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근우의 황교익 비판






                                                                                                                   사이비 목사는 신도들 앞에서 누운 병자를 일으켜세우거나 몸속에 악귀가 들어와 기세등등한 사람을 제압하는 쇼를 펼친다. 목적은 간단하다. 자신이 전지전능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 속임수는 가짜 목사에게 권위를 부여한다. 그 이후는 만사형통이다. 쇼가 성공하면 뭐니 ?  그렇다, 쇼미더머니'다. 헌금 많이 하면 천국 갑니다. 믿슙니까 ?  (일동 괄약근을 오므라이스처럼 바짝 오므리며) 네에, 믿슙니다아아아 ~                       경향신문 토요판 특별 기고 칼럼 << 황교익의 ‘백종원 비판’, 논리적인 것 같지만 인문학으로 포장한 독선 >> 에서 칼럼리스트 위근우는 백종원 - 황교익 논란에서 황교익을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 현재의 방송 환경에서 지식인들은 서사 과잉의 유혹에 빠지기 쉽다.  앞서의 < 질문 있는 특강쇼-빅뱅 > 을 비롯해 OtvN < 어쩌다 어른 > 이후 등장한 수많은 인문학 강연쇼는 연단 위의 강사에게 절대적 권위를 요청하는 동시에 부여하며,  이런 유혹 앞에선 꽤 현명한 전문가들도 자기 제한의 미덕을 잃는 경우가 많다 "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이 칼럼이야말로 논리적인 것 같지만 인문학으로 포장한 독설'이란 생각이 든다. 절대적 권위를 부여받은 쪽은 황교익이 아니라 백종원이다. 골목식당 제작진은 백종원이 화려한 쇼를 펼칠 수 있도록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이 프로그램에서 백종원은 음식의 맛을 보는 순간 그 식당의 문제점을 단박에 알아차리는 절대 미각을 가진 캐릭터로 설정되어 있다. 예를 들면, 백종원은 함박스테이크 맛을 보고 나서 주인(골목식당 뚝섬 경양식 편)에게 질이 나쁜 냉동 고기를 사용한다고 지적한 후 식당 냉장고에 있는 고기를 눈으로 보며 고기가 오래되었다고 인상을 찡그린다. 매의 눈이요, 장금의 혀'다. 햐, 우리 백 선상님은 맛에 대해서는 박사여, 박사 !            

시청자는 하나를 보면 백을 아는 종원의 신통력을 신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백종원의 지적은 사실일까 ?  백종원의 지적과는 달리 경양식 식당 주인은 냉동 고기가 아니라 냉장 고기를 사용했고, 질 나쁜 고기가 아니라 1등급 고기를 사용했다. 또한 오래된 고기가 아니라 포장된 지 2일 이하인 신선한 고기'를 소량 구매해서 신선도를 유지했다. 이 식당에 고기를 납품하는 관계자는  “예전부터 같은 (1등급, 냉장, 포장된지 2일 이하의)고기를 납품하고 있다”고 밝혔다.  백종원의 지적은 전부 오답이었지만 방송에서는 모두 정답으로 둔갑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악마의 편집요, 앉은뱅이를 걷게 하는 기적이다. 이 속임수(악마의 편집)는 백종원에게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한다.

말에 권위를 부여받으면 기적을 연출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백종원은 대전 청년구단 편 방송에서 막걸리에 물을 탔을 뿐인데, 시음에 참여한 사람들은 모두 다 물에 탄 막걸리 맛이 더 진해졌다고 고백한다.  백종원이 요술을 부린 것일까 ?  그럴 리는 없다. 술에 물을 탔는데 알코올 도수가 더 높아질 리도 없다. 이 모든 기적은 바로 권위라는 히로뽕이 만들어낸 착각일 뿐이다. 백색가루, 바로 백뽕의 기적이다.  그 이후는 만사형통이다.  쇼가 성공하면 뭐니 ?  그렇다,  쇼미더머니'다.  골목식당 제작진은 백종원에게 전지전능한 능력과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서 악마의 편집을 통해서 식당 주인을 악마로 만든다. 악마는 프리다 대신,  상처를 입는다.

