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가면과 문재인 정부




 



                                                                                                       한국인 일반의 평균 얼굴은 어떤 모습일까. 평균 얼굴'이란 만민의 평균치'일 것이다. 반면에 한국 미인의 평균값에서는 일반인 얼굴은 제외된다. 미인 중에서 평균치(데이터를 합성한)를 뽑은 얼굴이니까 말이다. 다음 사진은 한국 미인-들의 얼굴을 합성한 평균값이다.


미녀 가면






이 사진을 보고 누군가는 한가인을 닮았다고 생각할 것이고, 또 누군가는 김태희를 닮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또 누군가는 손예진을 닮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미인 사진을 기계적으로 합성한 이 사진 속 여인은 어디서 많이 본 미인이지만 실제로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미인이다. 설령, 싱크로율이 100%에 가깝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그것은 " 닮은꼴 " 이지 " 존재 증명 " 은 아니다. 당연히 이 가상의 얼굴을 닮은 사람은 평범한 범인보다는 실제 미인이 이 가상의 미인을 닮았을 가능성이 더 높다. 굳이 설명이 필요없는 대목이다. 북한 응원단이 응원가 < 휘파람 > 을 부르며 응원 도구로 사용한 미남 가면을 두고 논란이 발생했다. 이 가면'이 김일성 얼굴'이라는 것이다. 남조선 축제의 장에 북조선 김일성 가면이 등장했으니 논란이 일파만파. 하지만 이 논란은 단순한 해프닝에 불과하다. 김태희 얼굴이 미녀 가면과 닮은꼴인 이유가 김태희가 미녀라는 데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김일성 얼굴이 미남 가면과 닮은꼴인 이유는 김일성이 미남이라는 데 있다. 무엇보다도 이 논란이 엉터리인 까닭은 김일성 얼굴을 신성시하는 국가에서 김일성 눈깔을 도려내고 그깟 가면이나 만들었다는 점에서도 해명이 가능하다. 더군다나 그 시대 존엄을 상징하는 얼굴을 바닥에 내려놓는 불경은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뭐, 눈만 뜨면 문모닝하는 자유한국당(스러운) 같은 쓰레기들이야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은 든다. 하지만 내가 정작 놀랐던 지점은 김일성 가면 논란을 두고 문재인 정부에게 실망했다는 입진보인 척하는 네티즌의 댓글-들'이다. 설령, 백 번 양보해서 그 미남 가면이 실제로 김일성 가면이라 해도 문재인 정부가 비난받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   비난을 받아야 한다면 북한 응원단이지 문재인 정부는 아니지 않은가 ?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해 보라. 만약에 일본 관람객들이 아베 가면을 쓰고 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외쳤다면 당신은 문재인 정부를 비난할 것인가, 아니면 아베 정부를 비난할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모든 잘못은 문재인 정부'에게 돌린다.  최근의 언론 보도를 보고 있으면 광기가 느껴진다.  평창올림픽 기사의 기승전 다음은 북한이다.  언론도 문제이지만 그 언론에 부역하는 당신도 문제다.  이제는 그 지긋지긋한 기레기 언론의 여론 선동질과 조작질에 속지 않을 때도 되지 않았나. 그렇게 당하고도 정신을 못 차리나 ?  한 번 속으면 속인 사람이 나쁜 놈이지만 같은 일로 두 번 속으면 속은 사람이 바보'다.



 

 

 

 


덧대기 ㅣ 내가 보기엔 김일성 가면으로 논란이 되고 있는 그림은 옛날 교과서에 등장하는 바른 어린이 그림체를 닮았는데, 그렇다면 옛날 교과서는 북한을 찬양하는 행위가 되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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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02-12 11: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번 해프닝에서 압권은 국당의 논평이었습니다.
국민들이 그렇게 인식하면 맞다는...

그렇다면 늬들도 우리가 적폐라고 인식하면
인식하는 그대로 적폐가 되는 거냐고 되묻고
싶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8-02-12 11:24   좋아요 1 | URL
정확한 워딩은 : 정부는 김일성 가면 응원에 대해서 ‘김일성이 아니다’ 하면서 방어하기에 급급하다. 우리 국민과 언론이 보기에 ‘김일성 가면’으로 인식하면 김일성 가면인 것이다. 국민정서를 고려한 응원이 되도록 적절한 조치가 필요한 일”


그런 식의 논리가 가능하다면 우리 국민이 보기에 박근혜를 닭으로 인식하면 박근혜는 사람이 아니라 닭이다.


이런 말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 ㅋㅋ

우우 2018-02-12 11:30   좋아요 1 | 수정 | 삭제 | URL
생각은 자유니까요.

하지만 김일성 가면은 관련 사진이나 자료등이 이미 비교 대조 가능 합니다.
비교 가능한 것을 왜 자꾸 회피하는지 모르겠네요.
젊은시절 김일성 사진 보면 저가면 김일성인거 대번 알아볼수 있어요.

곰곰생각하는발 2018-02-12 11:33   좋아요 3 | URL
김일성 가면이라면 문재인 정부 욕을 하지 말고 김정은 정부 욕을 하세요..
그런 식의 논리라면 문재인 정부는 피해자인데 가해자 욕은 안 하고 왜 피해자 욕을 하고 지랄이신지..

그리고 아니 그렇게 떳떳하다면 김일성 가면이 맞다고 하는 놈은 하나같이 다 왜 비로그인으로 댓글다는지..

Don´t talk rubbi 2018-02-12 11: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김일성 가면 맞습니다.

김일성이 맞는데 왜 아니라고 하십니까?

글 읽어보니 정말 보고 싶은거만 보십니다.

여당이 비난받아야할 이유는 그것을 아니라고 당신처럼 괴상한 논리를 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도한 언론을 가짜뉴스라며 통제하기 때문입니다.

언론의 자유는 어디갔습니까?

당신처럼 무조건 지지하는 사람들 때문에 중우정치로 귀결되는 겁니다.

선동과 조작은 지난 정부만의 유산이 아닌듯 합니다.

이글 자체가 궁색합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8-02-12 11:26   좋아요 0 | URL
아니,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아니 그 글을 최초 보도한 노컷뉴스가 오보였다고 사과하고 삭제했는데 무슨 말 ?!
노컷뉴스 언론 자체의 자유에 의해서 오보였다고 고백하고 삭제한 거임..

곰곰생각하는발 2018-02-12 11:30   좋아요 0 | URL
로그인하고 비판하기에는 쪽팔려서 비로그인 댓글로 다네..
쓰레기 토크는 내가 아니라 님인듯
떳떳하다면 로그인 하고 들어오시길...

곰곰생각하는발 2018-02-12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신기해. 김일성 그림이 맞다면 떳떳하게 로그인 댓글 달 텐데
뭐가 그리 쫄아서 비로그인 댓글을 다시나. 쪽팔린 거지. 로그 댓글 달면 뽀록나거든.. 쫄보새끼들..

