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네 편








1 성난 황소. 2018  ★★


                                예술 영화는 인물을 집중 탐구하는 영역이어서 풀타임 내내 등장인물을 분석하는 데 할애한다. 그리고 예술 영화를 즐겨 보는 시네필도 기꺼이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만 오락 영화인 경우는 다르다. 오락영화에서 지루함은 재앙이다. 오락영화를 소비하는 관객이 지루함을 견딜 수 있는 한계는 영화 시작한 지 러닝타임 20분 내외'로 그 이후부터는 집중력이 저하되어 몰입에 방해가 된다고 한다. 이 시간대는 감독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캐릭터를 관객에게 소개하는 시간이다. 아아, 마이크 테스트 !  관객 여러분에게 소만근을 소개합니다. 소고기 한 근도 아니고 반 근도 아닌, 자그마치 소고기 만 근이요. 나이는 28세, 철근도 씹어삼킬 남근의 소유자입죠.                       이 기초 설정이 탄탄해야 후반부에 휘몰아칠 질풍노도에 관객은 격렬하게 호응하게 된다. 문제는 관객의 몰입도'이다. 그래서 할리우드 영화는 상영 시간 20분 즈음에 관객의 흥미를 끌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 예를 들면, 괴수 영화 장르 같은 경우 이 시간대에 괴물 꼬리를 살짝 보여주는 식이다. 지루해서 입이 댓 발 나온 관객은 꼬리를 보는 순간에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흥미를 갖기 시작한다. 이 시스템을 알고 나면 마동석이라는 배우는 매우 효과적인 배우이다. 마동석은 그 자체로 하나의 텍스트'여서 감독이 굳이 마동석이라는 인물을 지루하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마동석은 하나의 고유명사이기 때문에 다양한 영화에 출연해도 마동석은 마동석이다. 우리는 그가 화가 나면 헐크로 변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 성난 황소, 2018 >> 의 마동석은 << 범죄도시 >> 의 그 마동석이고, << 부라더 >> , << 챔피언 >> , << 원더풀 고스트 >> , << 동네 사람들 >> 의 그 마동석이다. 문제는 엇비슷한 이미지 소모에 따른 식상함이다. 바로 그 지점이 마동석의 딜레마'이다. 굵은 팔뚝만 가지고 장사하기에는 이제 밑천이 다 드러난 상태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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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도어락, 2018 


                            < 방 > 이 개인이 거처할 수 있는 실내라는 점을 감안하면 < 원룸 ONE-ROOM  > 은 1인 주거 공간의 마지노선'이다. 원룸은 자신의 가치를 훼손하지 않고 살 수 있는 마지막 보루인 셈이다. 이보다 후퇴한 주거 형태가 < 쪽방 > 이다.  쪽방은 ROOM 를 1/2, 1/3, 1/4, 1/5, 1/6......1/13으로 쪼갠 형태로 고시원, 쪽방촌, 달방, 고시텔이 이에 속한다.  영화 << 도어락 >> 은 원룸에 혼자 사는 여성이라면 누구나 겪었을 만한, 일상의 공포를 설득력 있게 제공한다. 독거의 최소 주거 공간 형태가 ONE - ROOM 이라는 점은 주인공 조경민(공효진 분)이 계약직 직원이라는 설정과 맞물리면서 주거 빈곤에 따른 현대 여성의 사회적 불안을 다루는데 성공한다. 한 칸짜리 방에 사는 여자는 이제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 이곳에서 물러나면 갈 곳은 방을 쪼갠 쪽방이다. 이 영화가 리얼리티를 가지는 부분이다. 하지만 살인마가 사는 공간으로 설정된 공가(空家)가 영화 중후반부터 주요 무대로 등장하면서 이 영화는 톤 앤 매너가 갑자기 와르르 무너진다. 무대가 원룸 ONE-ROOM 에서 공가(空家) EMPTY HOUSE 로 후퇴하면서 일상생활의 공포는 난도질 스플래터 장르의 판타지로 추락한다. 특히, 공가 장면들은 영화 << 목격자 >> 와 << 샤이닝 >> 냄새가 너무 나서 신선함마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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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완벽한 타인, 2018 ★★★


                                       영화 << 완벽한 타인 >> 은 핸드폰이 요물이라는 사실을 폭로한다. 영화 속 인물들은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곤경에 처하게 된다. 영화는 이 곤경과 불안을 코미디로 처리했지만 장르를 스릴러로 바꿔도 꽤 흥미진진한 영화가 탄생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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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크라잉게임, 1993 ★★★★★

                                        인간 관계가 어려운 지점은 내 본성과 네 본성이 대립할 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내 천성과 네 천성이 대립할 때 발생하게 된다.  본성이 < 거시적 서사 > 라면 천성은 < 미시적 서사 > 에 가까워서, 천성은 본성에 비하면 쩨쩨하고 사소한 성질머리'에 속한다. 그렇기에 뭔가 거창하고 잘난 척하기 좋아하는 문학은 주로 인간의 천성을 다루지 않고 인간의 본성을 다룬다. 예를 들면 " 게으른 성격 " 은 본성이 아니라 그 사람의 " 사소한 천성 " 이다. 일상에서 관계의 어려움은 주로 이 쩨쩨하고 사소한 성질머리-들이 서로 대립할 때 발생한다. 남녀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비록, 남녀가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 해도 남성의 천성과 여성의 천성이 다르기에 대립하게 된다. 여기어 덧대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개성과 살아온 환경이 다르다면 더더욱 그렇다. 천성이란 교정으로 고쳐지는 것이 아니어서 성격과는 다른 성격이 천성이다. 천성은 유별난 것이다. 그 사람의 천성이 유별나지 않다면 그것은 천성이 아니라 본성에 가깝다. 영화 << 크라잉게임 >> 에 등장하는 전갈과 개구리 이야기는 서로 다른 천성을 가진 전갈과 개구리가 등장한다. 헤엄일 칠 줄 모르는 전갈이 개구리 등에 엎혀 강을 건너는 도중에 개구리에게 독을 쏜다. 강 한가운데서 벌어진 일이어서 개구리는 독 때문에 죽고 전갈은 물에 빠져 죽는다. 개구리가 전갈에게 묻는다. WHY ? 그러자 전갈이 죽어가면서 대답한다. IT'S MY NATUER !  천성은 그 사람의 개성이면서 동시에 타인을 향한 독이기도 하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나는 전갈일까, 개구리일까 ?  내 천성이 누구에게는 독이 되지 않았을까 ?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밤이다. 그렇고 그런 한국 영화 100편을 보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 영화 한 편을 보는 것이 좋다. 이 영화는 걸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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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01-01 15: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미치광이 최강희 평론가라는 분은 완.타.를
작년 최고의 영화로 꼽더군요.