위근우 논리대로라면 서사 과잉에 빠지기 쉬운 사람은 황교익이 아니라 백종원(의 골목식당)이다. 또한 보다 더 강력한 권위를 부여받는 쪽도 백종원이다. 백종원에게 달라붙은 방송국 스텝의 인원을 보라. 겨 묻은 개'에게 더럽다고 손가락질을 할 수는 있다.  그런데 똥 묻은 개와 비교한 후 겨 묻은 개에게만 더럽다고 지적하는 것은 논리 모순이다. 그렇기에 위근우 칼럼은 졸라 엉터리'다. 엉터리 칼럼을 특별 기고 형식으로 포장하여 글에 권위를 입히는 것은 소음이다. 듣는 사람에게도, 우선 본인에게도.  


   


+

위근우는 칼럼에서 다음과 같이 황교익을 비판한다    :   그렇다면①  백종원의 등장 이후 한국인의 당 섭취가 위험한 단계로 올라갔는가?  ② 닭볶음탕에 설탕 세 숟가락을 넣는 백종원의 사람 좋은 미소와 설탕 여덟 티스푼이 들어간 청량음료 광고에서 청량함만을 강조하는 광고모델의 산뜻한 이미지 중 무엇이 더 단맛에 대한 경각심을 해제하는가?   정말로 백종원 신드롬은 10대만을 중심으로 생겨났는가?  황교익의 가설은 꽤 그럴싸하지만 이런 질문들에 대해 책임감 있는 답변을 해주진 않는다. 아니 더 정확히는 이들 질문 앞에서 쉽게 좌초할 정도로 허술하다. 하나의 이야기로서는 재밌지만 검증에 취약한 가설을 우리는 전문용어로 ‘구라’라고 부른다.


1.

위근우는 백종원의 등장 이후 한국인의 당 섭취가 위험한 단계에 올라갔다는 가설을 사실로 증명할 수 없기에 " 구라 " 라고 정의를 내린다.  우선, 가설 = 구라' 라고 뻔뻔하게 말하는 " 생각의 점프컷 " 에 놀라게 된다.  가설은 과학의 영역이고 구라는 사기의 영역이니 교집합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의 주장이 맞다면 신이 존재한다는 가설도 과학적 검증에 취약하기 때문에 구라'다.  생구라요, 개구라다.  종교를 구라의 영역으로 인식하는 위근우의 과학적 태도가 자못 당당하다.  그리고  황교익은 < 백종원의 등장 이후 한국인의 당 섭취가 위험한 단계에 올라갔다 > 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 한국인의 당 섭취가 위험한 단계인 상태에서 백종원의 등장 > 이 우려스럽다는 것이다.  그런데 위근우는 도치법을 사용해서 독자를 호도한다.  <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를 찍으면 남 > 이 되지만 < 남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를 찍으면 냠 > 이 되지 님이 되지는 않는다. 그렇지 않은가 ?


2.

그는 백종원의 설탕 세 스푼과 청량음료의 여덟 티스푼'을 비교한 후 누가 더 나쁜가_ 라고 묻는다. 쉽게 말해서 똥 묻은 개(설탕 여덟 티스푼)도 있는데 왜 겨 묻은 개(설탕 세 스푼)에게만 신소리를 하느냐고 묻는 뉘앙스'다. 그런데 이 논조는 그대로 위근우를 비판하는 논조로 활용될 수도 있다. 위 글에서도 지적했듯이 더 강력한 권위(서사의 과잉, 권위의 과잉)를 부여받은 쪽은 황교익이 아니라 백종원이다. 위근우의 논조대로라면 마약이 담배보다 더 해롭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담배는 마약보다는 덜 해로운 기호식품으로 긍정할 수도 있다. 이런 것을 두고 우리는 전문용어로 논리 박약'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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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10-20 21: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러다가는 전국의 음식점은 죄다 백 씨네
가게가 될 판입니다.

제가 동네는 백종원 브랜드가 힘을 쓰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새마을식당, 철판구이
등등 죄다 나가 떨어지네요.

그런데 팟캐에서 들어 보니 백 씨네 프랜
차이즈 식당을 운영하는 싸장님들 중에서
또 장사가 잘되는 쪽은 백 씨편을 들더군요.

곰곰생각하는발 2018-10-20 22:08   좋아요 0 | URL
뭐 맛이 좋아 장사가 잘 된다면 그것을 탓할 일은 아니나
굳이 방송에서 백종원이라는 브랜드를 ppl 형식으로 1시간짜리 광고를 하는 것인데
이거 불공정이죠.. 백종원 골목식당 이거 완전히 한 시간짜리 백종원 광고인 겁니다..
 

