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살던 고양이











                                                                                                 옛날 옛날 일'이다. 그해 나는 지하 벙커에서 어마어마한 일감을 해치워야 했다. 야근은 필수였고 때로는 자정 넘어서도 일을 해야 했다. 나중에는 출퇴근하는 일도 버거워서 회사 근처 모텔에서 생활을 해야 했다. 새벽 4,5시에 일을 끝내고 아침 7,8시에 일을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몸이 너무 아파서 조퇴 신청을 하고 집에 돌아오는 길이었다.  어디선가 고양이 우는소리가 들렸다. 주변을 살펴보니 고양이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내가 몇 걸음 걷기 시작하면 다시 고양이 우는소리가 들렸고 걸음을 멈추면 소리도 사라졌다. 괴이하도다, 괴이하도다, 아아 괴이하도다 !  서서 주변을 샅샅이 훑다가 그 문제의 고양이가 지붕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누구냐옹 ?  당시 내가 살던 동네는 집들이 촘촘하게 붙어서 지붕을 타고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겨 다닐 수 있었던 것이다.  서로 눈이 마주치자 고양이가 야옹 _ 울었다. 


나도 화답했다. " 이리 내려와. 아저씨가 집에 가서 밥 줄게 ! "  놀랍게도 고양이는 내 말을 듣자마자 지붕에서 내려와 내게로 다가왔다. 쭉정이 같은 빈말이었는데 아이고 참말로......        하는 수 없이 고양이를 집으로 초대했다.  당시,  내가 세 들어 살았던 곳은 대문 옆 곁방으로 거실은 없고 마당만 있는 구조였다.  흰 쌀밥에 술 안주로 먹다 남겼던 멸치와 참치를 섞어 주었더니 고양이는 넙죽넙죽 받아먹었다.  나는 잠시 고양이와 놀다가 피곤이 몰려와서 이불을 깔지도 못한 채 쪽잠에 빠졌다.  내가 다시 눈을 뜬 것은 고양이 울음소리 때문이었다.  


고양이는 닫힌 방문 앞에 앉아서 나를 바라보며 울고 있었다. 나가고 싶은 게로구나 ?                 내가 방문을 열어주자 고양이는 마당으로 나가 나무를 타고 올라 담벼락을 따라 이웃집 지붕 위로 사라졌다. 그리고 나는 다시 깊은 잠에 빠졌다. 일이 산더미처럼 쌓였는데 하루를 쉬었으니 일감은 배로 늘어나서 다음날부터 새벽 늦게까지 일을 해야 해서 일주일 동안 모텔에서 생활해야 했다. 일주일 후,  집에 돌아왔을 때 주인집 아주머니가 마당으로 나오시더니 내게 물었다. " 혹시 고양이 키우시오 ? "  내가 영문도 모른 채 멀뚱멀뚱 아주머니를 쳐다보자 


아주머니가 말했다  :  일주일 전부터 고양이 한 마리가 총각네 방 앞에 서서 울던데요. 내가 쫓아내도 다음날에도 찾아오고, 다음날에도 찾아오고, 다음날에도 찾아오고......                         그때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변변치 않은 한 끼를 대접했을 뿐인데 잊지 않고 찾아온 고양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나는 가난했고 외롭고 쓸쓸했으며 몸이 아팠고 서글펐고 막, 막막했다. 그때 그 고양이와 함께 한 시간은 30분 남짓이었으나 세월이 오래오래 흐른 지금도 여전히 오래오래 그 고양이 생각을 한다. 


