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 나 의   가 족   삼 성  :






삼성과 나치





                                                                                                         유대인 600만 명을 학살한 홀로코스트 주범이었던 나치 친위대 장교 아이히만은 어떤 사람일까 ? 유대인 정치 철학자였던 한나 아렌트는 주간지 뉴요커 특파원 자격으로 아이히만 재판 과정을 상세하게 기록하여 잡지 << 뉴요커 >> 에 4회에 걸쳐 게재1)한다.

사람들이 아이히만을 통해 보고 싶었던 것은 인간의 탈을 쓴 짐승만도 못한 개새끼, 혹은 " 악마 오브 악마 오브 악마 대마왕 " 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한나 아렌트는 대중이 바라는 인물상과는 달리 다음과 같은 인물평을 내놓는다 : 아이히만, 성실함. 졸라 성실함(원문 : 각별히 근면한 것을 제외하고는.....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에서 발췌)이었다. 승전국은 아이히만은 개새끼라는 프레임을 원했는데 사람 새끼라고 하자 발칵 뒤집어졌다. 뭐야, 이따위 삼시세끼 !  또한 자신을 각별히 근면한 사람이라고 믿었던 세계인들도 패닉에 빠졌다. 한나 아렌트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악은 평범하다는 주장이었다.

그는 이렇게 주장한다.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것 자체가 악입니다아. 그러니까 누구나 아이히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렌트가 주목한 것은 아이히만이 즐겨 사용하는 언어 습관이었다. 그는 생생한 생활어보다는 구닥다리 상투어와 딱딱한 관청어(관청에서 관료들이 특수하게 쓰던 언어)를 습관적으로 구사했다. 예를 들면 " 학살 " 을 최종 해결책, 완전 소개, 특별 취급 따위로 언어를 탈색시켰다. 이것은 언어(학살이라는 단어)를 암호화해서 행위에 따른 죄의식을 무감각하게 만들고자 하는 의도였다. 삼성이 삼성전자 노동조합을 와해시키는 것을 " 그린화2) " 라는 용어로 표현했다는 기사를 접했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아이히만이 즐겨 사용하던 관청어'였다.

삼성전자서비스센터 노조원 염종석 노동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자 삼성 노조 말살 내부 문건에 기재된 언어는 " 노조원 1명 탈퇴 " 라는 표현이었다. 회사 측의 지속적인 회유와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목숨을 끊은 불행한 죽음이 고작 " 탈퇴 " 라는 사무적이며 무미건조한 표현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삼성이 구사한 전략은 바로 아이히만의 그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삼성의 기업 이미지 광고를 볼 때마다 절실하게 깨닫게 되는 것은 악의 평범성이다. 저토록 친절하고 감성적인 언어 속에 숨겨진 그 악마성.  같은 노조원 최종범 노동자의 죽음도 다르지 않았다. 그는 너무 힘들고 배가 고팠다는 말을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딸 최별이 태어나던 날, 그는 자신의 sns 대문에 남긴 문자는 다음과 같다. 오늘부로 최종범 인생 끝. 최별 인생으로 다시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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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부터 사형집행 순간까지 1년여의 취재를 바탕으로 아렌트가 고급 주간지 ‘뉴요커’에 1963년 4회에 걸쳐 연재한 심층기사를 엮은 책이 바로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이다.

2) 삼성은 노조 가입자의 노조 탈퇴를 " 그린화 " 라고 명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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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8-05-11 13: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삼성은 핸드폰 팔아서 남긴 이윤으로 세월호 폭식 퍼포먼스 자금을 지원했다 !
삼성은 악덕 기업이라는 차원을 뛰어넘는다.

겨울호랑이 2018-05-11 17: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 시절 강조된 그린(green)화, 녹색성장, 녹조라떼, 새마을 운동 등등을 생각하면 녹색 공포증이 생길 것 같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8-05-12 10:09   좋아요 1 | URL
옛날에 전두환은 학원 내 좌파 세력 척결을 ˝ 녹화 사업 ˝ 이라고 했다고 하더군요. 그린화나 녹화사업이나 똑같은 거죠.... 삼성은 망해야 합니다..

