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석의 독점에 반대한다
비평가들이 일삼는 작품에 대한 해석은 예술에 대한 가장 잔인한 테러'이다
- 해석에 반대한다, 수전 손택
언제부터인가 신간 소설 뒤편에 부록처럼 평론가의 " 작품 해설 " 이 붙기 시작했다. 종종, 고전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 작품 헤제'가 실리는 경우는 있었지만 초판 1쇄 발행인 책, 그러니까 신간 소설이 대중 앞에 첫선을 보이기 앞서 (평론가의 검증 과정을 거친 후) 소설 뒤에 작품 해석 부록을 함께 제공하는 1+1 전략을 본격적으로 선보인 것은 출판사 문학동네'였다.
그러자 우후죽순으로 여러 출판사에서 이 스타일을 모방했고, 주례사와 정실 비평은 한국 출판 문학의 랜드마크'가 되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출판사와 이해관계에 있는 (출판사에서 운영하는 문예지에서 활동하는) 평론가들이 그 출판사에서 출간되는 작품의 평론을 작성한다는 점이다. 문제는 매의 눈이 되어 날카롭게 작품을 해제해야 될 평론가들이 썩은 동태 눈깔이 되어 사탕발림을 남발한다는 데 있다. 내가 보기엔 그 소설의 주제는 " 현대인의 불안 " 인데 평론가들은 " 현대인의 불알 " 이라고 하니 이 간극을 대체 어찌하오리까. 그래, 현대인의 불알은 소중하다아.
독자는 평론가'라는 권위에 눌려 그들이 해석한 텍스트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영화 << 넘버3 >> 에 등장하는 조필(송강호 분) 이다. 평론가들이 목에 핏대 세우며 " 내, 내내내내가 현정화라면 현정화야 ! " 라고 소리치면 임춘애'라고 믿었던 독자는 그만 할 말을 잃게 된다. " 그래, 현정화겠지. 아무렴 ! 한국 문학, 최고의 문학 박사님께서 현정화라고 하시니 현정화일 거야. 그래, 현정화는 날마다 라면만 먹고 육상에서 금메달 3개나 딴 육상 선수'야. " 그러다 보니 출판사에 소속된 문학 박사님께서 작성하시었던 " 평론을 가장한, 출판사 홍보 자료 " 는 권위의 날개를 달고
지붕 뚫고 하이킥을 하기에 이른다. 그들 말마따나 어떤 작품은 " 전무후무한 걸작 " 이 되고 " 전복적 상상력 " 이 되고, 또 어떤 작품은 " 출구 없는 현대인의 불알 " 이 된다. 아무렴, 그렇고말고요. 현대인의 불알은 소중하니까 ! 출판사가 자신과 이해관계에 놓인 평론가를 동원하여 평론(부록)을 제공하는 태도는 기본적으로 독자의 문해력이 낮다는 가정에서 출발한 애티튜드'이다. 너희, 문학 무지렁이들이 무엇을 알겠느냐. 문학 박사님이 가르쳐주마. 뭐, 이런 태도 ?! 그러니깐 평론 부록은 독자를 낮잡아보는 문학 엘리트의 지적 허세'인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보았던 주례사 비평의 최고봉은 남진우가 신경숙의 << 외딴 방 >> 에 남긴 평가였다. 그는 이 소설을 <<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 과 겨뤄도 손색이 없는 최고의 노동소설이라고 극찬했는데 사실 신경숙의 << 외딴 방 >> 은 노동소설이 아니라 반노동 정서를 악랄하게 담고 있다는 점에서 남진우의 주례사는 괴랄하다. 주인공 < 나 > 가 노조를 배신하면서 말했던 해도 해도 안 되는 일이 있다( " 해도 해도 안되는 일이 있는 것이다. 우리들의 희망은 소모전이었던 것이다 " )는 변명은
7,80년대 노동 운동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신경숙의 퇴행적 사회 인식을 엿볼 수 있다. 신경숙이 보기에 7,80년대 노동 운동은 쓸모 없는 소모-전'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녀는 줄기차게 주인공 < 나 > 의 입을 빌려서 노동 운동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을 보내는데, 이 행위 자체가 정확하게 강경 자본가 우파의 " 정치색 " 을 띤다는 점에서 < 나 > 가 강박적으로 정치에는 관심이 없다고 고백하는 언술은 이율 배반에 해당된다. 노동 운동을 단순하게 " 해도 해도 안 되는 ㅡ " 무용한 일로 치부하는 것은 자본가가 노조를 무력화하기 위해서 노동자를 협박하거나 회유할 때
자주 사용하는 언술이라는 점에서 << 외딴 방 >> 에서 주인공 나는 < 외피는 구로공단 여공 작업복을 둘렀지만 내피는 자본가 / 기득권 / 수구 보수 남성의 실크 넥타이를 맸다는 점에서 속내를 숨긴 캐릭터 > 로 읽힌다. 그것은 여성W이라는 외피를 둘렀지만 내피는 뒤집어진 남성 M 이라는 간교와도 일맥상통한다. 광주 시민을 학살했던 학살자(대통령)의 얼굴보다 싫은 것이 무우국을 끓이려고 사다 놓은 무우가 꽝꽝 얼어버려가지고 칼이 들어가지 않는 가난이라고 자신있게 말하는 화자의 철딱서니 없는 논리를 앞세우는 << 외딴 방 >> 이 난쏘공을 뛰어넘는 노동소설이라고 ????!
책 뒷면에 부록처럼 달린 주례사 비평과 정실 비평으로 인해 독자가 작품을 읽고 주체적으로 작품을 해석할 자유를 잃은 결과가 바로 한국 문학의 몰락이었다. 독자의 이해를 돕겠다는 선의와는 달리 출판사의 1+1 전략은 오히려 독자의 작품 해석을 방해하는 주범이 되었다. 작품 해석의 주체는 평론가가 아니라 독자의 몫이 아닐까 ? << 조국대전 >> 이라는 대하소설의 한 꼭지였던 < 김경록PB KBS 9.11 보도 파문 > 을 보면서 느꼈던 것은 출판사와 평론가의 끈적끈적한 관계가 언론과 검사의 관계와 매우 유사하다는 점이었다. 검사는 << 조국 >> 이라는 텍스트 독해를 독점한다. < 조국 > 이라는 일상성을 다룬 사소설 장르는 검사에 의해 가족 범죄 사기극(피카레스크) 장르로 변질된다.
그리고 검사의 말이니 믿고 의심하지 않는 기자의 태도는 문학박사님의 텍스트 독해이니 어련하시겠어 _ 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독자를 닮았다. 검사님이 " 내가 현정화라면 현정화야 ! " 라고 핏대 세우며 외치면 기자들은 받들어, 총 ! 대중 앞에 첫선을 보이기 앞서 먼저 평론가의 검증을 받고 나서 그 평론이 책의 부록처럼 유통되는 출판 시스템은 전 세계에서 대한민국이 유일하듯이 검사의 말이라면 팩트 확인도 없이 받아쓰는 기자들도 전 세계에서 대한민국이 유일할 것이다. 주례사 비평의 결과가 한국 문학의 몰락을 가져왔듯이 정언유착도 결국에는 한국 기자의 몰락을 가져올 것이다.
KBS이라는 거대한 공영 방송사'가 1인 유튜버에게 발려서 쪽도 못 쓰는 광경이 명징한 징후'이다. KBS 법조팀에게 묻고 싶다. " 정말 현정화는 짱깨와 라면만 먹고 달려서 육상에서 금메달 3개나 땄니 ? 너희들, 밥은...... 먹고 다니니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