 


 




 

 


 




스모킹 건






그   목사는  연기  나는  총을  손에  들고   서  있었다

the chaplain stood with a smoking pistol in his hand


-  << 글로리아 스콧 호 >> ,  셜록홈즈의 회상에 수록





   총을 허리에 찬 놈보다 위험한 놈은 총을 손에 쥔 놈이고, 총을 손에 쥔 놈보다 더 위험한 놈은 총을 쏘고 있는 놈이다. 캐서린 비글로우 감독이 연출한 영화 << 블루 스틸 >> 에서 영화 제목 " 블루 스틸 blue steel " 은 총에 대한 은유이다. 경찰 학교를 갓 졸업한 여성 경찰관 매건 터너는 첫 근무 날,  편의점 강도 사건을 목격하고 범인을 사살해 버린다. 그런데 범인의 총이 행방불명되고, 목격자도 없어 터너는 비무장한 범인을, 그것도 총탄을 모두 써가면서 무참히 사살한 혐의로 자격 정지를 당한다. 설상가상 원인불명의 연속 살인 사건이 이어지고, 피해자들의 시체에서는 하나같이 터너의 이름이 새겨진 탄피가 발견된다. 경찰은 그녀를 감시하고, 그녀는 점점 궁지에 몰린다. 스모킹 건은 누구의 손쥐어진 것일까(네이버 영화 소개 글'에서 발췌).

영화는 궁지에 몰린 터너가 사라진 스모킹 건의 행방을 찾는 것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사라진 총을 애타게 찾아 떠나는 여정이 바로 이 영화의 핵심'이다.  여기서 < 총 > 은 권력을 대표하는 남근의 대체재'로 여성 경찰관 매건 터너( 제이미 리 커티스 분)가 찾고 있는 것은 총이 아니라 남근(팔루스)이다.  거세된 여성이 남성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푸른 강철을 차지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루이스(수전 새런든)가 휴게소에서 델마를 강간하려는 악당을 권총으로 쏴 죽이는 순간 여성 정체성을 깨닫는 것과 같다.  영화 << 블루스틸 >>  은 " 피스톨 = 남근 " 이라는 영화적 상징이 다소 상투적이고 뻔뻔하기는 하나 그럭저럭 볼 만한 작품이다. 

내가 이 영화를 소개하는 이유는 공지영이 김부선의 동의 없이 몰래 녹음한 전화 통화 녹취록등장하는 " 스모킹 건 " 이라는 표현 때문이다.  영화 속 매건 터너가 애타게 사라진 스모킹 건을 찾듯이 한국판 델마와 루이스도 애타게 스모킹 건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스모킹 건이라는 표현은 가설을 증명하는 과학적 근거가 확실해서 빼도 박도 못하는 물증을 뜻한다.  김부선은 왜 " 자G와 불R 사이에 크고 까만 점 " 이 있다는 거짓말을 했을까 ?   같은 질문을 공지영에게도 던지자.  공지영은 왜 " 자G와 불R 사이에 크고 까만 점 " 이 있다는 거짓말에 그토록 열광했을까 ?  그것은 남성 성기를 모욕하고 훼손하는 데에서 오는 쾌락 때문이다.

이 심리는 일베가 여성 성기를 모독하고 훼손하는 일에 집중하고 그 반대편인 워마드가 남성 성기를 희화화하는 심통과 일맥상통한다. 점이란 피부의 변이(변성) 현상으로 양성 종양인 얼룩'이다. 그러니까 문학적 수사를 동원하자면 남근에 얼룩인 점이 있다는 것은 곧 남근의 불완전성(임포텐츠)을 뜻한다. 두 여자는 남근에 점을 찍어서 이재명을 사회적 고자로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 호호호호호, 네가 고자라니 !!!!!!!!!!! "  하지만 김부선이 주연을 맡고 공지영이 연출한 리벤지 포르노는 일장춘몽으로 끝날 모양이다. 스모킹 건이라 믿었던 점은 부메랑이 되어 오히려 두 여자에게는 그들의 아킬레스 건으로 돌아왔다.