우우 2018-02-12 12:14   좋아요 1 | 수정 | 삭제 | URL
비로그인이 뭐가 중요한 문제인지 모르겠네요.
김일성 가면의 진실여부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논점을 일탈해서 감정적 대응으로 일관하시네요.
김일성가면을 왜 김일성이 아니라고 해야하나요?

‘벌거벗은 임금님‘ 안데르센 동화 아시나요?
거기에 무지한 임금과 사기꾼, 그리고 동조하고 찬동하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벌거벗고 거리행진을 하는데 어린아이만 진실을 말하는 내용입니다!

김일성 가면이 무슨 대수 일까요? 북한이 저런거 하루이틀도 아닌데...
다만 북한측에 주의경고 하고 넘어갈 사안에 대해, 정부측이 궤변을 더하고 사람들을 우민취급하니까 문제죠.
아직도 그저 잘생긴 사람을 가면으로 쓴거라고 생각하시나요?

그리고 이런 댓글 쓰면 바로 수구기득권에, 욕을 먹어야 하는군요.

비로그인해서 글쓰기 잘했네요.
똥이 무섭다기보다 더러워서 피하고 싶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8-02-14 12:22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 가면이 뭐가 중요한 문제인지.. 이 빙시야..

syo 2018-02-12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지 저 백지얼굴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본다, 괴상한 논리, 가짜뉴스라며 언론 통제, 무조건 지지.

와, 이렇게 정확하면서도 통렬한 자기 인식이라니...... 소크라테스가 저 댓글을 칭찬합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8-02-12 11:55   좋아요 0 | URL
그지새끼들이죠... 그러니깐 백색얼굴로 유령처럼 등장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samadhi(眞我) 2018-02-12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든게 노무현 탓이다로 몰아가던 그때처럼 하고 있는데 문꿀오소리들이 가만있지 않을 거예요.

곰곰생각하는발 2018-02-12 11:55   좋아요 0 | URL
미디어 환경이 이제는 180도 바뀌었습니다. 종이신문의 권위 몰락, 새로운 미디어의 선전, 그리고 이제는 팩트 확인이 기자에서 시민으로 주도권이 바뀌었다는 것도 그들에게는 불리한 거죠.이젠 시민 누구나 기사의 펙트를 체크할 수 있습니다..

akardo 2018-02-12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 저래서 전 비로그인 댓글은 막아놨습니다.그러니 아주 조용하더군요. 예전 노 전대통령 때처럼 여론 조작이 가능할 거라 믿는 수구 기득권들이 우스워요. ㅋㅋㅋㅋㅋ

곰곰생각하는발 2018-02-12 11:53   좋아요 1 | URL
한번 속으면 속인 놈이 잘못이지만 두 번 속으면 속은 놈이 바보죠. 경험칙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호로요이 2018-02-14 19: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김일성 가면은 맞고, 문정부의 잘못은 아니다.
머 이정도가 사실에 가까운거 같네요
 

 

 

 

 

 

 


 




우물 안 개구리



 



 

                                                                                                                                                                                           개인의 모든 경험칙'은 " 일반화의 오류 " 에 빠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 개인 - 부분 > 은 < 집단 - 전체 > 에 비추어 본다면 매우 작은 편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 세계-내-개인 " 은 모두 개구리다, 우물 안 개구리다.

최근에 서지현 검사가 안태현 성추행 사건을 고발하고 임은정 검사가 이에 동조하며 검찰 내부의 사악한 욕망과 은폐를 폭로했던 행위도 일반화의 오류 비판'에서 벗어날 수 없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개인이 경험하는 총량은 전체 DB 중에서 매우 작은 편린에 불과하다. 그래서 조직을 사수해야 하는 홍위병들이 내부 고발자가 폭로한 사실과 경험을 공격하는 프레임으로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것이 " 일반화의 오류 " 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서지현 검사는 개인적 경험을 일반화해서 검찰 조직 전체가 마치 성범죄가 만연한 집단인양 그따구로 매도하지 마시져 ~                            

왜 아니 그러겠는가. 맞는 소리이다. 성추행을 일삼는 검사의 쪽수보다는 정직하게 자기 일을 수행하는 검사의 쪽수가 더 많을 테니까. 그렇다면 우물 안에 갇힌 개구리는 우물 안에서 바라본 하늘에 대해서는 입도 뻥긋할 자격이 없는 것일까 ?  누가 그 개구리에게 돌을 던질 수 있나.  최영미 시인의 시 < 괴물 > 에서 불붙기 시작한 논란에 대해서 이승철 시인이 페이스북을 통해 " 우리 EN 시인 " 을 옹호하며 최영미를 공격하는 태도도 홍위병의 그 수준을 벗어나지 않는다(전문은 아래 부록으로 옮겨 놓는다).  그가 페이스북에 남긴 글 중에서 내 눈에 단연 띄었던 것은 " 성처녀 " 라는 표현이었다.

봄처녀도 아니고 성처녀 ????!!  이 이야기는 일단 잠시 미루기로 하자.  그는 " 그녀가 이 시점에서 자기 체험을 일반화해서 문단 전체에 만연한 이야기로 침소봉대해 쏟아내는지 조금 의아했다. " 라고 말한 후 그녀가 " 피해자 코스프레를 남발한다 " 고 직격탄을 날렸다.  그는 글에서 그녀가 쏟아낸 말의 신뢰를 무너뜨리기 위하여 1994년으로 되돌아가서 그녀의 행실머리를 나열한다. 조금 유식하게 말하자면   :   메시지를 반박할 수 없을 때에는 메신저를 공격하라 _ 라는 고전적 정치 전술을 활용한 것이다. 즉, 때린 놈도 잘못이지만 맞은 년도 뭔가 맞을 짓을 했겠지 - 전술인 것이다.

읽다 보면 시인 이승철이 작성한 문장이라기보다는 가수 이승철이 작성한 문장이 아닐까 라는 의심이 들 정도로 문장과 논리가 조악하다. 그래도 참고 읽다 보면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온다. 나는 이 문장에서 유레카를 외쳤다. " 그녀는 실천문학사에서 < 돼지들에게 >란 시집을 펴낸 적이 있었다. 그 시집을 보면 시적 소재로 등장한 수많은 문화계, 문학계 인사들이 나온다. 시의 요점은 모두들 그녀에게 했다는 성적 추행의 이력이다. 어찌 보면 지독한 남성 혐오에 가까운 트라우마일 수도 있다. 왜 그녀는 그 시집에 등장한 수많은 유명인사들과 일부러 만나 그런 사건을 만들어야 했는가. 어찌 보면 난 그게 의문스러웠다. "

이 긴 문장은 술부이다. 그렇다면 주부는 ?  성처녀이다. 주부와 술부가 호응하니 메시지는 분명하게 읽힌다. 그러니까 성처녀 행세를 하는 최영미는 알고 보니 수많은 유명인사들과 일부러 만나 그런 사건들이나 만들어내는 경험 많은 여자'라는 의미가 담긴 것처럼 읽힌다. 성범죄 사건에서 사건 가해자들이 피해자들에게 덧씌우는 전형적인 공격과 유사하다. 비열하다, 졸라 !  이 논란의 핵심은 EN이지 최영미가 아니다. 이 논란에서 최영미라는 캐릭터는 별개의 문제이다. 핵심은 어르신의 성추행이니까. 끝으로 이승철 씨에게 한마디 : 이봐요, 명색이 시인인데 한글 맞춤법은 좀 지킵시다아.






