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정도 팔자 




                        광고에서 제일 많이 활용하는 감정은 " 행복 " 이다. 광고 모델은 항상 웃는다. 이제는 닭다리를 뜯어도 행복해서 입이 귀에 걸린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 중에서 몇몇이 쇼핑 중독 증상을 보이는 것은 상품에 깃든 행복을 돈을 주고 사기 위해서다. 하지만 이 행복은 뚜껑 열린 탄산음료와 같아서 시간이 지나면 톡 쏘는 탄산은 휘발되고 밍밍한 단맛만 남는다. 이제는 집이 안락한 생활 공간이 아니라 택배 보관소로 전락하고 만다. 


반면에 소비자의 " 걱정 " 을 이용하는 광고도 많다. 예를 들어 진통제 광고는 광고 모델에게 약을 먹지 않을 때 발생하게 되는 두통, 치통, 생리통 연기를 하도록 지시한다. 구강청정제 광고도 마찬가지다. 치열이 고른 광고 모델이 웃기 전에 발생하게 되는 상황극은 주위 사람들이 입 냄새 때문에 코를 막고 인상을 쓰는 장면'이다. 이처럼 " 걱정 " 이라는 부정적 감정( : 공포, 두려움, 불편 따위)을 상품 판매에 이용하는 광고는 광범위하다. 케이블 티븨 광고의 그 흔한 멘트를 떠올려보라. 발냄새가 걱정이시라고요 ? 입 냄새가 걱정이시라고요 ? 잦은 회식으로 인한 숙취로 고생하신다고요 ? 그럴 땐 컨디션 ~  


그래서 현대인은 상품 소비를 통해 행복은 사고 걱정도 팔자 !  당연히 걱정 광고를 시청하는 소비자의 걱정이 클수록 광고 효과도 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광고주가 모를 리 없다. 언론과 함께 종교도 일종의 걱정을 파는 상품'이다. 죽음에 대한 걱정만큼 쓰빽따끌한 걱정은 없다. 종교는 필연적으로 죽음을 다룬다. 그런데 죽음에 대한 공포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광고주가 있다. 이단이 대표적이다. 신천지가 시한부 종말론을 주장하는 것은 종말론이라는 거대한 < 걱정 상품 > 을 판매하기 위해서'다. 종말이 걱정이시라구요 ?  걱정하지 마세요. 여기 신천지가 열립니다. 이제 곧 불바다에서 물놀이합시다아 ~ 


그래서 그들은 예배를 올릴 때마다 현세가 말세다 _ 라는 말을 술 버릇처럼 내뱉는다. 그런데 걱정을 파는 광고가 지나치게 걱정을 과대 포장하게 되면 역효과가 난다. 예를 들어 금연 캠페인 광고에서 폐암 말기 환자가 나와서 보조 기계의 도움을 얻은 목소리로 금연하세요, 금연하세요, 금연하세요 ~  라고 강조하게 되면 흡연자들은 짜증이 나서 채널을 돌리게 된다. 그 광고는 자기 자신도 그렇게 죽을 수 있다는 암시이기에 공포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회피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코로나 때문에 모든 이슈를 빨아들이고 있다. 


설상가상, 선거철이다 보니 미래통합당에서는 입에 거품을 물며 코로나 공포를 이용하고 있다. 그런데 말입니다. 과연 이 선거 전략이 제대로 먹힐까 ?  걱정이라는 감정이 잘 팔리는 상품이기는 하나 지나치면 소비자는 회피 반응을 보이게 된다. 내가 보기에는 신천지 코로나는 미래통합당에게 호재라기보다는 악재가 될 가능성이 높다. 















