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라는 낱말의 동의어는 화가'이다




                                                                  옛말인 " 믈 " 은 " 물(水) " 로 변화했다. 마찬가지로 < 블 > 은 " 불(火) " 로, < 플 > 은 " 풀 (草) " 로 변화하였다. 형용사 " 푸르다 " 에서 어간 " 프르 ㅡ " 는 < 플 > 이 바탕이다.

그러니까 색을 지시하는 푸르다(푸른색)는 풀빛을 중심으로 그 주변색을 포괄적으로 아우른 때깔이다. 색띠(색상 스펙트럼)에서 靑 : 푸를 청'과 綠 : 푸를 녹'은 서로 떼래야 땔 수 없는 젖은 땔감과 같은 사이로 죽마고우요, 운우지정을 나누는 죽자사자 같은 사이'여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청색(BLUE)과 녹색(GREEN)을 따로 구분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녹색 신호등을 " 파란불 " 이라고 말하고 잔디를 " 파란 잔디 " 라고 부른다. 이처럼 동서양을 막론하고 옛사람들이 청색(BLUE)과 녹색(GREEN)을 구별하지 못하는 이유는 파랑( 먼셀 표색계에서 2.5PB 4/10에 해당되는 색)이라는 어휘가 다른 색 어휘와 비교한다면

비교적 최근에 발견된 색이라는 데 있다. 현대인이 인식하는 파랑은 자연(계)에서는 보기 힘든 색깔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파란색 꽃은 사람들이 인공적으로 교배해서 만들어낸 것이고, 6만4000종의 척추동물 중에서 몸에 파란색을 지니고 있는 종은 단 2개에 불과하다. 따라서 파랑이라는 인공염료를 생산하기 전까지, 옛사람이 자연에서 파란색을 보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옛사람들에게는 < 파랑 > 이라는 어휘 자체가 없었기에 청색과 녹색을 구별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것이다. 내가 파랑이라는 색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어떤 이와 < 파랗다 > 와 < 푸르다 > 를 두고 " 썰전 " 을 펼쳤기 때문이다.

그는 " 바다는 푸르다 " 거나 " 하늘은 푸르다 " 라는 표현을 문법 오류라고 지적했다. < 푸르다 > 가 녹색 계열인 풀빛을 중심으로 한 형용사이기에 " 바다는 파랗다 " 와 " 하늘은 파랗다 " 라고 써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하늘과 바다가 먼셀 표색계에서 2.5PB 4/10에 해당되는 색'이라고 ??!!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여, 잠시 모니터에서 눈을 떼어 창문 너머 하늘을 보시라. 그냥 보시지 마시고 뚫어져라 보시라. 파랑인가 ? 내 눈에는 오히려 회색으로 보인다. 실제로 색 어휘를 습득하지 못한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늘을 보고 하늘이 무슨 색이냐고 물으면 아이들은 대부분 색이 없다거나

회색이라고 대답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하늘을 파랗다고 맹신하는 이유는 실제로 하늘이 파랑이기 때문이 아니라 " 하늘이 파랗다 " 는 학습 표현에 세뇌되었기 때문이다. 고흐는 풍경화를 많이 남겼는데 그가 그린 그림 속에는 하늘이 다양한 색으로 그려져 있다. 하늘은 푸르다라는 문장을 틀렸다고 주장한 그 사람은 고흐의 그림을 보면 어떤 대답을 내놓을까 ?



- 수확하는 사람, 반 고흐



바닷물도 마찬가지'다. 서해에서 보는 물색과 남해와 동해에서 보는 물색도 서로 다르다. 물의 깊이와 수생식물의 종류 그리고 수질 상태에 따라서 물색은 제각각이다. 무엇보다도 물색의 기본은 " 색이 없다(투명) " 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런데도 하늘과 바다는 무조건 파랑이라고 해야 정답이라고 가르치는 것은 폭력이고 그 사람 밑에서 국어 교육을 받는 이는 불행한 사람이다. 그런 점에서 시'라는 문학 장르가 중요한 것이다. 만약에 어느 시인이 자신이 쓴 시에서 " 파란 하늘 " 이라거나 " 파란 바다 " 라는 관용어(법)를 사용한다면, 그 시인이 쓴 시는 시시하다는 데 500원을 걸어야 한다.

