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록키 호러 픽쳐 쇼 > 라는 컬트 영화를 300번 넘게 감상하고 나서 그 영화에 대한 책을 쓴 사람이 있다. ( 컬트라는 것의 정의 중 하나가 반복 관람이기는 하지만 300번이라면 도를 넘은 것이다. ) 그는 3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오로지 록키 호러 픽쳐 쇼'에 대해서만 썼다고 한다. 1회 감상에 1페이지 분량의 글감이 나온 셈이다. 만약에, 그가 500번 넘게 봤다면 5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의 책을 쓸 수 있을까 ? 우리라면 엄두도 못낼 것이다. 1번 볼 때마다 코 파고, 1페이지'를 작성할 때마다 피, 똥, 싼, 다. 하지만 그 록키 호러 열혈 무명씨'라면 가능할 것이다. 우리는 < 록키 호러 픽쳐 쇼 > 를 볼 때마다 " 반복 " 을 경험하지만 그는 볼 때마다 " 차이 " 를 경험한다. 이 차이는 다시 보기(반복)의 결과이다. 300번을 넘게 본 그는 볼 때마다 즐거워서 비명을 지르고,  3번째 보는 우리는 지루해서 댄스홀에서 지루박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다. 이처럼 차이'를 제대로 볼 줄 아는 사람들은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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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키 호러 픽쳐 쇼.

 

 


 

 

 

 

 

 

 

 

 

 

 

 

 

필경사 : 글씨 쓰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

 

 

필경사 : 글(소설)을 쓰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을 소설가라고 말하고, 글씨 쓰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을 필경사'라고 한다. 아주 오랜 옛날 도서관 사서는 필경사였다. 그들은 손으로 직접 필사를 해서 책을 만들었다. 필사란 원본을 그대로 다시 쓰는 행위이다. 그래서 누가 책을 훔쳐서 책이 사라지면 " 다시 " 필사'를 해야 했다. 성경책 한 번 써본 사람들은 다들 알리라. 이만저만 고된 일이 아니다. 책을 도둑 맞는다는 것은 그만큼 일감이 늘어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래서 도서관 사서들은 책도둑을 혐오했다고 한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무시무시한 경고문을 적었다. " 야, 시부랄 새끼야. 책 훔쳐가지 마라, 잉 ? 만약에 이 책 훔치면 니 애비는 8월의 물렁 좆이다. 알긋냐 ? 뜨거운 팬 위에 튀겨 죽을 놈아. 훔지지 마라, 잉 ? 느그들,  글씨 쓰다가 팔 빠져봤냐 ? " 농담이 아니라 진짜 이런 무시무시한 경고문을 도서관 곳곳에 써넣고는 했다. 당시의 책은 매우 비싼 물건이어서 도서관에서는 책을 쇠사슬에 묶어두기도 했다고.

 

 

가장 흔한 공상은 미래에서 과거로 돌아간 시간여행자'에 대한 공상이다. 우리는 과거로의 시간 여행'에 가져갈 소품에 대해 긴 이야기를 할 것이다. 132회 로또 당첨 번호, 월간 달려라 경주마, 1997년도 수능 시험 문제 해답지 등등. 그런데 꼭 타임머신이 꼭 1997년 어느 시점에서 내려준다는 법칙이라도 있나 ?  만약에 내가 시간 여행자'라면 스티븐 킹의 소설 하나를 원고지에 필사해서 과거로 돌아가겠다. 혹은 해리포터'는 어떤가 ? 원고를 출판사에 넘기고 느긋하게 기다리겠다. 소설가들에게 있어서 시간 여행이라는 서사만큼 매혹적인 이야기도 없다. 그래서 스티븐 킹'도 < 11/22/63 > 에서 시간 여행을 다룬다. 소설 속 주인공은 임무는 63년 11월 22일로 돌아가 케네디 암살을 저지하는 것이다. 단 시간 여행 문이 열리는 공간은 1958년 9월 9일 오전 11시 58분의 특정 거리'이다. 그러니깐, 소설 속 시간 여행자'가 총 5번의 시간 여행을 했다면 1958년 9월 9일의 그 거리 상황을 다섯 번 마주치는 것이 된다. 결국 시간 여행자'는 그들을 다섯 번이나 만나지만 그들은 항상 시간여행자'를 처음 본다. ( 킹의 모든 소설이 그렇듯이 이 소설도 곧 영화화될 것이다. ) 씐난다.

 

흥미진진하다. 우리는 이미 과거 속 인물의 동선과 대사가 다시 반복될 것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과거'는 완벽하게 다시 반복되지는 않는다. 뭔가가 약간씩 달라져 있는 것이다. 그것은 시간여행자'가 과거의 시간에 개입을 해서 생긴 일 때문(이라고 말한다). 반복이 차이'를 만드는 것이다. 여기서 관객을 독자'로 바꿔보자. 시간 여행자가 특정한 장소'를 재방문하는 행위'는 곧 독자가 책을 다시 읽는 행위'와 비슷하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결국 다시 읽기'는 첫 번째 읽기에서 놓친 것들, 달라진 것들을 발견해서 다시 정리를 하는 행위다. 다시 보기/읽기'는 비평의 첫 번째 과정이다. 프랑스와 트뤼포는 영화를 사랑하는 첫 번째 방법은 봤던 영화를 " 다시" 보는 것'에서 출발한다고 말했고, 소설가 신경숙도 자신의 습작 시절'을 회고하면서 가장 큰 문학 공부 방식은 필사'라고 말했다. 이 필사의 방식은 비단 작가지망생의 절차탁마'는 아니다. 책을 읽는 독자도 밑줄이라는 이름의 필사'를 한다. 밑줄을 긋는다는 행위는 일직선으로 글씨는 쓰는 일이다. 

 

사랑의 블랙홀 : 2월 1일 다음은 2월 2일이다. 2월 2일 다음은 2월 2일이다 ?!  2월 2일 다음도 2월 2일이다. 그리고 2월 2일 다음의, 다음의, 다음날도 2월2일이다. 영화 <  사랑의 블랙홀 > 의 주인공은   그라운드호그데이인 2월 2일'이 날마다 반복되는 나날을 경험한다. 알람시계를 부수고 잠을 자도 다음날 아침 6시면 시계는 다시 멀쩡한 상태가 되어서 8월의 매미처럼 열심히 운다. 눈이 오면 내 집 앞만 쓸 것 같은, 평소 차갑고 냉정하던, 남자는 마술에 걸린 2월 2일이 계속 되자 어느새 다정하고 속 깊은 남자로 변해있다. 앞으로 벌어질 모든 일을 알고 있는 그는  그 능력으로 이웃 사람들을 돕는다. 2월 2일은 날마다 반복되지만 상황은 조금씩 차이가 난다. 이 반복 서사'는 비평적 책 읽기'와 겹친다. 주인공은 평면적인 종이 텍스트 대신 3D 가상 텍스트'를 경험한다. 그가 다시 2월 2일을 경험한다는 것은 책을 2번 읽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2월2일의 반복에서 그는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을 깨닫게 된다. 반복은 차이를 만들고, 차이는 결국 비평/ 깨달음'을 얻는다.

http://blog.aladin.co.kr/749915104/6248986

 

어쩌면 세상의 모든 창작자'는 필경사인지도 모른다. 이처럼 " 다시 보기/읽기/쓰기/일하기" 는 쓸모없는, 소모적인 태도'가 아니다. 그것은 생산적 행위'다. 첫 번째 읽기가 독서라면, 두 번째 읽기 이후'부터는 비평의 영역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카뮈의 < 시지프 신화 > 는 새롭게 읽힌다. 그동안 우리는 시지프'를 지나치게 실존적 허무와 부조리적 인간'에 방점을 찍어 그를 맬랑꼴리한 인간형'으로 만들었지만, 곰곰 생각하면 시지프는 필경사요, 저자이며, 비평가의 운명을 가진 자이다. 그는 다시 산을 오르는 행위를 통해서 첫 번째 노동과 두 번째 노동 사이에서의 차이'를 읽는다. 그리고 두 번째 노동과 세 번째 노동 사이에서 다시 차이'를 발견한다.