2018-05-12 00: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5-12 10: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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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것은 " 하루총량 " 이지 " 한끼열량 " 이 아니다  :














전문가들의 사회





                                                                                                        어떤 분야를 연구하거나 그 일에 종사하여 그 분야에 상당한 지식과 경험을 가진 사람. < 전문가 > 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이다. 전문가는 곧 권위자'이다.

한평생 한 우물만 파신 분들이셔서 그 분야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없으니 전문가들 납시면 어리숭한 알거지 무지렁이인 우리 모두는 납작 엎드려 합죽이가 됩시다, 합 !  문제는 귄위를 앞세운 전문가 대부분은 좆문가라는 데 있다. 옛날에는 패션 전문가들이 티븨에 나와서 청바지 밑단을 접으면 키(다리)가 작아 보이기 때문에 접지 말라고 근엄하게 충고하고는 했으나 지금은 청바지를 롤업(밑단을 접어 입는)해서 바지 전체의 주름을 없애야 다리가 길어 보인다고 충고한다.  양복도 마찬가지다. 옛날에는 통 넓은 양복바지 밑단이 구두를 가려야 다리가 길어 보인다고 조언했으나 지금은 정반대다. 그들은 이렇게 외친다. " 통 넓은 수트 핏은 스튜핏 ! "

말이 서로 다르다. 둘 다 패션 분야에 대해 권위를 가진 전문가의 조언인데 말이다. 뭐야, 이런 쬬다쉬 ~          그렇다면 다이어트에 대한 상식은 ?  내가 1일1식을 선언했을 때 우려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이 짓'을 4년째 하고 있다. 그 결과, 한 끼만 먹고 어떻게 살아 ? _ 라고 의아해하던 사람들도 이제는 하루에 한 끼만 먹고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한 끼만 먹어도 체중 변화(1식을 처음 시작한 1년을 제외한 기간) 없이 정상적인 체중을 유지한다는 사실도 깨달았을 것이다. 1일1식은 체중을 감량하기 위한 목적보다는 요요 없이 정상 체중을 유지하기 위한 목적에 보다 적합한 식습관이다.


하여, 내가 내린 결론은 성인이 되어 성장이 멈춘 상태라면 한 끼만 먹어도 충분하다는 것이다.  한 끼만 먹는다는 것은 밥을 1/3으로 줄인다는 차원을 떠나 소금과 설탕을 1/3 줄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말을 다른 식으로 표현하자면 남들보다 조금 더 달게 그리고 조금 더 짜게 먹어도 하루에 섭취하는 설탕과 소금 총량은 삼시 세 끼를 먹는 남들보다 적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요한 것은 " 하루 총량 " 이지 " 한끼 열량 " 이 아니다. 1일1식 프로젝트는 일종의 내 몸을 실험하는 과정이었다. 내가 이 실험에서 증명하고 싶었던 것은 다이어트와 관련된 사회적 통념 상당은 허구라는 점이었다.  차근차근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 6시 이후에는 아무것도 먹지 말라  :  이 통념은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다. 나는 4년 동안 6시 이후에만 밥을 먹고 있다. 그중에서 처음 1년은 폭식의 향연이었다. 너무 많이 먹어서 배가 터지지 않을까, 걱정을 하며 먹었을 정도다. 하지만 1년 동안 10kg의 체중 감량을 경험했다. 그러니까 식사 시간과 체중 증가는 아무 관련이 없다. 누누이 하는 말이지만 중요한 것은 하루 총량이다. 야식이 비만을 부르는 이유는 6시 이후에 음식을 섭취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루에 네 끼를 먹었기 때문이다.

둘째, 과식이 비만을 부른다  :  이 소리도 개소리다. 과식이라 해도 하루 총량을 넘지 않으면 체중 증가는 없다. 하루에 섭취하는 음식이 동일하다고 가정했을 때 소식으로 하루에 다섯 끼니 나눠먹는 사람과 과식으로 한 끼에 몰아서 먹는 사람의 체중 변화는 미미하다(나는 1년 동안 세 끼 양을 한 끼에 몰아서 먹었다).