총을 허리에 찬 놈보다 위험한 상황은 총을 손에 쥔 놈이 등장하는 장면이고, 총을 손에 쥔 놈보다 더 위험한 상황은 총을 쏘고 있는 놈이 등장하는 장면이다. 그리고 총을 쏘려고 하는 놈보다 더 위험한 상황은 총을 쏘았는데 총알이 없을 때 발생한다. 내가 보기에 한국판 델마와 루이스가 선택한 것은 마지막 경우의 수인 것 같다. 트럼프였다면 두 여자에게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 You're fired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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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뉴스는 악을 응징하는 수단보다는 모멸감을 주는 수단에 가깝다. 뉴스가 모멸감을 생산하는 방식은 주로 " 양치기의 거짓(말)을 폭로하는 것 " 이다. 거짓(말)이 클수록 모멸감도 커지고 모멸감이 클수록 시청률도 크게 오른다. 농담을 섞어 말하자면, 뉴스를 생산하는 언론은 쪽을 사고 파는 기관인 셈이다.

그렇기에 언론인들이 정의의 사도 운운하며 권력을 감시하는 사명을 부여받았다며 비장한 목소리로 직업 윤리 강령을 강조할 때마다 웃게 된다. 언론은 권력을 감시하는 기관이다 ?! 가짜 뉴스'다. 권력을 감시하는 곳은 사정 기관이지 언론이 아니다. 언론의 주요 임무는 사실 보도'에 있다. 얼핏 보면 쪽(을) 팔린 일은 죽어도 하지 않으려는 양아치와 쪽을 사고 파는 일을 하는 언론인은 서로 상극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엇비슷한 점도 많다. 뉴스가 특정인에게 모욕감을 주는 방식은 비단 악당만을 표적으로 삼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언론이 노무현을 소비한 방식이 좋은 예이다. 논두렁 시계는 사건 본질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가짜 뉴스였지만 쪽을 사는 쪽에서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오브제'였다.

논두렁 시계는 노무현에게 모욕감을 주기에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노무현은 뉴스가 생산한 거대한 모욕감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수치와 염치를 아는 인간일수록 모욕감에 취약하다. 그렇기에 나쁜 정치와 결탁한 언론은 특정 대상을 공격하기 위해 끊임없이 모욕감을 생산한다. 언론사가 이재명이라는 정치인을 소비한 방식도 모욕감'이다. 언론은 김부선의 말을 " 팩트 체크 " 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김부선의 자극적인 말'을 여과 없이 보도하고 그 뉴스를 해석하는 단계에서 억측을 재생산한다. 김부선의 말(메시지)은 대부분 앞뒤가 틀리다. 김부선은 이재명을 불륜을 즐기기 위해서 따로 오피스텔을 얻었다고 폭로했지만

나중에는 자신의 아파트에서 불륜을 즐겼다고 말을 바꿨다. 또한 그와 뜨거운 밤을 보내느라 아파트 난방비가 많이 나왔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로 확인하니 정반대였다. 그녀는 이 지적을 의식한 듯 난방비를 아끼기 위해서 한겨울에도 이재명에게 파카를 입혔다고 말을 바꿨다. 그런데 언론은 이 사실을 보도하지 않았다. 오로지 김부선의 폭로에 집중했다. 화룡점점은 한때 사랑했던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를 찍어서 남을 만들었던 김부선의 폭로'다. 이 상황에서 공지영의 개입은 불난 집에 기름을 부은 꼴이 되었다. 공지영은 이재명의 크고 까만 점이 그에게 망신을 줄 것이라고 확신했지만 오히려 망신을 당하는 쪽은 당신으로 기우는 형국이 되었다.

사태가 겉잡을 수 없이 흐르자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를 찍었다고 폭로한 김부선은 침묵하고 있지만, 공지영은 여전히 트위트에서 말의 성찬을 쏟아내고 있다.  반성도 없고 사과도 없다.  입만 열었다 하면 인간에 대한 예의를 말하고 인권과 정의를 위해 싸울아비를 자청했던 그녀가 왜 이 사태에 대해서는 반성을 모르는 것일까 ?   그녀에게 묻고 싶다.  먼 훗날, 그때 그 일에 대해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었나 _ 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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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맨 2018-10-18 13: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전부터 공지영 소설가의 인격의 깊이와 창작가로서의 재주가 얕다고 느끼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인간성에 흠결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바꾸어 말해서 어느 남자가 (상대의 간음 여부를 밝히겠다면서) 여자의 특정 신체 부위에 무언가가 있다는 식으로 육성 발언을 했다면, 공지영은 어떠한 태도를 보였을까요. 진위 여부를 밝히는 일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특정인에게 함부로 신체적/인격적 모독을 하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고 봅니다. 작가적 재능이야 높건 낮건 간에 비판의 문제이지 비난의 쟁점으로 가서는 안되지만, 어떻게든 타인을 모욕하고 악인으로 낙인 찍으려고 드는 인간성이라면 비난 받아 마땅하다는 생각까지 듭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8-10-19 22:42   좋아요 0 | URL
공지영은 여전히 트윗으로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더군요. 마광수가 제자였던 공지영에 대한 평가가 딱 맞습니다. 공지영 이상문학상 수상했을 때의 어이없음은... 정말 최고였죠...
 

