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에게는 영혼이 없다





김명순은 21세(1917年) 때 동인지 『 청춘 』의 공모에 단편소설 「의심의 소녀」가 당선되어 등단한 근대 최초의 여성작가다. 여성작가로서는 최초로 작품집 『생명의 과실』과『 애인의 선물 』을 발간했다. 그녀가 남긴 작품은 소설 20편, 시 79편, 수필 15편, 평론 3편, 희곡 3편, 번역시와 번역소설 3편이었으니 실로 왕성한 필력이 아닐 수 없다.  또한 그는 일어에 능통한 것은 물론이고 프랑스어와 독일어도 읽고 쓸 줄 알았다고 하니 그 시대에서는 엘리트 문인'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그녀는 불우한 생을 살았다. 그는 데이트 강간의 피해자였는데 이 사실이 알려지자 한국 문단의 남성 문인들은 위로는커녕 조롱으로 피해자를 2차 가해했다. 혼인날 신랑이 세넷씩 달겨 들가봐, 독신생활을 하게 된 독신주의자” 라거나 “피임법 알려는 독신주의자”라는 비아냥이었다. 김명순을 모델로 타락한 여성으로 매도하는 소설이 등장하기도 했으니 김동인의 << 김연실전 >> 이다. 이 작품은 기생 출신의 어머니를 둔 김연실이라는 어릴 때부터 일본어 개인교사와 은밀한 관계를 맺고 어른이 돼서도 수많은 남성들과 육체관계를 맺으면서 그것을 자유연애라고 주장하다가 결국 파멸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후에도 그는 김명순을 “남편 많은 처녀”라거나 “영업적 매녀(賣女)아닌 여인”이라고 비하하고 조롱한다. 김동인의 여성 혐오는 친일 행적과 함께 익히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는 < 영혼 - 여자운동을 봄 > 이라는 글에서 " 여자에게는 영혼이 없다 " 고 주장한다.  읽다 보면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명문이다. 하여, 전문을 올린다. 읽을 때마다 3초에 1번 쌍욕이 튀어나오니 혼자 있을 때 읽기를 권한다.





옛적, 끄리시아(그리스) 학자 새에, ‘계집에게 영혼이 있느냐라는 문제가 토론되었다 한다. 그러고, 그들은, 다만 계집을 낮춰보는 곡심(曲心)으로, 계집에게 영혼이 없다 하였다. 그리스도교가 선전(宣傳)되면서, 너희들은 영()에 살으라고 부르짖을 때에, 계집에게도 영혼이 있다 하였다. 그러나, 이 존재 시인(是認)이 결코, 단정적 그것은 아니었었다. 근대에 이르러서, 아나톨 프랑스(Anatole France), 절대로 여자의 머리를 부인하였다. 계집은, 사내와 같지 못한 것이라 단정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우는 암탉들에게, 대단한 공격은 받았지만……. 여기 대하여서, 나도, 계집의 머리를 사내의 그것과 같이 말할 수가 없다 한다. 아니, 나는, 계집의 영혼의 존재를 (여러 가지 논거(論擧) 아래서) 절대로 부인한다. 장래에도 영혼이 못 생겨난다 함이 아니다, 현재에는 영혼의 씨가 있을 뿐, 영혼 그것은 없다고 단정한다.(참외 씨가 참외가 아닌 것 같이, 영혼의 씨는 영혼은 아니다)

 

대저, 사람의 영혼이라 함은 어떤 것을 가리켜서냐. 아직껏, ‘영혼이라는 것을 똑똑히 찾아내지 못한 그 큰 원인(原因)의 하나는, 그를 찾아낼, 제일 쉬운 근본적 방법을 몰각(沒覺)한 때문이다. 그럼, 그 첩경(捷經)은 무엇이냐. 사람에게는 영혼이 있다 한다, 짐승에게는 없다 한다. 그러고, 사람이라 하는 것은, 계집의 인권(人權)을 멸시한 때부터 칭한 말이니까, 사내를 가리킨 것이라 한다. 다시 말하자면, 사람의 사내게는 영혼이 있고, 짐승에게는 없다 한다. 그러면, 사람의 사내와, 짐승 사이에는, 어떤 구별이 있을까? 엎드려 걷는 것과, 서서 걷는 것, 그것을 구별한 것인가?, 만약 그렇다 하면, 영혼이라 하는 것은, 진실로 변변치 않는 것일 수밖에 없다. 걷는데, 서서와 엎드려서와, 그 구별에, 무슨 그리 큰 좋고 나쁜 차이가 있을까? 사람에게 서서 걷는 것이 좋아 보이면, 짐승에게는 엎드려 걷는 것이, 좋을 것이다. 영혼의 존무(存無) 구별은, 결코 이런 데는 안 있다.


사람이, 사내가, 짐승보다 다른 점은, 모든 재래(在來)의 물건이나 사조(思潮)에 반항하려는 반항심, 그 반항심이 낳은 창조력, 그것이 아닐까? 영혼은, 결코, 우리의 이성으로 판단할 수 없는, 내세에 천국지옥에를 간다는, 그런 신변불사의(神變不思議)한 것은 아닐 것이다. 사람이, 그 더러움과 불편함을 찾던 이 누리를, 차차 편리케 하여 놓고 차차 아름답게 하여 놓은, 그 힘이야말로, 사람의 영혼인 창조의 힘의 산물일 수밖에 없다. 온갖 짐승이, 자연대로 거기서 한 분()의 불편도 감()치 않고 살아올 때에, 다만 사람이, 재래의 것을 불편하다 생각하며, 더럽다 생각하여, 여기, 자기의 모양을 상징으로 한 다른 세계를 창조하려고 들이붓던, 그 힘이, 영혼의 힘이 아니고 무엇이랴? 사람의 영혼이라 하는 것은, 그의 창조력 그것에 다름이 없었다.

 

그러면, 계집에게는 창조력이 없는가? 옛적에도 없었던 것 같이, 지금도 없다. 그에게는 모방력이 있다. 그 모방력은, 원숭이보다 날카로운 것이다. 그들의 그 중 훌륭한 재간, 그들의 그 중 위인(偉人)이 하여 놓은 재간이 모두 모방에 지나지 못한다. 시인은 정서(情緖)가 날카롭지 않으면 안 된다 한다. 그러고 그들은 사내보다 정서에 날카롭다. 그러나 그들에게, 천재의 시인이 과연 있었던가? 워즈-워드(William Wordsworth?)가 있다 한다. 그러나, 그도, 계집이기에 천재라 하지, 만약 그가 사내였다면, 빈약한 우리 조선 문단에서도 낙오자가 되었으리라 나는 생각한다. 음악은 계집의 특재(特才)라 한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훌륭한 음악가가 과연 있었는가? 잠깐 미색으로 일시에, 천재라는 말을 들은 자는 많지만, 그의 특재라는 음악으로서 왁네르와 같이 만고(萬古)에 이름을 남긴 자가 과연 있었는가?


