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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chap and a bitch  :  연놈의 지정학적 관계   


 

 

 

 


 



너라고 부르지 마



 

 

 

                                                                                                                    이승기가 부른 노래 << 내 여자라니까 >> 에서 1인칭 화자는 연상의 여자를 사랑한다. 누나는 화자인 < 나 > 에게 " 니가 뭘 알겠냐고 크면 알게 된다고.... " 타이르는 것으로 보아 나이 차이가 꽤 나는 모양이다.

나이 차이 가지고 사랑의 조건을 논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기는 하나, 이 노래에서 나이 차이는 중요하다. 하여튼, 나는 누나를 사랑한다. 나는 말한다. " 누난 내 여자니까 ! " 이 용기 있는 사랑 고백은 박수를 받을 만하다. 하지만 내 관심은 < 나 > 가 이 고백 후에 내뱉는 말투'다. 그는 " 누나는 내 여자 " 라고 고백한 후 " 너는 내 여자니까 ! " 라고 다시 한 번 강조한다. 누나에서 한순간에 < 너 > 라는 반말이 진행되는 것이다. 내가 말머리에서 나이 차이를 언급한 이유이다. 만약에 이 노래를 연하남이 아니라 나이 어린 여자가 나이 차이가 많은 남자에게 사랑 고백한다면 다음과 같은 가사가 만들어질 수 있을까 (사랑 고백 후에 붉은 글씨로 쓰여진 태도 변화에 유의하도록 하자) ? 역지사지, 똑같은 잣대로 개사를 해보자.



내 남자라니까

개사 페루애​

저를 여동생으로만 / 그냥 그 정도로만 / 귀엽다고 하시지만요 / 아저씨는 내게 남자이시지요 / 가시네가 뭘 알겠냐고 크면 알게 된다고 / 까분다고 하시지만요 / 아저씨는 내게 남정네이시어요 / ...... / 아저씨는 내 남자라니까욧 / 너는 내 남자니까 ???????? / 이젠 너라고 부를게 / 뭐라고 하든 상관 없어, 시바 ??????? / 놀라지 말아라잉 / 이 쨔샤, 넌 내 남자라니까 ! / 나는 그런 여자여, 알긋냐 / 얼릉 내 품에 안겨보아라잉 / 아따, 사내새끼가 나이 처먹고 뭐시 그리 부끄럽다냐 / 후딱 내 가슴이 뽀개지도록 안겨라잉

 

 

 


 

연하남과 연상녀의 사랑을 다룬 드라마는 대부분 남성이 사랑을 고백하고 여성이 사랑을 받아들이는 순간 대등한 관계가 진행된다. 일종의 계급 장벽이 무너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 반대의 관계에서는 사랑의 결실이 수평적 계급을 만들지는 않는다. 만약에, 나이 어린 여자가 나이 많은 남자에게 너는 내 남자요, 이젠 너라고 부를게, 짜샤 ! 라고 말한다면 남자는 사랑의 힘으로 6월의 개똥벌레처럼 방긋 웃을 수 있을까 ? 이 노래는 그런 의미에서 시대착오적이다. 이처럼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사용하는 언어 속에는 여성차별이 많다. 가장 선명한 예가 < 연놈 > 이라는 단어'다. 그 어느 나라보다도 서열을 중시하는 가부장 유교 사회에서 순서는 매우 중요하다.

자리 배치에 있어서 힘을 가진 자가 항상 앞에 나열된다. 영어 " ladies and gentlemen ! " 를 한국어로 번역하면 " 신사 숙녀 여러분 ! " 이 되는 것도 바로 앞자리의 중요성 때문이다. 불온하도다, 남녀 칠세 부동산이거늘 미천한 계집이 사내 앞에서 설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외다. < 남녀 > 라는 단어도 남자가 앞자리를 차지하고, < 부부 夫婦 > 라는 단어도 夫 : 사내 부' 가 핫플레이스를 차지한다. 한국어 단어의 모든 단어가 " 불타는 남정네의 자리 욕심 욕망 법칙 " 를 따른다. 그런데 딱 하나, 이 법도를 벗어나는 단어가 있다. 바로 < 연놈 > 이라는 단어다. " 년 " 이 " 놈 " 보다 앞선다. 그렇다면 이 불온한 불경은 전복적 투쟁의 결과일까 ? 