에필로그



올해 새로 뽑힌 시인 협회 회장은 감태준이다. 그는 과거 성추문 논란으로 학교에서 해임된 전력이 있는 시인이다.








부 록






이승철 시인의 페이스북 글 전문


최영미 시인이 갑자기 떴다. 미투라고 했다. JTBC 손석희ㅡ최영미 인터뷰를 보면서 내내 심기가 불편했다. 문단에 만연한 성추행이라니, 최영미는 참으로 도발적인 발언을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잣대로 마치 성처녀처럼 쏟아냈고, 천하의 손석희는 한국문단이 "아 이럴수가 있나" 하며, 통탄하고 있었다. 메이저 출판사와 무소불위의 평론가들의 묵계를 강조하면서 그녀는 피해자 코스프레를 남발했다.

최영미의 그런 발언에 대해 절실성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왠지 내가 그녀의 가해자가 된듯 나도 모르게 안절부절하고 있었다. 최영미 인터뷰는 한국문단이 마치 성추행집단으로 인식되도록 발언했기에 난 까무라치듯 불편했다. 왜 그녀가 이 시점에서 자기 체험을 일반화해서 문단 전체에 만연한 이야기로 침소봉대해 쏟아내는지 조금 의아했다. 지난번 호텔 집필실 사건이 터졌을 때 썩 달갑지 않았지만 그래도 난 그녀를 옹호했었다. 시인도 인간이기에 욕망에 자유로울 수 없지 않은가. 하긴 그녀는 손석희와 인터뷰 때 추악한 문단을 떠난지 오래였다고 했다. 허나 그 오랜 기억이 문단의 현재적 풍토인양 뉴스화됐다.

내가 1993년에 김남주 시인을 상임이사로 모시고 민족문학작가회의(현 한국작가회의) 사무국장으로 일할 때 황석영 선생 귀국 문제가 조직의 현안으로 대두된 적이 있었다. YS 정권 초창기였다. 그해 4월에 황석영 작가가 오랜 망명생활 끝에 귀국하여 안기부(국정원)에 체포되었기에 <국제 엠네스티> 등이 긴급행동요구를 발동해 황석영 석방문제가 최대 현안으로 대두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최영미 시인이 작가회의 사무실에 놀러온 적이 있었는데 때마침 영국 엠네스티 본부에서 황석영 문제로 전화가 와서 (서)울대 출신인 그녀에게 바꿔준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매우 유창하게 영어를 구사했기에 난 그녀에게 작가회의 사무국 간사로 일할 수 있냐고 요청했고, 그녀가 흔쾌히 수락했기에 이후 한동안 사무실에서 함께 일한 적이 있었다.

최영미 시인, 그녀는 선병질적으로 튀는 성격이었다. 매우 완강한 자존의 소유자였고, 어찌 보면 유아독존적 처신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기 시에 대해 추호의 비판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건 어찌보면 창비와 언론이 만들어낸 <최영미 현상>이 불러온 결과였기에 그녀의 무례함에 대해 누구도 대놓고 반박하지는 못했다. 그즈음 이 땅의 민족문학은 사실상 최영미 현상으로 인하여 절단나고 있었다. 1) 그녀의 시 구절 ㅡ "컴퓨터와 씹하고 싶다"는 말만이 오랫동안 술좌석에 회자되었을 뿐, 그때 우리는 그녀가 야기한 환멸의 미학에 얼마나 통탄스러워했던가.

1994년 어느날이었을 것이다. 서울 마포 아현동 작가회의 사무실에서 <민족문학작가회의 시분과 합평회>가 열렸다. 그날 창비에서 출간된 그녀의 첫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잔치는 끝났다"는 표현은 서정주 시의 표절이었다) 2)에 대해 수십명의 시인들이 참가한 가운데 토론회를 가진 적이 있었다. 저자인 그녀는 물론 민영 시인 등 원로 문인들도 자리를 함께 했는데, 몇몇 시인들이 그녀 시에 대해 사소한 비판을 했는데, 그때 그녀는 좌중이 놀랄 정도로 난리 부르스를 쳤다. 숫제 안하무인이었다고 할까. 그 싸가지없던 악다구니가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합평회란 시의 문제점에 대해 이런저런 비판이 오가는 게 상례건만 합리적 대화가 불가능한 정도로 그녀는 피해의식으로 부르르 온몸을 떨었다.

그무렵 그녀를 둘러싼 이런저런 소문이 있었다. 그녀 시집에 등장한 첫남편(노무현 정권 시절 청와대에 근무했었다)에 대한 트라우마에 대해서도 얘기를 들었다. 남녀간 사랑이란 순탄치 않게 파국을 맞으면 둘 사이의 과거는 시쓰는 시인에게 증오로 표출될 수도 있다. 철학자 니체가 루 살로메의 가혹한 채찍을 언급한 것처럼 최영미는 그 남자의 혁띠를 들먹거렸다. 물론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랑의 파탄은 통상 상대에 대해 좋지 않은 기억만을 뇌리 깊숙이 각인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그즈음 그녀와 사귀고 있던 어느 소설가(유명 출판사 사장이었다)가 내게 무심결에 한 말을 듣고 난 깜짝 놀란 바 있었다. "야, 이승철 네가 최영미한테 무슨 잘못을 한 거야. 혹시 너, 달라고 추근거린 거 아니야. 최영미가 네 이야기가 나오면 그딴 인간과 왜 자주 만나냐고 난리치더라. 너와 다시는 만나지 말라는데 네가 무슨 잘못을 한 거야."

ㅡ 아, 잘못이라뇨? 형님! 내가 그 잘난 여자한테 무슨 잘못을ᆢ 다만 황석영 석방대책 건으로 사무국 간사로 선임했는데, 모 선배시인이 그 (미친) 여자를 왜 작가회의서 일하게 하냐고 해서, 할수없이 본의 아니게 한 달도 못되어, 그만두라고 한 적이 있었을 뿐입니다. 어쨌든 내가 미안하다는 사과편지를 건네주었고, 그 후로 사적으로 만난 적 이 없는데, 이런 제기럴 영미ᆢ.

