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럭처럼 울어 !








                                                                                               말보다 주먹이 앞섰던 국어 선생은 장래 문학 작가를 꿈꾸는 학생들에게 글쓰기 요령으로 신문 칼럼을 열심히 읽으라고 가르쳤다. 그는 입만 열었다 하면 욕을 대동포 장거리 미사일에 탑재하여 불특정 다수를 향해 발사하곤 했다. 성석제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뾰족한 말풍선의 가관이었다. 


성석제의 입말이 " 읽을수록 장관 " 이었다면 국어 선생의 입말은 " 들을수록 가관 " 이었다. 듣는 이의 비위와 염통을 후벼파는 솜씨가 칼을 잘 쓰는 청부살인업자 못지않았다. 그는 찌른 후 돌려서 장기를 완벽하게 파손하곤 했다. 즉사를 노린 것이다. 그것은 관계대명사를 부정하는 to부정사의 투투용법(too ~ to)이었다. 무림의 내공심법과 견줄만한 퐈괴력을 가진 공격이었다. 퐈이야 !  나 같은 학습 지진아들은 속수무책으로 깊은 내상을 입은 채 신음하기 일쑤였다. 아따, 시발놈 ! 욕을 참..... 찰지게 하신다. 국어 선생이란 놈이.         


그는 기자의 글쓰기야말로 객관적이고 논리적이며 깔끔하고 빈틈없는 문장이라고 주장하곤 했다. 몇몇 문학 범생이들은 조중동을 비롯해서 각종 신문 칼럼을 스크랩북 형태로 수집하는 녀석도 있었다. 그런데 칼럼만큼 영혼 없는 글맛도 드물다. 기자의 직업 정신'이기는 하나 글쓴이의 개성을 드러내지 않은 채 국어사전에 등재된 표준어로만 작성된 문장은 흠잡을 데 없는 모범적인 글이었지만 그것은 잽으로만 차곡차곡 점수를 얻어 승리를 따낸 아마추어 복싱 선수의 경기만큼 지루했다. 잽은 방어 자세를 유지하면서, 위험을 최소화시키면서, 유효 타격으로 점수를 얻을 수 있는 기술이지만 구경꾼 입장에서는 따분하기 거지없다. 뭐, 이런 거지같은 경기가...... 


사실, 구경꾼이 바라는 어퍼컷은 멋지기는 하나 방어 자세가 무너지기에 역으로 상대 선수에게 역공 당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경기를 지고 있는 선수 입장에서는 욕심이 날 만하다. 어퍼컷으로 경기를 한순간에 엎어버리고 싶겠지만 상대 선수의 훅(hook)에 한순간에 훅, 가는 수도 있으니 서로 잽만 날리며 탐색전을 펼치다가 종 치는 것이다. 신문 칼럼이 그렇다. 신문 칼럼 속 문장에는 어퍼컷도 없고, 럭키 펀치도 없고, 카운터펀치도 없다. 칼럼에서 << 록키 >> 시리즈 영화나 << 내일은 죠 >> 만화에 나오는 멜랑꼴리한 센티멘탈 하드보일드 펀치의 지랄같은 아우라를 찾으려고 한다면 오산이다. 


만약에 내가 문학을 가르치는 선생이라면 신문 칼럼 따위는 절대 읽지 말라고 충고했을 것이다. 국어사전에 등재된 표준어로만 작성된 문장은 옹졸하고, 비문이 전혀 없는 문장은 비계를 제거한 삼겹살을 씹는 기분이 들어서 읽다 보면 목이 막힌다. 비문을 남발하는 것도 문제이긴 하나 비문이 전혀 없는 것도 심각한 문제다(비문투성이로 위대한 문학적 업적을 이룩한 대가는 많다. 섹스피어는 당시에 영국 평단으로부터 비문투성이라는 욕을 얻어먹지 않았던가). 그런 글을 읽을 때마다 지나치게 깔끔을 떠는 것 같아서 재수없을 때가 많았다. 


나는 잽으로만 이루어진 안전한 문장보다는 어퍼컷도 날리고 럭키펀치도 가끔 등장하는 문장이 좋다. 비록 그 결과가 경기를 엎어버리게 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해도 말이다. 그래서 찰스 부코스키와 스티븐 킹과 필립 딕 소설을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찰스 부코스키가 예쁜 여자만 보면 자지가 서질 않는다는 문장을 작성했을 때, 나는 은밀하게 그의 저질스러운 문장을 지지했다. " 우럭처럼 울어 ! " 라는 허무맹랑한 표현을 사랑했다. 그것은 수많은 단어 속에서 내가 유일하게 그 가치를 인정해서 조탁한 결과이기에 아, 좋다 ! 


