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영화 1 위대한 영화 1
로저 에버트 지음, 최보은.윤철희 옮김 / 을유문화사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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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로저 애버트.

 

 

 

로저 애버트의 부고를 듣고 나서 그가 쓴 < 위대한 영화 > 를 다시 읽었다. 세 번째 읽는 중이다. 나는 그가 어떤 영화에 대해 내린 가혹한 혹은 관대한 평가가 정당한 것이었는가, 라는 의문이 종종 들기는 하지만 그가 뛰어난 문장가'라는 데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저널리즘 비평이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는 커다란 성과를 이룩한 것처럼 보인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내가 로저 애버트가 쓴 < 위대한 영화 > 를 처음 읽고 났을 때는 실망이 컸다. 영화에 대한 생각의 차이'가 컸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와 내가 가진 어쩔 수 없는 틈이었다. 하지만 두 번째 읽고 나서 생각이 180도로 바뀌었다. 문장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어떤 영화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아우라'를 글로 정확하게 표현할 줄 아는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다. 가령 파스빈더의<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 에 대해 파스빈더는 감정의 고양된 상태와 침울한 상태를 영화에서 모두 제거하고,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조용한 절망만을 간직한다. “ 라고 담담하게 써내려갈 때 그의 영화를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이 문장에 감탄했을 것이다. 정말 그렇기 때문이다. < 조용한 절망 > 이라는 문장을 읽을 때, 나는 울컥했다. 좋은 문장은 결코 잰 체하지 않는다. 그의 문장 몇몇을 소개한다. 아마... 당신은 아래 문장을 읽고 피,똥,쌀, 것이다.

 


 

 

노스페라투 : 노스페라투는 암과 전쟁, 질병과 광기 등, 새벽 세 시에 잠에서 깨어난 우리의 걱정거리 모두를 다룬 영화다.

 

 

3는 늘 애매모호한 시간이다. 오후 세 시는 무엇을 하기에는 너무 늦거나 이른 시간이며, 새벽 세 시 또한 잠을 자거나 깨어나거나 하기에는 너무 늦거나 이르다. 이 시간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애버트는 근심을 새벽 세 시라고 묘사했는데, 근심이란 원래 생각만 많지 실천하지 않는 것들의 총합이다.

 

지난해 마리앵바드에서 :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이야기책은 아동용이다. 이야기가 이야기를 더 이상 얼버무릴 수 없을 때까지 끝없이 전개되고 반복되며, 다시 예전 이야기로 되돌아가기를 되풀이한다는 것을 어른들은 알고 있다.....( 중략 ) 영화 관람의 재미는 질문을 던지는 데 있다. 질문에 대한 대답을 미리 내놓는 것은 패배나 다름 없다.

좋은 영화는 결말을 보여주지 않는다. 결말은 관객이 선택해야 할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텍스트와 독자 사이에 오고가는 교감이다. 그런데 해피엔딩은 결말이 명확하다. 애버트는 그것을 어린이용 서사라고 말하며 패배라고 규정한다.

 

카사블랑카: 마지막 장면의 클로즈업에서 버그먼의 얼굴은 혼란스러운 감정을 표출한다. 혼란스러웠을 법도 하다. 촬영 마지막 날까지도 비행기에 오를 사람이 누구인지를 확실히 아는 사람이 영화 관계자 중에 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영화를 촬영하는 동안, 버그먼은 영화가 어떻게 끝날지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런 배경 사연은 그녀가 등장하는 장면에서 그녀가 보여주는 감정의 신뢰성을 높여주는 기묘한 결과를 낳았다. 그녀는 바람이 불고 있다는 것만 알았지, 어느 쪽으로 불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애버트가 훌륭한 문장가인 이유는 : 그녀는 바람이 불고 있다는 것만 알았지, 어느 쪽으로 불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라는 문장을 보면 알 수 있다. 정성일이라면 이 문장을 이렇게 묘사했을 것이다. “ 할리우드 시스템은 배우와 스텝 간의 계급적 차이를 조성한다. 그것은 결국 비디제시스와 디제시스 간의 운명적 간극의 문제이며, 불화를 조성하고, 소통은 단절되며, 잡음은 끊이지 않는다. 그러니깐 버그만이 공항에서 보여준 혼란스러운 연기는 매우 이상한 방식으로 결정된 것이다. 그녀의 연기는 디제시스에 어떤 주관성을, 내면화를, 착각을, 부정확성을, 무엇보다도 비현실성을 부여한다. “ 라고 쓰지 않았을까 ? 정성일이 쓴 골때리는 만연체는 참... 쓰다. 쓸개 같은 문장이다.

 

쉰들러리스트: (스필버그)는 자신이 말하고 싶은 바를 수백만의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는 방식으로 말할 줄 아는 사람이다.

쉰들러 리스트를 좋아하지 않지만, 애버트의 스필버그에 대한 간결한 정의는 좋아한다. 스필버그는 확실히 자신이 말하고 싶은 바를 수백만의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방식으로 말할 줄 아는 사람이 분명하다. 이 문장은 고스란히 로저 애버트에게로 돌아가야 한다. 로저 애버트는 자신이 말하고 싶은 바를 수백만의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방식으로 말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비록 그가 내린 평가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해도, 나는 그가 써내려간 문장을 읽으며 기꺼이 즐거워한다. 그것은 결코 쉬운 설득이 아니다. 로저 애버트가 가지고 있는 힘은 설득에서 나온다. 삼가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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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일 영화평론집 세트 - 전2권 -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 + 필사의 탐독
정성일 외 지음 / 바다출판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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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정성일 문체 비판 : " 모두 밥그릇 때문... 현실은 어쩔 수 없더군 ! "

 

 

 

 

 

 

정성일은 < 언젠가 세상은... > 에서 " 당신이 하지 말아야 할 것 중 하나는 영화에 별점을 매기는 것이다. " 라고 말했으나 아무래도 나는 당신이 쓴 딱딱한 책에 별 하나를 매겨야 할 것 같다. 이 자세에 대해 천박한 취향'이라고 비판하기에 앞서 별점 체크를 하지 않고서는 리뷰를 할 수 없는 알라딘 시스템'에 대한 지적이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  이 지적을 정성일 씨가 자주 사용하는 말 본새'로 흉내 내자면 다음과 같다. 