셋째, 먹고 바로 자면 돼지가 된다. 하하하하. 이 소리야말로 정말 개소리다. 나는 저녁을 먹고 나면 식곤증이 몰려와서 바로 잔다. 저녁의 포만감은 가장 좋은 수면제'다.

넷째, 육식은 비만의 주범이다  :   육식이 비만의 주범이라는 잘못된 통념과 함께 널리 퍼진 것이 채식이 체중 조절에 도움을 준다는 통념이다. 이 통념이 사실이라면 채식을 하는 승려는 비만일 수가 없다. 하지만 승려 대부분은 날씬한 쪽보다는 통통한 쪽이다. 왜 그럴까 ?  이 구역(다이어트)에 미친놈은 나야 _ 라고 외치던 전문가라면 이 사실에 대해서 의구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닐까 ?

종합 : 다이어트의 적은 6시 이후도 아니고 육식도 아니며 과식도 아니다. 보상 심리가 다이어트의 최대 적이다. 예를 들어, 운동한답시고 등산을 하고 나면 그렇지 않은 날보다 더 많이 먹는 경향이 있다. 열심히 운동했으니 보상으로 맛있는 음식을 먹겠다는 심리이다. 하지만 운동이 체중 감량에 도움을 주는 영향은 매우 미미하다. 63빌딩 계단을 걸어서 오르는 운동은 약과 1개의 칼로리를 소모시키는 것과 동일하다. 그리고 갈비찜 5토막(750kcal)의 열량은 달리기를 1시간 30분 동안 해야 태울 수 있다.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들이 쉽게 범하는 실수는 채식은 마음껏 먹어도 된다는 환상(보상 심리)이다. 

정말 그럴까 ?  김치전 한 조각(손바닥 크기)의 열량을 태우기 위해서는 수영을 40분 동안 해야 한다. 그리고 저칼로리 식품으로 알려진 감자와 고구마도 마찬가지다. 고구마 한 개(200g인 경우 250칼로리) 먹으면 40분 동안 좆 빠지게 뛰어야 소모된다. 사람들이 다이어트를 결심하는 순간, 그때부터 살이 더 찌는 이유는 이처럼 잘못된 통념을 믿고 실천하기 때문이다. 운동과 채식 위주의 식단은 체중 감량에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 분야의 고수라는 그들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것일까 아니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신소리를 하는 것일까 ?

비만 인구가 많을수록, 그리고 다이어트에 실패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다이어트 산업은 호황을 이룬다. 전문가들은 그들이 소속된 집단의 이익에 봉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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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 2018-05-04 13: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림자들이 흔들리는 거리를 잠시 걸었는데, 사원증을 휘날리며 걷기에 취해 있는 사람들을 여럿 보았어요.

먹을 것에 기대고, 날씬함에 기대고, 김치전에 기대고 걷기에 기대고.
한 우물에 기대고, 곰발님에게 기대고.

저도 고구마 좋아하는데요 요즘 비싸서 못 먹고 있어요.
전문가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지만, 결과를 원인에 덧씌우는 풍경이 낯설지가 않아요.

지난 주에 <헝거>를 읽었는데
그 속에도 많은 전문가가 나오지요. 무력하기 그지없는.

곰곰생각하는발 2018-05-04 13:50   좋아요 0 | URL
요즘은 온갖 전문가들이 등장합니다. 전문가, 무슨무슨 컨설턴드, 심지어는 무슨무슨 코치... 따위. 다 전문가예요. 그런데 전문가의 신뢰를 지나치게 믿게 되면 자기결정권이 상실하게 됩니다.
결정을 그들 전문가에게 맡기거든요. 그러니까 이제는 데이트 할 때 입을 옷을 트친들에게 조언을 구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탈색과 탐색





 

                                                                                                     최초의 사진은 형태를 재현하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색깔을 재현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흑백사진이었기 때문이다. 재현이라는 문제만 놓고 보자면   :   흑백사진은 반은 성공하고 반은 실패한 발명품이었다. 하지만 색상이나 채도는 없고 오로지 명도의 차이만 있는 무채색 풍경은 묘한 아우라를 획득했다.  컬러를 탈색시킨 흑백사진은 컬러 화장을 지운 맨 얼굴과 같아서