 

" 필경사 " 라는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필경사 하면 떠오르는 인물은 단연 허먼 멜빌의 단편 < 필경사 바틀비 > 다.  바틀비'는 어느 순간부터 일을 거부한다. 그는 오로지 일 하기 싫다는 소리만 한다. " 그렇게 안 하겠습니다. " 결국 직장에서 쫒겨난 바틀비'는 모든 것을 거부한 채 구치소에서 굶어죽는다. 아, 불쌍한 바틀비 ! <  필경사 바틀비 > 라는 제목을 처음 접한 곳은 들뢰즈의 < 비평과 진단 > 에서 였다. 필경사라는 말도, 바틀비라는 말도 무척 생경스러워서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는데, 보르헤스 또한 이 단편의 서문을 썼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두 거물이 모두 이 짧은 단편에 대한 글을 쓴 것이다. 아이구야, 이 무시무시한 걸작을 안 읽어볼 수 없는 노릇 ! 필경사 바틀비'의 직업은 다시 쓰기와 다시 읽기다. 그는 두 사본을 꼼꼼히 대조하고, 다시 검토하고, 소리내어 읽는다. 그는 이 과정에서 그만 머리가 핑 돌아버린다. 그 후 계속 안 하겠다는 소리만 한다. 그의 불복종을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소설 속 1인칭 화자도, 독자도 그게 왜 그런 태도를 보이는지 아무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바틀비는 변했다는 점이다.

 

보르헤스는 이 바틀비 캐릭터를 눈여겨보았던 듯싶다. 그는 바틀비를 녹여서 피에르 메나르'를 창조한다. 삐에르 메나르'는 보르헤스 단편에 나오는 인물로 세르반테스의 < 돈키호테 >의 몇몇 장을 마침표 하나, 쉼표 하나까지 그대로 다시 쓴다.  결국 피에르 메나르는 세르반테스의 < 돈키호테 >를 능가하는 작품을 선보인다. 우리가 보기엔 명백한 표절이지만 보르헤스'는 다시 쓰기'를 창조적 행위'로 보았다. 사실 바틀비의 다시 읽기/쓰기'는 실패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 단편을 위대하게 만든 이유는 바틀비의 중단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다시 읽기에 성공한 자다.  삐에르 메나르도 다르지 않다. 이처럼 보르헤스의 세계를 관통하는 것은 " 필경의 풍경 " 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옛날에는 도서관 사서가 필경사 역할을 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보르헤스야말로 가장 위대한 필경사'였다는 점이다. 보르헤스'는 서른 중반이 넘어서 도서관 사서가 되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보르헤스는 캄캄하며 축축한 지하 서고'에서 冊만 읽었다고 한다. 보르헤스가 보기에는 캄캄하고 축축한 지하 서고는 여성의 검고 촉촉한 동굴의 비유였다. 보르헤스에게는 이곳이 쾌락의 원천이었다. 사람들은 엘리트 집안 출신의 보르헤스'가 그깟 도서관 사서'에 만족하고 있다면서 조롱했지만 그는 그저 책을 마음껏 읽을 수 있다는 사실에 만족했다. 그는 시력을 점점 상실하고 있었기에 필사적으로 책을 읽었다. 사실 가장 위대한 작가는 섹스피어가 아니라 보르헤스, 세르반테스, 허먼 멜빌'이다.  섹스피어가 그냥 신라면이라면 그들은  신라면 블랙'이요, 섹스피어가 스필버그라면 그들은 오손웰즈'였다. 전자가 < 딴따라 > 라면 후자는 < 난 달라 ! > 였다. 

 

필경사 피에르 메나르는 돈키호테를 다시 썼지만, 필경사 보르헤스는 20세기 문학의 역사를 다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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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패스트푸드점은 고객이 머무는 시간을 20분으로 제한한다는 메모를 붙여놓기까지 한다. 대체로 패스트푸드점의 구조는 고객이 먹으면서 미적거릴 필요도, 그러고 싶지도 않게 되어 있다... 고객이 20분 이상 앉아 있기에는 불편한 의자를 개발한 패스트푸드점도 있다. 이것은 패스트푸드점 실내 장식에 사용한 색상효과에 비길 만하다. 색상 효과의 요점은 긴장 완화가 아니라 고객을 빨리 내쫒는 것이다. 이 점을 두고 색상을 조심스럽게 선택한다. 로고의 주황색고 노란색부터 유니폼의 적갈색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어긋난다. 이러한 색상은 사람들이 편안한 마음으로 오래 머무르지 못하게 하려고 동원된 것이다.

 

- 맥도날드 맥도날드化, 조지 리처.

 

 

 

 

미국의 공장은 망했다. 돈벌이는 주로 영화와 전쟁 그리고 금융업의 돈놀이'로 미국 산업'을 지탱하고 있다. 미국의 2차 산업'을 부실하게 만든 주범은 월마트와 맥도날드 시스템'이었다. 메이드 인 유에스에이 공장 상품은 월마트를 꽉 채운 메이드 인 차이나'와의 가격 경쟁에서 밀려서 경쟁력을 잃었고, 맥도날드는 숙련노동자의 일자리를 파트타이머'들이 채우도록 하는 시스템을 발전시켰다. 요리사가 하던 요리는 이제 스무살 젊은 친구가 1시간이면 터득한다. 본사에서 내려온 닭다리를 97도에서 3분 간 튀긴 후 꺼내시오 ! 라는 명령에 충실하기만 하면 되니깐 말이다. 조지 리처'는 이 책에서 < 자본주의 합리성 > 이라는 신화'가 과연 타당한가를 묻는다.

 

그는 맥도날드의 합리성을 < 합리성의 불합리성 > 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맥도날드 시스템은 맥도날드'에게만 합리적인 것이지, 소비자에게는 불합리하다. 소비자인 우리는 돈을 내고 종업원이 해야 할 일으 한다. 음식을 직접 가져오고, 다 먹고 나면 쓰레기를 분리하여 각각의 통에 버리고, 빈 식판은 원래 자리에 다시 갔다 놓는다. 돈을 내면서 남의 가게에서 종업원이 되는 것이다. 오히려 맥도날드에서 소비자에게 품삯을 줘야 하는 실정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런 황당한 일을 하는 것일까 ? 맥도날드에서의 일련의 일처리는 하나의 문화적 습속으로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신속한 처리는 곧 나는 촌년이 아니라 세련된 도시 여자'다, 라는 암암리의 표현이 된다.

 

맥도날드는 이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 막대한 광고비를 지출한다. 이제 서비스 산업은 대부부 맥도날드화'가 되었다.  현금지급기'는 은행 직원이 해야 될 일을 소비자'가 직접 하도록 만든다. 설상가상 수수료라는 돈을 내고 일을 한다. 샐러드바'도 다르지 않다.

 

 

 


 

 

 

 

 

 

 

 

 

 

고갱은 타히티 섬으로 떠났습니다.  

 

 

옛날에는 개나 소나 극장을 운영할 수 있었다. 작은 댄스홀 정도의 크기면 극장 상영 허가가 떨어졌으므로 시내'에만 극장이 서너 개'는 있었다. 평일 오후에 가 보면 가관도 아니다. 축 늘어진 추리닝에 쓰리빠 끌고 오는 백수들과 건달들 그리고 데이트 비용이 아까워서 돈 천 원에 4시간은 때우는 극장을 찾는 실용파 가난한 연인들이 찾아오고는 했다. 자리 배석이 없는 것은 기본이고 상영 중 입장은 자유였다. 이런 표현이 심금을 울릴지는 모르겠지만 " 동네 그지깽깽이 " 는 다 모였다. 그런 곳이 바로 동네 동시 상영관, 3류 극장의 풍경이었으니. 어쩔 어쩔 ! 말 그대로 넘버 쓰리가 찾는 곳이 3류 극장이었다. 나 또한 동네 그지깽깽이'이므로 동네 극장은 나의 단골이었다.

