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근두근 네 인생 !











부모의 자식 사랑을  조건 없는 사랑이라고는 하지만 한국 부모의 자식 사랑은 어딘가 유별난 구석이 있다. 유물론적 변증법의 관계'라고나 할까 ?  한때 침 좀 뱉고 껌 좀 씹던 한국의 자식들이라면 아마도 부모에게서 가장 많이 들었던 소리는 " 뼈 빠지게 고생해서 키웠더니..... " 일 것이다. 고생에도 레벨이 있나니 한국 부모의 내리사랑은 " 탈골의 지경 " 에 가깝다. 그런데 이 말투는 상당히 계산적이다. 자식을 투자의 대상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뼈 빠지게 고생해서 번 돈을 자식에게 투자했는데 자식이 기대에 엇나갔을 때 내뱉는 정서가 배은망덕이다. 


성은이 망극을 기대했던 부모는 실망이 이망저망 !  부모 자식 관계를 투자자와 투자 대상으로 삼다 보니 한국 부모는 자식의 소유권을 강하게 주장하는 편이다. 그러다 보니 자식을 독립된 주체로 인정하기보다는 관계대명사 안에 가두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자식에 대한 간섭과 개입이 시작되고 시월드라는 해괴 망칙한 월드비전이 이십 색의 총천연색으로 펼쳐진다. 투자 금액이 높으면 높을수록 상품에 대한 기대도 높은 법이어서 하층민보다는 상류층 부모의 (엇나간 자식에 대한) 하악질은 그 수위가 더 높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한국의 부모 자식 관계는 < 유사 ㅡ 채권자와 채무자 > 관계'다. 


당연히 소유권과 명령권은 채권자에게 있다. 채권자는 채무자에게 연출자로서 배우에게 자신의 이상적 캐릭터를 요구할 수 있다. 부모 말 잘 듣는, 공부 잘하는, 착하고 예쁜 인형이 되라고 명령한다. 만약에 이 장면이 제대로 구현되지 않으면 형편없는 연기력을 가진 배우를 만난 감독처럼 화를 낼 것이다.  괜찮아요 ??  많이 놀랐죠 ?? 김애란의 << 두근두근 내 인생 >> 은 조로 병에 걸린 17살 소년 나(아름)의 1인칭 시점 소설이지만 사실은 3인칭 어르신의 욕망이 투영된 소설'이라 봐도 무방하다. 그렇기에 소설 속 화자인 < 나 > 는 소년의 말투가 아니라 어르신의 말투일 수밖에 없고 그 욕망 또한 어르신의 욕망이다. 


그러다 보니 " 아름 " 은 외피는 아이이지만 속내는 어른의 욕망이 반영된 인물이 되고 만다. 아름은 " 어른스러운 아이 " 가 아니라 " 어른스러운 아이를 연기하는 어르신 " 이다. 아름은 부모 말 잘 듣고, 똑똑하며, 배려심 많은 예쁜 인형'이다. 바로 이 지점이 이 소설을 더럽게 만든다. 이 소설이 기만적인 이유는 가난이 배경이지만 빈곤은 외화면에 가두고 고통에 대한 직시보다는 슬픔의 낭만성을 강조한다는 데 있다. 가난 포르노의 전형적 형태'다. 문제는 이런 작품을 비판 없이 수용하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 비평가의 태도다. 