그 선배작가는 최 시인이 날 우습게 여기더라는 말을 이후로도 안주삼아 몇번이나 했는데, 그럴 때마다 난 이런 씨부럴 하며 울화를 달래야 했다. 십여년 전인가? 그녀는 실천문학사에서 <돼지들에게>란 시집을 펴낸 적이 있었다. 그 시집을 보면 시적 소재로 등장한 수많은 문화계, 문학계 인사들이 나온다. 시의 요점은 모두들 그녀에게 했다는 성적 추행의 이력이다. 어찌보면 지독한 남성혐오에 가까운 트라우마일 수도 있다.

왜 그녀는 그 시집에 등장한 수많은 유명인사들과 일부러 만나 그런 사건을 만들어야 했는가. 어찌보면 난 그게 의문스러웠다.그 시집을 읽고 이걸 팩트로 믿어야 하나, 물론 시적 장치이지만, 여러 의구심이 들었다. 최영미 발언이 용기 있다고 한다. 어허 그렇다면 한국문학의 상징, 우리 En시인은 어찌할꼬나. 물론 En 시인의 기행에 대해서 숱한 얘기를 들은적 있지만 먼먼 소싯적 얘기를 현재 진행형하여 매도하는 건 조금 납득할 수 없다.남자의 성적 욕망이란게 얼마나 무서운가.그리고 그 욕망의 피해자가 받는 고통은 또 얼마나 지속적이고 치유 불가능한가.그걸 최영미 발언을 통해서 확인해본다.

1994년이던가? 소설가 이문열이 <시인>이란 소설로 En를 매도하다가 자신의 소설을 폐기처분한 바 있는데, 이제 최영미가 다시 등장했다.
난 미투가 두렵진 않다. 나도 한때는 여자사람을 좋아했는데 누가 나를 이십년, 삽십년 전 일로 미투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잠시 옛날을 되돌아 본다. 타인의 불행이 더이상 나의 행복은 아니다.허나 미투 투사들에 의해 다수의 선량한 문인들이 한꺼번에 도매금으로 매도되는 현실이 되지 않기를 바랄뿐이다.





 






​                                              



1) " 최영미 시인, 그녀는 선병질적으로 튀는 성격이었다. 매우 완강한 자존의 소유자였고, 어찌 보면 유아독존적 처신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기 시에 대해 추호의 비판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건 어찌보면 창비와 언론이 만들어낸 <최영미 현상>이 불러온 결과였기에 그녀의 무례함에 대해 누구도 대놓고 반박하지는 못했다. 그즈음 이 땅의 민족문학은 사실상 최영미 현상으로 인하여 절단나고 있었다. "


이 문장에서 최영미를 신경숙으로 바꾸면 오히려 더 선명한 메시지를 얻을 수 있다. 신경숙은 선병질적으로 튀는 성격이었고 매우 완강한 자존의 소유자였으며 유아독존적 처신이었다. 그녀는 자기 소설에 대해 추호의 비판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건 어찌보면 창비와 언론이 만들어낸 < 신경숙 현상 > 이 불러온 결과였기에 그녀의 무례함에 대해 누구도 대놓고 반박하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 이 땅의 민족문학은 사실상 최영미 현상으로 인하여 절단나고 있었다 " 라고 분석한 대목은 어이가 없다. 이승철은 최영미의 << 서른 잔치는 끝났다 >> 가 이 땅의 민족 문학을 작살낼 만큼 파괴력이 높았다고 분석했는데(나는 그녀의 이 시집이 매우 후졌다고 평가하는 쪽이다만), 그것은 최영미 때문이 아니라 장정일, 하일지, 유하처럼 새로운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의 괄목상대할 만한 성장세 때문이라는 것이 보다 정확한 분석일 것이다. 명색인 문인인데 문단을 이해하는 이해력이 굉장히 둔한 편이다.



2) 이승철은 < 서른 잔치는 끝났다 > 라는 제목이 서정주를 우라까이했다고 비판했는데, 아...... 진심으로 배꼽을 잡고 크게 웃었다. 잔치는 끝났다는 표현은 일상에서 관용구처럼 쓰이는 표현일 뿐이다. 서정주 이전에도 널리 쓰였던 표현이다. 서정주가 새롭게 직조한 표현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것을 두고 표절 운운하는 것은 구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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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18-02-08 1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다면 우물 안에 갇힌 개구리는 우물 안에서 바라본 하늘에 대해서는 입도 뻥긋할 자격이 없는 것일까?

; 제가 페미니즘에 대한 언급할 때, 상대로부터 반격의 의미로 자주 받는 질문이 ‘마립간의 경험을 일반화 할 수 있습니까?‘라는 것인데, 그 때, 곰곰발 님의 위 문장을 사용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8-02-08 11:11   좋아요 1 | URL
입도 뻥긋할 자격은 주어야지요.. ㅎㅎ

저는 정말 답답한 것이 막힌다 싶으면 무작정 그건 일반화의 오류예요.. 이런 말 하는 부류입니다.
정말 짜증남..니다..

마립간 2018-02-08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N 시인이 누구입니까? 인터넷에는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고 한던데요.

곰곰생각하는발 2018-02-08 11:10   좋아요 0 | URL
고은입니다.. 유승민이 대놓고 교과서에서 빼자고 한 기사가 전송된 걸 보니 이젠 아예 이름 까고 말하는군요.

cyrus 2018-02-08 1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 사건을 계기로 연말에 ‘고X’을 언급하는 기레기들이 없을 것 같군요. 그래도 한 번 기레기는 영원한 기레기라서 연말에 정신 나간 짓을 하는 기레기가 있을 것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8-02-12 10:25   좋아요 0 | URL
아마, 이 기사를 황석영이 가장 좋아할 겁니다.
황석영이 은근 고은을 싫어했거든요... 솔직히 고은은 김대중과 노무현 정권 때 큰 측면이 있기에
황석영이 열받아서 이명박 정권에 붙었다는 소리도 있었죠. 항간에는..

잠자냥 2018-02-08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사람 페이스북 가보니 소속이 ‘한국문학평화포럼‘이라고 나오던데 거기 바로 옆에 명예회장 ‘고은‘이라고 적혀 있더군요. 참나.... 가지가지합니다. 말도 안되는 문장과 논리로 홍위병 노릇이나 하고 있고 정말 부끄럽지도 않은가 봅니다.

좀전에 어떤 기사 보니 고은이 마스크에 선글라스에 모자까지 쓰고 수원 자택에서 바깥 동정 살피는 모습이 포착되었더군요. 그토록 구질구질할 수가.....

곰곰생각하는발 2018-02-12 10:23   좋아요 1 | URL
저도 그 페이스북 찾아서 봤습니다. 프필에 고은이란 글자가 박혀 있더라고요.. 아하, 했습니다..

저도 그 기사 사진 봤는데.... ㅎㅎㅎㅎ 아이고야. 이거 한국 문학의 위대한 거성이던 분이 어느새 경찰 포토 라인 앞에 설 떄 입는 패션 스타일을 그대로 따라하셔서 놀랐습니다. 아니, 떳떳하시다면 왜 모자 쓰고 마스크 쓰고 그러죠 이해 불가입니다..

