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앉는 배 위에서 가위바위보
어제는 불알후드 모임에 참석했다. 밤꽃 향기 작렬하는 중년들의 알탕 모임'이 탐탁지는 않았으나 외곽에서 꽃바람이라도 쐴 요량으로 오리고기 요리'로 유명하다는 식당에서 모였다.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하리 류의 만수산 드렁칡 잡담이 꽃을 피우니 참말로 더티하리 !
나는 세상 다 귀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구탱이에 앉아서 술을 홀짝이고 있었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정치 쪽으로 흘렀다. 누군가 민식이법에 대해 열변을 토해냈다. 그는 민식이법의 취지에는 동감하지만 법 적용의 평등성에는 문제가 있다고 주장했다. 민식이법의 처벌 형량이 음주운전 사망사고를 처벌하는 ‘윤창호법’과 같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음주운전은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나 마찬가지인 중대한 범죄인데, 아무리 어린이 사망이라는 중대한 결과를 초래했다 해도 스쿨존에서 발생한 교통사고라는 것만으로 과실로 인한 사고와 같은 처벌을 한다는 건 형벌의 비례성 원칙에 어긋난다는 지적이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정치 성향은 중도'라고 말했다. 진영 논리에 빠지지 않고 객관적 자세로 들여다 본 결과라는 소신을 강조했다. 어찌나 말을 잘하던지 그의 주장에 동조하는 이 많았다. 구석에서 오리발을 닭발처럼 뜯으며 조용히 술을 마시던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 혹시 영화 << 타이타닉 >> 보셨어요 ? " 그는 흔쾌히 보았노라, 대답했다. 내가 말했다. " 배가 침몰할 때 승객이 구명보트으로 갈아타는 장면 있잖습니까 ? 그때, 어린이와 여성 그리고 노인 순으로 구명보트에 탑승하잖아요. 형씨 말대로라면 이 장면도 대표적인 불평등입니다.
목숨은 하나인데 단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혹은 나이가 젊다는 이유로, 남성이라는 이유로 구명보트에 승선할 기회가 뒤로 밀려나니 형평성의 문제가 발생하죠. 타이타닉 선장이 아이와 여성을 먼저 구명보트에 태우려고 할 때 형씨는 우왕좌왕하는 승객을 향해 이렇게 소리쳐야 합니다. 어디서 조팝에 볍씨 쌈 싸먹는 소리야 ! 어이, 선장, 어디서 노약자 우선 주의야. 수박 씨 발라먹는 소리 하지 마쇼. 누구 목숨은 귀하고 누구 목숨은 천하오 ? 목숨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하오. 그러므로 구조의 비례성 원칙에 위반되오.
아마 이런 장면이 연출되었다면 이 영화는 말 그대로 조팝에 볍씨 쌈 싸먹는 영화가 되엇을 겁니다. " 그는 내 주장에 화끈하게 발끈했다. 민식이법을 이야기하는데 느닷없이 타이타닉 얘기냐며 어이없어 했는데 그 표정이 대한민국 경제를 이야기하는데 파리가 날아다니고 있다는 멘트를 날리며 호탕하게 웃었던 아나운서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가 자꾸 기계적인 중립과 법의 평등주의를 강조하기에 나는 이렇게 되받아쳤다. " 형씨 얘기는 교통사고가 발생한 곳이 단지 스쿨존이라는 이름만으로 다른 장소에서 발생한 교통사고보다 과중 처벌하는 것이 형평성에 어긋난다고 하는데 이런 경우는 어떻습니까 ?
20대 남자가 여자를 강간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피해 여성은 20대 여성입니다. 또 다른 강간 사건도 발생했습니다. 이번에는 피해 여성이 7살 여자아이입니다. 두 사건 모두 남성이 여성을 강간한 사건이니 동일한 형량이 주어져야 하나요 ? 포르노가 합법은 미국은 아동 포르노에 대해서는 엄격해서 아동포르노를 소지했다는 이유로 10년 형이 부여되는 데 이것도 비례성의 원칙에 위반되는 겁니까 ? " 그는 타이타닉 비유 때보다 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교통사고는 고의성이 없다는 점에서 민식이법과 미성년 강간 사건은 종류가 다르다고 주장했다.
캬, 여기까지 왔으니 나도 뒤로 물러날 수는 없는 노릇. " 몇 년 전에 이런 기사가 난 적 있습니다. 사소한 다툼으로 주먹질이 오가는 싸움이 발생했는데 상대방이 죽은 사건이었습니다. 과실치사'죠. 그런데 법원은 가해자의 주먹을 무기로 봤습니다. 왜냐하면 프로 격투기 선수였거든요. 그래서 가해자는 과실치사에 따른 집행유예가 아니라 징역형을 살았습니다. 이 경우 가해자 입장에서는 억울할 겁니다. 자신이 격투기 선수가 아니었다면 과실치사에 따른 집행유예로 풀려났을 텐데 직업이 격투기 선수라는 이유만으로 폭행치사에 따른 징역형이 선고되었으니 법의 형평성에 어긋났다고 생각하겠죠.
그 판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소한 말다툼으로 시작한 싸움이 주먹질로 인해 피해자가 사명한 사고가 발생했지만 격투기 선수인 피고인은 자신의 주먹이 무기가 될 수 있다는 점을 항상 염두에 두었어야 합니다. 그 사실을 망각했다는 점에서 죄를 엄중히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달리는 자동차는 격투기 선수의 주먹보다 더 위험한 무기'이죠. 아프리카 속담에 아이 한 명을 키우기 위해서는 마을 전체의 보살핌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민식이법은 마을 차원이 아니라 국가 차원에서 아이를 보호하기 위한 방책이죠.
형평성과 평등권 그리고 형벌의 비례성 원칙이 중요하다고 칩시다. 형씨가 타이타닉에 승선한 승객이었어요. 구명보트에 오를 티켓은 오로지 가위바위보로 결정됩니다. 형씨가 네 살 여자아이와 가위바위보를 해서 이겼다고 칩시다. 당신은 구명보트에 올랐어요. 구명보트 위에서 바라본 풍경은 아비규환입니다. 그때 당신은 검은 바다 위에서 허우적거리는 그 여자아이를 발견합니다. 그 풍경, 평화롭습니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