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럭처럼 울어 !
말보다 주먹이 앞섰던 국어 선생은 장래 문학 작가를 꿈꾸는 학생들에게 글쓰기 요령으로 신문 칼럼을 열심히 읽으라고 가르쳤다. 그는 입만 열었다 하면 욕을 대동포 장거리 미사일에 탑재하여 불특정 다수를 향해 발사하곤 했다. 성석제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뾰족한 말풍선의 가관이었다.
성석제의 입말이 " 읽을수록 장관 " 이었다면 국어 선생의 입말은 " 들을수록 가관 " 이었다. 듣는 이의 비위와 염통을 후벼파는 솜씨가 칼을 잘 쓰는 청부살인업자 못지않았다. 그는 찌른 후 돌려서 장기를 완벽하게 파손하곤 했다. 즉사를 노린 것이다. 그것은 관계대명사를 부정하는 to부정사의 투투용법(too ~ to)이었다. 무림의 내공심법과 견줄만한 퐈괴력을 가진 공격이었다. 퐈이야 ! 나 같은 학습 지진아들은 속수무책으로 깊은 내상을 입은 채 신음하기 일쑤였다. 아따, 시발놈 ! 욕을 참..... 찰지게 하신다. 국어 선생이란 놈이.
그는 기자의 글쓰기야말로 객관적이고 논리적이며 깔끔하고 빈틈없는 문장이라고 주장하곤 했다. 몇몇 문학 범생이들은 조중동을 비롯해서 각종 신문 칼럼을 스크랩북 형태로 수집하는 녀석도 있었다. 그런데 칼럼만큼 영혼 없는 글맛도 드물다. 기자의 직업 정신'이기는 하나 글쓴이의 개성을 드러내지 않은 채 국어사전에 등재된 표준어로만 작성된 문장은 흠잡을 데 없는 모범적인 글이었지만 그것은 잽으로만 차곡차곡 점수를 얻어 승리를 따낸 아마추어 복싱 선수의 경기만큼 지루했다. 잽은 방어 자세를 유지하면서, 위험을 최소화시키면서, 유효 타격으로 점수를 얻을 수 있는 기술이지만 구경꾼 입장에서는 따분하기 거지없다. 뭐, 이런 거지같은 경기가......
사실, 구경꾼이 바라는 어퍼컷은 멋지기는 하나 방어 자세가 무너지기에 역으로 상대 선수에게 역공 당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경기를 지고 있는 선수 입장에서는 욕심이 날 만하다. 어퍼컷으로 경기를 한순간에 엎어버리고 싶겠지만 상대 선수의 훅(hook)에 한순간에 훅, 가는 수도 있으니 서로 잽만 날리며 탐색전을 펼치다가 종 치는 것이다. 신문 칼럼이 그렇다. 신문 칼럼 속 문장에는 어퍼컷도 없고, 럭키 펀치도 없고, 카운터펀치도 없다. 칼럼에서 << 록키 >> 시리즈 영화나 << 내일은 죠 >> 만화에 나오는 멜랑꼴리한 센티멘탈 하드보일드 펀치의 지랄같은 아우라를 찾으려고 한다면 오산이다.
만약에 내가 문학을 가르치는 선생이라면 신문 칼럼 따위는 절대 읽지 말라고 충고했을 것이다. 국어사전에 등재된 표준어로만 작성된 문장은 옹졸하고, 비문이 전혀 없는 문장은 비계를 제거한 삼겹살을 씹는 기분이 들어서 읽다 보면 목이 막힌다. 비문을 남발하는 것도 문제이긴 하나 비문이 전혀 없는 것도 심각한 문제다(비문투성이로 위대한 문학적 업적을 이룩한 대가는 많다. 섹스피어는 당시에 영국 평단으로부터 비문투성이라는 욕을 얻어먹지 않았던가). 그런 글을 읽을 때마다 지나치게 깔끔을 떠는 것 같아서 재수없을 때가 많았다.
나는 잽으로만 이루어진 안전한 문장보다는 어퍼컷도 날리고 럭키펀치도 가끔 등장하는 문장이 좋다. 비록 그 결과가 경기를 엎어버리게 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해도 말이다. 그래서 찰스 부코스키와 스티븐 킹과 필립 딕 소설을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찰스 부코스키가 예쁜 여자만 보면 자지가 서질 않는다는 문장을 작성했을 때, 나는 은밀하게 그의 저질스러운 문장을 지지했다. " 우럭처럼 울어 ! " 라는 허무맹랑한 표현을 사랑했다. 그것은 수많은 단어 속에서 내가 유일하게 그 가치를 인정해서 조탁한 결과이기에 아, 좋다 !
우럭이 어떤 표정을 지으며 우는지 나는 모른다, 당신도 모른다. 하지만 우럭처럼 울어 _ 라는 문장은 온갖 페이소스를 경험하게 만든다(나의 뇌피셜이기는 하지만). 가을비가 여름 소나기처럼 내리던 날 밤, 사랑하는 개가 죽었다. 그때 나는 우럭처럼 울었다. 울컥한 마음에 버럭 눈물이 쏟아졌다. 지금도 종종 죽은 개를 생각하며 우럭처럼 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