우럭이 어떤 표정을 지으며 우는지 나는 모른다, 당신도 모른다. 하지만 우럭처럼 울어 _ 라는 문장은 온갖 페이소스를 경험하게 만든다(나의 뇌피셜이기는 하지만). 가을비가 여름 소나기처럼 내리던 날 밤, 사랑하는 개가 죽었다. 그때 나는 우럭처럼 울었다. 울컥한 마음에 버럭 눈물이 쏟아졌다. 지금도 종종 죽은 개를 생각하며 우럭처럼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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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트풀니스 - 우리가 세상을 오해하는 10가지 이유와 세상이 생각보다 괜찮은 이유
한스 로슬링.올라 로슬링.안나 로슬링 뢴룬드 지음, 이창신 옮김 / 김영사 / 2019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최근 10년 동안의 독서를 통틀어서 최악의 독서 두 권을 선정하라면




                                                                                                 최근 10년 동안의 독서를 통틀어서 최악의 독서 두 권을 선정하라면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이기주의 << 언어의 온도 >> 와 한스 로슬링의 << 팩트풀니스 >> 를 뽑겠다. 이 책들에 대한 내 한의 정서를 영화 대사에 빗대어 설명하자면 " 나 전당포 한다. 금이빨 몇 개냐. 금이빨 빼고 모조리 씹어 먹어주마 ~ " 가 아닐까 싶다. 


<< 언어의 온도 >> 는 시간 날 때마다 씹었기에 굳이 이 빛나는 자리를 빌려 다시 씹어먹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논외로 하겠다 ! 그래도 가볍게 논평한다면 타인을 위로한답시고 주머니를 털어 감성 코인 벌이를 하는 책이 아닐까 싶다.  << 팩트풀니스 >> 도 여러 번 씹은 책인데 오늘 다시 한 번 씹어보도록 하자. 이 책을 읽으면서 두 번 놀랐는데 첫 번째는 책 내용이 지나칠 정도로 쓰레기 같다는 것과 두 번째는 지식인들이 지나치게 빨아주고 있다는 점이다. 영혼을 팔아서 똥구멍 깊숙이 빨아준다고나 할까 ?  


이 책의 논지는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괜찮은 데 우리가 세상을 지나치게 오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걱정도 팔자라는 소리'이다. 저자는 세상이 점점 좋아지고 있다는 증거로 옛날에 비해 극빈층이 줄어들었다는 통계를 들이밀고 있다 ㉠. 어렵지 않은 설득이다. 옛날에 비해 폭력이 줄었다는 통계를 들어 좋은 세상이 되었다고 호들갑을 떨던 스티븐 핑거의 띨띨한 설득을 닮았다. 그렇다면 나는 한스 로슬링의 논리로 세상이 점점 나빠지고 있다는 증거를 제시할 수 있다.  21세기 상위 1% 부가 전세계 부의 50%를 독점하고 있다는 통계 ㉡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 


극빈층이 줄어드는 대신 극부층이 부를 과독점하는 현상은 과연 세상이 좋아졌다는 증거일까 ?  극빈층이 감소했다는 통계값이 불평등을 해소하는 명백한 증거라면 반대로 극부층이 부를 과독점한다는 것은 불평등이 심화되었다는 명백한 증거'가 아닐까 ?  한스 로슬링이 제대로 된 인간이라면 팩트 ㉠ 이 진실이라는 점을 증명하기 위해서 ㉡ 에 대한 합당한 해석을 내놓아야 하는데 ㉡에 대한 통계는 씹고 있다.  자신에게 유리한 팩트만 설명하고 불리한 팩트는 은폐하는 것이다. 


이 책은 온통 이런 개수작을 바탕으로 쓰였는데 버럭 오바마, 빌 게이츠, 스티븐 핑거 같은 인물이 이 책에 대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고 있으니 그 꼴이 과히 꼴사납다. 글 깨나 읽었다는 서평계의 고수들, 그러니까 간서치들의 호들갑스러운 설레발도 꼴사납기는 마찬가지다. 지식의 권위에 주눅이 들어서 선생님께서 하신 말이니 어련하시것어요, 네네네 ! 이딴 식으로 아무 비판 없이 책을 읽지 마시라. 추레하다, 존나 !






