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 사건을 다룬 르포만큼 재미있는 장르'도 없다. 더군다나 연쇄살인범을 쫒는 르포'는 < 갑 > 이라 할 만하다. 연쇄살인사건'은 주로 자본주의가 발달한 나라'에서 자주 발생한다. 이들 나라의 공통점은 또 하나 있다. 추리소설'이 대중적 인기를 얻고 있는 나라라는 공통점도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연쇄살인범의 팔 할'은 백인이라는 점이다. 그러니깐 연쇄살인'은 백인 범죄'에 가깝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에서 화성 연쇄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는 사실은 한국 사회'가 본격적으로 자본주의 사회로 접어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하승균의 < 화성은.. > 은 사건 담당 형사의 회고록이다. 표창원 교수의 < 한국의 연쇄살인 > 과 함께 읽으면 도움이 된다.

살인자들과의 인터뷰와 마인드 헌터'는 프로파일링 관련 서적 가운데 가장 흥미진진한 책이다. 반면 파리가 잡은 범인'은 곤충 법의학자의 시선으로 범죄'를 다룬다. 흥미진진하다. 끝으로 양들의 침묵은 스릴러 분야에서의 최고 걸작이라 할 만하다. 자세한 내용은 링크를 걸어둔다.

 http://myperu.blog.me/20148661402

 

 


 

 

 

1.

나쁜 영화

누가 나에게 영화 <디워> 는 나쁜 영화인가, 라고 물으면 < 나쁜 영화는 아니다 > 라고 말할 것이다. 또 누가 나에게 영화 <디워> 는 좋은 영화인가, 라고 물으면 < 좋은 영화는 아니다 > 라고 말할 것이다. 한 입 가지고 두 말 한다는 비난이 쏟아질지는 모르겠지만, 디워는 나쁜 영화도 아니고 좋은 영화도 아니다. 영화적 완성도 면에서는 좋은 영화는 아니지만 이 영화가 윤리적으로 나쁜 시각을 제공하지는 않기에 나쁜 영화도 아니다. 그런데 누가 나에게 영화 < 악마를 보았다 > 는 나쁜 영화인가 라고 물으면 나쁜 영화라고 답할 것이다. 또 누가 이 영화는 좋은 영화인가 라고 물으면 나쁜 영화라고 대답할 것이다. 왜냐하면 진짜 나쁜 영화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영화적 완성도뿐만 아니라 윤리적으로도 불온한 작품이다.

내가 본 최악의 영화는 김지운 감독의 < 악마를 보았다 > 이다. 이 영화를 보고 난 느낌은스너프 필름이나 아동 포르노를 보았을 때의 그런 혐오감과 비슷했다. 감독이 지나치게 세게 나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나 새로운 장르에 도전하던 김지운 감독고어 장르에 도전장을 내민다. 제대로 된 피범벅 영화 한 편 만들어 보겠다는 야심찬 출발. 영화의 작품성이 좋고 나쁨을 떠나서,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이 작품은 감독의 윤리적 문제에 중대한 하자가 있는 작품이다.

 

 

 

복수는 나의 것

연쇄살인마인 최민식을 고양이 쥐 다루듯 통제하는 국가 비밀 정보 요원 이병헌은 최민식의 처형을 단계적으로 미룬다. 보다 잔인한 방법으로 죽이기 위해서이다. 이병헌은 덫에 걸린 최민식을 흠씬 팬 후에 덫을 풀어준다. 풀려난 최민식은 또다시 다른 먹잇감을 노리다가 결정적 순간에 다시 덫에 걸린다. 그는 이유 없이 맞고, 풀려나고, 맞고, 풀려나고를 반복한다. 이 문장을 이병헌의 1인칭 시점으로 풀면 < 나는 그를 때리고, 풀어주고, 때리고, 풀어주었다. > 가 될 것이다. 한쪽은 풀려나고, 한쪽은 풀어준다. 구속과 석방이 반복된다는 사실은 결국 연쇄살인마의 먹잇감인 여성 희생자의 수가 그만큼 늘어난다는 뜻이기도 하다.

물론 여성 희생자들이 최민식에 의해 살해당하려는 순간, 이병헌이 등장해서 희생자를 구하고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목숨을 구한 것뿐이지 몹쓸 짓을 사전에 예방한 것은 아니다. 어쩌면 김지운 감독에 의해 화면 밖으로 떨어져 나간 영화 속 여성 캐릭터들은 죽음보다도 더 무서운 두려움을 안고 살아갈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이병헌의 개인적 복수심 때문에 애궂은 여성 희생자들의 벌거벗은 젖가슴만 실컷 본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개인의 복수심을 위해서 말이다.

이렇듯 영화 속 최민식보다 더 병적인 인간은 이병헌이다. 그는 여성 희생자의 죽음을 저지하기 위해서 최민식 앞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살인 현장을 훔쳐보기 위해서 그곳에 있는 것이다. 과연 이런 행위는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일까 ? 미치지 않고서는 그런 짓을 할 윤리적 인간은 없다. 감독이 이 영화의 주제를 악마와 대결을 하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악마보다 더 악마가 된 평범한 남자의 윤리적 파멸을 다룬 이야기라고 말한다고 해도,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용자는 많지 않을 것이다. 관객들이 바라는 것은 통쾌한 복수극이기 때문이다. 결정적 문제는 최민식보다 더 병적인 이병헌보다 더 병적인 사람은 감독 자신이라는 점이다. 과연 이 영화는 예술적 창조성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질 만한 영화인가 ?