" 연놈 " 이라는 단어는 오로지 욕으로 사용될 때에만 호출되는 단어'다. 남녀가 잘못을 저지르면 연놈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도 불타는 남정네의 자리 욕식 욕망 법칙이 작동한다. 욕을 먹되 남자가 먼저 먹는 것은 위신이 서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욕을 먹을 때에는 여자가 먼저 먹어야 한다. " 이 년아, 욕은 너 먼저 처먹어 ! " 이 얼마나 꼼꼼하신 전략인가 ! 나는 빈틈을 보이지 않으려는 불알후드의 욕망 앞에서 무릎 탁, 치고 아, 했다.  꼼꼼하시도다. 영어에도 < 연놈 > 과 비슷한 숙어가 있을까 ?   찾아보니 있다. < 연놈 > 의 영어 표현은 바로 < a chap and a bitch ! > 이다. 이 표현을 한국어로 번역한다면 남녀라고 써야 할까, 아니면 연놈이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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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도 없지만 어디에나 있다 :


 

 

 

                                     도어락, 2018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숨이 막히는 듯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무언가 끔찍한 일을 누군가에게 털어놓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하지만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의 집안 어디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혼자 살고 있었으며 그것은 그 순간 그 끔찍한 일을 함께 나눌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침대 밑을 보여 줄 사람이, 몸을 숨겨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 침대 밑 악어 중

 



                                                                                                      

 

오피스텔 원룸에서 독신으로 살아가는 주인공 경민(공효진 분)은 여성 1인 가구라는 사실이 알려져 범죄의 타깃이 될까 봐 전전긍긍하는 독신이다. 그는 일부러 빨래 건조대에 남자 속옷과 남자 양말을 진열하고, 현관에 남자 구두를 배치한다1).  만약에 영화를 보면서 영화 속 설정이 과도하다고 생각하는 이가 있다면 그 사람은 남성 관객일 확률이 100%다.  현실 반응은 영화보다 더 히스테릭하다.  여성이 혼자 있을 때를 대비해 배달이 오면 앱(Application)에서 남자 목소리로 변조되어 대답하는 기능도 인기를 얻고 있다.  영화보다 현실 속 설정이 더 기괴한 경우이다.  이처럼 영화 속 설정은 여성이라면,  더구나 혼자 사는 여성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불안이다.  영화는 그 불안의 지점을 파고든다.  강력범죄 피해자 중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은 86.2%이고,  성폭력은 하루 평균 88회 이상 발생하며,  

 

성폭력 가해자의 94.4%가 불구속 처리되고,  강도, 강간, 살인과 같은 강력범죄를 저지르는 가해자 중 남성이 차지하는 비율은 96.3%다.  그리고 주거침입 성범죄 사건에서 남성이 차지하는 비율은 99.8%다.  그렇다면 여성이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라고 생각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반응인 셈이다.  하지만 이러한 반응에 대하여 남성은 무시로 일관하거나 반대로 격하게 분노를 표출한다.  영화 << 도어락, 2018 >> 에서 남성 - 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원룸에 누군가 있다는 경민의 진술을 초지일관 히스테리한 반응으로 치부한다. 여성의 언어는 권위와 존경을 얻지 못한다. 가족극에서 문제가 발생할 때 사건에 개입하고 해결하는 것은 남편이다. " 당신은 조용히 있어 ! "           

 

이 흔해빠진 패밀리 플롯은  여성의 언어가 사건을 해결하는데 아무 도움도 될 수 없다는 편견을 심어준다.  반면, 가부장 남성은 몇 마디 하지도 않았는데 단숨에 다툼을 정리한다. 가족 서사극'은 남성의 언어에 권위를 부여하고 우리는 그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영화 << 도어락, 2018 >> 은 침대 밑에 악어가 산다는 환자의 재담을 닮았다. 즉, << 도어락 >> 은 익히 알려진 재담의 장르적 변주'이다.