 

더군다나 나는 " 삼복 중학교 1학년 영화 열혈 오타구 돌격대 회장 " 이었기에 일 주일에 한 번은 프로그램을 선정하여 아이들을 이끌고 극장을 순례할 의무가 있었다. " 자, 자자자. 삼거리극장과 사거리극장의 이번 주 메인 상영은 둘 다  " 터미네이터2 " 야. 하지만 삼거리는 동시상영작이 형편없군. [ 뼈와 살이 타는 밤 ]보다는 [ 살과 살이 붙는 밤 ] 이 더 좋겠어.  뼈와 살이 타는 밤'의 주연 배우는 유감스럽게도 a 컵이라구. 오늘은 사거리극장으로 고,고,고 ! " 이런 식이었다. 우리는 일단 영화 포스터가 붙은 벽이나 분식점들을 돌아다니면서 가게 주인으로부터 영화초대권을 싼 값에 사들였다. 극장은 영화 포스터를 가게 안이나 담에 붙여주는 조건으로 초대권을 그들에게 10장씩 주었다. 우리는 그 초대권을 사는 것이다.

 

자주 드나들다 보니깐 어느새 극장 돌아가는 꼴이 대충 보였다. 오호라 ! 그렇군. 금요일 6회 마지막 회'가 시작되면 우리들은 영사실에 있는 영사기사 들으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 아니 젖꼭지도 보여주지 않는 영화가 무슨 에로입니까 ? 관객의 애로사항은 무시해도 좋습니까 ? " 고함소리에 화들짝 놀란 늙은 영사기사'는 어찌된 영문인가 하고 극장 안을 살펴보고는 큰 소리'로 외친다. " 마침 토요일에 새롭게 선보이는 [ 젖꼭지는 물론이고 그곳도 ] 라는 따끈한 영화가 있는데 대신 보시렵니까 ? 보고 나면 홍보 부탁드려요 ! " 하며 토요일에 개봉할 영화를 미리 틀어주는 것이다. 물론 이 영화에서도 젖꼭지는 보여주지 않았다. 그래도 최신작을 미리 감상할 수 있다는 사실이 어디인가 ? 다음 날, 학교에 가면 우리 일행은 영화 속 장면을 실감나게 복기했다.

 

" 남자가 여자의 젖가슴을 움켜쥐지. 그럴 때마다 여자는 아흥, 아흥 한단 말이야. 이봐, 자네가 흉내내 보게 ? 그렇지. 흐흐흐흥, 흐흐흐흥. 이런 소리라네. 그리고는 여자의 엉덩이를 냅다 손바닥으로 후려치는 것이 아니겠는가 ? 오호 ! 그래, 그래. 말로만 듣던 그 자세라네. 후배위지. 음... 그러니깐... 후배위란. 그래 말 자세. 자네들 말이 하는 거 봤어 ? 남, 남남남남자가 여자의 엉,엉엉덩이를 벗기고는...... " 반 아이들은 이쯤에서 거의 반 죽음 상태다. 옛날 같았으면 이몽룡처럼 " 이리 오너라, 업고 놀자. 얼쑤 " 하면 정액을 방사했을 텐데, 성욕이 금기된 아이들은 이렇게 내가 말해주는 성애 장면에도 미친다. 불쌍한 것들.

 

 

 

 오손 웰즈의 < 시민케인 > 은 걸작이지만 < 상하이...  > 와 < 악의 손길 > 그리고 < 심판 > 은 < 시민케인 > 보다 더 걸작이다. 결론은 오손 웰즈는 천재다.

 

 

겨울 방학이 되면 나는 도시락 두 개'를 싸 가지고는 도서관이 아닌 시골 변두리 극장으로 향했다. 이 동네에는 서로 가까운 거리 안에 커다란 극장이 3개나 있어서 A 극장에서 1,2회를, B 극장에서 3,4회를, 그리고 마지막으로 C 극장으로 달려가 5회와 마지막 회'를 감상하고는 막차를 타고 돌아오고는 했다. 일주일'에 한 번은 늘 있는 여행이었다. 끼니 해결은 물론 극장 안에서 도시락을 까먹는 것으로 해결했다. 당시 삼거리 극장에는 연탄 난로'로 난방을 해서 난로 뚜껑 위에 양철 도시락을 놓고 영화를 보면 도시락 속의 밥이 자글자글 끓고는 했다. 잘 데워진 계란 후라이'를 극장에서 한 입 베어무는 맛이란 ! 더군다나 헐리우드 액션 영화를 보며 먹는 도시락은 정말 꿀맛이었다. 하지만 모두 좋은 것은 아니었다.

 

동네 양아치 형님들이 오셔서는 난로 속에다가 가스 라이터'를 버리고는 냅다 도망치는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관객은 갑자기 펑 터지는 난로 뚜껑에 기겁을 해서 혼비백산 구석진 자리로 옮기는 것이다. 그 모습을 키득키득거리며 보고 있던 형님들은 관객들이 무서워서 도망간 난로 옆 명당 자리'를 차지하고는 오징어며 밤, 고구마를 구워먹었다. 소설 쓰냐고 ? 아니다. 정말 그랬다. 지금도 생각나는 것은 시뻘건 연탄이다. 영화 중간 중간에 연탄을 갈았는데 어두컴컴한 극장 안에서 보이는 것은 둥둥 떠다니는 뻘건 연탄이었다. 그러면 우리는 야유를 보내고는 했다. " 아저씨 ! 연탄 가스 중독인 거 같아요. 머리가 아픔니다아아아앙. " 그리고 실제로도 영화를 보다가 연탄 중독으로 영화 도중 밖으로 나가 오바이트'를 한 적도 있다. 그리 먼 이야기도 아니다. 1990년 초중반까지 실제로있었던  시골 변두리 극장 풍경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극장 풍경은 cgv라는 멀티플랙스가 극장 문화를 주도적으로 선도하면서 하루아침에 바뀌기 시작한다. 괴물처럼 변하기 시작했다. " 안녕하십니까, 고갱님 ! " 이라는 새로운 극장 문화'가 선보인 것이다. 고갱은 타이티 섬에 가야 만날 수 있는데 자꾸 나에게 고갱'이라고 하니 남세스러웠다. 극장도 맥도날드化가 되어버린 것이다. 옛날 극장을 차지했던 매점 아줌마와 극장 간판 아저씨, 그리고 극장 관리인은 온데간데없고 젊은 아르바이트생'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젊은 극장 스텝들은 하루종일 서서 고갱'을 목이 터져라 외쳤다. 항상 웃는 얼굴이어지만 피곤함이 역력했다. 극장 본사에서 발령 받고 온 점장은 사무실의 씨씨티븨'를 통해 일일이 스텝을 통제했다. 조그마한 실수라도 하는 날이면 당장 무전기를 통해 쌍욕이 오갔다. " 야, 개새끼야... 티켓팅 제대로 안 할래 !!!!! " 무전기와 연결된 이어폰으로 그 소리를 들은 스텝은 화가 잔뜩 나지만 그래도 방긋 웃으며 " 어서 오십시요, 고갱님 !! "

 

그 전에는 영화를 다시 보고 싶으면 다음 회'에도 다시 볼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다. 영화가 끝나면 관객은 소비자로서의 왕 노릇도 끝난다. 스텝은 점장이 통제하고, 관객은 스텝이 통제한다. 그들은 양치기가 되어서 양이 된 관객을 내쫒는다. 이것이 바로 멀티플렉스의 효율성'이다. 원가 100원인 팝콘은 7000원에 팔린다. 여기에 나트륨을 듬뿍 첨가해서 목이 마르도록 유도한다. 목이 마른 당신은 영문도 모른 채 " 콜라 주세욧 ! " 이 모든 것은 극장 체인 본사가 보기에는 합리적이고 효율적이다. 하지만 소비자 입장에서 보면 불합리하다. 문제는 그 사실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극장문을 나서면 우리는 콜라와 나트륨에 중독되어서 입에서는 트림이 나오고 똥구멍에서는 방구가 쉴새없이 나온다.    

 

 

 

 

 

 

 

▶ 이 영화, 정말 좋다. 구로자와 아끼라의 최고 걸작은 < 이끼루 > 인지도 모른다.

