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안의 파시즘 : 집 나가면 개고생이다.

 

 

해마다 여름'이면 박카스'에서 주최하는 국토 순례 대장정'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청(소)년 극기 체험 프로그램'이다. 참가한 학생들은 각자 조'를 나누어 일주일 동안 도보로만 국토'를 횡단해야 한다. 각자 무리'를 지어 나누었으니 그 중엔 리더'가 있을 것이고 다른 무리'와의 경쟁'과 갈등'도 있을 것이다. 온실 속에서 자란 아이들에게는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이나 다름 없다. 비가 와도 행군. 눈이 와도 행군'이다. 오직, 행군'뿐이다. 한 명의 낙오' 없이 우리는 이 지옥의 레이스'를 뚫고 나아가야 한다.

 

이쯤 되면 눈치 빠른 사람'은 알아차렸을 것이다. 이 로드-쇼'는 군사 훈련 프로그램'을 청소년 성장 프로그램'으로 변형시켜 놓은 원맨-쇼'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국토대장정 프로그램은 육체의 한계를 테스트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을 향한 개인의 충성도를 체크'하는 불온한 익스트림 스포츠'다. 개인의 포기는 곧 그 개인이 소속된 조'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한다. 겉으로는 내색은 안하지만 조원들은 자신의 조에서 이탈자가 발생했다는 사실에 짜증이 난다. 이탈자는 곧 겁쟁이, 까탈쟁이, 투덜이, 빙신, 쪼다, 개불, 재수없던 애'로 강등된다.

 

남자라면 징징거리는 사내 새끼 취급을 하고, 여자라면 너무 곱게 자린 년 취급을 당한다. 이 지점에서 국토대장정은 본색을 드러낸다. " 하자 " 있는 육체와 정신'을 걸러내는 것, 그것은 일종의 색출'이며 검열, 바로 히틀러식 우생학'이다. 더욱 재미있는 사실'은 부모의 돈으로 참가한다는 데 있다. 고. 생. 을. 사. 서.한. 다 ?!  돈 주고 깨달음'을 얻겠다는 발상'인데, 그 시작이 심히 불온하다. 차라리 돈 내고 피, 똥, 싸, 라 ! 잇힝 ~

 

결국, 그 모든 고통'을 견디며 최종 목적지'에 도착한 아이'들은 만감이 교차한다. 비싼 참가비'를 내고 얻은 깨달음은 두 가지'다. 하나는 모두가 yes라고 할 때 no라고 말하면 빙신'이 된다는 사실.  빙신보다는 차라리 고통을 참는 것이 유리하다는 결론이고, 다른 하나는 집 나가면 개고생'이다는 사실이다. 지구는 독수리 5형제가 지키고, 노원병은 안철수가 지키지만, 우리집은 아빠와 엄마가 지켰어. 엉엉엉. 고마워 아빠 !  아이들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올 것이다. 좀더 안락한, 좀더 근사한 내부의 집'을 열망하며 열공할 것이다. 땡볕에서 일하는 직업은 힘든 직업. 그래서 그들은 편안한 안락의자'를 꿈꾼다.  오늘도 네이티브 원어민 발음'을 위하여!  굳은 혓바닥'을 동글게 휠 것이다. 두.유.스.피.크.잉.글.리.쉬 ?

 

 

 

1. 히틀러는 일종의 패티쉬 환자'라 할 만하다. 그를 자극하는 이미지는 횃불'이다. 이 횃불 이미지'는 바그너와도 연결된다. 그가 < 불 > 을 상징하는 프로메테우스'에게 반한 이유는 이 불꽃 이미지 때문이다. 2. 인간에 대한 오해'는 히틀러의 우생학이 얼마나 멍청한 짓인가를 짓인가를 증명한다. abo 혈액형'은 히틀러 우생학에서 비롯된 이론으로 히틀러 추종자들은 B형은 나쁘다는 논리'를 편다. 유럽인들은 대부분 O, A형이기 때문이다.B형은 유독 아시아 인종'이 유럽 인종'에 비해 많다. 그런 식으로 따지자면 히틀러 우생학자들이 경배해야 될 대상은 페루 인디언이다. 이들은 모두 100% O형으로 이루어졌다. 3. 홀로코스트 산업'은 히틀러 학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히틀러 학살'을 이용하는 유태인에 대한 보고서'이다. 히틀러에 의해 가장 많은 수가 희생된 집단은 유태인이 아니라 집시'였다. 4. 우리 안의 파시즘'은 파시즘이 비단 20세기 초 독일 히틀러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말한다. 파시즘은 일상 곳곳에 침투해 있다. 국토대장정'따위의 극기 프로그램이 그 좋은 예이다. 참가자는 명령과 복종을 배운다. 인내와 끈기'라는 인문학적 포장지로 포장을 했으나 사실 포장지 안에 들어간 알맹이는 마조히즘'이다. 고통을 참는 것이다. 즉 개인보다는 집단이다.집단의 이익을 위해서는 개인의 욕망을 억제하라, 라는 것이 파시즘의 주요 강령은 아닐까 ?