다만 그 영화 역시 우리의 오리지널이 아니
라, 외국영화의 리메이크인지라...

그나저나 외국 걸작 영화들의 번역 제목을
차용한 영화들의 범람이 그다지 마음에 들
지 않습니다.

마틴 스코시즈와 드니로의 <성난 황소>가
전혀 상관 없는 마동석 배우의 영화로 거듭
나는 건 쫌...

곰곰생각하는발 2019-01-01 16:14   좋아요 0 | URL
일종의 소품인 영화인데
한국 영화가 워낙 질이 떨어지다 보니
최강희는 원탑이라 자신있게 말하는군요..

마틴의 < 성난 황소 > 는 정말 걸작이죠.
저의 톱10안에 도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나와같다면 2019-01-01 19: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Why? It‘s in my nature
죽음. 소멸의 공포마저도 이겨버리는 본성.
너무나 슬픈 대사

전갈의 천성을 알면서도 등에 태울 수 밖에 없었던 개구리

곰곰생각하는발 2019-01-01 19:29   좋아요 1 | URL
보고 나면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영화죠.
저 위의 < 완타 > 도 재미있긴 한데.. 보고 나면 남는 건 없어요..

syo 2019-01-01 19: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2019년 첫 영화를 <크라잉게임>으로 해야겠구나 싶은데요!! 영화에는 진짜 소양이 없어놔서, 올해는 곰발님 픽 덕 좀 보겠슴니다...

곰발님 새해 복 많이 받으소서!!

곰곰생각하는발 2019-01-01 20:53   좋아요 1 | URL
이 영화 좀 오래된 영화인데 생각할거리가 매우 많은 영화입니다.
충격적 반전도 있고 꽤 재미있습니다..
 

 

 




체리와 함께


                                               옛날에 칠레산 체리를 먹다가 그만 (체리)씨를 삼키는 바람에 뱃속에 씨가 자라서 산부인과 병원 대신 자유부인 수목원에서 배를 갈라 어린 체리나무를 낳았다. 당시, 광우병 시위로 인하여 사람이 체리를 임신했다는 놀라운 뉴스는 묻혔지만, 이 동네에서는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이야기'였다. 동네 사람 중에서 젊은 사람들은 나를 " 체리 아빠 ' 라고 불렀고 노인들은 앵두 아빠라고 불렀다.  금지옥엽, 체리를 키웠다.  고생한 보람은 있어서 지난여름에는 체리가 달콤한 열매를 생산했다. " 아빠, 제가 만든 열매들이에요 ! " 체리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아빠, 제가 만든 열매들이에요. 그 열매들이 첫 월급을 탄 자식이 선물한 빨간 내복 같아서 나 또한 설움이 목구멍까지 올라와 체리와 함께 울었다. " 우리 외나무,  체리야 !  이 시베리아벌판보다 추운 서라벌한복판에서 홀홀단신 홀로 살아야 할 체리야. 외롭지 않니 ? " 체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체리를 보자 나는 말했다. "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아무 말이라도 해보렴, 어서 ! " 체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아무 말이나 하려고 애를 쓰느라 애를 먹고 있었다.  오늘은 체리와 함께 술을 마셨다. 술을 어느 정도 마시자 불콰해진 체리'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유재하의 << 가리워진 길 >> 이었다. 체리가 노래를 부르자 나는 술 안주 대신 기타 반주로 체리의 가락에 호응했다. 창을 부르는 소리꾼에 맞춰 장구를 두드리는 고수처럼 말이다. 늘어진 노래 테이프처럼, 슬픈 하울링이 텅빈 방안 가득 채우자 나는 그만 눈물이 앞을 가렸다.



참, 이상도 하지......  기똥차게 노래 잘하는 가수가 부르는 노래는 이상하게도 지겹다. 탐 웨이츠, 밥 딜런, 백현진의 노래가 좋다. 고음 파트를 삑사리로 처리할 때마다 " 인간적 ㅡ " 이란 생각이 든다.  언제였던가 !  충무로 인현시장 노포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데 누군가가 내게 다가와 말했다. " 혹시 앵두 아빠 아니세요 ? " 백현진이었다. 그는 반색을 하며 어린 앵두 소식을 물었다. 나는 그가 앵두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그의 나이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초등학교를 국민학교라고 말하는 세대의 말버릇처럼 말이다.  우리 앵두는 잘 있읍니다. 우럭도 아니면서 무럭무럭 크고 있읍니다.  사슴도 아니면서 서슴없이 뛰어드는 혈기왕성한 어린애 같읍니다. 그가 내게 크라운 맥주를 가득 컵에 따라 주었다. 치어스 ~ 그가 말했고  나는 응답했다. 치어스 ~ 노래가 흘러나왔다.  외로움만이 나를 감쌀 때 그대여, 힘이 되어 주오.