+

걱정을 상품으로 파는 곳 중에 하나는 언론이다. " 걱정 상품 판매 회사 " 가 바로 언론사인 것이다. 그들은 항상 걱정을 과대 포장하는 경향이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에 따른 사망률은 일반 감기와 비교해서 그다지 높지 않다. 일반 감기로 인해 사망하는 사망자 수가 연간 2370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로나 감염은 마치 치사율 100%의 페스트 전염처럼 다루고 있다. 한국인이 일반 감기에 의한 합병증으로 사망하는 수가 연평균 2370명이다. 한달에 평균 197명이 감기로 사망하고, 하루에 평균 6,7명이 사망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재앙인가 ? 우리가 지금 코로나에 대하여 공포를 느끼는 이유는 사망자 수가 실시간으로 생중계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결코 재앙이 아니다. 한국인은 하루에 평균 705명이 죽는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하나다. 쫄지 마라, 쫌 ! 코로나 좆도 아니다. 중국인 봉쇄 안 하냐 _ 이런 띨띠리 같은 소리는 하지 마시고.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푸른괭이 2020-02-28 17: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열과 병에 취약한, 아픈 아이를 키우는 엄마임에도 너무 공감합니다ㅠ 바이러스보다도 불안 때문에 힘드네요, 거참.

곰곰생각하는발 2020-02-28 17:56   좋아요 0 | URL
저도 눈치 때문에 억지로 마스크는 쓰긴 하는데 이걸 왜 껴야 하는지 공감이 안 갑니다. 공포가 너무 지나치게 과대 포장되고 있습니다.

가넷 2020-02-28 23: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맞는 말씀입니다. 코로나 자체의 위험성보다는 불안이 주는 위험성이 더 큰 것 같아요. 에볼라 바이러스처럼 80%이상이 죽는 것이라면 모르겠지만....

항상 이런 불안과 공포를 조장하는 언론과 정치인의 행태는 못마땅합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20-02-28 23:18   좋아요 0 | URL
사망자가 속보로 실시간으로 중계되니 불안이 폭증하는 겁니다. 한국인 하루에 705명이 죽어요. 일반 감기로도 하루 6명이 죽습니다. 마치 페스트처럼 난리를 피우니..

라로 2020-03-04 18:30   좋아요 2 | URL
오늘 뉴스에서 에볼라를 97.5% (에볼라에 걸린 사람도) 예방하는 백신이 개발되었다고 뉴스에 나오는데 그 말을 하는 WHO대표의 목소리가 너무 감동해서 우는것처럼 들렸는데, 에볼라를 무서워하던 저는 얼마나 감격을 했는지.....암튼 에볼라는 정말 무서운 전염병이죠. 인간이 거둔 성과에 경의를 표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이 소식이 그냥 묻히는 것 같아 안타까와요.

곰곰생각하는발 2020-03-04 18:40   좋아요 0 | URL
짝짝짝 ! 이런 백신의 개발은 정말 인류 모두 박수를 쳐야 합니다. 위대한 업적인 거죠. 에볼라에 비하면 코로나는 정말... 그냥 일반 감기 수준으로 보이는데 너무 공포가 과대표되어서 난리도 아닙니다. 거리 걷다 보면 미칠 것 같아요. 국민 모두가 마스크를 껴서 공포 영화 보는 것 같다니까요.
 