 

 


 

 

 

 

 

 

 

 

난도질 영화 : 집 나가면 개고생이다.

 

 

고백하건대, 한때 나는 공포영화 열혈 오타꾸'였다. 가가호호. 면면촌촌. 동네 비디오 가게의 공포영화 코너'란 코너'는 모두 섭렵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 당시 나의 꿈은 공포 영화'를 정복하는 것이었다. 지구 정복'은 잘 빠진 주류 하드-바디'들의 몫이었으니, 나 같은 비주류 오타꾸는 병뚜껑 모으기 정복, 껌종이 모으기 정복' 등 주류가 꺼려하는 변방의 잡동사니'를 수집하는 넝마주이'형에 가까웠다. 아아, 그 시절'을 회상하며 나는 쓴다. 오래되고 낡은 브이. 에이치. 에스' 테이프 속에서 웨스 크레이븐'과 로이드 카우프만'의 영화'를 발견해내는 기쁨'은 하나의 위대한 불꽃'이었노라 말이다.

 

 

 

스플래터 무비'라고 불리우는 십대 난도질 영화에서 희생자들이 곱게 죽이면 재미'가 없다. 미안한 소리이지만 우선 나부터 우우, 한다. 난도질 영화의 묘미'는 바로 살인 도구의 스펙타클화'에 있다. 전기톱'이 등장하는가 하면 정원사용 가위'까지 등장한다. 심지어는 꿈속의 악마가 살인을 하기도 한다. 이 장르를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집 나가면 개고생'이다'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삼백여 편'의 공포영화'를 섭렵한 내공'이니, 위의 정의'를 우습게 생각하지 말기'를 바란다.

 

죽을 운명에 놓인 영화 속 십대들은 할로윈데이나 13일 밤의 금요일'이 되면 꼭 집을 나간다. 엄마의 잔소리'와 아빠의 충고'를 무시하고 떠난 사춘기 소년 소녀들의 캠프파이어'는 결국 지옥에서 보낸 하루로 끝난다. 이 죽음'은 아빠의 징벌'에 가깝다. 관객이 보게 되는 것은 살인자의 얼굴이 아니라 무시무시한 무기'다. 장면과 장면 사이에 삽입된 단단한, 딱딱한, 확대된 무기'는 일종의 아버지 남근'이다. 그것은 아버지의 법'을 무시한 죄. 가족이라는 이름의 울타리'를 벗어난 죄. 그리고 집 밖에서 팬티'를 내린 죄'에 대한 응징'인 셈이다. 영화 속 최후의 생존자'는 온 몸에 피를 뒤집어쓴 채 이렇게 중얼거린다. " 집 나가면 개고생'이야. "

 

이 지점에서 십대 난도질 영화'와 국토 대장정'은 겹친다. 그들은 모두 밖에서 고생하다가 집으로 돌아온다는 줄거리를 가지고 있다. 차이점이 있다면 전자는 부모의 금지 명령이 십대를 밖으로 내몰고, 후자는 부모의 적극적인 후원에 의해 밖으로 내몰린다는 점이 다르다. 하지만 그들 십대들이 깨닫는 교훈은 동일하다. 아버지의 말씀'을 무시하지 말라는 거. 가족이라는 이름의 울타리'는 언제나 당신'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해준다는 거. 그리고 무리'에서 벗어나지 말라는 것!!!   벗어나는 순간, 그러니깐 당신이 팬티를 내릴려고 으슥한 곳으로 가는 순간, 당신을 기다리는 것은 하키 마스크를 뒤집어쓰거나, 얼굴 가죽을 뒤집어쓰거나, 정원용 가위나 전기톱을 든 가면 쓴 아버지'다. 관객인 우리는 젖가슴이 큰 여자가 무리에서 벗어나는 순간 속으로 외친다. " 이 바보야 ! 무리에서 벗어나지 말라고 ! "

 

부모들은 자신의 자녀들이 십대 난도질 영화'에 빠지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보면 안 되는 목록으로 지정한다. 그런데 여름방학만 되면 자신의 자녀'를 국토대장정 프로그램에 참여시킨다. 내가 보기엔 다 거기서 거기인데 말이다. 사실 난도질 영화보다 더 위험한 것은 국토대장정이다. 난도질 영화는 말 그대로 영화일 뿐이지만, 국토대장정은 체험이기 때문이다. 십대 난도질 영화가 남성 가부장 이데올로기의 후진 잔소리'이라면, 국토대장정은 남성 가부장"들"의 집단 명령'이다. 남성 가부장의 확장형이 바로 파시즘이기 때문이다.  무엇이 더 위험한가 ?

 

아이가 고통'을 참지 못하고 절룩거릴 때는 걷기를 중단해야 한다. 멋들어지게 비트겐슈타인의 말투를 빌려 비비꼬자면, 개인의 고통에 대해서는 모두 다 침묵해야 한다. 그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그게 어른이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하는 교육이다. 누군가는 강하게 키우겠다고 채찍을 드는 사람도 있겠으나 그것은 교육이 아니라 폭력이지 않은가 ? 당신은 어쩌면 파시즘을 가르치기 위해 자신의 자식을 땡볕으로 내몰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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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터에는 신기한 힘이 있지. 과거가 진짜 있었던 일이라는 것을 일깨워주거든. 흉터를 얻게된 사연은 결코 잊을 수 없지. 안 그런가?