 

 내가 좋아하는 단어는 < 아무 > 라는 대명사'다. " 아무 ㅡ " 다음에 어떤 조사가 붙는냐에 따라 의미가 180도 달라진다. < 아무나 > 와 < 아무도 > 는 전혀 다른 뜻이다. " 아무나 " 는 아무나 할 수 있지만 " 아무도 " 는 아무도 할 수 없다. 전자는 everything이고 후자는 nothing이다. 이처럼 " 아무 " 는 모든 것이면서 동시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 있다.  그것은 당신의 무능이 아니다.  < 하고 싶은 것 > 을 잃어버린 당신에게 이 노래를 추천한다.  올해의 목표를 아무것도 이룩하지 못했다고 화를 낼 필요는 없다.  당신의 무능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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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yonder 2018-12-31 14: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 해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더욱 좋은 일만 함께 하는 새해 맞으시기 바랍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8-12-31 16:40   좋아요 0 | URL
수고 많으셨씁니다.. 건강하십시오 ~

겨울호랑이 2018-12-31 20: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곰곰발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1일1식과 함께 건강한 2019년 되세요!^^:)

곰곰생각하는발 2019-01-01 13:41   좋아요 1 | URL
겨울호랑이 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새벽 5시, 포방터 돈가스집 앞에서  :

 


 

 

 

 

 


1일1식 4년차를 마무리


 


                                                                                                                   올해를 끝으로 일일일식을 한 지 4년을 마무리한다. 내년이면 5년 차이다. 체중 감소는 일일일식 1년 차에 집중했을 뿐이니(나머지 해는 체중을 유지했다) 1식이 내 일상을 변화시켰다고 말하는 것은 모순이다. 먹는 습관을 바꿨을 뿐인데 바뀐 것은 체중 변화가 아니라 사고방식이었다.

쥐와 인간은 음식에 대한 < 새것공포증 neophobia > 을 가지고 있다. 처음 보는 낯선 음식에 대한 거부 반응이다. 어린아이에게 있어서 처음 보는 음식은 모두 혐오 음식인 셈이다. 그 이유는 먹을 수 있는 음식이라 해도 그 사람의 체질과 기저 질병에 따라 어떤 음식은 약이 되기도 하지만 독이 될 수도 있다는 데 있다. 예를 들면 현미와 시금치는 병실 환자의 대표적인 식단이지만 신장이 나쁜 사람에게는 치명적인 독으로 작용하여 장기 복용할 경우 사망에 이를 수도 있다. 그렇기에 인생 경험이 짧은 아이들에게 낯선 먹거리는 위험한 것이다. 쥐도 마찬가지'다. 쥐는 처음 보는 낯선 먹이가 아무리 맛있는 냄새를 풍긴다 해도 극소량만 맛을 보고 대신 맛없는 음식을 배 터지게 먹는다고 한다.

설령, 자신이 먹은 낯선 음식 속에 쥐약이 숨겨 있다 해도 쥐는 극소량만 섭취했기에 몸속에서 독소를 해독할 수 있다. 만약에 이 낯선 음식을 먹었는데도 다음날 배탈이 나지 않으면 그때부터는 어제 먹다 남긴 낯선 먹이를 안심하고 먹기 시작한다고 한다. 그런데 한국인의 밥상은 다양한 음식을 골고루 먹는 것이 올바른 식사법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서 산해진미를 차려놓고 골고루 먹는다. 우리는 뷔페식당에 가면 허리띠를 풀어 놓고는 배가 터지도록 이것저것 먹기 시작한다. 그런데 다양한 음식을 한꺼번에 섭취하게 되면 자기 몸에 맞지 않는 독소가 든 음식을 섭취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배탈이 나기 일쑤다. 하지만 섭취한 종류가 많다 보니 어떤 식재료가 배탈을 유발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렇기에 식단을 간소화해서 먹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내가 오이가 내 몸에 독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발견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김치와 오이만으로 구성된 식단을 차려서 먹었는데 다음날 배탈이 나서 고생을 한 적이 있다. 내게는 오이 성분이 독소로 작용한 탓이다. 음식 종류를 간소하게 차려서 먹다 보니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을 가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경험을 통해서 깨닫게 되는 것은 " 다양 " 하다는 것이 가지고 있는 함정이다. 그동안 나는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었다. 문학은 물론이고 사회, 자연, 과학, 정치와 관련된 책도 꾸준히 읽었다. 1년에 평균 100권 정도 읽었다. 1년에 100권 ?!  우레와 같은 박수를......

하지만 여기에는 꼼수가 도사리고 있었으니, 목표를 실천하기 위해서 거의 대부분을 속독과 다독으로 건성건성 읽어치웠다. 하루에 책 여러 권을 1 / 3, 1 / 4, 1 / 5씩 읽는 방식이다.  주말에는 대여섯 권을 신용불량자가 카드돌려막기하는 것처럼 < 텍스트 돌려 막기 방식 > 으로 읽곤 했다. 이 방식은 책 읽는 지루함을 상쇄시킬 수 있다. 지루하다 싶으면 다른 책을 읽고 지루하다 싶으면 다른 책으로 건너뛰는 것이다. 이러다 보니 내용이 섞이게 된다. " 라스콜리니코프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로 알제리에서 해수욕을 즐기다가 아랍인을 권총으로 쏴 죽였지,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는 말과 함께 ! "  이런 식 ?! 응, 그런 식 ! 지금은 한 가지 책을 매우 느리게 읽는다.

김영민의 << 차마, 깨칠 뻔하였다 >> 라는 에세이는 한 달째 읽고 있다. 문장은 짧으나 사유가 깊어서 가끔 그의 한 문장에서 책 한 권의 사유를 훔치게 된다. 간소하게 차린 식단으로 식사하는 기분이 든다. 저자인 김영민도 1일1식을 한 지 오래되었다고 한다. 다양한 음식을 고루고루 먹는 것이 건강식이 될 수 없듯이 다독이 사유를 넓히는 것도 아니듯이 다양한 경험이 그 사람이 살아온 서사를 풍요하게 만드는 것도 아니다. 여행과 경험의 다양성이 그 사람의 인성을 풍부하게 만든다면 세계 곳곳을 누빈 김우중과 이명박은 성인이 되었을 것이다. 칸트는 오로지 산책을 통해서만 거대한 사고를 확장했고 몽테뉴의 << 수상록 >> 은 다락방에서 쓰여진 책이었다. 먹는다는 것은 곧 생각한다는 것이다.