 

 

초대받은 사람들

이 영화의 결정적 오류는 최민식의 처형 장면에서 절정에 다다른다. 이병헌은 최민식의 사형식이 거행될 장소에 최민식의 늙은 부모와 자식을 초대한다. 초청장을 받은 그들은 영문도 모른 채 사형 장소에 도착한다. 그리고 그들이 목격하게 되는 것은 머리가 잘린 아들이자 아버지의 목과 몸뚱이. 감독이 생각하기에 이 방식이야말로 악마를 가장 잔인하게 처단하는 방법이라고 판단한 모양이다.

오류는 바로 그 지점에서 발생한다. 왜 감독은 그들을 그곳으로 초대했을까 ? 최민식의 처형은 사람을 죽인 죗값이라는 데는 동의하지만, 부모는 살인자 아들을 두었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죗값을 받아야 하는 것일까 ? 아들의 죄는 곧 부모의 죄인가 ?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이듯이, 자식의 죄는 부모의 죄요, 자식의 죄인가 ? 죄는 연대보증인가 ? 웃기는 짓이다. 김지운 감독은 한 마디로 웃기는 짓을 한 것이다. 그것은 윤리적으로 옳지 않은 것이다.

감독은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그리스적 서사의 비극을 재현하려고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파시즘적 증오만을 보여준 채 끝났다. 죄 없는 선량한 늙은 부부의 손으로 죄 많은 자식을 죽게 만드는 행위를 보며 감독은 카타르시스를 느낀 모양이다. 혼자서 말이다. 그건 마스터베이션일 뿐이다. 이런영화는 가차없이 침을 뱉어도 좋다.

 

 

 

2.

 

덕과 탓

대한민국는 자식의 죄는 곧 자식 교육을 제대로 하지 못한 부모 탓이라는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강력 사건이 발생하면 기자들은 어김없이 부모의 인터뷰를 따낸다. 못난 자식을 둔 부모의 답변은 늘 동일하다. 부모는 못난 자식을 대신해서 국민 앞에 사죄를 한다. 죽을 죄는 부모의 몫이고, 죽인 죄는 자식의 몫이다. 화면은 모자이크 처리를 하고 음성은 변조된다. 심지어 어느 가해자 부모는 이제 더 이상 내 자식이 아니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런 식의 인터뷰에 익숙한 시청자는 늘 이런 소리를 한다. “ 부모 입장에서 오죽하면 저런 말을 하겠어 ! "

나는 이런 식의 죄의 전이와 죄의식을 이해할 수 없다. 아들의 죄가 왜 부모의 죄인가 ? 아들이 저지른 죄를 왜 부모가 사죄를하는가 ? 죄란 연대보증적 성격을 띤것일까 ? 그 핏줄이 그 핏줄인가 ?이러한 가족 공범 의식이 다른 나라에 비해 유독 한국을 비롯한 동양에서 발현되는 이유는 자식은 부모 잘 둔 덕을 보려고 하고, 부모는 잘난 자식 덕을 보려고 하는 심리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두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착각하고 있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이러한 태도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영화마지막에서의 부모의 등장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관객은 그것을 통쾌한 복수극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아무리 범죄자라고 해도 부모 앞에서 자신의 목이 잘려나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들은 피를 나눈 가족일 뿐이지, 죄를 나눈 가족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부는 평범한 시민일 뿐이다. 당신처럼 말이다.

 

 

 

기생과 숙주

지나친 가족 연대 서사는 순기능보다는 역기능의 피해가 더 많다. 우리는 이재용이 잘난 아버지 덕때문에 승승장구하는 것을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불법인데도 말이다. 기러기 아빠서사는 겉으로 보기에는 자식에 대한 무조건적 희생의 서사를 가지고 있지만 이것을 뒤집으면 늙어서 잘난 자식 덕을 보려고 하는 욕망과도 겹친다. 등록금 1000만 원 시대는 이러한 숙주와 기생 정신이 탄생시킨 기형적 풍토이다. 이러한 상부상조를 확대하면 족벌은 재벌로 뭉치고, 고향 선후배는유사 가족으로 뭉치고, 회사 직원과 조직은 우리는 하나의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뭉친다. 깡패는 동향으로 뭉친다. 그리고명박은 상득이와 뭉치지, 절대 완득이와는 뭉치지 않는다.꼴에 닭 벼슬도 벼슬이라고 말이다.

우리가 버지니아 총기 난사 사건에서 보인 자발적 굴신은 조선을 침탈한 중국의 장수에게 고개를 세 번 땅바닥에 조아린 조선 왕의 굴신과 비슷하다. 한인 사회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본토에서 보여준 자발적 사죄는 우리가 얼마나 백인에게 쫄고 있었나를 여실히 보여준 꼴불견이 아니었을까 ?( 이와 같은 일이 푸에르토리코나 과테말라에서 벌어졌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 열광적 사죄일까 ? 아니면 모르쇠일까 ? ) 그 모습은 마치 꼬리를 뒷다리 사이로 감춘 개의 꼴이다. 한마디로 꼴불犬 이다. 한 개인의 잘못을 나라 전체의 백성이 사죄하는 꼴은 전체주의적 시각과 다르지 않다. 자식의 죄는 부모 탓이라고 생각하고 초청장을 보낸 영화 속 주인공이나 미국 국적의 한국인의 범죄에 대해 머리 숙여 사죄하는 대한민국 어버이들이나 모두 똑같다. 젓가락 두 짝은 똑같은 법이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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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와 우울.