- 모두 다 예쁜 말들 中

 

 

 

오늘 생각없이 책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코멕 메카시의 < 모두 다 예쁜 말들 > 이 생각났다. 이유는 모른다. < 아비정전 > 을 생각하다가, 장국영을 생각하다가, 장만옥을 생각하다가, 실패한 내 연애를 생각하다가, 불현듯 < 모두 다 예쁜 말들 > 이 떠오른 것이었다. 다시 읽기 위해 찾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그냥... 찾고 싶었을 뿐이다. 다섯 개의 책장에서 코멕 메카시의 소설을 모두 골라냈다. < 핏빛 자오선 > < 국경을 넘어서 > < 평원의 도시들 > <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 < 로드 > . 하지만 여전히 < 모두 다 예쁜 말들 > 은 보이지 않았다. 분실한 모양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그동안 내가 잊고 있었던 기억이 갑자기 생각났다. 나는 천장이 낮은 옥탑에서 산 적이 있다. 그곳에서 한 여자를 오랫동안 사랑했다. 그 여자와는 헤어졌다. 그 책을 그녀가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책인 레비스트로스의 < 슬픈 열대 > 가 내 책장에 있는 것처럼 말이다.  기억이란 늘 이렇게 의뭉스러운 점이 있다.  생각해 보니, 이 아비정전'도 그녀와 함께 본 영화였다. 책을 다시 사야 할까 ? 고민하다가 이내 포기했다. 잃어버린 책을 다시 사는 것은 어리석다. 더군다나 그 책을 읽은 적이 있다면 더더욱 그렇다. 그리고 헤어진 여자를 그리워하는 것도 어리석다. 더군다나 헤어진 여자가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졌다면 더더욱 그렇다. 이젠 소년다운 고집은 버려야 한다.

 

잃어버린 것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었을까 ? < 모두 다 예쁜 말들 > 에 대한 리뷰'를 읽어보았다. 그러다가 그 여자가 쓴 글을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다. 천장이 낮은 옥탑에 살았던 남자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 사람은 코맥 메카시의 소설을 유독 좋아했다고  담담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그리고 끝으로 < 모두 다 예쁜 말들 > 은 그 남자의 책장에 꽂혀 있어야 할 책이었으나 이렇게 자신의 책장에 꽂히게 되었다고 말했다.   2009년의 리뷰였다. 범종 같은 울림이 밑바닥 깊은 곳'에서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 밑에는 글쓴이의 동료로 보이는 사람의 덧글이 달렸다. 덧글은 2012년의 것이었다. 그러니깐 글쓴이의 동료는 3년이 지난 글에 뒤늦게 덧글을 단 것이다. " 우연히 네가 쓴 글을 보았다 " 로 시작한 글이었다. " 우연히 네가 쓴 글을 보았어. 내가 ** 샘'에게 보내던 메일 주소 아이디'와 알라딘 아이디가 똑같더라... 너무 아파서 끝까지 읽지 못했다. **샘'이 그렇게 불의의 사고로 허망하게 떠나고 나서, 나... 샘의 빈 자리'를 보며 많이 울었어. 여긴 마치 나를 위한 숨은 보물 찾기 쪽지 같아. 자주 올께. 주인 없는 집에 너무 자주 온다고 눈치를 주지는 마. 보고 싶다. 그립다... "

 

내일은 4월 1일'이다. 하루 앞당겨서 이리 쓴다. 

 

 

 

 


 

  

 

 

 

 

 

 

소년다운 고집.

 

 

 

장국영이 죽었다. 같은 날 김정일은 군부 세력에 의해 살해당했고, 기타노 다케시는 가족 살해 혐의로 체포되었으며, 심형래는 칸느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58건이나 되는 허위 신고가 119에 접수되었다. 2003년 4월 1일 만우절의 풍경이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모두 죽었다가 깨어나는 기적을 이루었으나 장국영은 더 이상 깨어나지 못했다. 그는 빌딩 24층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잉게보르크 바하만이 그랬던가.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고?! 스스로를 발 없는 새'라고 말했던 남자는 거짓말처럼 죽었다.나는 그 소식에 휘청거렸다. < 아비정전 > 을 스무 번 넘게 보던 즈음이었다. 그날 밤, 다시 아비정전을 보았다. 살아 있는 배우의 걸작'을 보는 것과 죽은 배우가 남긴 유작'을 보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이라는 사실을 그때 깨달았다.

