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건과 손수건
" 무릎을 꿇을지언정 서서 죽겠다 " 이토록 비장하며 비통한 서정은 남성성을 대표하는 애티튜드'이다. 남자는 몸을 웅크리거나 허리를 굽히거나 속 좁은 행위 따위를 남자답지 못하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룹 들국화가 남성들에게 쩨째하기 굴지 말고 가슴을 활짝 펴라 _ 라고 주문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남자는 자신의 몸을 활짝 펼쳐 놓아야 한다. 허리는 꼿꼿하게, 어깨는 당당하게, 걸을 때는 성큼성큼, 꿈은 원대하게 ! 한국 사회가 남성에게 요구하는 이미지는 " 부풀리기(팽창) " 이다. 자신의 몸보다 크게 보이게 하려는 의태는 모든 수컷 짐승의 공통된 특징'이기도 하다. 반면에 한국 사회는 여성에서 " 오므리기(수축) " 을 강요한다. 남성이 옷자락 펼치며 걷는 것이 상남자의 표본이라면 여성은 가슴옷자락 여미며 조신하게 걷는 것이 표본이 된다.
다소곳한 여성은 가부장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상이다. 다소곳한 태도가 : 고개를 약간 숙이며 온순한 태도를 보이는 의태라는 점에서 자신의 몸보다 작게 보여야 여성적이라고 판단하는 것이다. 몸은 66사이즈'인데 옷은 44사이즈를 입으려고 욕망하는 것은 결국 억압의 결과이다(20대 한국 여성의 평균 몸 사이즈는 66이다. 반면에 44사이즈는 키 150cm에 가슴 둘레 82cm를 기준으로 만들어진 옷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터넷 쇼핑몰 중에는 66사이즈 옷을 팔지 않는 곳이 많다. 예쁜 옷은 대부분 44와 55사이즈이다. 44사이즈는 현대판 코르셋인 셈이다).
만약에 한글도 프랑스어처럼 명사에 성별을 부여할 수 있다면 수건은 남성명사이고 손수건은 여성명사'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두 사물의 의태는 각각 남성적 특징과 여성적 특징을 고스란히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물의 기능성을 놓고 보자면 수건은 펼쳐야 하고 손수건은 접혀야 한다. 전자는 팽창 이미지이고 후자는 수축 이미지'이다. 특히 손수건은 자신의 몸보다 작게, 그리고 무해하도록 접히고 접히고 또 접힌다. 주머니 속에서 드러내지 않고 감추기. 그것이 손수건의 일생이었다. 그래서 나는 손수건을 볼 때마다 손수건은 내성적이야 _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필름누아르라는 이름의 바(bar)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데 한 여자가 내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나는 순간, 그녀가 위험한 여자'라고 직감했다. 그것은 편견에서 비롯된 결과라기보다는 (장르 영화에 대한) 편애에서 비롯된 용인에 가까웠다. 느와르 영화 속 여성은 모두 다 위험하니까. 그는 " 팜므 " 였기에 필연적으로 " 파탈 " 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 전생에서는 손수건이었으나 현생에서는 여자로 태어난 사람 _ 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말도 안 되는 엉터리 소리였지만 왠지 진실처럼 느껴졌다. 내가 웃으면서 말했다. " 프랑스어로 손수건은 남성명사이지요 ! "
여자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지금 당신에 매고 있는 넥타이는 프랑스어로 여성명사예요. 그러니까 인생은 아이러니죠. 종종 몸과 영혼의 성별이 뒤바뀐 경우가 있죠. 몸은 남성인데 영혼은 여성이거나 몸은 여성인데 영혼은 남성이거나...... 손수건과 넥타이의 운명도 그런 것이 아닐까요 ? " 나는 그녀에게 수건과 손수건의 차이에 대해 설명했다. 여자는 리스본행 특급 열차를 기다린다고 했다. 시간을 확인하는 횟수가 잦아질 무렵 여자는 리스본행 열차를 타기 위해 떠났고, 나는 홀로 남아 술을 마셨다. 스피커에서는 < The Train Leaves at Eight > 의 기타 연주곡이 흘러나왔다.