 

 

 

 

 

 

 

 

 

 

 

 

 

 

 

 

 

 

 

 

 

 

 

                        

 

 

 

 

 

 

 

 

 

 

 

 

 

 

편지는 반드시 수신인'에게 도착한다. 라캉의 말이다. 하지만 우체부의 실수나 천재지변'으로 인하여 늦게 도착하거나 유실된다면 어떻게 될까 ? 혹은 수취인불명이라면 ?!  지연, 유실, 부재'에 따른 전송 실패는 상흔을 남긴다. 우울은 이러한 상흔의 결과이다. 정신분석이란 본질적으로 잃어버린 편지를 찾아주려는 과정'이다. 유실된 편지를 찾아서 편지의 주인에게 돌려주거나, 수신인의 행방을 찾아서 주소를 알아오는 것이 정신과 의사의 역할'이다. 그러고 보면.... 프로이트는 우편배달부'에 가깝다. 지나치게 낭만적인 접근인가 ? 후훗.. 하지만 프로이드'는 좋아할 것 같다.

 

 


 

 

 

1. 날림 막 자막으로 영화 보던 시절

이와이슈운지의< 러브레터 > 는 영화관에서 정식으로 개봉되기 전에 이미많은 사람들이 보았던 영화다. 삐자 테이프로만 30만 개가 유통되었다고 한다. 평단은 외면했고, 대중은 열광했다. 나 또한 이 영화를 시네마떼끄 삐자 막 자막 버전으로 보았는데, 나는 이 영화가 당최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 뒤에 앉은 사람은 날 보고 키는 작지만 머리가 커서 화면이 보이지 않는다고 짜증을 냈고, 나는 앞 사람에게 얼굴은 작지만 키가 커서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투덜댔다. 사실 이 영화를 이해하지 못했던 원인으로삐자에, 날림 자막에, 앞 사람 머리가 스크린전체의 1/3를 차지하는 열악한 관람 환경 탓도 있었지만 사실은 영화 자체가 상당히 어려웠다. 이 영화가 정식적으로 극장에서 상영할 때, 조조할인으로 이 영화를 다시 보았으나 헷갈리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세 번째로 이 영화를 보고 나서야 영화가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이와이슌지 감독, 꽤 좋은 감독인걸 !우리는 그를 러브스토리 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감독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의 영화들은 대부분 사랑을 시작하기 전에 끝나거나 사랑이 끝난 후의 풍경을 담는 감독이다. 정작 영화 속에서는 < 사랑 진행 중 > 인 이야기는 찾을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붕어빵에 붕어는 없는 경우와 동일하다.

 

 

2. 하룻밤에 세 번씩이나 ?!

여자 와타나베히로코 2년 전에 산에서 불의의 사고로 죽은 애인 남자 후지이이츠키를 잊지 못한다.히로코는 우울하다. 그녀는 죽은 지 2년이 지난 애인의 추도식에 참석한다. 그녀는 우울증을 앓고 있는 듯하다. 때가 되면 죽은 사람을 잊고 정상적인 생활 속으로 돌아와야 하는데 여자는 남자가 죽은 지 2년이 지나도록 그를 잊지 못해서 죽고 싶다. 눈 속에 누워서 호흡을 멈추고 자살을 시도하기도 한다. 하지만 숨이란 참는다고 멈추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

 

 

여자는 남자가 옛날에 살던 주소로 편지를 쓴다. 물론 죽은 자에게 보내는 편지이니 답장이 올 리가 없다. 답답해서 그냥 보내는 편지이다. 우리가 산타 할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내듯이 말이다. 그런데히로코에게 답장이 도착한다. 더군다나 여자 히로코에게 편지를 보낸 사람의 이름은 후지이이츠키. 어라?! 정말 죽은 애인에게서 편지가 왔네 ! 우리는 이 영화가 판타지 멜로가 아니라는 점을 알고 있기 때문에 과거에서 온 편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곧이어 밝혀지는 제2의 후지이는 놀랍게도 히로코와 생김새가 똑같은 여자 후지이. 더군다나 죽은 남자 후지이와 여자 후지이는 학교 동기동창이었다. ( 히로코를 연기한 나카야마 미호가 여자 후지이를 동시에 연기한다. 일인 이역이다. )

 

여자 히로코와 여자 후지이는 서로 편지 왕래를 통해서 죽은 남자 후지이를 회상한다. 서로 둘이 좋아했나요 ? 어머, 아니에요. 우린 그냥 그렇고 그런 칠성 사이다 예요. 호호. 그렇군요. 흐흐. 후지이는 어떤 사람이었나요 ? 글쎄요. 좀 독특했어요. 호호. 그래요 ? 흐흐. 이것도 인연이니 우리 언제 한 번 만나서 코가 삐뚤어지게 술을 마셔요. 어때요 ?좋아요 ! 그런데... 혹시 둘이 손만 잡고 자는 그런 사이다는 아니죠 ?호호. 그 사람은....하루에 세 번 했어요. 어머나, 하루에 세 번이나 한 사이다네요 ?칠성 사이다가 아니라 삼성/三性 사이다죠. 그러네요. 호호. 그렇군요. 흐흐.

 

히로코의 편지에 자극받은 여자 후지이는 같은 반 동창 남자 후지이를기억하기 위해 이것저것 기억 속의 잡동사니를 꺼내본다. 그녀는 자신의 모교 도서관 독서 카드를 통해서 동창 후지이가 자신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결국 남자 후지이가 여자 히로코를좋아하는 이유는 히로코가 자신의 첫사랑인 여자 후지이와 너무나 닮았기 때문이다(라는 결론을 유추할 수도 있지 않을까? 러브레터는 사실 멜로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히치콕의 현기증을 닮았다! 이 영화의 성격을 굳이 구분하자면 순정 멜로라기보다는 미스터리 멜로라고 구별짓는 것이 더 합당하다.)