 

 

              

 

 

 

 

 

 

 

나는 이 영화를 생각날 때마다 보았다. 볼 때마다 생각났다. 이런저런 일로 이 영화를 마흔 번 넘게 보게 되었다. 이 영화를 습관처럼 본다는 것은 소년다운 고집'에 속했다. 이 영화에 대한 개인적 오마쥬인 셈이었다. 내가 이 영화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2007년 봄, 낙원동 시네마떼끄'에서였다. 그때, 나는 이제 더 이상 이 영화'를 보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이 불길한 느낌은 적중했다. 성공한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소년의 불순한 고집따위는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담배를 끊으면 사탕을 찾듯이, 나는 고집을 버리는 대신 반짝반짝 빛나는 것들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다시는 보지 않겠다는 태도는 지금 생각해 보니, 또 다른 고집이었던 것 같다. 오래된 고집을 버리고 새 고집을 얻은 셈이다

.

 

 

 

 

내가 이 영화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장국영이 자신을 버린 어머니를 찾았을 때'이다. 바람과는 달리 어머니는 만남을 거부한다. 어머니에게서 다시 한번 버림받은 그가 뒤돌아서 빠른 걸음으로 씩씩하게 걸을 때, 화면은 재촉하는 걸음과는 달리 어느 순간 슬로우모션'이 되어 느린 걸음으로 바뀐다. 재촉은 지연된다. 이 빠른 걸음과 느린 걸음'은 주인공이 품고 있는 겉과 속을 효과적으로 표현한다. 빠른 걸음이 그가 어머니를 향해 내뱉는 위악'이라면, 느린 걸음은 어머니 곁에 머물고 싶은 그리움이다. 어머니는 커튼이 쳐진 창가에서 아들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앞에서는 보이지 않으나 뒤에서 보면 선명하게 보이는 것은 초라한 어깨'다. 내것이 아닌 타자의 어깨'는 늘 마음 속에 오래 남는 법이다.

 

 

 

 

 

▶ 편집 과정에서 삭제된 아비정전 스틸 컷

 

오늘 우연히 이 스틸 사진'을 발견했다. 편집에서 삭제된 장면 중 하나'다. 장만옥은 왜 천장이 낮은 양조위의 방 창가에 앉아 있(었)을까 ? 나는 엔딩에서 거울을 보며 머리를 빗는 양조위'를 장국영'이라고 착각한 적이 있다. 세 번째 보았을 때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인물'은 장국영이 아니라 양조위'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질 나쁜 모니터 화질 탓만은 아니었다. 둘은 묘하게 닮았다. 그녀는 여전히 첫사랑인 장국영을 잊지 못한 것이다. 장만옥에게 있어서 양조위는 장국영의 헛것이다. < 첫 > 의 반대말은 < 끝 > 이 아니다. < 헛 > 이다. 그러므로 첫사랑의 반대말은 헛사랑'이다. 나는 그 후로 양조위를 볼 때마다 장국영이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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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2013-03-31 1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정말이지 내일이 바로 그날.. 거짓말처럼 저 배우가 간지도 벌써 몇 년이 흘렀네요.
제게 곰발님 오늘 글은 특히나 좋네요. 가슴에 팍팍 꽂힙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3-03-31 18:37   좋아요 0 | URL
제 글이 아니라 저 영화가 가지는 독특한 매력 때문일 겁니다.
어제 한번 다시 보았습니다. 42번째 관람입니다.

달사르 2013-03-31 1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흉터는 그렇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며 치유의 과정을 반복하나봐요.
제게도 흉터가 있는데 가끔 나도 모르게 손이 갈 때면, 지나간 과정이 도르르 말리면서 재생되더라구요.
나를 사랑하는 남자라면, 내 흉터 또한 사랑해줬으면..생각이 가끔 들기도 하구요.

내일은 만우절보다는 장국영이 떠난 날로 더 먼저 기억되는 거 같아요. 이것도 흉터여서 그렇겠지요?

곰곰생각하는발 2013-03-31 19:53   좋아요 0 | URL
5월은 가정의 달이고, 4월은 장국영의 달이죠. 이젠 전 그렇게 기억합니다.
4월 1일 혹은 4월 16일을 장국영의 날로 정해야 합니다.
영화 속 장국영과 장만옥이 만나는 날이 4월 16일이거든요. 장국영은 공교롭게도
4월에 세상을 뜨고 말이죠. 4월은 이래저래 장국영이 떠오르비다.

포스트잇 2013-03-31 2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왕가위, 장국영, 양조위, 장만옥... 제게 90년대는 화양연화였네요...,영화의 시대였어요.......

곰곰생각하는발 2013-04-01 00:01   좋아요 0 | URL
화양연화도 좋죠. 이참에 다시 보아야겠습니다.

라로 2013-04-01 1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것이 아닌 타자의 어깨'는 늘 마음 속에 오래 남는 법이다. 라는 말 인상에 남네요,,
첫의 반대는 헛! 이군요,,,,미리 앞당긴 만우절 페이퍼인가요?????ㅎㅎㅎ
늘 멋져요!!^^

곰곰생각하는발 2013-04-01 17:22   좋아요 0 | URL
네에. 하루 앞당긴 만우절 페이퍼입니다.
전 이상하게 그 사람이 뒤돌아서면 그때부터는 어깨만 보이더라고요.
참.. 신기해요..