대상을 실존적 차원에서 탐색(접근)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인류 역사 발전 단계에서 색채어가 발생한 순서를 보자면 1순위는 검은색과 흰색이었고 2순위는 빨간색, 3순위는 초록색(혹은 노란색)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흑백사진은 가장 원초적이면서 근원적인 형태를 띈다고 볼 수 있다. 내가 장례식장을 찾을 때마다 맞닥뜨리게 되는 당혹감은 고인의 컬러 영정사진이었다. 이 세상에 화려한 죽음은 존재하지 않기에 그것은 죽음이라는 불행과는 격이 맞지 않는 색처럼 보였다. 나는 내 장례식장에 쓰일 좋은 영정 사진을 갖기를 원했고 그때부터 흑백 필름을 기계식 필름 카메라에 장착하여 사용하기 시작했다, 오래전 일이다........

기계식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찍을 때에는 대상을 흑백으로 찍을 것인가 아니면 컬러로 찍을 것인가, 라는 문제부터 결정해야 한다. 흑백 필름을 카메라에 정착한 경우, 사진가는 알록달록한 세상을 흑백의 시선으로 번역해야 한다. 미리 예측하고 찍어야 한다. 이 번역 능력이 없는 사진 작가는 좋은 흑백 사진을 얻을 수 없다. 흑백사진을 찍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빛1)이다. 빛의 세기와 강도 그리고 방향이 전체 이미지를 좌우한다. 하지만 누구나 찍을 수 있는 디지털 카메라가 보급되면서, 더군다나 핸드폰에 렌즈가 달리면서 흑백 이미지는 말 그대로 빛이 바랬다. 

이제 빛은 컬러에 스며들면서 원하는 색감을 얻기 위한 보조 물감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  솔방울정원, < 감정의 재료, 재료의 감정 시리즈 > 중에서

 

위의 펜화는 솔방울정원 님이 현재 작업하고 있는 <  감정의 재료, 재료의 감정 - 시리즈  > 중 하나다. 작가는 색을 탈색시킨 모습으로 대상을 밖으로 드러낸다.  이 흑백 펜화는 컬러였다면 놓쳤을 것이 분명한 빛과 그림자에 주목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빛이 들어오는 방향과 세기 그리고 빛이 대상과 충돌하면서 만들어 놓은 그림자의 농도와 형태도 주목하게 만드는 것이다.  더군다나 빛이 대상을 들이받을 때의 속도와 강도도 어렴풋이 느낄 수 있다(이것을 뭉뚱그려서 빛의 펀치라고 하자).  빛이 밝을수록 그리고 그 대상 뒤편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짙을수록 < 빛 > 은 핵주먹을 가진 싸움꾼일 가능성이 높다. 후술하겠지만 빛의 속도가 가장 빠른 부분(펜화에서 명도가 가장 높은 2층 블록과 3층 블록)은 결과적으로 이 그림의 주제를 반영한다.

점, 선, 면으로만 이루어진 단순한 형태의 이 펜화는 풍부한 깊이와 재질을 느끼게 해준다. 오브제의 형태와 빛이 대상과 충돌하거나 스며드는 흔적, 그리고 그것에서 빗겨나가는 과정을 포획한 광학적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흑백사진이 화장을 지운 맨 얼굴을 직시할 수 있는 아우라를 제공하듯이, 작가는 색을 탈색시켜서 버려지는 대상 자체에 집중할 수 있는 기회를 우리에게 제공한다.  더군다나 그림 상단 우듬지 오른쪽에 위치한, 사선 45도로 기울어진 블록은 이 덩어리들이 가벼운 재질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짐작하게 만든다. 주목해야 될 점은 쌓아올린 덩어리-들의 형태다.

