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근우의 황교익 비판
사이비 목사는 신도들 앞에서 누운 병자를 일으켜세우거나 몸속에 악귀가 들어와 기세등등한 사람을 제압하는 쇼를 펼친다. 목적은 간단하다. 자신이 전지전능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 속임수는 가짜 목사에게 권위를 부여한다. 그 이후는 만사형통이다. 쇼가 성공하면 뭐니 ? 그렇다, 쇼미더머니'다. 헌금 많이 하면 천국 갑니다. 믿슙니까 ? (일동 괄약근을 오므라이스처럼 바짝 오므리며) 네에, 믿슙니다아아아 ~ 경향신문 토요판 특별 기고 칼럼 << 황교익의 ‘백종원 비판’, 논리적인 것 같지만 인문학으로 포장한 독선 >> 에서 칼럼리스트 위근우는 백종원 - 황교익 논란에서 황교익을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 현재의 방송 환경에서 지식인들은 서사 과잉의 유혹에 빠지기 쉽다. 앞서의 < 질문 있는 특강쇼-빅뱅 > 을 비롯해 OtvN < 어쩌다 어른 > 이후 등장한 수많은 인문학 강연쇼는 연단 위의 강사에게 절대적 권위를 요청하는 동시에 부여하며, 이런 유혹 앞에선 꽤 현명한 전문가들도 자기 제한의 미덕을 잃는 경우가 많다 "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이 칼럼이야말로 논리적인 것 같지만 인문학으로 포장한 독설'이란 생각이 든다. 절대적 권위를 부여받은 쪽은 황교익이 아니라 백종원이다. 골목식당 제작진은 백종원이 화려한 쇼를 펼칠 수 있도록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이 프로그램에서 백종원은 음식의 맛을 보는 순간 그 식당의 문제점을 단박에 알아차리는 절대 미각을 가진 캐릭터로 설정되어 있다. 예를 들면, 백종원은 함박스테이크 맛을 보고 나서 주인(골목식당 뚝섬 경양식 편)에게 질이 나쁜 냉동 고기를 사용한다고 지적한 후 식당 냉장고에 있는 고기를 눈으로 보며 고기가 오래되었다고 인상을 찡그린다. 매의 눈이요, 장금의 혀'다. 햐, 우리 백 선상님은 맛에 대해서는 박사여, 박사 !
시청자는 하나를 보면 백을 아는 종원의 신통력을 신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백종원의 지적은 사실일까 ? 백종원의 지적과는 달리 경양식 식당 주인은 냉동 고기가 아니라 냉장 고기를 사용했고, 질 나쁜 고기가 아니라 1등급 고기를 사용했다. 또한 오래된 고기가 아니라 포장된 지 2일 이하인 신선한 고기'를 소량 구매해서 신선도를 유지했다. 이 식당에 고기를 납품하는 관계자는 “예전부터 같은 (1등급, 냉장, 포장된지 2일 이하의)고기를 납품하고 있다”고 밝혔다. 백종원의 지적은 전부 오답이었지만 방송에서는 모두 정답으로 둔갑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악마의 편집요, 앉은뱅이를 걷게 하는 기적이다. 이 속임수(악마의 편집)는 백종원에게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한다.
말에 권위를 부여받으면 기적을 연출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백종원은 대전 청년구단 편 방송에서 막걸리에 물을 탔을 뿐인데, 시음에 참여한 사람들은 모두 다 물에 탄 막걸리 맛이 더 진해졌다고 고백한다. 백종원이 요술을 부린 것일까 ? 그럴 리는 없다. 술에 물을 탔는데 알코올 도수가 더 높아질 리도 없다. 이 모든 기적은 바로 권위라는 히로뽕이 만들어낸 착각일 뿐이다. 백색가루, 바로 백뽕의 기적이다. 그 이후는 만사형통이다. 쇼가 성공하면 뭐니 ? 그렇다, 쇼미더머니'다. 골목식당 제작진은 백종원에게 전지전능한 능력과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서 악마의 편집을 통해서 식당 주인을 악마로 만든다. 악마는 프리다 대신, 상처를 입는다.