 

 

난로 옆에서 연탄 가스를 마시며 도시락을 까먹던 나는 도저히 이 시스템에 적응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이것이 나의 한계였는지도 모른다. 지금도 나는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보지만 편하지는 않다, 처음 보는 사람이 자꾸 웃으면서 안녕하십니까, 고갱님 ! 이라고 하니미칠 노릇이다. 이제 나는 극장에서 김치가 담긴 병 뚜껑을 열어서 총각 무를 베어물지도 않고, 밤을 굽지도 않는다, 문어를 굽지도 않고, 동네 형들이 난로 속에 집어넣은 라이터가 언제 터질까 초조해하지도 않는다. 항온 시스템은 최적의 환경을 제공해서 보는 이가 영화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도통 영화에 집중할 수가 없다. 싸구려 노스텔지어인가 ? 그럴 수도 있다. 그리고 아닐 수도 있다. 내가 사랑한 것은 영화가 아니라 낡은 극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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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3-03-28 1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은 주로 목요일에 영화를 개봉하지만 옛날에는 토요개봉'이 철저하게 지켜졌다.
그래서 상영 중 사람이 제일 없을 때가 금요일이다.
더군다나 6회 마지막 상영은 거의 몇 사람이 안 되었다.
당시 나는 영사기사 아저씨와 친분이 있어서 기사 아저씨'는 토요일 개봉할 영화를 관객의 동의 하에 틀어주고는 했다.
마지막 상영 영화는 대부분 한국 동시상영용 영화여서 재미가 없었기에
토요일에 개봉하는 메인 작품을 틀어준다고 하니 마다할 일이 없었다.
서로 서로 좋은 거다. 금요일 마지막 회에 영화를 틀어주는 이유는 또 있다.
어차피 영사사고를 막기 위해서 영화를 미리 점검해야 한다. 그래서 금요일 6회 마지막 상영 시간에는 종종
토요일 개봉 영화를 보고는 했다.

노이에자이트 2013-03-30 2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손 웰즈의 가장 강렬한 모습은 영화 '제3의 사나이'에서였습니다.이 영화와 그레이엄 그린의 원작을 번갈아 읽었죠.

곰곰생각하는발 2013-03-30 20:46   좋아요 0 | URL
오손 웰즈는 어디에서나 빛을 발했어요.
훌륭한 감독이기도 하고 위대한 배우이기도 하고 말이ㅛ. 전 악의 손길에 나오는 그 웰즈가 압권이었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13-03-30 2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우리나라 영화에서 최초로 여배우의 유두가 나오는 영화의 제목과 연도를 기억하시는지요?

곰곰생각하는발 2013-03-30 20:47   좋아요 0 | URL
헤헤헤..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네요.... ㅎㅎㅎㅎ
 

 

 

 

 

 

 

 

 

 

 

 

 

 

만약에 내가 여의도 대로에서 묻지 마 칼부림 범죄'를 저지른다면 조선일보는 제일 먼저 이 글'을 기삿거리에 인용할 것이 뻔하다. 곰곰생각하는발, 평소 잔인한 영화 자주 봐... 웨스 크레이븐의 < 왼편 마지막 집 > 에서 시체 훼손 장면을 보며 환상 키운 듯 !  이왕 인용할 거라면 다음과 같은 문장도 꼭 인용해 주길 바란다. " 나는 평소 아침마다 배달되는 조선일보'를 읽지도 않은 채 그 신문종이로 똥을 닦고는 했다. "

 

P.S 조선일보는 이런 기사 내용을 쓸 것이다 : 곰곰생각하는발은 평소 잔인한 영화를 자주 보았다. 웨스 크레이븐의 왼편 마지막 집에서의 그 유명한 시체 훼손 장면을 보며 환상을 키운 듯하다. 또한 조선일보'를 혐오한 점으로 보아 극렬 좌익 세력에 세뇌가 된 것으로 보인다.

 

 


 

 

 

 

 

 

 

 

Freaks : 애타게 공포 영화를 찾아서......

 

나는 중학생 때부터 세계 3대 영화제에서 공인한 걸작들만 보러다녔다. 영화를 보기 위해서 시네마떼끄는 물론이고 불란스 문화원도 몇 번 간 적이 있다. 아, 불란서 하니깐 조경란이 생각난다. 불란서'스러운 조,경,란 ! 그래서 친구들이 3류 동시 상영 극장에서 하는 공포 영화‘나 에로 영화를 보러 가자고 할 때마다 속으로 코 팠다. 

 

" 그 영화 정말 무섭대 ! 학동이는 그거 보고 오줌까지 지렸다고 하던걸. 시바, 존나 무섭나 봐. 더군다나 영화 < 반지하 제왕 씨' > 이라는 영화는 주인공 제왕이가 서울 여자 다 따먹는 얘기래.  젖꼭지는 물론이고 여배우 털도 보여준대. 강식이 형이 말하던데 세상의 모든 거시기 털'은 다 곱슬이라네. 너 자지에 털 났냐 ? 났으면 한 번 보여 줘. 나도 다음에 나면 보여줄게. 응, 으으응? 이거 좆나 환상적인 조합 아니냐. 당장 야자 까고 보자 ! " 그럴 때마다 나는 작품의 질과 취향의 저급함’을 들어 거부 의사‘를 분명히 했다. " 아이콩, 므므므므므 무서워라. 보다가 똥도 쌀 놈들. 꺼져, 병신들아 ! 가서 엄마 젖이나 더 빨고 와. 쮸쮸바나 빨아랏 ! " 당시 나는 적어도 아카데미 수상작 정도는 되어야 내 수준에 맞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착각은 자유다.


동네 동무들이 할로윈따위의 공포영화에 열광할 때, 나는 점잖게 프란시스 코폴라 감독의 < 지옥의묵시록 > 감독판'을 혼자 보고 있었다. 말론 브란도’가 말한 “ horror ... horror! " 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하지만 속내’는 그렇지 않았다. < 할로윈 > 과 < 나이트메어 > 시리즈‘를 미치게 좋아했고, 무릎과 무릎 사이를 보고 싶었으며, 겨드랑이와 겨드랑이 사이’에 있는 물컹한 것을 한 번 만져보는 것이 당시의 소원이었다. 뽀송뽀송한 우윳빛 젖가슴이란. 당시 나는 커다란 도화지‘에 영화 별점 체크카드’를 만들어서 벽에 붙이고는 그날 그날의 영화와 별 스티커 점수를 기록하였는데, 당시의 공포 영화‘는 아무리 재미있어도 별 세 개 이상은 무리였고, 반면에 아카데미상 출신 영화들은 지루해서 잠을 자는 한이 있어도 최소 별 세 개’ 이상이었다. 사실 입 주변에 솜털이 4월의 새순처럼 듬성듬성 자라던 아이‘가 < 지옥의묵시록 > 를 이해한다는 것은 파리가 경제를 이야기하는 뉴스 스튜디오에서 진지하게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는 것과 같다.

 

하지만 나는 < 지옥의 묵시록 > 을 보고 나서 " 별 다섯 개 ! 가장 위대한 영화!!!!!!! " 라고 그날의 영화 관람 카드’에 적은 기억이 난다. 허세가 작렬했던 시절이었고, 제대로 된 중2병이 도지던 시절이었다. 반면 < 무릎과 무릎 사이 > 따위의 영화를 영화 관람 카드에 적을 때‘는 부모님이 볼 수도 있다는 가정 하에 < 무와 무 사이 > 로 적고는 별 하나도 아까워 별 스티커‘를 매기기를 거부했다. 그리고 < 장대를 든 여자 > 는 < 연필을 든 여자 > 로 개명하고는 혼자 까르르르 웃었다. 공포영화는 마치 친구들과 어울려서 거리를 걷는데 몸빼 바지’를 입고 머리에 다라이‘를 이고 가는 엄마’를 볼 때와 비슷했다. 나름 예술 영화 마니아로서 공포영화를 좋아한다는 고백은 창피하고, 외면하고 싶고,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끌리는 그 무엇이었다 !