+

내가 제일 싫어하는 인간 부류는 백종원'이다. 의도적으로 오타를 남발하자면 골목 상권을 파괴하는 주체가 가난한 골목 자영업자 앞에서 눈알을 불알이며 그들의 생사여탈권을 자지우지하는 것을 보면 화가 난다. 그리고 포방터 돈가스집 돈가스를 처먹기 위해 새벽 5시부터 줄을 서서 기다리는, 그 좆같은 대중 취향의 광기도 혐오하는 쪽이다. 소확행을 위해서 돈가스 하나 처먹겠다고 새벽 5시에 가게 앞에서 기다릴 시간에 차라리 사랑하는 사람과 뜨거운 섹스를 해라. 섹스가 돈가스보다 맛이 좋아. < 소확행 > 의 핵심은 경제적 불평등이 낳은 좌절과 절망을 교묘한 방식으로 자위하려는 자기 방어 기제'이자 경제 불황과 미래 불안으로 인해 위축된 소비자의 호주머니를 다른 방식으로 털기 위한 먹거리 자본제의 속성이다. 찐따 새끼들, 맛있는 음식이 너희들을 행복하게 만들지는 않아.



+

요즘은 < 몸의 장소성 > 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예수는 "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 라고 말씀하셨는데  예수는 무거운 짐을 진 자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몸을 그들에게 실내(室內)라는 장소'로 내준 것이다. 타인을 < 안 > 으로 들이는 방식은 환대이고 사랑의 행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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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bomi 2018-12-29 12: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와 생각이 비슷한 부분이 많네요. 저는 골고루 먹으라는 말이 듣기 싫어요ㅜㅜ 매 끼니 단백질(고기) 챙겨 먹으라는 말도 참 듣기 싫고요. 꼬박꼬박 골고루 챙겨 먹었을 때 더 힘들던데... 그리고 그렇게 먹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아무거나 막 먹거나, 하루종일 먹고 있는 것만 같고... 여튼 공감합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8-12-29 12:39   좋아요 0 | URL
각자 몸에 맞는 음식은 다 다릅니다. 위에서 예를 들었듯이 말입니다. 누구에게는 현미가 건강식이지만 누구에게는 현미가 독이죠. 모든 식재료는 약이자 독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종류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몸에서 독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은 음식을 섭취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고... 안전한 먹거리는 자신이 먹었을 때 무탈했던 것을 가려내는 능력이 아닌가 싶습니다..

syo 2018-12-29 13: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먹는 걸 돼지처럼 좋아하다 보니 1일 1식은 정말 일종의 경지로 보일 지경이네요..... 4년 씩이나, 멋있으세요.

2018년도 이렇게 착착 마무리가 되고 있습니다, 곰발님.
올해도 이래저래 감사했구요, 2019년도 잘 부탁드립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8-12-29 13:52   좋아요 0 | URL
알라딘계의 슈퍼스타 쇼 님도 내년에는 장원급제하여 이 나라를 평정하여 주시옵소서 ~

syo 2018-12-29 17:07   좋아요 0 | URL
네?? 슈퍼스타요?? 말도 안 됗ㅎㅎㅎ
그렇지만 저에 대해 뭔가를 기억하시고 계신 것 같아서 살짝 감동......ㅠ

1일 1식에 입문하게 되면, 꼭 곰발님의 자문을 구하겠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8-12-29 18:18   좋아요 0 | URL
진단은 의사에게 약은 약사에게 1식은 곰곰발에게 ~

카알벨루치 2018-12-29 13: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곰곰님 1일1식...4년...우아! 감탄사 백개 찍고 갑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구 늘 건강하십시오!

곰곰생각하는발 2018-12-29 13:59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2018-12-31 12: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2-31 12: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신경숙의 << 외딴 방 >> 에서 보여지는 퇴행적 역사 인식과 오류





​눈을 감으세요 / 모두 눈을 감으세요


ㅡ 징병검사장에서, 윤희상




                                                                                                                                          지니아 울프는 << 자기만의 방 >> 에서 여성 예술가는 독립적 공간을 위한 < 자기만의 방 > 과 경제적 자립을 위해 < 500파운드의 돈 > 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버지니아 울프는 여성이 " 남성 " 으로부터 독립하여 자유롭게 살아가기 위한 장소로 " 자기만의 방 " 을 선정한 셈이다. < 방 > 이 버지니아 울프를 대표하는 장소성'이라면 < 부엌 > 은 신경숙 문학을 대표하는 장소성'이다. 하지만 신경숙이 집착하는 부엌이라는 장소성은 버지니아 울프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자기만의 방이 남성으로부터 독립하고자 하는 잰더 인식에서 비롯되었다면 신경숙의 부엌은 남성들과 결탁하여 스스로 그 욕망에 부역하고자 하는 장소로 퇴행한다.

부엌에서 만들어진 밥은 남성(욕망)을 위해 바치는 보시이다. 자전적 소설로 알려진 << 외딴방 >> 에서 1인칭 여성 화자인 < 나 > 는 정치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사랑하는 오빠를 위해 저녁을 차리는 것을 최고의 행복이라 믿는다. " 나는 정치 같은 건 몰라, 그냥 오빠에게 맛있는 저녁을 차려주는 행복만을 느끼고 싶어 ! " 신경숙은 < 나 > 를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학교를 다니며 집에 와서는 오빠의 저녁밥을 책임지는 부엌데기'로 취급한다. 내가 이 소설이 굉장히 악질적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70년대 말에서 80년대를 관통하는 시대적 배경과 구로공단에 위치한 동남전기주식회사의 열악한 노동 현장이라는 지정학적 위치를 정조준한 소설이면서도 애써 탈정치적 노스텔지어만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주인공 < 나 > 가 노조를 배신하면서 말했던 해도 해도 안 되는 일이 있다( " 해도 해도 안되는 일이 있는 것이다. 우리들의 희망은 소모전이었던 것이다 " , 외딴방 )는 변명은 7,80년대 노동 운동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신경숙의 퇴행적 사회 인식을 엿볼 수 있다. 신경숙이 보기에 7,80년대 노동 운동은 쓸모 없는 소모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녀는 줄기차게 주인공 < 나 > 의 입을 빌려서 노동 운동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을 보내는데, 이 행위 자체가 정확하게 강경 자본가 우파의 " 정치색 " 을 띤다는 점에서 < 나 > 가 강박적으로 정치에는 관심이 없다고 고백하는 언술은 이율 배반에 해당된다.