■ 보론


 


저자는 극빈층이 줄고 재화의 획득 기회가 넓어져서 그들이 중간 계층으로 이동했다고 주장하는데, 그것은 극빈층이 줄어든 것이 아니라 1% 부가 전체 부의 50%를 차지하는 과독점으로 인해 90%의 인구가 가난의 평준화에 진입했다는 증거로 사용될 수도 있다. 팩트와 진실을 혼동하면 안된다. 그리고 저자는 부모의 소득 수준이 올라가면 자녀를 더 적게 낳는 쪽을 선택한다고 말했는데 그렇다면 인구 감소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대한민국의 젊은 부부는 소득 수준이 높기 때문에 아이를 안 낳으려고 하는 것일까 ?  천만에 !  아이를 더 낳고 싶어도 양육비를 감당할 만한 소득을 얻지 못하기 때문에 안 낳는 것이다. 저자는 대한민국의 인구 감소 현상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할 것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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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12-06 21: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최근 어느 인터넷 언론에서 진행 중인
똥천지가 되어 간다는 미국 도시에 대
한 기사를 읽고 있습니다.

참 흥미롭더군요.
부동산 가격 폭등으로 주거비를 감당
할 수 없게 된 이들이 노숙자가 되고
수많은 노숙자들이 거리에서 아무런
수치심 없이...

사실의 일부만을 가지고 침소봉대
하는 건 동방의 어느 나라 언론 못
지 않은 신박한 기술이 아닐 수 없네요.

그나저나 저 방송은 과연 출판사에서
얼마의 협찬을 받고 진행하는 지나
밝혀 줬으면 싶네요.

그게 대외비 영업기밀이라면 할 말
없구요.

곰곰생각하는발 2019-12-07 14:21   좋아요 0 | URL
그 기사 링크 걸어주실 수 없나요. 흥미로운데요. 눈먼 자들의 도시 생각도 나고 말이죠..



정말 어이없었던 것은 인구 감소의 원인을 딱 하나로 찝어서 내놓는 상술입니다.
인구 감소의 원인은 수십 가지는 되죠. 이것들이 모여서 현상을 만드는 것인데
무슨 소득 수준이 오르면 인구 감소가 된다는 개떡 같은 주장을 하는데..
글구, 저기 설민석.... 할 말 많습니다. 전형적인 사기꾼 캐릭터. 국뽕으로 돈 버는 광대.. 라고나 할까요..

나무그늘 2020-07-27 0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절대적 빈곤이 줄었다는 게 포인트가 아닌가요?! 님이 주장하는 것은 상대적 박탈감이 저성장시대 양극화 시대 sns의 발달로 더 많이 느끼고 있고 이것이 공동체를 파괴할 수 있다는 문제점을 지적한 거 같네요. 둘은 관점이 달라서인 거 같습니다.
 













가면의 고백  :  다자이 오사무와 미시마 유키오에 대하여












                                                                                        서로 극과 극인 관계를 종종 " 다자이 오사무와 미시마 유키오 " 에 빗대어 설명하곤 한다. 다자이 오사무는 부잣집 도련님으로 평생을 화류계 여자 치마폭 속에서 살다가 게이샤와 함께 맑고 깊은 상수원에 뛰어들어 동반 자살했다. 


네 번의 자살 시도 끝에 완성한 마침표'였다. 당시에 청산가리를 먹고 마을 식수원에 뛰어들었다고 해서 대대적인 식수원 수질 검사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시신은 일주일 후에 발견되었다). 마을 사람들이 음용할 식수원에서 투신자살을 했으니 민폐인 경우이다. 화류계 여자와 결혼한 다자이 오사무는 약물 중독으로 인해 많은 빚을 졌고, 두 번째 동반 자살에서는 혼자 살아남아서 병원에서 눈을 뜨자마자 자살 방조죄로 체포되었으며, 성적이 형편없어서 대학은 졸업도 못했다.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저는 인간의 삶이라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라는 첫 문장으로 시작하는 << 인간실격 >> 의 요조가 말해주듯이 그는 나약하고 쩨쩨한 사내였다. 내면의 여성성도 강해서 1인칭 여성 시점으로 쓰여진 << 여학생 >> 이라는 소설은 남성 작가가 썼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세세하게 여성 심리를 묘사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렇다 보니 남근의 화신이자 하드바디가 되기 위해 보디빌딩에 심취했던 헬쓰보이 미시마 유키오'가 보기에 다자이 오사무는 " 계집 같은 사내새끼 " 처럼 보인 모양이다. 다자이가 맑고 투명하며 깊은 마을 상수원에 투신 자살을 하자 미시마는 