 

히로코 입장에서 보면 죽은 남자 후지이는 히로코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어릴 적 짝사랑의 대상이었던 여자 후지이를 닮은 히로코를 사랑한 것이 된다, 남자는 첫사랑이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두 번째 사랑이다, 넘버2, 어쩌면 히로코는 남자 후지이가 사랑한 여자의 도플갱어이다. 하지만 어쩌랴 ! 시간은 흘렀고, 세월도 흘렀고, 애인은 산 속 메아리가 되었으니 말이다. 우야둥둥...... 모든 것을 이제 다 잊기로 한다.

 

 

3. 애도와 우울증 : 순환과 정체에 대해서

추도식이란 < 애도 > 를 의미한다. 애도란 다 함께 슬퍼함을 뜻한다. 노무현이 죽던 날, 내가 속초 동명항포장마차 방파제에서 코가 삐뚤어지게 술을 마시고 펑펑 운 것은 그에 대한 애도 행위때문이었다. 이처럼 우리는 죽은 자를 위해서 어느 정도 애도 기간을 가진다. 그 기간 동안 죽은 자를 추억하고 함께 슬퍼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모든 문화권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문화인류학적 접근으로 살펴보면 애도는 죽은 자에 대한 예우를 갖춤으로써 죽은 자의 영혼이 자신을 해코지하는 것을 방지하려는 살풀이요, 액막이굿이다.

 

http://myperu.blog.me/20152896891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영화 속 히로코의 슬픔은 애도가 아니라 우울증이다. 애도란 슬픔을 나누는 행위이고, 우울증이란 슬픔을 간직하는 행위이다. 이쯤에서 당신은 슬픔을 나누는 행위와 간직하는 행위가 뭐가 다르냐고 짜증을 낼지도 모르지만,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친절한 곰곰생각하는발 씨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친절하게 이 말의 뜻을 당신에게 설명할 용의가 있다.

 

슬픔을 여러 사람들과 함께 나눈다는 것은 똥을 싸는 것과 같다. 밖으로 내보내는 것이다. 우리는 이 행위를 통해서 몸 속에 있는 독소를 배출한다. 반면 슬픔을 여러 사람들과 함께 나누지 못하고 혼자 간직하는 행동은 똥을 못 싸고 체내에 쌓아두는 것과 같다. 애도는 나눔과 순환이며, 우울은 소유와 정체이다. 히로코는 죽은 남자의 상실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자아의 상실에 고통스러워하는 것이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그것은 우울증 환자들의 자기 비난이라는 것이 사실은자기가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비난인데, 그것이 환자 자신의 자아로 돌려졌다는 것이다. 술 취한 아내가 남편에게 나 같은 여자 만나서 당신에게 미안하다, 라고 말하는 자기 비하의 말투 이면에는 사실은 이런 여자 밖에 못 만나는 당신의 능력 부족에 대한 신랄한 조롱으로 읽을 수도 있다. 이 말도 프로이트의 말이다. 히로코는그동안잃어버린 사랑 때문에 슬픈 것이 아니라 화가 난 것이다. 그녀는 지금까지 애인의 죽음에 대한 애도를 계속 거부해 온 것이다.

 

 

4. 사랑과 감기는 속일 수 없다.

여자 후지이이츠키는 어떤가 ?후지이는 시종일관 독감을 앓고 있다. 카메라가 그녀의 사연을 훑으면 몇 년 전에 독감으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관객에게 알려준다. 지금 딸은 아버지가 앓던 독감을 앓고 있다. 정신과 의사라면 후지이의 독감 < 강박 신경증 > 이라고 판단할 것이다. 그러니깐 후지이가 앓고 있는 감기의 원인은 독감 바이러스에 의한 감염이 아니라 죽은 아버지에 대한 죄의식에 따른 집착이 원인이다. 후지이는 아버지의 죽음을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꾸 기침을 흉내낸다. ” 그녀는 기침을 흉내 냄으로써 죽은 아버지를 계속 상기시킨다. 아버지의 몸 속에 있던 바이러스는 고스란히 딸의 몸 속으로 침투한다.

 

그런데 여자 후지이의 상황은 묘하게 여자 히로코와 겹친다. 히로코의남자친구는 죽은 후에도 히로코에게 영향을 미친다. 살아 있을 때보다 더 강력한 감응력이다. 히로코의 몸 속에는,이승에서 저승으로 보내지 못한, 2년 전에 죽은 후지이가 있다. 내 안에 너 있다. 애도 행위는 슬픔의 절차를 통해서 타자를 이승에서 저승으로 보내는 태도인데, 여자 후지이와히로코는 애도라는 절차 과정 없이 바로 우울증에 빠져서 죽은 타자()은 그녀() 곁에서 떠나지 못하고 맴돈다.

 

그래서 죽은 자는 산 자의 몸 속에서 산다. influenza/감기와 influence/감응력의 공통점은 강력한 전염에 있다. 너무 상투적인 표현이어서 쓰지 않으려고 했으나 이 문장에서는 가장 적절한 표현인 것 같아서 인용한다. 사랑에 빠진 사람과 감기에 걸린 사람의 얼굴은 숨길 수가 없다. 그들은 심한 몸살을 앓는다!히로코와후지이는 같은 병을 앓고 있다.

 

그들은 매우 강력한 하나이다. 히로코는 우울증을 앓고 있고, 후지이는 독감을 앓고 있다. 그들의 공통점은 날마다 훌쩍인다는 점이다. 영화는 히로코가 죽은 남자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애도로 돌아서서 그를 용서하는 것으로 끝난다. 동시에 오타루첩첩산중 얼음 골짜기 마을에 사는 여자 후지이도 독감을 떨쳐버리고 건강을 찾는다. 감독은 이 장면을 교차편집으로 보여주면서 주술의 동일화를 강조한다. 드디어 그들은 사랑하는 남자를, 사랑하는 아버지를보낸다.