 

" 이런 식의 별점 체크, 그러니깐 신경쇠약 직전의 자본주의적 욕망 기계가 요구하는 뻔뻔한 자세에 대한 우리는, 영화제를 위해 아무 조건 없이 시간을 할애하는,  힘을 합쳐 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이 시대에 대한 우리들의 외침이며 근심입니다. 이제 개인을 향한 집단적 에티튜드'는 버리고 시스템에 대한 통열한 자기 반성으로 나아가, 이런 식으로는 얼마든지 가능한, 보이지 않는 벽을 허무는 행위가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는 믿음. 그리고 윤리적 결심. 그것은 영화를 사랑하는 자만의, 이상한 방식의 윤리적 태도를 넘어, 너머와 넘어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걸치는, 앎의 음란성을 배제하려는 롤랑바르트적 동의이며 프루동과 바쿠닌 혹은 조르주 소렐적 동맹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저는 믿숩니다. " ( 내가 쓰고도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다. )

 

이 문장을 이해하기란 꽤나 까다롭다. 아래 문장을 보자.

 

 

방금 보고 나온 영화에 대한 침묵. 우리는 영화를 그저 관념적으로 알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 말은 영화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과 같다. 그러니까 영화에 의지해서 칸트와 사드를, 라캉과 지첵을, 들뢰즈-가타리와 바타이유를, 프로이트와 소쉬르를, 벤야민과 아도르노를, 크리스테바와 이리가라이를, 니체와 레비나스를, 또는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리비도를 끌어들이건, 잉여가치를 발견하건, 부유하는 기표를 따라가건, 소문자 타자의 구멍을 채우건, 그건 아무래도 좋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하다고 해서 영화를 말하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영화에 의지해서 철학을, 정신분석학을, 혹은 다른 예술 장르의 비유를 사유하는 것이다. 이 말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것은 철학에 의지해서 영화를 사유하는 것이 아니다.

 

- 정성일, 필사의 탐독 128 p

 

이 놀랄만한 문장은 꽤나 화려하다. 철학 족보를 일목요연하게 압축시키는 정성일 식 <골때리는 만연체 > 는 발군의 실력을 뽐낸다. 문제는 제시된 철학자를 짝패로 병합하여 나열했는데 유감스럽게도 이 묶음에는 통일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그냥 자동기술 ( 自動記述 , écriture automatique ) 에 의한 무의미한 나열에 지나지 않는다. < 칸트와 사드 > 를 기술하니 문득 라캉이 말한 " 칸트와 함께 사드를 ! " 이라는 구호가 생각났을 것이고, 라캉 하니 지첵이 떠올라 라캉과 지첵을 짝패처럼 묶다가 갑자기 그 유명한 짝패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 의형제 생각이 났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조르쥬 바타이유, 지그문트 프로이트, 벤야민, 아도르노'가 생각났을 것이다. 이처럼 차별성 없는 짝패들의 병합이라면 차라리 칸트, 사드, 라캉, 지첵.... 이런 식으로 나열했음이 옳다. 그런데 그는 왜 문장에서 철학가들을 짝패로 묶어서 나열했을까 ? 굉장히 의미있는 분류처럼 말이다.

 

 

그가 힘주어 말하는 것은 결국 철학을 말하기 위해서 영화'를 끌어들이지 말라는 충고다. 철학이라는 주인공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영화를 엑스트라'로 쓰지 말라는 것. 이러한 태도를 비판할 생각은 전혀 없다. 하지만 그가 써온 글(들)은 한 페이지 걸러 한 장 꼴로 데리다를 거론하고, 들뢰즈와 지첵을 경유해서 에릭 홉스본을 이야기하는 식으로 끝난다는 점이다. 자신의 영화 평론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인용된 수많은 철학'은 용서할 수 있지만 철학을 말할 때 영화를 인용하면 안 된다는 불관용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 영화는 오로지 영화 내에서만 사유해야 한다는 고집 아닌 똥고집'은 그가 지금까지 선보인 글 본새와는 차이가 많다. 그는 왜 영화를 이야기하면서 " 칸트사드라캉지첵들뢰즈가타리바타이유프로이트소쉬르벤야민아도르노크리스테바이리가라이저리가라이니체레비나스 " 를 거들먹거리는 것일까 ? 다음은 그가 습관처럼 자주 사용하던 ( 영화를 사랑한다는 ) 친구와 우정에 대한 정의다.

 

 

박상륭의 < 열명길 > 을 읽고 감명했다는 독자를 만날 때 문학평론가들에게는괴로워질 것이다. 소설의 첫머리에서 존 레논을 듣고 인생이 바뀌었다는 문장을 볼 때 음악평을 쓰는 내친구는 괴로워진다는 말을 한다. 소설의 이곳저것에서 < 블레이드러너 > 를 논하고, 이유 없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장면이 인용되고, 내가 본 그 영화에 대해서는 이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지루한 영화론을 읽어야 할 때, 나는 그냥 소설을 덮어 버린다.... ( 중략 ) # 사람은 자기가 잘 알지 못하는 것을 쓰면 안 된다.

 

" 영문과 교수들께서 먼저 영화에 대해서 입을 열기 시작했다. 아마도 프레드릭 제임슨이 용기를 주었을 것이다. 제임스 조이스를 이야기하던 그 혀로 삼류 헐리우드 영화를 진지하게 이야기하기 시작했을 때 처음에는 그냥 농담인 줄 알았다. 소설가들이 영화의 기법을 소설에 도입하겠다고 나섰을 때 그냥 웃자고 하는 이야기라고 받아넘겼다. 시인들이 영화의 제목을 빌려 왔을때 그건 한 번 하고 말아야 할 유머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어야만 했다. "

 

- 도둑질하고, 도둑질당하고 ( 왜 한국 문학과 한국 영화는 서로 우정을 나눌 수 없는가 )

 

 

 

 

 

 

 

 

 

 

 

" ...... 그 혀로 삼류 헐리우드 영화를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 사람들이 < 도둑질 하고 도둑질당하고 > 을 읽으면 혀를 끌끌 찰 것이다. 김성곤 교수는 영미문학에 대해서나 말을 하지 왜 영화를 기웃거리다가 욕을 먹는 것일까, 고미숙 또한 수유 너머에서 고전 독해에만 집중했다면 < 그 혀' > 라는 조롱은 면했을 것이 아닌가. 정성일 씨가 하고 싶었던 말은 " 너나 잘하세요 ! " 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영화에 대한 글을 쓰지 말라는 짜증처럼 읽힌다. " 남의 업장 넘보지 마라이잉 ? " 결국은 밥그릇인가 ?  (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대한민국 평론가의 평론집보다는 고미숙의 < 이 영화를 보라 > 가 내용이 알차고 깊다. )

 

 

 

 

 

 

 

 

 

 

 

그런데 영화에 대한 훌륭한 저서들 가운데는 딴 살림 차린 사람이 의외로 많다. 정성일 씨가 존경하는 ( 영화학자도 아닌, 감히...... ) 철학자 들뢰즈'는 < 영화 1,2 > 를 쓰지 않았던가 ?  틈만 나면 히치콕에 대해 말하는 친근한 이웃집 아저씨 슬라보예 지첵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할 것이며, 사회학 교수인 더글라스 켈너의 < 카메라 폴라티카 > , 영문과 교수 수잔 재퍼드의 < 하드 바디 >, 사회학자 에드가 모랭의 < 스타 >에 대해서는 뭐라고 할 것인가. 그 혀가 그 혀인가 ?  