위근우 논리대로라면 서사 과잉에 빠지기 쉬운 사람은 황교익이 아니라 백종원(의 골목식당)이다. 또한 보다 더 강력한 권위를 부여받는 쪽도 백종원이다. 백종원에게 달라붙은 방송국 스텝의 인원을 보라. 겨 묻은 개'에게 더럽다고 손가락질을 할 수는 있다. 그런데 똥 묻은 개와 비교한 후 겨 묻은 개에게만 더럽다고 지적하는 것은 논리 모순이다. 그렇기에 위근우 칼럼은 졸라 엉터리'다. 엉터리 칼럼을 특별 기고 형식으로 포장하여 글에 권위를 입히는 것은 소음이다. 듣는 사람에게도, 우선 본인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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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근우는 칼럼에서 다음과 같이 황교익을 비판한다 : 그렇다면① 백종원의 등장 이후 한국인의 당 섭취가 위험한 단계로 올라갔는가? ② 닭볶음탕에 설탕 세 숟가락을 넣는 백종원의 사람 좋은 미소와 설탕 여덟 티스푼이 들어간 청량음료 광고에서 청량함만을 강조하는 광고모델의 산뜻한 이미지 중 무엇이 더 단맛에 대한 경각심을 해제하는가? 정말로 백종원 신드롬은 10대만을 중심으로 생겨났는가? 황교익의 가설은 꽤 그럴싸하지만 이런 질문들에 대해 책임감 있는 답변을 해주진 않는다. 아니 더 정확히는 이들 질문 앞에서 쉽게 좌초할 정도로 허술하다. 하나의 이야기로서는 재밌지만 검증에 취약한 가설을 우리는 전문용어로 ‘구라’라고 부른다.
1.
위근우는 백종원의 등장 이후 한국인의 당 섭취가 위험한 단계에 올라갔다는 가설을 사실로 증명할 수 없기에 " 구라 " 라고 정의를 내린다. 우선, 가설 = 구라' 라고 뻔뻔하게 말하는 " 생각의 점프컷 " 에 놀라게 된다. 가설은 과학의 영역이고 구라는 사기의 영역이니 교집합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의 주장이 맞다면 신이 존재한다는 가설도 과학적 검증에 취약하기 때문에 구라'다. 생구라요, 개구라다. 종교를 구라의 영역으로 인식하는 위근우의 과학적 태도가 자못 당당하다. 그리고 황교익은 < 백종원의 등장 이후 한국인의 당 섭취가 위험한 단계에 올라갔다 > 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 한국인의 당 섭취가 위험한 단계인 상태에서 백종원의 등장 > 이 우려스럽다는 것이다. 그런데 위근우는 도치법을 사용해서 독자를 호도한다. <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를 찍으면 남 > 이 되지만 < 남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를 찍으면 냠 > 이 되지 님이 되지는 않는다. 그렇지 않은가 ?
2.
그는 백종원의 설탕 세 스푼과 청량음료의 여덟 티스푼'을 비교한 후 누가 더 나쁜가_ 라고 묻는다. 쉽게 말해서 똥 묻은 개(설탕 여덟 티스푼)도 있는데 왜 겨 묻은 개(설탕 세 스푼)에게만 신소리를 하느냐고 묻는 뉘앙스'다. 그런데 이 논조는 그대로 위근우를 비판하는 논조로 활용될 수도 있다. 위 글에서도 지적했듯이 더 강력한 권위(서사의 과잉, 권위의 과잉)를 부여받은 쪽은 황교익이 아니라 백종원이다. 위근우의 논조대로라면 마약이 담배보다 더 해롭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담배는 마약보다는 덜 해로운 기호식품으로 긍정할 수도 있다. 이런 것을 두고 우리는 전문용어로 논리 박약'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