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향과 이몽룡 그리고 me too
<< 춘향전 >> 에서 " 춘향 " 은 남성 독자에게 자신의 지고지순한 절개를 세 번 증명해야 한다. 삼세번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좋은, 완결된 숫자이자 완벽한 서사의 종결이 아닌가 !
그래서 춘향은 몽룡을 향한 일편단심을 증명하기 위해서 치명적 유혹 내지 시련을 세 번 견디어야 한다. 그것은 기생이라는 하층민이 럭셔리 양반 계급으로 수직 상승하기 위한 통과 의례이다(기생인 춘향은 자신이 꽃뱀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할 필요가 있다). 첫 번째 유혹자는 변 사또'다. 변 사또는 춘향에게 수청을 들라 하지만 단칼에 거부한다. 수청을 거부한다는 것은 곧 숙청을 의미한다. 그녀는 신체적 고통을 받는다. 당시, 국가 소유였던 기생 신분이 중앙 국가 권력을 대신해서 내려온 지방 분권 권력의 수청을 거부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숙청 대상이지만 춘향은 이를 거부함으로써 첫 번째 도장 깨기에 성공한다.
두 번째 유혹자는 춘향 앞에 거지꼴로 나타난 이몽룡이다. 춘향이 변 사또의 수청을 거부할 수 있었던 것은 이몽룡이 언젠가는 소년 급제하여 자신을 구원하리라는 믿음 때문이었는데 이 희망을 거세함으로써 첫 번째 시련보다 더 큰 시련을 던져준다. 어머머, 이 거지 같은 사랑을 계속 유지해도 좋은 것일까 ? 첫 번째가 신체적 시련이라면 두 번째는 심리적 시련이다(고문 피해자들이 한결같이 말하는 것은 육체 고문보다 힘든 것은 심리 고문이라는 고백이다). 하지만...... 견딘다, 춘향은 ! 이로써 춘향은 자신의 사랑이 신분 상승에 눈이 먼 물욕이 아니라 순수한 사랑이라는 사실을 관객에게 증명한다. 두 번째 도장 깨기도 성공이다. 하지만 관객은 의심을 거두지 않는다.
세 번째 유혹자는 암행어사 이몽룡이다. 서열만 놓고 보자면 사또가 늑대'라면 어사라는 신분은 사자'다. 목에 칼을 쓰고 머리를 풀어헤친 춘향 앞에 펼쳐진 암행어사출두 장면은 명불허전이리라. 춘향이가 본 것은 체포 작전 현장이 아니라 으리으리한 의전 행사'다. 그것은 욕망의 불꽃놀이다. 어사 이몽룡은 부채로 얼굴을 가린 채 춘향에게 묻는다. 수청을 들라 ! 이것은 첫 번째 도장 깨기의 업그레이드 버전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 뭐, 다들 아시다시피 춘향은 세 번째 도장 깨기에 성공한다. 내가 << 춘향전 >> 에서 주목한 대목은 왜 춘향이는 자신의 절개를 세 번 증명해야 남성 사회로부터 그 진정성을 획득하는가, 이다. 그리고 유혹하는 자는 왜 모두가 남성뿐인가 ?
최근에 대한민국을 뒤흔든 미투 혁명에서 피해자는 끊임없이 자신의 피해 고백이 불순한 의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해야 한다. 피해자에게 자신의 순결을 증명하라는 요구는 남성 욕망이 반영된 탓이다. 춘향전에서 첫 번째 시련을 던져주는 사람이 가해자인 변사또라면 그보다 더 큰 시련을 던져주는 사람은 이몽룡이라는 사실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구경꾼인 우리는 미투 사건에서 벗어난 존재이지만 사사건건 개입하여 1차 가해보다 더 큰 가해를 가하는 이몽룡이다. 내가 보기에는 춘향전에서 변사또보다 나쁜 인간은 이몽룡이다. 그리고 미투 피해자의 진심을 끊임없이 의심하는 당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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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과 이몽룡 그리고 me too, part 2
춘향은 변 사또의 수청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숙청(죽음)을 당할 위기에 처한다. 암행어사가 된 이몽룡은 일부러 거지로 변장한 후에 옥중에 갇힌 춘향을 몰래 찾는다.