 

▦  자신의 책 제목인 < 언제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 > 는 들뢰즈의 문장에서 빌려온 것이다.

 

그는 사람들이 자기가 잘 알지 못하는 것을 쓰면 안 된다고 했는데, 사실 이 말은 틀린 말이다. < 폭풍의 언덕 > 은 불꽃 같은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 작가가 쓴 책이었다. 에밀리 브론테는 그 흔한 사랑 한 번 못하고 서른에 결핵으로 죽었다. 그리고 히치콕은 경찰이 무서워서 평생 운전면허증도 없었던 사내였다. 히치콕은 오히려 범죄의 세계를 잘 몰랐기 때문에 위대한 작품이 탄생한 것은 아닐까 ? 우리는 누구나 그 영화에 대해 말할 자격이 있다. 입장료를 내고 영화를 보았으며 티븨 수신료를 매달 내면서 < 주말의 명화 > 를 시청했다. 이 정도면 자격이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영화는 오로지 평론가의 몫인가 ? 웃으며 코 판다. 잇힝 ~

 

그가 가진 태도는 접어두고서라도 일단 쓸데없이 긴 나열, 불분명한 주어 설정, 그리고 미완성으로 끝나는 술어들의 나열은 읽기를 방해한다. 문장이 틀어지면 삭제하고 다시 써야 하는데 그는 삭제 대신에 완성되지 않은 문장을 그냥 쉼표로 남겨두고는 다시 다음 문장을 쓰기 시작한다. 결국은 완성되지 않은 문장들이 둥둥 떠다니다가 뜬금없이 마침표로 끝난다. 그것은 빵 봉지'를 뜯어 빵을 한 입만 베어물고는 식탁 위에 놓은 채 다시 다음 빵 봉지를 뜯어 한 입 베어무는 꼴과 다르지 않다. 먹다 만 빵들이 탁자 위에 널려 있다간 엄마한테 혼나요. 그는 개성적 문체라기보다는 차라리 세계 인명 사전식 보그**체'에 가깝다. 끝없이 물고 늘어지는 수많은 이름들의 인용의, 인용의, 인용의, 인용이다. 다음은 < 취화선 > 에 대한 부분이다.

 

 

우리는 소설을 읽고 난 다음 아무렇게나 말하지 못한다. 조이스나 프루스트 같은 미로를 헤치고 나온 다음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면서 그저 할 수 있는 일은 친구들의 이름이 적힌 수첩을 들추면서 우리의 하루를 돌아볼 뿐이다. 세잔의 그림을 보고 난 다음 그 감흥을 아무렇게나 말하지 못한다. 브루크너의 제 8교향곡 3악장 아다지오에 대해서 방금 듣고난 다음에도 다시 한 번 더 듣고 말하겠다고 대답을 미룬다. 베케트의 무대는 거의 등장인물이 없는데도 무언가 보지 못한 것이 거기 있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그런 영화는 보고 나오면, 그 영화가 난니 모레티건, 허우 샤오시엔이건, 제임스 캐머린이건, 데이비드 린치건, 임권택이건, 그게 누구의 영화건, 누구라도 영화관 문을 나서면서 방금 보고 나온 것에 대해서 금방 입을 연다.

 

- 필사의 탐독, 취화선

 

 

이런 문장을 읽을 때 종종 칼칼한 고추장에 밥을 비벼먹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인명 사전 식 나열'은 어김없이 이어진다. 그는 임권택을 말하기 위해서 조이스, 프루스트, 브루크너, 베케트, 난니 모레티, 허우 샤오시엔, 제임스 캐머런, 데이비드 린치'를 나열한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요 ? 문체보다 더욱 곤혹스러운 것은 인터뷰'다. 인터뷰어'는 기본적으로 인터뷰이'보다 낮은 자세'로 인터뷰'를 진행해야 한다. 이 겸손은 인터뷰어'가 가져야 할 기본적 자세'이다. 그런데 정성일은 항상 감독보다 많이 안다는 자세'로 영화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그것은 질문이 아니라 확인이다. 그는 내 해석이 맞는가 틀린가에 대한 확인에 열중한 나머지 종종 무례하기까지 하다. 정성일은 날카로운 질문과 무례한 질문(들)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 트뤼포가 쓴 < 히치콕과의 대화 > 에서 트뤼포가 빛났던 점은 인터뷰이에 대한 존경과 영화에 대한 정확한 이해 그리고 그 이해를 바탕으로 한 날카로운 질문이 더해져서 좋은 인터뷰를 뽑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정성일의 인터뷰는 언제나 살얼음을 걷듯 삐걱거린다.

 

그가 쓴 글을 읽다 보면 하얼핀 역에 도시락 폭탄을 던지기 직전에 작성한 혈서 같다. 비장하다. 그가 동료들에게서 배워야 할 점은 트뤼포의 겸손함이나 로빈 우드의 적확한 텍스트 그리고 로저 에버트'의 담백한 글들이다. 그리고 또 하나, 문법 연습과 대화의 기술이다. 조이스도 좋고 브루크너의제8교향곡3악장아다지오'도 좋은데 주어와 술어의 호응 관계에 대한 개념부터 가져야 할 것 같다.

 

 

 

 

정성일 : 앎의 음란성이라고 부르는 것에 너무 가까이 다가간 게 아닌가, 라는 느낌이 있어요.