 

 

5. /mur은 사랑/amour.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뽑으라고 하면 백이면 백, 메아리 장면과 독서 카드 장면을 뽑을 것이다. 히로코는 사랑하는 사람을 삼킨 설산 앞에서 이렇게 외친다. “ 잘 있나요 ?“ 이번에는 메아리가 된 죽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 잘 있나요 ?“ 여자는 답한다. “ 전 잘 있어요 !“ 남자도 답한다. “ 저도 잘...있습니다 !“ 워낙 유명한 장면이어서 잊혀지기 힘든 장면이다.

 

이 영화에서 메아리는 매우 중요한 상징으로 작용한다. 과학 시간에 졸지 않고 열심히 공부한 사람이라면 메아리의 원리를 알고 있을 것이다. 소리가 산이나 벽에 부딪혀서 되돌아오는 것이 바로 메아리. 히로코가 설산을 향해 잘 있나요 ? 라고 부를 때, 그녀의 소리는 설산의 벽에 부딪혀서 부메랑처럼 되돌아온 것이다. 설산의 벽이 사랑하는 사람을 삼킨 주체라는 점( 남자는 등반 중 사고로 죽는다. ) 을 감안한다면 이 메아리는 사랑하는 남자의 목소리이기도 하다.

 

히로코는 남자가 자신의 곁을 떠난 지 2년 만에 처음으로 그의 안부를 묻는다. 그것은 < 당신이 나만 남겨두고 내 곁을 떠날 수 있어 ? 어떻게 그럴 수 있어 ?> 라고 화를 내는 것과는 다르다. 그녀는 지금 애도를 한다. 이처럼 사랑과 용서의 시작은 바로 발화이다. 사랑이란 주고 받는 것이다.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있을 때에만 가능한 편지의 소통 기능처럼 말이다. 사랑받기 위해서는 사랑한다고 외쳐야 한다. 그래야지 설산도 당신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기 때문에.

 

 

 

6. 그래도 당신을 사랑한다.

나는 그동안이 영화에 대한 당신의 아련한 순정을 깨지 않기 위해서 하고 싶은 말을 미뤘지만 이쯤에서 폭로해야 한다. 미루고 미루면 끝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히로코는 우울을 버리고 애도로돌아섰을까 ? 죽어도 못 보내, 라며 울던 여자가 몇 번의 편지 왕래를 하고 나서 죽은 자를 보내주기로 결심을 한 것일까 ? 정답은 그남자의 지고지순한 사랑의 환상이 깨졌기 때문이었다. 히로코는 남자 후지이의 첫사랑이 아니다. 남자 후지이가 히로코를 사랑한 이유는 첫사랑 여자 후지이를 닮았기 때문이다. 히로코가 보기에 자신은 그 남자의 두 번째 사랑이며, 대리 충족의 대상이 아니던가 ! 환상이 확 깨진 것이다. ...속았나봐 !그래서 놓아주기로 한다. , 이젠 나도 좋은 사람 만나서 행복해지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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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LD / boy .

 

 

 

 

 

 

 

 

 

 

 

 

 

 

 

 

 

 

 

현대인은 편리한 것을 문화적인 것으로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불편한 것을 야만적인 것으로 규

정한다. 레비스트로스'는 그런 사람들을 향해 " 너나 잘하세요 ! " 라고 말한 모양이다. 레비스트로스가 보기에 그러한 업신여김은 천부당만부당한 소리'다. ( 레비스트로스와 사르트르의 논쟁은 유명하다. 레비스트로스가 보기엔 인간은 역사의 의해 진보한다는 사르트로의 논리가 못마땅했을 것이다. 그 말은 결국 원시사회'는 미개하다는 논리가 아닌가 ? 그래서 대판 싸운 모양이다. 싸움에 승패가 어디 있는가마는, 그래도 상처 입은 사람은 사르트르인 것 같다. ) 그는 < 야생의 사고 > 와 < 신화학 > 을 통해서 원시사회가 매우 치밀하게 짜여진 토템 사회'라는 것을 밝혀낸다.

 

레비스트로스는 " 오이디푸스 신화 " 를 설명하면서 근친상간과 수수께끼의 공통점은 서로 분리되어야 할 것들이 결합한 형태라고 말한다. 근친상간은 사회의 규범에 의하면 서로 분리된 채로 있어야 하는 것들의 결합이고, 수수께끼'는 결코 답이 연결되지 않는 물음'이 이상한 방식으로 결합한 것이다. 그러니깐 근친상간은 수수께끼와 구조적으로 유사하다. 수수께끼'란 사실 답이 존재하지 않는 질문이다. 우리가 수수께끼'를 우스갯거리'로 치부하는 이유는 질문과 답 모두 엉터리'이기 때문이다. 이 둘은 결코 짝이 아니다. 그런데 억지로 결합시키는 꼴이다. 그런데 신화의 기본 속성은 이렇게 서로 상관이 없어 보이는 것들의 결합이다. 예를 들면 나무 위의 새둥지를 보았더니 곰이 잠을 자고 있더라는 식이다. 엉뚱하다. 하지만 엉뚱하지 않다. 우리가 이러한 것들을 엉뚱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이성적 사고에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레비스트로스는 이성적 사고에 길들어진 현대인에게 야생적 사고'도 함께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곁가지 없이 본론으로 바로 들어가자.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어머니와 섹스를 한다면, 오대수는 자신의 딸과 섹스를 한다. 이 금기를 깨는 사건이 발생한 시점이 오이디푸스는 아들/boy'이었을 때이고, 오대수는 아버지/old'였을 때이다. 영화 제목 < old / boy > 는 근친상간을 저지른 아버지와 근친상간을 저지른 아들'에 대한 은유라 할 만하다. 영화 올드보이'는 오이디푸스 번안근이다.  