"그런 개같은 성격이 문제라서 그 인간은 자살한 거야. 냉수마찰이나 기계체조 같은 규칙적인 생활을 했으면 자살했을 리가 없지 "라는 폭언을 쏟아내기도 했다.  일본도와 훈도시의 상징이었던 미시마 유키오는 투신과는 다른 할복이라는 기이한 형태의 자살을 선택한다. 그렇다 보니 다자이 오사무 문학을 좋아하는 이는 미시마 유키오 문학을 좋아할 수 없고 미시마 유키오 문학을 좋아하면 다자이 오사무 문학을 좋아할 수 없다. 그런데 나는 다자이 오사무도 좋아하고 미시마 유키오도 좋아한다. 내가 보기엔 두 사람은 이란성 쌍생아'다. 


취향이 전혀 다른 두 사람은 서로 헐뜯고 다녔지만 그들은 뗄래야 뗄 수 없는 젖은 땔감 같은 관계다. 둘 다 찌찔하고 쩨쩨한 인간이었다. 미시마 유키오는 계집 같은 사내새끼-들을 경멸했지만 사실 미시마 유키오의 유년 시절은 귀족 가문의 과보호 속에서 우쮸쮸 우쮸쮸 자란 전형적인 유약한 부잣집 도련님이었다. 가뜩이나 왜소한데다가 병약해서 별명이 " 창백 " 이었다.  어느 날, 덩치 큰 아이가 미시마 유키오에게 " 어이, 창백이 !  너는 불알도 창백하냐 ? " 라고 놀리자 미시마 유키오는 바지 지퍼를 내려 자신의 불알을 보여줬다고 한다. 그때 그 일을 기억하는 동급생의 기억에 의하면 체격에 비해 불알이 꽤 커서 놀랐다고. 


또한 다들 아시다시피 그는 마마보이로 유명했으며 게이바를 들락날락거리는 동성애자'였다. 강한 남성성의 복원을 강조했던 그의 뒷면은 사실 여성성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미시마 유키오는 다자이 오사무를 통해 자신의 컴플렉스를 보았던 것이다. 그들은 지킬과 하이드의 관계였다. 어쩌면 미시마 유키오도 미발표 원고에 다음과 같은 문장을 작성했는지도 모른다. "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저는 인간의 삶이라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자신도 다자이 오사무와 미시마 유키오의 혼종일지도 모른다. 


나는 찌질하고 쩨쩨한, 얼굴이 창백한 불알후드의 후예'이다. 누가 나에게 너는 불알도 창백하냐 _ 라고 놀린다면 기꺼이 바지 지퍼를 열어 보여줄 용의가 있다. 당구공만한, 딱딱한, 반짝반짝 빛나는, 오랜 케겔 운동으로 원형의 미학을 쟁취한 내 불알 두 쪽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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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맨 2019-12-03 12: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미시마와 다자이 두 사람을 좋아하지만 나이가 들어도 지금만큼 좋아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 둘의 글은 저에게 때로는 열기가 번뜩이는, 때로는 냉기로 창백해진 청년의 글로(만) 읽힙니다. 다시 말하자면 두 사람은 청년 남성의 파토스라는 조건에(만) 자신들을 과하게 투영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거든요.
언젠가 평론가 김현은 ‘살아서 별별 꼴을 다 보아야 하며, 그것이 삶이다‘라는 식으로 말했던 적이 있습니다. 이 말을 제 식대로 바꾸자면 이른 나이에 존재의 슬픔을 말하는 글보다는, 오래오래 살아서 인간사의 희한함과 기막힘에 대해서 말하는 글이 더 와닿을 때가 있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9-12-06 13:32   좋아요 0 | URL
시기마다 작품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더군요. 저도 그렇습니다..
 