평론의 두 거목 신형철과 권희철 어르신의 조곤조곤한 알랑방귀 비평을 볼 때마다 닭살이 돋는 까닭은 그 칭찬들이 한국 문학을 죽이기 때문이다. 발터 벤야민은 < 문학비평에 대하여 > 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칭찬하는 일이 지닌 위험성은 비평가가 자신의 신용을 잃게 된다는 데 있다. 모든 칭찬은 전략적으로 볼 때 백지수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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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동네의 두 슈퍼스타 신형철과 권희철의 공통점은 " 사랑-뽕 " 이다. 한국 문학에 대한 사랑이 어찌나 지극한지 다정도 병인 양하여 몸져눕지 않을까 걱정이 태산 아래 개미 똥구멍이다. 그들은 주로 이런 문장을 사용한다. 어찌 이것이 사랑이 아니란 말인가 _ 라거나 사랑의 글쓰기 이외에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그러니까 사랑에 미친 사람처럼무엇보다 사랑이라는 것이 제어불가능하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처럼 보인다 _ 라고 쓴다.  이름을 가리고 읽다 보면 누가 신형철이고 누가 권희철인지 헷갈린다. 이분들, 왜 이러는 걸까요 ? 이들이 심심할 때마다 끼워넣는 사랑이라는 단어는 마치 백종원의 만능양념장 같다. 심형래의 << 디워 >> 도 이들이라면 곡진한 사랑 타령가로 뽑을 것이다. 가령, 도시의 폐허에서 서로 뒤엉켜 꿈틀거리는, 그러니까 제어 불가능한, 상승이 좌절된 하강의 세계가 지금 이곳이라면,  폐허의 욕망을 우리는 과연 사랑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 어때요, 문장에 사랑이라는 단어를 몇 개 쑤셔 넣으니 꽤 그럴싸하쥬 ? 도대체 언제부터 문학비평은 사랑학 개론이 되었을까. 통탄할 만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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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14 11:5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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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14 17: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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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근두근 내 인생
김애란 지음 / 창비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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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클로스, 김애란 그리고 당신 







                                                                                                        산타클로스는 선택적 복지의 상징적 인물이다. 그는 누가 착한 애이고 누가 나쁜 애인지를 분류한 후에 착한 아이에게는 선물을 주고 나쁜 아이는 선물을 안 주신다. 다시 말해서 착한 아이는 선물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나쁜 아이는 선물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나는 늙은 할배가 일말의 자비도 없이, 두말할 필요도 없이(세 말 하지 않겠어. 내 입만 아프니까), 우는 아이에겐 선물을 안 준다고 했을 때 기가 차서 웃음도 안 나왔다. 조건 없는 사랑을 강조했던 예수의 가르침은 온데간데없고 자신의 윤리적 판단 기준에 따라 < 받을 자격 > 을 논하면서 선별적 시혜를 하겠다니 웃긴 꼴이다. 더군다나 예수님 생일에 말이다. 만약에 예수가 산타 복장을 하고 선물을 나눠 주셨다면 웃는 아이와 우는 아이를 구별했을까 ?  지난 정권 때 중학교 무상 급식을 두고 < 선별적 복지 > 와 < 보편적 복지 > 논쟁이 뜨거웠다는 점을 상기하면 자유한국당은 산타클로스의 정신을 계승한 후예들이라 할 수 있다. 


한국 사회가 장애인을 방송에 노출시키는 방식을 보면 역겨운 점이 많다. 비단, 집값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특수 학교 설립을 반대하는 동네 주민 따위(특수 학교 설립 반대를 외쳤던 동네 주민은 히틀러와 견줄 만한 악마의 성품을 지녔다) 두고 하는 말은 아니다. 내가 김애란의 장편소설 << 두근두근 내 인생 >> 을 비판했던 대목은 김애란이 소설에서 장애인을 다루는 태도와 한국 사회가 장애인을 다루는 방식이 그닥 다르지 않다는 데 있다. 장애인을 단순하게 연민의 대상으로만 인식하고 대중으로부터 동정을 끌어내는 수단으로 착한 장애인 서사를 작동시킨다는 점에서 


<< 두근두근 내 인생 >> 은 보수적이며 퇴행적인 소설'이라 할 수 있다. 내가 묻고 싶은 것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장애인은 왜 항상 " 착한 장애인 " 이어야 하는가 _ 라는 점이다. 나쁜 장애인은 사회로부터 의료 도움을 받으면 안되는 것일까 ?  평론가 신형철은 이 작품을 두고 입에 거품을 내며 " 김애란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가능한가 ? " 라며 온갖 성찬을 늘어놓았지만 그가 보다 총명한 비판적 사고를 가진 문학평론가라면 묻지 마 사랑가 타령 대신에 " 17살 소년 아름은 왜 반드시 착한 장애인이어야만 했는가 ? " 라는 질문을 던졌어야 한다.  그것이 비평가의 태도다. 