노동 운동을 단순하게 해도 해도 안 되는 무용한 일로 치부하는 것은 자본가가 노조를 무력화하기 위해서 노동자를 협박하거나 회유할 때 자주 사용하는 언술이라는 점에서 << 외딴 방 >> 에서 주인공 나는 < 외피는 구로공단 여공 작업복을 둘렀지만 내피는 자본가 / 기득권 / 수구 보수의 남성 실크 넥타이를 맸다는 점에서 속내를 숨긴 캐릭터 > 로 읽힌다. 이 얼마나 가증스러운 가면극인가. 그리고 광주 시민을 학살했던 학살자(대통령)의 얼굴보다 싫은 것이 무우국을 끓이려고 사다 놓은 무우가 꽝꽝 얼어버려가지고 칼이 들어가지 않는 가난1)이라고 자신있게 말하는 화자의 논리는 박정희 정권의 독재를 지지하기 위해 내세웠던 태극기 집회 무리의 산업화 논리와 다를 것 하나 없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 외딴 방 >> 에서 주인공은 자신을 탈정치적 존재라고 강조하지만 유감스럽게도 < 나 > 는 그 누구보다도 정치적 입장을 당당하게 그리고 적극적으로 말하는 존재'이다. 이 소설이 문학동네에서 출간되었고 조선일보가 남진우를 앞세워서 조선일보 지면에서 대대적인 작품 홍보에 열을 올렸다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문학동네가 조선일보의 비호 아래 짧은 시간 안에 거대한 공룡으로 성장했다는 사실은 문학판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출판사 문학동네는 한국 문학사에서 1970-80년대 문학을 정치색에 함몰된 저질 프로파간다 문학으로 평가절하하면서 문학은 정치적 이데올로기로부터 독립하여 탈정치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정점에 서 있는 것이 신경숙 작가이고 신경숙 문학의 최고봉이 << 외딴 방 >> 이다. 이 소설 또한 1970-80년대 노동 운동을 평가절하하면서 탈정치화를 선언한 구로공단 여공이 주인공이라는 점에서 문학동네와 신경숙은 동일한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탈정치화를 주장하는 행위 자체가 정치적인 행위'라는 점이다. 인간은 정치적이다. 이 전제를 바탕으로 하자면 인간을 다루는 문학은 필연적으로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탈정치화를 선언한 신경숙 소설뿐만 아니라 그를 옹호한 문학동네 또한 정치적인, 너무나 정치적인 이익집단이다. 비극은 그들이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데 있다. 신경숙은 외부의 일에 간섭하지 말고 눈을 감고 내면의 이야기를 하자고 속삭인다. 눈을 감으세요. 모두 눈을 감으세요.

그럴수록 우리는 더욱 두 눈 부릅뜨고 외부를 바라보아야 한다. 컨베이어 벨트에 목이 잘리는 노동자가 있고 지금도 철탑 위에서 408일 동안 농성을 하는 노동자가 있다. 해도 해도 안되는 일을 하는 것은 쓸모 없는 소모가 아니라  숭고한 일이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는 한때 해도 해도 안되는 일이었다. 신경숙 문학에 침을 뱉는다.



 

 

 

                                    


 

1)

, 오빠. 나는 그런 것들보다 그때 연탄불은 잘 타고 있었는지, 가방을 챙겨들고 방을 나간 오빠가 어디 길바닥에서나 자지 않았는지, 그런 것들이 더 중요하게 느껴져. 그때 왜 그렇게 추웠는지 말야. 오빠, 그때 내가 정말 싫었던 건 (전두환) 대통령의 얼굴이 아니라 무우국을 끓이려고 사다 놓은 무우가 꽝꽝 얼어버려가지고 칼이 들어가지 않은 것 그런 것들이었어. 눈이 내린 아침에 수돗물을 틀었을 때 말야. 물이 얼지 않고 시원스럽게 나와주면 너무 좋았고, 안 그러고 얼어 나오지 않으면 너무 싫고 그랬어. 내가 문학을 하려고 했던 건 문학이 뭔가를 변화시켜주리라고 생각해서가 아니었어. 그냥 좋았어. 문학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현실에서 불가능한 것, 금지된 것들을 꿈꿀 수가 있었지. 대체 그 꿈은 어디에서 흘러온 것일까. 나는 내가 사회의 일원이라고 생각해. 문학으로 인해 내가 꿈을 꿀 수 있다면 사회도 꿈을 꿀 수 있는 거 아니야?


-​신경숙, 외딴방』, 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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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딴방 - 신경숙 장편소설 문학동네 한국문학 전집 9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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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아 다 리    짝 짝 꿍   :




 



저녁(밥)이 있는 풍경




 


                                                                                                                                                                                                           우리 집 곁방에 세 든 총각 아저씨는 젊은 문학도'였다. 우편함에는 정기적으로 그에게 발송되는 우편물이 있었는데 하나는 발신처'가 한국문인협회였고 다른 하나는 명문대 동문 회보'였다.

