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 곡 성
1. 여곡성, 2018
요즘, 남들이 " 망작 " 이라며 저주를 퍼붓는 영화들을 찾아서 보는 악취미가 생겼다. 영화를 보기 전부터 작심하고 보는 일'이라 안구가 썩는 고통도 즐거운 마음으로 " 눈 뜨고는 차마 볼 수 없는 영화 " 를 눈 감고 본다, 눈 뜨고 보나 눈 감고 보나 거기서 거기니까 ! << 안시성 >> 같은 쓰레기 영화를 얼마나 기쁜 마음으로 보았던가. 욕하면서 보는 막장 드라마처럼 망작 영화도 욕하면서 보는 재미가 있다. 영화를 보는 내내 극장 문을 뻥, 발로 차고 나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야 티켓값이 아깝지 않다. 마음속에서는 온갖 독설이 쏟아진다. 살다 살다 이런 개 같은 영화는...... 그것은 일종의 모욕을 당하면서 희열을 느끼는 메조흐적 관객이라 할 수 있다. 아흐, 마조흐 ! 아흐, 마조흐 !! 소비자가 왕인 시대에 욕쟁이 할머니집에서 욕먹는, 그 유명한 이명박의 대통령 선거 광고처럼 형편없는 영화에 관객으로서 모욕을 당하면서도 나는 혼자서 낄낄거리며 웃게 된다. 아흐, 마조흐 ! 오늘은 악평 자자한 << 여곡성, 2018 >> 을 보며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싶었으나 목에 담이 걸려서 하루 종일 누워 있었다. 종영이 되기 전에 하루빨리 저 그지같은 영화를 봐야 할 텐데, 하는 조바심이 들었다. 개인적으로 형편없는 것들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 낡은 노포를 찾아 문어처럼 밤거리 술집을 찾아다니는 이유도 추레한 것에 대한 애정 때문이다. 만약에 당신이 작가 지망생이라면 도스토옙스키'보다는 러브크래프트 문학이 더 많은 용기를 줄 수 있다(러브크래프트 문학이 형편없다는 소리는 아니다. 러브크래프트는 위대한 작가이다. 다만, 문장만 놓고 보면 러브크래프트는 아마추어다). 그래서 나는 B급 무비'가 좋다. 에드 우드'에게 경배를. << 여자들 >> 이라는 소설에서였나 ? 찰스부코스키는 예쁜 여자를 보면 좆이 서질 않는다는 문장을 남긴 적이 있는데 묘하게 동의하게 되는 지점이어서 고개를 끄덕인 적이 있다. 결핍 없는 미학은 " DESIGN " 이지 " ART "는 아니다. 영화도 그렇다. 형편없는 영화는 나를 위로하고 용기를 준다. 여곡성, 꼭 보고 말리라 ~ (어금니 꽉 물고 외치리라) 기다려라, 내가 너를 금이빨 빼고 모조리 씹어 먹어주마1) !
2 여곡성, 1986
옛날에는 여름이 되면 << 주말의명화 >> 시간에 납량 특집 시리즈를 상영하곤 했다. 폭서의 계절에 혹한의 공포를 선사하겠다는 편성 목적이었다. 토요일 주말 저녁이 되면 우주 로봇 건담조차 간담을 서늘케 한다는 공포 영화가 매주 상영되었다. 그때 상영했던 한국 공포 영화가 << 월하의 공동 묘지, 1967 >> , << 깊은밤 갑자기, 1981 >> , << 여곡성, 1986 >> 이었다. 거웃이 솜털처럼 야들야들 자라던 중학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무덤이 홍해처럼 쫙 갈라지며 화장실에서나 달았을 빨간 알전구 불빛이 세상 밖으로 번지는 월하의 공동묘지를 보며 오금이 저려서 오줌을 쌀 뻔했던 기억이 난다. 므, 므므므므섭구나. 이 납량 특집 한국 공포 영화 시리즈 기획에서 발군은 << 여곡성 >> 이었다. 눈에서 피를 흘리는 신씨 부인의 데스마스크'는 그 어떤 표현으로도 형용할 수 없는 공포를 선사했다. 신씨 부인이 닭 피를 마시다가 낌새를 차리고 갑자기 뒤돌아보는 장면에서 오금보다 오줌이 먼저 저리는, 믿지 못할 신체 반응을 경험하기도 했다. 오금을 저린다는 것과 오줌을 지린다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곤경이라는 사실을 알려준 영화였다. 므, 므므므므섭구나. 어디 그뿐인가. 대감이 지렁이 국수를 먹는 장면은 내가 지금껏 보았던 모든 병맛 장면을 통틀어서 두 번째로 좋아하는 씬이다(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존 워터스 감독의 << 핑크 플라밍고 >> 에서 디바가 길거리에 떨어진 개똥을 먹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배우는 실제로 개똥을 씹어먹는다. 예술을 위하여 개똥에 쌈 싸먹는 장면을 보면 예술은 똥이라는 앤디 워홀의 말이 어느 정도 일리는 있다는 생각이 든다). 대감은 귀신에 홀려서 그릇에 담긴 지렁이를 국수로 착각하고는 맛있게 먹는다. 이 장면의 리얼리티를 글로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금 이 순간도 마찬가지다. 리얼리티란 가짜를 진짜처럼 연기할 때 발생하는 효과일 뿐이니 말이다. 단장이 끊어지면서 몸부림치는 지렁이 장면은 소름 그 자체였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장면에 사용된 지렁이는 미니어처가 아니라 실제로 살아있는 지렁이였다고 한다. 배우는 열정을 불태워 혼신의 연기를 펼친 것이다. 그 후에도, 나는 세 편의 영화를 다시 보곤 했다. 그 옛날처럼 오금보다 빨리 오줌을 지리지는 않지만 여전히 나는 한국 공포 영화를 자주 본다.위 세 편의 무대는 대부분 < 넓은 집 > 이다. 사랑채와 별채가 있고 뒷간과 넓은 마당이 있는가 하면 현대극인 << 깊은밤 갑자기 >> 는 이층집이다.







▶ 1981년에 만들어진 공포영화 << 깊은밤 갑자기 >> 의 무대가 되는 집이다. 넓은 정원에 창고로 사용하는 다락까지 계산하면 3층집에 가까운 대저택의 위용을 과시한다. 감독은 하우스호러 영화 장르에서 공간이 차지하는 효과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영화가 시작하면 감독은 공간의 크기를 강조하기 위해 카메라가 원을 그리며 팬한다. 하긴, 코딱지 만한 집구석에서 무슨 얼어죽을 공포영화인가 !
생각해 보면, 단칸방에서 귀신이 나오는 영화를 찍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공포영화의 핵심은 인간이 아니라 공간이 주는 공포'다. 공간이 넓으면 넓을수록 감독은 더 많은 공포 효과를 효율적으로 만들 수 있다. 그렇기에 모든 공포 영화는 기본적으로 부르주아적이다. 한국 영화가 공포 영화 장르에 취약한 이유는 한국인이 대부분 열악한 주거 환경에 노출되어 있다는 데 있다. 기껏해야 30평짜리 아파트 공간에서 무슨 얼어죽을 공포를 선사할 것인가. 악취가 심한 고시원 방이 알고 보니 옆 호실 투숙객이 고독사해서 발생한 냄새였다는 한겨례 기사를 읽은 적 있다. 사실, 진짜 공포는 이런 것인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