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학을 떼는가 ?




 

                                                                                                       혼자 밤길을 걷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낯선 사람과 단둘이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골목길을 걷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학생일 때에는 " 방과 후 옥상  " 이 위험 지대'였다면, 지금은 " 골목길 접어들 때 " 가 위험하다.

이 골목에 미친놈 한 명 정도는 살고 있으니 말이다.  내가 상대방보다 앞서서 걷는 경우에는 뒤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귀를 쫑긋 세우기 마련이다. 아무래도 앞서서 걷는 것보다는 뒤서서 걷는 것이 마음 편하다. 하물며 여성들은 오죽하랴. 이 경우에 내가 앞서서 걷는다면 크게 문제가 될 것은 없지만 내가 여성의 뒤를 따르면 긴장감이 발생한다. 샛길이라도 있으면 불편을 감수하더라도 에둘러 가겠지만 외길이면 그럴 수도 없다. 그렇다고 상대방을 앞질러 가겠다고 걸음을 재촉하다가는 이상한 상황극이 연출될 수도 있다. 이럴 때, 나는 혼자 쏘가리(속앓이) 하다가 나중에는 가오리가 된다. 옛 문어체로 말하련다. 주여, 이 길을 어찌 가오리 ~ 

내가 이 상황에서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은 (샛길로 빠질 수 없는 외길이면) 걸음을 멈추고 딴청을 피우는 것이다. 앞서가는 사람에게 안전거리를 확보해 주려는 속셈이다. 이때의 상황극을 심리학적으로 요약하자면 : 남자는 불편하고 여자는 불안하다. 이 줄거리에서 남성과 여성이라는 단어를 삭제하고 단순하게 불편과 불안만 놓고 보자면 우선순위로 먼저 해결(해소) 되어야 할 상황은 불편이 아니라 불안'이다. 타인의 불안(두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내가 불편을 감수하는 것은 일종의 예의'이다. 그런데 한국 남자들은 여성의 편리 때문에 자신이 불편을 겪는다고 아우성이다.

문제는 그 불편(不便)을 불평(등)不平等의 결과라고 착각한다는 데 있다. 하지만 그것은  불편 / 不便과 불평 / 不平을 혼동한 결과이다. 이솝우화 << 여우와 학의 식사 초대 >> 1)는 불편과 불평의 차이를 정확하게 보여준다. 이 우화에서 " 평평한 접시 " 는 여우에게는 편리한 그릇이지만 학에게는 불편한 그릇이다. 그렇다고 해서 평평한 접시가 불평등(차별)의 결과는 아니다. 여우는 생각이 짧았을 뿐이다. 모지란 놈 ~   하지만 학이 내놓은 호리병은 차별 대우의 결과이다. 왜냐하면 학은 여우가 호리병 속 음식을 먹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복수심에 고의로 음식을 호리병에 담아 주었기 때문이다.

학은 (경험을 통해서) 서로의 차이를 간파했지만 애써 그 차이를 복수의 도구로 활용했다는 점에서 여우를 차별(불평)한 꼴이 된다. 여우는 생각이 짧은 친구이지만 학은 간사한 녀석이다. 나쁜 새끼.  그래서 " 학을 뗀다 " 라는 속담이 탄생한 것이다.  뭐, 믿거나 말거나 !   최근에 발생한 < 대림동 경찰관 폭행 사건 > 이 여성 경찰관 혐오로 확장되는 현상을 보고 있자니 저절로 학을 떼게 된다.  남자인 내가 남자인 당신에게 묻고 싶다. 네 불알이 그렇게 소중하니 ?