하부는 (아래에서) 사선으로 빗겨난 2층 블록이 증명하듯이 견고한 형태가 아니다. 블록 쌓기 놀이를 해본 사람이라면 붕괴를 야기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는 지점이다. 이 불완전한 축성을 보완하고자 3층에 위치한 블록이 중심을 잡아보려 애를 쓰지만 이 또한 사선이어서 불완전한 느낌을 준다. 빛의 속도 저항을 가장 많이 받은 2층과 3층 블록은 빛의 강력한 주먹질에 의해 중심을 벗어나 오른쪽으로 밀려나고 있는 형태를 보인다. 시리즈 제목이 < 감정의 재료, 재료의 감정 > 이라는 점은 감안하면, 감정을 사물에 투영한다는 점에서, 작가는 유심론(감정)을 유물론(재료)적 시각으로 번역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니까 이 그림은 작가의 위태위태한 불안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비단 작가만이 가지고 있는 위기 의식만은 아니다. 현대인이라면 모두 다 느낄 수 있는 불안이다. 위태롭게 축성된 탑은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 것인가. 그 관점에서 이 그림을 보면 매우 흥미롭다. 단순한 도상이지만 매우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는 그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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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바람개비가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을 볼 수 있게 만든 발명품이라면 흑백사진은 눈에 보이지 않는 빛의 운동성을 볼 수 있게 만든 발명품이다. 내가 흑백사진을 관찰할 때 관심을 가지는 부분은 빛의 성질이다. 어느 녀석은 순진하고 어떤 놈은 까탈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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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네 마당 Vol.10 어른 찾아 삼만리 - 2018
언니네 마당 편집부 엮음 / 언니네마당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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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     고            있     네        :




 


애나 어른이나



잡지 << 언니네 마당 봄호 >> 에 게재된 글을 옮긴다. 글자 수를 늘릴 요량으로 중언부언하다 보니 글이 산으로 갔으나 담당자가 요술을 부려서 정상적인 꼴을 갖춰주셨다. 편집의 묘미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새삼 느끼게 된다(훌륭한 작가에게는 반드시 훌륭한 편집자가 있다. 만고불편의 진리이다).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모두 다 동의하겠지만 글을 늘리는 것보다 글을 줄이는 것이 훨씬 어렵다는 것은 진실이다. 담당자가 제대로 된 글꼴을 갖춰 보내주신 한글 파일을 찾지 못해서 어쩔 수 없이 부득이 중구난방 상태인 그지같은 원본을 올린다. 이번 호는 읽을거리가 많다. 언니들에 대한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았다.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서 구매할 수 있다. 강추 !

 - 피터 브뢰헬, 아이들의 놀이 1599년





                                                                                                          인간은 두 부류로 나뉜다. 어쩌다 어른이 된 사람과 어쩌다 어른이 될 사람. tvN 프리미엄 특강 쇼 << 어쩌다 어른 >> 은 어른이 될 준비를 하지도 않았는데 어쩌다 떠밀려서 어른이 된 사람과 어쩌다 어른이 될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특강 쇼다.

“ 어쩌다 - ” 라는 부사에는 준비 없이 어른이 되었다는 두려움과 설렘 그리고 억울함도 살짝 묻어 있다. 어찌 합니까, 어떻게 할까요?  제가 감히 어른이 되었습니다아. 이 방송 프로그램이 주요 타깃으로 삼은 대상은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 라고 말하는 캔디형 어른이다. 사실은 외롭고 슬프지만 어른인 척하느라 내색도 못하고 참고, 참고, 참고, 참고, 참다가 마침내 참치가 된 캔디를 겨냥한 것이다. 인류와 어류 사이. 당신은 사람입니까, 참치입니까. 이는 지금의 세태와 맞물리면서, << 어쩌다 어른 >> 은 홀로 문화를 주도하고 있는 1인 독립 가구의 증가, 시대 변화에 따른 디지털 호모루덴스의 탄생,

어른이지만 어린아이처럼 놀이에 탐닉하는 키덜트, 그리고 대학 졸업 후 취직할 나이가 되었지만 취직도 못하고 경제적 사정 때문에 부모로부터 독립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시달리는 88세대와 캥거루 계층에게 호소한다. 이들은 사회가 요구하는 어른의 자격에서 살짝 벗어났다는 데 불안을 느낀다. 그런데 나는 어른이라는 단어 앞에 어쩔 수 없다는 어투로 붙은“ 어쩌다 ㅡ ” 라는 표현이 자꾸 거슬린다. 사람들은 유년 시절이 지나면 필연적으로 어른의 세계로 진입하는 것일까? 그리고 그래야만 하는 것일까? 인간은 아이와 어른으로 나뉜다는 단순한 분류에 대해 의문을 가지기 시작한 계기는 네덜란드 화가 피터 브뢰헬의 풍속화 << 아이들의 놀이, 1559 >>를 감상하면서 시작되었다.