이것을, 이 현상을, “아직껏 너무 구속되어 있어서 그렇다고 하는 사람이 있지만, 최근까지 구속되어 있다가, 십 년 전후 하여 겨우 놓여난 조선 사람의 사내와 몇 세기 전부터 해방되었다는 서양 계집을, 서로, “창조력이라는 안경으로 비길 때는, 그들이 얼마 더 우매(愚昧)한지 넉넉히 볼 수 있다. 이 현상을 어떻게 설명하여야 할까? 암만, 계집의 미력에 끌려서, 그들을 본다 하여도 그들에게, 창조력이 있달 수는 없다. 따라서 영혼도 있달 수 없다. 사내의 가장 무식한 자도 적으나마, 창조력이라는 것이 있으되, 계집에게서는 이것은 볼 수가 없다. 그러나, 누구든 볼 수 있는 현상으로, 계집에게는, 영혼 씨가 있다. 다른 짐승들보다 좀 더 영리하고, 모방력이 날카로운데, 창조력의 씨를 볼 수 있다.


그 씨가, 언제 어음이 나서, 영혼이 될지, 그것은 아무도 모를 일이다. 그들에게는, 날카로운 모방심이 있어서, 오히려 그 모방력으로 말미암아 창조의 씨의 발생을 방해한다. 그들은, 온갖새 사조를 맛보아서, 그것이 자기네에게 해가 없는 것이라 생각하는 사조로는, 물불을 헤아리지 않고 막 진()하는 맹목적 용기가 있다. 가까운 예로 남녀평등이란 사조로(실로는, 이를, 그들은, 남녀동심지어 여체남성(女軆男性)으로 오해는 하였지만) 나아가며, 생리학상 자기네 신체구조는 생각지 않고, 참정권을 다고 어찌 하여라, 덤빈다. 그러고, 이런 것이, 그들의 영혼의 발아를 가장 방해하는 것이다. 그들의 영혼의 발아는, 참 자각(지금과 같은 오해한 자각은 결코 아니다)에 있다 한다. 내가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는 딴데 있지 않다. 이즈음 소위 새여자라는 사람들이, 온전한 자각도 없이 남녀평등을 그릇 깨달아가지고 덤비는 것도, 아니꼽지만 소위 사내라는 사람들도, 그 사조를 오해하여가지고, 여자에게 참정권을 주어라 어쩌라 덤비는 것이 한심하여서 쓰는 바이다


- 「 영혼-여자운동을 봄 」 전문 , 『창조 9호』, 1921.6.



 


김동인이 이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으니 평소 김명순을 곱게 볼 리 없었던 것이다. 그의 작품 속에서 여성 혐오는 광범위하게 나타난다.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 광염소나타 >> 이다. 소설 속 주인공 작곡가 백성수는 방화, 여성 사체 모욕, 여성 시간(屍姦), 여성 살인 같은 범죄를 저지르는 행위를 통해 예술적 영감을 얻는다. 이와 관련해 음악비평가 케이(K)는 “천 년에 한번, 만 년에 한번 날지 못 날지 모르는 큰 천재를, 몇 개의 변변치 않은 범죄를 구실로 이 세상에서 없이 하여 버린다 하는 것은 더 큰 죄악이 아닐까요” 라며 백성수의 행위를 예술을 구실로 옹호한다.

 

그러니까 여성을 살해하고 사체를 모욕하고 시간하는 행위를 예술을 위한 퍼포먼스 따위로 인식하는 것이다. 김동인은 2002년에 발표된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 문학 부문에 포함되었다. 또한, 국가기관 친일진상규명위에서도 그의 이름이 포함돼 있다. 조선일보가 주관하는 동인문학상은 김동인을 기리는 문학상이다. 동인문학상 수상 작가 중에는 6명의 여성 작가가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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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kardo 2018-12-22 1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대 남성작가들은 국내외를 불문하고 어느 정도는 여성 혐오를 당시 시대 분위기상 깔고 있어서 어지간하지 않으면 당시는 다 그랬으니 하고 넘기는 편이지만 김동인은 아주 대놓고 조롱하는 글을 문학이랍시고 써갈겨서 싫어합니다. 광염소나타는 어릴 때 국어시간에 배웠지만 그때도 엽기적이라 생각했었죠. 역시나 여혐하는 작가답게 친일 짓거리도 가장 열심히 한 듯요.

곰곰생각하는발 2018-12-23 23:31   좋아요 0 | URL
문단의 이러한 성향이 그 시대이니 발생할 법한 일은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김명순 사태와 비슷한 일이 김정란 사태입니다.
노혜경, 김정란 시인을 두고 한국 문인들이 엄청 깠죠.... 변한 것은 없습니다.. 평론에 육두문자 써가며 지랄방광하는 거 보고.. 와, 평단도 진짜 시발 개판이구나 했습니다..

akardo 2018-12-24 01:00   좋아요 0 | URL
우리사회가 그런 문제에 관해선 발전이 없다는 걸 반증하는 거죠. 그 일들 이후로도 변화가 없어 미투 운동까지 가게 된 거니. 과연 바뀌긴 할까 암담합니다.

2018-12-22 21: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8-12-23 23:32   좋아요 0 | URL
네에. 이런 폭력적 남성 사회에 만성적으로 노출된 여성의 분노가 폭발한 지점이 메갈, 워마드의 탄생인 것 같습니다..

cyrus 2018-12-23 18: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남성은 영혼이 있는 존재, 여성은 영혼이 없고 육체만 있는 존재. 이러한 생각에는 영혼(이성)을 육체보다 우월하게 보는 서양철학 인식이 반영되어 있어요.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철학이나 윤리를 전공한 남자들은 여성혐오 문제에 둔감한 반응을 보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8-12-23 23:33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이러한 인식은 비단 근대의 어리석음만은 아닐 겁니다... 현대도 크게 변한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드네요..ㅎㅎ