닫힌 방문 앞에서 상처 받고 돌아갔을 그 고양이를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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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log.naver.com/unheimlich1/220524718774     :    벼락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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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와 사랑이 



                               내가 " 여우 " 라고 부르는 동네 개가 있다. 반려견 주인이 부지런해서 하루에도 몇 번이나 산책을 시키는 모양인데 내가 머물고 있는 빌라를 지날 때에만 짖는다. 캉캉캉 !  카랑카랑해서 듣기 좋은 음색이다. 그들의 언어를 모르지만 펄럭이의 반응으로 보아 여우의 언어 번역은 유추 가능하다. " 야, 이 덩치 큰 놈아 ! 자신 있으면 나와봐라. 달랑거리는 불알을 확, 물어뜯어버릴 테니...... " 이런 메시지였던 모양이다. 여우가 짖으면 펄럭이는 온몸의 털을 곧추세우고는 베란다를 향해 전속력으로 질주한다. 그리고는 담벼락에 앞발을 걸치고는 바깥에서 짖고 있는 여우를 향해 컹컹컹 짖는다. 순간, 마을은 " 캉캉캉 " 과 " 컹컹컹 " 이 엉켜서 잠시 소동이 벌어진다.  펄럭이의 메시지도 유추 가능하다. " 야 이 쪼맨한 여우 새끼, 너 나한테 걸리면 그땐 진짜 죽는다잉 ? " 이 정도 앙숙 관계라면 견원지간 저리 가라, 이다. 그들은 결국 화해하지 못했다. 펄럭이는 세상을 떠났으니까. 오늘 아침( 이 글을 쓰기 바로 전)에 여우가 밖에서 짖는 소리가 났다. 캉캉캉 !  캉캉캉 다음에는 반드시 컹컹컹 이라는 소리가 들려야 하나 고요했다. 울컥 한 마음, 잠시 흔들렸다. 창문 너머 여우를 보니 여우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누군가는 잊지 않고 이렇게 찾아와서 맞짱을 뜨자고 허세를 부리니 말이다. 이 자리를 통해 고백하자면 펄럭이는 성정이 좋은 녀석은 아니었다. 초등학교 운동장에 걸린 태극기처럼 도도했다. 그가 하는 일이라고는 베란다 담벼락에 발을 올려놓고는 산책하는 개와 아이들에게 여길 지나가려면 통행세를 내라며 지랄하는 일을 낙으로 살았다. 아마도 펄럭이는 집앞 길도 동거인의 나와바리'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주인의 경제력을 과신한 경우다. 특히, 아이들을 보면 큰소리로 짖으니 민폐였다. 그중에서 한 아이가 기억에 남는다. 내가 이름 모를 동네 개에게 " 여우 " 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듯이, 그 아이는 펄럭이를 " 사랑이 " 라고 불렀다. 펄럭이는 지나가는 아이들만 보면 윽박지르는데 그 아이는 사랑이라는 사랑스러운 이름을 지어 준 것이다. 가끔 이 아이도 " 여우 " 처럼 담벼락 아래에서 사랑이를 부르곤 한다. 나는 이 아이에게 어떤 말을 해 주어야 할지 모르겠다. 고요할 때마다 펄럭이가 생각난다. 현관문을 열었을 때, 여우가 캉캉 짖었을 때, 아이가 담벼락 아래에서 사랑아, 라고 애타게 부를 때 아무런 응답이 없다는 사실이 슬프다. 타자의 죽음은 부재 때문이 아니라 응답할 수 없는 침묵 때문에 힘든 것이다. 귀빠진 날 아침에 청승맞게 이적의 < 거짓말 > 이란 노래를 듣는다. 그때 나는 응급실에서 산소 호흡에 의지하는 펄럭이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 괜찮아, 다 괜찮아질 거야. 내가 집을 팔아서라도 꼭 고쳐줄게. 내일 다시 올게 ! " 개는 살짝 꼬리를 흔들었다. 내가 응급실을 나선 지 10분 후에 펄럭이는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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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궐 2019-11-23 21: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렸을 때 조그만 갈색 암컷이 동네 사람들을 자주 물었어요. 부모님이 얘 좀 잡아라 했을 때 신경질이 나서 그만 발로 걷어찼죠. 이웃집에 불 났을 때 짖어대서 큰 화재를 막았던 영민한 개였어요. 학교 다니느라 서울에 나와 살 때 그 개는 집에서 나가 한갓진 곳에서 몰래 혼자서 죽었대요. 그러고는 별 생각이 없었는데 요즘 붉은 여우처럼 될 것만 같은 암컷 강아지가 또 생겨서 집에 데려오려고 합니다. 딸내미 소원이라서 어쩔 수 없어요. 이 강아지를 키울 생각을 하니 그 때 그 암컷이 자꾸 생각나는 거예요. 그 때 그 아이를 발로 찼던 게 이내 마음에 남았던 거 같아요. 개는 쓰다듬을 때 눈을 지그시 내리감고 사람 손길을 온몸으로 느끼는 모습이 저는 좋아요. 펄럭이는 아직도 곰곰 님 손길을 느끼고 있을 거예요. 기운내세요.