박찬욱 :  ?? '앎의 음란성'이란 게 뭔지 잘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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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3-04-06 1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쩌면...어쩌면! 그 빌어먹을 한도 끝도 없이 주저리주저리 이어지는 거지같은 정성일 식 만연체에 대한 생각이 이리도 똑같으신지? 아하하하하하하하- 삼 년 묵은 똥이 쑥 빠지듯 속이 다 시원. 근데 더 골 때리게 환장하겠는 건, 그 분이 입으로 자기 문체를 뱉어낸다는 사실이지요. 아하하하하하하하- 도대체 어디서 쉬어야 할 지 내가 더 난감한 그 이의 말투를 듣고 있노라면 듣고 있던 라디오를 집어 던져 뽀개버리거나 옆에 있다면 멱살을 쥐고 제발 그 입 닥쳐! 라고 소리질러 주고픈 충동이;;;


언어 논술 강사 오래 하다보니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정성일 씨 비문법적 말투마다 빨간 팬으로 돼지꼬리 땡야-를 쳐 주고 싶다는;; 하도 말 많아서 그럼 영화는 잘 찍을라나? 혹시나 하고 영화 보러 갔다가 3시간 내내 이를 북북 갈며 욕만 줄창 하다 왔다는;; 블로그에 느와르 다방 욕 좀 올렸더니 몹쓸 추종자란 분들이 와서는 욕을 욕을...어후 썅, 역시 영화는 입으로 찍는 게 아니었어요. 영화를 글로 배웠어요! 의 정성일 씨는 청보 핀토스 감독에 취임했다 1년 만에 짤린 허구연 해설위원과 도플갱어! 영화게의 허구연!

안그래도 로저 이버트 옹이 별세했다 해서 그 이의 영화 평론에 대한 글을 쓰고 싶었는데, 곰곰발 님도 정성일 씨를 떠올린 모양입니다. ㅎㅎㅎㅎ


마지막으로 정성일 씨께 한 마디 해주고 싶어요.

"(당신 요즘 말할 때) 숨은 쉬고 다니쇼?" 라구요.



참, 저는 (페루에 님 때문에) 알라딘에 로그인 하고 서재 만든 스눞이라고 합니다. ㅎㅎ


곰곰생각하는발 2013-04-07 04:30   좋아요 0 | URL
ㅎㅎㅎ. 드디어 알라딘에 서재 하나 만들었군요. ㅎㅎ. 만들고 나니깐 리뷰에만 집중할 수 있어서 좋은데요..ㅎㅎ.
가끔 정성일 열혈팬들이 많아요. 저도 카페... 그거 비판했다고 욕만 먹고...ㅎㅎㅎㅎ.
맞습니다. 로저 에버트 사망 기사 보고... 짠해서 그에 대한 글을 쓰려고
정성일과 문장 비교하다가 그냥 정성일 비판으로... 어찌나 깔 게 많은지...ㅋㅋㅋㅋㅋㅋㅋㅋ
그의 문장 특징 가운데 하나가 문장이(주부+술부) 가 완성되지도 않은데 마침표대신 쉼표 찍고는 다른 걸 주우욱... 이게 나열이 되요.... 대부분 술부가 미완성들인... 술부가 10개인다 주어가 정확히 안 보인다는 겁니다.
논술 가르치셔서 아시겠지만... 이건 정말 논술 고사 보면 0점입니다.
그리고 요즘 사람들이 비판하는 보그 ** 체보다 더 보그 ** 체 같습니다.

문제는 이런 것을 잘 모르는 정성일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이게 좋은 문장인 줄 안다는 겁니다.
영화 리뷰 비스무리한 것 보면 죄다 정성일체'예요. 아니 이걸 왜 따라 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도대체 앎의 음란성'이란 게 뭔지 정말 궁금해요. 제가 국어 순혈주의자는 아니지만
적어도 ~의, ~적, ~ 성... 이런 번역투는 쓰지 않으려고 하는데 ( 안 쓰는 건 아닙니다 ~ 의'는 안 쓸 수가 없더라고용.. ) 이 사람은 그래도 잡지 편집장까지 하신 분인데 너무< A의 B 性 > 이런 게 너무 많습니다. 앎의 음란성' 같은 별천지 대꾸'처럼 말이죠.

로저 에버트를 보세요. 저널리즘 비평과 본격 비평'의 차이를 인정한다고 해도 둘 사이의 틈이 너무 큽니다.
에버트 옹 쓰려다가 정성이 건드리게 되고 그러다가 그만... ㅎㅎ




곰곰생각하는발 2013-04-07 05:59   좋아요 0 | URL
스누피 님 열불나라고 글을 더 추가했습니다. 추가한 글은 좀더 더 더 열받습니다...

비로그인 2013-04-09 18:49   좋아요 0 | URL
아....이 분 참 대단-똑똑하긴 한데 좀 재쉅다- 스타일이심. ㅋㅋ
읽어 보고 더더 열 받을게요. ㅋㅋㅋㅋ


2013-04-06 16: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4-07 04: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4-09 18: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4-09 18: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twinspica 2013-04-10 0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리가라이저리가라이 ㅋㅋ 훠이 훠이

곰곰생각하는발 2013-04-10 04:26   좋아요 0 | URL
전 저 분 이름 외울 때 이라가라저리가라.. 식으로외웠어요.. 왜 영어 연상 암기법있잖아요..ㅎㅎ.

소림꿈나무 2018-12-31 07: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야씨발 개소리도 좀 그럴듯하게 해
정성일이 얘기하는게 니가 말하는 그거같어?
니가 보기에 영화는 씨발 언터처블하라고 정성일이가 말하는거같냐?
씨;발 같은 텍스트를 놓고도 왜 나랑 니 생각이 씨발 왜케 차이가나는거여
정성일은 영화를 오독하지 말라고 말하잖어 병신새끼야
너같이 대가리에 똥박에 안들은 새끼들이 아는척 할라고 영화를 끌어들이면서 오독을 하니까 그러지 말라고 말하고잇잔아 병신새끼야 이해안되 새대가리야? 간단하게 설명해줘? 사회현상이나 역사나 철학이나 뭐 어떤분야에서 지들 이론 설명할때 영화를 끌어다 쓰면서 설명을 하면은 그거에 맞게 끌어다 쓰면서 설명을 해야는데 너같은 돌대가리 새끼들이 어줍잖게

소림꿈나무 2018-12-31 07: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상황에도 맞지도 않는 영하 끌어들이면서 꼴깝떠ㅏ니까ㅣ 그러지 말라고 얘기하잔어 그러니까 그냥 간단하게 너같이 대가리에 똥밖에 안들은 새끼들이 내머리엔 똥은 없고 뇌가 잇습니다 이러니까 씨바ㅓㄹ 그냥 보기에도 같잖은거지

소림꿈나무 2021-12-17 0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는 문학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만큼 훌륭한 예술이고 누구나 들먹일수 있을정도로 만만한 예술이 아니라는 말을 정성일이 하고 있는데 잘 이해가 안가나요? 예컨데 이문열이나 김훈 진중권에 대해서는 감히 칼날을 들이댈수 없으면서 영화에 대해서는 감히 칼날을 들이대면서 이리저리 파헤지는거 자체가 영화를 하위문화로 인지하는것에대한 오만함을 저지르지 말라는 말이에요. 글쓴이가 감히 진중권이나 김훈 이문열과 정면으로 논의할수 있다고 믿습니까? 저는 그렇지 않다고 보고 본인도 그렇게 생각할거 같은데요. 마찬가지로 정성일은 영화에 대해서 감히 논하지 말라는 거예요. 좆도 알지도 못하면서 말이죠.
 