스누피 2013-04-01 1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전 장국영에 빙의된 저 인물이 장학우라고 얼핏 착각하고 있었다는.
그런데 곰곰 발로 생각해 보니 머리 빗는 장학우는 영화전차 엔딩에서 본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당시의 홍콩영화들은 죄다 비빔밥이 돼 버려서
기억이란 놈 참 의뭉스럽다,그런 생각 많이 합니다. ㅎㅎ

곰곰생각하는발 2013-04-01 17:21   좋아요 0 | URL
저 영화를 볼 때 모니터가 심각하게 어두웠어요.
왜 오래되면 어두워지잖습니까. 가뜩이나 어두운데
화면도 어둡다 보니 전 마지막 머리 빗는 남자가 정말 감쪽 같이
장국영인 줄 알았어요. 제가 생각하는 그 스누피 님 맞으시죠 ? 후후..

그 놈 맞음 스누피 2013-04-01 17:45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스누피란 놈도 워낙 의뭉스런 놈이라;; ㅋㅋㅋㅋㅋ
맞아요. 심각하게 어두웠지요. 원래 화면도 그런데다 그 땐 죄다 닳고 닳은 비디오로 아비정전을 봤으니까요. 그래서 저도 처음엔 응? 장국영인가벼? 저 놈 안 죽었나? 회상씬인가? 그랬다는; ㅋㅋㅋ

아마도 왕가위가 일부러 그런 걸 노리고 관객들을 놀려 먹은 게지요, 분명히. ㅎㅎㅎ

곰곰생각하는발 2013-04-01 17:56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ㅎㅎㅎㅎㅎ 왕가위가 워낙 뒤죽박죽 편집 대마왕이라서..
저도 과거의 한 장면이겠거니 했습니다.
이 영화에서 편집으로 잘려나간 장면이 무지 많았다고 하죠 ?
하여튼 잘리기 전에는 장만옥과 양조위가 한방에 있는 것으로 보아
연인이 되었나 봅니다. ㅎㅎ.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장국영
주성철 지음 / 흐름출판 / 2013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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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다운 고집.

 

 

장국영이 죽었다. 같은 날 김정일은 군부 세력의 반란에 의해 살해당했고, 기타노 다케시는 가족 살해 혐의로 체포되었으며, 심형래는 칸느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58건의 허위 신고가 119에 접수되었다. 2003년 4월 1일 만우절의 풍경이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모두 죽었다가 깨어나는 기적을 이루었으나 장국영은 더 이상 깨어나지 못했다. 그는 빌딩 24층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잉게보르크 바하만이 그랬던가.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고?! 스스로를 발 없는 새'라고 말했던 남자는 거짓말처럼 죽었다.나는 그 소식에 휘청거렸다. < 아비정전 > 을 스무 번 넘게 보던 즈음이었다. 그날 밤, 다시 아비정전을 보았다. 살아 있는 배우의 걸작'을 보는 것과 죽은 배우의 유작'을 보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이라는 사실을 그때 깨달았다.

 

 

                           

 

 

 

 

나는 이 영화를 생각날 때마다 보았다. 볼 때마다 생각났다. 이런저런 일로 이 영화를  마흔 번 넘게 보게 되었다. 그의 영화를 습관처럼 본다는 것은 일종의 소년다운 고집'이었다. 이 영화에 대한 개인적 오마쥬인 셈이었다. 내가 이 영화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2007년의 봄, 낙원동 시네마떼끄'에서였다. 그때, 나는 이제 더 이상 이 영화'를 보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이 불길한 느낌은 적중했다. 성공한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소년의 불순한 고집따위는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담배를 끊으면 사탕을 찾듯이, 나는 고집을 버리는 대신 반짝반짝 빛나는 것들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다시는 보지 않겠다는 태도는 지금 생각해 보니,   또 다른  고집이었던 것 같다. 오래된 고집을 버리고 새 고집을 얻은 셈이다.

 

 

          

 

내가 이 영화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장국영이 자신을 버린 어머니의 집을 찾았을 때'이다. 그의 바람과는 달리 어머니는 만남을 거부한다. 어머니에게서 다시 한번 버림받은 그가 뒤돌아서 빠른 걸음으로 씩씩하게 걸을 때, 화면은 그의 빠른 걸음과는 달리 어느 순간 슬로우모션'이 되어 느린 걸음으로 바뀐다. 재촉은 지연된다. 이 빠른 걸음과 느린 걸음의 대비는 주인공의 겉과 속을 효과적으로 표현한다.  빠른 걸음이 그가 어머니를 향해 내뱉는 위악의 표현이라면, 느린 걸음은 어머니 곁에 머물고 싶은 그리움이다. 어머니는 커튼이 쳐진 창가에서 아들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앞에서는 보이지 않으나 뒤에서 보면 선명하게  보이는 것은 초라한 어깨'다. 내것이 아닌 타자의 어깨'는 늘 마음 속에 오래 남는 법이다.  