곰곰생각하는발 2019-11-24 12:56   좋아요 0 | URL
붉은 여우 같은 강아지 식구가 늘어나니 좋군요. 잘 키우시기 바랍니다. 저의 집 개도(옛날에 키우던...) 13살 노견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원래, 주인에게 충성스러운 개들은 죽을 때가 되면 집을 나가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죽는다고 하더군요..

곰곰생각하는발 2019-11-26 12:57   좋아요 1 | URL
˝ 곰은 마지막 며칠 동안 너무 아파서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어. 그런데도 곰아, 부르면 애써서 고개를 들고 꼬리를 치는 거야. 곰아, 밥 먹어, 말하면 곰은 안 아픈 척 밥에 코를 대고 먹는 시늉을 했어. 그런 곰 앞에서 울었어. 곰이 단순히 아픈 게 아니라 죽어간다는 걸 느꼈거든. 한 밤을 자고 나서 개집에 가니 곰이 사라졌더라. 그애가 사라지고 한 달 내내 울면서 학교를 다녔어. 울고 또 울었지. 내가 괜히 곰 앞에서 눈물을 보여서 곰이 집을 나갔다고 생각했어. 자기가 아픈 걸 보고 내가 마음 아파하니까 죽으러 나간 거라고 생각하며 자책했지. 아무리 슬프더라도 내색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울지 말았어야 했는데. ˝



- 최은영 <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 >

돌궐 2019-11-26 19:40   좋아요 1 | URL
슬픈 글, 죽어가면서도 주인의 말소리에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 같은 글, 적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불  안  불  알  하  다     :














신경숙 문학이 타락한 한국 문학을 대표한다고 ?!














외대 근처에서 식당을 하는 그는 시간 날 때마다 세계를 여행한다. 소식이 뜸하다 싶으면 여행 중이라 생각해서 무소식이 희소식이려니 한다. 언젠가는 자전거 한 대로 일본 열도를 여행하며 쓴 기록을 책으로 출판하기도 했다. 그가 스페인을 여행할 때였다고 한다. 우연히 한국인 여행자를 만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가 느닷없이 대화 도중에 페루애를 언급하며 열을 올리더란다. 처음에는 페루(에 사는) 애'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는 동방예의지국에서 입만 열었다 하면 불알후드를 남발했던 그 페루애'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아니고 머나먼 이국에서 자신이 알고 있는 페루애란 이름을 들어서 신기했다고 외대에서 식당을 하는 그는 말했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누구나 자유롭게 글쓰기 창(플렛폼)을 통해서 글을 쓸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서 서로의 취향이 비슷하다면 그것을 공유 혹은 체험하게 되는 경우는 드문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취향이 비슷하다면 끼리끼리 모여 알음알음 알게 되는 시대가 바로 뉴 미디어 시대이다. 이제는 특정 분야의 전문가만이 그 권위를 부여받아 글을 생산하고 유포하는 시대는 지났다. 아니 끝났다. 깐 데 또 까는 일본 순사처럼 보다 잔인한 어조로 말하자면 그런 시대는 죽었다 ! 