​                                           
  
1)  여우와 학의 식사 초대       :      어느 날 여우가 이웃에 사는 학을 저녁식사에 초대하였습니다. 여우는 맛있는 음식을 평평한 접시에 담아왔습니다. 여우는 맛있게 음식을 먹었지만 학은 부리가 길고 뾰족하기 때문에 도저히 음식을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며칠 후 이번에는 학이 여우를 초대하였습니다. 학은 목이 긴 병에 음식을 내놓았습니다. 학은 맛있게 음식을 먹었지만 여우는 음식을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려는 기대에 비워놓은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습니다. 학은 여우에게 말했습니다. 친구야, 지난번에 네가 나에게 맛있는 저녁식사를 대접했을 때 제대로 고마움을 표시하지 못해서 오늘 그 보답을 하는 거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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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손



 


                                                                                                  입이 없으면 손으로 말한다. 수화(手話)는 입(口話) 대신 손으로 말하는 소리 없는 아우성. 그러니까 손은 입이라는 사물의 본성에 가장 가까운 물성.

사전적 의미로 보자면 < 손 = 입 > 이라는 공식이 성립할 수는 없겠지만,  만약에 당신이 문학적 관용과 낭만적 포용을 허용한다면 < 손 ≒ 입 > 이라는 공식을 만들 수는 있다.  < 손짓 > 은 손으로 만든 문장이라는 점에서 손이야말로 문인이 가장 사랑하는 신체 부위'란 생각이 든다.  소리는 삼키고 의미는 드러난다(기표는 사라지고 기의는 전달된다). 그래서 손이라는 사물의 본성이 투사된 단어-들은 내향성을 띤다는 점에서 내성적(內省ㅡ)이다. 또한 내성(內聲ㅡ)이다. 예를 들면 손편지나 손수건은 접고 접어서 부피를 줄이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내향성'을 띠고, 손수레는 수레에 비해 수동성(手動性)을 강조한다.

최승자의 시 << 사랑하는 손 >> 은 당신을 사랑한다는 고백을 말 없이 진행한다는 점에서 수화의 풍경'이다.

 


 

거기서 알 수 없는 비가 내리지

내려서 적셔주는 가여운 안식

사랑한다고 너의 손을 잡을 때

열 손가락에 걸리는 존재의 쓸쓸함

거기서 알 수 없는 비가 내리지

내려서 적셔주는 가여운 평화

           - 사랑하는 손, 최승자




이 시는 침묵의 힘'이다. 사랑하는 이의 손을 잡는다는 행위는 풀리지 않게 띠의 매듭을 묶는 행위와 같다. < 매듭 > 이 이음매 없이 매끄러운 것이 서로 엮여서 흉터처럼 부풀어오른다는 점(열 손가락에 걸리는 )에서 " 너의 손을 잡 " 는 것은 상흔이자 통증이다. 그것은 예견된 불행을 감지하는 불안한 증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사랑하는 손을 잡는다. 거기에는 가벼운 불행과 가여운 안식과 오르지 못하고 하강하는, 손바닥에 가라앉은 평화가 공존하는 세계이다. 시에서 < 비 / 雨 > 는 제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하늘에서 추락하는 이미지'를 내포한다. 손은 그것을 오롯이 받아내는 장소 topos 이다.

시에서의 하강은 릴케의 << 두이노의 비가 >> 을 연상케 한다. 시인은 이 불행한 하강을 강조하기 위해서 " 내리지... / 내려서... / 내리지... / 내려서... " 라는 시어'를 반복한다.  이 시에서 " 사랑 " 은 솜사탕처럼 달뜬 무중력의 풋풋한 사랑이 아니라  중력의 자장 안으로 포섭된 세계이다.  김영민의 사유를 빌리자면 < 사랑하는 손 > 에서 사랑이라는“ 연정은 지형(topos)이 무너진다는 뜻이다. ‘무너진다’는 것은, 마치 중력 하나가 모든 존재를 지배하는 어느 순간의 경험처럼, 모든 이치들이 열정의 무중력 공간 속에서 속절없이 해체ㅡ(사랑 그 환상의 물매, 김영민). ” 되어 재처럼 가라앉은 세계이다.

