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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녀문의 비밀 -상 - 백탑파白塔派 그 두 번째 이야기 ㅣ 백탑파 시리즈 3
김탁환 지음 / 황금가지 / 2005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개인적으로 이 시리즈에 무척 관심 깊고, 재미있게 보고 있다.
내가 흥미롭게 보는 것은 추리소설로서의 기법이나 솜씨 보다는 아무래도 그 근저에 깔린 것들이다. 백탑파 지식인들에 대한 저자의 관점이다. 백탑파라고 총칭되는 그룹 속에도 다양한 사상적 스펙트럼이 있겠는데 저자는 일단 이들이 낡고 경화된 지배권력층과는 다른 새로운 군주 정조와 함께 새로운 조선을 만들고자 하는 의욕과 열정에 가득찬 지식인들임을 설정하고 있다.
첫 번째 이야기인 [방각본 살인사건]은 정조 집권 초기와 백탑파들의 인물과 이들의 성향, 문화 그리고 소설의 거대한 배후인 18세기 조선을 소개하는 입문서에 해당한다면 두 번째 이야기 [열녀문의 비밀]은 보다 전개된 갈등과 깊어가는 시대적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된다.
크게는 두 가지 축이 있다.
그것은 ‘암흑의 핵심’처럼 드러나지 않으면서 소문으로만 무성하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환상과 두려움을 동반하는 것이며 그것은 백탑파 특히 김진이 부딪혀야 할 거대한 시대의 아젠다이다. 황제가 자신을 칭하는 ‘짐朕’이라는 단어가 이 두 가지 축을 설명하는 데 꽤나 적절한 용어라고 나는 생각한다. 짐은 아직 보이지 않는 희미한 상태를 말한다. 사물이 확연히 드러나지 않아 다만 형태만을 느낄 수 있을 상태.
두 축은 ‘짐朕’으로써 소설 전체를 지배한다. [방각본 살인사건]에서 ‘짐’은 정조였다. 정조는 자신의 등극 자체가 위협이 되는 노론 일부 세력의 도전에 맞서며 집권 초반 왕권을 장악해 나가는 주도면밀하고 노회한 왕으로 묘사되었다.(정조가 백탑파에게 모습을 드러내는 후반은 정조의 위엄과 권위를 동반한 두려움의 분위기를 물씬 담고 있다.)
[열녀문의 비밀]에서 ‘짐’은 김아영이다.
김아영은 생전에 그녀를 만난 모든 인물들이 김진과 독자들에게 알려주는 진술 속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조사자 김진에게 그 모든 진술은 거짓과 진실이 교묘히 결합된 언어들이다. 그 언어 속에서 김아영은 조선유교가 공고하게 구축해 놓은 여성의 길을 성실하게 따라간 열녀이며 또한 학식과 예술적 안목을 두루 갖춘 지식인이자 과감하게 배운 것을 실천한 경영자이기도 하고 시문 뿐 아니라 소설을 짓는 작가이기도 하다.
소설이 결말을 향해 갈수록 김아영은 시대가 감당할 수 없는 길을 간 여성이었음이 드러난다.
열녀문은 정조의 공맹사상으로 구축된 구조물이어야 했으며 야소교의 가르침을 끌어대어 새로운 삶과 질서를 선양하기 위한 구조물이 될 수는 없었다. 소설 후반부에 복명을 위해 정조를 알현하는 자리에서 김진이 주청한 열녀문이 결코 구조될 수 없는 것은 김아영이 극복할 수 없었던 한계였으며 정조의 한계이자 시대의 한계였다. 백탑서생들 역시 이 벽에 부딪쳐 좌절할 수 밖에 없는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은 곧 정조가 결코 받아들일 수 없으며 김진을 비롯한 백탑파의 견해가 갈리는 지점을 정확히 가리키고 있는 핵심이다.
한 쪽에는 혁신적이지만 여전히 공고한 자신의 왕국을 고수하는 정조의 시대가 있으며 다른 한 쪽에는 그 공고함을 근본부터 무너뜨릴 수 있는 또 다른 세상을 꿈꾸는 이들의 시대가 있다. 한 쪽은 노회하며 다른 한 쪽은 열정적이고 참신하나 세를 얻지 못하는 한 영원히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 채 흔적만을 남기고 사라져 버릴 수 있는 위태로운 환상이다.
이 사이에서 백탑서생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지 과연 다음 이야기에서 나의 이러한 생각은 확인될 수 있을지 이것이 이 시리즈의 다음을 기다리게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