수다맨 2018-02-08 1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최영미의 성추행 경험과 폭로‘와 ‘최영미의 평소 성격(타인에 대한 뒷담화? 자기 작품에 대한 타인의 합리적인 비판 거부?)과 협애한 문학성‘은 당연히 구분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 둘은 전혀 다른 얘기이지요.
전자가 A(성추행 경험과 폭로)이고 후자가 B(최 시인의 성격과 문학성)라면, B라는 원인 때문에 오늘날 A라는 사건이 발생해서 전체가 매도 당하고 있다는 식의 논리는 그릇된 것이라고 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8-02-12 10:21   좋아요 0 | URL
이런 것을 두고 전문용어로 물타기라고 하는 겁니다..

samadhi(眞我) 2018-02-09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장이 토할 것 같아요. 조금만 지나면 곧 이불킥하게 될 글을 이렇게 대놓고 쓰는지. 근데 글을 보니 이불킥 따위 할 사람도 아닌 듯하네요.

곰곰생각하는발 2018-02-12 10:22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조금 쫄았을 듯합니다... 억지 논리를 펼치다 보니 논리가 억지일 수밖에요..
 

 



 



EN의 연애담


 


 

                                                                                                    어느 날, 릴케는 두이노 성 주변을 산책하다가 환청을 듣는다. " 내 울부짖은들 천사의 열에서 누가 들어주랴..... " 이 환청에 영감을 받은 젊은 시인은 10편으로 구성된 << 두이노의 비가 >> 를 완성한다.

20페이지가 채 안되는 분량인데 이 시를 완성하는데 걸린 세월이 10년이었다.  37세 때 쓰기 시작한 " 비가 1 " 은 47세 때 " 비가 10 " 으로 끝났다. 이 장고의 세월 동안 시인은 얼마나 많은 퇴고에, 퇴고에, 퇴고에, 퇴고를 거듭했을까. 말머리를 오랜 장고 끝에 완성한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 두이노의 비가 >> 로 시작한 이유는 최영미 시인이 < 괴물 > 1) 이라는 풍자시에서 언급한 시인 EN과 비교 평가하기 위해서다. 이 시를 읽고 나서도 EN이 누구인지 모른다면 굳이 이 글을 읽을 필요도 없다. 과연 대한민국에서 시집 100권을 낼 정도의 역량을 가진 시인'이 누가 있을까.

아니, 전세계를 통틀어 보아도 살아생전에 시집 백 권을 출간하며 이 시대의 어른으로 숭앙 받는 시인은 그가 전무후무할 것이다.  보다 정확하게 기술하자면 그가 낸 책은 시집 외 잡다한 목록까지 포함하면 150권이 넘는다.  물론 다작을 한 작가라고 해서 비판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조르주 심농은 400편의 추리소설을 내놓았고,  스티븐 킹은 500편의 작품을 내놓았다(무엇보다도 스티븐 킹이 놀라운 점은  원고지 분량만 놓고 보자면 원고지로 쌓아올린 종이 바벨탑에 도전할 작가는 없다는 점이다).  하지만 EN의 다작이 문제인 이유는 시라는 장르가 속필이 불가능한 영역이라는 데 있다.

EN의 시는 깊이도 없고 넓이도 없고 높이도 없다. 시가 반드시 " 묵은지 " 일 필요는 없으나 적어도 " 겉절이 " 를 내놓고는 슬로푸드'라고 자랑하는 것은 면이 서지 않는 짓이 아닐까 ? EN의 시가 詩답지 않아서 시답지 않은 시시한 시'인데도 불구하고 노벨상을 발표할 계절이 오면 기자들이 그가 사는 수원 집 앞에서 배수진을 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내 정치에 능한 그와 그의 이너서클이 만들어낸 아우라가 아니었을까 ? 신경숙 신화가 문단 내 사내 정치가 만들어낸 허수이듯이 EN 신화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 사내 정치 > 이중적이며 중첩적 의미로 사용했는데 사내는 사내(男兒)이면서 사내(社內)이다. 

신경숙이 사내 정치에서 승자가 될 수 있었던 데에는 그가 철저하게 명예 남성 역할을 자행하며 남성 욕망을 지지했기 때문이다.

 




​                                    

 

1) 괴물, 최영미




괴물


En선생 옆에 앉지 말라고
문단 초년생인 내게 K시인이 충고했다
젊은 여자만 보면 만지거든

K의 충고를 깜빡 잊고 En선생 옆에 앉았다가
me too
동생에게 빌린 실크 정장 상의가 구겨졌다

몇 년 뒤, 어느 출판사 망년회에서
옆에 앉은 유부녀 편집자를 주무르는 En을 보고,
내가 소리쳤다
'이 교활한 늙은이야!'

감히 삼십 년 선배를 들이받고 나는 도망쳤다
En이 내게 맥주잔이라도 던지면
새로 산 검정색 조끼가 더러워질까봐
코트 자락 휘날리며 마포의 음식점을 나왔는데,

100권의 시집을 펴낸
'En은 수도꼭지야. 틀면 나오거든
그런데 그 물이 똥물이지 뭐니'
우리끼리 있을 때 그를 씹은 소설가 박 선생도
En의 몸집이 커져 괴물이 되자 입을 다물었다

자기들이 먹는 물이 똥물인지도 모르는
불쌍한 대중들

노벨상 후보로 En의 이름이 거론될 때마다,
En이 노벨상 받는 일이 정말 일어난다면,
이 나라를 떠나야지
이런 더러운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아

괴물을 키운 뒤에 어떻게
괴물을 잡아야 하나


ㅡ최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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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adhi(眞我) 2018-02-07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에 한창 난리가 났던 박진성 시인은 저도 뭣 모르고 막 욕했는데 무고한 것으로 드러났지요.
은태할배는 범신할배는 으~웩

곰곰생각하는발 2018-02-07 14:24   좋아요 0 | URL
몸사릴 할베들 많죠. 방석집 좋아하시는 어르신들이 많습니다.. ㅎㅎ

samadhi(眞我) 2018-02-09 13:39   좋아요 0 | URL
참 은태 할배는 고은 시인 본명인 거 아시죠? 고은태.