수다맨 2018-12-27 16: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김동인은 잘해야 연구의 대상이 되어야지 찬양의 대상이 되어선 안 된다고 봅니다. 무엇보다 그의 글에 드러난 성향(여혐, 친일 등)이 이러한데 문학사적 업적으로서 기념해야 하는지 의문이 들거든요.
예전에 이명원 평론가의 평론을 본 적이 있는데, 동인문학상은 상당히 정치적인 의도 하에서 만들어졌습니다. 1950년대 한국문단은 남한 출신이자 ˝현대문학˝의 주간인 조연현이 주도하고 있었고 이북 출신의 문인들은 (황순원 정도의 예외적인 존재를 빼면) 상대적으로 소외받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이북 출신이었던 백철, 최정희 등이 당시 ˝사상계˝의 주간이었던 장준하의 지원을 받아서 평안도 출신이었던 김동인을 기념하는 문학상을 만들게 되지요.
문제는 이 상의 초대 심사위원들의 절대 다수(백철, 최정희, 김팔봉, 이헌구, 정비석, 이무영 등등)가 친일 경력이 있던 문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동인의 이름을 딴 상을 만들면서 문학적으로 비판 받아야 할 사안들을 상의 권위를 내세워서 윤색시켜 버렸고, 아울러 심사위원들의 친일 경력을 따지는 것도 문단에선 ‘상당히‘ 금기시되었지요.
이 상은 태생부터 지금까지 문제가 너무나 많다고 생각합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8-12-27 18:27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전 전혀 몰랐던 사실인데 이렇게 알려주어 고맙습니다. 수다맨 님...
글구 보니 수다맨 님 만난지도 꽤 오래이군요.
건강하시죠 ?

수다맨 2018-12-27 19:18   좋아요 1 | URL
네. 그동안 이런저런 일이 있어서 곰곰발님 서재에 오랜만에 들렀습니다. 조만간 한 잔 같이 하시지요
 

 

 

 

 

 

 

 

 

 

 

 

 

 

 

 

 

                                     

 

개새끼로  살다  씹새끼로  죽다   :

 


 

 

 

 

 



못 잊어 개새끼



 



                                                                                                                 젊었을 때 흰색 무지 웃옷(라운드 티셔츠)에 모나미 유성 매직으로 글을 써서 입고 다녔다. 일종의 셀프 레터링(lettering) 패션인 셈이다. 지금도 몇몇 문장은 또렷이 기억한다. " 아버지 씹새끼, 너는 입이 열이라도 말 못해 "

이성복의 < 그해 가을 > 이라는 시의 한 구절인데 옷에 출처를 밝히지 않았으니 사람들은 아버지를 저주하는 패륜아'로 나를 오해했을 것이다. 내가 이 싯구에 매료되었던 까닭은 " 씹새끼 " 라는 욕 때문이었다. 문학에서 시라는 장르는 소설보다 한 단계 위인 형이상학(미학)일 터인데 美와 學의 영역에서 쌍욕이 중요한 시어로 쓰이다 보니 관심을 끌지 않을 수 없었다. 아아, 씹새끼도 미학이 될 수 있구나 !  이 옷을 입고 지하철을 타면 어느 순간 갑분싸'가 되는 타이밍이 온다. 충과 효를 중시하는 사회에서 아버지에게 씹새끼라니..... 너는 입이 열이라도 말 못해 _ 라니...... 도대체 저주와 패륜의 언어를 쏟아내는 저 새끼가 과연 사람 새끼란 말인가 ?

 

 

사람들은 그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곤 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 아버지 " 라는 존재는 죽어야 할 운명이라 믿는다. 길을 가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아라한을 만나면 아라한을 죽이고, 권속을 만나면 권속을 죽이라 했으니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는 것도 당연한 소리'이다. 그리고 나무가 죽어야 나무가 산다. 산불은 숲의 재앙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건강한 숲 생태계를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재앙이다. 키 크고 넓은 아름의 거목은 빛을 독점한다. 식물에게 있어서 빛이 생명이라는 점을 감안하면(어린 나무 입장에서 보면) 산불은 어린 나무에게는 기회가 될 수 있다.

 

한국 사회가 이 모양 이 꼴이 된 이유는 아버지 살해를 주저했다는 데 있다.  아버지 살해는커녕 죽은 아버지를 숭배하는 사회가 되었다.  박정희는 죽었으나 여전히 박정희는 살아 있다.  거목이 쓰러지지 않고는 어린 나무가 자랄 수가 없듯이 아버지를 살해하지 못하면 아들(세대)는 건강하게 자라지 못한다. 우리는 용서와 화해라는 명목으로 아버지를 살해하지 못하다 보니 아들은 빛을 보지 못한다. 그렇기에 아버지 씹새끼, 너는 입이 열이라도 말 못해 _ 라고 말할 줄 아는 용기가 필요하다. 이성복이 씹새끼라는 시어를 끌어왔다면 최승자는 < Y 를 위하여 > 라는 시에서 개새끼라는 시어를 사용했다. 최승자의 개새끼는 이성복의 씹새끼만큼 강렬하다.

아니, 오히려 더 아름답다.

 


 

너는 날 버렸지,

이젠 헤어지자고

너는 날 버렸지,

산 속에서 바닷가에서

나는 날 버렸지



수술대 위에 다리를 벌리고 누웠을 때

시멘트 지붕을 뚫고 하늘이 보이고

날아가는 새들의 폐벽에 가득찬 공기도 보였어.



하나 둘 셋 넷 다섯도 못 넘기고

지붕도 하늘도 새도 보이잖고

그러나 난 죽으면서 보았어.

나와 내 아이가 이 도시의 시궁창 속으로

세월의 자궁 속으로 한없이 흘러가던 것을.

그때부터야.

나는 이 지상에 한 무덤으로 누워 하늘을 바라고

나의 아이는 하늘을 날아다닌다.

올챙이꼬리 같은 지느러미를 달고.

나쁜 놈, 난 널 죽여버리고 말 거야

널 내 속에서 다시 낳고야 말 거야

내 아이는 드센 바람에 불려 지상에 떨어지면

내 무덤 속에서 몇 달간 따스하게 지내다

또 다시 떠나가지 저 차가운 하늘바다로,

올챙이꼬리 같은 지느러미를 달고.

오 개새끼

못 잊어!