그 우편물로 미루어 볼 때    :    나는 그가 등단은 했으나 책은 아직 출판하지 못한 미생의 작가'가 아니었을까 추측했지만, 그것을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것은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굳이 말하지는 않았다. 그는 명문대 출신으로 알랑 드롱 뺨치게 잘생긴 사람이었다( 요즘 젊은 세대들은 알랑들롱을 알랑가몰랑, 됐고 ! ).  그래서 어머니는 곁방 총각에게 항상 넉넉한 음식을 제공했다.  나는 문단의 최신 경향을 파악하기 위해서 음식을 싸 들고 곁방 문을 자주 두드렸고 그는 답례로 언제든지 와서 읽고 싶은 책을 마음대로 빌려 가라고 권했다.  먹거리와 책거리를 교환하는 방식이었던 셈이다.  나는 그곳에서 한국 문학의 최신 동향을 파악할 수 있었다. 

우리 집 곁방에 세 든 알랑 드롱은 장정일, 공지영, 신경숙이 문단의 스타로 우뚝 발기하기 전부터 그네 - 들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장정일의 청년작과 공지영의 처녀작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알랑 드롱 덕분이었다. 신경숙의 << 풍금이 있던 자리 >> 가 수록된 단편 소설집도 알랑 드롱이 추천한 책이었다. 이 책을 읽었을 때 느꼈던 내 첫경험은 " 쇼크 " 였다. 그동안 실천 문학이니 참여 문학이니 하며 딱딱한 문장과 서사만 읽다가 ASMR 에 가까운 작게 소곤거리는 예쁜 문장을 접하다 보니 귀르가즘이라는 신천지를 경험하게 되었다.  소녀 감성 충만한 할리퀸의 문학 버전 ?!  하지만 그것은 < 새것 > 이 주는 잠시 즐거운 아우라'였을 뿐  문학적 완성도'에서 오는 웅숭깊은 즐거움은 아니었다.

신경숙의 " 뽀록 " 은 오래가지 못했다.  쉼표( , ) 와 말줄임표 ( ...... ) 를 남발하는 문장을 보면서 점점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신경숙 특유의 < 스타일 > 로 발전하지 못하고 < 웅엥웅 > 으로 몰락한 느낌을 받았다.  음향과 녹음 상태가 형편없어서 자막 없이는 등장인물의 대사를 알아들을 수 없는 80년대 싸구려 국내 방화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  웅 ~~~~~ 엥 ~~~~~~~~~~  웅 ~~~~~~~~~~~~~~    신경숙 소설에서 여성이 스스로 말하기를 주저하게 만드는 기저(基底)는  남성 억압에 의한 결과라기보다는 오히려 남성 체제에 쥐새끼처럼 순응한 결과처럼 보여서 신경숙이 창조하시었던 보수적이며 수동적인 여성-들에게 삭힌 홍어로 그네 목구멍을 뻥 뚫게 만들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소리 질러 , 시바.

예를 들면 소설 << 외딴 방 >> 에는 전경들이 휘두르는 곤봉에 맞아 친오빠가 쓰러지는 장면을 목격한 1인칭 화자인 < 나 > 는 " 나는 정치 같은 건 몰라, 그냥 오빠에게 맛있는 저녁을 차려주는 행복만을 느끼고 싶어 ! " 라고 혼자 독백하는 장면이 나온다. 나는 조선시대 여인네 같은 말투에 크게 당황했다.  국가 폭력 앞에서 갑자기 앞치마 두른 새색시가 되어 뜬금없이 밥 타령을 말하니 어리둥절했다. 그대가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오빠의 저녁상을 차리는 것도 모자라 그 행위에서 행복을 느낀다고 ??!! 이 소설은 매우 퇴행적인데 민중을 배부르게 먹여만 준다면 독재 따위는 눈 감아 줄 수 있다는 태도를 보인다.

, 오빠. 나는 그런 것들보다 그때 연탄불은 잘 타고 있었는지, 가방을 챙겨들고 방을 나간 오빠가 어디 길바닥에서나 자지 않았는지, 그런 것들이 더 중요하게 느껴져. 그때 왜 그렇게 추웠는지 말야. 오빠, 그때 내가 정말 싫었던 건 (전두환) 대통령의 얼굴이 아니라 무우국을 끓이려고 사다 놓은 무우가 꽝꽝 얼어버려가지고 칼이 들어가지 않은 것 그런 것들이었어. 눈이 내린 아침에 수돗물을 틀었을 때 말야. 물이 얼지 않고 시원스럽게 나와주면 너무 좋았고, 안 그러고 얼어 나오지 않으면 너무 싫고 그랬어. 내가 문학을 하려고 했던 건 문학이 뭔가를 변화시켜주리라고 생각해서가 아니었어. 그냥 좋았어. 문학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현실에서 불가능한 것, 금지된 것들을 꿈꿀 수가 있었지. 대체 그 꿈은 어디에서 흘러온 것일까. 나는 내가 사회의 일원이라고 생각해. 문학으로 인해 내가 꿈을 꿀 수 있다면 사회도 꿈을 꿀 수 있는 거 아니야?


-​신경숙, 외딴방』, 245

 


 

​전두환이라는 인물이 상징하는 국가 독재와 국가 폭력에 대한 증오보다 " 무우국을 끓이려고 사다놓은 무우를 꽝꽝 얼어버려자기고 칼이 들어가지 않은 것 ㅡ " 과 " 눈이 내린 아침에 수돗물을 틀었을 때...... 안 그러고 얼어 나오지 않 ㅡ " 는 것이 더 싫다고 고백하는 이 철딱서니 없는 < 퇴행적 고백 > 에 대하여 평론가들은 왜 < 포스트모던 > 하다고 평가했던 것일까 ?  퇴행적 증후와 포스트모던은 정반대의 애티튜드가 아닐까 ?  이 탈정치적 선언 고백은 신경숙 문학의 핵심이다. " 정치의 백치(성) " 야말로 신경숙 문학의 정체성이다. 그녀는 80년대 구로공단 노동 현장을 배경으로 한 소설에서 변화보다는 불변(체제 유지)를 갈망하는 것처럼 보인다. 내가 문학을 하려고 했던 건 문학이 뭔가를 변화시켜주리라고 생각해서가 아니었어.