 

 

    대 밑에 악어가 산다고 불평하는 여성 환자가 있다.  여자는 악어가 자신을 잡아먹기 위해서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고 말한다.  정신과 의사는 환자에게 그것은 단지 환상에 불과하며 침대 밑에는 악어가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와, 악어 있다니까요 ~    왜, 내 말을 안 믿냐고요 ~    나, 이대 나온 여자라고요 ~   하지만 의사는 도시에서 악어 출현은 " 실현 불가능한 환각 " 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무시한다.  두 번째 상담에서도 그 환자는 여전히 똑같은 불평을 하지만 남자는 지난번 진단과 같은 처방을 내린다. 와, 악어 없다니까요 ~    왜, 내 말을 안 믿냐고요 ~     나, 정신과 의사라고요 ~             세 번째 상담이 있던 날,  약속했던 환자가 나타나지 않자 의사는 환자의 망상이 사라졌다며 기뻐한다.  만약에 이야기가 여기서 끝이 난다면 이 이야기는 매우 지루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다.  며칠 뒤, 의사는 환자 친구인 k를 거리에서 우연히 만나 환자의 안부를 묻는다. k가 말한다.  그 악어한테 잡아먹힌 친구 말하는 겁니까 ?  이웃집에 사는 사람 말로는 그 집 침대 밑에서 악어가 살았다고 하더군요.                   

 

 

자신이 살고 있는 오피스텔 원룸 안에 누군가 있다고 말하는 경민(공효진 분)은 침대 밑에 악어가 산다고 말하는 정신과 상담 환자와 동일인이다. 그리고 경민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이 형사(김성오 분)는 정신과 의사'이다. 또한 혼자 사는 여성만을 노리는 범인은 사람 탈을 쓴 초록색 악어'이다(실제로 영화 속에서 범인은 경민의 침대 밑에 숨어 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남성 - 들'은 예외 없이 모두 경민의 침대 밑에 사는 악어에 대하여 " 실현되지 않는 환영 NON·REAL(IZE)  " 이라고 진단한다. 하지만 남성들에 의해 실현되지 않은 환영'으로 치부되었던 악어는 관객 앞에 " 실현된 환각 NON·ILLUSION(ED) " 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초록색 악어는 남성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여성에게는 존재하는 공포의 대상이다.  그렇다면 왜 초록색 악어는 남성들에 의해 리얼/real 이 아니다/non 라는 존재 부정을 당하는 것일까 ?   그것은 바로 초록색 악어가 일반 남성의 비밀스러운 환유이기 때문이다.  남성이 악어의 존재를 인정하는 순간, 그 행위는 곧 자기 자신을 향한 비판'이 된다.  라캉의 사유를 빌리자면 침대 밑에 사는 악어는 실재 the Real 에 가깝다. the Real 실재(계)는  the reality  현실과는 다른 개념으로 실제(實際)도 아니고 실재(實在)도 아니요, 그렇다고 실체(實體)도 아니다. " 리얼리티 없는 리얼 " 이 바로 침대 밑에 사는 악어이다. 남성에 의하면 악어는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이 존재 부정이야말로 악어를 어디에나 있도록 만든다. 악어는 침대 밑에서 출몰하기도 하고, 거리에서 바바리를 입고 여고 앞 골목길에 등장하기도 한다. 그리고 선생님이나 목사님의 탈을 쓰고 나타나기도 한다. 악어는 어디에도 없지만 어디에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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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원룸 ONE-ROOM  > 은 1인 주거 공간의 마지노선'이다. 은행 직원 경민은 1인 가구를 2인 가구로 포장하기 위해 위장을 선택하지만 원룸 자체가 독거 주거 형태'라는 점을 감안하면 효과는 미지수'다. 이보다 후퇴한 주거 형태가 < 쪽방 > 이다.  쪽방은 ROOM 를 1/2, 1/3, 1/4, 1/5, 1/6......1/13으로 쪼갠 형태로 고시원, 쪽방촌, 달방, 고시텔이 이에 속한다.  영화 << 도어락 >> 은 원룸에 혼자 사는 여성이라면 누구나 겪었을 만한, 일상의 공포를 설득력 있게 제공한다. 독거의 최소 주거 공간 형태가 ONE - ROOM 이라는 점은 주인공 조경민(공효진 분)이 계약직 직원이라는 설정과 맞물리면서 주거 빈곤에 따른 현대 여성의 사회적 불안을 다루는데 성공한다. 한 칸짜리 방에 사는 여자는 이제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 이곳에서 물러나면 갈 곳은 방을 쪼갠 쪽방이다. 이 영화가 리얼리티를 가지는 부분이다. 하지만 살인마가 사는 공간으로 설정된 공가(空家)가 영화 중후반부터 주요 무대로 등장하면서 이 영화는 톤 앤 매너가 갑자기 와르르 무너진다. 무대가 원룸 ONE-ROOM 에서 공가(空家) EMPTY HOUSE 로 후퇴하면서 일상생활의 공포는 난도질 스플래터 장르의 판타지로 추락한다. 특히, 공가 장면들은 영화 << 목격자 >> 와 << 샤이닝 >> 냄새가 너무 나서 신선함마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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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어 프로젝트 - 남자들만 모르는 성폭력과 새로운 페미니즘 푸른지식 그래픽로직 5
토마 마티외 지음, 맹슬기 옮김, 권김현영 외 / 푸른지식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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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현 가능한 환각의 출현 :