 

 

 

 

 

 

 

 

 

 

 

 

 

 

 

 

 

 

그는 오랫동안 위가 없이, 장이 없이, 폐가 거의 없는 상태로, 식도가 갈라진 채로, 방광이 없이, 또는 갈비뼈가 부러진 채로 살았고, 또 가끔 음식을 삼킬 때 자기의 인두를 함께 삼켜 버리기도 하는 등의 상처를 받았다고 했다. 그러나 신성한 기적이 파괴되었던 것을 원상 복귀시켰고, 그래서 그가 남자로 남아 있는 동안에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이런 놀랄 만한 일들은 오래 전에 끝났고 대신 그의 여자다움이 강해졌다.

 

- 편집증 환자 쉬레버, 프로이트

 

 

 

 


 

 

 

 

 

 

내장 없는 신체들.

 

 

 

 

 법원장 쉬레버'는 자신이 여자가 되어야 한다는 망상에 시달렸다. 그는 자주 자신이 여성이 되어서 남성과 음탕한 짓을 벌리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 바텀 " 이 되어서 건장한 남성에게 깔리는 상상을 하는 것. 하지만 남자가 여자가 될 가능성은 없다. 그것은 희망사항일 뿐이다. 결국 그의 병을 일으킨 원인은 동성애적 리비도'였다. 평소 그의 금욕적 생활과 사고는 자신의 동성애 성욕과 싸우다가 결국은 터져버린 것이다. 아, 불쌍한 쉬레버 할아버지 ! 그런데 이  신경 쇠약 직후의 남자는 교묘하게 사이코의 노먼 베이츠'와 겹친다.

 

영화 사이코에서 주인공 노먼 베이츠'는 여성 복장 도착자'이다. 그는 살인을 할 때 항상 엄마 옷'을 입으며 목소리를 흉내낸다. 그것은 " 더블 " 이다. 이런 설정은 < 사이코 > 의 성공 이후 많은 상업 영화들에 의해 차용된다. 브라이언 드 팔머 감독의 < 드레스 투 킬 > 에서 정점을 찍었으며, 조나단 드미 감독의 < 양들의 침묵 > 에서는 변형된 여성 복장 도착자'가 등장한다.  이들은 모두 노먼 베이츠이다.  실제로 법원장 쉬레버는 웃통을 벗고 머리에 리본이나 싸구려 목걸이를 주렁주렁 매달아 거울을 보고는 했다고 한다.

 

중요한 것은 이들 여성 복장 도착 행위가 여성성에 대한 숭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혐오에서 발생한 것이란 사실이다. 노먼 베이츠'는 여성성'을 얻으려는 것이 아니라 외양만 빌린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젖가슴과 자궁이 아니라 거죽 옷/clothes다.  결국 그들이 원하는 것은 내장 없는 신체'다. 내장 없는 신체'란 말 그대로 내장을 발라낸 거죽 껍데기'이다. 속이 텅 빈 거죽 껍데기'를 입는 순간 금기'는 사라진다. 그것은 필요할 때에만 옷장에서 꺼내 입을 수 있다는 측면에서 매혹적이다.

 

▦  버펄로 빌은 여성 옷 대신 여성 피부'로 만든 가죽 옷을 입는다. 그가 키우는 나방 이름은 a clothes moth 이다. 위에서 언급한 쉬레버 박사는 자신의 내장들을 발라내고 살갗이 여성화'되는 것을 욕망한다.

 

내장 없는 신체는 곧 박제와 동일시된다. 박제 기술이란 내장을 제거한 후 그 속에 방부제'를 넣어서 형태를 보존하는 것이다. 영화 사이코'에서 노먼 베이츠의 모텔 사무실은 온통 내장 없는 새의 거죽 껍데기들로 진열되어 있다. 이 지점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점'은 바로 쟈넷 리'가 연기한 메리언 크레인이라는 이름이다. 그녀는 이집트 신화에 나오는 불사조 이름과 똑같은 피닉스에서 왔다. 더군다나 그녀의 이름인 크레인'은 학'이다. 그녀는 이미 내장 없는 신체가 되어 박제가 될 운명인 것이다.

 

히치콕은 자신의 영화 < 사이코 > 를 블랙코미디'라고 말하고는 했는데 마리온은 " marry on crane " 처럼 읽힌다. 아마도 히치콕은 그녀의 이름을 생각하고는 낄낄거렸을 것이다. 영화 속에서 마리온'은 결혼하지 않은 여자'로 설정되지만 그것은 단지 60년대 검열을 피하기 위한 자체 검열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영화 오프닝에서의 정사 장면은 뭔가 불법적인 느낌을 강하게 풍기기 때문이다. 결국 그녀는 타락한 아이의 어머니'이면서 새이다. 메리언 크레인과 새'를 동일시하는 노먼의 태도는 메리언과의 식사 장면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쉼없이 새'에 대해 말을 한다

 

" 당신, 당신은 새처럼 먹는군요... 어쨌거나 나는 새처럼 먹는다,라는 말을 들었는데, 그, 그건 실제로는, 말, 말,말,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왜냐하면 새들은 정말 엄청나게 먹어대거든요. "

 

 

노먼은 새가 엄청나게 먹어댄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쉴새없이 재잘거린다, 라는 말을 돌려서 한 것이다. 먹다와 말하다는 모두 입의 기능이니 말이다. 새는 주로 멍청한 여성들을 조롱할 때 쓰였다. 심술궂은 어린 여자를 거위라고 하거나 새대가리라는 식이다. 꽥꽥거리다는 곧 잔소리'다. 그러니깐 엄청나게 먹어댄다는 말의 속뜻은 쉴새없이 잔소리를 늘어놓는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그것은 쉴새없이 잔소리를 늘어놓는 어머니'에 대한 불만이다.