<< 아이들의 놀이, 1559 >> 라는 그림에는 아이들이 무려 200여 명이나 출연한다. 그들은 각자 혹은 끼리끼리 모여서 다양한 놀이(75가지)를 재현한다. 물구나무서기, 팽이 돌리기, 굴렁쇠 굴리기, 말뚝박기, 뜀틀 넘기, 통 굴리기, 카드놀이, 소꿉놀이, 공기놀이, 기마놀이, 돌치기 놀이 등 말 그대로 놀이 백화점인 셈이다. 그런데 놀고 있는 아이들은 생김새로 보아 아이와 어른의 구분이 애매모호한 구석이 있다. 설상가상, 이들이 입고 있는 복장도 어른이 입는 옷이 똑같아서 복장만 가지고는 어른과 아이를 구별할 수도 없다. 그림을 확대해서 세세하게 살펴보면 아이가 어른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어른이 아이를 흉내 내며 놀이에 열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내가 이 그림을 감상하고 나서 내린 최종 결론은 이렇다. 놀고 있네, 애나 어른이나 하는 짓은 똑같구나. “ 어쩌다 어른 ”이라는 제목은 나이가 들면 본인 의지와는 상관없이 사회적 요구에 떠밀려서 어른이 될 수밖에 없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그것은 필연이자 숙명이다. 이 가정법은 반드시 상대적 개념인 아이라는 계층이 존재할 때에만 성립될 수 있다. 만약에 어린이라는 개념이 없었다면 어른이라는 개념도 없었을 것이다. 올챙이 시절 없는 개구리는 존재할 수 없으니까. 어린이라는 개념이 근대가 낳은 발명품이라고 말하는 이가 있다. 어린이가 근대의 발명품이라고 ?! 워워. 말도 안 되는 신소리라며 나에게 화를 낼 필요는 없다.

그 주장은 프랑스 역사학자 필립 아리에스가 한 말이다. 역사학자 필립 아리에스는 << 아동의 탄생 >> 에서 아동은 필요에 의해 근대에서 만들어진 발명품이라고 말한다. 아이는 7세 이후가 되면 어른들 세계로 편입되어 그들과 섞였고,  어른들의 공동체에 소속된 아이들은 나이에 상관없이 친구가 되었으며 일과 놀이를 공유했다. 궁금하여 그 시대 풍속사를 살펴보니 옛날에는 아이와 어른의 구별이 따로 없어서 아이들은 어른들과 어울리며 그들과 똑같은 놀이를 했다고 한다. 아이들은 어른과 섞여서 카드놀이나 주사위 놀이를 하고 돈을 걸고 도박을 했고 술도 마시며 기방도 출입했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서로의 달콤한, 아 !  아밀라아제를 교환하며 사랑을 나눈 나이가 14살이 아니었던가. 반대로 어른들도 아이들이나 하는 놀이를 즐겼다고 하니 키덜트족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있었던 족속이었다. 이를 두고 서구가 동양보다 도덕적으로 더 개방적이고 성적으로 더 타락했다는 증거라고 말하는 것은 변명에 불과할 것이다. 왜냐하면 동양 사회도 아이를 작은 어른 취급을 했기 때문이다. 이몽룡이 기방을 제 집 드나들 듯 출입하며 기생들에게“ 이리 오너라, 업고 놀자 ” 라고 했을 때가 16살이었고, 연암 박지원과 다산 정약용은 15세에 결혼을 했으며, 벽초 홍명희는 13살에 결혼을 해서 나이 서른이 되어 손자를 보았다.