 

 

 

 

 

 

 

 

 

​악어 이야기

 

                                             

                                                                                                                   훌륭한 이야기에는 항상 " 악어 " 가 등장한다. 만약에 지금 당신이 읽고 있는 책에서 악어가 등장하지 않는다면 미련 없이 쓰레기통에 버려도 좋다. 그런 책은 재미없어 !

악어가 등장하는 유명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유명한 재담'이다)  :  침대 밑에 악어가 산다고 불평하는 여성 환자가 있다.  여자는 악어가 자신을 잡아먹기 위해서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고 말한다.  정신과 의사는 환자에게 그것은 단지 환상에 불과하며 침대 밑에는 악어가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와, 악어 있다니까요 ~    왜, 내 말을 안 믿냐고요 ~    나, 이대 나온 여자라고요 ~   하지만 의사는 도시에서 악어 출현은 " 실현 불가능한 환각 " 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무시한다.  두 번째 상담에서도 그 환자는 여전히 똑같은 불평을 하지만 남자는 지난번 진단과 같은 처방을 내린다. 와, 악어 없다니까요 ~    왜, 내 말을 안 믿냐고요 ~     나, 정신과 의사라고요 ~               

세 번째 상담이 있던 날,  약속했던 환자가 나타나지 않자 의사는 환자의 망상이 사라졌다며 기뻐한다.  만약에 이야기가 여기서 끝이 난다면 이 이야기는 매우 지루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다.  며칠 뒤, 의사는 환자 친구인 k를 거리에서 우연히 만나 환자의 안부를 묻는다. k가 말한다.  그 악어한테 잡아먹힌 그 사람 말하는 겁니까 ?  침대 밑에서 악어가 살았다고 하더군요.                         이 이야기에서 < 악어 > 는 현실 공동체 질서 안에서는 실현 불가능한 환각'에 불과했지만,  현실 속에서 " 실현된 환각 " 으로 나타나면서 서사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이처럼 악어는 스토리텔링1)에서 매우 중요한 오브제이다.

이명박 스토리와 박근혜 스토리가 매우 흥미진진했던 까닭도 인간의 눈에서 악어의 눈물이 흐른다는 데 있다. 아, 아아아아아악어의 눈물이라니. 그것은 싱크대 수도꼭지를 틀었더니 맥주가 쏟아지는 것과 같은 꼴이다. 쇼킹하다. 세월호 희생자를 추모하며 흘린 박근혜의 눈물을 보았을 때 우리 모두는 당황했었다. 어, 어어어어어어...... 닭이 아니라 악어였어 ???!!!!  이처럼 훌륭한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항상 악어 한 마리 정도는 비장의 카드로 숨겨놓아야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 어느 하드보일드 작가는 글을 쓰다가 막히면 권총을 등장시키면 된다고 충고했다.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글을 쓰다가 막힌다 싶으면 악어 한 마리를 등장시키라구.

그런데 악어가 한 마리가 아니라 악어가 떼로 등장하는 만화가 있다.   바로 << 악어 프로젝트 >> 라는 프랑스 만화'이다.  이 책에서 남자는 모두 초록색 악어로 등장한다.   악어 떼가 득실거리는 세상에서 사는 여성이 일상적으로 겪는 성차별과 성폭력을 그리고 있는데 양성 평등 국가로 알려진 프랑스에서도 이 문제만큼은 예외가 아닌 모양이다.  초록색 악어들은 호시탐탐 여자들을 잡아먹을 궁리만 한다.  " 남자는 모두 다 늑대(악어) " 라는 말은 세계 어디를 가나 만국공통어'란 사실을 깨닫게 된다.  특히, 남성 입장에서 보면 모든 남성을 포식자인 초록색 악어로 묘사해서 읽는 내내 불편한 감정이 들 수밖에 없다.  잠재적 가해자가 된다는 것은 언제나 불편한 느낌이 드니까.