 

 

 

 

 

그렇다, 당신도 전생에 한때는 자작나무‘이었듯이, 나 또한 한때는 영화광’이었고, 자일리톨‘이었다.  예술영화에 대한 열광이 시들해질 무렵, 동네 비디오 가게’를 지나가다가 문득 공포 영화‘를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왜 그런 생각이 번개처럼 들었는지는 지금이 모르겠다. 나는 바로 비디오 가게 문을 열고 공포 영화’ 코너‘를 훑어보았다. 신간들이 1박2일로 대여료 2000원에 팔리고 있는 사이 방구석 모퉁이의 공포 영화’는 먼지를 이불 삼아 드르렁드르렁 잠을 자고 있다. 늘어진 하얀 런닝구 사이로 젖꼭지를 보인 채 낮잠을 자고 있는 사과 장수인 아버지‘처럼.  굴러다니느라 멍들어서 상품가치가 떨어진 오래된 공포영화 테이프'는 개 당 500원에 한 개씩 팔리고 있었다. 떨이'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팔리지 않는 것은 실패한 것이 아니었던가 ? 안쓰러운 마음에 나는 대한민국 비디오 가게‘에 팔리지 않고 낮잠을 자는 세상의 모든 공포영화’를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날 이후로 공포 영화 비디오 테입‘은 번개 맞은 박달나무’처럼 분주하게 팔리고 있었다. 물론 유일한 고객은 나뿐이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여전히 공포 영화‘는 팔 할이 쓰레기였다. 그래도 나는 이탈리아 장인처럼 한 땀 한 땀 공포 영화를 찾아서 보기 시작했다. 그해 본 공포 비디오테이프’가 이미 100개를 넘었다. 공포 영화 오디세이‘를 통해서 깨달은 것’은 싸구려 공포영화는 매우 훌륭한 장르라는 점이었다. 거기에는 인간의 원초적 욕망이 있었고, 자일리톨이 있었고, 오래된 자작나무가 있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영화는 < 고무인간의 최후 > 였다. 처음에는 < 고무지우개의 최후 > 의 오타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잠시 했다. 얼마나 그림 공부를 열심히 했으면 지우개가 닳고 닳았을까? 비디오테이프 뚜껑을 보니 조잡하기 그지없다. 뚜껑에 쓰인 카피 문구'처럼 정말 눈 뜨고는 차마 보지 못할 영화인지도 몰랐다. 차라리 < 우뢰매 > 의 특수효과를 칭찬해 주고 싶은 간절한 마음. 감독을 보니, 피터졌어 ?! 빵 ! 콩 콩 스카이콩콩.


내가 이 영화를 선택한 이유는 따로 없다. 당시 나는 비디오 가게에 나열된 순서대로 비디오를 선택했기 때문에 4편의 공포영화를 빌리는 데는 1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다만 이 작품은 뉴질랜드 영화'라는 것 때문에 설레였던 기억이 난다. 기대하지도 않았으면서 기대한 영화다. 하지만 처음의 우려와는 달리 영화는 기가 막히게 훌륭했다. 기득권에 대한 냉소와 경멸 그리고 힘 있는 유머‘가 영화 전체’를 든든하게 지원사격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 나중에 이 영화를 만든 < 피터졌어 > 감독은 < 반지의제왕 > 으로 헐리우드를 정복한다. 피 터트리는 재주로 헐리우드의 제왕이 된 피터잭슨‘에게 경배를 !

 

 

< 나이트메어 > 를 만든 웨스 크레이븐의 초기작‘을 구하는 것도 이 오디세이의 별미’였다. 서울시의 모든 비디오 가게의 공포 코너‘를 샅샅이 뒤져서 그의 영화’를 보는 것‘이 유일한 낙이기도 했다. 연희동 < 으뜸과버금 > 에서 < 왼편 마지막 집 > 을 발견했을 때'는 서울대학교 전체 수석'을 차지한 것만큼이나 기분 좋았다. 그렇게 재미있냐고 ? 그렇게 훌륭하냐고 ? 천만에, 웨스 크레이븐의 초기작만큼 재미없고, 후지고, 지루한 영화’도 없다. 사실 별 스티커 하나도 아까운 것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내가 < 왼편 마지막 집 > 에 감동한 이유는 베르히만의 걸작 < 처녀의 샘 > 을 아주 싸구려틱하게 리메이크했다는 점이다. 고상한 영화를 싸구려로 만드는 웨스 크레이븐의 연출력에 나는 감동했다. 시바, 그래 그거다.

 

다른 영화들처럼 진지하지도, 교훈을 주지도, 아름답지도, 재미있지도 않았지만 진지하지도 않아도 좋고, 교훈을 주지 않아도 좋고, 아름답지 않아도 좋고, 재미를 주지 않아도 좋았다. 나는 그것’이 인생이 아닐까 생각했다. 우리들의 지루한 그리고 비루한, 재미있지도 흥미진진하지도 않은, 명풍 루이비통 가방을 가지고 싶지만 가짜 루이비통으로 만족해야 하는, 이 지상의 삶은 교묘하게 싸구려 공포영화‘를 닮았다. 가끔은 상사의 뒤통수를 시원하게 박살내고 싶기도 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하빠리의 비애’를 공포 영화는 시원하게 만족시켜 준다.


가끔 뉴스에서 잔인한 공포영화와 포르노‘가 모방범죄의 원흉으로 지목되지만 나는 그들에게 이 나라’를 더 병들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라고 묻고 싶다. 호환 마마’보다 더 무서운 것‘은 빈곤에 고통스러워하는 이웃을 외면하는 눈이고, 교육’을 빌미로 약장사 하는 사학이며, 뒷돈 챙기기에 혈안이 된 정치권이다. 이들이야말로 공포영화나 포르노‘보다 더 이 사회’를 병들게 한다. 그렇지 않을까 ? 나는 저예산 공포영화를 보면 몸빼 바지에 똥색 다라이‘를 머리에 인 어머니’가 생각나고, 한여름 그늘 아래에서 늘어진 런닝구 차림으로 낮잠을 자는 대책 없는 아버지의 초라한 젖꼭지가 생각난다. 별 볼일 없는 인생이라고 스스로를 정의하셨던, 스펙타클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 족보에서 너희들이 태어난 것이 유일한 스펙타클이라고 말씀하시던, 그런 싸구려 삶. 하지만 반짝반짝 빛나던 삶. 안녕 나의 괴물들. 안녕, 나의 프릭스.

 

이 자리'를 빌어 고백한다. 나를 키운 것은 팔 할이 공포 영화와 에로 영화'다, 라고 말할 줄 알았지 ? 뻥이야.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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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벽지에 때가 타서 도배 할 생각은 엄두도 안 나고, 곰곰 생각하다가 직접 그렸다.

 

 

 

 

 

 

 

프릭스'와 카프카'라는 이름의 술병이다. 프릭스는 공포 영화'에 대한 개인적 오마쥬'이고, 카프카는 카프카에 대한 오마쥬다. 그 전에 살던 집에서는 한쪽 벽면 전체'에다 니체의 얼굴을 그렸다. 정말 말 그대로 얼굴만 그려서 거대했다. 다행히 그 집은 재개발 지역 아파트여서 내가 이사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헐렸다.

 

 

 

 

 

 

花 라고 그려진 꽃병은 릴케'다. 윤희상 시인이 바람을 그리기 위해서 흔들리는 꽃을 그렸다고 고백하듯, 나는 릴케를 그리기 위해서 화병을 그렸다. 화병 주둥이에 꽂힌 줄기는 장미'다. 그리고 장미 가시에 찔려 흘린 피는 릴케의 피다. 릴케의 묘비명은 다음과 같다. 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 그 눈꺼풀 아래 그 누구의 잠도 아닌 즐거움이여. 내가 외우는 유일한 묘비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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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사르 2013-03-27 2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재밌게 읽었어요. 실컷 글 읽고는 '프릭스'를 장바구니에 담았지 뭐에요.
중간중간에 삽입되는 그림들이 아주 마음에 드는데요. 곰발님 글 속의 그림들은 그림 자체가 뭔가 말을 건네는 드한 느낌이랄까. 글과 그림의 유기적 결합이랄까.
책 들고 영화관에 가다' 코너 좋네요.

곰곰생각하는발 2013-03-27 21:36   좋아요 0 | URL
사실 여기에 올린 글은 모두 복사해서 올린 글이비다. 다른 블로그에 썼던 글들인데
책과 관련된 거 죄다 이쪽으로 옮기고 있는 중이에요. 제가 무슨 수로 이많은 글을 하루에 쓰겠어요. ㅋㅋ
옮긴 중에 이미지'나 추가하는 게 전부입니다. 제가 포스터'를 굉장히 좋아해요.
좋은 포스터 있으면 그동안 수집해 놓은 게 있는데 내용에 맞겠다 싶은 포스터 삽입하는 거니다.
요거 은근 재미있어요. ㅎㅎ.

