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편소설 no.1
400번째 안타.
술을 많이 마시거나 피곤하면 종종 화장실에서 혈변을 보고는 했다. 치질이면 그나마 다행인데 대장암'이라면 어떻게 될까 ? 걱정 때문이기도 했지만 검사를 계속 미룬 이유는 쪽팔려서 병원을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낯선 남자에게 내 항문을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창피해서 죽고 싶었다. 애인에게도 보여준 적 없는 항문을 남자에게 보여줘야 하다니, 눈 앞이 캄캄한 것이다. 하지만 계속 미룰 수가 없어서 병원 예약을 했다. 예약 당일, 나는 새벽 5시부터 일어나서 목욕탕으로 갔다. 3시간 동안 항문만 닦았다. 그 모습이 그리 유쾌하지는 않았으리라. 종로 속옷 가게에 들러 19,900원짜리 메이커 팬티'를 사 입고 병원에 도착했다.
순간 아차 했다. 산부인과에 가는 환자는 팬티보다 양말이 깨끗해야 창피하지 않다고 누군가 말하지 않았던가 ? 어차피 산부인과 의사가 보는 것은 팬티가 아니라 거치대에 올려진 양말을 신은 발이니 말이다. 발의 바닥을 그토록 적나라하게 볼 수 있는 사람은 남편과 산부인과 의사가 유일할 것이다. 간호사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 소율 손님 ! "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 갑자기 똥구멍이 간지러워 ! 빌어먹을. 문을 열고 들어갔으나 의사'는 갑자기 진행에 차질에 생겼는지 서류를 뒤적이며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나는 진찰실 안을 이러저리 살펴보았다. 눈에 띄는 물건이 보였다. 진열장에 야구공과 투수 글러브'가 보였다. 그런 나를 보았는지 의사가 물었다.
- 야구 좋아하세요 ?
- 네에... 십 년째 엘지'를 응원하고 있습니다. 의사선생님은 사회인 야구'를 하시나 보죠 ?
- 아 ? 핫핫 ! 네에. 의사도 스트레스가 보통이 아니거든요. 환자들 더러운 똥구멍만 하루 종일 봐야 하니... 앗! 농담입니다.
- 아, 네에 ! 포지션이 투수신가 봅니다. 왼손잡이 투수'가 좋죠.
- ( 차트를 보며 ) 소율 씨 ? 야구에 대해 해박하시군요. 일반 사람들은 투수 글러브와 야수 글러브'가 다르단 사실을 잘 모르거든요.
하하 반가워요. 그나저나 엘지는 올해 잘 할까요 ?
- 잘 하겠죠. 10년째 그 생각으로 야구장에 가고는 했습니다.
- 하하하
- 허허허
- 이크, 웃느라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네요. 바로 가죠 ? 증상이...
- 종종 혈변을 봐서요.
- 음, 뭐, 동성애.. 이런 건 아니시죠 ? 애널섹스에 의한 단순 파열이 있을 수 있거든요.
- 아, 아닙니다 !
- 그럼 한번 봅시다. 똥구멍 벌려보세요.
의사는 수술용 장갑을 끼더니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 아... > 하는 소리가 내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는 무너진 건물 안에 갇힌 고양이를 살피기 위해 투입되는 카메라 내시경'처럼 이리저리 손가락을 움직였다. 아... 아................ 아프지만 좋다. 갑자기 의사가 내게 속삭였다. " 기모치이이 ? " 기모치 ?!! 의사는 느닷없이 나에게 일본말로 좋냐고 물은 것이다. 뭐가 좋다는 건가 ?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허둥대고 있는데 그가 갑자기 손으로 내 엉덩이를 때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 기모치 ? " 아, 아아..... 나는 그의 강압적인 재촉에 그만 무의식적으로 " 야메떼 구다사이 !!!! " 라고 소리쳤다. " 자... 됐습니다. 소율 씨. 이제 자리에 앉아주시기 바랍니다. " 나는 수치스러움에 몸 둘 바를 모른 채 그 앞에 섰다. 그는 방그레 웃고 있었다.