글자가 없던 시대에는 새끼줄을 매듭 지어 문자 대신 사용했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손을 잡는 행위는 가장 원시적인 사랑 고백이자 문장인 셈이다. 최승자 시인의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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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맨 2019-05-22 08: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여성 시인들과는 궁합이 잘 맞지 않는 편인데 최승자 시인 만큼은 호감이 가더군요......

곰곰생각하는발 2019-05-23 17:36   좋아요 0 | URL
최승자 초기 중기 시는 참 좋죠.... 짜릿할 만큼..
 

 

 

 

 

 

 

 

 

 

 

 

 

 

 

                                        


유  주  얼    서  스  펙  트    :










고릴라는 생각하지 마



                                                                                                     반전이 훌륭한 영화는 자칭 / 타칭 자신을 홈즈의 후예'라 믿었던 관객의 뒤통수를 친다. 별 볼 일 없는 대낮에도 별 볼 일 있게 만드는 것이 바로 반전 영화의 묘미이다. 영화 << 유주얼 서스펙트 >> 는 << 식스 센스 >> 와 함께 이 방면에서는 전설로 통하는 반전 영화'이다.

악당들이 모여서 한탕 할 계획을 꾸민다. 무려, 9100만 달러 탈취 모의'이다. 하지만 계획이 계획대로 진행되면 재미가 없는 법. 일이 꼬일 대로 꼬인다. 공황 상태에 빠져 앞으로의 일을 걱정하는 그들 앞에 코바야시(피트 포스틀스웨이트 분)라는 자가 나타나 5인의 일당에게 새로운 일을 시킨다. 버벌 일당이 반발하자 코바야시는 자신의 보스가 전설과도 같은 무시무시한 지하 범죄 조직의 두목 카이저 소제(Keyser Söze)이고, 또 버벌 일당이 예전에 저질렀던 죄들이 모두 카이저 소제에게 피해를 줬다며 카이저 소제를 위해 일할 의무가 있다고 협박한다. 카이저 소제 ?!  화장실 변기 광택제임 ?                

코바야시의 입에서 카이저 소제'라는 이름이 발화되는 순간, 우리 모두는 카이저 소제'에게 집중한다. 카이저 소제, 카이저 소제, 카이저 소제, 카이저 소제......  카이저 소제는 생각하지 마 !                               자칭 / 타칭 자신을 홈즈의 후예'라고 믿었던 나는 감독이 놓은 카이저 소제라는 이름의 덫에 빠지면 안된다고 생각했으나 그럴수록 점점 빠져들게 되었다. 상상할수록 점점 커지는 음란 마귀처럼 말이다. 결국 관객은 함정에 빠지고 만다. 박근혜의 그 유명한 어록을 빌려 리바이벌하자면 : 나도 속고, 관객도 속고, 수사관도 속고, 국민도 속았습니다. 지금 대전은요 ?!

화장실 변기 광택제 이름 같은 카이저 소제는 일종의 코끼리(조이 레이코프 <<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 ) 이자 고릴라( 크리스토퍼 차브리스 << 보이지 않는 고릴라 >> ) 를 섞어 놓은 캐릭터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주제는 고릴라는 생각하지 마 _ 이다.  보이지 않는 고릴라 실험은 심리학 역사상 가장 유명하고 독창적이며 흥미로운 실험으로 통한다.  실험 과제는 검은 옷을 입은 3명, 흰 옷를 입은 3명, 도합 여섯 명이 각각 팀을 이뤄 농구공을 패스하는 1분짜리 동영상을 보고 나서 흰 옷을 입은 팀의 패스 횟수만 세면 된다. 주의력이 필요하지만 그리 어려운 과제는 아니다.

패스 횟수는 총 16회 ! 그런데 실험을 주최한 교수는 엉뚱한 질문을 던진다. " 혹시 고릴라 보셨나요 ? " 실험 참가자 일동. 네에, 고릴라요 ????!!!!