수다맨 2018-02-07 15: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는 굉장히 화가 났는데 한편으로 이런 생각도 들더군요. 최영미 시인이 (이런 폭로시를 쓴 의지와 열정은 지극히 존중할 만하지만) 아주 예전부터 소영웅주의와 자기 연민에 빠져 있지는 않은가 하고 말이죠. 저는 예전부터 소외와 오해만 받는 용감한 (그래서 아주아주 불쌍하기 그지없는) 나 VS 악랄하고 몰가치하고 파렴치한 전체 집단의 구도를 그의 시에서 여러번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최영미의 작품 세계는 80년대 참여문학의 나이브한 연장이자, 공지영의 시인 버전 같다는 인상이 들더군요.
저는 최영미 시인의 이번 폭로와 고발을 존중하고 지지하며 이에 연루된 해당인은 그만한 책임과 대가를 당연히 짊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녀가 ‘나는 문단의 왕따‘이다, ‘나는 죽은 목숨이다‘라는 식으로 반복해서 말하는 것은 약간은 오버이자 난센스 같다는 인상도 듭니다. 저는 만일 최영미의 시 세계가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면 그것은 ‘가부장적이고 여혐적인 문단 체제‘ 뿐만이 아니라 그녀의 시작 역량이 (그녀가 진단한 것보다) 뛰어나지 않다는 데서도 찾아져야 한다고 봅니다. 저는 시인이 이러한 것들(체제의 더러움과 추악함과 자신의 문학적 공력)을 모두 돌아볼 줄 아는 균형적인 안목도 마땅히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어쨌거나 저는 EN 시인을 문학적으로도 좋아하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인격적으로 싫어할 이유까지 생겼군요.

곰곰생각하는발 2018-02-07 15:56   좋아요 1 | URL
제가 두 곳에 같은 글을 올리는데 네이버에 단 저의 댓글 내용은 이렇습니다.
최영미의 미투를 지지하지만, 솔까말 최영미는 시를 못 쓰는 시인이다. 그것도 사실이다.. 뭐,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전 남성 권력의 폭압과 함께 그녀 스스로의 시인으로서의
역량 미달도 지금의 쇠락의 결과라는 생각이 듭니다.

2018-02-07 17: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2-07 17: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2-07 17: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2-07 17: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2-07 18: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시선  :



 

 

 

 

 


 

이재용을 향한 편애와 편견



 


                                                                                                         책은 사서 읽지만, 읽은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읽은 경우는 거의 없다. 내가 자주 들춰 보는 책은 한정되어 있다. 그것도 대부분은 필요에 의한 발췌독이다(니체 전집, 프로이트 전집, 아케이드 프로젝트, 사랑의 단상, 두이노의 비가 따위).

 

가성비와 효용성만 놓고 보자면  :  한 번 읽고 나면 다시 읽지 않을 책은 사는 것보다는 도서관에서 빌리는 것이 합리적 소비라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 두 번 다시 읽지 않은 책은 책장에서 비울 생각이다(라고 쓰고 있지만, 과연 내가 그럴 수 있을까 ?).  그 자리를 각종 사전과 도감으로 채우고 싶다. 도감 중에서도 가장 가지고 싶은 도감은 보리 출판사에서 기획한 << 세밀화로 그린 보리 어린이 도감 >> 시리즈'다. 도감은 세부 목록(동물보감, 식물보감, 동물흔적보감, 양서파충류도감, 갯벌도감, 민물고기도감, 나비도감, 나무도감, 곤충도감, 풀도감, 새도감, 버섯도감, 바닷물고기도감)을 설정한 후 

그림이나 사진을 모아서 실물 대신 보면서 읽을 수 있도록 엮은 책'인데 읽는 재미와 함께 보는 재미가 가미되어 기분이 좋아진다. 무엇보다도 도감은 사진보다는 그림(세밀화)으로 구성된 책이 월등히 훌륭하다. 사진이 실물을 그대로 재현하는, 초정밀 광학적 세계의 끝판왕이기는 하나 독자가 그림을 이해하는 가독성 측면에서 보자면 사람 손으로 그려진 세밀화는 사진보다 가독성이 뛰어나다. 그렇기에 동식물 도감은 세밀화로 구성된 책으로 읽어야 한다. 그 차이는 분명하다. 사진은 광학 기계의 시선으로 바라본 상이고 그림은 사람의 시선으로 바라본 상이다.

그러니까 세밀화는 독자가 직접 눈으로 보는 것과 같은 효과를 준다. 인간이 한 편의 그림 같은 사람(혹은 풍경)을 좋아하는 이유이다. 사진을 찍을 때, 클로즈업과 부분 초점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사진 렌즈에 의해 포착된 상은 편견이 배제된 상이다. 반면에 사진 렌즈가 아닌 사람의 홍채에 의해서 재현된 상은 편견을 중심으로 만들어진다. 사람은 전체를 본다기보다는 관심이 가는 영역을 중심으로 이미지 전체를 이해한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항상 색안경을 쓰고 사물과 현상을 들여다보는 종이다. < 편견 > 이야말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시선인 셈이다.

하여,   나는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편애(편견)라고 생각한다.  편애하는 사람에게도 품격은 있따. " 편애 " 가 강자에게만 쏠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약자에게만 쏠리는 사람이 있다. 전자는 俗이고 후자는 聖이다. 예수는 후자에 속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약자에 대한 편애와 강자에 대한 편견을 가진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예수가 안철수처럼 극중주의와 화신 백화점이었다면, 나는 그에게 침을 뱉고 따귀를 때렸을 것이다. 정의로운 사람은 대부분 편견과 편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엄청난 죄를 짓고도 집행유예로 풀려난 이재용 재판은 판사의 그릇된 편견과 편애 때문이 아니라 거악에 대한 " 편견 없음 " 과 정의에 대한 " 편애 없음 " 이 낳은 결과이다.

어렵게 말했으나 저잣거리 입말로 쉽게 표현하자면 이렇다. " 저 판사 새끼, 시발 진짜 좆같은 새끼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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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06 10: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8-02-06 10:20   좋아요 2 | URL
퇴임 후 법무팀에서 모셔가겠죠. 연봉 20억 때려서 5년 근무하는 방식이겠죠. 그러면 100억.. 합법적 뇌물이잖아요. 법무팀에서ㅓ 하는 일은 없을 테고... 뭐, 판사 입장에서는 욕 졸라 한번 처먹고 퇴임 후 목돈 마련해서 자식새끼 좋은 데 유학 보내자.. 이런 마인드이겠죠. 삼성 불매 운동해야 합니다..

마립간 2018-02-06 11: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의로운 사람은 대부분 편견과 편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

이 문장을 보니, ≪도덕경≫의 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 聖人不仁 以百姓爲芻狗 문구가 떠오릅니다. 자연의 정의와 사람의 정의가 다르죠.

곰곰생각하는발 2018-02-06 11:25   좋아요 0 | URL
흠... 마립간 님 한자 해석 좀 -_- ;

마립간 2018-02-06 12:08   좋아요 1 | URL
^^, 곰곰발 님의 글을, 제 독후감에 인용하였습니다.

앞부분만 이해하시면 됩니다. ; 천지, 성인은 인자하지 않다. 즉 편애가 없다는 뜻입니다. ≪도덕경≫의 의견입니다.

cyrus 2018-02-06 11: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판사 이름이 정형식. 예전에 삼성 라이온스에서 뛴 정형식이라는 타자가 있었죠. 타격 센스가 박해민 급이었어요. 그런데 음주운전 교통사고를 내서 임의 탈퇴 처리되었죠. 다행히 정형식이 나간 이후로 박해민이 등장할 수 있어요. 아무튼 정형식이라는 이름, 절대로 잊지 못할 겁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8-02-06 11:41   좋아요 1 | URL
저 인간은 성을 바꿔야 합니다. 정씨가 아니라 화씨로..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희대의 변명일 겁니다.