 

 

 

 

오늘 우연히 이 스틸 사진'을 발견했다. 편집에서 삭제된 장면 중 하나'다. 장만옥은 왜 천장이 낮은 양조위의 방 창가에 앉아 있(었)을까 ? 나는 영화의 엔딩에서 거울을 보며 머리를 빗는 양조위'를 장국영'이라고 착각한 적이 있다. 세 번째 보았을 때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인물'은 장국영이 아니라 양조위'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질 나쁜 모니터 화질 탓만은 아니었다. 둘은 묘하게 닮았다. 그녀는 여전히  첫사랑인 장국영을 잊지 못한 것이다. 장만옥에게 있어서 양조위는 장국영의 헛것이다. < 첫 > 의 반대말은 < 끝 > 이 아니다. < 헛 > 이다. 그러므로 첫사랑의 반대말은 헛사랑'이다. 나는 그 후로 양조위를 볼 때마다 장국영이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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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의 독설 - 합본개정판, 흔들리는 30대를 위한
김미경 지음 / 21세기북스 / 2012년 10월
평점 :
절판


 

 

 

The King’s Speech by Tom Huveners

 

 

 

 

 

욕설의 진화 : 언니의 독설.

 

 

각하가 국밥을 드실 때 질펀하게 욕을 하던 국밥집 할머니가 광고 모델이 된 적이 있다. 알음알음 들리는 소식으로는 각하와 할머니의 나이 차이는 한 살'이란다. 각하가 보기엔 얼추 비슷한 동년배'요, 서로 늙어가는 처지이니, 이 욕쟁이 할머니는 고향에 두고 온 캄캄한 밤하늘의 패, 경, 옥이었으리라. 그 이전에도 무수한 욕의 대가들이 있었다. 그들은 욕쟁이 할머니'라는 이름으로 장사를 하고는 했다. 서비스 산업의 논리로 보자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욕, 을 할수록 장사는 잘 됐으니 말이다.

 

기업 분석가들은 욕쟁이 할머니의 성공 비결로 가족 마케팅'을 뽑았다. 욕쟁이 할머니의 거침없는 욕을 들으면 그 옛날 시골 엄마 생각이 나는 것이다. 눈물이 찔끔 떨어지고, 마음의 평화도 찔금 얻어가는 것이다. 욕쟁이 할머니란 결국 시골 엄마 마켓팅'인 것이다. 주목해야 될 점은 엄마'가 아니라 시골 엄마'라는 점이다. 도시의 쌀쌀맞은, 신경 쇠약 직전의 교양 있는 도시 엄마'가 아니다. 촌스러운 엄마다. 아가씨 하이힐 소리 같은, 딱부러진 서울 표준어가 아닌 사투리'는 계산적이지 않아서 좋은 것.

 

김미경의 독설은 욕쟁이 할머니를 벤치마킹한다. " 욕 = 독설 " 이다. 욕이란 독한 말'이다. 29살에 강사가 되어 전국 방방곡곡의 무대를 밟아본 배테랑'은 청중(들)이 무엇에 호응하는지를 정확히 꿰뚫고 있다. 21세기 한국인은 노블리스 오블리제'에 공감할 여유가 없다. 노블리스를 경험한 적 없고, 오블리제'도 본 적 없으니 훌륭한 위인전 이야기에 공감할 수는 없다. 그들의 이야기는 구중궁궐 이야기처럼 들린다. 이때 김미경은 구중궁궐 대신 개천'을 끌어들인다. 그리고는 자신은 개천에서 태어났다고 고백한다. 그녀 스스로 말하는 " 증평의 촌년 " 이 바로 " 개천 " 이다. 꾸벅꾸벅 졸던 청중의 눈이 번쩍 떠진다. 뜬구름 잡는 남의 얘기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 그럭저럭 잘난 덕에 성공한 여자인 줄 알았더니 알고 보니 동향이다. 우리... 친구 아닌가유?!

 

김미경의 자기비하'는 우럭처럼 울컥 해서 막 던진 넋두리'가 아니다. 셈이 밝은 강사'가 그런 뜻하지 않은 커밍아웃을 할 리는 없다. 1회 3000만 원의 강사료를 받는 그녀의 대본은 프로'답게 치밀하다. 값어치, 한다 ! < 개천 > 이라는 밑밥은 < 승천 > 이라는 화려한 변신을 보다 드라마틱하게 보이기 위한 장치'다. 사실 신데렐라 드라마는 < 개천에서 승천'까지 > 라는 서사 구조에 충실하다. 그녀는 < 걸어서 하늘까지 > 는 없는 놈들이나 하는 낭만 서사'라고 말할 것이다. 성공한 사람의 스토리'를 화려하게 만드는 것은 현재의 부'가 아니다. 과거의 빈'이다. 과거에 얼마나 피똥 쌌는가, 가 그 사람의 성공을 더욱 빛나게 한다. 그러니깐 김미경의 승천'에 청중이 호감을 보이는 이유는 그녀의 고향이 개천'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말은 증평의 촌년'답게 직설적이다. 그녀는 스스로 자신의 화법을 독설'이라고 정의한다. 그녀는 고상 떠는 멘토의 힐링'과는 다르다. 혜민이 다신의 잘못이 아닙니다, 라고 말할 때 김미경은 등신아, 니가 잘못한 것이여 ! 라고 욕을 한다. 구수한 시골 사투리의 억양을 숨기지 않은 채 말이다. 영락없는 잔소리 많은 시골 엄마 캐릭터'이다. 이 잔소리는 계속 이어진다. 가난한 남편을 만난 이야기, 애 업고 고생한 이야기. 남들보다 2배 고생한 이야기 등등.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에피소드가 파라노마처럼 나열된다. 그런데 나열된 에피소드를 모두 모아서 분석하면 결론은 하나다. 가진 것 없이 태어난 년/놈'은 남들보다 2배 고생해야 한다, 이다. 이게 까칠한 언니가 당신에게 전해주는 성공 노하우'다. 만약에 그 사실을 전혀 몰랐다면 당신은 병신이거나 머저리다.