코로나와 신천지 : 띄어쓰기가 전혀 안 된 문장 






                                                                                 아버지가 가방에 들어가는 경우가 있다( " 아버지 가방에 들어가셨다 / 아버지가   방에 들어가셨다 ). 띄어쓰기를 잘 못하면 발생하는 참사다. 이처럼 정확한 문장의 뜻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낱말과 낱말 사이에 간격을 유지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연인 사이가 아니라면 서로 대면 대화를 나눌 때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너무 가까이 다가가서 말을 하는 것도 선을 넘는 것이고 그렇다고 너무 멀리 떨어져서 대화를 나누는 것도 선을 넘는 것이다. 그런데 종종 결집과 결속을 위해 혈맹을 강조하는 경우가 있다. 사장이 직원에게 가족 이데올로기를 강조하는 경우다. 가족 같이 지내자  문장이 " 가  좆같이 지내자  변질되는 경우는 흔하디흔하디흔하디흔하다. 또한 며느리를 딸처럼 생각하겠다는 시어머니의 맹세처럼 간사한 말도 없다. 며느리를 딸처럼 생각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며느리는 딸이 될 수 없다는 전제에서 출발한 사탕발림이다. 이처럼 띄어쓰기는 무시한 채 관계를 맺으려고 하면 메시지는 오염될 수밖에 없다. 띄어쓰기 잘하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다. 그런 점에서 신천지의 예배 방식은 띄어쓰기가 전혀 안 된 문장을 연상시킨다. 하얀 소복으로 통일한 채 다닥다닥 붙어서 이만희 교주에게 경배를 드리는 모습은 마치 컨템퍼러리 아트 같다는 느낌마저 준다. 신천지가 이단이자 밀교이기 때문에 집단의 내향적 결속을 위해 가족주의를 강조한 결과인데 외향적 운동성을 가진 코로나와 조우하면서 재앙이 된 경우이다. 이처럼 가족주의는 득보다는 실이 많은 결속의 방식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20-02-26 21: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2-27 14: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수다맨 2020-02-27 09: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며느리를 딸처럼 생각하겠다, 이 말 듣고 뿜었습니다 ㅎㅎㅎ 돌아가신 친할머니도 우리 엄마한테 저런 말을 쓰셨지요. 딸같이 생각하겠다고.
그런데 김장철이 되면 친할머니는 세 명의 친딸들, 제 고모들과 그 가족들에게 먹일 김치까지도 엄마에게 담그라고 하셨던 것이 생각납니다. 해종일 엄마와 제가 김장을 담그면 한밤에 고모들이 김치통 들고 우리집으로 왔고, 그때껏 노인정에 있다가 돌아온 할머니가 친딸(!)들에게 아낌없이 김치를 퍼주시고는 했지요. 그러면서도 우리 할머니는 엄마한테 ‘딸같이 생각한다‘는 말을 심심찮게 했습니다.
며느리를 딸처럼 생각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사탕발림이라는 말씀에 백 번 공감합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20-02-27 14:10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며느리 내 딸 타령은 이타주의가 아니라 이기주의죠.
 










■ 영화 << 기생충 >> 에서의 근세에 대하여







                                                               영화에서 " 지하실 : 지하 공간 " 은 대부분 은폐된 악덕이 사는 공간이다. 알프레드 히치콕의 << 사이코 >> 에서 지하실은 아들이 죽은 어머니의 백골을 숨긴 장소이다. 배우 안소니 퍼킨스이 연기한 나약한 아들은 죽은 어머니의 목소리(죽은 망령의 명령)을 거역하지 못한 채 살인을 대리하는 캐릭터다. 그는 어머니라는 타자의 욕망을 실천하는 집행자'이다. 하지만 죽은 어머니라는 망령의 명령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환청이기에 결국은 아들이 만들어낸 허구에 불과하다. 아들은 어머니라는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 


영화 << 기생충 >> 에서도 지하 공간은 매우 중요한 공간이다. 이 영화에서 지하 인간, 근세(박명훈 분)는 박사장이 지하실에 가둔 자신의 원초적 욕망, id(이드)이다. 그것은 아무것도 모르고 날뛰는 천둥벌거숭이'이다.  박사장이 사회화 과정에 성공한 " 부르주아-자아 " 라면 근세는 구순기 이후의 사회화 과정에 실패한 " 원초적 본능(무의식의 욕망) " 에 가깝다(구순기 고착).  공갈 젖꼭지를 물고 바나나를 주식으로 삼는다는 캐릭터 설정은 그가 이유식에 머무는 갓난아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퇴행이 아니라 고착에 가깝다. 


다시 말해서 박사장이 사회에서 성공한 자아를 대표한다면 근세는 성공한 자아의 이드'이다. 자아와 이드의 대립은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벌어지는 투쟁이다. 영화 << 기생충 >> 은 그것을 눈에 보이는 이미지로 시각화했을 뿐이다. 근세라는 캐릭터에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지점은 부호의 사용이다. 모스 부호는 점과 선으로 구성되었다는 점에서 언어의 기표라기보다는 약호에 가깝다고 보아야 한다. 라캉의 사유를 빌리자면 근세는 언어의 세계인 상징계 진입에 실패한 채 상상계에 머문다. 이 영화가 인디언 패티쉬에 집착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인디언은 문자 언어를 가지지 못했다. 