그런데도 불구하고 레거시 미디어를 통해서 권위를 부여받아 특권을 누렸던 사람들은 이 사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세계에서 유일하게 한국에서만 존재하는 등단 제도는 그들의 나와바리를 공고하게 만드는 집단 이기주의를 대표하는 표본이지만 이 적폐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는 문인은 거의 없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죽은 아들 불알 만지듯이 미련을 못 버리고 이미 죽은 한국 문학의 불알을 만지며 한국 문학의 부활을 외치고 있으니 볼 때마다 불안불알하다.  그들을 보면 안쓰럽게보다는 미련하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문학이 세상을 구원하는 시대는 지났다. 


발가락 다쳤다고 낑낑대는데 정강이 냅다 걷어찬 꼴이라 미안하기는 하지만 그 사실을 그들만 모른다. 신경숙 표절 사태에서 내가 정작 한심하게 생각했던 이는 신경숙이 아니라 신경숙 표절을 최초로 고발한 이들의 고결한 결의'였다. 이응준이 신경숙을 고발하면서 " 타락한 한국 문학에 맞 -  " 서야 한다고 말할 때, 내 눈에는 이 순정이 순결하다기보다는 미련하게 보였다. 왜냐하면 신경숙 때문에 한국 문학이 타락한 것이 아니라 등단 제도'라는 나와바리를 지키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던 한국 문학 전체가 공모했기 때문이다. 한국 문학의 타락은 신경숙을 비롯해서 등단 제도의 혜택을 누린 문단 전체'에 있다. 


그렇기에 신경숙만 싸잡아서 적폐라고 주장하는 것은 죄를 은폐하기 위한 문단의 격동적인 수사이자 서둘러 종결하기 위해 에둘러 말하는 게으른 으름장이다. 신경숙 문학이 타락한 한국 문학을 대표한다고 ?! 아니다, 한국 문단이 타락한 한국 문학을 대표한다. 







덧대기

젊은 예비 작가들이 등단 제도를 통과하기 위해서는 문단 어르신의 취향에 맞춰야 한다. 문단 어르신이 대부분 장년의 남성 엘리트 집단이라는 점에서 젊은 예비 작가들은 철저하기 늙은 남성의 욕망을 찬양할 수밖에 없다. 한국 문학이 늙어가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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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훌륭한 가성비에 대한 환상






비비케이(BBK) 같은 사건이 터졌을 때 제대로 된 사회에서라면, 거의 반년 안에 스무 권이 넘는 논픽션이 쏟아져 나와야 한다. 그 가운데 어느 한 종이 100만부나 팔리고 그게 시중의 화제가 되고 칼럼에 오르내리는 사회가 <엄마를 부탁해> 같은 소설이 100만부나 팔리는 사회보다 훨씬 바람직할 수도 있다.
 
ㅡ 장정일





                                                                                                                                                                                                                  자본주의 상품 가운데 " 가성비 " 가 가장 낮은 것은 책'이다. 책이라는 상품은 소비자가 지급한 가격에 비해 큰 효용(실용)을 주지 못한다. 투자 비용과 독서를 위해 소비된 시간을 감안하면 쾌락(만족)은커녕 오히려 고통을 선사할 뿐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 스터전의 법칙 > 을 생각한다. 모든 것의 90%는 쓰레기 ! 


그중에서도 가성비가 최악인 상품은 제임스 조이스의 << 더블린 사람들 >> 일 것이다. << 더블린 사람들 >> 은 읽는다는 행위가 고문의 한 형태가 아닌지 끊임없이 의심하게 만드는 제품이다. 독서 행위가 마라톤 경주라고 했을 때, << 더블린 사람들 >> 에는 깔딱고개가 수십 개 등장한다. 완주할 수 있을까 _ 라는 의문이 계속 들지만 의문이 계속될수록 결승점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아마추어 마라토너의 목표는 기록 경신이 아니라 완주'가 아니던가 ! 독서의 목표는 쾌락이 아니라 고통이다. 고로 간서치는 마조히스트'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가성비가 낮다는 것은 좋은 상품이라는 의미'이다. 