달사르 2013-03-27 2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접힌 부분 펼치기' 기술도 터득하셨네요?
와..빠르십니다. ^^

직접 그리신 그림, 멋져요. 여기서도 프릭스'는 홀로 누워있군요. 한 방울씩 계속 떨어지는 중인가요?

곰곰생각하는발 2013-03-27 21:38   좋아요 0 | URL
앗.. 프릭스' 토드브라우닝 영화 말씀하시는 건가요 ? 이 영화느 워낙 개인적 취향이라..
하여튼 저의 베스트 10입니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 무지 좋아해요.

+

프릭스란 병을 자세히 보면 울퉁불퉁해서 서 있을 수 없어요. ㅎㅎ. 항사 넘어져 있을 수밖에 없죠..

달사르 2013-03-27 22:25   좋아요 0 | URL
넵. 토드브라우닝요.
ㅋㅋㅋㅋ. 과연..프릭스' 답군요. 울퉁불퉁.

올해는 옛날 영화 좀 많이 봐야지..생각하고 있었는데, 곰발님 덕분에 계획이 수월하게 풀립니다요. ^^

곰곰생각하는발 2013-03-28 00:34   좋아요 0 | URL
전 요즘 영화들 너무 현란해서 짜증이 나더라고요.
프릭스'라... 느낌이 묘할 겁니다. 하도 오래전에 보아서 가물가물하네요..

라로 2013-03-28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벽을 다 그림으로 채우신 거에요????헐~
곰생발님,,곰발님???암튼 계속 놀래키시네요!!!^^

곰곰생각하는발 2013-03-28 12:21   좋아요 0 | URL
일종의 낙서로 도배를 한 거죠..ㅎㅎㅎ
저것도 죽노동이더군요. 9시간 정도 걸린 것 같아요..
 
갑질 사회 : 완장은 문신이다 !

 

 

 

 

 

 

 

  

 

 

 

 

 

 

 

 

 

 

 

 

 

 

 

 

 

 

 

 

 

 

 

 

A.

호돈의 소설 < 주홍글씨 > 는 가방에 대한 이야기'다. 이 가방의 로고가 A다. 주홍글씨 A 다. 주인공 헤스터가 가진 가방은 36폰트가 박힌 가방이다. 로고가 크니 백 미터 밖에서도 쉽게 보인다. 마을 사람들은 그런 그녀를 손가락질한다. 헤스터가 욕을 먹는 이유는 촌티 나는 A 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왜냐하면 주민 모두 다 A를 가지고 있다. 다만 로고가 작아서 잘 보이지 않을 뿐이다.  이 로고는 훗날 루이비통으로 진화하였다. 믿거나 말거나.

 

 

 


 

 

 

 

 

 

 

 

 

 

계급의 진화 : 주홍글씨 A에서 LV까지.

 

* LV : 루이비통

 

명품 로고'를 보면 계급이 보인다. 이 바닥을 들여다보면 우아한 것과 천박한 것'들의 두뇌 싸움'이 흥미롭게 진행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명품이란 말 그대로 비, 싼, 것' 이다. 백이면 백, 품질이 좋아서 구매한다기보다는 있어 보이기 위해서 구매'를 결정한다. 사정이 그러하니, 초창기'에는 루이비통'이라는 로고를 폰트 36'로 대문짝만하게 찍어냈다. 이렇게 !

 

'루 이 비 통'

 

이 정도 크기라면 전방 백 미터 거리에서도 알 수 있는 크기다. 사람들은 이 크기에 압도당하고, 이 로고가 박힌 가방을 맨 여자'는 상류층, 우아한 것'이 된다. 그러면 상류층을 꿈꾸는 바로 아래 단계의 계급인 쁘디부르주아 무리는 무리해서라고 8년 3개월 할부'로 이 36 폰트의 루이비통을 구입하게 된다. 그리고는 상류층의 럭셔리 파티'에 참석하며 자신도 상류 계급의 일원으로 인정해 달라고 요구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리 쉬운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오리지날 상류 계급은 루이비통 가방 하나 달랑 매고 돌아다니는 아랫것'을 자신들과 같은 레벨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36 폰트 루이비통 대신 9 폰트 루이비통 가방을 들고 다니기 시작한다. 백 미터 밖에서도 보이던 로고는 이제 악수할 수 있는 거리 안에서만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은 티 테이블에 앉아서 서로의 9폰트 루이비통을 확인한다. 그들은 서로 마주앉아서 차 마시는 사이다. 호호호.

 

 

'루 이 비 통'

 

 

어제까지만 해도 36폰트 루이비통 가방을 들던 살롱 마담들은 이제 36폰트 루이비통'은 가난한 년이 있어 보일려고 생색내는 가방'이라며 조롱한다. 하지만 눈치가 100단인 바로 아랫것은 8년 3개월 할부 중 7개월만 납부한 가방을 버리고 9폰트짜리 루이비통 가방으로 잽싸게 갈아탄다. " 저 년들을 따라가야 해 !  " 명품과 계급의 관계는 늘 이런 식'이다. 그런데 관계가 그런 식으로 작동한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하층 계급의 소비자'는 계를 타서라도, 빚을 내서라도 뒤늦게 36폰트 루이비통'을 카드로 긁는다. 이로써 상류 계급의 예언은 적중한다. 36폰트 로고가 박힌 루이비통은 가난한 년이 있어 보일려고 생색내는 가방이 된다. 비싼 돈 주고 샀는데 욕만 먹는 꼴이다. 여기에 틈새시장을 노리고 접근하는 루이비통이 있다. 짝퉁이다. 현실은 시궁창이지만 욕망만 상류층인 소비자를 위해 짝퉁은 만들어진다. 그들의 욕망을 위해서 36폰트로 박는다. 이것은 일종의 게임이다. 

 

 

나중에는 로고 없는 루이비통이 등장한다. 가방'을 열어야지만 개미 똥구멍 같은 로고가 보일 뿐이다.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주고받던 사이인 그들은 이제 가방을 열어 명함을 주고받는 은밀한 사이가 된다. 결론은 이렇다.  36폰트 루이비통 가방을 가진 사람은 아침 8시에 지옥철'을 타고,  14폰트 루이비통을 가진 사람은 자가용으로 출근을 하고, 9폰트 루이비통은 벤츠를 타고 출근을 하며, 로고 없는 루이비통을 가진 사람은 출근'을 하지 않는다.  이쯤 되면 명품 로고는 품격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천박한 것들이 꼴값하는 지표로 읽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로고 없는 루이비통'은 우아한 자가 가질 수 있는 최후의 명품 종결자'인가 ? 천만에 ! 한정판'이 있다. 돈 있다고 무조건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한정판이라는 딱지가 붙으면 가격은 최소 두 배 이상 오른다. 공장에서 나이키 만 개 만들다가 한정판이란 이름으로 달랑 열 개 만들면 열 배'로 뛰는 이치와 같다. 엄밀히 말하면 농락이지만 사람들은 희소성의 가치라는 이유'로 어리석은 소비를 한다. 비싼 가방을 사도 우아한 것들에게 욕을 먹으니, 돈은 돈대로 들고 자존심은 자존심 대로 상한다. 도대체 대안은 뭘까 ? 간단하다. 명품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면 된다.

 

이 루이비통 로고를 주홍글씨 A로 바꾸자. A는 욕망'이다. 희망은 드러내면 좋지만 욕망은 감추는 것이 좋다. 그런데 이 촌스러운 36폰트 로고가 박힌 가방을 들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 마광수가 대표적이다. 교수가 야한 여자가 좋다고 하니 사람들은 손가락질을 한다. 결국에는 음란죄로 재판에 호명된다. 그나마 남자에게는 관대한 편이다. 여성이 36폰트 A 로고가 박힌 가방을 들면 난리가 난다. 서갑숙의 < 나는 때론 포르노그라피의 주인공이고 싶다. > 가 좋은 예이다. 검사가 호통을 친다. 죄명은 36폰트 A라는 로고가 박한 가방을 가진 죄다. 쪽팔리다는 이유이다. 물론 검사는 36폰트 로고 A가 박힌 가방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로고가 아무것도 없는 평범한 검은 가죽의 클래식한 가방이다.