작가 토마 마티외는 " 악어라는 이미지를 통해 남성 우월주의,  성차별주의,  성적 고정관념,  남성의 성적 욕망,  그리고 실제로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는데도 거리에서 마주친 남성에게 느끼는 두려움 같은 것을 드러내고 싶었다 " 고 한다.  남성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 초록색 악어는 " 실현되지 않은 NON·REAL(IZE) " 환영에 불과하지만,  여성에게 있어서 초록색 악어는 " 실현된 환각 NON·ILLUSION(ED)" 으로써 라캉의 실재 the Real  2)에 가깝다. < 초록색 악어 > 는 남자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여자에게는 존재하는 공포의 대상이다. 리얼리티 없는 리얼이다.  이처럼 the Real(실재계)은  the reality와는 다른 개념으로 실제(實際)도 아니고 실재(實在)도 아니요, 실체(實體)도 아니다. 

그것은 the Nothing에 접근한 공허(空虛, the void)에 가깝고, 슬라보예 지젝이 언급한 히치코크의 얼룩이자 오점에 해당된다.  이 책을 읽고 난 뒤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다.  읽는 내내 불편한 마음을 가졌다면, 남성인 당신은 지난날에 대하여 반성할 기회가 아직 남아 있는 사람이고,  읽는 내내 불쾌한 마음으로 책장을 넘겼다면 당신은 a son of a bitch crocodile'이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말머리에서 소개한 침대 밑에 악어가 산다는 여자 이야기를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게 된다. 이 익살스러운 재담에서 환자를 여성으로, 그리고 의사를 남성으로 설정한 이유는 무엇인가 ?  그리고 다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정신과 의사는 침대 밑에 악어가 산다는 여자의 말을 왜 일고의 가치도 없는 무의미한 진술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   세상의 절반이 악어인데 말이다.  혹시...... 그도 또 다른 악어 한 마리는 아니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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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근에 개봉한 영화 << 도어락 >> 은 침대 밑에 악어가 산다고 말하는 히스테릭한 여자 이야기의 변주'이다. 자신이 살고 있는 오피스텔 원룸 안에 누군가 있다고 말하는 경민(공효진 분)은 침대 밑에 악어가 산다고 말하는 여자와 동일인이다. 그리고 경민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이 형사(김성오 분)는 정신과 의사'이다. 또한,  혼자 사는 여성만을 노리는 범인은 악어'이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남성 - 들'은 예외 없이 모두 경민의 히스테릭한 반응에 대하여 " 실현 불가능한 환각 " 이라고 말하지만 < 실현 불가능한 환각 > 은 < 실현 가능한 환각 > 이 되어 관객 앞에 출현한다.


2)   " 라캉의 실재(the Real)는 현실(the reality)이 아니다. 라캉의 실재는 상징계의 밖에 있다. 다시 말해 우리의 현실 밖에 있는, 현실이 아닌, 현실 너머의 어떤 것이다. 라캉의 실재는 경험적 실재와 구별되고, 초감각적 세계의 추상적 실재와도 구별되는 개념이다. 경험적 실재란 우리 주변의 모든 구체적 물건들을 뜻하고, 추상적 실재란 ‘자유’, ‘정의’ 같은 추상 명사들을 뜻한다. 그러나 라캉의 실재는 이것들 중 그 어떤 것과도 상관이 없다.상징계가 언어적 세계라면 실재계는 언어를 초월하는 언어 밖의 세계이다. 우리의 현실은 언어로 된 세계인데, 실재는 언어로 매개되지 않는 세계이다. 그것은 언어에 포함되지 않고, 언어 외부에, 또는 주체 외부에 있는 성(性)과 죽음의 차원이다. 결국 실재계는 불안의 대상이다. 그 세계 앞에 서면 모든 단어들이 얼어붙고 모든 범주들이 추락하는, 그런 불안의 대상이다.  상징화를 거부하므로 즉 도저히 언어로 표현할 수 없으므로 실재계는 표상이 불가능하다. 상상할 수 없고, 상징계 안에 통합시킬 수도 없어서, 우리는 도저히 그 곳에 도달할 수가 없다. 현실 속에서는 결코 제시될 수 없지만 우리가 현실과 밀착해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전제되어야 하는 어떤 것이다. 현실 끝에 한계가 있고, 그 한계 너머로 속이 텅 비어 있는 심연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실재다. 실재는 우리가 결코 접근할 수 없는 끔찍한 한계, 즉 그것을 건드리는 것이 곧 죽음을 의미하는 한계이며, 동시에 그 너머의 공간이다. 그리스 신화의 오르페우스를 생각해 보자. 연인 유리디체를 지하세계에서 구출해 나오는 오르페우스에게는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금기가 내려졌다. 돌아서서 뒤에 따라오는 연인을 바라보는 순간 연인이 죽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한 중간에 오르페우스는 참지 못하고 뒤돌아보았고, 연인 유리디체는 죽었다. 실재의 은유로 이것만큼 적당한 것이 없다. 실재에 가까이 가는 것은 치명적인 죽음을 의미한다. 현실과 실재를 가르는 한계는 근본적 불가능성의 표지이다. 우리는 그것을 결코 넘을 수 없고, 거기에 가까이 가기만 해도 죽는다. 그리고 그 너머는 금지되어 있다. 실재는 그러니까 실체도 없고, 물질성도 없다. 일체의 상징화를 거부하므로 그 어떤 말로도 표상할 수 없다. 그러나 굳이 표현하자면 그것은 공허(空虛, the void)이다. 실재는 텅 비어 있는 빈 공간이다 "

