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집과 꿀
폴 윤 지음, 서제인 옮김 / 엘리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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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요, 우린 비명을 지릅니다.” (...)
그들은 하나같이 삼백 년 전 일본이 침략해 온 일을, 그리고 사찰들과 선교사들과 유럽에서 온 배들의 역사를 이야기하며 유령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요, 우린 비명을 지릅니다.” 199-200

<벌집과 꿀>편에서 등장하는 고려인들의 저 이야기는 이주민들의 삶의 고단함의 정도를 바로 느끼게 해준다. 잠도 못잘 만큼 괴롭지만 유령 따위로 자신의 ‘터’를 떠날 순 없다. 그 터란 나고자란 터이기도 하지만 강제로 떠나와 자리잡은 터도 마찬가지다. 헌데 벌집과 꿀에서 유령을 보는 사람들은 자신을 허락없이 범하는 남편을 죽인 아내의 죽음에 동조하거나 묵인했던 사람들이다. 유령이 나타나지 않는 사람은 러시아 공사관과 죽은 여인의 딸 뿐이다. 타이틀에서 등장하는 꿀과 벌집은 대등하거나 종속관계라기 보단 벌집을 찾아내기 위한 수단으로 꿀이 쓰이는 것을 뜻한다. 공사관은 자신의 아버지를 전쟁으로 잃었고, 자신도 삼촌에 의해 불모지에 파견되어 왔다. 그리고 그곳에서 새로운 터를 잡고 살아가는 고려인들은 벌집을 얻으려는 누군가에 의해 이용된 ‘벌’인 듯 보인다. 표제작 뿐 아니라 다른 작품들에서도 이런 고단함이 느껴진다. 코마로프와 크로머는 탈북인들의 부모와 자녀들의 삶이 간접적으로 비쳐진다.

“두 분 다 반쯤 죽은 듯이 사셨잖아.” 그레이스가 말했다. “그리고 몇 년 뒤에 여기 도착하셨을 때는 더 그러셨고. 살아 있다는 걸 제대로 느낀 적이 한 번도 없으셨을 거야. 그게 그분들의 삶이었어. 항상 다른 사람들을 따라잡으려고 하는 거. 당신도 그 정도는 알잖아, 해리.” 169쪽

발췌문에 등장하는 해리와 그레이스는 탈북한 두 남자가 각각의 가정을 꾸리고 낳은 아이들로 어릴 때 부터 같이 놀고 다투며 어른이 되어 자연스레 부부가 되었다. 해리는 아버지의 어린 시절이 궁금하고 때때로 가족이라곤 둘 뿐 이라는 삶의 유한성에 외로움을 느끼며 자녀를 가져보는 것이 어떨지 생각하며 그레이스가 아이를 원하지 않는 이유가 궁금해진다. 독자인 내겐 발췌문에서 그레이스가 이야기한 그들 아버지의 삶만 보더라도 왜 그녀가 아이를 원할 수 없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전보다는 나아졌다고 할 수 있지만 분쟁으로 발생한 폭력에 두 블럭을 날아가 해리 품에 안겼던 그녀에게는 피부색도 다르고 언어도 다른 세상에서 살아가는 자신과 남편의 아이가 안전하다고 안심할 순 없었을 것이다. <코마로프>에서처럼 죽은 아이의 시신도 거두지 못하고 탈북해야 했던 주연 만큼 급박하고 처절하진 않았더라도 ‘항상 다른 사람들을 따라잡으려고’ 하는 삶은 좀 더 나았다고 할 수 있을까.

매일 밤 여기서 달이 뜨고, 기울고, 부서졌단다. 그러고는 스스로를 다시 만들어냈지. 250쪽

전쟁이나 침략 혹은 이주의 아픔을 직접 겪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 아픔이란게 시간의 흐름과 함께 완전하게 소멸하진 못할 것이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잊고 살다가도 갑자기 떠올릴 수도 있고, 갈 곳이 어딘지 알 수 없는 누군가는 어쩌다 만난 이의 흘리듯 했던 말에도 마음을 움직인다. 그렇게 마치 계속 기울고 부서지면서도 다시 살아가는 모습이 소설집 <벌집과 꿀> 안의 마치 벌집처럼, 여러 개의 방이 칸칸이 모여 있었다. 결말이 모호해서 답답한 것이 아니라 그 모호함 속에서 희망이 보이고, 잊힌 아픔이 떠오르다 부서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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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구석 판소리 - 조선의 오페라로 빠져드는 소리여행 방구석 시리즈 3
이서희 지음 / 리텍콘텐츠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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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구석판소리 #이서희 #판소리 #전통음악 #소리 #조선오페라