시인의 첫 번째 덕목은 오래 보는 일이다. 내가 시인이라는 낱말의 동의어'는 화가라고 말하는 이유이다. 하늘이 파랗다, 라고 쓴 시인은 역설적이지만 하늘을 오래 본 사람이 아니다. 관찰 없이 관용(慣用)적 습관만으로 쓴 시는 사이비'다. 윤희상 시인의 시 < 화가 > 는 오랜 관찰 끝에 결국에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되는 경지'를 다룬다. 화가가 그린 것은 수선화이지만 화가가 본 것은 보이지 않는 바람이다.

 


​화가는 바람을 그리기 위해서

바람을 그리지 않고

바람에 뒤척거리는 수선화를 그렸다

바람에는 붓도 닿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어떤 사람들은

그곳에서 바람은 보지 않고

수선화만 보고 갔다

화가가 나서서

탓할 일이 아니었다

                        

                         - 화가,  윤희상

 

 

 

 


사랑의 본질은 " 본다는 행위 " 에 있다.  오래 보아야 예쁘다는 나태주 시인의 시처럼 보고 싶다는 욕망(본다는 행위)이 결국에는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욕망으로 확장될 때 비로소 사랑은 완성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당신이 누군가를 사랑했다면) 한 번쯤은 시인'이었다. 나도 한때 시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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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04 17: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6-04 17: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6-04 18: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6-04 19: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파란여우 2019-06-04 21: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시는 그림과도 같다˝고 한 말이 생각나네요.

곰곰생각하는발 2019-06-04 22:12   좋아요 0 | URL
마그리트 그림 보면 정말 시 같습니다... 그림과 시는 비슷한 구석이 매우 많다는 생각이 듭니다..
 

 

 

 

 

 



 


 

 

 

 






 


  문학판 멘토는 없다








많은 한국 사람들은 사회생활에서 성공하기 위해선 멘토가 필요하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었던 것 같았다 ...(중략).... 어떻게 하면 자기들도 ‘멘토’를 구해서 직장에서 성공할 수 있을까를 묻는 것이었다. 조금은 시시했다.


- 멘토는 없다, 주진형 칼럼 中

 







                                                                                                     안철수는 한때 " 국민 멘토 " 였다. 그는 진보는 물론이요, 보수층도 두루두루 ' 아우 ' 를 만큼 시대의 ' 형님 ' 이자 스승이자 어르신이었다. 그는 초능력자들이 즐겨 입는 망토 입은 멘토'였다.

그가 오락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룸살롱이 뭐예요, 마카롱이에요 ? _ 라고 말했을 때, 우리는 이 순진한 남자의 순정을 믿어 의심치 아니했다. 대구의 모 국회의원이 이 소리를 들었다면 찬란한 밤 문화를 마카롱化시키는 작태에 새빨갛게 발기했을 것이 분명하다. 꼰대에게 있어서 벤츠 몰고 룸빵 가서 여자 끼고 양주 원샷 때리는 것이 그 인간에게는 성공의 기준이었던 것'이다. 자칭 / 타칭,  자신을 " 진보라 " 믿었던 이들은 안철수에게서 컬러풀한 아우라'를 보았다. 진보라보다는 연보라색을 좋아했던 나는 안철수를 멘토라고 숭배하는 대중의 꼴도 우스웠고, 스스로를 멘토라고 생각하는 안철수의 꼬락서니는 더더욱 우스웠다. Oops !!!   

          

 인생은 " 독고다이 " 라고 믿는 나에게 멘토는 공갈빵'이었다. 자기 앞가림도 못하는 것이 인간인데 누가 누구를 가르친다는 것인가 !  성공한 사람 옆에 붙어서 기생하고 싶은 멘티와 그것을 이용해서 나와바리를 확장하고 싶은 멘토가 있을 뿐이다. 내 허락 없이 이 골목 전봇대에 오줌 싸지 마라잉.  안철수는 멘토의 낯짝을 제대로 보여준 인간'이었다. 형광등 3만 개를 켜놓은 듯했던 아우라는 사라진 지 오래. 후광이 사라진 그 자리에는 초등학생 한 명이 초라하게 서 있었다. 내가 안철수입니까, 갑철수입니까. 네에. 아, 아아. 그만 좀 괴롭히십시오. 아이 실망입니다.  