 

▦  박제된 새와 박제된 어머니에서 알 수 있듯이 노먼은 새, 어머니, 여성'을 동일한 범주'로 가둔다. 그런데 오이디푸스 신화 속 괴물인 스핑크스는 새이면서, 어머니이면서, 여성'이다. 얼굴은 여자이고 몸은 독수리의 날개를 가졌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스핑크스의 뜻이 똥구멍이라는 점이다. 스핑크스의 어원이 괄약근이라는 사실은 이 오이디푸스 괴물이 항문기'와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항문기 아이'의 신체를 책임지는 사람은 바로 어머니다. 어머니는 항문기 아이의 배변과 청결을 책임진다. 그러므로 스핑크스의 정체는 어머니 괴물이다. 이 오이디푸스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스핑크스'를 제거해야 한다. 노먼은 어머니, 새, 여성'을 제거함으로써 오이디푸스'를 완성한다.

 

▦  스핑크스 수수께끼에 대한 도발적 해석 : 아침에는 네 개의 다리, 점심에는 두 개의 다리, 저녁에는 세 개의 다리'로 걷는 것은 ? 오이디푸스의 말에 의하면 정답은 < 인간 > 이다. 이 수수께끼의 열쇠는 < 저녁에는 세 개의 다리 > 인데 지팡이에 의지해서 걷는 노인'을 뜻한다고 오이디푸스는 자신있게 대답했다. 그런데 이 수수께끼'는 다른 식으로도 설명이 가능하다. 아침의 은유는 구순기이고, 점심은 항문기이며, 저녁은 남근기이다. 항문기일 때 아이들이 첫걸음을 걷기에 두 개의 다리'라는 설명도 가능하다. 그렇다면 남근기'에서의 세 개의 다리는 ? 발기다. 페니스는 세 개의 다리 가운데 하나'이다.

 

새에 대한 노먼의 불만은 재미있게도 법원장 쉬레버'에게도 나타난다. 쉬레버는 자신의 망상 속에서 < 말하는 새들 > 가 쉴새없이 말을 하는 통에 머리가 아프다고 불평을 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는

  

" 나는 남아 있는 새들의 영혼을 구별하기 위해 그것들에게 농담으로 여자 이름을 붙여 주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호기심이 많다든가 관능적인 성향이 있다든가 하는 점에서 어린 여자들과 꽤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들 이름 중 몇몇은 신의 빛살이 인정하여 해당되는 새의 영혼을 가르치는 이름으로 남게 되었다. "

 

- 편집증 환자 쉬레버 중

 

 

라고 말한다.  많은 평론가들이 노먼을 어머니와의 근친상간'에 주목했지만 사실 그는 동성애 드랙 퀸'에 가깝다고 보아야 한다. 그는 어머니를 사랑한 것이 아니다. 여기서 오이디푸스의 삼각관계'는 깨진다. 아이 노먼'은 어머니의 침대를 노리기 위해서 아버지'를 경쟁자'라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곁을 차지하기 위해서 어머니를 경쟁자'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어머니를 제거함으로써 아버지의 곁에 머물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  영화는 정신과의사의 진단으로 끝을 맺는다. 영화가 당시 유행하던 프로이트 이론을 끌여들었다는 것은 원작자 로버트 블록의 말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실제로 일어났던 엽기적인 연쇄살인법 에드 게인 사건을 기초'로 프로이드풍으로 멋지게 연결지었다. 아마도 그가 염두에 둔 프로이드의 등장인물은 법원장 쉬레버'가 아니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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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과 진단 - 문학 삶 그리고 철학
질 들뢰즈 지음, 김현수 옮김 / 인간사랑 / 2000년 11월
평점 :
품절


 

 

 

 

 

 

 

 

 

 

 

들뢰즈'에게 빅엿을 !

 

 

그는 미스테리한 인물이었다. 한겨울이었는데도 가을 바바리에 검은 양복 바지가 전부였다. 말도 거의 없었다. 점심은 굶는 모양이었다. 비쩍 마른 몸에 퀭한 눈, 콧구멍 사이로 삐져나온 콧털 ! 유독 광대뼈가 튀어나온 그는 웃을 때마다 썩은 이'를 드러냈는데 웃음소리는 내지 않았다. 도통 속을 알 수 없는 남자였다. 그는 직원이 아니라 일이 바쁠 때 일손을 거들기 위해 긴급 투입된 나이 든 아르바이트생이었다. 며칠만 일하기로 했는데 일이 꼬여서 몇 개월을 그와 함께 하게 된 것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그의 허리띠 " 바클 " 이었다. 서울대 문양'이었다.

  

 

 

 

 

 

 

 

 

 

 

 

직원들 사이에서는 그가 서울대를 나온 운동권 학생으로 수배가 되어서 자신의 신분을 속인 채 도망 중이라는 설도 있었고,  출소하자마자 이곳에 왔다는 소문도 있었다. 가을에 잡혀서 다음해 겨울에 풀려나, 옷은 가을 옷 하나가 전부라는 그럴 듯한 추론도 덧붙여졌다. 내가 그 형'과 친하게 된 이유는 들뢰즈 때문이었다. 나는 점심시간에 점심을 먹고 들뢰즈의 < 앙띠 오이디푸스 > 을 읽고 있었는데 그가 오더니 무슨 책을 읽느냐고 물었다. 내가 그에게 책을 보여주었더니 그는 소리 없이 웃으며 들뢰즈에 대해 이것저것 물었다.

 

 

 

 

 

 

 

 

 

 

 

 

 

 

 

 

 

들뢰즈에 대한 상식이 없으면 묻지 못할 질문들이었다. 그날 이후로 그는 한 가지 소문이 더해졌다. 서울대 철학과'라는 소문이었다. 며칠 후 그가 내게 오더니 책을 몇 권 내밀었다. 들뢰즈의 책 3권이었다. < 소수집단의 문학을 위하여 > < 의미의 논리 > 그리고 그 문제의 < 비평과 진단 > 이었다. 빌려주는 것이냐고 물었더니 자신에게는 필요없는 책이라며 가지라고 했다. 들뢰즈 그룹 스터디 때 사용하던 책이라 낙서'가 많다는 귀뜸도 해주었다.