아침밥을 차려주는 아내를 현모양처의 제 1 덕목으로 여기는 한국 문단의 어르신들에게 주인공 < 나 > 는 완벽하며 아련하고 가녀린 여성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글을 쓸 수 있는 자기만의 방을 소망했다면 신경숙은 요리를 만들 수 있는 자기만의 부엌에 집착한다. 신경숙은 이 소설에서 맛있는 저녁, 꽝꽝 얼어버린 무우, 수돗가 따위의 문장을 통해서 주로 음식을 만들 수 있는 쾌적한 장소에 대한 집착을 보인다는 점에서 이 소설을 " 키친아트(부엌소설) 문학 " 이라 부를 만하다. 많은 평론가들이 이 소설에 빈번하게  나타나는 말줄임표(......)나 말없음표(ㅡㅡㅡㅡ)에 대해 " 고백적 진술 자체가 매우 힘든 것임을 간접적으로 드러내 주는 효과적 서술 방식 " 이라며 호, 호호호호들갑을 떨었지만 내가 보기에는 제대로 된 문장 하나 완성할 만한 필력이 모자라서 말줄임표와 말없음표로 문장을 매조지하는 것처럼 보였다.

역량이 부족하다면 불철주야 < 글 짓기 > 에 문장 연습에 정진하여 실력을 키우기에도 시간이 모자를 판인데 사랑하는 < 밥 짓기 > 로 작가 인생을 낭비하게 되었으니 신경숙 표절 사태는 예측 가능한 참사'가 아닐 수 있다 말 할 수 있는 이 뉘 있으리오 ?  그렇다면 이 모든 게 다 신경숙 잘못일까 ?  90년대 평론은 문단과 출판이 유착된 시기로 장점만 말하고 단점은 말하지 않는 주례사 비평(정실 비평)이 책을 파는 데 도움을 준다는 사실을 평론가들이 쥐새끼처럼 알아차리게 된 시기였다. 이때부터 책 뒷부분을 장악한 것은 평론가가 영혼을 팔아 쓴 작품 해설이었다. 읽다 보면 장광설이 하늘을 찔러 이 논조대로라면 한국 문학은 노벨문학상 1000개 정도는 수상했어야 마땅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좋은 사례가 문학동네 작가상을 수상한 << 동정 없는 세상 >> 에 대한 평론가들의 매문이다. 이토록 형편없는 소설에 대해 " 탈근대적 성장소설 " 이라고 하거나 " 신인답지 않은 작가의 탄생 " 이라고 설레발을 치니 그 수준을 의심하게 된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닥치고 빨아주다 보면 발생하게 되는 참사'다. 화장실 벽 낙서'에나 볼 수 있는 < 졸라 하고 싶어서 불알이 터져버릴 것 같은 고3 남학생 이야기 > 를 두고 탈근대적 ?! 차라리 " 남근대적 성장소설 " 이라고 하거나 " 신인답지 않는 작가 " 가 아니라 신인답지 않은 짜가  " 라고 해라.  응응 한번 했더니 어른이 됐다 ?!  그렇다면 응응 천 번을 한 나는 세계 인류 3대 성인 중 한 명이더냐 ?  성경험과 성장통'을 하나로 엮어서 퉁치는 클리쉐는 이제 지겹다.

섹스는 당신을 어른으로 만들지도 않고 성숙하게 만들지도 않는다. 이런 식의 오럴섹스에 가까운 주례사 비평과 신경숙 문학의 대중성이 맞물리면서 신경숙 문학은 한국 문학을 대표하는 대모'로 우뚝 서게 된다. 신경숙이 한국 문학을 평정하고 있을 때 김정란 시인이 신경숙 문학을 매섭게 비판한 적이 있다. 그때 비평가 일군이 발군을 뽐내며 무차별적으로 김정란을 융단폭격했다. 가히, 그 수준이 눈 뜨고는 차마 볼 수 없어서 눈 감고 커트코베인 수준에 이르렀다. 그 무리의 수장이 바로 남진우였다. 그렇다, 경숙 씨 남편 남진우.  김정란과 남진우는 2000년에도 대차게 싸운 적 있다. 그는 김정란을 두고 " 가장 타락한 형태의 페미니즘이란 구호 " 라고 비판했다.

김정란은 남진우가 자신을 " 남근 달린 여성 " 이라고 표현하자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응수했다.


그(남진우)는 지성과 이론이 남성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 어떻게 지성과 이론을 갖추었다고 여성비평가를 남근 달린 여성이라고 야유할 수 있는 걸까 ? 그러면, 별로 지성적인 것처럼 보이지도 않고 이론으로 무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 남진우는 자궁 달린 남성인가 ? 더더욱 놀라운 것은, 여성비평가가 여성작가를 공격 대상으로 삼고 있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면서 여성의 적은 여성이다 라는 야비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면 하일지, 장정일, 이인화, 박일문을 공격했던 남진우를 보고 우리는 남성의 적은 남성이다 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남진우는 어느 인터뷰에서 이명박 정권 때 젊은 작가 137인이 정권 교체를 바라며 비상시국 선언 성명을 발표하고 한국 작가회의가 지지 성명에 동참했던 사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 한두 명도 아니고 137명...... 요즘 시인이나 작가들의 책 서문을 보면 앞뒤 맥락 없이 노동과 혁명을 이야기해요. 그런 단어들이 튀어나올 때마다 뜬금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 이 고백은 신경숙이 << 외딴방 >> 에서 1인칭 화자의 말을 빌려 " 나는 정치 같은 건 몰라, 그냥 오빠에게 맛있는 저녁을 차리는 것이 행복해 " 라고 했던 세련된 키친아트적 고백과 일치한다. 이런 것을 두고 " 아다리가 짝짝꿍 " 이라고 말한다. 두 사람은 서로 운명적으로 만날 수밖에 없는 아다리 짝궁인 셈이다.