찬란한 어록을 남기고 사라진 그를 볼 때마다 멘토는 꼰대의 순화된 버전이란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한국 문단의 슈퍼스타 김경주 시인이 대필을 시인했다. 김경주 시인이 작성한 < 미디어 아티스트 흑표범의 전시 도록 해설 > 은 알고 보니 차현지 소설가가 대필한 것으로 밝혀졌다. 두 사람은 동덕여대 문예창작과 스승과 제자의 관계'다. 당시 김경주는 문단의 불야성 같은 존재였으니 차현지 작가에게는 반짝반짝 빛나는 멘토였으리라. 김경주는 언론 인터뷰에서“ 2016년 미디어 아티스트 흑표범의 전시 도록에 해설 원고 청탁을 받았으나 마감이 지나도록 쓰지 못하던 차에

후배이자 제자 격인 차현지 소설가가 자기 이름으로 나가지 않아도 좋으니 자신이 써 보겠다고 했고, 합의 하에 차 작가가 원고를 썼다”고 밝혔다.  김 시인은 “ 몇 년 지난 뒤 흑표범 작가에게 말해서 필자 이름을 바꿔 주기로 차 작가와 합의했고, 얼마 전 흑표범 작가에게 메일을 보내 이런 사실을 알렸다”고 말했다. 그랬던 그들 사이에 험한 소리가 오갔던 모양이다. 김경주 시인은 " 차 작가와는 시나리오 메인 작가와 서브 작가, 인터넷 문학방송 피디와 구성작가, 미술전시 공동 프로젝트 등 많은 작업을 같이 했고 개인적으로도 친한 사이였는데, 최근 소원해져서 나에 관해 부정적인 말을 주변에 하고 다닌다고 들었다"

라고 말한 반면에 차현지의 말은 김경주의 말과는 사뭇 다르다. 그는 한국일보와 전화통화에서 “ 김 시인이 먼저 대필 제안을 해왔다 ” 며 “ 당시 저는 작가적 자의식이 없는 신인이었던 데다 글을 쓸 기회가 너무나 한정적이었기 때문에 제안을 받아들였다 " 라고 말했다. 또 “ 대필을 제안하고 수락하는 관계는 결코 수평적인 관계일 수 없다 " 라며 “ 다른 신인 작가들이 나와 같은 경험을 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서 대필 사실을 밝히게 됐다 " 라고 말했다. 누구 말이 옳든 그르든 간에 서로 드잡이하며 싸우는 꼴이 매우 뷰티풀해서 원더풀하다. 

인간이란 궁지에 몰리면 서로 물어뜯는 존재여서 드잡이의 풍경을 역겹게 볼 필요는 없다. 빈정 상하면 드잡이 하는 것이 인간이다. 하여튼....... 멘토와 멘티의 관계란 그런 것이다. 멘토는 없다. 상처에는 마데카솔 연고가 좋다고 하지만 빈정으로 인해 발생한 심리적 상처에는 좋아라마이싱이 최고의 명약이다.  팔팔년도 쌈마이 동네 3류 극장 광고 버전으로 요약하자면 이렇다 : (에코 빵빵 넣은 음향 버전) 오고가는 말풍선에 싹트는 우정. 어느덧 뾰족한 말풍선에 갈라선 빈정. 상처에는 마데카솔 / 빈정에는 좋아라마이싱. 동원극장 사거리 맞은편 광동 약국에서 절찬리에 판매 중 ! 
 