260억이 넘는 스위스 파텍필립 수제 황금 회중시계는 실용과 효용적 측면만 놓고 보면 형편없다. 시간을 보기 위해 이 시계를 구매하는 억만장자는 없다.  이 시계는 오로지 감상용일 뿐이다.  반대로 가성비가 높다는 것은 하품(下品)을 의미한다.  이런 상품들은 대부분 박리다매 전략을 통해서만 이윤을 창출할 수 있다. 그러므로 책을 사고 읽는 행위는 럭셔리한 것이다. 한승태 노동 에세이이자 르포 문학이라 할 수 있는 << 고기로 태어나서 >> 는 내가 선정한 올해의 책'이다(문학 분야에서는 애나 번스의 << 밀크맨 >> 을 추천하고 싶다). 


무엇보다도 한국 출판문화에서 불모지라 할 수 있는 르포르타주에서 이룩한 뛰어난 성취라 무엇보다도 반갑다(출판 문화 강국의 베스트셀러는 대부분 논픽션이다). 평소 소설과 시만이 위대한 문학 예술이라고 믿는 문인(문단)의 지랄같은 허세가 역겨웠는데 이 작품을 만나니 반가운 마음이다. 첫 번째 장편소설로 부커상을 수상한 이후 픽션 대신 논픽션을 선택한 로이는 문학 한다고 힘 주는 작가들에게 묻는다. " 대체 언제부터 작가들이 논픽션 쓰기를 포기했는지요 ? " 


이 책은 저자가 몸소 체험한,  고기로 태어나서 죽을 수밖에 없는 닭/돼지/개 농장 현장을 다룬 르포인데 심각한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문학적 재능에 힘입어 쉽게 읽힌다. 사육장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그 이상'다. 이 책을 읽다 보면 " 사육장 " 이라는 단어는 " 살육장 " 을 은폐하기 위해 사용한 나치의 언어규칙(Sprachregelung)화'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나치는 < 학살 > 이라는 표현 대신 < 최종해결책> 이라는 단어로 은폐했다). 저자는 동물농장에서 자신이 하는 일이 동물을 기르기 위한 노동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죽이기 위한 노동력을 제공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성장이 늦은 병아리와 돼지는 그 자리에서 즉결 처리, 도태, 청소된다. 동물 복지 윤리에 따른 애도도 없고 절차도 없다. 병아리 다리를 잡고 머리를 시멘트 바닥에 내리치는 것이 전부다. 새끼 돼지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생명이란 질긴 것이어서 머리가 으깨진 병아리 더미에서도 아프다고 밤새 운다고 한다. 우리가 가격 대비 최고의 단백질 공급원이라고 찬양하는 치느님의 고단한 일생인 것이다. 이 책을 읽다 보민 치느님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폭력적인 표현이란 사실을 깨닫게 된다. 우리들이 찬양하는 치느님은 닭 농장에서 평균 35일을 산다. 닭이 13살까지 살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너무 짧은 생'이다. 


얼마 전, 키우던 개가 죽었다. 대형견이어서 수혈 1회 비용이 150만 원이었고 하루 입원비는 40만 원이었다. 개에게는 피가 필요했고 그럴수록 나는 피가 바짝바짝 말랐다. 돈 때문에 생명을 외면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개가 죽은 후 다시는 개를 키우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이 다짐이 영원한 결의가 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나 스스로 잘 알고 있다. 기회가 된다면 유기견 보호센터에서 개 한 마리 입양해서 키울 생각이다. 젊은 녀석보다는 늙은 녀석을, 예쁜 녀석보다는 흉한 녀석을, 순종보다는 믹스견을 입양의 조건으로 고려해 보아야 겠다. 


