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예술가는 빌리지만 위대한 예술가는 훔친다 :
결정적 순간
일요일 오전 10시.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시원한 맥주와 안주를 준비하고 창문을 닫고 커튼을 친 다음, 에어컨을 가동했다. 플레이 버튼'만 누르면 영화가 시작되지만 오늘 준비한 이벤트의 화룡점정은 상영 시간'에 맞춰져 있다.
프레드 진네만 감독이 연출한 << 하이 눈, 1952 >> 은 반드시 오전 10시 35분'에 플레이 버튼을 눌러야 되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모두 다 아시다시피 이 영화 속 배경은 오전 10시 35분에 시작되어 12시 정오에 끝나는 영화'다( 물론 시계가 12시를 가리킨 이후에도 15분가량 마지막 대결 장면이 보이기 때문에 12시 15분에 끝나는 영화라는 표현이 더 적확할 것이다). 하이눈은 영화 속 시간(10:35~12:15)과 영화의 상영 시간(100분)을 일치시킨 영화로 관객이 영화를 보는 실재 시간과 영화 속에서 상기시키는 시간 흐름이 일치한다는 점에서 매우 실험적인 영화'이다.
나는 이 기쁨을 만끽하고 싶어서 정확히 오전 10시 35분에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영화 속 등장인물과 관객인 나는 지금 동시간대를 공유하는 것이다 !). 영화에 등장하는 시계는 등장인물과 관객에게 악당이 마을에 도착하는 예정 시간인 정오까지 얼마나 남았는지를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정오는 말 그대로 " 데드라인 " 인 셈이다. 나는 영화 속에서 시간을 알리는 시계가 등장할 때마다 거실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영화에서 11시를 가리키면 현실 속 시간도 정확히 11시를 알리고 있는 것이다. 아따, 허벌나게 짜릿하다 ! 이 영화는 주류 서부극 장르'에서 흔히 보이는 클리셰'가 없다.
예를 들면 서부극의 트레이드 마크라 할 수 있는 추격, 폭력, 액션, 서부의 광활한 자연 풍경 찬양 따위'가 등장하지 않는다. 또한 보안관 케인(게리 쿠퍼 분)은 기존 서부극 영웅과는 결이 다르다. 기존 서부극 속 영웅은 혼자의 힘으로 악당을 물리쳐 마을을 구원하는 맨-파워의 상징적 인물이지만 이 영화에서 보안관 케인'은 전지전능한 구원자가 아니다. 그는 적과 싸우기 위해 마을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힘을 합쳐 함께 싸우자고 호소하는 다소 나약한 인물로 그려진다. 일종의 수정주의 서부극인 셈이다. 그러다 보니 전통 서부극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 영화를 곱게 볼 리 없었다.
서부극에서 전지전능한 영웅을 연기했던 존 웨인'은 이 영화를 싫어했고 하워드 혹스는 존 웨인과 의기투합하여 영화 << 리오 브라보 >> 를 만들었다. 마을 보안관이 어느 누구의 도움 없이 혼자서 악당-들'과 대결한다는 내용이다. 이 영화를 만든 목적은 단순했다. 하워드 혹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존 웨인과 나는 < 하이 눈 > 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 리오 브라보 > 를 만들었다. 나는 좋은 보안관이라면 겁쟁이처럼 사람들에게 도움을 구걸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보안관의 목숨을 살리는 것은 그의 아내가 아닌가 ? 이러한 설정은 내가 생각하는 좋은 서부극이 아니다 ! "
불알후드의 발광 다이오드적 3파장 극성에 해당되는 지랄 같은 허세'를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존 웨인'보다는 게리 쿠퍼 보안관'이 마음에 든다. 나는 영화 속 게리 쿠퍼 보안관을 열렬히 지지했다. 영화에 흠뻑 빠지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흘러 12시(high noon)에 다다랐다. 악당 프랭크 밀러 일당과 게리 쿠퍼'가 만나는 지점이다. 그때였다. 내 집 거실 벽에 걸려 있던 시계가 12시를 알리는 알림 소리'를 냈다. 불길한 예감. 거실에 걸린 시계는 알람 소리 기능이 없는 단순한 시계'가 아니던가 ? 알고 보니 시계의 알람 소리가 아니라 누군가 현관문 벨을 누르고 있었다.