                  - <Y를 위하여> 전문

 



 

이성복의 < 그해 가을 > 이라는 시에서 " 아버지 " 와 " 씹새끼 " 는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구조이다. 이것은 한국 사회가 용납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난 배치'이다. 하지만 이성복은 아버지와 씹새끼를 병렬로 배치시킴으로써 시적 의미를 획득한다. 마찬가지로 최승자는 " 개새끼 " 와 " 못 잊어 " 를 연결한다. 이 또한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감정의 배열이지만 그렇기에 시적 서정을 획득한다. 만약에 " 오 개새끼 미워죽겠어 ! " 라고 했다면 이 싯구가 시로써 작동할 수 있었을까 ?  유성 매직으로 옷에 문장을 쓰던 시절에 최승자를 알았다면, 나는 사랑하는 애인에게 오 개새끼 못 잊어 _ 라는 레터링을 한 옷을 입게 하고  나는 아버지 씹새끼 _ 라는 옷을 입고 나란히 길거리를 걸었을 것이다.

개새끼와 씹새끼가 나란히 걷는 모습을 연상하니 그 상상만으로도 이토록 짜릿하구나.  나는 아버지 씹새끼라는 모멸 속에서 죽는 것에 대해 동의하는 것이 다음 세대를 위한 어른의 태도라 생각한다.  또한 옛 애인에게는 개새끼로 호명 받고 싶은 마음도 있다. 개새끼인데 못 잊는다면 그 사람은 훌륭한 연애를 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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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22 07: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8-12-22 08:18   좋아요 0 | URL
어디서 읽었는데...


가족 범죄(예를 들어 아들에 아버지를 죽였다던지..)가 발생하면 한국인은 처음에는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다고 하다가고 마지막에 가서는 처벌하지 않겠다는 탄원서를 쓴다고 합니다.
이런 경우가 거의 99%라고 하네요.

반대로 미국은 가족범죄가 발생하면 처음에는 범죄자 가족을 감싼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용서하지 않는 쪽으로 간다고 하네요...
재판 과정에서 진실이 밝혀지니 그것에 분노하는 것.. 이런 경우가 거의 99%라고 합니다.


결론은 미우나 고우나 그래도 가족이니 용서하자가 한국의 정서이고 미국은 반대죠...
한국은 가족주의이고 미국은 개인주의입니다..

2018-12-22 09: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2-22 08: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2-22 09: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8-12-22 09:16   좋아요 0 | URL
저도 메갈과 워마드가 싸지르는 글에 절대 찬성 안 합니다.
개년들의 글이죠.
그것에 동의한다는 것은 미친 짓이죠.... ㅎㅎㅎㅎ
다만, 왜 저렇게 광기의 글을, 남성에 대한 저주를 퍼붓는가에 대해서
깊은 마음을 가지고 들여다보자는 거죠...
글이 개같기에 저 분노도 고려할 필요 없는 쓰레기다, 라고 무시하지는 말자는 게 제 생각입니다

저 분노에는 필경 한국 남자가 한국 여성에게 저지른 죄악의 근본이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입니다...


전 한국 남자들이 자기는 지금 너무 불쌍하다고 징징거리는 거에
정말 좀.. 뭐라 해야 하죠. 찌질하다고 생각이 듭니다.
왜 징징거려. 응..

syo 2018-12-22 10: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곰발님이 말씀하시는 그 ‘아버지‘와는 결이 완전히 맞아들어가지는 않지만, 저는 실제로 아버지 욕도 하고 제사도 쌩까는 패륜왕입니다.....

갑자기 분위기 고해성사
대체 곰발님 대댓글 어떻게 다시라고 이런 댓글을 남기고 있을까요 ㅋㅋㅋㅋ

그냥 말씀하신 티셔츠를 떠올리다 보니 그만....

곰곰생각하는발 2018-12-22 10:09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 그렇군요. 저는 의외로 아버지와 사이가 좋았습니다. 아버지도 항상 형제자매 중에서 저를 데리고 여행도 많이 다니셨고.... ㅎㅎㅎㅎ

저는 한국인이 좀 가족주의에서 벗어났으면 좋겠어요
결혼했으면 온전히 하나의 우주로 인정하고 간섭을 하지 말앗으면 좋겠다는 생각..
왜 시어머니들, 며느리 집에 가면 냉장고부터 열어보잖아요.
와, 전 이거 폭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짓 좀 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예의가 없어요.. 예의가..

syo 2018-12-22 10:37   좋아요 1 | URL
아버지가 사이가 좋으셨던 곰발님은 아버지 씹새끼 티셔츠를 입고 다니셨고, 음지에서 아버지 욕하고 다닌 저는 남들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아들인 척 하고 살았으니, 아무래도 티셔츠는 제가 받아가야 ㅎㅎㅎㅎㅎㅎ

가족주의 말씀은 공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꼭 며느리-시어머니처럼 사회적으로 형성된 가족이 아니라 유전자로 얽힌 가족 구성원들 간에도 그런 식의 폭력이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벌어지고 또 용인되기도 하잖아요.....

곰곰생각하는발 2018-12-22 10:51   좋아요 1 | URL
공감합니다. 저는 시어머니들이 무슨 권력으로 며느리집 가서 냉장고부터 열어보고는
숙제 검사하는 선생님 같은 표정으로 바라보는지 궁금합니다.
아들이 결혼하면 남의 집 아닌가요 ? 열어보려면 며느리에게 열어봐도 되냐고 물어봐야 하는데
오히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을 이상하게 보더라고요.... 참, 신기해요..
 

 

 

 

 

 

 

 

 

 