+  덧대기

 

김경주 시인이 차현지 작가'에게 보낸 메일.  메일 속 문장을 보면 그 유명한 굴다리 싱하형 문체가 생각난다.  싱하형 문체란 대략 이런 것이다.  " 형, 조낸 화났다. 지금 당장 굴다리 밑으로 쳐와라. 10초 준다. 8초, 9초 이런 건 소용 없다. 정확히 10초다. 지금부터 지켜보겠다  " 김경주의 문체를 싱하형 문체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형, 조낸 화났다.  마지막 경고다.  글 지우고 한강 굴다리 밑으로 와라.  10초 준다.  9초, 8초 이런 건 소용 없다.  1초 늦을 때마다 내 주먹감자가 네 면상을 강타할 것이다.  그 파급력은 너의 주변인과는 다를 것임을 문학적으루다가 약속할 수 있다. 찌질이 새퀴, 긴장해라. 형을 몰라보는 새퀴는 조낸 죽을 때까지 패버린다. 내 나와바리에 오줌 싼 놈은 용서하지 않는다. 일단 나와라. 한강 굴다리에서 조낸 맞고 시작하자. ① 일 말의 용서도 없다. ② 두 말 하면 입 아프니까. ③ 세 말 하지 않으련다. ④ 네 말 명심해라.  자비는 없다. 형, 조낸 화났다. 쳐와라. 기한은 그때까지 딱 10초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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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드로사랑해 2019-05-30 15: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최근 소원해져서 나에 관해 부정적인 말을 주변에 하고 다닌다고 들었다˝고.
지가 잘못해놓고 자기 뒷담화하고 다닌다고 징징대는 것도 꼴볼견이에요.

곰곰생각하는발 2019-05-30 16:37   좋아요 0 | URL
저도 그 부분이 참...... 품격을 훼손하는구나..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글구 보면 문인들은 말을 참 우아하게 하세요.
그냥 뒤따마‘라고 하면 될 것을 나에 관해 부정적인 말‘로 표현하시는 것을 보면 말이죠.

잠자냥 2019-05-30 16: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김경주가 차현지에게 보낸 (협박) 메일 보면 문장도... 참.......
시는 대체 어떻게 썼을지 궁금해지더군요.

곰곰생각하는발 2019-05-30 16:36   좋아요 0 | URL
협박 메일도 있나요 ? 아. 찾아보니 뭐, 법적 대응 운운했었나 보죠 ? 허어..

잠자냥 2019-05-30 16:57   좋아요 0 | URL
넵 문제의 메일은 이 기사 끄트머리에서 볼 수 있습니다.

http://www.news-paper.co.kr/news/articleView.html?idxno=49034

곰곰생각하는발 2019-05-30 17:07   좋아요 0 | URL
오, 방금 읽었습니다. 이야... 이거이거이거참............ 경주 씨, 이런 메일 보낼 때는 문장이 너무 아름답네요...ㅎㅎㅎㅎ

수다맨 2019-06-01 11: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 집에는 시집들이 거의 없는데 마침 김경주의 첫 시집인 ˝나는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2쇄본이 있더군요. 바로 버렸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9-06-04 16:45   좋아요 0 | URL
저는 시에 대한 이해도가 없어서
김경주가 왜 이름값을 하는지 잘 이해는 안 가더군요.

수다맨 2019-06-05 13:29   좋아요 1 | URL
김경주가 이름값을 얻게 된 배경에는 (본인의 역량도 있겠지만) 시인이자 평론가였던 권혁웅의 전폭적인 지지도 한몫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권혁웅은 2000년경에 문단의 주류적 경향이었던 서정시들을 크게 비판하면서 이에 대한 대안으로 황병승, 김경주의 시들을 내세웠지요. 뭐 단지 이러한 이유 때문에에 김경주가 이만큼 뜬 것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당대의 신진 비평가들(권혁웅, 신형철 등등)이 김경주에게 보냈던 기대와 지지와 후원이 컸다는 것만큼은 기억납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9-06-05 13:40   좋아요 0 | URL
생각나네요. 권혁웅이 주도해서 이들을 이끈 측면이 큰데..
전 개인적으로 권혁웅을 매우 싫어합니다.
 


 

 

 

 

 

 

 

 

 

 

 

 

 

                                      

 

병  아  리  와    옥  수  수  :

 

 

 

 

 



대한민국 치킨뎐

















영화 << 집으로 >> 에서 시골 외딴집에 사는 외할머니는 도시에서 온 손자가 밥을 안 먹는 바람에 속앓이를 한다. 할머니가 손자에게 먹고 싶은 게 뭐냐고 묻자 손자는 손짓, 몸짓, 말짓을 모두 동원하여 켄터키가 고향인 닭에 대해 말한다.