김애란은 독자가 아름'에게 감정적으로 완벽하게 몰입할 수 있도록 주인공 소년을 착한 아이로 만들었는데 이 태도는 산타클로스의 선별적 복지 태도를 닮았다. 무엇보다도 이 작품은 " 착한 아이의 착한 마음을 지나치게 강조한 썅팔련도패밀리플롯의 거대한 착각 " 이라는 점에서 구질구질한 최루성 신파'다. 적어도 착한 아이만큼은 사회적 복지 혜택을 주어야 한다는 고정 관념에는 다음과 같은 기만이 숨겨져 있다(아래 발췌한 글은 허허 님 블로그에서 인용했다).

 


작년 겨울에 기초수급 가정의 학생에게 개인 후원을 하던 사람이 인터넷에 후원 후회의 글을 올린 것을 우연히 봤다. 후원자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수십만 원의 돈을 한 학생에게 후원해왔다고 한다. 돈 대신 학생이 원하는 물품으로 주기도 했단다. 그해 겨울엔 00 금액 한도 내에서 필요한 물품이 있냐고 하니 학생이 '롱패딩'을 말하더란다. 한 몇 년간 '국민 교복'이었잖나. 거리엔 걸어 다니는 김밥(검정롱패딩)과 떡가래(흰롱패딩) 밖에 없다고 할 정도로, 가난한 집의 학생도 친구들과 같은 옷을 한 번 입고 싶었던 모양이다. 후원자는 그 학생이 철딱서니가 없어서 기가 찬다느니, 나도 롱패딩 없다느니 하는 게시글을 올렸다. 그 밑엔 그 글에 동조하는 기초수급자 가정을 비방하는 댓글이 줄줄이 올라왔다. 가난뱅이들이 내가 낸 세금으로 국가 보조금과 문화카드를 받아 영화 보고 미술 학원 가더라, 우리보다 낫다..... 류의 댓글이었다. 


가난한 사람들, 가난한 자들의 연민 중

 





이 사례에서 후원자가 원했던 것은 " 롱패딩 " 이 아니라 병든 할머니에게 드릴 " 보약 한 첩 " 따위가 아니었을까 ? " 키다리 아저씨, 무람된 말씀이오나 크리스마스 선물을 꼭 주셔야 하신다면 저의 롱패딩보다는 할머니의 영양제를 부탁드립니다아. 할머니 건강이 많이 안 좋으세요. 저는 헌옷 입어도 상관 없어요. 키다리 아저씨의 따스한 후원으로 무럭무럭 자라는 소녀 올림 " 후원자가 보기에 < 롱패딩 > 이라는 기표는 가난한 자에 대한 자신의 거룩한 동정과 연민을 배신하는 철딱서니에 불과한 것이다. 


후원자는 가난한 아이가 자신을 물주 취급한다며 불쾌한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 하지만 정작 이 폭로에서 드러나는 것은 후원을 가장한 도덕적 허세의 날것이다. 후원자가 후원하는 아이가 자신을 " 물주 " 취급하는 것 같다며 화를 내는 태도의 뒷면을 들여다보면 스스로가 그 아이를 " 물건(예쁜 인형) " 취급하는 마음의 반영이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후원 행위가 후원 대상에 대한 통제력을 정당화한다고 믿는 것이야말로 졸라 염치 없는 마음이다. 김애란의 << 두근두근내인생 >> 은 이 후원자의 마음에서 쓰여진 소설 같다. 소설 속 아름은 후원자인 김애란의 마음이 반영된 예쁜 인형이다. 


그렇기에 아름은 롱패딩 입고 싶어용 _ 따위의 철딱서니없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김애란도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도 그 후원자의 마음으로 이 소설을 썼기 때문이다. 이런 소설에 대하여 대한민국 문단이 앞다퉈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늘어놓는 것을 보면 한심하기도 하고 측은하기도 하다. 이 소설은 < 가난 > 이 배경이지만 정작 " 빈곤 " 을 다루지 않고,  < 아픔 > 을 다루지만 항상 " 고통 " 은 외면한다. 전형적인 가난 포르노이다. 나는 롱패딩 입고 싶다고 고백한 그 11살 여자아이의 철딱서니를 지지한다. 