꽃집에서 민음사 세계시인선 17
프레베르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1975년 4월
평점 :
품절




 

다급한 마음



                              사람이 너무 당황하게 되면 머릿속이 캄캄해질 뿐만 아니라 동시에 새하얗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옛날에 퍼펙트월드라는 영화감상실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을 때 같은 건물 지하 당구장 아저씨가 이상 증세를 보인다는 연락을 받고 내려갔더니 아저씨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초점 잃은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계셨다. 그리고 바지가 젖어 있었는데 아마도 소변을 지리신 것 같았다. 다급한 마음에 나는 당구장 손님들에게 소리쳤다. " 119 전화번호가 어떻게 되죠 ? " 119 전화번호가 119인데 당황하다 보니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 것이었다. 마당 넓은 집에서 펄럭이가 한 살 때 일이었다. 터앝을 가꾸는데 사용했던 농약을 비닐봉지에 담아 나뭇가지에 걸어두었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개가 그것을 잡아뜯어서 농약을 삼킨 일이 있었다. 개는 불을 삼킨 듯 마당을 뱅뱅 돌며 뛰었다. 당황한 마음에 나도 개를 업고 뛰었다. 택시를 탔는데 당황한 마음에 지갑을 놓고 왔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고, 당황한 마음에 핸드폰도 놓고 왔다는 사실 또한 뒤늦게 알았다. 간절한 마음과는 달리 잘못된 실수의 연속이었다. 어찌어찌하여 동물병원 앞에 다다랐는데 이른 아침(늦은 새벽에 가까운)이라 문은 닫혀 있었다. 돈도 없고 핸드폰도 없었다. 그리고 새벽에 가까운 이른 아침이어서 행인도 없었다. 마침 길 건너편에 응급실이 딸린 병원이 보였다. 당황한 마음에 나는 개를 업고 그 병원 응급실을 찾았다. 물론, 알고 있다. 사람을 다루는 병원과 동물을 다루는 병원은 다르다는 사실을 말이다. 하지만 나는 당직 직원의 팔을 잡고 응급처치를 해달라고 소리쳤다. 그의 옷소매를 잡고 애원했지만 사실은 바짓가랑이 잡고 울며 매달리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마음이 통해서였을까 ? 그 당직 직원의 도움을 얻어 우여곡절 끝에 24시간 동물병원에 도착했고 다행히도 개는 기적처럼 살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개를 업고 뛰는 동안 슬리퍼 한쪽이 벗겨지는 바람에 한쪽 발이 맨발이라는 것도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새하얗고 캄캄한 머릿속. 옛 애인과 헤어지던 날 밤이 그랬다. 절망은 벤치 위에 앉아 있고, 새하얗고 그렇게 캄캄한 밤이었다. 결별을 마중하고 돌아오는 길. 캄캄한 밤이었는데 새하얘서 길을 잃던 밤. 




+

그때 일을 생각하면 항상 자크 프레베르의 시 << 꽃집에서 >> 가 생각난다. 





+

어느 남자가 꽃집에 들어가

꽃을 고른다

꽃집 처녀는 꽃을 싸고

남자는 돈을 찾으려

주머니에 손을 넣는다

꽃값을 치를 돈을

동시에 그는

손을 가슴에 얹더니

쓰러진다

그가 땅바닥에 쓰러지자

돈이 땅에 굴러가고

그 남자와 동시에

돈과 동시에

꽃들이 떨어진다

꽃들은 부서져도

남자는 죽어가도

꽃집 처녀는 거기 가만 서 있다

물론 이 모두는 매우 슬픈 일

그 여자는 무언가 해야 한다

꽃집 처녀는

그러나 그 여자는 어찌할지 몰라

그 여자는 몰라

어디서부터 손을 쓸지를

남자는 죽어가지

꽃은 부서지지

그리고 돈은

돈은 굴러가지

끊임없이 굴러가지

해야 할 일이란 그토록 많아



- 자크 프레베르, 꽃집에서

 프레베르 『꽃집에서』민음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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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9-12-01 2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가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저도 반려동물이 갑자기 사고로 다치거나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한 상황을 겪게 되면 당장 병원에 갔을 거예요. 반려동물은 종은 달라도 소중한 가족이니까요.

곰곰생각하는발 2019-12-01 22:34   좋아요 0 | URL
10년 전 일이죠. 그 개는 올해 11월에 무지개 다리를 건넜습니다.
 
존 윅
데이빗 레이치 외 감독, 키아누 리브스 외 출연 / 노바미디어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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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는 말할 것도 없이













                                                                                             영화 << 존 윅 >> 에 대한 평가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한쪽은 스타일리시한 액션에 높은 점수를 주는 쪽이고, 다른 한쪽은 개 한 마리 때문에 사람을 백 명 넘게 죽이는, 개연성 없는 줄거리에 볼멘소리를 한다. 