현관문 렌즈를 통해 밖을 보니 복도에는 세 명의 남자가 카우보이 복장을 한 채 주변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영화 속 악당인 프랭크 밀러와 그 부하들이 아닌가. 나는 깜짝 놀라서 현관문에서 한 발짝 물러나다가 내 허리춤에 리볼보 45구경 권총이 걸려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영화에 집중하다 보니 영화 속 세계로 빨려 든 것이다. 타임 블랙홀에 빠진 것이다. 좋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사나이답게 적과 싸우다가 장렬히 죽으리라. 나는 현관문 잠금장치를 해제한 후 문을 냅다 걷어찼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갑자기 문이 열리면 악당들은 당황해서 허둥대리라. 그때를 노려야 한다.
내 계획이 빗나갔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문이 열리자 눈부신 정오의 햇살이 밀려 들어와 " 결정적 순간 high noon1) " 에 갑자기 앞이 하얗게 보이는 화이트아웃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그때 세 방의 총성이 동시에 울렸다 ! 때는 늦었다. 소리와 속도의 물리적 계산을 하기에는 너무 늦은 것이다. " 니미, 시이이이발 ~ " 총알을 피하기에는...... 나는 너무 늙었다. 사람이 죽으면 제일 먼저 열리는 것은 항문의 괄약근이라고 한다. 푸쉬쉬쉬 ~ 열린 내 괄약근 사이로 방귀가 새어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잠시 고민했으나 나에게는 많은 시간이 허락되지 않았다.
1) high noon 은 " 정오 " 라는 뜻과 함께 " 결정적 순간 " 이란 뜻도 가지고 있다. 어느 하드보일드 소설의 대가(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는 독자가 지루하다 싶으면 느닷없이 소설 속에 총을 등장시켜 방아쇠를 당긴 후 잉글랜드 토끼처럼 토끼라고 했다. 그래야 독자의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릴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에 쿠엔틴 타란티노는 머리통을 날릴 기세로 총을 뽑되 절대 쏘지는 마라 _ 라고 충고한다. 영화 << 펄프픽션 >> 의 도입부에서 두 명의 짝패 펌킨과 허니버니는 식당에서 커피를 마시다가 밑도 끝도 없이 식객을 향해 소리친다. " 모두 꼼짝 마. 우린 강도다. 발가락만 움직여도 모두 머리통을 날려버린다 !!!! "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냅다 소리를 지르며 시작하니 관객은 어리둥절할 뿐이다. 시작부터 이 모양이니 관객은 총알이 빗발치는 현장을 상상하지만 격발은 내내 지연된다. 이 지적은 발기하되 사정하지는 마라 _ 라는 고대 인도의 성전 < 카마수트라 > 의 문장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너무 천박한가 ? 그렇다면 인이불발 (引而不發) 정신이라고 해두자. 활시위를 당길 뿐 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 영화 << 펄프 픽션 >> 에서 이 장면은 당기되 쏘지 않는 방식의 전형'을 보여준다. 기똥찬 영화'다.
두 대가의 작법론 중에서 어느 것이 더 훌륭한 작법일까. 에둘러 말하지 않고 서둘러 말하자면 둘 다 옳은 지적이다. 전자는 선행된 액션에 방점이 찍혔고 후자는 지연된 심리에 방점이 찍혔다. 또한 전자는 서프라이즈에 해당되고 후자는 서스팬스에 해당된다. 그러니까 활극이 스토리텔링의 중심이라면 일단 쏘고 나서 잉글랜드 토끼처럼 토끼는 편이 유리하고, 서스펜스를 중심으로 한 심리극이라면 장전은 하되 쏘지 않는 편이 유리하다는 소리이다. 여기서 잠깐 샛길로 빠지자면 많고 많은 토끼 중에 왜 하필 잉글랜드 토끼'인가 _ 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으련다. 잉글랜드 토끼는 일종의 나의 맥거핀'이다. 잉글랜드 토끼는 그런 존재'다 ! 나는 아무래도 일단 쏘고 나서 토끼는 잉글랜드 서사가 좋은 모양이다(물론 때에 따라서는 가거도 우럭 서사도 좋아하는 편이다). 고전 영화 리뷰랍시고 글을 쓰다가 글이 막혀서 느닷없이 총을 든 악당을 등장시켰으니 말이다. 오후 3시가 온전히 << 아비정전 >> 의 시간이라면 << 하이 눈 >> 은 10시 35분, 혹은 정오의 세계이다. << 하이 눈 >> 은 좋은 영화'이다. 일요일 아침 10시 35분에 이 영화를 권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