수다맨 2018-02-06 1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젠가 고종석 작가가 우스갯소리로 이 나라에서 이명박근혜가 왕(또는 상왕)이라면 이건희/재용은 황제라고 한 적이 있었지요. 어제 재판 결과가 고종석의 말에 정확히 들어맞았던 것 같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8-02-07 09:51   좋아요 0 | URL
삼성이 황제라는 사실을 고종석이 아니어도 다 아는 사실이죠. 법위의 존재예요. 박근혜도 깜빵 가는 세상에 이제는 이재용은 안 가는 세상이 되었군요.

기억못함 2018-02-06 1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노자는 자연의 섭리를 편애했어요.
천지불인은요. 큰것을 위하지 않아요.
그래서 작은 것들이 큰 놈에게 강제당하지 않게 되어요.
그러면 천지불인이 작은 놈을 위한다고 생각할지 몰라요.
작은 놈이란 거는 천지불인과는 상관없는거여요.
걍 천지불인은 큰 것을 위하지 않는다는 놈이다 라고 생각하는 게 좋아요.
이러는 것이 천지간이 잘 돌아가는 것이라고 노자가 얘기하는 거라고 봐요.
그래서 위하지 않음을 위한다고 하는 건데요.
이걸 아무거나 다 에브리띵 다 위하지 않는 거라고 퉁치는 얘기로 읽으면 노자를 한참 잘 못 읽는거라고 봐요.
여기 곰곰발님 말씀처럼 사람은 편애 편견덩어리여요.
무엇을 위하여야만 사는 놈이라는 거죠.
그런데 위하면 작은 놈도 그게 큰 놈이 금새 되어버려요.
그래서 위하지 않음은 큰놈이 생기지 않게 해요.
그래서 작은 놈을 위하게 된다는 식으로 넘어가면 안되구요
위하지 않음을 위한다는 말은 오직 큰 놈을 잡기 위해 있는 말입니다요.
위하지 않음을 위하는 편견 편애는 그것이 위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큰 놈이 절대 안되요.
다른 위함은 모두 큰 놈이 되요.
오직 위하지 않음을 위하는 편애 편견만이 큰 놈을 만들지 않아요.
그게 노자의 천지불인이라고 한다면 여러분 믿을 수 있씁니까.

곰곰생각하는발 2018-02-07 09:50   좋아요 0 | URL
허어. 그렇군요. 노자에 대해 잘 모르다보니
노자의 천지불인을 제대로 이해를 못하겠군요. 혹시 추천해주시고 싶은 책이 있으신지요.
읽고 논하도록 하겠습니다..

기억못함 2018-02-07 10:09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도덕경 해설서 독해서 추천드릴만한게 없습니다.
곰곰발님이 독자적으로 해석해보시는 건 어떤가요?
그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                                             

고까짓 것, 울지 마 울긴 왜 울어  : 




 




                     1987  :  내풍인촌1)



 


주머니에서 딱성냥 한 개비를 꺼내 벽에 그었다. 교실 안이 조용해서인지 불붙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ㅡ  이문열, 변경 



 


                                                                                                                    저주받은 걸작 영화 <<  넘버 3  >> 에서 불사파 두목 조필(송강호 분)은 감정의 발화점이 매우 낮은 캐릭터이다. 발화점이 낮다 보니 언어의 온도가 낮아도 쉽게 열불을 낸다.  그는 발화점이 낮은 딱성냥 같다.  아무 데나 긁어도 불이 쉽게 붙는 성냥 말이다.  그 유명한 장면.  스승이 현정화 선수는 라면만 먹고도 장거리 달리기 경기에서 1등 했다고 설교를 하자,  제자가 스승의 잘못을 지적하며 " 임춘애입니다, 행님 ! " 이라고 정정한다. 조필은 침묵한다. 잠시, 숨 고를 시간이 지나고.......  5,   4,   3,   2,   1,                           퐈이야 !!!

스승은 화,      화화화화화를 참지 못하고 점화한다. " 감정의 발화점이 낮다는 것 " 은  마음 속 불(火)을 쉽게 제어하지 못하고 직설적으로 표현한다는 의미이다(주로 만화 같은 캐릭터들에게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조필뿐만이 아니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은 모두 발화점이 낮은 딱성냥 캐릭터들이다.  조필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송능한 감독은 남근 중심인 한국 사회를 " 좆삐리 문화 " 로 희화화한 후 신랄하게 조롱1)하기 위해서 발화점이 낮은 캐릭터 난장을 묘사한다.  그가 감정의 발화점이 낮은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운 이유는 한국 사회가 미성숙한 얼라에 속한다는 데 있다.

이런 캐릭터들은 평면적이어서 깊이가 없다. 그리고 " 주먹 " 을 " 눈물 " 이라는 오브제로 전환하면 신파와 통속이 된다.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나가는 깡패 캐릭터나 속울음보다 장소 불문하고 대낮에도 대성통곡을 하는 캐릭터는 서로 다를 것이 없다. 감정 표출을 극한까지 몰고 가서 관객에게 말초적 반응을 강요한다는 점에서 둘 다 포르노'다. 이런 방식에 능한 감독이 윤제균과 강우석이다. << 국제시장 >> 이 보여준 남조선 쌍팔련도 최루성 포대기 신파는 책상을 탁, 치니 툭, 하고 우는 울보 캐릭터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했기에 성공한 영화다. 이 영화가 노리는 것은 관객의 눈물샘이 전부이다

누누이 하는 말이지만 눈물만큼 가성비 좋은 특수효과는 없다.  눈물보다 전염성이 강한 감성 코드가 또 있을까 ?  그렇기에 재능 없는 감독이 자주 사용하는 것이 탁, 치면 툭, 하고 우는 발화점 낮은 캐릭터를 활용하는 것이다. 대성통곡을 싸잡아서 싸구려라고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지점은 대성통곡이라는 클라이맥스를 위해서는 기/승/전 과정에서 잦은 소성통곡은 자제해야 된다는 점이다.  그래야 마지막에서의 대성통곡이 빛이 난다. 좋은 예가 영화 << 길, 1954 >> 과 << 파이란, 2001 >> 이다.  저 짐승 같은 탁성'은......            진짜다.  이것이 신파의 품격인 것이다.