 

책 < 비평과 진단 > 은 마치 편집 교정자의 작업 같았다. 밑줄과 책 모서리를 접은 양이 무척 많았다. 그리고 잘못된 띄어쓰기를 표시하기 위해 v 자를 표시하고, 온갖 교정 부호들이 페이지마다 가득했다. 그뿐이 아니다. 엄청난 메모'가 페이지마다 가득했다. 소문은 도망 중인 서울대 철학과 운동권'에서 전직 출판사 교정 직원'으로 바뀌었다. 내가 보기엔 이 책은 그룹 스터디의 흔적이 아니라 교정자의 작업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 책을 끝까지 읽기는 읽었으나 짜증이 치밀어올랐다. 제 9장 < 어린이들이 하는 말 > 에서 번역가는 문장에 的을 남발했다. " 부모적인 형태 " , " 부모적 인물들의 단순 확대 " , " 지도 제작적 개념 " , " 인칭적... " , " 천상적 상황 " 등등... 이 짧문 시론에 과녁 적이 넘쳐났다. 태어나서 만파식적에 대해서는 들어봤으나 " 지도 제작적 개념 " 이라는 말은 처음 들었다. 도통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 이해 못하면 덮는 게 상책이다. 책을 덮고 났더니 묘한 컴플렉스가 생겼다. 하여튼 그는 그렇게 몇 개월을 함께 하다가 사라졌다. 그와 함께 이 책도 책장 어딘가에 박혀서 몇 년 동안 먼지만 쌓이고 있었다. 내가 다시 이 책을 꺼내서 읽게 된 계기는 < 필경사 바틀비 > 때문이었다. 읽다가 문득 들뢰즈'가 이 책에 대해 언급했다는 기억이 떠올라 찾아보니 그 옛날 < 비평과 진단 > 에 수록되어 있었다.

 

그때는 멋모르고 읽었을 때이니 다시 읽으면 이해가 가리라. 그런데 웬걸 ?! 여전히 무슨 소릴 하고 있는지 감이 오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이 책과 관련된 글을 찾다가 로쟈 님'의 페이퍼'를 보게 되었다. 아이구야, 그런 문제가 있었구나. 다음은 < 비평과 진단 > 에 수록된 " 바틀비 혹은 상투어 " 에 나오는 문장이다.

 

하지만 끊임없이 이사하게 처신하는 소송대리인의 비정상적 행동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어찌 그를 제대로 알 수 있을까 ? 소송대리인은 중요한 직업상의 승진을 한다. 사장 슈레버(Schreber ) 또한 승진하고 나서야만 정신착란을 면할 수 있음을 상기해 볼 수 있다.

- p 137

 

로쟈 님의 친절한 해석에 의하면 사장 슈레버'가 아니라 법원장 슈레버'라고 한다. 프로이트에 나오는 그 유명한 법원장 슈레버 말이다. 그런데 번역가는 법원장을 동네 사거리 사장님'이라고 번역을 했다. 솔직히 나는 이 문장을 읽었지만 그냥 동명이인이려니 했다. 법원장 슈레버'는 프로이트를 대충 알아도 알 수 있는 인물이니 번역가가 실수를 한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못했다. 맙소사 ! 들뢰즈의 서적을 번역할 정도이면 들뢰즈에 대한 기본적 상식은 갖추어져야 하는 것은 기본이다. 알뛰세르의 책을 번역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맑스에 대해 해박해야 하고, 라캉의 책을 번역하기 위해서는 먼저 프로이트에 대해 알아야 한다.

 

 

 

 

 

 

 

 

 

 

 

 

 

 

 

 

 

 

 

들뢰즈의 책 번역도 마찬가지다. 들뢰즈는 < 앙띠 오이디푸스 > 와 < 천 개의 고원 > 을 썼을 정도이니 프로이트는 기본이 아닐까 ? 프로이트는 1911년 < 편집증 환자 쉬레버 - 자서전적 기록에 의한 정신분석 > 이라는 중요한 글을 발표한다. 설령 번역가가 프로이트를 읽지 않았다고 해도 들뢰즈는 < 앙띠 오이디푸스 > 에서 " 기관 없는 신체 " 를 다루면서 그 사례로 법원장 슈레버'를 중요한 인물로 다루었을 뿐만 아니라 라캉도 법원장 슈레버에 주목했다. 이런 표현이 적절하지는 않겠지만 법원장 슈레버'는 편집증 환자의 슈퍼스타였다. 그런데 어떻게 법원장 슈레버'를 동네 아무개 회사 사장님이라고 소개를 할 수가 있는 것일까 ?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온다. 그것은 마치 프로이트의 딸 안나 프로이트'를 프로이트의 아내로 소개하는 꼴과 무엇이 다른가. 번역가가 들뢰즈에게 빅엿을 먹인 꼴이다.

 

지금 생각해 보니 이 책에 그어진 수많은 밑줄과 메모 그리고 교정 부호들은 인쇄가 잘못되어 발생한 오탈자'를 기록한 것이 아니라 이상한 번역으로 인해 뒤죽박죽이 되어버린 문장에 대한 재해석이었던 것은 아닐까 ? 저 위의 문장을 책에서 찾아보니 사장 슈레버'라는 문장 앞에 밑줄을 긋고는 물음표 ( ? ) 두 개가 신경질적으로 써져 있다. 그나저나 그 사람은 무엇을 하고 있을 지 궁금하다. 한겨울 가을 베이지색 바바리와 검은 양복 바지 하나'로 겨울을 버티던 그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 여전히 수배 중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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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치콕과 사이코
스티븐 레벨로 지음, 이영아 옮김 / 북폴리오 / 2012년 11월
평점 :
절판


 

 

 

 

 

 

 

 

히치콕과 관련된 책은 의외로 많다. 그만큼 히치콕에 대한 현대인의 열광'이 보인다. 개인적으로 히치콕에 대한 가장 탁월한 저서는 트뤼포가 히치콕을 인터뷰한 < 히치콕과의 대화 > 다. 이 인터뷰는 위대한 스승/히치콕'에 대한 제자의 존경/ 트뤼포'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인터뷰어의 미덕은 겸손이다.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는 것은 좋으나 단정적이서는 안 된다. 주체는 인터뷰이/감독이지 인터뷰어/평론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정성일은 질문자로서의 자격이 없다. 그가 박찬욱과 영화에 대해 말할 때 그는 언제나 박찬욱보다 많이 안다는 전제로 대화를 시작한다. 미친 짓이다. 지첵의 < 삐딱하게 보기 > 도 명불허전이다. 지첵은 히치콕을 통해 라캉으로 가는 길을 친절하게 가르쳐준다. 이 책과 함께 < 항상 라캉에 대해... > 도 읽어볼 만하다. 그리고 < 여성 괴물 > 과 < 너무 많이 알았던 히치콕 > 은 여성적 시각으로 히치콕 영화를 해부한다. 끝으로 < 히치콕 > 은 히치콕을 다룬 전기 중 가장 꼼꼼하다.