 

장면이 바뀐다. 여기는 경기도 가평의 어느 별장. 반주 음악이 들리고 탬버린 흔드는 소리가 들린다. 카메라 이동하면 10명 남짓의 남녀가 노래방 시설이 갖추어진 거실에서 벌거벗고 그 짓을 한다. 씐난다 ! 누군가 외친다. 채찍이 필요해 ! 그 소리에 검사는 자신의 검은 가죽 가방을 열어 가죽 채찍을 꺼낸다. ( 인써트 ) 가방 안에는 상표가 있다. 촌스럽다고 지적했던 주홍글씨 A 다. ( 페이드 아웃 )

 

 

 

 

 

 로고의 진화

 

 

루이비통 : 가짜. 

루이비통 : 하층민 

루이비통 : 중산층

루이비통 : 상류층

루이비통 : 보다 상류층

루이비통 : 보다 더 상류층.

루이비통 : 최상위 1%.

루이비통  ; 로얄패밀리.

루이비통 ; 진짜 로얄 패밀리.

루이비통 : 정말로얄피밀ㄹ.

                박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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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13-03-27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주홍글씨에 대한 논문을 써야 하는데 님의 이 주제를 좀 가져가서 사용해도 될까요????
제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알게 해주셨네요!! 님 진짜 누구세요????ㅎㅎㅎ(팜님이 괴물이라고 했던 댓글이 기억나서;;;) 암튼 멋지십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3-03-27 11:41   좋아요 0 | URL
아, 이거 완성된 글이 아닌데 올라갔네요 ? 어 왜 올라갔죠 ? ㅎㅎㅎ. 가져가세요. 왕창 !!!

달사르 2013-03-27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악. 제가 얼마전에 촌년 인증 당했던 거로군요..ㅠ.ㅠ (이 포스팅 보고서야 그 이유를 알았네요. 힝.)
지인이 결혼 선물로 명품 가방을 샀다고 보여주는데요. 로고가 가방 안에 있다면서 보여주더라구요. 명품인데 왜 로고가 뻔히 잘 보이는데 없고 가방 안에 있지? 이상타..하고만 말았더니..ㅋㅋㅋ

명품 가방 없으믄 탈계급? ㅎ

곰곰생각하는발 2013-03-27 17:26   좋아요 0 | URL
그렇죠 ? 요즘은 가방 안에 인증표를 단다고 합니다. 사실 명품 가지고 싶은사람들은 이미 카다로그 보고 다들 알잖아요. 하여튼 명품 로고는 크기가 점점 줄어들다가 안으로 들어가는 추세입니다.
사실 나이키 로고가 제일 크게 박힌 옷은 대부분 짝퉁 3000원짜리 옷이었잖아요.
크면 다 짝퉁입니다.
명품 가방 없으면 글쎄요...ㅎㅎㅎㅎㅎ 뭘까요..

만화애니비평 2013-03-27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누나가 마지막이군요.ㅋㅋ

곰곰생각하는발 2013-03-28 00:32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정확히 보셨군요.
이거 무서워서 맘 놓고 쓰지도 못하게습니다.
 

토리노에서.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가 상징성'에 기반을 둔다면, 벨라 타르는 현시성'에 방점을 찍는다. 그것은 즉물성이다. 벨라 타르는 그 어떠한 첨삭 없이 날것을 현시함으로써 진실을 보게 만든다. 그의 영화는 온갖 상징으로 압도되는 알레고리화'라기 보다는 쿠르베나 일리야 레핀의 소박한 그림에 가깝다. 그는 < 과정을 과장 > 없이 보여준다. 양말을 신고, 바지를 입고, 셔츠를 입고, 그 위에 스웨트를 걸치고, 마지막에 외투를 입는다. 그리고 옷을 벗을 때는 그 역순을 편집 과정 없이 집요하게 보여준다. 말의 장신구를 입히는 과정과 벗기는 장면도 지루하도록 반복된다. 결국 과장 없는 과정의 목격을 통해서 관객이 깨닫는 것은 우리가 깨닫지 못했던 일상의 반복'이다. 인간은 매일 똑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감독은 생의 의지를 죽음의 묵시록과 연관시켜서 인간은 시지푸스처럼 부조리한 존재라는 사실을 각인시킨다. 벨라 타르는 生은 환희가 아니라 형벌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생의 의지'에 대한 경멸을 의미할까 ?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늙은 남자가 얼어버린 감자'를 씹을 때, 우리는 어떤 숭고함을 경험하게 된다. 하지만 이 숭고함은 생의 찬양이 아니다. < 겨우 > 살아야 하는 인간'에 대한 감독의 연민이다. 영화 < 토리노의 말 > 에서는 니체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니체가 늙고 병든 말의 목덜미'를 잡고 울다가 미쳐버린 곳이 바로 토리노'다. 이 일화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문장은 롤랑 바르트의 < 카메라 루시다 > 이다. 그는 " 1889년 1월 3일, 학대받아 숨진 말의 목덜미에 울며 매달리던, 연민'때문에 미쳐버린 니체 " 라고 적는다. 나는 이 하나의 문장 때문에 이 책을 사랑했다. 그것은 박완서의 < 그 남자네 집 > 에서 한때의 찬란을 " 내 생애 구슬 같은 겨울 " 이라고 말해서 내 심장을 뛰게 했던 것과 같은 울림이다.

 

 


 

 

 

 

 

 

 

 

 

 

옛 고전 그림'은 대부분 알레고리畵였다. 그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징'에 대한 이해'가 필요했다. 화가 얀 반 에이크의 걸작 <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화 / 1434年 > 그림은 배경 속 사물의 속뜻'을 이해하면 보다 선명하게 보인다. 미술학자 파노프스키는 이 작품을 결혼(을 증명하기 위한) 그림이라고 해석했다. 그의 해석에 따르면 촛대 위에 켜진 단 하나의 초는 신의 통찰력과 지혜 혹은 결혼에의 맹세를, 오렌지는 아담의 사과를 의미하는 과일을, 강아지는 남편에 대한 아내의 충성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묵주는 영혼의 걸음이고, 빗자루는 마음을 쓸어담는 도구이고, 벗어놓은 신발은 결혼식을 수행하는 공간이 신성한 곳이라는 것을 상징하기 위한 배치다. 그리고 거울 뒤에 반영되는 세 인물은 화가와 조수 그리고 결혼을 증명하는 증인'이라고 한다. 파노프스키'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는 모르겠으나 사실 상징이라는 것은 귀에 걸면 귀걸이요, 코에 걸면 피어싱이고, 목에 걸면 목걸이다. 엿장수 마음대로'다. 

 

도상학'이 우습다는 것이 아니다. 그림을 마음 속으로 받아들일 때 도상학이 主가 되면 안 된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은 것이다. 상징 해석은 별책 부록 정도로 다루어야 한다. 냉정하게 이 그림을 보자 ! 이 그림에서 낮인데도 불구하고 불이 켜진 하나의 초는 신의 통찰력에 대한 상징일까 ? 그렇지 않다. 네덜란드의 일조량은 매우 적다. 일년 내내 비가 내리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 당시에는 낮에도 촛불을 켜 두고는 했다. 그리고 오렌지에 대한 해석도 과장된 해석이 많다.