ㅡ 박정자 칼럼에서 부분 인용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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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는    왜    타  자  인  가  : 

 

 

 





욕망이냐 요구냐



 

                                                                                                                   어린이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은 한 아이가 울면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방긋 웃던 또래아이들도 함께 따라 우는 장면이다. 이것을 공감(共感)이라고 한다.

보다 쉽게 설명하자면 공감 = 동감(同感)이다. 공감과 동감은 모두 타인의 감정, 생각, 욕망을 모방하려는 현상이다.  집에서는 거식에 가까웠던 외동 아이가 유치원에서는 폭식에 가까운 행동을 하는 것도 타자에 대한 모방 심리로 설명할 수 있다. 어른의 세계도 마찬가지'이다. 코미디 프로그램 제작진이 웃음소리를 효과음으로 넣는 것도 감정 공유 본능 습성을 이용하여 더 재미있게 하려는 전략이다. 집에서 티븨로 영화를 감상하는 것과 영화관에서 영화를 감상하는 것이 다른 체험인 이유이다. 울음소리도 웃음소리와 비슷하다. 장례를 지낼 때 일정한 소리로 우는 곡(哭)은 조문객의 슬픔을 유도하기 위한 고도의 전략이다. 그래서 옛날에는 곡비(哭婢)라 하여 장례 때 우는 게 직업인 노예도 있었다. 

그렇다면 이 모든, 이 모오든 희노애락은 타자의 욕망을 흉내 낸 것에 불과한 것일까 ?  라캉은 YES ! _ 라고 자신있게 대답할 것이다. 지첵도 OF COURSE ! 라고 대답할 것이다. 욕망이란 < 내 감정 > 에 충실한 갈망이라고 믿지만 사실은 < 네 감정 > 을 흉내 낸 것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당신은 왜 루이비통을 욕망하는가 ?  그것은 남들이 루이비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내 욕망은 오롯이 네 욕망을 copy한 사본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기에 무인도에서 혼자 사는 로빈손 크루소에게는 욕망이 작동하지 않는다. 로빈슨 크루소의 허기는 머리에서 신호를 보내는 욕망(desire)이 아니라 몸의 단순한 신체 반응 요구(needs) 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desireneeds 를 구별해야 된다는 점이다. 로빈손 크루소는 배가 고플 때만 밥을 먹는다. 이 허기는 needs 에서 파생된 반응으로 진짜 허기'이다. 하지만 현대인의 허기는 desire 에서 파생된 가짜 허기'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전자가 몸이 반응한 결과라면 후자는 뇌가 공모한 반응이다. 가짜 허기는 결핍이 주요 요인'이다. 신체적 허기의 대표적 반응은 꼬르륵 소리'이다. 꼬르륵 소리는 위에서 음식물이 완전히 비워질 때 나는 소리이다. 양 손바닥을 펴서 서로 붙였다가 뗄 때 공기 유입으로 인해 소리가 나는 원리와 같다. 위장에서 음식물이 깨끗하게 비워지는 시간은 평균  9시간 30분( ~ 12시간)이 소요된다. 이때 밥을 먹으면 걸인의 찬이라 해도 꿀맛을 경험하게 된다. 