표절 논란 이후, 신경숙은 무엇을 하며 지내고 있을까. 눈이 내린 아침에 수돗물을 틀어을 때 물이 얼지 않고 시원스레 나와주는 따스한 키친아트에서 시원한 무우국을 끓이며 저녁(밥)상을 차리면서 마냥 행복한 삶을 살고 있을까.  삼시세끼 제때제때 밥은..... 먹고 다니는지 궁금하다. 하여, 나는 존경 없이 당신-들1)에게 묻는다.  밥은 먹고 다니냐 ?









​                           


1) 아다리 짝짝꿍 맴버들은 신경숙과 남진우를 포함한 문학동네 편집위원들이다. 철철 브라더스(권희철과 신형철)의 변명을 듣고 있으면 요실금 환자처럼 웃음이 실실 흘러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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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8-12-24 10: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알랑 들롱 뺨치게 잘 생긴 명문대 출신의 작가라는 대목을 보니 김경욱 작가님이 번뜩 떠오릅니다.....
스무 살 즈음, 김경욱 작가님의 무슨 단편집이었던가 책 날개를 펼쳤는데 한 3~4가지 장르의 열등감이 동시에 들더라구요 ㅋㅋㅋㅋ

곰곰생각하는발 2018-12-24 10:25   좋아요 0 | URL
김경욱 작가 님 미남이시죠... ㅎㅎㅎㅎㅎ

akardo 2018-12-24 13: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은 친오빠라 한다면 부모님 사랑을 둘러싼 경쟁자이자 친구 정도로 생각할 텐데. 친오빠에게 밥 차려주기 싫은 어린 여동생들이 더 많을걸요. ㅋㅋㅋ

곰곰생각하는발 2018-12-24 13:59   좋아요 0 | URL
생각을 하면 얼마나 < 나 > 라는 소설 속 여자는 얼마나 남성에 순종적인가요. 여동생의 행복이 친오빠 저녁 차리는 게 행복이라니.. 이러니 한국 문단 어르신들이 좋아하시는 듯...
이 얼마나 시대착오적이며 퇴행적인 판타지입니까... 어이가 없어씀..

곰곰생각하는발 2018-12-24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소설은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오빠에게 저녁상을 차리는 것을 의무라고 말하는 것도 웃긴데
한술 더 떠 저녁상을 차리는 게 행복이라고 말하는 소설 속 화자인 여성은
내가 보기에 남성 욕망을 채우는 판타지의 재현이다.

이 소설이 얼마나 퇴행적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것이야말로 신경숙 문학이 왜 그토록 보수적이며 퇴행적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아니.. 시바, 도대체 오빠 저녁상 차리는 게 행복이라고 지껄이는 저 아름다운 정체성은 무엇이란 말인가.

신경숙이 얼마나 한국 주류 남성 문단에게 잘 보일려고 애를 썼나를 단번에 알 수 있다.
이런 소설이 포스트모던하다고??!!!!!

이게 한국 문학의 위대한 결산‘이란 말이냐.
문학을 배워서 평론 짓으로 먹고사는 놈들이 퇴행적 증후와 포스트모던한 증후를 헷갈린다는 게
말이 되오 ? 응 ??


이 시밤바들아.. 내참.. 더러워서.. 읽다가 토하는 줄 알았다....



2018-12-24 16: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8-12-24 16:48   좋아요 1 | URL
주인공 나이가 16살입니다.... ㅎㅎㅎㅎㅎㅎ 16살부터 19살까지의 이야기인데... 전 도무지 이해가 안 갑니다.
진짜 그지같은 작품이에요. 제가 이 작품과 다른 작가의 작품을 혼동해서 그동안 읽지 않고 있다가 신경숙 최고 걸작이라길래 순수한 마음으로 읽다가 기절하는 줄 알았습니다. 정말 개같은 작품입니다...

수다맨 2018-12-27 15: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차라리 젊은 평론가들이야 (이명원이나 조영일 같은 강골이 아니라면) 출판사와 문예지의 눈치를 안 볼 수는 없으니 신경숙 문학에 대해서 ‘속 시원히‘ 말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도 어느 정도는 듭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외딴방˝에 대한 최악의 비평은 백낙청의 ‘외딴 방이 묻는 것과 이루는 것‘입니다.
예전에 곰곰발님께서도 제 서재에 들러서 이 글(http://blog.aladin.co.kr/719469195/7622927)을 보셨을 터인데 ˝외딴방˝의 성취를 논하고자 한국 문학사의 거성들인 염상섭, 홍명희, 조세희를 호출합니다. 여기서 백낙청은 조세희의 ˝난쏘공˝을 가리켜 문학에 대한 물음의 집요성이나 현실 탐구의 깊이가 ˝외딴방˝에 견주지 못한다고 폄하하고, 염상섭의 ˝삼대˝를 일러서 독자를 편하게 만드는 소설이라고 낮추보며, 홍명희의 ˝임꺽정˝에 대해선 창조적 모색의 긴장이 풀어진다고 비판하지요.
소장 비평가들이야 (신형철 같은 예외를 제외하면) 힘도 빽도 없는 경우가 많으니 시장과 출판사와 ‘어느 정도는‘ 타협하는 성향이 있다고 봅니다. 저는 이 부분에 대해선 (당연히 비판을 포함한) 심도 깊은 얘기가 더 필요하다고 봅니다. 다만 한국 문학의 원로라는 인물이 보다 진중한 안목과 독법으로 젊은 작가의 작품을 비평하지 못하고 위대한 작가들의 작품을 폄훼하면서까지 ˝외딴방˝을 호평하려는 모습은 비판을 넘어서, 비난 받아야 마땅하다는 생각조차 듭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8-12-27 18:31   좋아요 0 | URL
읽은 기억은 나나 다시 읽어보았씁니다.
참 낯 뜨거운 매문이군요. 다시 읽어보아도..
이 양반은 남진우보다 한술 더 떴구려.. 참. 기도 안 찹니다.. ㅎㅎ

이거 하루빨리 수다맨 님이 문단을 접수해야 하는데....

나중에 술 한 잔 해요. 안 한 지 오래되었구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