노란조끼와 워마드




                                                프랑스 노란조끼 시위가 대한민국에서 벌어졌다면 어떤 일이 발생했을까 ? 시위대가 가게를 약탈하고 자동차를 뒤집어엎는다면 한국 언론은 어떤 자세를 취할까, 그리고 국가는 ?  만약에 이명박근혜 정권 때 노란조끼 시위 같은 일이 발생했다면 국가는 계엄령을 발동했을 것이다. 박근혜 정권이 촛불시위라는 그 평화로운 집회 때에도 계명령을 준비했다고 하니 지나친 상상력은 아닐 것이다. 프랑스 언론이 노란조끼 시위를 보도하면서 보인 태도는 폭력적인 시위'는 대중으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하면서도 시위가 발생하게 된 근본 원인'이 무엇인가를 들여다보아야 한다고 진단했다. 그러니까 프랑스 언론은 노란조끼의 폭력 시위에 대해 원인과 결과를 분리해서 접근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 언론은 노란조끼 시위가 제2의 68혁명 혹은 신자유주의에 저항하는 민중적 봉기라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한국 언론이었다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접근법이다. 대한민국 언론은 시위가 발생하면 제일 먼저 계산기부터 두드린다. 뉴스 속보를 말씀드리겠습니다아, 삼 일째 이어진 금속노조 파업으로 인해 1조 3000억의 국가적 손실이 발생했습니다. 또한 시위 현장 인근 상인들은 잦은 시위로 인해 가게 문을 닫을 지경이라며 파업이 하루빨리 끝나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한국 언론은 시위대가 경제(불평등)가 어려워서 시위를 하는데 반대로 시위를 해서 앞으로 경제가 어려워질 것이라고 진단을 하니 원인과 결과를 도치해서 진단하고 있는 것이다. 시위 도중에 폭력 사태가 발생했다면 그 결과(폭력사태)에 대한 비판을 하되 원인은 따로 분리해서 진단을 해야 하지만 한국 언론 거개는 그렇지 못하다. 워마드 - 메갈 논란도 마찬가지'다. < 밖으로 내뱉은 말 > 이라는 것은 철저하게 결과의 산물이다. 이 결과는 < 안으로 삼킨 마음 > 이 원인이다.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명백하다. 여성이 밖으로 내뱉은 말에 대하여 그것을 강제로 제거하거나 제압한다고 해서 안으로 삼킨 마음마저 도려낼 수는 없다는 점이다. 전자는 가시적 현상학(결과)이고 후자는 내재적 심리학(원인)이다. 프랑스 언론이 노란조끼 시위의 폭력에 대해서는 우려를 표명하면서도 신자유주의에 저항하는 민중적 봉기라는 평가를 내리듯이 한국 여성이 < 내뱉은 말 > 과 < 안으로 삼킨 마음 > 은 따로 분리해서 분석하고 평가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나는 사회적 약자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든 지지할 생각이 있다. 나는 믿지 못하겠지만 변강쇠를 뛰어넘어 가르캉뒤아의 성기 사이즈를 가지고 있으나 당신이 그런 나를 소추라며 놀려도 기꺼이 받아들일 용의가 있다. 당신은 항상 옳다, 언제나 !












■  덧대기


한국인의 여성관은 주로 < 남자는 배이고 여자는 항구 > 라는 시각이다. 여성의 정주성(定住性)을 강조한 것이다. 망부석(望夫石 : 정조를 굳게 지키던 아내가 멀리 떠난 남편을 기다리다 그대로 죽어 화석이 되었다는 전설적인 돌)은 있는데 망모석이 없는 이유이다. 여성은 주로 실(室)과 내(內)와 방(房)으로 묘사된다. 아내를 집사람, 안사람이라고 부르는 것도 여성을 집이라는 장소성으로 규정한 결과이다. 아내라는 말도 집 안쪽이라는 뜻이다. 그러다 보니 여성이 < 안 > 을 벗어나 < 밖 > 에 있으면 남성으로부터 표적이 된다. 한국 남성들이 흔히 여성을 조롱할 때 사용하는 표현인 " 할 일 없으면 집에서 밥이나 하라 ! " 는 말도 여성의 정주성을 강조한 것이다. 김승옥의 << 무진기행 >> 도 이와 똑같은 상황인식을 보여준다. 주인공 < 나 > 가 무진에 내려가 사랑을 나누는 여자 이름이 바로 하인숙이다. 이 이름은 여인숙을 떠올리게 만들고 이름을 도치하면 하숙인(집)을 연상케 한다. 여성의 정체성을 집이라는 장소성에 가두려고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단편은 문체는 훌륭하지만 한편으로는 졸라 고리타분한 남성적 시각을 보여준다. 또한, 이 소설은 서울과 무진을 제국과 식민의 관계로 설정한다는 점에서 불편하다. 서울 사람(화자인 나와 여인숙은 서울에 거주하거나 서울에서 무진으로 내려간 사람이다)은 무진을 계몽이 필요한 장소로 설정하고 무진 사람을 속물로 규정한다. 이런 소설이 문학도들에게 숭배에 가까운 찬사를 받는 것은 우려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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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옥, 손창섭 그리고 페미니즘

 

   

 

                                                                                                                                                                                                                    문학에 문외한인지라 한국 문학의 전설로 통하는 김승옥의 << 무진기행 >> 을 읽었을 때 이 작품이 가지고 있는 문학적 가치를 가름하지 못하는 쪽이다

 

어느 문학 모임에 갔을 때 S 대 국문과 출신이라는 이가 뒤풀이 장소인 호프집에서 이 작품을 " 문체의 혁신과 내용의 전복 " 으로 설명하던데, 나는 그가 내뱉는 장광설이 하도 따분해서 하모니카를 연주하듯이 치킨 닭 모가지를 두 손으로 공손하게 잡은 후에 박힌 살을 세심하게 뜯는 데에만 열중했다발라먹는 이 재미, 아시려나 그는 필사할 한국 문학으로 이 작품을 첫 번째로 뽑던데....... 글쎄올시다, 나는 모르겠습니다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         내가 보기에는 이 작품이 가지고 있는 " 문체의 혁신1) " 은 인정하지만 " 내용의 전복 " 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 무진기행 >> 에서 서른셋인 화자는 제약회사 중역으로 아내의 도움으로 벼락출세한 남자'.

출세를 위한 사랑 없는 결혼으로 읽히는데권태에 빠진 남자는 잠시 휴가를 얻어 세속을 벗어나 무진으로 떠난다. 살면서 좌절을 할 때나 실패를 할 때마다 무진을 찾았다는 화자의 고백으로 미루어 보자면 무진으로 떠난다는 행위는 고개 숙인 남성성'을 회복하려는 수단으로 보인다.  그곳에서 그는 하인숙이라는 처녀를 만나 섹스를 하며 사랑에 눈을 뜬다는 내용그는 < 세속의 명예 > 이냐 < 탈속의 사랑 > 이냐를 놓고 잠시 고민하지만 이내 무진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하룻밤이지만 즐거웠어 ~              내가 이 소설을 읽으면서 느낀 것은 여성'을 단순하게 오로라민 C 같은 활력 보조제 따위로 취급하려는 것이었다.