그런데 가짜 허기는 위장에 음식물이 가득 차 있는데도 배가 고프다는 신호를 보낸다. 이 가짜 신호는 입이 짧은 아이가 유치원에만 가면 밥그릇을 싹싹 비우는 행위와도 맥락이 통한다. 현대인의 허기는 대부분 타자의 욕망을 모방하는 데에서 비롯된다. 먹방을 시청하기 전까지는 허기를 느끼지 못했다가 먹방을 보기 시작하자 허기를 느끼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포방터의 돈가스가 맛있게 느껴지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진짜 허기에서 오는 효과'이다. 맛은 굶주림에 비례한다. 이곳에서 돈가스를 먹기 위해서는 평균 9시간은 기본이다. 돈가스를 먹기 위해 17시간을 기다렸다는 고생담도 널리 퍼져 있다. 시장이 반찬이라는 것은 모든 이들이 경험을 통해 터득한 진리이다.

또 다른 이유는 백종원이라는 대타자를 흉내 냈다는 만족감이다. 그들에게 백종원은 " 킹 " 이다. 이 두 가지 요인이 섞여서 돈가스 맛을 향상시킨다. 그들은 백종원의 팔루스를 빨고 싶은 것이다. 이 욕망은 개인의 취향이라기보다는 집단적 욕망이기에 몰개성적 입맛이며 체험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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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17 15: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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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17 16: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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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모르면 가만히 있어 :

 


 

 


 

 

 

가만히 계세요 !




 



                                                                                                                  한국어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단어 두 가지를 뽑으라 한다면 나는 < 아무 > 와 < 가만 > 을 뽑을 생각이다. < 아무 ㅡ > 에 대한 단상은 틈틈이 써놓은 글이 있기에 제외하고 오늘은 < 가만 ㅡ > 에 대해 내가 그동안 이 녀석을 스토킹 한 소회를 밝히고자 한다. 일종의 관찰 일기'인 셈이다 . 양 양(ㅡ壤)과 불미스러운 일로 고성이 오간 적이 있었다. 나도 쉽게 물러나는 성격은 아니어서 나중에는 고성이 철원까지 들릴 정도였다. 이 문장에서 웃는다면 당신은 내 유머 코드를 정확히 이해하는 몇 안되는 사람이다 

그때 양 양'이 나에게 협박을 하며 했던 말이 " 이대로 가만 당하고만 있지는 않을 거야 " 였다. < 가만 > 이라는 부사가 움직이지 않거나 아무 말 없는 상태를 지시하는 단어이니 이제부터는 분주히 움직이며 사람들에게 아무 말'이라도 해야겠다는 다짐으로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아니나 달라, 그녀는 분주히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아무 말(흉)이나 해서 나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동분서주, 발품을 팔며 흉을 보는 이를 이길 재간은 없었다. 아, 흉보는 일도 부지런해야 하는구나. " 가만히 있어 ! " 라는 말은 " 자리를 지켜( 혹은 분수를 지켜) ! " 라는 말과도 맥락이 통한다.

남의 일에 나서지( ㅡ stand up) 말고 자기 자리에 앉아( ㅡ sit down)서 일이나 해, 라는 의미이다. < 가만 > 은 장소와 분수를 내포하는 것이다. 이 언어의 욕망을 이해하면 남성이 여성을 비하할 때 흔히 사용하는 " 집에서 밥(이나 빨래, 애, 설겆이, 청소)나 해 " 라는 말의 행간을 제대로 분석할 수 있다. 여자의 자리는 집안'이요, 여자에게 집 밖 나들이는 분수도 모르고 주제 넘는 월경인 셈이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여자답다, 아이답다, 어른답다, 처녀답다 _ 라는 말속에는 자신이 소속된 자리에 가만히 있을 때 얻게 되는 칭찬이다. 여자의 자리, 엄마의 자리, 아내의 자리, 며느리의 자리'가 따로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장소라는 뜻의 그리스어인 토포스(topos)이다.