 

 

 

 

 

 

 

 

 

 

 

 

 

                                        

 

소 설   쓰 고    앉 아 있 네   :


 




공지영은 성실한 사람 !







뉴스는  우둔한  자를  무장시키고

 바보에게 권위를 부여하는 짓이다

- 플로베르 







 

                                                                                                                           사기(꾼)은 성실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는 직업군에 속한다. 남을 속여서 이득을 취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어서 사기꾼은 사기를 칠 대상에게 집중하게 된다. 칠(7)과 성의로도 부족하고, 팔(8)과 성의로도 부족하며, 구(9)와 성의로도 태부족이다. 오로지 열과 성의를 다해 성실한 태도를 취한다. 간이고 쓸개고 나발이고 난 네가 기뻐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 ~ 

비록, 이 연출이 교활한 연기이기는 하나 타인을 감쪽같이 속인다는 점에서 성실한 연기'다. 그래서 나는 성실한 사람보다는 차라리 게으른 사람이거나 타인에게 무심한 사람'을 신뢰하는 편이다. 영화 << 밀양 >> 에서 아들을 잃은 신애(전도연 분)가 느꼈던 분노는 자기 아들을 죽인 살인범이 신애 앞에서 보인 < 성실한 태도 > 때문이다.  영화 속 유괴 살인범은 속죄를 통해 신으로부터 구원을 받았다고 고백하지만 신애는 신이 인간에게 응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신은 본래 인간에 대하여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신애가 부정하고 싶었던 것은 神이 아니라 어쩌면 信( : 성실할 신)과 愛( : 사랑 애 )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신애가 보기에 자신이 처한 곤경에 대하여 슬퍼하는 사람 대부분은 모두 위선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위로는 진짜가 아니라 가짜 위로'이다.  <<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 은  나이 서른에 교수가 된 금수저 여자와 나이 스물일곱에 세 여자를 죽여 사형수'가 된 남자가 서로 대화를 통해 사랑과 구원 그리고 용서를 얻는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소설'이다. 읽는 내내 기가 차서 백석의 당나귀처럼 흐엉흐엉 웃기만 했다. 세 번의 살해 행위와 세 번의 자해 행위1) 를 동일선상에 놓고서는 두 인물을 동일한 경험과 아픔을 공유한 운명론적 쌍생아로 설정한 대목에서 웃지 않는다면 우리 모두는 싸구려 통속극에 우네부네하는 얼치기요, 신파에 놀아나는 띨띨이'다.

내 몸에 상처를 입힌 것과 네 몸에 상처를 입힌 것을 똑같은 행위라고 말하는 것은 죄책감의 문제가 아니라 법 해석의 무지에 있다. 기초 얼개가 이토록 부실하니 마무리 공사가 제대로 될 리 없다. 사상누각인 셈이다. 인간에 대한 예의 운운하며 세 여자를 죽인 사형수도 용서해야 마땅하지 않느냐 _ 며 우네부네하는 공지영은 왜 이재명 따위는 용서 받지 못할 자로 낙인을 찍는 것일까 ?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산 그녀가 보기에 이재명의 한 점은 부끄러움의 결정적 증거'라고 판단한 것일까 ? 그깟, 한 점이 뭐라고.  김부선의 주장이 모두 진실이라고 치자.  그렇다고 해도 그가 사람을 죽인 것도 아니요, 사기를 쳐서 불로소득을 얻은 것도 아니지 않은가.  

살인죄는 용서할 수 있지만 사소한 거짓말은 용서할 수 없다 ?!  나는 공지영이 실력이 형편없는 소설가'라고 생각하지만 매우 성실한 소설가'라는 데에는 동의한다. 그는 성실하다. 그는 지금도 방구석에 앉아 정의가 승리하는 소설이나 쓰고 앉아있을 것이다. 건투를 빈다.