지적한 대로 존 윅은 오랜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난 아내가 세상에 홀로 남을 남편을 걱정해서 선물한 강아지가 러시아 조직원에게 살해되자 개빡친 주인공이 복수를 감행하는 영화이다. 존 윅은 피도 눈물도 없다. 티븨는 물론이고 케이블 티븨에서 방영하는 영화도 잘 보지 않는 내가 일부러 이 영화를 찾아 보기로 결심한 이유는 존 윅의 황당무계한 개복수극 때문이다. 영화를 보다 보면 처음에는 황당한 복수극 같지만 나중에는 존 윅의 " 멜랑꼴리한 애니멀 센티멘탈 " 에 설득 당한다. 그럴 수 있어, 개는 말할 것도 없이 가족의 일원이니까 ! 


<< 존 윅 >> 은 멋진 수트야말로 킬러가 반드시 갖춰야 할 의복이란 사실을 증명한다. 수트가 원래 군복에서 유래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어색한 조합은 아니다. 나카토미 빌딩에서 맨발에 하얀 난닝구 입고 죽도록 고생했던 아재 브루스 윌리스에 비하면 키아누 리브스는 얼마나 개멋진가 !  영화는 꽤 영리한 전략을 구사한다. 존 윅은 " 오랜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난 아내가 세상에 홀로 남을 남편을 걱정해서 선물한 강아지가 러시아 조직원에게 살해되 " 는 설정을 통해서 존 윅의 분노를 이해 가능하도록 만든다. 그 이후는 속전속결이다. 설명이 필요 없다는 것은 장점이다. 


말보다 주먹이 앞서야지 주먹보다 말이 앞서면 액션 영화로서는 단점이기 때문이다. 주먹보다 말이 앞서는 순간, 킬러의 아우라는 사라지고 동네 양아치의 개싸움으로 전락하고 만다. 입만 열었다 하면 안드레이 타르콥스키와 캔 로치 감독을 언급하던 내가 할리우드 쌈마이 양아치 총질 영화'를 좋아한다고 고백하니 배신감이 드는 이이도 있겠으나, 고백하거니와 나는 원래 B급 장르 영화에 대한 애정을 버릴 수 없다.  토니 자의 << 옹박 >> 은 인생 영화까지는 아니더라도 그해의 톱텐이었다. 


심지어 에로 영화도 좋아한다. 이름부터 에로스러운 틴토 불알스 감독이 연출한 영화를 좋아했는데 딱히 이유는 없다. 후배위를 포착하는 틴토 불알스의 에로틱한 시그니처를 사랑했다. 나는 감독에게 경배했다. " 당신의 아름다운 불알에 경배를 ! " 에로 영화라는 장르에서 미학과 윤리를 따지는 것은 얼마나 따분한가 ! 에로 영화 장르의 목적은 하나다. 관객을 꼴리게 만드는 것. 이 얼마나 심플한가 ! 장르 영화의 미덕은 단순함이다. 나이가 들다 보니 이제는 심각한 영화를 감상하는 데 에로, 아니 애로 사항이 많다. 


옛날에는 안토니오 미켈란젤로나 잉게마르 베르히만의 심각한, 심각한, 너무 심각한 영화도 관심을 가지고 감상하고는 했는데 이제는 나이 들어 괄약근마저 부실하다 보니 오래 앉아 있는 것조차 버겁다(영화제 때 극장에 앉아서 벨라 타르의 8시간짜리 영화 << 사탄탱고 >> 를 봤다는 자랑은 이 자리에서는 하지 않겠다).  그 누가 알랴. 치질 때문에 양쪽 엉덩이 두 짝을 나란히 바닥에 지지지 못하고 한쪽 또 한쪽 번갈아 가면서 수평 조절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존 윅은 멋있다. 저 아름다운 상판과 하드바디에 경탄하게 된다. 그와 비교할 수록 나는 자꾸 번데기가 되어가는 기분이다. 


나도 한때는 굉장히 크고 딱딱하며 어마어마했던 남근을 소유했던 사나이였다. 믿거나 말거나. 노파심에서 하는 충고이지만 만약에 둘 중 하나에 도박을 걸어야 한다면 " - 말거나 " 에 거시기 바란다.  그것이 현명한 선택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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