" 선생님은 동성애 항문 섹스에 의한 출혈은 아니신 것 같군요. 대부분은 애널 취향을 창피하게 여겨서 감추는 경향이 있어요. 여성 환자의 40%는 단순한 애널 섹스에 의한 항문 파열 때문에 오죠. 남성의 경우는 더욱 그렇죠. 선생님은 이성애자'예요. 이성애 야동을 많이 본 사람들은 대부분 기모치와 야메떼 구다사이'란 단어에 익숙해요. 왜냐하면 남자 배우가 기모치라고 물으면 여자들은 앙앙거리면서 야메떼 구다사이'라고 외치죠. 제가 선생님에게 기모치? 라고 닥달을 했을 때, 선생님이 생각없이 야메떼 구다사이'라고 말한 것은 일종의 무조건반사적 학습효과입니다. 선생님은 노멀한 포르노'를 많이 보았다는 증거입니다. 고로 동성애자가 아니십니다. 동성애자들은 이성애 야동을 보지 않거든요. 게이 포르노는 기모치, 뭐 야메떼... 이런 앙앙거리는 멘트를 날리지 않거든요. 그들의 섹스는 돌직구'예요. 웅장하죠. 이성애 포르노가 피아노 소곡이라면, 게이 포르노는 오르간 연주처럼 묵직해요.푹, 윽, 퍽, 악, 이런... 하여튼 선생님의 병명은.... "
나는 무척 긴장이 되었다. 의사는 사무적인 말투로 선고를 내렸다. " 안구 착색 망막 손상'이 진행 중이십니다. 쉽게 말해 1년 안에 눈이 멀게 되는 병입니다. 괄약근은 눈과 연결이 되어 있죠. 눈은 아시다시피 괄약근으로 이루어져 있잖아요. 눈이 나쁘면 괄약근에 이상이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마음의 준비를 하십시요. " 나는 대장항문과 전문의로부터 시력 상실'이라는 선고를 받았다. 눈이 괄약근이라는 사실은 태어나서 처음 듣지만... 의사가 괄약근이라고 하면 괄약근인 거다. 의사란 그런 존재다. 나는 청천벽력 같은 선고에 펑펑 울었다. 남자는 그런 존재다. 의사는 유쾌하게 말을 이었다. " 아니, 뭐 그리 죽상이십니까 ? 꼴도 보기 싫은 인간들 얼굴 안 볼 생각하면 좋지요. 저도 눈이나 멀었으면 좋겠네요. 더럽고 험한 꼴 안 보게 말이지요. 지금의 대한민국이 어디 눈 뜨고 볼 만한 풍경입니까 ? 각하 얼굴 보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당신은 행운입니다. 반갑습니다. 제 이름은 강타구입니다... " 의사의 말을 들으니 그럴 듯했다. 각하를 보지 않아도 된다니. 야홋 ! 인생이란 케세라세라 ! 그것이 인연이 되어서 다음날 한강 공원에 나와 공을 주고 받는 연습을 했다.
- 메이져리그는 어느 팀 좋아하십니까, 소율 씨 ?
- 전 보스톤 레드삭스 좋아합니다.
- 왜요 ?
- 빨간 양말 로고가 예뻐서요
- 그거 아십니까 ? 스티븐 킹이 보스톤 광팬이라는 사실 ?
- 그럼요, 알다마다요. < 톰 고든을 사랑한 소녀' > 라는 소설에서 톰 고든은 그 유명한 레드삭스 선수 아닙니까.
- 하하하. 그래요. 소율 씨 꿈은 뭐였습니까 ?
- 투수요 ! 저도 의사 선생님처럼 투수가 되는 게 꿈이었습니다. 중학교 때 야구부 투수였습니다.
- 그래요? 어쩐지... 꿈 포기하지 마십시요. 인생이란 어떻게 진행될 지 모르잖아요. 럭비공 같아요.
럭비공이 하늘을 날 때는 예상 가능한 포지션이지만 땅에 바운드 되는 순간 어디로 튈지 모르죠.
우리는 밤 늦게까지 공을 주고 받았다. 나는 그날 결심했다. 눈이 안 보이는 그날까지 공을 받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공은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진다. 그게 세상의 진리'이다.
에필로그.
눈이 먼 지 7년이 지났다. 나는 현재 마운드 위에 서 있다. 레드삭스 팀 투수'가 되었다. 물론 나는 맹인'이다. 앞을 못 보는 데 어떻게 공을 던지냐고 ? 비웃지 마라 ! 이 세상에 불가능은 없다. 각하는 어떻게 대통령이 되었나? 불가능한 것은 각하나 나나 마찬가지였다. 동료인 포수가 종을 울리면 그 소리를 향해 공을 던진다. 내 공은 낙차가 크다. 지금까지의 방어율은 3.12, 10승 5패의 전적이다. 꽤 좋은 성적이다. 타선의 도움도 받았다. 팬들은 나를 소울 재즈 킹'이라고 부른다. 내가 등장하면 팬들은 와와 한다. 그리고 원정 경기에 가면 우우 한다.
지금까지 399개의 안타를 허용했다. 한 개 더 맞으면 400개의 안타를 허용할 것이다. 오늘의 경기에서도 운이 좋으면 3,4개의 안타를 내줄 것이다. 아무리 잘 던진다고 해도 몇 번의 실수를 하게 되어 있다.. 인생이란 그러한 실수들의 총합이 아니었던가 ! 몇 번의 성공과 수백 번의 실수로 이루어진 것이 인생이다. 나는 지금까지 399번의 실수를 허용했으나 399번의 실패를 경험하지는 않았다. 실수와 실패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3회까지는 안타 없이 잘 막았다. 퍼펙트 게임'을 꿈꾸지는 않는다. 그저 오늘도 무사히 승리를 기원할 뿐이다.
" 소울 투수 ! 와인드업 !! 던졌습니다 !!!!!!!!!!!!!!"
장내 야구 해설가의 목소리가 들린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세상의 모든 공은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