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훈
초등학교 때 담임샘이 내준 숙제는 " 우리 집 가훈 " 이었다. 오늘은 집에 가서 부모님께 우리 집 가훈이 무엇인가 알아 오는 숙제를 내주겠어요. 선생님이 내일 물어볼 거예요, 알았죠 ?
만화 < 캔디 > 에 나오는 이라이자처럼 생긴 내 짝꿍이 손을 번쩍 들며 말했다. 선생님, 저는 벌써 우리집 가훈 알고 있어요. 샘은 방긋 웃으며 우리 집 가훈을 알고 있는 학생은 손을 들라고 했다. 절반 정도가 손을 들었다. 대부분 있는 집 자손이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어머니에게 물었다. 엄마, 우리 집 가훈은 뭐야 ? 어머니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몰라 몰라, 아빠 오면 물어봐. 하지만 아버지는 그날도 문어가 되어서 흐느적거리며 집에 들어오셨다. 내가 아버지에게 우리 집 가훈이 무엇이냐고 물었지만 이미 곤드레만드레 취하신 아버지는 엉뚱한 대답만 하셨다.
보다 못한 어머니가 큰소리쳤다. 술 먹지 말자 ! 이제부터 우리집 가훈은 술 먹지 말자, 다. 아휴. 지겨워, 지겨워. 이놈의 새끼들, 너희들 커서 술만 처먹었단 봐라. 아주 다리뭉둥이를 부러뜨릴 테니깐. 다음날, 담임샘이 아이들에게 가훈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정직하게 살자, 열심히 공부하자, 가화만사성 따위가 대부분이었다. 내 차례가 다가왔다. 우리 페루애는 가훈이 뭐지 ?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수줍게 말했다. 술 먹지 말자 ! 아이들이 낄낄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웃음소리가 클수록 내 얼굴은 빨개졌다. 샘이 물었다. 아버님이 술을 자주 드시나 보네 ?
내가 우물쭈물하고 있을 때 우리 집 사정을 훤히 알고 있는 녀석이 소리쳤다. 쟤 아버진 주정뱅이예요. 부끄러웠지만 딱히 화를 낼 만한 일은 아니었다. 내 아버지는 주정뱅이였으니까. 중학교 3학년, 새 학년 첫날에 내 아버지를 주정뱅이라고 했던 녀석과 조우했다. 같은 반에 배정된 것이다. 내가 민들레처럼 바닥에 납작 엎드려서 땅 냄새를 맡고 있을 때 그는 콩나물처럼 쑥도 아니면서 쑥쑥 자라서 키도 크고 덩치가 우람해져 있었다. 그 녀석은 싸움을 잘해서 반에서 일진 그룹에 속했다. 그는 이빨이 고르지 않아서 벌어진 틈 사이로 침을 물총처럼 쏘고는 했는데 자기보다 서열이 낮은 아이들을 만나면 시도 때도 없어 침을 쏘았다.
그것은 일종의 영역 표시였다. 개가 전봇대를 보면 의무적으로 오줌을 싸듯이. 이에 반항하면..... 뭐, 다들 아시리라. 민들레 파에 속했던 나 또한 그의 만행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어느 날이었다. 그때 나는 어떤 이유로 인해 화가 많이 나 있는 상태였다. 복도를 걷고 있는데 그 녀석이 나타나서 으레 하듯이 나에게 침을 쏘고 지나갔다. 야, 박만출 ! 그가 어이없다는 듯이 뒤를 돌아보았다. 라스베이거스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내가 말했다. 야, 시발새끼야 ! 따라와. 그는 언빌리버블 하다는 표정으로 옥상으로 올라왔다. 나는 꼴뚜기처럼 씩씩하게 말했다.
다시 한번, 나에게 침을 뱉으면 술병 깨서 니 모가지에 쑤셔넣는다, 응 ? 그가 뭐라고 씨부렁거리는 했으나 말에는 힘이 없었다. 나는 그 균열을 놓치지 않았고 더욱 거세게 다그쳤다. 그날 나는 수업에 들어가지 않았다. 수업을 받을 이유가 없었다.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가방을 챙겨서 빨리 집으로 돌아가라는 통보를 받은 상태였으니 말이다. 집으로 가는 길에 불현듯 그 옛날 가훈이 생각났다. 그날 이후로 나는 그 녀석에게 괴롭힘을 당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나를 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주정뱅이였던 아버지가 내가 준 선물이었다.
그 경험 이후로, 누군가와 싸울 때 져본 적은 없다. 나는 몸집이 왜소했으나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라면 각목이나 벽돌 따위 심지어는 술병을 들고 상대방 머리통을 향해 내리치곤 했다. 비겁하다 욕해도 어쩔 수 없다. 내 싸움의 기술은 반칙이었다.
- 손바닥 소설
이 손바닥 소설은 70%는 논픽션이고 30%는 픽션이다. 혁오밴드의 << 톰보이 >> 란 노래를 듣다가 문득 생각났다. 어머니가 이혼을 전제로 한 별거를 선언하며 자식들에게 누구와 살 것인가를 두고 가족회의를 했을 때 가족 중에서 나만 유일하게 극장 간판을 그리는 가난한 주정뱅이 아버지를 선택했었다. 그렇게 나는 아버지와 단 둘이 1년을 함께 살았다. 노래 가사에서 슬픈 어른은 늘 뒷걸음을 친다는 가사를 들었을 때 주정뱅이였던 내 아버지가 생각났다. 술에 취하면 일보 전진하고 삼보 후퇴했던, 밤 문어처럼 흐느적거렸던 불쌍한 내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