이마 위에 한손을 올리고는 닭벼슬 흉내도 내고 양손을 겨드랑이에 바짝 붙인 후 파닥파닥 날갯짓도 흉내를 낸다. 할머니, 꼬꼬댁. 파닥파닥, 알지 ?          그날 할머니가 손자 앞에 내놓은 것은 " 물에 빠진 닭 " 이었다. 노란 치킨을 원했던 손자는 하얀 백숙을 보자 밥상을 뒤엎는다. 짭쪼름한 천하장사 소세지를 달라고 했더니 닝닝하고 쓴 맛이 강한 도라지를 내놓은 꼴이다. 손자는 " 도라지처럼 토라져 " 입이 댓 발 나온다. 손자 입장에서 보면 닭과 치킨'은 둘리처럼 요리 보고 조리 봐도 전혀 다른 음식'인 것이다. 저개발의 시대를 관통했던 할머니에게 닭 요리는 곧 백숙을 의미했다.

그 시대에는 거의 모든 고기를 물에 익혀 먹었던 시대였다. 가족 구성이 대가족 형태이다 보니 귀한 고기'로 많은 사람이 고기 맛을 맛보기 위해서는 국물로 요리를 내는 수밖에 없었다. 60년대와 그 이전이 " 물에빠진 백숙 " 의 전성시대였다면, 70년대는 " 전기구이 통닭 " 의 전성시대'였다. 옷을 입히지 않고 홀딱 벗기기는 했으나 끓는 물에 익혀 먹는 방식이 아니라 구워 먹는 전기구이 방식의 통닭은 백숙에서 치킨으로 진화하는 과정에서 중간 단계를 차지한다(당시에는 고기의 기름 맛'을 매우 귀하게 여긴 시대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구워서 기름을 빼는 요리법은 사치에 가까웠다). 그것은 백숙도 아니고 튀김도 아닌,  마치 물속에서 사는 어류와 땅위에서 사는 파충류의 중간 단계인 양서류와 같은 포지션이었다.

" 통닭 " 이 " 치킨 " 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한 시점은  식용유가 업소용으로 값싼 가격에 대량 유통되는 시기와 맞물린다.  이때부터 옥수수 전분으로 만든 튀김옷과 옥수수 기름이 만나 후라이드(fride)한 닭고기 튀김'이 탄생한다.  와우, 판타스틱 치킨 베이베, 오예 ~                         치킨을 한 번도 안 먹은 사람은 있어도 딱 한 입만 먹어본 사람은 없다는, 전설의 치느님이 탄생하게 되는 원년'이었다. 이때부터 한국인은 혓바닥이 남성의 귀두요, 여성의 클리토리스라는 사실에 경악하게 된다. 식욕이 성욕이었던 것이다. 뜯으면서 느끼는 것이다. 오, 예 ~ 우, 판타스틱 베이비 ~

재미있는 사실은 치킨용 닭은 옥수수 사료를 먹고 자란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옥수수 사료를 먹고 자란 닭에게 옥수수 전분으로 만든 튀김옷을 입혀서 옥수수 기름으로 튀김 요리를 내놓은 것이 바로 치킨이라는 점이다. 지금 당신이 혀끝에서 느끼는 오르가슴은 옥수수 맛이다. 그 인기가 영원불멸하여 결코 시들지 않을 것 같았던 프라이드 치킨도 90년대 들어서면서 양념 치킨에게 그 영광을 양보한다. 양념은 주재료가 고추장, 물엿, 간장인데 그중에서도 핵심은 물엿'이다. 치킨 양념에서 물엿이 차지하는 비율은 팔 할'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될 지점은 옥수수 전분으로 만든 물엿이다.