공갈 젖꼭지, 바나나 이유식, 언어 습득 실패(옹알이)의 상징성을 종합하면 근세는 생후 6개월~18개월 사이의 어린아이'이다. 상상계가 언어와 주체가 형성되기 이전 무질서하고 불안정한 욕망이 들끓는 무의식의 세계이자 법과 규범의 지배에서 자유로운 공간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단계적으로 사회화 과정을 학습하지 못한 채, 판도라 상자가 열리자마자 용수철처럼, 불쑥 야외 파티장에 튀어나온 근세에게 성문법의 질서에 순응하라는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부르주아적 애티튜드에 익숙한 박사장에게 있어서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근세는 자신의 쌍생아이자 


지킬 박사의 하이드이며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nothing 이다. 근세는 인식의 세계로 뛰쳐나와 칼을 휘두른다. 물론 이 학살은 계획에 없는 일이다. 무의식의 다른 이름은 무계획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씨네21 No.1243 : 2020.02.25 - <기생충> 스페셜 에디션
씨네21 편집부 지음 / 씨네21(주간지) / 2020년 2월
평점 :
품절



​                               


기  생  충  과    화  엄   :










시각적 쾌락 너머 











- < 화엄 Majestic Splendor, 1997 > 이불









기 98마리의 물고기가 투명 비닐백에 담겨 미술관 전시실 벽에 걸려 있다. 바늘 달린 비즈 구슬( and 스팽글)이 물고기 몸에 촘촘히 박혀 있다.  그 무엇보다 화려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전시된 생선은 썩기 시작하고 이내 악취가 진동하기 시작한다.  


어제보다는 오늘의 전시가 더욱 고약한 악취를 발산한다.  설상가상 미술관은 악취를 감추기 위해 방향제와 탈취제와 향수를 살포한다.  악취와 향수가 겹쳐지는 순간,  더욱 고약한 악취로 되돌아온다.  은폐가 오히려 확산의 주범이 된다. 전시의 종착역은 명약관화하다.  생선의 몸은 결국 물과 휘발성 기체로 변하고 결국에는 뼈와 싸구려 인조 장식품들만 남는다. 설치 미술 작가 이불(LEE BUL)의 의도는 분명하다. 플라스틱 꽃으로 화장한 물고기의 시각적 쾌락 너머 썩어가는 몸의 후각적 본질을 보라 !  1997년 뉴욕현대미술관에 전시되었다가 악취로 인해 며칠 만에 강제 철거된 설치 미술 작품 << 화엄 Majestic Splendor >> 이야기'다1)


작가의 고백에 따르면   :    비즈 공예에 사용되는 구슬은 작가가 어릴 때 어머니가 부업으로 구슬백 만드는 일을 한 것에서 출발했다. 이 작품에 사용된 " 구슬 " 이라는 오브제는 가난한 여성에게는 생계 수단이지만 부유층에게는 부의 표식이었다. 또한 그것은 살의 비천함을 감추기 위한 코르셋이기도 하다. 영화 << 기생충 >> 을 다루면서 이불의 << 화엄 >> 을 소환하는 이유는 냄새라는 키워드로 매우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한 작품이라는 공통점 때문이기도 하지만 두 작품은 욕망과 억압 그리고 폭로'라는 구조의 유사성 때문이기도 하다. 


기택(송강호 분) 가족에게 있어서 박사장 가족은 자신들이 욕망(하는 판타지의 재현)의 투사'이다. 그러므로 기택 가족은 박사장 가족의 욕망을 욕망한다. 라캉의 말을 빌리자면 "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 "  7년 전 구상한 제목이 원래는 << 데칼코마니 >> 였다는 점은 " 나의 욕망은 곧 타자의 욕망 " 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이 영화에서 짜빠구리 못지않게 회자되었던 것은 박사장 집 인테리어 소품-들'이었다. 쓰레기통 가격은 250만 원이었고, 식탁 테이블 가격은 500만 원이었으며, 의자는 2500만 원짜리 소품이었다고 ??!!!!     바로 이 소품들은 << 화엄 >> 에서 죽은 물고기의 살을 파고들었던 바늘 달린 구슬이다. 