내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하인숙이라는 이름이다. 이름 순서를 도치하면 하숙인이 된다. 그러니까 여인숙을 떠올리게 하는 하인숙은 하숙집에 사는 하숙인이란 의미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 > 라는 화자가 일면식도 없는 하인숙이라는 여인과 하룻밤 몸을 섞다가 떠나는 장면은 일종의 여인숙에 머물렀다가 1박 하고 떠나는 2일 여행인 셈이다김승옥이 이 소설을 쓰면서 그것을 의도했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설령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도 어쩌면 무의식적 발현의 결과라는 생각이 든다주인공 < > 는 하인숙을 만나 진정한 사랑을 느끼지만 그 이면에는 하인숙을 값싼 하급 여관1) 정도로 취급하려는 작가의 애티튜드를 읽을 수도 있다

 

내가 주목하는 작가는 손창섭이다김승옥의 문체와 문장이 아름다울 정도로 세련되었다면 손창섭은 지식인 특유의 계몽적 태도가 없으며 정직하고 꼿꼿한 느낌을 준다단편 << 신의 희작 , 1961 >> 은 압도적 몰입을 가능하게 만드는 걸작이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 S 는 자신을 손창섭이라고 밝힌 후 이야기를 전개한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치즈코'도 실제로 그의 아내 이름'이어서 한국 문단에서는 이 작품이 자전 소설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소설 내용을 보면 S 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개새끼'. 읽다 보면 이런 개새끼도 없다. 이 소설이 자전 소설( S = 손창섭 )이라면 손창섭은 개새끼'인 셈이다. 그런데 실제로 손창섭은 법 없이도 살 만큼 정직했으며 내성적인 성격에다가 누구보다도 애처가'였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 팩션 / faction " 이 아니라 " 픽션 / fiction " 인 셈이다그가 이 소설에서 말하고 싶었던 것은 한국 남자라는 사실에 대한 자기 혐오'가 깃든 자기 부정이 아니었을까 손창섭 문학은 페미니즘적 시각으로 다시 읽어야 할 매우 중요한 텍스트'특히 << 삼부녀 >> 는 매우 흥미로운 펄프픽션이다.  < 주간여성 > 에 연재되었다가 1970년에 출간된 이 소설은 원조교제와 계약 가족이라는 파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서 막장 세태 통속소설로 치부되고 있지만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면 한국문학 사상 이보다 파격적이며 전복적인 소설은 이 소설이 유일하다. 이 소설을 읽다 보면 뭐, 이런 막장 소설이 있나 _ 하며 한탄하게 된다.

아내는 시누이 남편과 바람이 나서 이혼한 상태이고, 남편은 여대생과 원조교제하는 사이이다. 결국 가족은 해체되어 모두 집을 떠나지만 남자는 떠난 자리를 마이너한 타자 - '로 채운다. 원조교제하는 여대생을 유사 아내로 모셔오고 술집에서 일하는 친구의 딸을 딸자식 역할로 데려온다새로운 가족을 재구성한 셈이다.  과연, 이 나쁜 가족극은 성공할 수 있을까 ?  얼핏 이 소설은 남자의 성적 판타지를 총족시키기 위한 싸구려 통속소설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정반대로 가부장 욕망과 가족 역할의 재배치를 다룬다. 그렇기에 이 소설은 오히려 페미니즘적 시각으로 다시 읽어야 한다고 내가 주장하는 이유이다. 손창섭이 이 소설에서 주장하고자 했던 것은 낡은 가부장제 해체'이다

​그는 국내 유력 문학상을 두 번이나 수상한 뛰어난 작가였지만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다한국 정치에 대한 혐오와 한국 남성(가부장제)에 대한 경멸'이 반영된 것처럼 보인다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그는 한국을 떠나 일본에 정착하며 개명한 이름은 우에노 마사루 였다. 우에노 마사루, 부계의 '을 따르는 한국 (부)성' 거부하고 아내 이름을 따랐으니 모계의 (모)성을 받아들인 것이다완벽한 자기 부정인 셈이다그는 2010623일 향년 88세로 숨을 거두었다. 숨을 거두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말은 아내에게 " 그동안 잘 대해줘서 고맙다 " 는 말이었다.

 

 

 

 

                                    

 

1) 이 소설의 문체와 문장은 정말 모던하다. 완벽하다 ! 안개에 대한 풍경 묘사는 압권이다.

2)  하숙집의 사전적 의미가 값싼 하급 여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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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sulemono 2018-12-20 11: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무진기행>을 두고 ˝내용의 전복˝을 이야기하는 건 과해보이네요. 저 정도를 ˝전복˝이라고 하면 이상의 <날개>같은 작품을 두고는 뭐라 할지...

곰곰생각하는발 2018-12-20 21:59   좋아요 0 | URL
제가 그때 좀 알딸딸한 상황이어서... 뭐 하여튼 전복전복하더군요..ㅎㅎ

2018-12-20 12: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8-12-20 21:59   좋아요 0 | URL
그렇죠 ? 왜 그 이름으로 정했을까? 첫 번째 드는 의문은 그것이었습니다.
왜 작가들은 이름 지을 때 고심을 많이 하잖아요. 상징성도 넣으려고 하고...

잠자냥 2018-12-20 13: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손창섭에 대해 하신 말씀 구구절절 공감하면서 좋아요 7개를 누르고 갑니다.
덧붙여 ‘하모니카를 연주하듯이 치킨 닭 모가지를 두 손으로 공손하게‘에서 미친듯이 웃고 갑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8-12-20 21:58   좋아요 0 | URL
제가 치킨 부위 중에서 닭모가지를 제일 좋아해서..
닭모가지 살을 발라내는 데 시간이 걸리다 보니 다른 녀석들은 날개와 닭다리를 다 먹더군요..ㅎㅎ
전 항상 손해를 봅니다..

cyrus 2018-12-20 17: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얼어 죽을 전복 같은 소리하네... ㅎㅎㅎ 그 국문학과 사람한테 전복죽이나 먹으면서 정신 차리라고 말하고 싶네요.

그나저나 역시 손창섭 마니아다운 글입니다. 페미니즘 소설이 나오는 것도 좋지만, 페미니즘 시각으로 읽을 수 있는 소설들도 많이 알려져야 합니다. ^^

곰곰생각하는발 2018-12-20 21:57   좋아요 0 | URL
제가 아마 손창섭의 첫 번째 마니아일 겁니다. 자랑자랑.. ^^

akardo 2018-12-20 20: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문체는 모르겠는데 내용의 전복은 헛소리 같은데요. ㅋㅋㅋ 우리나라 근대 남성작가들 소설에 흔히 나오는 게 아내 아닌 여자와 그렇고 그런 관계 맺는 거 아닌가요. ㅋㅋㅋ

곰곰생각하는발 2018-12-20 21:57   좋아요 0 | URL
지금 생각하니 내용의 전복성은 아니고 형식의 전복성인가... 뭐, 하여튼... 전복 전복 그랬던 것은 기억이 나네요... 알딸딸할 때 들은 내용이라.... ㅎㅎ

akardo 2018-12-20 22:13   좋아요 0 | URL
형식의 전복이라면 무진에서 옛날 여자를 만나 사람이 확 바뀌어 새 삶을 살게 됐다는 식의 근대 교양 소설에서 벗어나 도로 원래 생활로 돌아갔다는 걸 말한 걸지도 모르겠네요. 그렇게 해석한 글도 본 듯한데 말이죠. 여행을 갔다가 돌아왔어도 주인공의 내면과 외면에서 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도 포함해.