설탕이 사탕수수로 만든 당이라면 물엿은 옥수수로 만든 액상과당이다.  액상과당이 설탕보다 나쁘다는 사실은 이미 밝혀진 사실이다. 옥수수 거의 대부분이 GMO(유전자조작농산물) 식품이라는 점에서 물엿으로 맛을 내는 것보다는 차라리 설탕으로 맛을 내는 것이 그나마 낫지만 액상과당(포도당과 과당의 액상 혼합물)이 설탕에 비해 값은 싸고 단맛은 강해 상업적으로 거래되는 거의 모든 음식이 액상과당으로 단맛을 유도한다는 점에서 심각하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 ① 유전자 조작 농산물인 옥수수 사료를 먹고 자란 닭을 ② 유전자 조작 농산물인 옥수수 전분으로 만든 튀김옷을 입혀서

③  유전자 조작 농산물인 옥수수 기름에 튀기고 나서  ④ 유전자 조작 농산물인 옥수수 전분으로 만든 물엿을 다시 입힌 것이 바로 ⑤ 대한민국 양념 치킨'인 것이다. 그렇다면 양념치킨이야말로 유전자 조작 농산물로 생산한 정크푸트의 끝판 대마왕이 아닐까 ?  지금 당신이 찬양하는 치느님은 닭의 외피를 두른 GMO 옥수수'다. 그런 점에서 양념치킨은 박근혜의 반대말이다. 박근혜는 인간의 외피를 두른 닭이었으니깐 말이다. 오, 판타스틱 어덜트 베이비. 내가 대한민국 치킨사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한 이유는 닭 요리법의 변화 과정을 살펴보면 비만의 원인을 찾을 수 있다는 점이다.

해방 이후,  한국인 체형이 미학적으로 가장 훌륭했을 때'는 1970년대이다. 1970년대는 비만 인구를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적었으며 대부분은 날씬한 체형을 유지했다.  암 유병률도 매우 낮았다. 그리고 비만과 당뇨는 " 부자병 " 이라 해서 일부 특권층의 사치병이라 불렸을 정도'다. 전기구이 통닭 시대가 한국인에게 가장 뛰어난 식단을 제공한 셈이다. (전기구이)통닭과 백숙 요리법의 핵심은 주재료 본연의 맛에 집중할 수 있도록 요리를 한다는 점이다. 반면, 체형에 변화의 조짐이 일기 시작한 80년대에는 탄수화물을 지방(기름)으로 튀기는 요리법이 인기를 끌었다.

탄수화물 + 지방이 만나는 순간, 한국인의 체형은 서서히 살이 붙기 시작했다. 여기에 기름을 쏟아부은 요리법이 바로 단짠 양념의 과다 사용'이다. 90년대 이후, 비만과 당뇨가 치솟기 시작한 것은 원인 중 하나가 과도한 단짠 양념에 있다는 사실은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닭 요리법의 진화는 결국 소울푸드였던 것이 정크 푸드로 변하는 과정과 일치한 셈이다. 그런 점에서 퇴행'이다. 그렇기에 양념 치킨(고탄고지+ 액상과당 과다)보다는 후라이드 치킨(고탄고지), 후라이드 치킨보다는 튀김옷을 입히지 않은 전기구이 통닭(고단), 전기구이 통닭보다는 백숙'을 먹는 것이 건강에 좋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맛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이다. 소비 사회에서 적게 먹는다는 것은 매우 큰 미덕이며 똥을 너무 많이 싸는 것은 꽤나 은밀한 악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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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숙의 << 배에 실린 것을 강은 알지 못한다 >> 에 부쳐  :




 



 ​언니가 돌아왔다​


                                                                                                     언니가 돌아왔다, 4년 만이다.  미시마 유키오의 << 우국 >> 을 표절한 << 무국 >> 으로 문단을 초고추장化시킨 신경숙이 돌아온 것이다. 시~ 원한 소고기 무국, 한 뚝배기 하실래예 ? 

신경숙은 출판사 창비를 통해 중편 << 배에 실린 것을 강은 알지 못한다 >> 를 발표하며 " 젊은 날 한순간의 방심으로 제 글쓰기에 중대한 실수가 발생했고 그러한 일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망각한 채 오랜 시간이 흘렀다 ...(중략)... 작가로서의 알량한 자부심이 그걸 인정하는 것을 더디게 만들었다"고 사과했다. 또한 그는 "읽고 쓰는 인간으로 살며 제 누추해진 책상을 지킬 것 " 이라며 " 쓰는 것밖에 할 수 없는 사람이니 차근차근 글을 쓰고 또 써서 과분한 기대와 관심, 많은 실망과 염려에 대한 빚을 조금씩 갚아나가겠다 " 고 작품 활동 재개를 알렸다. 소설의 모티브는 작년 10월에 병환으로 사망한 허수경 시인'이 모델로 보인다.