하여, 나는 “ 나쁜 생각 을 지지하련다여성이 자유롭게 자신의 욕망을 말할 수 있는 자유를 지지하며장애인이 보행권을 문제 삼아 시민 사회를 향해 지랄을 떠는 태도를 지지하며도움이 필요한 주폭도 지지한다가진 것이 없으면 착하기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은 개나 주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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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에 나쁜 개는 없지만 걔는 있다  :












세상에 나쁜 피는 없다











                                                                                             반려동물고민상담 방송 <<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 >> 에서 제작진은 의뢰인을 방송 스튜디오로 불러 인터뷰를 진행한다. 반려동물 몇 마리를 키우고 있느냐고 묻자 의뢰인이 대답한다. ( 낯선 이름이어서 잘 생각은 안 나지만 예를 들자면 : )비숑 프리제 한 마리와 차이니즈 샤페이 그리고 스코티쉬 폴드 고양이를 키우고 있어요.  내가 이 장면을 보고 의아했던 것은 동문서답이었다. 몇 마리의 반려동물을 키우느냐는 질문에 의뢰인은 개 두 마리와 고양이 한 마리'라는 대답 대신에 묻지도 않은 품종을 나열하고 있는 것이다. 


의뢰인의 인터뷰에서 내가 포착한 것은 반려동물을 명품 브랜드 취급하는 태도'였다.  화면은 방송국 스튜디오에서에서 의뢰인의 집으로 이동한다.  아니나 달라. 의뢰인의 반려동물들은 모두 다 최신 헤어컷에 멋들어진 옷을 입고 뿜뿜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가 키우는 짐승은 최근 반려인들 사이에서 가장 핫한 인싸 품종들이었다. 문득, 그는 정말 자신이 키우는 짐승을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 _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의 미적 기준에 의해 개조(미용)된 개는 행복할까 ?  의뢰인의 과시욕이 견종 차별처럼 느껴져서 역겨웠다. 


얼마 전 티븨엔'에서 리얼리티 동물 예능이랍시고 품종을 알 수 없는 길고양이를 우아한 스코티쉬 폴드 고양이와 비교 평가하면서 " 촌년 " 이라는 자막을 달아 논란이 됐던 장면과 겹쳐졌다. 품종이 없다는 이유로 촌년이라고 말하는 경멸적 태도와 묻지도 않았는데 키우는 짐승의 품종부터 말하는 순혈주의는 서로 닮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종종, 아니 자주 듣는 소리가 혈액형이 뭐냐는 질문이다. 이 질문을 받을 때마다 개봉동 딱정벌레처럼 쉽게 피로해진다. 도대체 왜 궁금해하는 것일까 ?  혹시, 그 질문을 던지는 사람은 흡혈귀가 아닐까 ? 


바넘 효과1)를 이용한 혈액형 성격 테스트를 믿는 나라는 일본과 한국이 유일하다(혈액형 성격 테스트는 일본에서 시작되었다). 그 어느 나라도 혈액형과 성격을 연결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혈액형이 무엇인지 모르는 서양인은 수두룩 빽빽이다. 만약에 독일 사람에게 혈액형이 무엇이냐고 묻다가는 따귀를 맞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독일 사람에게 혈액형 성격설은 우생학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히틀러가 인종 청소를 위해 이용한 학문이 바로 우생학이다. 나치즘은 대부분의 포유류가 B형인 반면에 인간과 침팬지에서는 A형도 분포되었다는 점에 착안해서 B형을 나쁜 피로 분류하였다. 


즉, B형이 많은 민족일수록 그 나라는 열등하다는 논리이다. 히틀러가 이 말도 안 되는 우생학을 정치적 목적으로 활용한 이유는 백인일수록 A형이 많기 때문이다. 생화학적 인종계수가 바로 그것이다. 일본인이 스스로를 " 명예백인 " 이라고 우기는 것도 바로 피의 우생학에 기초한다. 그들에 의하면 한국인과 유태인은 1.18로 '아시아-아프리카형'에 속하고 일본인(1.48)이나 러시아인(1.41)은 '중간형'에 속하며, 영국인(4.09)이나 프랑스인(5)은 '유럽형'에 속하는 식이다. 이처럼 인종 청소(인종 차별)의 목적으로 악용된 혈액형 성격 테스트를 


한국인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며 낄낄대는 것은 누워서 침 뱉는 꼴이다. 이 세상에 나쁜 피는 없다. 선택할 수 없는 것은 단점이나 장점이 될 수 없다. 밀란 쿤데라의 말이다. 