영화 << 대부, 1977 >> 에서 말론 브란도가 연기한 대부 돈 클레오네는 남조선 깡패 얼라-들 : 조필과 그 똘마니들과는 달리 쉽게 흥분하지 않고 쉽게 말하지 않고 쉽게 주먹을 내세우지 않는다. 그는 감정의 발화점이 높은 인물이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이 모든 것은 결국에 처절한 가족 비극으로 끝나리라는 사실을. 또한 모든 폭력의 배후에는 그가 있다는 사실을. 내가 영화 << 1987 >> 에 불만을 가지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감독은 박종철 가족을 지나치게 신파로만 접근한다. 어머니는 사망 소식을 듣자마자 바닥에 주저앉아 대성통곡을 하고, 아버지는 겨울 바다에 유골을 뿌리다가 오열하고, 삼촌도 경찰 봉고차 안에서 흐느껴운다.

자식을 잃은 부모와 가족의 마음이야 굳이 이 자리를 빌려 표현할 필요는 없지만 그 상실을 감독은 너무 자극적으로만 설명하고 있다.  대표적인 장면이 배우 조우진이 연기한 박종철 삼촌의 오열 연기이다.  박종철 어머니도 울고, 박종철 아버지도 울고, 박종철 누이도 울었는데 굳이 박종철 삼촌이 오열하는 장면도 필요했을까 ?   이것은 오열하는 서정의 강조가 아니라 무의미한 반복이 아닐까 ?  기자들을 다루는 방식도 마찬가지이다.  차분하다기보다는 마약을 과다 투여한 중독자처럼 흥분해서 이리저리 방방 뛴다.  기개가 하늘을 찌를 듯하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누가 살짝 옆구리를 긁기만 해도 쉽게 발화하는 딱성냥 같다.

영화는 조폭(같은 경찰) 느와르 장르로 시작해서 스파이 장르로 바뀌다가 나중에는 멜로드라마 장르'로 끝을 맺는데, 이 혼종을 예술적 통섭의 좋은 예라고 말하기에는 이질적인 측면이 있다. 오히려 산만하다. 무엇보다도 마지막 멜로 판타지는 어설프다(어설프기보다는 엉뚱하다). 현대사의 어두운 측면을 폭로하다가 느닷없이 멜랑꼴리한 러브 판타지로 전환되는 것이 과연 올바른 선택이었을까. 이 영화를 보고 뜨겁게 운, 당신의 신파를 의심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관객이 흘린 선의와 슬픔을 이해한다. 그렇기에 관객의 열광적 지지에도 동의한다. 그리고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도 의심하지 않는다.

나 또한 그 시대, 뜨거운 함성을 지지한다. 하지만 평론가의 열광적 지지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이 영화는 장점만큼 단점도 분명하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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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耐風燐寸(내풍인촌) : 딱성냥, 딱성냥은 일반 성냥보다 발화점이 낮은 燐을 사용한다.

2)    " 조필이 " 를 장음으로 길게 빼면 " 조삐리(좆+삐리) " 가 된다.  여기서 < 삐리 > 는 남사당패에서, 각 재주의 선임자 밑에서 재주를 배우는 초보자를 뜻한다.  종합하면   :  조필과 우락부락한 깍두기 형님-들'로 대표되는 " 불굴의 페니스 " 는 알고 보면 발기해도 3센티미터인 고추의 세계이다.   이 영화는 명백하게 미성숙한 남근의 세계(얼라의 고추)에 대한 송능한의 B급 조롱이다.  불사파를 뜻하는 표식 " olo " 은 누가 봐도 발기된 남근(고추)을 형상화한 타이포그라피이다. 영화 << 넘버 3 >> 는 김기영 감독의 << 하녀 >> 시리즈와 더불어 희대의 컬트이며 걸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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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맨 2018-02-02 10: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감정의 발화점‘이라는 용어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는 글입니다. 영화(또는 소설)의 내용이 풍자나 희화, 컬트에 가깝다면 감정의 발화점이 낮은 인물들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말씀하신대로 ˝넘버 3˝나, ˝핑크 플라밍고˝의 ‘디바인‘ 같은 인물이라면 감정 발화점을 높게 설정할 이유가 전혀 없지요.
반면에 재치 넘치는 유희보다 진지하고 묵직한 리얼리즘적인 기법으로 작품을 만든다면 감정의 발화점이 높은 인물들이 많이 나와야 한다고 봅니다. 물론 저는 ˝1987˝을 보지는 않았지만, 다른 예로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 나오는 이스트우드나 힐러리 스웽크 같은 인물들이 울보 떼쟁이였다면 이 영화는 그야말로 조야하고 흔한 휴머니즘 영화로 그 격이 떨어졌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8-02-02 11:52   좋아요 0 | URL
영화 < 길소뜸 > 을 보면 남자가 반드시 울어야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장면에서 남자는 울어야 하죠. 그때 카메라는 뒤로 물러나기 시작하더니 점점 멀어져서 뒷모습으로 빠집니다. 뒷모습만 보이니 관객은 이 남자가 우는지 아닌지 정확히 모르죠. 저는 이것이 영화의 윤리라고 생각합니다. 포르노에서 다리를 쫙 벌린 포르노 배우와 만개와 입안 가득 음식을 씹는 입술을 클로즈업하는 것과 우는 배우의 얼굴을 클로주업하는 것은 다 비슷합니다.


syo 2018-02-02 12: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파이란>이 기억납니다.
저는 영화를 보고 많이 우는 편이고, 우는 것에 대해 그다지 거부감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영화가 다 끝나고 조용히 돌이켜 보니 그때 내가 같이 울었던 게 1도 부끄럽지 않은 영화는 <파이란>이 처음이었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8-02-02 12:05   좋아요 0 | URL
훌륭한 발라드 가수는 자신은 울지 않고 노래를 부르는데 관객을 울게 만드는 것이고, 형편없는 발라드 가수는 자신은 울면서 부르는데 정작 관객들을 시큰둥하게 만드는 것이고, 가수도 울고 관객도 울면 평작이라는.....
영화도 마찬가지란 생각이 들더군요..


파이란은 정말 묵직한 한방이 있죠. 최민식의 최고 걸작은 확실히 파이란입니다. 최민식도 그런다고 하죠. 어디가서 자신의 최고 골작은 파이란이라고..

고양이라디오 2018-02-04 16: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평론입니다. 갑자기 <대부>의 묵직함이 그립네요. 근데 전 <1987> 굉장히 재밌게 봤습니다ㅎㅎㅎ 곰발님 글을 읽으니 영화의 단점들이 보이지만요. 제게 영화에게 가장 아쉬웠던 부분은 강동원의 등장이었습니다. 강동원이 영화에 나온다는 것을 알고 봤는데도 강동원 등장에 몰입이 ‘와장창‘ 깨지더군요.

곰발님 말씀도 옳지만 부모나 삼촌이 우는 장면이 저는 그다지 어색하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오히려 가족의 입장과 감정에 몰입하는데 도움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ㅎ

곰곰생각하는발 2018-02-05 08:14   좋아요 1 | URL
확실히 강동원 장면(연희와의 로맨스)는 갑툭튀입니다.
저도 몰입이 확 깨지더라고요. 갑자기 명랑 멜로 드라마가 된 듯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