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색과 탐색
최초의 사진은 형태를 재현하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색깔을 재현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흑백사진이었기 때문이다. 재현이라는 문제만 놓고 보자면 : 흑백사진은 반은 성공하고 반은 실패한 발명품이었다. 하지만 색상이나 채도는 없고 오로지 명도의 차이만 있는 무채색 풍경은 묘한 아우라를 획득했다. 컬러를 탈색시킨 흑백사진은 컬러 화장을 지운 맨 얼굴과 같아서
대상을 실존적 차원에서 탐색(접근)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인류 역사 발전 단계에서 색채어가 발생한 순서를 보자면 1순위는 검은색과 흰색이었고 2순위는 빨간색, 3순위는 초록색(혹은 노란색)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흑백사진은 가장 원초적이면서 근원적인 형태를 띈다고 볼 수 있다. 내가 장례식장을 찾을 때마다 맞닥뜨리게 되는 당혹감은 고인의 컬러 영정사진이었다. 이 세상에 화려한 죽음은 존재하지 않기에 그것은 죽음이라는 불행과는 격이 맞지 않는 색처럼 보였다. 나는 내 장례식장에 쓰일 좋은 영정 사진을 갖기를 원했고 그때부터 흑백 필름을 기계식 필름 카메라에 장착하여 사용하기 시작했다, 오래전 일이다........
기계식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찍을 때에는 대상을 흑백으로 찍을 것인가 아니면 컬러로 찍을 것인가, 라는 문제부터 결정해야 한다. 흑백 필름을 카메라에 정착한 경우, 사진가는 알록달록한 세상을 흑백의 시선으로 번역해야 한다. 미리 예측하고 찍어야 한다. 이 번역 능력이 없는 사진 작가는 좋은 흑백 사진을 얻을 수 없다. 흑백사진을 찍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빛1)이다. 빛의 세기와 강도 그리고 방향이 전체 이미지를 좌우한다. 하지만 누구나 찍을 수 있는 디지털 카메라가 보급되면서, 더군다나 핸드폰에 렌즈가 달리면서 흑백 이미지는 말 그대로 빛이 바랬다.
이제 빛은 컬러에 스며들면서 원하는 색감을 얻기 위한 보조 물감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 솔방울정원, < 감정의 재료, 재료의 감정 시리즈 > 중에서
위의 펜화는 솔방울정원 님이 현재 작업하고 있는 < 감정의 재료, 재료의 감정 - 시리즈 > 중 하나다. 작가는 색을 탈색시킨 모습으로 대상을 밖으로 드러낸다. 이 흑백 펜화는 컬러였다면 놓쳤을 것이 분명한 빛과 그림자에 주목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빛이 들어오는 방향과 세기 그리고 빛이 대상과 충돌하면서 만들어 놓은 그림자의 농도와 형태도 주목하게 만드는 것이다. 더군다나 빛이 대상을 들이받을 때의 속도와 강도도 어렴풋이 느낄 수 있다(이것을 뭉뚱그려서 빛의 펀치라고 하자). 빛이 밝을수록 그리고 그 대상 뒤편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짙을수록 < 빛 > 은 핵주먹을 가진 싸움꾼일 가능성이 높다. 후술하겠지만 빛의 속도가 가장 빠른 부분(펜화에서 명도가 가장 높은 2층 블록과 3층 블록)은 결과적으로 이 그림의 주제를 반영한다.
점, 선, 면으로만 이루어진 단순한 형태의 이 펜화는 풍부한 깊이와 재질을 느끼게 해준다. 오브제의 형태와 빛이 대상과 충돌하거나 스며드는 흔적, 그리고 그것에서 빗겨나가는 과정을 포획한 광학적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흑백사진이 화장을 지운 맨 얼굴을 직시할 수 있는 아우라를 제공하듯이, 작가는 색을 탈색시켜서 버려지는 대상 자체에 집중할 수 있는 기회를 우리에게 제공한다. 더군다나 그림 상단 우듬지 오른쪽에 위치한, 사선 45도로 기울어진 블록은 이 덩어리들이 가벼운 재질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짐작하게 만든다. 주목해야 될 점은 쌓아올린 덩어리-들의 형태다.
하부는 (아래에서) 사선으로 빗겨난 2층 블록이 증명하듯이 견고한 형태가 아니다. 블록 쌓기 놀이를 해본 사람이라면 붕괴를 야기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는 지점이다. 이 불완전한 축성을 보완하고자 3층에 위치한 블록이 중심을 잡아보려 애를 쓰지만 이 또한 사선이어서 불완전한 느낌을 준다. 빛의 속도 저항을 가장 많이 받은 2층과 3층 블록은 빛의 강력한 주먹질에 의해 중심을 벗어나 오른쪽으로 밀려나고 있는 형태를 보인다. 시리즈 제목이 < 감정의 재료, 재료의 감정 > 이라는 점은 감안하면, 감정을 사물에 투영한다는 점에서, 작가는 유심론(감정)을 유물론(재료)적 시각으로 번역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니까 이 그림은 작가의 위태위태한 불안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