오래 전 한 박물관 행사로 마당 전체는 아니고 심청가 일부를 보여주었는데 그때 판소리를 직접 보면서 느낀 건 전혀 지루하지 않고 ‘판소리의 구성 요소 중 하나인 추임새가 절로 나온다는 거였다. 이서희 작가의 ’방구석 판소리‘는 판소리가 무엇인지, 어떤 구성으로 어떻게 진행되고 이뤄져있는지를 초반에 알려주며 앞으로 맞이하게 될 판소리 해설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첫 챕터는 ’조선의 오페라‘라고 할 수 있는 판소리 다섯 마당 이야기, 두 번째 챕터에는 잃어버린 조선의 아리아라고 수식한 타령 네 마당, 세 번째 챕터에는 삼국시대 뮤지컬이라 할 수 있는 처용가와 같은 향가, 네 번째 챕터에는 고전의 발라드인 고전시가, 마지막 다섯 번째 챕터는 달빛 아래 붉은 실이란 타이틀의 고전소설을 다루었다. 앞서 언급한 심청가외에 이전에 알고 있었던 것은 교과서에 수록되어 있었던 ’처용가, 단심가‘이며 황진이와 소세양 이야기나 장끼타령 등은 각색된 형태의 다른 버전으로 읽었었다. 아마 판소리 다섯 마당은 모두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텐데 읽으면서 놀랐던건 ’아니, 이런 이야기가 있었어.‘라는 사실이었다. 심청가의 경우 임당수에 빠지기 전 뱃사람들이 제사를 바친 것은 알고 있었지만 바닷속 용궁에서도 이미 심청이가 빠질 것을 알고 이에 맞는 예식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많을까. 그런가하면 흥보(흥부가 아니었다)는 착할 뿐 아니라 아내에게도 다정한 남편인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이웃집 사람이 매를 대신 맞고 맷값을 가로챘으면 그 사람을 탓해야 하는데 자신을 걱정한 마누라를 탓하는 대사를 보고 작품을 이해할 때, ’시대를 알아야 하는 이유‘를 새삼 깨달았다. 그런가하면 변 사또가 춘향이를 보며 “‘옹골지게 잘 생겼다!”라고 말하는데 이게 요즘 시대에 그렇게 플러팅 했다가는 변 사또가 아니라 과거급제한 이몽룡이라도 쉽지 않았을 것 같다. 물론 이렇게 일차원적인 재미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옹고집타령을 들여다보면 단순히 고집이 센 사람의 이야기라고 보면 아쉽다. 못된 심보로 결국 자신을 잃게 된 상황에서 다행히 ’개과천선‘하며 이야기는 마무리 되지만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다반사다. 끝까지 고집을 부리다가 자신만 다치는 것이 아니라 가족을 포함한 주변사람들까지 힘들게 하면서도 반성없는 사람들이 정말 많다. 적당한 고집은 누구나 있을 수 있고 그것이 소신이자 삶의 방향을 지탱하는 역할이 되기도 한다. 아닌 줄 알았을 때 사과하고 고칠 줄 아는 용기가 정말 중요하다.

“사람이 누구나 다 고집 없는 사람이 어디가 있겠는가. 고치면 되느니라.” 123쪽

안타깝게도 판소리 12마당이 모두 이어져내려오진 못했다. 첫 챕터는 판소리 창본이 전해져 내려오는 작품이지만 옹고집전과 같은 경우는 복원된 내용을 참고하였기 때문에 저자의 노고에 감사한 마음이 든다. 다만 창본이 없는 경우 여러 갈래의 결말로 이야기가 전해지는 경우도 있는데 ’숙영낭자전‘의 경우가 그러하다.

<숙영낭자전>을 바탕으로 탄생한 판소리는 해당 흐름을 충실히 따른 것도, 그렇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백석눈이 천태산에서 약을 구해 오는 것으로 되어 있는 창본도 있으며, 그리하여 억울하게 죽은 사랑을 구하기 위하여 더욱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백선군의 모습이 담겨 있기도 하지요. 172쪽

이처럼 원본이 없는 경우 20세기에 재창작 되기도 한다. 판소리의 내용이 현대가요에 영향을 준 경우도 있는데 <소요월야하사>가 그렇다. ‘소슬한 달밤이면 무슨 생각하시나요“(224쪽)는 황진이의 그리움이 담긴 가사인데 꽤 낯익은 느낌이다. ’달 밝은밤에 그대는 누구를 생각하세요,‘라는 가사가 담긴 이선희의 <알고 싶어요>라는 노래 모티브가 된 작품으로 이 사실을 알고서 다시 들으니 노래가 더 애틋해졌다.