 

중요한 것은 < 2배의 노력 > 이 아니라 < 2배의 노력을 해야지만 여성이 직장에서 성공할 수 있는 구조 > 다. 이상적인 기업은 1배의 노력만 해도 성공할 수 있는 구조다. 그런데 2배의 에너지를 쏟아야지만 승진을 하고 성공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그 기업이 여성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거나 여성 차별적'이기 때문이다. 김미경은 여성이 성공하지 못한 까닭을 개인의 게으름이 원인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구조적 문제다. 여성 차별적 사회 구조'가 핵심'인 것.

 

그런데 김미경은 무조건 개인이 열심히 안 한 죄'라고 말한다. 앞뒤가 바뀐 것이다. 생략해도 될 낱말에 밑줄을 긋고는 " 돼지꼬리 땡땡 " 붙이며 강조를 하는 것이다. 김미경이 말하는 2배의 노력 중 1배의 노력은 국가 복지 케어'의 몫이다. 그런데 그것을 국가 복지 시스템이 받쳐주지 않기에 개인이 떠맡는 꼴이다. 이제 대한민국도 후진국은 아니지 않은가 ? G20의 회원국이라면 당연히 갖추어야 할 복지'다. 김미경이 진정한 멘토라면 그 복지의 몫을 여성이 맡아야 하는 힘든 현실'을 지적해야 옳다. 그래야 좋은 언니'이다. 내가 보기엔 그녀의 착각은 인문학에 대한 지식의 부족 탓이다. 그녀는 인문학을 무엇에 쓰는 물건이고?! 라고 물었지만 그에 대한 해답은 명확하다. 인문학은 자기계발서따위의 책이 사실은 아무것도 없는 빈 깡통 계좌'라는 것을 알게 해주는 물건이다.  

 

     

 

 

 

> 알라딘 검색창에 " 흔들 " 이라고 치면 엄청난 분량이 쏟아진다. 수백 권은 되는 모양이다. 제목이나 부제에 " 흔들 " 이라는 이름이 들어간 책이 말이다. 대충 몇 가지만 뽑아보자. < 상처받고 흔들리는 당신을 위한... > < 흔들리지 않고 의지가... > < 당신의 사랑은 흔들리고 있다 > < 평생 흔들리지 않을 자신감을 찾... > < 흔들리는 직장인을 위한... > < 흔들리는 나에게... > < 흔들림 또한 ... > 이와 같은 방식으로 " 아프 " 와 " 미치, 미쳐 " 를 쳐보면 이 또한 수백 권이 쏟아진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독자들이 아프고, 흔들리고, 미친 것일까 ?  이 정도면 대한민국은 종합병원이다. 김미경의 < 언니의 독설 > 이란 책의 부제도 < 흔들리는 30대를 위한 >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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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사용설명서를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는 사람은 꼼꼼한 사람이다. 반면 내용을 취사 선택해서 부분만 읽는 사람은 성격이 급한 사람이다. 마지막으로 아예 읽지 않는 사람은 게으른 사람이다. 내 경우는 제품사용설명서'를 읽어본 적이 없는 부류에 속한다. 나는 그것을 아이스크림 " 붕어 사만코 포장지 " 취급을 한다. 뜯으면 바로 버린다. 이렇듯 사용 설명서를 읽어본 적이 없으니 제품의 기능이 무엇인지를 모른다. 그래서 나는 제품의 기능 10가지 중 2,3개만 사용한다. 나머지는 몰라서 사용을 못한다. 이런 내가 답답한지 주위 사람들이 일일이 가르쳐준다. 그러나 불만은 전혀 없다. 폰뱅킹을 할 줄 모른다고 불편한 건 없다. 내가 휴대폰을 고를 때의 기준은 첫째가 기능이 없는 것이다. 통화와 문자 그리고 사진 이외'에는 다른 용도로 써 본 적이 없다. 디지털 노마드에서 추방당한 아날로그적 쪼다새끼'라고 욕하지 마라. 그 옛날, 칼 융 선생님께서 인간의 유형을 16가지로 분류하였나니 내 경우는 INTP 유형이었다. 그는 나 같은 유형을 " 제품 사용 설명서'는 절대 읽지 않을 놈 " 으로 이미 규정했다. 농담이 아니라 INTP형은 제품 사용 설명서'를 잘 읽지 않는다. 허진호의 98년도 영화 < 8월의 크리스마스 > 를 보면 나와 비슷한 캐릭터'가 나온다. 한석규'가 아니다. 한석규 아버지로 나오는 신구'다. 그는 제품사용설명서의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즐거운 편지.