 

<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화 > 에서 왼쪽 창가를 보면 오렌지가 놓여 있다. 도상학자 파노프스키'는 이 과일을 선악과 이전의 순수'를 상징한다고 해석했다. 미술학계의 거목이니 그의 말은 권위'를 얻는다. 그런데 조금 다른 시각으로 보면 오렌지'는 다르게 해석될 수도 있다. 그림 속 모델인 아르놀피니는 부호'였다고 한다. 당시 그림은 부자들의 사치품 중 하나였다. 일반 서민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르네상스 시대에 접어들어서 거상들이 그림 속 모델로 등장한 이유는 부의 탄생과 맥을 같이 한다. 그림은 그 이전에는 주로 성서나 신화 속 주인 혹은 권력자들의 몫이었다. 그러던 것이 상인들이 떼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파워의 중심으로 들어온 것이다. 아르놀피니'가 궁정 화가였던 아이크를 고용해서 그림을 그리게 했다는 것은 아르놀피니가 아이크에게 꽤 비싼 비용을 지불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 고흐가 이웃집 모델을 그리는 따위의 서민적인 풍경을 연상하면 안 된다. 당시에 그림은 사치품이었다. )

 

 

 

 

 

 

홀바인의 < 대사들 > 과 마찬가지로 당시의 그림들은 대부분 자신의 부를 과시하기 위한 뽐내기 중 하나였다. 만약에 당신이 아이크에게 그림을 주문했다고 하자. 무엇을 요구하겠는가 ? 나라면 이렇게 요구하겠다. " 제가 책을 좋아하다 보니 거실을 배경으로 그려주십시요. 아, 그리고 이쪽... 이쪽으로 오세요. 요 책장이 콩가에서 직수입한 삼나무인데요. 번개 맞은 나무입니다. 명품이죠. 이곳에 서 있는 것을 그려주세요. 구두는 페리가모'를 신겠습니다. 하하하, 제가 이 수제 구두를 러브합니다. 아, 그리고 바나나 ! 하하하하. 창가에 바나나 하나 놓고 그립시다. 맛 좀 보신 적 있소 ?  이놈의 바나나 하나가 농민들 한 달 품삯이라니, 비싸도 너무 비싼 과일이오. " 대충 이런 식이다.

 

위에서도 지적했듯이 네덜란드에서 오렌지'는 구경하기 힘든 과일 중 하나였다고 한다.  오렌지를 먹는다는 것은 곧 부를 상징하는 것. 아르놀피니가 자신의 부를 과시하기 위해서 오렌지'를 선택했다면 ? 오렌지에 대한 해석에서 전자가 도상학적 접근이라면 후자는 사회경제학적 접근'이다. 도상학적 접근이 맞을 수도 있고, 경제학적 접근이 맞을 수도 있다. 경제학적 접근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만만치 않다. 하지만 < 책 읽어주는...... > 따위의 미술 소개 책들은 모두 오렌지'를 성악과 이전의 순수를 상징한다고 말한다.

 

파노프스키의 해석이 맞을 수 있다. 하지만 틀릴 수도 있다.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한다는 소리이다. 과일을 종교적 성스러움과 결부시키려면 차라리 사과나 포도'를 그렸어야 하지 않을까 ? 오렌지'는 오히려 파노프스키의 도상학'이 매우 위험한 접근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당시 르네상스 시대는 부와 사치'를 훌륭한 덕목이라고 생각했다. 그림 또한 그러한 사치 품목 중 하나였다. 그렇기 때문에 부의 과시는 지금처럼 부도덕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림을 주문한 거상은 자신이 소유한 부를 과시하기 위해서 그림 속에 명품이 함께 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림 속 오렌지'는 아담의 사과에 대한 은유가 아니라 그 당시 네덜란드에서는 구하기 힘든, 가장 비싼 과일 중 하나였기 때문에 선택된 것이라는 의견도 설득력을 가진다.

 

지나치게 과도한 상징과 기호'는 부르주아적 시선이다. 그것은 일종의 살롱 문화'가 선호하는 취향이다. 많이 배운 놈이 그림의 이해력도 좋다. 결국 도상학이란 많이 배운 놈들이 가지고 놀기 좋은 재료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번역하자면 < 갑 > 의 놀이터이다. 여기에 반기를 든 사람이 있다. 바로 귀스타브 쿠르베'다. 그는 체질적으로 상징과 기호'를 경멸했다. 상징을 해석해야지만 그림이 비로소 선명하게 보인다는 것은 민중에 대한 배,배배배배신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천사를 보지 않았기에 천사를 그리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그가 그린 그림은 상징에 대한 오브제'를 배제했다. 도상학에 대한 상식이 없이도 그림을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그가 원한 것은 순수한 리얼리즘'이었다.

 

< 세상의 근원 > 은 여성의 성기'를 적나라하게 보여줌으로써 리얼리티란 완벽한 재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너머의 것을 재현하려는 욕망임을 분명하게 밝힌다. 일리야 레핀의 <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 > 도 리얼리즘의 걸작이다. 이 그림 또한 도상학적 오브제'가 사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 어떤 상징 해석'보다 풍부하다. 유배지에서 돌아온 아버지의 느닷없는 출현은 팽팽한 긴장감을 선사한다. 기쁨과 놀람이 교차하는 지점을 포착하는 레핀의 눈은 매와 같다. 이 작품이 알레고리화'와 차별점을 두는 것은 날것의 생생함이다. 리얼리즘은 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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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사르 2013-03-28 0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기 그림도 맘에 들어 한참을 봤는데, 링크도 걸려 있군요. 하하. 그림 읽어주는 남자' 셨군요. ^^

도상학. 일종의 그림 해부학 개념이네요. 유명한 도상학자는 요즘의 유명한 평론가 스타일?
근데 저런 설명이 없으면 저 같은 사람은 그림 속에 뭐뭐가 있는지 제대로 다 보지도 못했을 것 같애요. 그저 와..천 질감이 제대론데? 저 구겨진 부분을 봐. 강아지 털은 또 어떻구? 완전 북실거려. 아, 만지고 싶다. 남자는 다리가 왜케 얍실해? 완전 부실한데? 슬리퍼는 왜 저래? 좀 단정하게 놔두지 않고 말야...등등의 생각에 그쳤겠어요. ㅎㅎ

별책부록 정도의 도움으로 도상학 설명을 듣고, 나머지는 자기가 창조적으로 생각을..제 생각에도 오렌지 그림은 비싸다, 라는 이유가 가장 컸을 거 같애요. (주위에 그림 좋아하는 지인이 있는데, 그 지인에게 이런 이야기 해부면 무척 좋아할 것 같아요. ^^)

곰곰생각하는발 2013-03-28 00:37   좋아요 0 | URL
슬리퍼도 무슨 상징이 있던데 까먹었습니다.
참고 자료론 좋지만 그것을 그림 감상의 주가 되면 좀 곤란한 거 같아요.
아하, 그럴 수도 있구나, 라고 생각해야지 이것은 그거다, 라는 전재를 깔고
보면 개인적감상이 반감이 되잖아요. 그래서... 어줍잖게 일갈을 ㅎㅎㅎㅎㅎ

달사르 2013-03-28 00:45   좋아요 0 | URL
요즘 공부하는 게 있어서 늦게까지 공부하다 오늘, 머리 제대로 식히고 갑니다. ^^
제 댓글이 미진한 듯하여, 위에 추가댓글을 좀 보강했슴돠~

달사르 2013-03-27 2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벨라 타르가 영화계의 쿠르베 씨인가요?
현시성. 일상의 반복..'토리노의 말'도 시간 내서 봐야겠어요. 잘 읽은 고마움으로,
황지우 시인의 시 한 편 덧붙입니다.


<거룩한 식사>
황 지우


나이든 남자가 혼자 밥 먹을 때
울컥, 하고 올라오는 것이 있다
큰 덩치로 분식집 메뉴표를 가리고서
등 돌리고 라면발을 건져올리고 있는 그에게,
양푼의 식은 밥을 놓고 동생과 눈흘기며 숟갈 싸움하던
그 어린 것이 올라와, 갑자기 목매게 한 것이다


몸에 한세상 떠넣어주는
먹는 일의 거룩함이여
이 세상 모든 찬밥에 붙은 더운 목숨이여
이 세상에서 혼자 밥 먹는 자들
풀어진 뒷머리를 보라
파고다 공원 뒤편 순댓집에서
국밥을 숟가락 가득 떠넣으시는 노인의, 쩍 벌린 입이
나는 어찌 이리 눈물겨운가



곰곰생각하는발 2013-03-28 00:39   좋아요 0 | URL
아, 제가 좋아하는 황지우 시네요.
토리노의 말 보십시요. 깜짝 놀라게 됩니다.
뭐... 기똥차서 말이 안 나와요.
최소주의'라고 하나요...
전 요즘간결한 게 좋아요.
바우하우스적 디자이 좋아하거든요.
토리노의말은 최소주의'적인 영상이 맘에 듭ㄴ다.

걸작이라는 말은 이런데 쓰이는 걸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