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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과 진단 - 문학 삶 그리고 철학
질 들뢰즈 지음, 김현수 옮김 / 인간사랑 / 2000년 11월
평점 :
품절
들뢰즈'에게 빅엿을 !
그는 미스테리한 인물이었다. 한겨울이었는데도 가을 바바리에 검은 양복 바지가 전부였다. 말도 거의 없었다. 점심은 굶는 모양이었다. 비쩍 마른 몸에 퀭한 눈, 콧구멍 사이로 삐져나온 콧털 ! 유독 광대뼈가 튀어나온 그는 웃을 때마다 썩은 이'를 드러냈는데 웃음소리는 내지 않았다. 도통 속을 알 수 없는 남자였다. 그는 직원이 아니라 일이 바쁠 때 일손을 거들기 위해 긴급 투입된 나이 든 아르바이트생이었다. 며칠만 일하기로 했는데 일이 꼬여서 몇 개월을 그와 함께 하게 된 것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그의 허리띠 " 바클 " 이었다. 서울대 문양'이었다.
직원들 사이에서는 그가 서울대를 나온 운동권 학생으로 수배가 되어서 자신의 신분을 속인 채 도망 중이라는 설도 있었고, 출소하자마자 이곳에 왔다는 소문도 있었다. 가을에 잡혀서 다음해 겨울에 풀려나, 옷은 가을 옷 하나가 전부라는 그럴 듯한 추론도 덧붙여졌다. 내가 그 형'과 친하게 된 이유는 들뢰즈 때문이었다. 나는 점심시간에 점심을 먹고 들뢰즈의 < 앙띠 오이디푸스 > 을 읽고 있었는데 그가 오더니 무슨 책을 읽느냐고 물었다. 내가 그에게 책을 보여주었더니 그는 소리 없이 웃으며 들뢰즈에 대해 이것저것 물었다.
들뢰즈에 대한 상식이 없으면 묻지 못할 질문들이었다. 그날 이후로 그는 한 가지 소문이 더해졌다. 서울대 철학과'라는 소문이었다. 며칠 후 그가 내게 오더니 책을 몇 권 내밀었다. 들뢰즈의 책 3권이었다. < 소수집단의 문학을 위하여 > < 의미의 논리 > 그리고 그 문제의 < 비평과 진단 > 이었다. 빌려주는 것이냐고 물었더니 자신에게는 필요없는 책이라며 가지라고 했다. 들뢰즈 그룹 스터디 때 사용하던 책이라 낙서'가 많다는 귀뜸도 해주었다.
책 < 비평과 진단 > 은 마치 편집 교정자의 작업 같았다. 밑줄과 책 모서리를 접은 양이 무척 많았다. 그리고 잘못된 띄어쓰기를 표시하기 위해 v 자를 표시하고, 온갖 교정 부호들이 페이지마다 가득했다. 그뿐이 아니다. 엄청난 메모'가 페이지마다 가득했다. 소문은 도망 중인 서울대 철학과 운동권'에서 전직 출판사 교정 직원'으로 바뀌었다. 내가 보기엔 이 책은 그룹 스터디의 흔적이 아니라 교정자의 작업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 책을 끝까지 읽기는 읽었으나 짜증이 치밀어올랐다. 제 9장 < 어린이들이 하는 말 > 에서 번역가는 문장에 的을 남발했다. " 부모적인 형태 " , " 부모적 인물들의 단순 확대 " , " 지도 제작적 개념 " , " 인칭적... " , " 천상적 상황 " 등등... 이 짧문 시론에 과녁 적이 넘쳐났다. 태어나서 만파식적에 대해서는 들어봤으나 " 지도 제작적 개념 " 이라는 말은 처음 들었다. 도통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 이해 못하면 덮는 게 상책이다. 책을 덮고 났더니 묘한 컴플렉스가 생겼다. 하여튼 그는 그렇게 몇 개월을 함께 하다가 사라졌다. 그와 함께 이 책도 책장 어딘가에 박혀서 몇 년 동안 먼지만 쌓이고 있었다. 내가 다시 이 책을 꺼내서 읽게 된 계기는 < 필경사 바틀비 > 때문이었다. 읽다가 문득 들뢰즈'가 이 책에 대해 언급했다는 기억이 떠올라 찾아보니 그 옛날 < 비평과 진단 > 에 수록되어 있었다.