 

개인적으로 오이디푸스 신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캐릭터는 여왕 이오카스테와 스핑크스의 관계이다. 우선 이우진의 정체는 무엇일까 ? 유지태가 연기한 이우진 말이다. 유지태는 소포클레스의 < 오이디푸스왕 > 에 나오는 스핑크스'를 닮았다. 물론 오이디푸스는 최민식'이다. 유지태는 최민식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묻는 말에 대답하세요. " 이보세요, 오대수 씨 ! 15년 동안 감금된 이유에 앞서 15년 만에 풀어준 이유가 더 궁금하지 않습니까 ? " 그는 끊임없이 오대수에게 질문을 퍼붓는다. 마치 길손들 앞을 막고는 " 아침에는 네 개의 발로, 점심에는 두 개의 발로, 그리고 저녁에는 세 개의 발로 걸어다니는 짐승은 무엇인가요 ? " 라고 묻는 친절한 스핑크스 씨'처럼 말이다.

 

스핑크스의 어원은 괄약근'이다. 똥구멍 괴물'이다. asshole ! 이다. 별별 괴물은 다 들어봤어도 똥구멍 괴물'은 처음 들어보았을 것이다. 똥구멍을 살짝 먹물 꼰대 언어'로 바꾸자. 그렇다. 항문이다. 여기에 일정한 기간을 의미하는 " ~기 " 가 합쳐지면 그 유명한 프로이트의 < 항문기 > 가 된다. " 항문기 " 란 무엇인가 ? 똥을 눌 때 쾌락을 얻는 단계로 주로 언어'를 배우기 전인, 사회화 전 단계인 꼬마를 말한다. 이때 똥구멍과 가장 밀접한 주변 인물이 등장한다. 바로 엄마'다. 엄마는 아이'의 똥구멍을 관장한다. 엄마는 배변 습관, 청결을 집중적으로 교육한다. 엄마는 말한다. " 이제부터 너의 똥구멍은 엄마가 감시한다. 똥 누면 잘 닦어 ! 소처럼 엉덩이에 똥딱지가 다닥다닥 붙어 있으면 엉덩짝을 차 버릴 테니깐 ! 알았니 ? " 스핑크스의 주체는 바로 엄마, The Mother 이다. < 스핑크스 = 엄마 > 다.

 

지나친 해석이 아니다. 엉뚱한 해석이 아니다. 소포클레스의 < 오이디푸스 왕 > 을 보면 오이디푸스의 엄마인 이오카스테 여왕'은 스핑크스는 같은 운명을 가진 도플갱어'처럼 보인다. 둘은 모두 아들 오이디푸스의 " 근친상간 " 이 실패하기를 원한다. 그들은 계획을 세운다. 아들을 제거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계획이 실패로 끝나자 둘 다 자살을 선택한다. ( 엄마인 이오카스테는 스핑크스'로 변신하여 아들의 신탁을 막으려는 계획이 실패하자 자살을 한다. ) 이우진은 아이를 돌보는 엄마처럼 최민식을 보살핀다. 먹여주고, 재워주고, 씻겨준다. 또한 그는 최민식에게 수수께끼'를 던지는 인물이다. 이 운명의 싱크로'는 비극적 결말에서도 동일하다. 아들인 최민식이 모든 비밀을 알자 그는 비로소 스스로 자살을 선택한다.

 

1. 영화에서는 이우진과 이수아'는 남매'로 나온다. 하지만 사실 이 두 인물은 한 사람'이다. 학교 과학실에서 남매가 섹스를 할 때 수진은 자신의 거울을 보며 즐기는데 이 장면은 명백한 나르시즘'을 뜻한다. 거울보다 명징한 나르시즘의 상징적 오브제가 어디에 있는가. 나르시즘은 곧 셀프 퍽, 자위'로 이어진다. 최민식이 바라본 것은 남매의 섹스가 아니라 엄마의 자위'이다. 엄마는 아들에게 자위 행위를 들킨다. 이수아가 오이디푸스의 엄마인 이오카스테라면, 이우진은 이오카스테의 하수인인 스핑크스가 된다. 그녀의 이름 수아'는 秀我'다.

 

2. 스핑크스 질문에 대한 도발적 해석 : 아침에는 다리가 네 개이고, 점심에는 다리가 두 개이며, 저녁에는 세 개인 짐승은 ? 정답은 인간이다. 여기서 저녁은 인간의 늙음을 의미하며 다리가 세 개인 이유는 지팡이에 의지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난 이 신화적 해법이 영 못마땅하다. 아침은 구순기이고, 점심은 항문기이며, 저녁은 남근기이다. 저녁에 다리가 세 개인 이유는 남근의 발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가 이 질문의 정답을 알았다는 사실은 이미 오이디푸스가 아이를 떠나서 남성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들의 페니스는 이제 단단해졌다.

 

다소 어렵겠지만 < 항문기 > 로 돌아오자. 프로이트는 성욕의 발달 과정을 구순기 - 항문기 - 남근기'로 구별하였다. 항문기는 언어를 습득하기 전까지의 단계를 의미한다. 언어를 배우는 순간 아이는 똥을 쌀 때 오르가슴을 경험하는 그런 천박한 시기를 떠나 본격적으로 사회화 과정을 배우게 된다.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아이가 사회로 진입하였다는 명징한 징후인 것이다. 영화 < 올드 보이 > 에서 최민식은 스스로 혀/tongue'를 자른다. 여기서 tongue'는 혀'라는 신체 부위를 지시하기도 하지만 " 언어 " 라는 뜻도 내표하고 있다. 결국 최민식이 혀를 자른다는 것은 언어'를 거부하겠다는 태도이다. 이처럼 언어'를 거부한다는 것은 그가 영원히 항문기 이후의 과정으로 진입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어른이 되지 않겠다는 것.