이 책을 많은 사람들이 읽어으면 한다. 한국 출판 문화에서 훌륭한 르포르타주를 만난다는 것은 흔하지 않은 행운이다. 이 책은 기(록하는)자의 르포르타주로도 훌륭하고 소설가의 르포르타주로도 훌륭하다. 저자 한승태는 기자도 아니고 소설가도 아니지만 둘 다 해냈다는 점에서 훌륭한 성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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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맨 2019-11-18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한승태의 글을 읽으면서 자꾸만 찰스 부코스키가 자신의 산문집인 ˝죽음을 주머니에 넣고˝에서 썼던 문장이 떠오르더군요.
‘끔찍한 일이다. 우린 얼른 뒈져서 여길 떠나주는 게 제일 좋다.˝
사실 환경보호와 동물존중에 갈음할 수 있는 말은, 인간절멸이라는 생각마저 들기도 합니다.

2019-11-18 13: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1-18 14: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1-18 15: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에로틱번뇌보이 2019-11-18 17: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저도 한승태님의 ‘인간의 조건‘과 ‘고기로 태어나서‘라는 두 르포를 읽고 공장식 축산방식에 경악함과 동시에 작가의 글맛에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르포 작가의 표본이 있다면 이런 분이 아닐까 싶어 후속작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전 장정일 작가님께서 독서일기에 적었던 글이 생각나네요.
˝바람직한 사회는 예컨대 천안함-세월호 사건 직후, 거기에 대한 논픽션이 20여권이나 쏟아져 나오는 사회다.(중략)
논픽션은 민주 사회를 지키는 보루이며, 나아가 공공의 가치를 지키는 데 필요한 무기다˝

곰곰생각하는발 2019-11-18 18:25   좋아요 1 | URL
한국 출판 문화가 낙후되었다는 명징한 증후가 바로 르포르타주죠. 일본만 해도 르포가 많이 출간되고 베스트셀러에 오릅니다.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죠. 그런데 유독 한국 출판은 황무지입니다. 천시하는 경향도 있고요. 순문학을 숭배하는 이상한 꼰대 정신이라고나 할까요. 하여튼 한승태의 이 책은 발견이었습니다. 조은의 << 사당동 더하기 22 >> 라는 르포르타주도 좋죠. 이런 르뽀 많이 출간되었으면 합니다. 장정일의 말에 100% 동의합니다..

기록이야말로 진실의 가장 강력한 힘이죠.

에로틱번뇌보이 2019-11-19 13:34   좋아요 1 | URL
500여명의 희생자를 낸 삼풍백화점붕괴사고 관련 르포도 2016년 출간된 <1995년 서울, 삼풍> 1권에 불과합니다. 그것도 서울문화재단의 기획과 후원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죠. 르포르타주가 관련 사건 희생자들을 위로하고 기억하는 제의의 한 방식으로 이해한다면, 우리 사회는 타인의 비극에 무감하고 되려 천시하는 끔찍한 사회라고 단언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말씀하신 <<사당동 더하기 22>> 책도 읽어봐야겠네요. 감사합니다.
 