동영상을 다시 보면 고릴라 한 마리가 농구장 중앙에서 가슴을 치며 춤을 추다가 사라진다. 못 볼래야 못 볼 수 없는 장면인데 실험에 참가한 사람 중에 절반은 고릴라를 전혀 보지 못했다. 이것이 바로 " 주의력 착각 " 이다. 집중이 맹시를 낳는 것이다. 이 실험의 교훈은 명확하다. 인간은 보고 싶은 것만 본다. 영화 << 유주얼 서스펙트 >> 는 카이저 소제라는 이름의 고릴라가 등장한다. 영화가 끝나갈 무렵, 수사관 동료 제프 라빈(댄 헤다야 분)이 커피를 들고 사무실로 돌아오자 용의자를 심문했던 수사관 쿠얀(채즈 팰민터리)이 "사무실 참 엉망이네. 정리 좀 하지?"  라며 농담을 한다.

그러자 라빈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지금 보면 그렇겠지. 하지만 멀리 떨어져서 보라고......"  얼큰한 순댓국 먹고 나서 식당 계산대에서 박하 사탕 씹을 때의 그 알싸함. 비로소 눈에 들어오는 사무실 풍경들. 쿠얀 형사는 나, 좆된 거임 ?! 이런 표정으로 카메라 정면을 응시한다. 이 메시지는 그대로 관객에게 전이된다. 나도 그와 똑같은 생각과 표정으로 영화를 보았다. 하, 나도 좆된 거임 ?!                        보이지 않는 고릴라 실험에서 농구공이라는 몰입 요소가 고릴라를 볼 수 없게 만들었듯이, 영화에서는 카이저 소제라는 몰입 요소가 진짜 범인을 놓치게 만들었던 것이다.

​자유한국당은 청와대 자유한국당 해산 청원 동의에 200만 명에 육박했다는 사실'을 부정한다. 심지어 북괴 소행이라거나 여론 조작이라고 믿는 눈치이다. 설마, 백년 정당 역사상 언제나 1등이었던 우리를 국민들이 그토록 미워하겠어 ?                          인간은 보고 싶은 것만 본다. 마찬가지로 듣고 싶은 말만 귀에 들어온다. 자유한국당에 대한 국민의 원성이 자자하나 그들이 듣는 목소리는 태극기 집회에서의 환호성이다.  이 환호성에 몰두하다 보면 망하게 되는 것이다. 차브리스 교수의 말에 의하면 " 사람들은 자신의 능력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 고 한다.  그것이 바로 심리학 용어로 < 자신감 착각 > 이다. 즉, 자신감이라는 이름의 고릴라'이다.

그런데 실력이 없는 인간일수록 자신을 향한 과대평가가 더 강해지는 경향이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자유한국당의 꼴이 영락없이 그 꼴이다. 충고 한 마디 하자면 : 그러다가 언젠가 좆될 거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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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맨 2019-05-17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때는 이명박 밑에서 수하 노릇을 하던 정두언이 말하기를 장외집회라는 것이 (여야를 막론하고) 상당한 중독성을 지니고 있다고 하더군요. 국회나 청문회에 오면 입 아프고 골 아픈 일들이 숱하지만, 저런 종류의 집회에선 당 고위 간부들이 별다른 제스처를 취하지 않아도 다수의 참가자들이 열성적인 호응을 보내주니 ‘그 기분‘에 도취한다고 합니다.
문제는 이런 류의 집회가 정치인에게는 ‘어느 정도는 필요한 자극제‘인 동시에 ‘유해성이 상당한 환각제‘라는 것을 알아야 할 터인데, 현재 자한당은 환각제로서의 효과에만 탐닉하는 것 같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9-05-17 14:41   좋아요 0 | URL
한번 졸개는 영원한 졸개죠. 기껏 용트림해봐야 물개 정도 ?
 