소설 속 여성 주인공 < 나 > 는 타국에서 사망한 친구를 추억하며 독일로 떠나는 과정을 담은 내용이라고 한다. 문득, 궁금한 것 두 가지.  왜 하필 허수경 추모작인가, 왜 하필 소설 속 주인공은 소설가인가 ?  신경숙은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렸지만 이 작품은 소설을 빙자한 입장문'이다. 그러니까 장황하게 나열한 중편 분량의 입장문인 셈이다. 허수경 시인을 모델로 했다는 것은 문단에 애도를 표현함으로써 문단과의 화해를 도모한 것처럼 보인다. 눈에 띄는 것은 표절을 애써 " 글쓰기에 중대한 실수 " 라고 표현한 대목'이다. 실수라는 것은 고의는 없었으나 본의 아니게 표절이 되어 문단에 폐를 끼쳤다는 소리이다.

어디서 많이 본 애티튜드'이다. 어디서...... 봤더라 ?!   그렇다,  죄를 저지른 사람이 변명이랍시고 술에 취해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심신 미약을 주장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다시 말해서 신경숙은 예나 지금이나 하나 마나 한 심신 미약을 주장하고 있으나, 이를 어쩌나.....     지금까지 이런 사과는 없었다. 이것은 사과인가, 배인가, 바나나인가 ?  문학을 자신의 변명을 합리화하기 위한 소통 창구로 활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신경숙은 꽤나 정치적이다. 신경숙 문학이 이명박근혜 정권 때 화룡점정과 화양연화를 동시에 꽃 피우며 한국문학 원톱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이 작품을 읽어보진 않았으나 대충 짐작하자면 : 애들아, 나 그동안 마음고생 졸라 심했어, 엉엉. 뭐, 이런 것이 아닐까 ? 징징거린다고 독자가 당신에게 연민을 느낄 것이란 생각은 잘못된 판단이다. 이 작품에 대한 남진우의 날카로운 비평이 기대된다.  당신의 소설 제목을 빗대어 조롱하자면 " 창비에 실린 것을 독자는 알지 못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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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맨 2019-05-24 16: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당연히도 영영 절필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런 식으로 복귀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그것도 표절, 베껴쓰기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방심, 실수, 망각과 같은 단어로 눙치려고 하는 것을 보니 진심과 반성을 담아서 사과문을 썼는지 의심이 드네요. 게다가 복귀의 장이 다른 데도 아니라, 신경숙의 강력한 옹호자이자 창비의 최고 어른인 백낙청의 잡지이니 탄식이 나올 뿐입니다.
설령 백낙청의 뜻(신경숙의 전격 복귀)이 그러했다 해도 잡지의 실무와 방향성을 담당하는 편집위원들이 이를 마땅히 제고했어야 한다고 봅니다. 말로는 매번 노동과 민중과 혁명과 투쟁을 말하면서 어째서 이들은 자신들이 가장 비판하는 수구/적폐세력들의 행태를 그대로 답습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9-05-24 17:44   좋아요 0 | URL
저는 신경숙의 변을 읽고 나서 번개처럼 떠오른 이가 신형철이었씁니다. 신경숙 표절 논란ㅇ에 대한 신형철의 입장문에는 ˝ 표절 ˝ 이라는 단어가 단 한 개도 나오지 않습니다. 에둘러서 표현한 것들이 대부분이죠. 신경숙도 마찬가지. 방심, 실수, 망각 따위의 표현으로 표절을 달리 표현하지 않습니까. 계산적인 거죠...


포스트잇 2019-05-24 17: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한당 보는 듯했습니다요...

곰곰생각하는발 2019-05-24 17:46   좋아요 0 | URL
굉장히 정치적이지 않나요 ? 전 신경숙이란 작가야말로 굉장히 정치적 인간이란 생각이 듭니다. 정치하시면 잘 하실 듯... 뭐, 소설에서는 난 정치란 관심없어. 흥흥흥... 이런 멘트 많이 날리시지만 누가 봐도 정치적임..