인생은 실패의 연속








                                                                                                 SF작가 시어도어 스터전은 " SF문학의 90%는 쓰레기다. 하지만 모든 것의 90%도 쓰레기 " 라고 말했다. 이것을 < 스터전의 법칙 > 이라고 한다. 홧김에 내뱉은 요설처럼 보이지만 곰곰 뜯어보면 진실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 주장은 작가가 SF의 90% 는 쓰레기라고 생각한 사람들, 혹은 장르 문학을 싸잡아서 비난하고 순문학을 숭배하는 사람과의 논쟁에서 반박용으로 마련한 말풍선이었다. 이 기준을 다른 곳에도 적용한다면, 영화, 문학, 상품, 매식(식당 요리) 따위도 90% 는 쓰레기라고 주장할 수 있게 된다. 시어도어 스터전이 강조하고 싶은 말은 하나다. 공상 과학 소설은 다른 모든 예술 장르와 동일한 가치를 가진다. 인간이라고 해서 스터전의 요설을 벗어날 수 없다. 인간의 90%는 쓰레기'다. 망언처럼 들리지만 달리 생각하면 특정한 인간은 다른 모든 인간과 동일한 가치를 가진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 또한 쓰레기일 확률이 높다. 우우, 하지 마시라. 나 또한 우주에 떠도는 쓰레기에 불과하니까. 쓰레기'라는 단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우주에 떠도는 티끌 정도로 해 두자.  내 독서 경험, 정확히 말하자면 책을 사는 소비 행위에 비춰 말하자면 10권을 사면 마음에 드는 책은 2권 정도에 불과하다. 영화도 그렇다. 한 편의 걸작(傑作)을 만나기 위해서는 아홉 편의 걸작(乞作 : 거지 걸)을 먼저 만나야 한다. 영화가 거지 같다고 징징거리며 울 필요는 없다. 훌륭한 영화를 만나기 위해서 징검다리 하나를 놓는 과정이라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우는 법이니깐 말이다.  스터전의 법칙에 순응하면 우리는 하자 많은 상품에 대하여 불같이 화를 낼 필요 없다. 어차피 인생이란 선택의 연속이고 그 선택이 성공할 확률은 10%에 불과하니깐 말이다.  백종원이 << 골목식당 >> 에서 음식 맛이 형편 없다며 씹던 음식을 휴지에 싸서 버렸을 때, 그가 정작 버려야 했던 것은 음식물 쓰레기가 아니라 그 사람의 썩어빠진 염통이었다.  우리는 돈을 주고 구입한 책이 재미가 없다고 해서 작가의 집을 찾아가 그 사람 면전에서 책을 찢어 버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영화가 재미없다고 해서 영화관 직원 멱살을 잡고 환불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선택 행위에서 필연적으로 따라올 수밖에 없는 실패를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맛이 없다고 해서 음식점에서 음식을 뱉는 행위는 버릇 없는 세 살 아이'나 할 짓이다. 우리는 이런 행위를 진상 짓이라고 부른다. 식당에서 파는 음식의 90%는 맛이 없다. 요식업이라는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는 것은 나머지 10%다.  살아남은 식당이 결국에는 맛집으로 등극하는 것이다. 맛 없는 음식은 쓰레기통에 버려야 할 음식물 쓰레기'라고 믿는 백종원은 과연 자신이 운영하고 있는 프랜차이즈 식당을 성공적으로 이끌고 있을까 ? 


프랜차이즈 식당의 폐점률(가맹점 업주의 계약 해지 비율)을 살펴보면 백종원 프랜차이즈 식당은 다른 프랜차이즈 식당과 비교했을 때 대동소이하거나 오히려 조금 더 높다.  더본코리아가 운영하는 11개 프랜차이즈 폐점률은 6.7%로 치킨(6.6%)와 피자(6.7%) 분야의 주요 프랜차이즈 업종의 평균 폐점률과 유사하다. 가맹점 수가 많든 적든 폐점률 수치가 높다는 것은 기대한 수익보다 실제로 받는 수익이 적거나 본사에서 관리와 역량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백종원이 다른 식당에 비해 맛의 우위를 확보하지 못했다는 명백한 증거'다. 


<< 골목식당 >> 에 출연한 식당이 성공하는 이유는 백종원의 레시피 때문에 아니라 방송 과정에서 벌어지는 스토리텔링 때문이다. 맛을 결정하는 것은 요리가 아니라 단순한 허기'이다. 인생이 선택의 연속이라면, " 선택의 연속 " 은 곧 " 실패의 연속 " 이기도 하다. 돌고 돌아서 원점에서 다시 말하자. 다자이 오사무처럼,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처럼 징징거리며 말하겠다 : 인생이란 결국 실패의 연속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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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18 11: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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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18 12: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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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18 12: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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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18 13: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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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9-11-18 2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그냥 지저분한 쓰레기로 살래요. 완전 깨끗한 사람은 건강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어요. 적당히(이게 어느 수준이 저도 잘 모르겠고, 명확하지 않지만) 지저분하게 살아야 병균에 견디고 면역력이 생기니까요.. ㅎㅎㅎㅎ

곰곰생각하는발 2019-11-19 23:32   좋아요 0 | URL
그래요. 조금 지저분하게 사는 것도 숨통이 트이는 방식 아니겠씁니까..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