 


​                                  


1)       남자는 여자를 세 번 죽인 사형수이고 여자는 세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한 서른의 교수'다. 삶에 미련이 없어서 세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다가 실패했다는 여자는 나이 서른에 그토록 얻기 힘들다는 교수 자리를 얻는다. 교수 자리 따기 위해 엄청 노력했다는 소리인데, 아니... 삶에 의욕이 없어서 자살을 세 번이나 했던 주인공은 왜 그토록 열심히 공부했을까나 ? 무기력과 닥치고 열공은 성격이 다르지 않나 ?  주인공은 밝은 미래를 위해 너무 열심히 열공하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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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영, 김부선 그리고 이재명




 


                                                                                                              옆집에 세 들어 살던 남자는 문청'이었다. 사회 초년생이었는데 작가의 꿈은 잠시 접고 직장을 다니고 있었다(그는 책은 내지 않았으나 등단은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종종 그 남자에게서 책을 빌리곤 했는데 그중 하나가 공지영의 첫 번째 장편소설 << 더 이상 아름다운 방황은 없다 >> 였다.

일종의 운동권 문학'이었는데 멋은 잔뜩 부렸는데 졸라 촌스러웠던 소설로 기억하고 있다. 그 소설 이후, 내가 오랫동안 공지영 소설을 읽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 싹수가 노랗다고 판단했던 모양이다. 내가 그의 소설을 다시 읽기 시작한 것는 신경숙과 함께 공지영이라는 브랜드가 명성을 떨치고 있던 때였다. 두 번째 손에 든 책은 << 고등어 >> 였다. 운동권 후일담 문학이었는데 아아, 그 촌스러움이 그지같았다. 결정타는 <<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 이었다. 이 소설은 대참사에 가까웠다. 내가 남긴 기록을 살펴보니 이 책에 대한 20자평은 " 젊은 나이에 성공한 금수저 주인공이 세상은 불공평하다고 투덜대면 짜증 이빠이 " https://blog.naver.com/unheimlich1/220932692652

 

세 작품을 읽고 나서 내린 최종 결론은 소설 쓰고 자빠졌네 _ 였다. 문장도 촌스러운데 감성도 촌스러우니 촌제적 난국처럼 보였다. 그가 단편 << 맨발로 글목을 돌다 >> 로 이상문학상을 수상했을 때 나는 공지영의 이상문학상 수상은 이상문학상이 없어져야 하는 결정적 증거'라는 글을 남겼다. 신경숙과 더불어 공지영은 나으 쉰밥이요, 좆밥이었다. 이 경멸은 그의 문학에 대한 애티튜드였지 그에 대한 애티튜드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에 대한 예의 바른 애티튜드도 거둬들이기로 했다. 공지영과 김부선의 오고가는말풍선'을 듣고 있자니 욕지기가 쏟아진다. 불알과 똥구멍 사이에 난 점을 이야기하며 낄낄거리는 대화를 듣다 보면 그에게 인간에 대한 예의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이재명과 김부선,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분명히 거짓말을 하고 있다.  김부선의 폭로는 김부선의 폭로로 반박이 가능할 정도로 시시각각 변하고 있다. 이 자리에서 누가 진실을 말하고 누가 거짓을 말하고 있는가를 따지고 싶은 마음은 없다. 설령, 이재명이 거짓말을 했다고 해도 그 거짓의 대가로 만천하가 보는 앞에서 불알을 까 보여야 하는 것일까 ?  이 잔인한 커밍아웃이 공지영이 시간 날 때마다 외쳤던 인간에 대한 예의인지 시발 존나게 묻고 싶다. 다음은 마광수가 공지영을 회상하며 적었던 글이다.



공지영은 대학시절에 운동권인 '척'하다가, 시에서 소설로 전향하여 처녀작 < 더 이상 아름다운 방황은 없다 > 라는 소설을 썼다. 말하자면 운동권과 결별했단 얘긴데, 지금은 진보인 척하며 시대의 양심인냥 독자들을 속이고 있다. 그녀는 대학시절 감옥에 가본 일도 없는 지적 사치를 즐긴 운동권 학생이었다. 또 <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 는 책으로 독신주의 페미니즘을 팔아먹으면서, 많은 여성들을 잘못된 결혼관으로 혼란시키다가 정작 자신은 세 번이나 결혼하는 모순된 행동을 보여주고, 또 그걸 팔아먹으며 돈을 벌고 있다. 사이비 얼치기 페미나치에다가 위장된 진보일 뿐, 그녀가 사회 진짜 민중에게 도움을 준 적은 없다


- 마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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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16 09: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0-16 12:4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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