250만 원짜리 쓰레기통 소품은 시각적 쾌락을 극대화한 바늘 달린 플라스틱 오브제이면서 비천한 몸(본질)을 감추는 코르셋'이다. 우리는 흔히 지하실에 갇혀 사는 근세 가족과 기택 가족을 동일한 계급의 연장으로 보지만 사실 근세의 페르소나는 기택이 아니라 박사장'에 더 가깝다. 식구(食口)의 사전적 의미가 " 한 집에서 함께 살면서 끼니를 같이하는 사람 " 이라는 점에서 근세는 박사장의 식구이자 동거인이며 불쑥 튀어나온 이드'이다. 그것은 박사장 집 지하실에 가둔 박사장의 리비도(무의식)'이다.  그렇다면 냄새의 주체는 누구인가 ?  당연히 그 냄새의 주체도 박사장이다. 


박사장은 자신의 몸에서 나는 냄새에 코를 막고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 것이다. 냄새의 출현으로 인하여 기택이 깨닫는 것은 자신이 리스펙했던 타자의 정체다. 기택은 미쳐 날뛰는 근세의 사회화된 캐릭터가 박사장이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                   



1)   화엄 , 1997  :  이 작품은 죽은 생선을 구슬과 시퀸(sequin) 등 으로 화려하게 장식하고 비닐에 담아 벽을 빽빽하게 채웠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물고기들이 부패하는 과정을 작업의 과정으로 삼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생선들은 부패하였고 비닐 속에는 생선 썩은 물이 고였으며 썩는 냄새는 온 미술관을 덮었다. 뉴욕현대 미술관은 전위적인 작품의 경연장이라 할 만큼 엽기 적인 소재의 작품도 흔히 전시를 하는 곳이나 이불의 [화엄]만큼은 그들이 감당하기 힘들었다. 급기야 작품은 전시 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철거되었다. 현대 미술은 썩은 생선이든 그 어떤 재료든 작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반증적으로 보여준 전시이기도 했다. 생선의 몸은 결국 물과 휘발성 기체로 변했고 싸구려 인조 장식품들만 남았는데, 생선은 여성의 육체를 장식품으로 간주되는 한국 문화에서의 여성성을 함축적으로 의미한다. 그녀가 생선을 화려하게 꾸며 작품을 제작한 모티브는 유년시절 어머니가 가내 수공업으로 시퀸을 붙여 장식하는 수출용 가방을 만들었던 기억으로부터 연유되었다. 시퀸은 경제 발전에 공헌한 한국 여성의 값싼 노동력의 상징이고, 썩어가 는 생선은 몸 바쳐 희생하는 여성의 미덕과 그를 당 연시하고 강요하는 사회적인 관습에 대한 반기로서 작용한다. 노동으로 장식된 생선을 통해서 계급과 젠더에 있어서의 한국 여성의 환상과 무상함을 표상하려 하였다(채드웍 2006). 하지만 정작 그녀에게 “페미니스트이냐?” 라고 질문 하면 “과거에는 그랬으나 지금은 아니다.”라고 대답한다. 페미니즘이라고 단정 짓는 것이 자신의 작품을 국한되고 한정되게 한다는 생각에서이다.


- 음식을 소재로 한 현대 여성미술가의 작품 연구, 나정기 김형섭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폭력의 여러 양상'에 대하여









숙대 레디칼 페미니스트의 트랜스젠더 A 씨 입학 반대 사태를 두고 리버럴 페미니스트가 성급하게 " 저것은 페미니즘이 아니다 " 라고 손절했을 때 꽤 웃기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우나 고우나 내 새끼이듯이, 저 혐오의 페미니즘도 결국에는 페미니즘의 한 분파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그 혐오를 경계하되 부끄러워 할 필요는 없다. 누군가 나에게 서프러제트 운동을 높이 평가한다면서 숙대 레디칼 페미니스트를 비판하는 것은 " 성깔의 모순 " 이라고 지적했는데,  나는 이 레디칼 페미니스트의 지적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레디칼 페미니즘과 서프러제트 운동을 동일한 성향으로 착각했기 때문이다. 익명이 보장되는 대자보라는 방식을 통해서 말로써 소수자를 혐오하는 폭력 방식과 여성 참정권을 위해서 몸으로 싸웠던 서프러제트의 폭력 중에서 어느 쪽이 더 폭력적일까 ?   레디칼 페미니즘은 " 급진적 - " 이라기보다는 " 근본주의 - " 에 가깝다. 