그때는 멋모르고 읽었을 때이니 다시 읽으면 이해가 가리라. 그런데 웬걸 ?! 여전히 무슨 소릴 하고 있는지 감이 오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이 책과 관련된 글을 찾다가 로쟈 님'의 페이퍼'를 보게 되었다. 아이구야, 그런 문제가 있었구나. 다음은 < 비평과 진단 > 에 수록된 " 바틀비 혹은 상투어 " 에 나오는 문장이다.
하지만 끊임없이 이사하게 처신하는 소송대리인의 비정상적 행동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어찌 그를 제대로 알 수 있을까 ? 소송대리인은 중요한 직업상의 승진을 한다. 사장 슈레버(Schreber ) 또한 승진하고 나서야만 정신착란을 면할 수 있음을 상기해 볼 수 있다.
- p 137
로쟈 님의 친절한 해석에 의하면 사장 슈레버'가 아니라 법원장 슈레버'라고 한다. 프로이트에 나오는 그 유명한 법원장 슈레버 말이다. 그런데 번역가는 법원장을 동네 사거리 사장님'이라고 번역을 했다. 솔직히 나는 이 문장을 읽었지만 그냥 동명이인이려니 했다. 법원장 슈레버'는 프로이트를 대충 알아도 알 수 있는 인물이니 번역가가 실수를 한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못했다. 맙소사 ! 들뢰즈의 서적을 번역할 정도이면 들뢰즈에 대한 기본적 상식은 갖추어져야 하는 것은 기본이다. 알뛰세르의 책을 번역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맑스에 대해 해박해야 하고, 라캉의 책을 번역하기 위해서는 먼저 프로이트에 대해 알아야 한다.
들뢰즈의 책 번역도 마찬가지다. 들뢰즈는 < 앙띠 오이디푸스 > 와 < 천 개의 고원 > 을 썼을 정도이니 프로이트는 기본이 아닐까 ? 프로이트는 1911년 < 편집증 환자 쉬레버 - 자서전적 기록에 의한 정신분석 > 이라는 중요한 글을 발표한다. 설령 번역가가 프로이트를 읽지 않았다고 해도 들뢰즈는 < 앙띠 오이디푸스 > 에서 " 기관 없는 신체 " 를 다루면서 그 사례로 법원장 슈레버'를 중요한 인물로 다루었을 뿐만 아니라 라캉도 법원장 슈레버에 주목했다. 이런 표현이 적절하지는 않겠지만 법원장 슈레버'는 편집증 환자의 슈퍼스타였다. 그런데 어떻게 법원장 슈레버'를 동네 아무개 회사 사장님이라고 소개를 할 수가 있는 것일까 ?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온다. 그것은 마치 프로이트의 딸 안나 프로이트'를 프로이트의 아내로 소개하는 꼴과 무엇이 다른가. 번역가가 들뢰즈에게 빅엿을 먹인 꼴이다.
지금 생각해 보니 이 책에 그어진 수많은 밑줄과 메모 그리고 교정 부호들은 인쇄가 잘못되어 발생한 오탈자'를 기록한 것이 아니라 이상한 번역으로 인해 뒤죽박죽이 되어버린 문장에 대한 재해석이었던 것은 아닐까 ? 저 위의 문장을 책에서 찾아보니 사장 슈레버'라는 문장 앞에 밑줄을 긋고는 물음표 ( ? ) 두 개가 신경질적으로 써져 있다. 그나저나 그 사람은 무엇을 하고 있을 지 궁금하다. 한겨울 가을 베이지색 바바리와 검은 양복 바지 하나'로 겨울을 버티던 그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 여전히 수배 중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