 

 

 


 

 

 

 

 

 

 

 

" 그건 영화에서 흔히 쓰는 방식이지 ! "

 

 

 

왕가위와 히치콕은 서로 정반대의 작업 스타일'로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다. 왕가위는 편집에 목숨을 걸었고, 히치콕은 촬영에 목숨을 걸었다. 사실 < 동사서독 > 은 자신의 영화에 대해 스스로 신뢰를 할 수 없어서 우왕좌왕한 결과였다. 영화 촬영 도중 내용이 바뀌어 동사 역을 맡은 배우가 서독을 하고, 서독을 연기하던 배우는 동사 역을 하게 되었다. 한 달 동안 찍었던 촬영은 없던 일이 되고 다시 찍기를 반복했다. 제작 기간이 2년 가까이 소요되자 왕조현은 자진 하차'를 하고 사막을 떠난다. 왕가위는 자신이 무엇을 만들고 있는지에 대해 몰랐던 것 같다. 그는 산더미처럼 쌓인 필름을 편집실에 가지고 가서 100분 분량으로 간추리는 작업에 몰두했다. 상황이 이러하니 당연히 서사는 엉망이었다. 하지만 왕가위는 행운아였다. 과정은 엉망이었지만 결과는 언제나 훌륭했으니깐 말이다. 그가 원한 것은 서사가 아니라 이미지'였기 때문이었다.

 

반면 히치콕은 만약을 대비해서 다양한 설정으로 찍는 어설픈 짓따위는 하지 않았다. 철저한 계산 아래에서 촬영이 되었기 때문에 자투리 촬영 필름을 남기지 않았다. 사실 영화사가 자투리 필름으로 편집실에서 장난을 치는 꼴사나운 짓을 보고 싶지 않으려는 마음이 더 컸다. 영화사는 마음에 들지 않는 장면을 들어내려고 해도 그 장면을 대체할 촬영분이 마땅히 없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제작했던 데이빗 셀즈닉은 히치콕의 이러한 꿍꿍이를 두고 분통을 터트렸다. 그는 히치콕의 촬영 방식을 < 직소 퍼즐 > 이라고 불렀다. 직소퍼즐 게임이 1000조각 중 하나'라도 없으면 완성이 안 되듯, 히치콕 영화 또한 한 조각이라도 없으면 완성이 되질 않았다. 아이구야, 화가 난다. 화가 나 !!!

 

 

영화 < 사이코' > 는 히치콕 입장에서 보면 저예산 영화'에 가까웠다. 총제작비로 80만 달러'가 들어갔다. 티븨 30분 단막극 하나에 평균 10만 달러의 비용이 들어갔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영화는 티븨용 90분짜리 특별판'이라고 해야 된다. 그는 제작비를 줄이기 위해서 실제로 티븨 드라마 촬영 팀'과 작업을 했다. 이유는 촬영 기간을 단축시키기 위해서였다. 티븨 제작 시스템에 익숙한 기술자들은 히치콕의 의중을 쉽게 이해했고 일을 빨리 빨리 밀어붙였다. 다들 아시다시피 이 영화의 흥행은 상상을 초월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위의 영상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지금 보아도 파격적인, 6분짜리 사이코 예고편이다. 그는 이 예고편에서 관객을 철저하게 속인다. 히치콕은 부인의 방'을 안내한 후 침대를 가리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여긴 그 여자의 방입니다. 침대에는 그녀가 누웠던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오메, 후덜덜덜덜 ! " 그는 예고편에서 존재하지 않는 부인'을 마치 존재하는 것처럼 설명한다. 그것은 자신의 트릭을 감추기 위한 계산이었다. 더군다나 예고 끝에서 비명을 지르는 사람은 쟈넷 리'가 아니라 베라 마일즈'이다. 예고편이란 영화를 보기 전에 상영되는 것이 아니었던가 ! 영화 < 사이코 > 를 보기 전이었던 관객들은 베라 마일즈'가 살해당하는 것으로 알았을 것을 것이다. 하지만 막상 영화 속에서는 최고의 스타 중 하나였던 쟈넷 리가 30분 만에 살해당한다. 이처럼 예고편은 온통 거짓말투성이'다.

 

 

            

 

내가 히치콕의 샤워 씬'에서 가장 궁급했던 장면은 샤워 꼭지에서 쏟아지는 물줄기를 정면에서 찍은 장면이었다. 정면에서 찍었다면 물방울이 카메라 렌즈에 튀어서 흔적을 남길 텐데 그런 흔적이 보이지 않아서 늘 궁금했었다. 거기에 대한 해답은 위의 동영상 속 남자가 비밀을 가르쳐준다. 정답은 샤워 꼭지의 가운데 구멍을 막고 꼭지 원 둘레에만 물이 나오도록 고안한 장치'이다. 그러니깐 물줄기는 모두 카메라 바깥으로 흘러내리고 정작 중심부는 물이 내리지 않는 구조가 된 것이다. 태풍의 눈처럼 말이다.

 

히치콕이 즐겨 사용했던 말 가운데 하나는 " 그것은 영화에서 즐겨 쓰는 방식이지 ! " 였다고 한다. 완곡하게 거절을 하지 못했던 히치콕은 돌려서 < 진부하고 뻔한 것 >을 < 즐겨 쓰는 방식' > 이라고 돌려서 말했다. 그것은 곧 거절의 뜻이었다. 50년이 지난 이 영화를 지금의 관점에서 보자면 쇼킹'하기보다는 오히려 클래식'하다. 이제 그가 사용했던 영화 기술은 표준이 되어서 이제 즐겨 쓰는 방식이 되어 버렸다. 시간은 이처럼 새로운 것을 낡은 것으로 만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시간이 지나도 마스터피스'는 영원하다는 점이다.

 

 

▦ 참고로 영화 속 피는 초콜릿 시럽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칼이 " slashing " 하는 소리는 칼로 수박을 찌를 때 나는 소리'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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