타임즈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으로 뽑힌 스티븐 핑커의 <<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 를 읽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욕을 한 적이 있다. 이웃 여러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욕을 하면 그 욕은 뭣이다 ?! 그렇습니다. 쌍욕'입니다.                  나는 이 두꺼운 책을 읽는 내내 쌍욕을 한 바가지 퍼부었다. 그의 주장은 인간 본성은 원래 폭력적인데 역사와 과학의 진보로 인하여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폭력이 감소한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온갖 통계 자료를 끌여들여서 폭력으로 인해 사망한 사람의 숫자가 감소했기에 현대는 폭력의 시대가 아니라 평화의 시대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가 놓치고 있는 것은 폭력의 양상이다. 옛날에는 총과 칼로 사람을 죽여서 땅과 재산을 탈취했다면 현대는 합법적 방식으로 폭력을 행사한다. 예를 들면 노조의 복직 투쟁으로 인해 다시 복직한 노동자의 책상을 화장실 앞에 두고 그 어떤 일도 시키지 않는 사측의 평화로운 관용은 폭력적인가, 비폭력적인가 ?  내가 보기에는 차라리 몽둥이로 뒤통수 때리는 것보다 이 행위가 더 폭력적이다. 과거에 비해 폭력이 감소하는 이유는 선한 천사의 숭고한 승리 때문이 아니라 폭력의 양상이 다른 얼굴로 둔갑을 했기 때문이다. 신체를 살해하는 방식보다 효과적인 것은 합법적 테두리 안에서 인격을 살해하는 방식이다. 그것은 진보의 결과가 아니라 진화의 결과다, 보다 더 나쁜 쪽으로 ! 스피븐 핑커는 팩트를 수집해서 나열한 후, 그것을 근거로 자신의 주장이 과학적이라고 말한다. 과학은 사실의 집합이라는 데 동의한다. 집이 돌로 지어지듯 과학은 사실로 이루어지니까. 그러나 돌로 쌓아 올렸다고 해서 반드시 집이 되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사실을 모았다고 해서 반드시 과학이 되는 것도 아니다. 앙리 푸앵카레의 말씀이시다. 핑커야, 좀...... 새겨 들어 !










무시와 방관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가 창조한, 심박한, 대따 훌륭한 폭력의 방식이다. 옛날에는 폭력을 행사하기 위하여 망치와 도끼, 총과 칼(혹은 몽둥이와 회초리 따위)을 들었지만 지금은 무시와 방관이 그 무엇보다도 폭력적인 도구가 되었다. 그것은 손에 잡히지 않고 눈에 보이지도 않지만 타격감과 상해 강도는 매우 높은 도구이다. 영화 << 기생충 >> 에는 눈에 보이는 폭력과 눈에 보이지 않는 폭력이 존재한다. 전자는 근세와 기택의 폭력이고 후자는 박사장(이선균)의 폭력이다. 죽어가는 두 사람(기정, 근세) 앞에서 코를 막고 인상을 쓰는 박사장의 비폭력적인 얼굴은 그 무엇보다 비인간적인 얼굴이며 폭력적인 얼굴이다. 그가 기택 가족과 근세 가족에게 보인 폭력의 이름은 무시'이다. 






영화 << 기생충 >> 이 부르주아 개인의 은밀한 무시와 방관을 다룬 영화라면 << 세월호 >> 는 국가라는 주권의 은밀한 무시와 방관을 다룬 사건이다. 이 사건은 국민의 S.O.S 요청에 대하여 국가가 인상을 찡그리며 코를 막고 팔짱을 낀 채 무시와 방관으로 국민에게 폭력을 행사한 결과이다. 폭력의 방식이 역사를 관통하면서 새로운 방식으로 진화했듯이 국가의 지배 방식 또한 국민을 억압하는 쪽에서 방치하는 쪽으로 변했다. 이 시대에 주권의 역할은 국민을 보호,탄압,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을 모호한 곳에 두는 것이다. 팽목항은 한국의 아우슈비츠이자 관타나모 포로 수용소'다. 스피븐 핑커의 논리대로라면 박근혜가 침몰하는 세월호에 대해 보인 무시와 방관은 비폭력적 애티튜드'에 해당된다. 스티븐 핑커가 사이비 과학자인 이유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