토포스를 구수한 한국말로 번역하면 " 가만(히 있는 삶) " 이다. 그리고 토포스(topos)의 반대말이 아토포스(atopos)이다. 아토포스는 어떤 장소(자리)에 고정되지 않은 것, 정체를 알 수 없는 것, 특정 지을 수 없는 것을 뜻한다. 여자의 자리를 벗어나서 여자다움에서 벗어나 자유를 획득하는 것이 아토포스'이다. 자유인이란 토포스에서 아토포스로 월경한 사람이다. 그런데 국가와 자본이 바라는 인물상은 토포스적 인간이라는 점에서 불온하다. 그들은 남의 일에 나서지 말고 자기 자리에 앉아 일이나 하는 일꾼을 바란다. 이 정언명령은 세월호가 침몰할 때조차 가만히 있으라 _ 라고 명령했던 무자비한 폭력을 닮았다. 최초의 아토포스적 인간은 소크라테스'였다. 아토포스의 유래도 바로 소크라테스에서 비롯되었다.

 

플라톤의 << 항연 >> 에서 사람들은 그를 아토포스라고 불렀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 나는 진리를 모른다. 하지만 내가 진리를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너도 진리를 모른다. 하지만 당신은 자신이 진리를 모른다는 사실을 모른다. 하여, 나는 당신보다 더 많은 것을 안다. " 그렇기에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이 알고 있는 사람보다 항상 앞선다. 히치콕 영화가 위대한 지점은 재미를 놓치지 않으면서도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는 데 있다. 앨프리드 히치콕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는 " 누명 " 이다. 그래서 히치콕 영화에는 " 누명 쓴 사내 " 가 자주 등장한다. 그는 특정 사건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를 뿐만 아니라 아무 관련도 없는 사내이지만 악당으로부터 "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사내 " 라는 오해를 받아서 그들로부터 쫓기게 된다.

 

악당은 <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사내 > 보다 <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사내 집단 > 이다. 그래서 악당은 주인공이 도착하는 것보다 항상 먼저 도착한다. 모른다고 하소연해도 통하지 않는다. 어찌하오리까 ?  아무 것도 모르는 남자가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사내라는,  누명을 뒤집어쓴다는 이야기 구조는 히치콕이 즐겨 다루는 아이러니'이다. 얼핏, 아무것도 모르는 남자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악당의 대결은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같지만 언제나 승리하는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남자'이다. 말을 해도 알아듣지 못하니 이길 방법이 없다고 한탄했던 진중권의 고백을 상기시키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아무것도 모르는 자는 어떻게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믿는 자'를 이길 수 있을까 ?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는 소크라테스를 호명해야 한다.

 

어느 날, 소크라테스는 잠을 자다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목소리를 듣는다. " 세상에서 네(소크라테스)가 제일 똑똑하다 ! "  소크라테스는 이 목소리를 의심한다. 환청인가, 신탁인가 ?  그는 자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저잣거리에서 똑똑하다는 명성이 자자한 명사들을 찾아 나선다.  경주에 사는 유시민도 만나고, 월계동에 사는 진중권도 만나 논쟁을 펼치는 식이다. 그런데 그들은 논쟁을 펼칠 때마다 소크라테스의 논박에 진다. 소크라테스는 말했다. " 나는 진리를 모른다. 하지만 내가 진리를 모른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당신도 진리를 모른다. 하지만 당신은 당신이 진리를 모른다는 사실을 모른다. 하여, 나는 당신보다 많이 안다. " 그러니까 소크라테스의 힘은 < 나는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앎 > 이다.

그것이 히치콕 영화에서 < 아무것도 모르는 남자 > 가 <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악당 > 과 대결하여 이길 수 있는 힘이다. 이러한 방식은 자크 랑시에르의 << 무지한 스승 >> 과도 맥락이 통한다.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학생에게 설명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랑시에르는 스승은 학생에게 지식을 주입시키는 < 설명 > 보다는 본질에 대한 < 질문 > 을 던지는 것이 올바른 교육법이라고 주장한다. 소크라테스의 대화법, 히치콕의 unknown, 랑시에르의 무지한 교수법'이 말하고자 하는 본질은 많이 안다는 것의 허구'이다. 그것은 지식의 허구'이다. 현대사회를 지배하는 것은 전문가 집단이다. 그들은 사태와 세태를 분석하고 전문가의 이름으로 해결책을 내놓는다.

이들은 때론 독설을 내뱉는 언니가 되고 형이 되기도 했으며, 멘토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리고 이제는 힐링이랍시고 상처를 치유하는 영혼의 정신적 스승이 되기도 한다. 서로 다른 외양과 이름으로 불리지만 같은 얼굴이다.  그들은 자신이 속한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무지한 제자를 가르치려고 하지만 진짜 무지한 자는 바로 자신이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렁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지식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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