 

여기서 남근기란 성기 중심의 쾌락을 의미한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는 남근기 때 시작된다고 한다. 최민식이 남근기를 거부하고 항문기에 머무른다는 사실은 결국 영원한 오이디푸스 금지'를 의미한다고 보아야 한다. 영화 < 올드보이 > 는 생각보다 풍부한 텍스트를 보여준다. 흥미, 진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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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사회와 그 적들. 

 

 

 

 

 

 

 

 

 

 

 

 

 

 

현대인은 편리한 것을 문화적인 것이라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불편한 것은 곧 야만스러운 것으로 정의한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그것은 착각'이다. 울리히 벡'은 기술 시스템으로 작동되는 현대 문명 사회'가 역설적으로 불완전한 사회'라고 주장한다. 좋은 예'가 전기 공급의 차단이다. 만약에 문명 도시에 전기 공급이 한 달 간 중단된다면 어떻게 될까 ? 아비규환이 따로 없을 것이다. 당장 물을 퍼올리는 펌프가 멈추게 되면 지하철에 물이 넘치게 된다. 대한민국 부의 상징인 타워팰리스의 화장실은 어떻게 될까 ? 똥이 둥둥 떠다닐 것이다. 그 아비규환의 세계'를 주제 사마라구는 < 눈 먼 자들의 도시 > 에서 생생하게 묘사한 바'가 있다. 초고층 빌딩은 현대 최첨단 기술의 총합이지만 그 총합의 부피만큼 재난의 사이즈도 거대해진다. 초가집이 불타면 지붕만 타지만 타워가 불타면 모두가 죽는다. 울리히 벡'은 이러한 기술 사회'를 경계해야 된다고 말한다. 방법은 딱히 없다. 편리함을 조심씩 버리고 불편함을 서서히 받아들이는 것이 사회'를 건강하게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한다. 사회학서의 필독서다. 일독을 권한다.

 

 

 


 

 

 다이하드.

 

 

 

<나카토미 빌딩’> 은 하이테크 신기술로 지어진 일종의 <바벨탑> 이다. 방재와 보안이 완벽한 빌딩은 오히려 그 이유로 인하여 경찰의 빌딩 내 투입이 거부된다. 완벽한 보안 경비 시스템이 오히려 재앙을 부른 꼴이다. 만약에 이 영화의 무대가 지은 지 50년이 지난 재개발 은마 아파트에서 벌어졌다면 테러리스트들은 쉽게 소탕되었을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완벽한 보안 시스템은 오히려 위험한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존 맥클레인 형사가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있었던 이유는 디지털 장비가 아닌 아날로그 장비때문이었다. 그가 가진 최고의 무기는 권총도 아니고, 컴퓨터도 아니며, 위치추적장치도 아니고, 목소리인식시스템도 아니다. 그것은 낡은 <무전기> 였다. 이영화는 일종의 무기판 <다윗과골리앗의싸움>이다. 첨단 무기 대 한물간 무전기의 격돌인 셈이다.

존 맥클레인 형사에게 있어서 이 무전기는 일종의 검은 안락의자와 같은 역할을 담당한다. 정신과 상담을 받을 때 눕던 그 환자용 안락의자 말이다. 그는 끊임없이 밖의 수호천사와 소통을 함으로써 외로움을 견디며 자신의 상실을 치유한다. ( 빌딩 밖에서 순찰을 하던 흑인 형사는 백인 형사의 멘토이자 멘티이다. 그들은 모두간댕거리는자지를소유한 거세 직전의 불쌍한 형사들이다. 흑인 형사 알 파웰은 실수로 13살 소년을 쏘아 죽인 후, 더 이상 권총/페니스를 발사/사정하지 못한다. 그 또한 거세 직전의 형사다 ! 이들 짝패는 서로의 멘토와 멘티가 되어서 서로를 위로한다. 사실 존과 홀리의 화해의 포옹보다는 존과 알의 포옹이 더 감동적이다. )

무전기라는 상징성이 말하듯, 존 맥클레인 형사5,60년대 포드주의에 대한 향수를 대표하는 노동자 인물이다. ( 그는 오로지 육체의 힘으로만 상대를 제압한다. ) 이 영화는 자본과 기술에 대한 불안과 불만이 반영된 작품이다.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기술이 발달한 사회일수록 재앙의 리스크도 높아진다고 경고한다. 최첨단 기술이 접목된 고층 빌딩일수록 화재에 인한 재난도 높아진다는 것이다. 단독주택 화재와 63빌딩에서의 화재를 떠올려 보라. 디지털 시대도 마찬가지다. 해킹에 의한 금융 전산망과 기계 오작동은 자칫하면 엄청난 재난을 초래한다. 이제는전기가 며칠만 끊겨도 국가 전체가 멈추게 된다. 사람들은 더위나 추위에 죽을 것이고, 냉장고는 음식들의 시체보관소가 될 것이며, 하루 종일 물을 끌어올리는 지하 펌프가 멈추면 지하철은 물바다가 될 것이다.

이처럼 기술의 발전은 영화 속 나카토미 빌딩처럼 보다 완벽한 방재와 보안 시스템이 최악의 조건을 만들 수도 있다. 기술의 발전은 위험을 증가시킬 뿐이다. 오히려 가장 안전한 것은 디지털이 아니라 똑딱이 버튼이 달린 아날로그. 더 나아가 맨손이다, 맨발이다. 어쩌면 인류의 희망은 아이폰 따위의 기술이 아니라 존 맥클레인 형사의 씩씩한 맨발처럼, 단순한 자전거가 세상을 구원할 수도 있지 않을까 ?

