 흐름'을 지연시키기 위해서이다. 물살'을 지연시킴으로써 상류의 유실과 하류의 퇴적을 막기 위함이다. 곡선은 곧 생명이다.
오, 곡선은 위대한 것이다. 오, 이 정도면 이무기가 발광하는 것은 모더니티에 대한 복수가 아니었을까 ? 뭐, 이 정도면 진중권이 말한 것처럼 < 싸가지없는 영화 > 는 아닌 것 같다. 괴물은 인간을 파괴하기 위해서 출현하는 것이 아니라 휴머니티'를 복원하기 위해서 나타나는 존재이다. 우리는 도시에 나타나서 시가지를 아수라장으로 만드는 괴물과 인간이 싸우는 과정을 통해서 그동안 잃어버렸던 인간성을 성찰하게 된다. 괴물 영화가 최종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가족의 재발견이다. 괴물은 바로 인간적인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일그러진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한다. " 얼굴이 못생겨서 죄송합니다잉 ! " 읭 ?!
다시 한 번 반복하자. 우리가 재난 영화에서 < 괴물 > 을 끌어들이는 이유'는 괴물를 통해서 잃어버린 가족 휴머니티'를 복원시키기 위해서다. 인간을 위해서 괴물은 기꺼이 악당이 된다. 괴물은, 오... 시발, 아름답다 !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 당신은 누군가를 위해서 단 한번이라고 위악적 악당 흉내를 낸 적이 있었던가. 디워... 당신이 생각했던 것만큼 그렇게 후진 영화는 아니다잉. 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