깊이에의강요 2019-05-25 12: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을 냈군요~ㅎ
예전 곰발님 포스트 중
신경숙과 공지영에 관한 글이
있었던 것 같은데..?
몹시 동의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9-05-25 14:39   좋아요 0 | URL
적당히 동의해줘도 좋은데
몹시 동의를 해주시니 고맙습니다 ^^
 



돈, 2019

 



                                                                                                        드라마에서 중요한 것은 " 갈등(葛藤 ㅣ 칡 갈, 등나무 등) " 이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서로 상반되는 괴리'가 발생할 때 내면 갈등이 발생하고 개인 대 조직이 갈등할 때에는 내부 갈등이 발생한다. 

주인공과 갈등하는 대상이 누구인가에 따라서 고부 갈등,  노사 갈등,  계급 갈등,  세대 갈등,  남녀 갈등'을 일으킨다.  그리고 갈등의 종류가 무엇인가에 따라 드라마의 성격도 어느 정도 결정된다.   관객은 주인공이 이 갈등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에 흥미를 느낀다.  그러니까 장르 불문하고 칡과 등(나무)이 제대로 얽혀야 좋은 희극과 비극이 탄생한다.  이것은 극작법의 ABC.  그런데 드라마에 갈등 요소가 없으면 죽도 밥도 아닌 MBC가 된다는 것은 뻔한 사실이란 말이시.   영화 << 돈, 2019 >>  에는 " 갈등 " 이라는 핵심 요소가 빠져 있다.  이 영화는 갈등은 없고 해소'만 거창하다.

번호표(유지태 분)의 범죄 제안에 증권사 신입 주식 브로커 조일현(류준열 분)은 고민도 없고 갈등도 없이 두꺼비가 파리를 잡아채듯이 악마의 유혹을 덥석 문다. 그런데 조일현의 " 망설임 없는 조력 " 은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 그가 처음부터 "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물불 안 가리는 비호감 캐릭터 " 였다면 충분히 이해가 가는 대목이지만 조일현이라는 캐릭터의 초기 설정은 돈도 없고 빽도 없는 착한 소시민 캐릭터'라는 데 있다. 그에게는 불법을 저지르면서까지 죄를 지어야 하는 " 간절한 결핍 " 이 부재하고,  또 마찬가지로 불법을 저지르면서까지 돈을 벌어야 하는 " 간절한 야망 " 도 보이지 않는다.

간절한 욕망의 파이(π) 가 작다 보니 갈등이 선명하지 못하고,  갈등이 선명하지 않으니 전결(기/승/전/결'에서) 부분에서는 설득력을 잃는다.  지하철역에서 돈 뿌리는 장면은 관객에게 카타르시스를 해소한다기보다는 헛웃음만 나오게 한다. 그리고 조일현이 번호표에게 느닷없이 던지는 훈계의 말'은 설득력 제로'이다. 평범한 소시민이 과시적 소비와 만나게 되었을 때의 판타지에 집중했으면서 갑자기 계롱산 산신령처럼 뒷짐 지고 훈계질'이라니......         강렬한 오르가슴을 얻기 위해서는 공을 들인 전희가 필요한데 이 영화에는 애국가 타임라인 섹스를 선보이고는 황홀하지 ?

라고 되묻는 교회 오빠의 성스러운 근자감을 떠올리게 만든다. 충고 한 마디 하자면 : 섹스, 그렇게 하는 거 아닙니다. 예 ?                 영화는 생각 없이 보기에는 그럭저럭 재미있다. 하지만 조금만이라도 생각을 하고 본다면 그럭저럭 우럭하다.









이 영화에서 소비되는 여성 이미지는 남성이 욕망을 성취한 후 얻을 수 있는 성과물이다. 배우 원진아가 연기한 박시은 대리'는 하루종일 섹시하다. 이마에 나 섹시함 ? 어때요. 졸라 섹시함 ??!  이란 표 딱지를 붙이고 있다. 남성의 원기 회복용 캐릭터는 몸은 섹시한데 교양은 난시'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영화는 이 여자의 육감을 집요하게 부각한다. 여성 감독이 여성'을 소비하는 방식에 박수를 보낸다. 한심하다, 졸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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