사람들은 <아이폰> 이 세상을 변화시켰다고 말한다. 나는 사람들이 그런 소릴 할 때마다 나의 페니스보다는 2배 작은 가운뎃손가락을 올리며 엿먹어라, 를 외치고 싶다.클린턴이 부시에게멍청아, 문제는 경제야! “라고 말했던 것처럼,나 또한 이렇게 말하고 싶다. “ 멍청아, 문제는 하이테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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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이라는 숫자.

 

 

 

 

 

 

 

 

 

 

 

1.  멜로는 엇갈림의 서사다. 엇갈리지 않고 오다가다 다 만나면 그건 텔레토비지멜로가 아니다. 멜로는 시간, 공간, 벡터, 이 세 가지 중 하나라도 물리적으로 달라야만 성립한다......멜로 드라마의 주인공들은 만날 듯 만날 듯하면서도 만나지지 않는다. 그들은 너무 빠르거나 느리다.

-김영하의 영화이야기

 

2.   나를 빈방으로 끌고 들어가는 여백이 고맙다고, 청파에는 골목이 많고 골목이 많아 가로등도 많고 가로등이 많아 밤도 많다고, 조선낫 조선무 조선간장 조선대파처럼 조선이 들어가는 이름치고 만만한 것은 하나 없다고, 북방의 굿에는 옷(衣)이 들고 남쪽의 굿에는 노래가 든다고
 

- 당신이라는 세상, 부분

 

3.   <철도원>에 실린 여덟 편의 단편 중에서 '철도원'과 '러브 레터' 두 편이 영화화되었고, '츠노하즈에서'와 '백중맞이'는 텔레비전 드라마로 방영되었는데, 이는 나오키 상 제정 이래 최초이자, 단일 소설집으로는 가장 많은 작품들이 영상화된 이례적인 기록이기도 하다. 이 가운데 영화 「철도원」은 99 부산 국제 영화제에서 상영된다.

 

- 출판사 소개글, 부분

 

 


 

 

김영하'는 멜로'를 어긋남의 서사'라고 말했다. 오고가다 다 만나면 그것은 텔레토비'이지, 멜로 영화'가 아니라고 말이다. 강재'는 변두리 바닥 깡패'다. 조직이 운영하는 비디오 가게 영업장을 관리'하는, 30대 중반의 넘버 3'다. 자신의 동료는 조직 오야붕이 되어 있고, 자신은 새파랗게 어린 후배들에게도 치이는 꼬붕 아닌 꼬붕이 되었다. 아귀다툼 속 변두리 깡패들의 바닥'을 보고 있자니 " 조선낫 조선무 조선간장 조선대파처럼 조선이 들어가는 이름치고 만만한 것은 하나 없다 "는 어느 젊은 시인의 시'가 생각났다. 한때 조선이었던 이 나라는 여전히 살아가는 데 팍팍하다. 아라비아 숫자 3은 묘하게 비루한 느낌을 준다. 3은 그 어느 영역으로도 속할 수 없는 애매모호한 경계'이다. 12시 정오와 6시 저녁 사이이며, 청년과 노년 사이'이다. 강재... 그는 딱 숫자 3 같은 존재이다. 그렇게 끼인 존재이다. 점심이라고 하기에는 늦고, 저녁이라고 하기에는 이른 오후 3시의 짜장면처럼 초라한 강재는 깡패라고 하기에는 여리고, 여리다고 하기에는 폭력적인 인물이다.

 

 

중국 여자 파이란은 그린 카드를 위해 강재와 결혼을 한다. 위장 결혼'이다. 하지만 강재에게 파이란'은 아내이면서 동시에 아내가 아니다. 그는 기혼이면서 동시에 미혼이다. 그들 법적 부부는 단 한 번의 엇갈림이 있었을 뿐, 서로 마주친 적이 없다. < 파이란 > 이란 영화를 다시 보다가 문득 내가 강재의 입장에서 서사를 읽는 것이 아니라, 파이란의 입장에서 이 영화를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난 파이란의 시선으로 강재를 바라보고 있던 것이다. 사내 새끼'가 강재를 안쓰러워 하다니......

 

 

 

몇 년 전, 도망치다시피 집을 떠나 강원도 속초에 머물렀었다. 영화 속 파이란처럼 그곳에서 1년을 혼자 버텼다. 춥고 배 고팠다. 첫눈에 반한 여자와는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10년 연애 끝에 헤어졌다. 첫눈에 반했던 그 여자 생각을 하며 동명항 방파제 앞 가게에서 밖을 바라보면 대설 특보'가 내려진 방파제가 보였다. 첫눈에 반한 여자와 폭설이라...... 어쩌면 나는 그 유배지'에서 파이란처럼 헤어진 정인'을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강재처럼 저렇게 방파제에서 통곡 한 적이 있다. 노무현의 노제'를 다녀와서 동명항 술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방파제에 앉아서 통곡을 했다. 비단 노무현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랬을까 ? 영화 속 파이란의 손끝, 파란 정맥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오늘, 약속이 있었으나 계속 잠만 잤다. 잠을 자면서 꿈속에서 결정을 했다. 오랜 고민이었다. 결정을 하고 나니 환해졌다. 최승자 시인의 시'처럼, 터널은 끝에 가서야 환해진다. 나를 포함한 모든 것을 용서하기로 했다. 끝에 가서야 환해진다는 시인의 말, 요즘 계속 생선 가시'처럼 걸려 있다.

 

 

 

 

 

 

 

http://myperu.blog.me/20150522526 : 파이란, 결이 좋은 나무를 잃었다.

http://myperu.blog.me/20152896891 : 파이란, 동명항 방파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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