여자가 떠난 자리에는 그녀가 놓고 간 손수건이 보였다. 하늘색 도트 무늬 손수건이었다. 그 손수건은 내가 오래전에 잃어버렸던 그 손수건과 똑같았다. 층층이 쌓인 손수건 모서리 끝단에는 자신의 이니셜 이름을 새긴 알파벳 모양이 설핏 보였다. 나는 손수건 모서리 끝단을 살짝 올려 이니셜을 확인했다. 내 이니셜과 같았다(F.O).
-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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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8.18
손수건은 내성적이다
늦은 밤, 심야식당에서 나는 혼자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때 한 여자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하늘색 물방울무늬의 하얀 옷을 입은 여자'였다. 처음 보는 낯선 여자였으나 낯익은 얼굴처럼 느껴졌다. 나는 계속 어떤 묘한 기시감에 갇혀서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입생로랑 담배를 입에 물고 내게 다가오더니 낮은 톤으로 말했다. " 자지 깔까 ? 'зажигалка' " 러시아어로 라이터 불 좀 빌립시다, 라는 뜻이었다. 이 농담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서 저, 포경했는데요 _ 라고 말하면 위트 없는 사람이 된다. 나는 그녀에게 자지깔까를 건네면서 물었다. " 조심히 다뤄 주세요. 폭발할 수도 있습니다. 농담입니다. 러시아에서 오셨나 봐요 ? " 그녀는 담배 연기를 길게 내품으며 말했다. " 아니요, 저는 무정부주의자예요. 사실은..... 국적을 몰라요. 하여튼 메이드 인 러시아는 아니에요. 몇 년 전에 인간으로 환생했거든요. " 후생이 인간이라면 전생은 무엇이었을까 ? 실례지만.... 당신의 전생을 물어봐도 될까요 ? 처음에 그녀는 내 질문에 관심 없다는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말 없는 그녀의 옆 얼굴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보면 볼수록 낯익은 얼굴이었다. 어디서 봤더라 ?! 현세에서는 서로 만난 적이 없었으니 이 기시감은 전생에서의 인연이 아니었을까 ? 나는 다시 물었다. 환생을 기억한다는 것은 전생을 기억한다는 것 아닌가요 ? 그녀가 나를 바라보았다. " 그래요, 나는 전생을 기억하죠. 나는 손수건이었어요. 이 세상에서 제일 예쁜 손수건이 왼쪽 모서리와 오른쪽 모서리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접점을 이루어 접힐 때에요. 이제 내가 누군지 아시겠나요 ? " 그녀는 그 말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졌다. 떠난 자리에서는 샤프란 향이 은은하게 퍼졌다. 비로소 나는 그녀가 내가 잃어버렸던 손수건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늘색 도트 무늬 패턴의 하얀 손수건. 나는 종종 사람들에게 말하곤 했다. " 이 세상에서 제일 예쁜 손수건이 뭔 줄 알아 ? 모서리와 모서리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접점을 이뤄 접힌 손수건이야말로 제일 좋은 손수건이지. 펼쳐지는 순간, 손수건은 손수건만이 가지고 있는 미학을 잃어버리지. 손수건은 내성적이야. 늘 닫혀 있거든. 그게 마음에 들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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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에 " 전생에서는 손수건이었다가 후생에서는 인간으로 환생한 여자 " 가 꿈에 나타났다. 꿈에 이야기를 덧댔다. 나는 손수건을 보면서 늘 손수건은 내성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손수건은 늘 첩첩이 접혀 있어서 그 속을 알 수가 없으니까 말이다. 수건과 손수건의 차이는 명백하다. 수건은 반듯하게 펼쳐져야 예쁘고 손수건은 반듯하게 모서리가 겹겹이 접혀야 예쁘다. 나는 한때...... 내가 사랑했던 여자를 모서리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