그리고 조혼 풍습으로 인해 10살에 장가를 간 꼬마 신랑도 있었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라고 ? 아니다, << 임꺽정 >> 의 저자 홍명희는 20세기 인간이었다. 어린이라는 말은 17세기부터 써온 말인데 중세 국어에서 어리다는 의미는 " 나이가 적다 " 는 것이 아니라 " 어리석다 " 는 의미였다. 이 말은 20세기에 와서야 아동 문학가였던 소파 방정환(1899~1931)이 나이가 어리다는 의미로 사용했으니 그 이전에는 나이가 적다는 의미에서의 어린이란 없었다. 다시 말해서 옛날에는 나이가 많고 적음에 따라 어른과 어린이를 구별하지 않았다. 이 모든 사실을 종합하면 어른이라는 개념

또한 근대가 만든 발명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어른이라는 개념은 판타지다. 그렇기에 어린이와 어른이라는 구별 짓기는 칼로 물을 베는 것과 같다. 대부업 광고 문구 중에 " 여자니까 쉽게 ( 대출 가능 ) " 라는 표현이 있다. 여성 계층에게는 다른 계층보다 특별 우대하겠다는 표현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 여자는 멍청해서 복잡한 것은 못해 " 라는 뉘앙스로도 읽을 수 있다. 여성 우대보다는 여성 홀대로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현세를 살아가는 어른들은 어린이 인권에 대해서 과도할 정도로 보호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어른과 아이를 나누는 것이 억압의 결과였다는 사실은 잘 모르고 있다.

어른과 아이를 구분 짓기 하는 순간 차별은 시작된다. 나는 짊어져야 할 어른의 무게 때문에 힘들다며 징징거리는 어른을 볼 때마다, 그리고 그들끼리 모여서 서로를 위로하며 자위할 때마다 씁쓸한 생각이 든다. 그것은 어른이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성장통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어야 하는 성장통이다. 그렇기에 어른이기 때문에 겪는 특별한 성장통은 허구라는 점에서 환상통이다. 애나 어른이나 하는 짓은 똑같다는 사실을 부정한 채 인간의 성장 과정을 어린것와 어르신으로 나누는 것은 인간을 올챙이와 개구리로 나누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인간의 성장 과정에는 변태라는 극단적 형태의 변신은 없지 않은가.

그런 사람들에게 나는 항상 이렇게 묻고 싶다. 인류와 양서류 사이. 당신은 인간입니까, 개구리입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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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아이즈 2018-05-01 13: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애나 어른이나 하는 짓은 똑같다,는 사실적 통찰에
뜨끔해집니다
인간인지 개구리인지 저 스스로 헛갈리는 나날입니다
잘 계시지요?

곰곰생각하는발 2018-05-01 14:30   좋아요 1 | URL
저는 사람 가지고 구별 좀 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여자 남자, 어른 아이, 이성애자 동성애자.. 굳이 이런 구분을 왜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차별의 시작은 구분에서 시작된다고 봅니다..
저야 늘.... 다크 님이야말로 잘 지내시지요 ? 다크 님이 다크한 소설을 빨리 보고 싶은 1인입니다아..

cyrus 2018-05-01 17: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은 <성의 변증법>에서 여성과 아이의 차별과 억압이 없는 유토피아를 제시합니다. 그녀는 유토피아를 실현하기 위해서 ‘어른’과 ‘아이’로 구분하는 문화와 학교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해요.

곰곰생각하는발 2018-05-02 10:17   좋아요 0 | URL
제 글의 요약본이네요. 사이러스 님 댓글이 말입니다... 파이어스톤의 주장에 적극 동의합니다..
 

 

 

 








이 시금치를 아욱국이라 불러도 좋다




                                                                                                       못생긴 운동화(어글리 슈즈) " 발렌시아가 트리플 에스 팔라디움1) " 가격은 백만 원을 훌쩍 넘는다. 비싸지만 없어서 못파는 지경이란다. 운동화 가격이 십만 원을 넘기면 비싸다고 투덜대는 내가 보기에는 언빌리버블하다(내가 보기엔 운동화 적정 가격은 삼만 원이다).