1)  바넘 효과  :  란 이런 것이다. 화를 내면 아무 일도 아닌 일에 화를 낸다고 소심한 A형이라 하고, 웃으면 배알도 없냐며 소심한 A형이라 하고, 수긍하면 소심하게 반박도 못한다고 A형이라고 하고, 반박하면 그냥 재미로 한 소리인데 정색을 하는 것을 보니 소심한 A형이라 하고, 이 꼴 저 꼴 다 싫어서 무시하면 소심하게 삐쳤냐며 A형이 맞다고 확신하고, 삐치면 아무 일도 아닌 일은 그냥 무시하면 되지 그깟 일로 삐쳤나며 소심한 A형이라 하니, 삼라만상 모든 감정은 A형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O형이라고 해서 다를까 ? 화를 내면 화를 참지 못하는 성격인 것을 보니 O형이라 하고, 웃으면 호탕하게 웃는 것을 보니 O형이라 하고, 수긍하면 통 크게 인정하는 것을 보니 O형이라 하고, 반박하면 돌려말하는 것을 잘 못하는 성격을 보니 O형이라 하고, 무시하면 싸우는 걸 안 좋아하는 걸 보니 O형이라 하고, 삐치면 성격 좋은 사람이 오죽했으면 삐쳤냐며 O형이라 한다. 코에 걸면 코걸이요, 귀에 걸면 귀걸이요, 양 팔에 걸면 양파링이다. 아이고야, 스피노자가 울고 갈 노릇이다. 


2)  니미 조또  :  일본은 일본인이 열등한 유색인종이 아니라 차라리 백인에 가깝다는 탈아입구를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아시아 국가와의 차이점을 강조해야 했다. 처음에 도입한 것은 신체 계측학이었다. 두개골 크기, 신체 길이, 남근 크기 따위를 측정했는데 일본의 야심과는 정반대의 결과에 실망하게 된다. 일본인의 두개골은 한국인의 두개골보다 크고 반대로 키는 일본인이 더 작았다. 무엇보다도 일본의 페니스 길이도 작었다. 일본의 좆이 좆도 아닌 것으로 판명이 나자 일본 제국은 매우 크게 실망했다. 닝기미, 조또 !  결국 계측학은 포기하고 피의 우생학에서 해답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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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맘대로 살아볼 용기 - 당연한 것들과의 결별
이종미 지음 / 들메나무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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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반대말이 없는 것은 쓸쓸할까 ? 












여교사라는 단어의 반대말은 없다. 남교사'라는 단어는 없으니깐 말이다. 여배우라는 단어의 반대말도 없다. 남배우라는 단어도 사전에는 없는 말이다. 여교사, 여배우, 여의사, 여교수 따위의 낱말은 주로 성적 비하 판타지로 소비된다. 신조어인 개똥녀, 김치녀도 마찬가지다. 개똥남과 김치남이라는 단어'도 없으니 개똥녀와 김치녀의 반대말도 없다. 그렇다면 < 그녀 > 의 반대말은 무엇일까 ?  십중팔구는 " 그 " 라고 대답하겠지만 < 그녀 > 의 반대말은 < 그 > 가 아니다. 


사전적 의미로 < 그 > 라는 낱말은 성별 구별 없이 말하는 이와 듣는 이가 아닌 사람을 가리키는 삼인칭 대명사이거나 앞에서 이미 이야기하였거나 듣는 이가 생각하고 있는 대상을 가리키는 지시 대명사'일 뿐이다. < 그 > 가 남녀를 아울러 통칭하는 낱말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 그 > 옆에 애써 < -女 > 를 붙여 < 그 > 와 < 그녀 > 를 분리한 것은 빈곤한 철학의 반영인 셈이다.  분류할 필요가 없는 데에도 불구하고 애써 구별짓는 심보야말로 " (페루애적 관용어로 설명하자면) 밤꽃 향기 작렬하는 불알후드의 발광 다이어드적 3파장 극성 " 때문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지랄이 풍년이라는 소리. < 그녀 > 라는 단어는 광복 이전에는 없는 단어'였다. 문예지 현대문학에서는 이 단어를 두고 치열한 논쟁(현대문학 3월호, 1965년)이 일기도 했다. 일종의 현대어인 셈이다. 뜬금없는 질문 하나. < 그 > 의 낮춤말은 무엇일까 ? < 그놈 > 이다. 반대로 높임말은 < 그이 > 이다(보통은 어른 혹은 어르신으로 부른다). 그렇다면 < 그녀 > 의 낮춤말은 무엇일까 ? < 그년 > 이다. 반대로 그녀의 높임말은 ?  없다. 여자를 높여 부르는 말은 여사님이거나 사모님인데 이 두 단어는 상류층 진입에 성공한 여성을 지시할 뿐 보통의 여성을 지시하지는 않는다. 