비루 먹은 개처럼 꾀죄죄한 모습으로 춘향 앞에 나타난 배삼룡, 아니 이몽룡.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보는 법. 몽룡 때문에 죽음을 앞둔 춘향 입장에서는 몽룡이라는 인간이 시들시들한 노란 싹수처럼 보였을 것이다. 아이고 ! 이 글러 먹은 인간아 _ 라고 타박을 할 법도 하지만 그녀는 거지 꼴을 하고 나타난 몽룡에게 변함없는 사랑을 맹세한다. 이 부분에서 몽룡, 감동 먹어. 그리고 몽룡과 같은 심정으로 바라보는 관객도 감동 두 번 먹어 x 2. 하지만 나는 이 옥중 장면에서 열광하는 몽룡과 관객을 향해 퍽유 세 번 날려 x 3. 시바, 지금 뭐하는 개수작이야 !
이 도령이 정상적인 사고 방식을 가진 놈이라면 하다못해 시름에 빠진 춘향에게 내일 너를 구해주겠으니 하룻밤만 더 견디라고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한 가닥 실오라기 같은 희망으로 절망을 견뎠던 춘향이 거지가 된 몽룡을 보고서는 절망한 나머지 자결이라도 했으면 어쩔 뻔했나. 그런 걱정은커녕 기껏 한다는 짓이 죽음을 앞둔 춘향의 절개(지조)나 시험하는 것이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 춘향이가 일편단심 민들레여서 좋겠다, 시발놈아. " 이 수작은 다음날에도 반복된다. 몽룡은 어사 출두 의전 퍼포먼스를 한 후에도 춘향을 시험한다. 그는 부채로 얼굴을 가린 채 이렇게 말한다.
" 수청을 들라 ! " 조마조마한, 몽룡도 관객도 모두 다 조마조마한 마음. 춘향이 침묵을 깨고 말한다. " 수청을 들겠나이다. 오늘 밤 화끈하게 놀아보아요. " 농담이다. 만약에 춘향이 어사의 수청을 수락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 해피엔딩일까, 해피 엔드일까 ? << 춘향전 >> 에서 가해자는 변 사또이고 피해자는 성춘향이며 이몽룡은 주변인에 가깝지만, 이 소설에서 진짜 나쁜 가해자는 이몽룡이다. 옥중 만남 장면과 어사 출두 장면에서 몽룡이 춘향의 절개를 시험하는 장면은 명백한 2,3차 가해'이다. 내가 춘향전과 안희정 미투 폭로 사건을 오버랩하는 이유이다. 가해자 안희정은 변 사또이고 피해자 ***은 춘향이다.
그리고 춘향이에게 끊임없이 의혹을 제기하는 네티즌들은 부채로 얼굴을 가린 채 익명으로 춘향이의 지조를 묻는 이몽룡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고전 << 춘향전 >> 이 가부장 남성의 욕망이 중심인 서사이면서도 정작 제목은 < 춘향전 > 이라는 데 있다. 왜, 몽룡전이 아니라 춘향전인가 ? 2008년 12월, 조두순 사건은 대한민국을 뒤흔들었다. 사건 발생 초기에 명명되었던 나영이 사건이라는 명칭은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에게 초점을 맞췄다는 비난에 직면하자 그 이후로 조두순 사건으로 바뀌었다. 하여, 나는 같은 이유로 << 춘향전 >> 을 << 변사또전 >> 혹은 << 몽룡전 >> 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동의하는 사람은 푸쳐핸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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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과 이몽룡 그리고 me too, part 3
시간 날 때마다 고백한 바, 나는 임권택 영화를 지독하게 싫어하는 남자. 욕하면서 보는 막장 드라마 시청자처럼, 특정인에 대한 악플도 그 사람을 향한 지속적인 관심의 변형이어서 오로지 까기 위해서 극장에서 임권택 영화를 돈 주고 봤다. 이 정도면 성실한 악플러가 아닐까 ?
아비가 딸에게 독약 먹여 눈멀게 하는 패륜을 예술혼이라고 구라치는 << 서편제 >> 를 보다가 실소한 이후, 꾸준히 임권택 영화를 보면서 실소를 남발했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안다고 이 맛에 돈 내고 영화를 잘근잘근 씹는다. 정점은 << 하류 인생 >> 이었다. 부부강간을 부부관계라고 포장하는 개구라에 경악을 금치 못해서 팔짝 뛰었던 기억이 난다. 시바, 이런 짓은 개구리도 안한다 ! 성관계를 거부하는 아내를 폭력으로 때려눕힌 후 섹스하는 장면 다음 컷 1)은 임권택의 여성관을 적나라하게 엿볼 수 있는 시그니처다. 이것은 영화도 후지지만 감독이 더 후진 케이스.