 

 

제품사용설명서'를 읽는 것만큼 나를 미치게 하는 것도 없다. " ~ 오 " 로 끝나는, 묘한 명령체'가 나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마치 영혼이 없는 좀비와 소통을 하는 느낌이다. 제품사용설명서'에는 문장과 문체가 없다. 그것은 온통 삿대질 이모티콘

<>: 삿대질 이모티콘.

 

들이  문자로 둔갑해서는 문자인 척 하는 것이다.   A를 누른 후 B를 올리시오 ! C를 클릭한 후 복사한 고유번호를 입력하시오 ! 저리 가시오 ! 이리 오시오 ! 아, 하시오. 오, 하시오. 아흥아흥 하시오 ! 질문은 내가 하오. 묻는 말에나 답변 하시오 ! 제품 설명문의 세계는 온통 삿대질'이다. 그것은 손가락으로 이루어진 지시문'이다. 영화 < 8월의 크리스마스 > 에서의 사진사 정원은 아버지에게 청기 올려, 백기 내려, 백기 올리지 말고 청기 내리지 마, 라고 할 수는 없다. 더군다나 아버지는 눈이 캄캄해서 글을 읽을 수가 없다. 그래서 고육지책으로 생각해낸 것이 바로 문자 대신 이미지'로 제품사용설명서'를 만드는 것으로 " 사진이라는 도구를 사용한 필사 " 이다. 그러므로 그 또한 필경사'다.

 

필경사이며 사진사인 정원(한석규)'은 나와 같은 INTP 유형'을 위해서 제품사용설명서'를 새롭게 재해석한다. 그것은 일종의 메타-언어'다. 아마 인류 역사상 최초로 " 제품사용설명서(원본) " 를 사진(사본) 으로 재해석한 전무후무한 방식의 < 비디오 아트 > 행위로 남지 않을까 ? 사실 이 세상 모든 창작물은 원본의 사본'이다. 누군가의 것을 베낀 것에 불과하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는 피에르 메나르가 그대로 필사하고, 바틀비'는 필사하다가 미친다. 오리지날은 바닥이 난 지 이미 오래. 그래서 니체는 미래를 " 패로디'가 시작된다 ! " 로 규정했다. 19세기에 가까웠던 20세기 인간인 니체'는 확실히 21세기의 눈을 가진 천재'다.

 

카메라는 만연필이다. 그러므로 사진은 문장'이다. 연필이 문자로 이미지'를 기록한다면, 사진기는 이미지로 문자를 대체한다. 때론 사진 한 장'은 책 한 권의 내용보다 풍부할 때가 있다. 전쟁 보도 사진'은 그 정점에 다다른 영역이다. 백 마디 말보다 한 장의 사진이 대중에게 주는 메시지는 보다 더 강렬하다.

 

허진호 감독은 박찬욱과는 정반대의 연출 스타일'을 갖췄다. 박찬욱이 상징을 중요시한다면 허진호는 상징을 배제하는 쪽으로 연출한다. 전자가 칼칼한 매운탕이라면 후자는 맑은 탕'이다. 그는 카메라의 움직임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롱숏'를 자제한다.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것이다. 사실 자신의 작품이 예술 영화'처럼 보이게 하려는 얄팍한 야심을 가진 이'는 롱숏을 자주 활용한다. 하지만 허진호는 롱숏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롱숏 다음에는 필연적으로 미디엄 숏과 풀숏이 따르기 때문에 정적인 느낌이 깨지기에 그렇다. 그래서 그는 고집스럽게 미디엄 쇼트'로 간다. 현명한 선택이었다. 사진사에게 가장 어울리는 프레임은 미디엄샷이다. 증명사진은 대부분 미디엄숏이니깐 말이다.

 

허진호 감독의 고백에 의하면 이 영화의 원래 제목은 < 즐거운 편지 > 였다고 한다. 황동규의 시'를 무척 좋아해서 외우고 다녔다고.......  그러니깐 이 영화 속 사진은 곧 LETTER'의 은유이다. ( 이 단어는 편지와 함께 문자'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 그가 남긴 것은 사진으로 쓰여진 필름 현상기 제품 사용 설명서'이다. 황동규 시집 < 三南에 내리는 눈 > 에 수록된 " 즐거운 편지 " 로 끝을 맺겠다. 시인은 " 밤이 들면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한다 " 고 말한다. 눈 내리는 크리스마스의 깊은 밤이었나 보다.

 

 

 

 

 

 

즐거운 편지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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