결국 수평적 관계로써 그녀라는 단어의 반대말은 없다. 친애하는 이웃인 허허 님이 << 혼자 살아볼 용기 >> 에서 " 왜 반대말이 없는 것은 쓸쓸할까 ? " 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나는 그 질문에 감탄했다, 좋은 대답보다 어려운 것은 좋은 질문이니까 ! 이 책의 저자인 허허 님은 이렇게 말한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따뜻함의 반대말은 많은데 쓸쓸함의 반대말은 하나도 없었다. ' 음산, 고독, 황량, 적적, 삭막, 스산... ' 등등 외롭고 어둑한 '쓸쓸'함과 비슷한 말은 이렇게 많은데 그 반대말은 하나도 없다니! 쓸쓸함을 면할 길 없는 쓸쓸한 말이구나. 반대말이란 무엇인가 ? 왜 반대말이 없는 건 쓸쓸하게 느껴질까 ? 

 


돌이켜보면  :  반대말이 없는 단어는 쓸쓸하다. < 홀몸 > 이나 < 고아 > 라는 단어가 반대말을 가지지 못하는 이유는 외롭기 때문이다. 어쩌면 반대말이 없기 때문에 쓸쓸한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종종 독서를 통해서 명쾌한 답을 얻기를 원한다. 하지만 이보다 멍청한 태도는 없다. 진리는 질문에서 시작되는 것이지 결론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다 필요 없다. 당신이 책을 통해서 " 좋은 질문 " 하나를 건졌다면 그것만으로 훌륭한 결과'다. 명쾌한 답 100개보다 도움이 되는 것은 훌륭한 질문 1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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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륜의 < 즉문즉설 > 이나 혜민의 < 위로 > 따위의 솔루션 에세이가 질이 낮은 이유는 훌륭한 질문은 없고 명쾌한 대답만 남발하기 때문이다. 평생을 괴롭힌 고민이 겨우 승려의 20자 대답으로 요약될 수 있다면 그 고민은 고민이 아니고 20자평은 해결책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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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 2020-01-09 2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은 다섯인데... 내용은 하나인가요?

곰곰생각하는발 2020-01-09 23:41   좋아요 0 | URL
내용도 별 다섯입니다..

tobewhat 2020-01-09 2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나 ‘그녀’가 3인칭 대명사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최근세의 일이며, 신문학 초창기인 1919년경에 김동인 등이 쓰기 시작했다. 그전까지는 ‘그’ 대신에 ‘궐자(厥者)’를, ‘그녀’ 대신에 ‘궐녀(厥女)’라는 말을 썼다. 그간 ‘그녀’는 성차별적 언어로 여겨지기도 했으나, 이젠 다른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데, 고경태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언어는 움직이고 진화하는 것인데, 일본어의 유래만 가지고 ‘그녀’를 사생아 취급하는 게 옳을까요. 영어의 ‘she’에서 나왔든 일본어의 ‘彼女’에서 나왔든, 그걸 반드시 제국주의의 괴물처럼 비난해야 할까요. ‘겨레의 말’엔 과연 성차별 요소가 없을까요. 전통의 언어습관에 대한 집착이 배타적 민족주의의 무기가 되는 건 아닌지 의심해봅니다. 이에 반해 여성학자들은 ‘차이 드러내기’라는 차원에서 ‘그녀’를 지지합니다. 언어에서 성을 차별하는 게 진짜 성차별적 언어들에 저항하는 길이라고 합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그녀 (선샤인 논술사전, 2007. 12. 17., 강준만)

곰곰생각하는발 2020-01-09 23:41   좋아요 0 | URL
1919년에 김동인이 ˝ 그녀 ˝ 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것이 아니라 이광수‘입니다. << 무정 >> 에서 그녀라는 말을 사용했죠. 그리고 최현배는 그녀라는 말이 일본에서 비롯되었다며 반대했는데 반해 김동리는 그녀가 일본어에서 비롯되었다는 근거가 없다며 그녀를 옹호했죠.