 

 


 

 

 

 


독재와 달창


 

 

 

 

 

 

 

 

                                                                                          누군가가 당신에게 뜬금없이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라고 명령하는 순간, 우리는 질문자의 당부와는 상관없이 코끼리만 생각하게 된다. 웬, 코끼리 ?!  이 작은 의문은 점점 커지게 된다. 그리고 머릿속은 알이 꽉 찬 4월 주꾸미 머리통처럼 온통 코끼리란 단어로 뽀글뽀글 차오르게 된다. 코끼리, 코끼리, 코끼리, 코끼리..... 결국 우리는 질문자의 계략에 말려들어 코 끼(꿰)게 되리. 나, 코 꿴 거임, 그런 거임 ?!              

 

이러한 심리 동조 현상을 발견한 것은 조이 레이코프 박사로 그는 이것을 " 프레임 이론 " 으로 명명했다. 쉽게 말하자면 " 떡밥 던지고 나 몰라라 하기 놀이 " 라 할 수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안철수의 " 제가 안철수입니까, 갑철수입니까 ? " 발언이었다. 그는 자신은 갑철수가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한 말이지만 역으로 안철수는 대중에게 갑철수라는 캐릭터로 고착되는 계기가 되었다. 안철수는 대통령 후보 토론회에 나와서 갑철수라 부르지 마 _ 라고 명령하는 순간에 대중은 머릿속에 온통 갑철수란 단어로 꽉 차게 된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갑철수, 이제 미역국 잡셨수 ~                    

 

현재, 논란이 진행 중인 송현정 기자의 독재자 질문도 일종의 거대한 코끼리'인 셈이다. 안철수가 자신은 갑철수가 아니라고 아무리 부정해도 결국에는 갑철수가 되었듯이,  문재인 대통령 또한 그 질문에 대해서 강한 어조로 부정한다 한들 시청자 뇌리에 박히게 되는 것은 바로 독재자라는 거대한 코끼리 형상'이다. 그렇기에 KBS 대통령 대담회는 악의적일 수밖에 없다. 현재 대한민국은 2019년 언론 자유 지수가 아시아 국가 중에서 1위이다. 기자가 대통령에게 당신은 독재자입니까 _ 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었던 것도 언론의 자유가 보장된 환경 때문에 가능한 설정인 것이다. 그렇기에 기자가 대통령에게 당신은 독재자입니까 _ 라고 물을 수 있는 여건이 형성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문재인은 독재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 질문은 파나 마나 한 파나마 모자처럼 하나 마나 한 질문이 되는 것이다. 질문은 많고 시간은 적어서 대통령의 답변을 67번이나 가로채기했던 기자는 왜 이런 쓸모없는 질문에는 집요하게 파고들었을까 ?  저잣거리에서 몇몇이 핸드마이크 들고 떠들었던 " 문재인은 독재자 " 라는 선동이 대중적 여론이라고 믿었다면 기자는 200만 명에 육박하는 " 자한당 해산 청원 " 에 대한 대통령의 견해도 물었어야 옳다. 그렇지 않은가 ? 독재자 파문은 나비 효과가 되어서 입만 열었다 하면 시궁창 냄새가 났던 나경원이 국민을 상대로 달창(달빛창녀단)이라는 일베 용어를 내뱉게 되는 계기를 선물한 셈이다.

 

언론 자유 지수가 1위라 하여 기자의 수준이 높은 것은 아니다. 기자 단톡방 사건은 기자 수준이 아시아 국가에서 압도적 꼴등이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기자와 PD  200명이 연합한 기자 단톡방에서 정준영 동영상이 올라오자 기자들은 좆나게 환호한다.  이것이 바로 밤꽃 향기 휘날리며 사건 현장을 쫒는 기자의 하이에나 정신이다. 꼴리면 답이 없다.