그렇다 보니 발렌시아가 에스 신발을 신은 패피(패션피플)들은 인스타그램에 착장 사진을 올릴 때 이 운동화가 돋보이도록 옷을 입거나 운동화가 강조되도록 카메라 각도에 신경쓴다(바지 밑단이 운동화 끈을 가리는 것을 염려해서 바지 밑단을 양말 속에 넣은 녀석도 보았다. 쏘가리 같은 댓글 하나 남겼다. " 모내기 하냐, 농번기 때 모내기 해 ?? " ). 나, 발렌시아가 운동화 신은 남자야 !               그러니까 그네들에게 있어서 주인공은 운동화이고 엑스트라는 옷이다. 웩 더 독 !  당연히 패션 보조 용품인 악세서리에 불과했던 운동화가 주인공이 되다 보니 전체적인 균형과 조화에 균열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것은 마치 깍두기 형님들이 금목걸이가 강조되도록 옷을 배치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런 것을 두고 나는 " 졸라 촌스러운 페티시 패션 " 이라고 부른다.  우리, 제발 호스트와 게스트는 구별 합시다아.  중요한 것은 그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시그니처'다. 이 시그니처를 아우라라 불러도 좋다.  옷차림에 대한 글을 쓰다 보니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꾸 보그 병신체처럼 외래어를 쓰기 되는데..........   좋다 !  아우라 대신 아욱국이라 부르겠다( 그리고 시그니처는 시금치라 부르겠다). 사람들이 종종 착각하는 것은 < 유행 > 과 < 개성 > 을 혼동한다는 점이다. 

유행하는 옷을 즐겨 입는 사람을 개성 있는 사람이라고 착각을 하는데 유행과 개성은 서로 반대 개념에 가깝다. 왜냐하면 유행은 대중성을 기반으로 한 현상이고 개성은 말 그대로 개인의 시금치를 기반으로 한 아욱국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유행 따라 옷을 입는 사람을 두고 옷을 개성 있게 입는다,  라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중요한 것은 시금치와 아욱국이다. 유행에 따르지 않지만 누가 봐도 이 스타일은 그 사람 고유의 시금치라고 모두 다 동의할 때 그 사람의 패션은 아욱국을 얻는다. 시금치 없는 스타일은 스타일이 아니다.

문학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  시금치는 스타일을 만들고 스타일은 그 작가의 아욱국을 만든다. 문창과 중심으로 신인 작가를 뽑는 한국 현대 문학(문단)은 스타일이 모두 대동소이하다.  그 나물에 그 밥이라고 그 교수에 그 제자가 결국에는 작가가 되는 시스템이 한국 문단이다.  현대 젊은 작가들의 작품에서 각각 몇 문장을 발췌해 문장을 뒤섞으면 마치 한 사람이 쓴 작품처럼 보일 때가 많다.  쉽게 말해서 그들끼리 근친혼을 하다 보니 문장 분별력이 떨어진다.  그리고 분별력이 떨어지다 보니 변별력도 떨어지는 것이다. 개나 소나 전복적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란다.

이 말은 작가 고유의 시금치가 없다는 것이고, 아욱국이 없다는 말이 된다.  당연히 한국 문학은 골라먹는 재미가 없다.  한국 문학이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시금치와 아욱국이다 ■

 

 

 

덧대기

사람들이 신형철 평론에 대해 엄지 척 하며 성찬을 하덴더 개인적으로 신형철 평론은 평론의 연성화, 평론의 감성화, 평론의 국뽕화, 평론의 멜로화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문장은 아름다우나 아름다운 문장이 평론의 덕목은 될 수 없다.




​                                     

1) 옛날에 시골 개 한 마리 키운 적이 있었는데 몰골이 말이 아니어서 사람들이 무시하고는 했다. 이에 열받은 나는 아주 멋진 이름을 지어주었다. 개 이름은 " 드미트리히 라스콜리니코프 앙겔로 라흐마니 3세 " 였다(지금은 정확한 이름은 생각이 나지 않지만, 뭐 대충 이런 이름이었다).  이름이 길면 뭔가 고급스럽고 귀족스러운 느낌이 난다.  발렌시아가 프리플 에스 팔라디움이라는 네이밍도 이 전략을 구사한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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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30 11: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8-04-30 11:52   좋아요 1 | URL
그 귀한 것을 어떻게 땅을 밟게 하는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ㅎㅎ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