어디 그뿐인가 ? 영화 << 화장 >> 에서는 꼴에 구라파 예술 영화 흉내 낸답시고 영화 속 아내의 더러워진 여성 성기를 씻기는 장면을 노출시키는데(말 그대로 성기 노출 장면이다), 지금에 와서 다시 생각해도 이 장면에서 성기 노출이 꼭 필요한 장면이었는지 의아할 뿐이다. 성기를 노출시키면 예술이 된다 ?! 이 장면은 사전에 합의된 사안이 아니었다고 한다. 원래는 이 장면에서 상반신 노출만 하기로 했었는데 감독이 느닷없이 성기 노출을 포함한 전라 노출을 요구 2) 했다고 한다. 여성 입장에서는 무엇보다도, 무엇보다도, 무엇보다도 중요한 결정 사항이었을 텐데
촬영 도중에 번갯불에 콩 튀겨 먹듯이 불현듯 예술적 영감이 찾아왔드나, 이 영감탱이야. 모야. 이런 된장, 고추장, 간장, 이명박은 다스 공장 대장....... 허허 ! 평론가 정성일이 한국 영화의 금자탑 운운하며 꿀 빨았던 << 춘향전 >> 을 보다가 다른 감독이 만든 << 춘향전 >> 을 비교 평가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임권택의 << 춘향전, 2000 >> 에서 이몽룡은 칼을 뒤집어쓴 춘향 앞에 두 번 나타난다. 한 번은 옥에 갇힌 춘향 앞에 거지꼴로 나타나고 다음은 어서화 쓴 어사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옥에 갇힌 춘향을 만나는 장면에서 이 도령은 몰락한 폐족을 충실하게 연기할 뿐 절망에 빠진 춘향에게 솔루션을 제시하지 않는다. 걱정하는 쪽은 오히려 춘향이다. 그 유명한 사랑의 맹서. 서방님, 내가 죽거들랑 양지 바른 곳에 묻어주오. 싸랑해요. 이도령은 걱정은커녕 춘향의 굳은 맹서(절개)를 확인하고는 기분이 좋은 듯 옥을 나서면서 월매와 농담 따먹기 놀이를 하기도 한다. 내가 임권택의 << 춘향전 >> 을 보면서 느꼈던 의문은 이렇다. 이몽룡은 내일이면 죽는 춘향이에게 왜 그 어떤 위로도 하지 않았던 것일까 ? 저 깊은 절망 때문에 스스로 명을 끊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
어사 출도 장면에서도 이도령은 신분을 속인 채 춘향에게 수청을 들라는 제안을 한다. 두 경우(옥중 장면, 어사 출도 장면) 모두 춘향의 절개를 시험하는 장면이다. 반면에 신상옥 감독이 만든 << 성춘향,1961 >> 에서는 이몽룡이 옥에 갇힌 춘향을 만나는 장면이 없다. 그리고 어사 출도 장면에서도 고개 숙인 춘향에게 수청을 들라는 자극적인 스폰서 제안을 하지 않는다. 잰더 인식 측면에서 보자면, 춘향의 절개를 시험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신상옥의 << 성춘향,1961 >> 이 임권택이 만든 << 춘향전,2000 >> 보다 진보적이다. 반면에 북한 영화 << 춘향전,1980 >> 에서는 이몽룡이 옥에 갇힌 춘향과 만나는 장면이 있는데 사뭇 애절하고 인간적이다.
춘향은 거지꼴로 나타난 이몽룡을 보더니 대뜸 과거 시험 결과를 묻는다. 몽룡이 낙방했다고 하자 춘향은 고개를 푹 숙인다. 아놔, 나 좆된 거임 ?! 이런 표정이다. 그런 춘향 앞에 이몽룡은 말한다. " 춘향아, 이 밤 지나면 내 다시 올테니 한탄 말고 기다리오. (옥을 빠져나가다가 다시 춘향에게 다가오며) 내가 다시 오기 전에 스스로 명을 끊었다가는 그대의 소원도 듣지 않을 테니 마음 굳게 먹고 날 기다리오 ! " 내가 임권택의 춘향전을 보며 가졌던 의문을 북한 영화 속 이몽룡의 대사가 속 시원하게 풀어준다. 어사 출도 장면에서도 이몽룡은 고개 숙인 춘향에게 수청을 들라는 요구를 하지 않는다.
죽음을 넘나드는 마음 고생을 한 춘향에게 농담 따먹기 놀이를 한다는 것은 애인에 대한 예의가 아닐뿐더러 인간에 대한 예의도 아니다. 이처럼 3편의 춘향전을 비교 평가하다 보면 임권택 영화가 얼마나 비열한 잰더 감수성과 여성관을 가졌는지를 엿볼 수 있다. 내가 보기에 임권택 영화는 형편없는 영화다. 내 주장에 동의한다면 모두 다 푸쳐핸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