 



▲ ‘버닝썬 2탄’ 영상을 요구하는 대화(왼쪽)와 대화 직후 불법촬영물이 공유된 대화(중간). 가수 정준영씨가 속옷 차림의 여성들과 찍은 사진(오른쪽)도 공유됐다. 기자들이 올린 영상과 사진 아래에는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문장이 작성되었다.  "질펀하게 놀고 싶다", "업소나 실장 추천 가능하느냐", "낮 4시에 다녀왔다. 20살이다", "월요일에 하루 종일 놀 아가씨. 이번에는 여자 맞다. 400$ 정도"라며 성매매 정보를 공유하고 불법 촬영된 것으로 추정되는 여성들의 사진도 공유했다. 독재 정권 앞에서는 찍소리도 못하던 기자들이 어느 순간 기자 정신 운운하며 발기탱천하는 모습을 보면 폭력 교사 앞에서는 찍소리도 못하다가 학교 체벌 반대를 신념으로 삼은 전교조 교사 앞에서만 개기는 양아치 새끼가 떠오른다. 마찬가지로 화기애애하게 오고가는 입말을 선보였던 기자 단톡방을 보면 정준영 단톡방 앞에서는 정의를 외치다가도 정작 자신들의 단톡방에서는 개가 되는 미러링을 엿보게 된다. 낮에는 펜 잡고 기사 쓰다가 밤에는 좆 잡고 취미 생활하는 기자여, 펜 내려놓고 좆 잡고 반성부터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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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송현정 기자입니다 2



 

대담과 토론은 다르다. < 대담 > 은 인사를 초청해서 대담자의 " 얘기를 듣는 것 " 이고 < 토론 > 은 토론자가 서로 " 의견을 말하는 것 " 이다. 전자는 聞 : 들을 문'에 방점이 찍힌 것이고 후자는 問 : 물을 문'에 방점이 찍힌 것이다. 그러니까 대담회는 진행자가 귀를 여는 방송이고 토론회는 토론자가 입을 여는 방송'이다. 그렇기에 KBS가 문재인 대통령 취임 2주년을 맞아 대담회를 개최하면서 << 대통령에게 묻는다 >> 라는 제목을 단 것은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운 것이라 할 수 있다. 대통령을 대담자로 선정해서 대담회를 열었다면 대통령에게 듣는다고 했어야 한다. 그런데 귀를 열어야 하는 자(진행자)가 귀를 닫고 입만 열려고 하니 방송 사고'가 난 것이다. 초록은 동색이라고 했던가. KBS 기자들은  송현정 기자의 날선 질문과 태도를 권위 앞에 위축되지 않은 기자정신을 제대로 보여줬다 " 며 송 기자의 의기충천을 높이 평가했지만 사실 그것은 의기충천이 아니라 발기충천'이다. 이 발기충천된 기자 정신은 왜 이명박근혜 정권 때에는 동네 변두리 수족관 속 개불처럼 7년 내내 쪼그라들었는지 의문이 든다. 

 

​▶ 박근혜 정권 때, 청와대 초청 기자 간담회  :  대담이 경청을 위한 자리라면 간담은 서로 대화를 나누는 자리이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기자들은 입은 닫고 귀를 열어 경청하고 있다. 시대에 따라 입만 뻥끗대는 붕어가 되었다가 또 어느 때는 입만 열었다 하면 촉새가 되는 변신술을 기자 정신이라고 정의 내릴 수 있다면 기자는 쓰레기'다.

역사학자 전우용의 멘트를 빌리자면 폭력 교사 앞에서는 쪽도 못 쓰면서 안 때리는 선생님에게만 개기는 고등학교 양아치 새끼'가 떠오른다. 그것이 바로 기레기 정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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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맨 2019-05-12 1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폭력 교사 앞에서는 쪽도 못 쓰면서 안 때리는 선생님에게만 개기는 양아치‘ 이 표현에 무릎을 칩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9-05-12 14:14   좋아요 0 | URL
양아치에서 끝나니 어감이 살지 않는군요. 양아치새끼‘라고 해야 제맛이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