곰곰생각하는발 2018-12-20 22:39   좋아요 0 | URL
이 소설 보면 무진 사람들은 다 멍청하고 속물이에요....
이 소설에는 서울에서 살던 사람이 딱 둘인데 하인숙과 주인공 남자입니다..
이 양반 둘이 주구장창 무진 사람들 속물근성에 대해 말하는데
전 이게 엘리트주의의 계몽주의적 태도로 보여서 읽는 내내 불편했던 기억이 납니다..
뭔가 더럽게 좀 가르치려고 해요..


반면에 손창섭 소설에는 그런 게 전혀 없습니다. 문체는 투박해도 문체가 꼿꼿해요..

akardo 2018-12-20 22:45   좋아요 0 | URL
오래전에 읽어 자세힌 기억 안 나는데 무진사람 속물근성 흉도 봤었군요. 아니 제가 보기에 속물근성은 주인공 양반이 제일 강한데 말이죠. ㅎㅎㅎ 손창섭 소설 재미있게 잘 봤었는데 다시 찾아봐야겠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8-12-20 22:50   좋아요 0 | URL
제가 보기엔 자기들도 속물이면서 무진 사람 속물이라고 흉을 보고 있죠...ㅎㅎㅎㅎㅎ
뭐, 그게 작가의 의도 같기도 하고.... 일단, 전 주인공이 꼴도 보기 싫어서..
이런 인간 질색입니다. 겉으로는 꽤나 정직한 척하지만 속은 더럽게 속물인...

akardo 2018-12-20 22:56   좋아요 1 | URL
주인공에게 감정 이입은 안되는 소설이었죠. ㅎㅎ 막장드라마에서 원래 여자 배신하고 부잣집 여자와 결혼해놓고선 불행해 웅엥웅거리는 주인공 같아 비호감이었는데.ㅋㅋ

곰곰생각하는발 2018-12-20 23:41   좋아요 0 | URL
제가 진짜 이 소설을 이해 못하는 대목이


딱 보면 남자가 출세를 위해서 제약회사 회장 딸과 결혼하잖아요.
이 사람이 곧 전무 승진을 합니다. 주주총회가 열리는데 아내가 잠시 무진 내려가 있으라고 하죠
아빠와 둘이서 일을 잘 마무리짓겠다고.. 아마도 논란이 있겠죠
남자는 무진으로 가요. 그리고는 종종 서울 일을 궁금해 하는데
회장이 주주총회에서 자신을 전무로 승진하려는 것을 상상하는데
하여튼.. 주인공은 그 장면이 좀 역겹다,.. 뭐 그런 마인드를 가졌더라고요..
속으로 제가.. 이나 시발놈, 출세에 눈이 멀어서 사랑 없는 결혼을 한 주제에
장인이 전무 추진하면 감사해야지.. 웬 정의로운 코스프레를 하지 ?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akardo 2018-12-20 23:52   좋아요 0 | URL
위선적이죠. ㅎㅎ한국 드라마에서 자기보다 잘난 집 여자를 만나 결혼한 남자가 여자가 시댁을 무시한다느니 어쩌고하면서 그래서 나는 불행해 뭐 이러는 거 보는 느낌입니다.
 

 

 

 

 

 

 

 

 

 


 


 

​                                       


꽃  으  로  도     때  려  라   :



 




위플레쉬, 심석희 그리고 백종원



 

400번의 매질이 아이를 어른으로 키운다

- 프랑스 속담 




 


1등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각오가 되어 있는 앤드류는 음대 신입생이다.  그는 최고의 재즈 드러머가 되기 위해 플레쳐 교수가 이끄는 밴드에 들어간다. 그의 교수법은 폭언과 학대'이다. 그에게는 " 가학( 苛虐 : 몹시 심하게 학대함 ) 이 곧 가학( 苛學 : 회초리 교육법 ) " 이다.  그대 ↗  앞에만 서어면 ~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 아니라 똥 ! 덩 ! 어 !  리 ! 

이 영화는 한국 평단과 관객 모두에게 극찬에 가까운 칭송을 받으며 흥행에 성공한다.  왜 ?!  미치광이 선생이 휘두르는 사랑의 채찍질(whiplash) 이야기.  한국 사회에서는 너무나 익숙한 서사이기 때문이다(반대로 유럽 국가에서는 흥행에 실패한다. 사랑하기 때문에 때려야 한다는 이야기에 유럽인은 1도 이해 못해).  온갖 인간 군상이 잡다하게 모이는, 정치색이 다종다양한 한국 평단이라면 한 명쯤은 " 때려야 말을 듣는다 " 는 S - 서사와 " 맞아야 정신 차린다 " 라는 M - 서사에 대해 불편한 시선을 보일 만하지만 한국식 교수법에 익숙하다 보니 삐딱한 시선으로 이 영화를 보는 이'는 없었다.  평소 진보적 PC함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이도 모두 다 가시는 길에 영광있으라이 _ 라고 말하니  나는 " AC , 이게 뭐야 ~  " 

나는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앤드류의 그 후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가정 폭력에 시달리는 아이가 어른이 되면 가정 폭력의 주체가 되듯이 플레쳐 교수법으로 최고가 된 앤드류도 나이가 들면 플레쳐와 똑같은 폭군이 되어 학생들에게 위플레쉬하지 않을까 ?  아따, 앤드류보다 플래쳐 교수가 더 매력있다아 ~   매 맞는 아이가 악에 받쳐서 1등이 되어가는 이야기를 보며 너무나 감동해서 물개 박수나 치고 있는 영화관 풍경을 보며 속으로 외쳤다. 지랄하고 자빠졌네. 이 영화에 열광했다면 당신은 조재범 코치와 심석희 선수의 애증이 섞인 십 년 풀 스토리에 감동해서 기립박수를 쳐야 한다. 조재범 코치는 플레쳐 교수'다.