그리고 여성학자들이 차이 드러내기라는 차원에서 그녀를 지지했다는 것은 여러 해석 중에 하나일 뿐입니다. 어느 페미니스트는 그녀의 탄생이 남성이 모든 지시대명사를 대표했다는 점에서 그녀가 성차별의 결과라는 해석을 하기도 합니다.
 



























펼치지 않은 우산







모두가 돌아갈 무렵엔 우산이 필요하다

ㅡ 디디의 우산, 147










그녀는 명문대를 졸업하고 모두가 선망하는 대기업에 취직했다. 더군다나 연구소 연구원이었다. 똑똑한 사람들만 모인 곳에서도 똑똑한 편이어서 늘 중요한 프로젝트의 핵심 멤버로 활동했다. 모든 것이 다 만족스러웠다고 한다. 연봉도 훌륭했고, 사원 복지도 훌륭했고, 무엇보다도 자신에 대한 임원의 신뢰는 큰 자산이 아닐 수 없었다. 그녀에게 유리 천장은 보이지 않았다.  목표가 생기자 욕심이 생겼다. 밝은 미래가 보였다. 밤낮없이 일했다. 어느 날이었다. 그날은 지난한 고생 끝에 연구 계발한 시제품을 임원 앞에 선보이는 날이어서 정신없이 바빴다. 


그때 이십대 젊은 동료의 전화를 받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함께 밤샘 작업을 했던 동료 연구원이었다. 평소 싹싹한 성격으로 자신을 친언니처럼 잘 따르던 동료였다. 하지만 그녀는 워낙 바쁘다 보니 주저주저하는 동료 목소리를 뒤로 하고 짧은 통화만 하고 끊었다. 회의는 한없이 이어졌다. 회의에, 회의에, 회의가 이어지다 보니 날은 밝았다. 그때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경찰서'였다.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회사 동료가 15층 아파트 옥상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것이다. 그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연락을 한 사람이 당신이니 조서를 작성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내내 생각했다. 


회사 동료가 자신에게 전달하고자 했던 말은 구원의 손길이었을까 ?  아니면 당부의 말이었을까 ?  내가 만약에 그 전화를 끊지 않았다면 상황이 바뀔 수도 있었던 것은 아닐까 ?  컴컴한 우울과 너무 하얗고 시끄러운 죄책감이 그녀를 짓눌렀다.  가슴은 뻥 뚫렸는데 항상 속이 답답했다.  출시된 상품은 빅히트를 쳐서 연초 승진 0순위로 뽑혔다.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출근길에 현관 수납장에 넣어둔 3단 접이식 우산이 눈에 들어왔다.  2년 전에 사두었던 예쁜 우산.  그녀는 그 우산을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밤낮없이 집과 주차장과 회사를 오갔으니 비가 와도 우산이 필요 없었던 것이었다. 그 공간이 그녀가 2년 동안 오갔던 동선의 전부였던 것이었다. 늦은 겨울의 한낮, 겨우내 꽁꽁 얼었던 마당의 수도가 녹으면서 느닷없이 녹물을 쏟아내듯이 그녀는 2년 동안 단 한 번도 펼쳐보지 않은 우산을 보며 실컷 울었다. 마치 그 우산이 단 한 번도 펼쳐보지 못한 자신의 꿈 같았다. 모든 사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녀느 사표를 내고, 지금은 깊은 산속에 컨테이너 작은 집을 짓고 살고 있다. 주중에는 지방 중소기업에 다니고 주말이 시작되는 금요일에는 숲속 오두막에서 산다. 


올해는 깨를 깨(?) 많이 심어서 챔~기름을 4병이나 얻었다. 비가 오면 자주 걷는다고 한다. 3단 접이식 우산을 펼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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