심석희의 고백에 의하면  :  어릴 때 조재범 코치의 폭행으로 인해 새끼손가락이 부러졌으며 그것이 일상이었다고 하니 그 역경을 극복하고 세계 정상에 우뚝 선 심석희는 앤드류인 셈이다.   나는 백종원의 << 골목식당 >> 을 볼 때마다 플레쳐 교수가 오버랩된다.  골목식당 제작진은 < 돌아온 탕아 > 라는 성서 이야기를 재현할 인물을 찾는다. 제작진 레이더망에 걸려든 이가 바로 홍탁집 아들이다.  하는 꼴을 보니 건들건들하고 게으르며 늙은 노모 밑에서 돈이나 타 쓰는,  한심한 한량이다.  땀 흘리지 않고 먹고산다는 의미에서 불한당(不汗黨  :  아니 불, 땀 한, 무리 당. 땀 흘리지 않고 사는 무리라는 뜻이다) 이다. 이런 캐릭터는 백종원이 폭언하기 좋고 학대하기 좋다.

제작진이 멍석은 깔았으니 한국의 플레쳐 교수인 백종원만 등장하면 된다. 가차없다.  보다 보면 기가 찬다.  그는 홍탁집 아들에게 말한다. 똥 !  덩 !  어 !  리 !  1회를 보면 마지막 50회의 결말을 알 수 있는 막장 드라마처럼 우리는 이 이야기의 끝을 알 수 있다.  영화 << 위플레쉬 >> 에서 플레쳐 교수는 게으르고 약해빠진 사람들에게 항상 같은 말을 한다. "  어이, 시밤바 !  내 말 잘 들어. 세상에서 가장 쓸데없는 말이 그만하면 잘했어 야 "  백종원은 플레쳐 교수의 교수법을 그대로 따른다. " 그만하면 잘했슈 _ 라고 내가 말할 줄 알았쥬 ? " 백종원이 채찍질을 할 때마다 홍탁집 아들은 좌절한다.  하지만 이 악물고 그 모욕을 견딘다.  그리고 결말은 개과천선한 탕아'다.

사람들이 감동해서 백종원 선생을 향해 기립박수를 칠 때 나는 속으로 외쳤다. 지랄하고 자빠졌네.                 문득, 의문이 들었다.  만약에 백종원 교수의 교수법을 거부한다면 그 사람은 반드시 실패하게 되는 것일까 ?  훌륭한 사례가 있다.  충무로 골목 편에서 백종원의 교수법에 반기를 들어 백종원 레시피를 거부한 출연자가 있다.  바로 충무로 국숫집'이다.  백종원 교수법이 옳다면 충무로 국숫집은 파리만 날려야 한다.  정말 그럴까 ?  현재 충무로 국숫집은 주말인데도 불구하고 점심시간이면 줄을 서서 먹어야 할 정도로 장사가 잘 된다. 이 사실은 백종원 레시피'가 죽은 자(가게)도 벌떡 일어나게 만든다는 기적의 레시피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다.

그것은 백종원이 가진 전지전능한 능력 때문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방송의 힘'이다. 내가 보기에 << 위플레쉬 >> 이야기나 << 심석희 >> 이야기나 << 홍탁집 아들 >> 이야기는 서로 장르가 다를 뿐 동일한 이야기'다. 폭언과 학대가 성적 향상에 영향을 주었다고 해서 그것을 정당화한다면,  당신은 << 조재범과 심석희의 애증 십 년 풀-스토리 디렉터즈컷 버전 >> 에도 공감해야 한다.  플레쳐, 조재범, 백종원은 동일인물'이다. 삼위일체 ㅡ 놀랄 일은 아니다. 영화 << 불한당 >> 의 그 유명한 대사로 매조지하자. 셋 다 모두 좆이나 뱅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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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18 23: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8-12-19 21:20   좋아요 0 | URL
교육과 조련의 차이라는 지적이 확 마음에 와닿습니다.. ^^

문득 저는 < 교육과 교련 > 의 차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한국 문화는 확실히
군사문화의 잔재가 매우 깊이 박힌.... 아, 요즘은 교련 과목이 사라졌죠 ?

저도 백종원 음식이 맛있다고 느껴본 적 1도 없습니다.
종종 사람들 때문에 할 수 없이 백종원 가게 몇 번 가본 적 있는데
당최 맛의 우월성을 못 느끼겠습니다. 술 마시기에는 더럽게 분위기 없는 가게라는 인식만 남았습니다..

서연오 2018-12-19 14: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백종원씨 개인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인데, 요즘 인터넷 돌아다니다보면 이 사람이 한국에서는 거의 신처럼 대접받고 계십니다. 백종원씨의 사람됨됨이를 떠나서(사실 백종원씨가 사적으로 좋은 사람이냐, 혹은 그렇지 못한 사람이냐는 전혀 관련 없는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보통 이런 얘기 하면 사람들이 혼동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이런 대답들을 하곤 합니다 ˝왜, 백종원이 부럽냐?˝) 그가 이렇게 추앙받는 사회는 그만큼 불행할 수 밖에 없음을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곰발님이 항상 말씀하시는 한국사회에 깊게 내제된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와 관련지어서는 물론이고, 저는 더 나가서 백종원식 ‘사이다‘에도 문제를 제기하고 싶네요. 소위 사이다라는 것이 복합적으로 구성된 하나의 문제를 평면으로 뭉게버리고, 거기다가 간단명료하지만 강경한 해결책을 제시하는데 이게 비단 음식점이 흥하냐 망하냐의 차원이라면 그리 큰 문제가 아니겠지만 스케일이 커져서도 사람들의 생각속에 그대로 자리잡고 있는걸로 보이거든요. 그래서 요즘 네티즌들이 PC같은걸 학을 때는겁니다. 복잡한것들은 모르겠고 자기들이 생각하기에는 굉장히 심플한 해결책이 보이니까요. 그래서 걔들은 PC강조하는 사람들을 파시스트라 부릅디다. 마치 페미를 나치라 부르듯이.. 왜 유럽이나 북미가 그렇게 엄격하게 PC를 들여왔는지는 안 찾아보는 모양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8-12-19 21:27   좋아요 0 | URL
저도 황교익씨 개인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사람인데 어찌하다 보니 황교익 지지자가 된 모양새이지만 개인적으로도 황교익에 대해 우호적인 사람은 아닙니다.

위에서도 지적했듯이, 저는 위플레쉬의 플레쳐 교수법을 교육이 아닌 교련‘으로 보았습니다.
일종의 군사문화적 강압인데. 이것에 대한 지적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익숙하다는 거죠. 성공만 한다면 스승의 모욕과 학대는 교육이 되는 겁니다.
같은 이유로 백종원 서사도 그런 것 같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정치적 소양 없이는 그 어떠한 에티켓도 애티튜드도 없다고 봅니다.
모든 훌륭한 태도는 기 기본이 PC잖아요. 그런데 그것을 무시하면 엉터리가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