챕터 마지막에는 언급되었던 작품의 일부를 감상할 수 있도록 큐알코드가 수록되어 있어 읽으면서 작품의 분위기나 실제 어떻게 연출되는지 궁금할 때 바로바로 볼 수 있어 좋았다. 무엇보다 중간에 이렇게 엮고 해설해주어 감사하다고 표현은 했지만 더는 정본이 사라지거나 끊기지 않도록 많이 읽히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미와 지식 그리고 삶의 지혜를 조화롭게 담아낸 책이다. #리텍콘텐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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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철학 노트 - 읽고 쓸수록 내일이 달라지는 101가지 철학자의 말
정지영 지음 / 유노책주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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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힘들 때 철학책을 읽으라고 하면 머리가 더 아파질 것 같다고 거부할 지도 모른다. 진로나 혹은 여러가지 선택을 두고 망설이는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로 철학책을 권한다면 반길 사람이 많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의 ‘철학 노트’라면 어떨까. 그 노트를 펼치면 내가 마주한 상황(혹은 어려움)에 맞게 챕터가 나눠져있고 때로는 자기개발서처럼, 때로는 심리학 에세이처럼, 혹은 소설의 한 구절처럼 철학이 이토록 친근하고 실용적이었는지 놀랄지도 모른다. <나의 철학 노트>가 바로 그런 책이었다. 책을 펼치면 첫 면지에 ‘자기만의 철학으로 삶을 다시 써 내려가고 싶은 _____님께 이 책을 전합니다.’ 라는 문구를 만날 수 있다. 처음부터 철학자들의 이론을 찾아서 상황별로 목록화하려면 쉽지 않다. 하지만 누군가 정리해둔 노트에 ‘나만의 코멘트’를 붙인다면 한결 수월할 뿐 아니라 마치 현명하고 지혜로운 철학자와의 대화를 하듯 이 책을 읽어낼 수 있다. 맘에 들거나 책 에서 강조하는 내용을 필사할 수 있는 공간도 별도로 챕터별로 항목을 달리하여 마련되어 있는데 필사하고픈 내용이 너무 많을 경우 접착 메모지를 이용하여 추가로 필사하는 것도 방법이다. 나의 경우는 이 책에 직접 무언가를 적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별도의 노트에 내가 처음 읽었던 날짜를 기입한 후 작성했고, 이 이후에 또 철학 노트가 필요할 때 추가하기 위해서다. 한 번 읽고 마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추가하며 스크랩북처럼 만들어보고 싶기 때문이다. 이런 방법론도 있지만 우선 이 책은 앞서 열거한 것처럼 새로운 일에 도전할 용기가 없거나 지난 나의 선택들이 자꾸 후회되거나 막연한 무언가를 탐구하려할 때 얻을 수 있는 조언들이 많다.

프랭클은 우리에게 조용히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습니까”, “당신에게 소중한 사람은 누구이고, 그 사람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어떤 흔적을 세상에 남기고 싶습니까” 라고 묻습니다. 99쪽 프랭클린의 살아가야 할 이유를 알면 알 수 있다 편에서,

그런가하면 아들러가 ‘열등감’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의 따라 삶의 태도와 그 결과가 달라진다는 내용도 정말 좋았다. 어린 아이를 키우다보니 무조건 잘 해야하는 마음, 친구보다는 이겨야겠다는 생각들로 혼란스러워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나 뿐 아니라 대부분의 부모들이 ‘이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아이들에게는 부모가 언제 크게 기뻐하고 칭찬하는지 너무 잘 알고 있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모든 것을 잘 할 순 없다. 분명 부족한 부분도 있고, 단순히 재능과 관련된 부분이 아니라 타인과 다른 여러가지 환경적인 부분등에서도 열등감을 가지게 된다. 이때 열등감을 무조건 피하거나 모른 척 회피하는 것보다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더 나은 방향으로 사고할 수 있도록 안내해주는 것도 중요하다. 책을 읽으면서 당장 내가 처한 상황이나 고민 뿐 아니라 육아를 하면서 필요한 것들도 도움이 되었다. 맨 뒷표지에 ‘행복한 내일을 위한 키워드 찾기’라는 리스트 항목에 맞게 이 책을 읽은 것 같아 좋았다. 저자서문에 철학자는 ‘사유하는 사람이자 기록하는 사람’이라고 말하였다. 덕분에 조금 더 철학하는 사람에 다가간 것 같아 추천하고 싶다.


*해당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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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어린 어둠
조승리 지음 / 다산책방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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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문 밖으로 나와 학교를 돌아봤다. 모든 게 낯설게 보였다. 도망친 건 나인데 쫓겨난 것처럼 기분이 처참했다. 30쪽

도망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란 것이 존재할까. 온통 어둠뿐인 세상은 가능할까. 책에 빠져서 허우적 거리듯 읽기 시작하면 모든 것이 질문으로 바뀐다. ‘그랬구나’하고 수긍하기에는 안타깝고 ‘도와줄래’라고 말하기에는 작품 속 인물과 나와의 세상이 다르다. 그런데도 질문을 던지고 싶다. ‘지금은 괜찮은가요?’

<나의 어린 어둠>은 <이 지랄맞음이 쌓여 축제가 되겠지>의 저자 조승리의 첫 소설이다. ‘첫’이란 단어는 몇 가지 장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이라는 말로 퉁쳐지는 아쉬움이 있다. <나의 어린 어둠>은 문학적으로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어떻다고 말할 수 없지만 소설을 즐겨 읽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네 편의 연작과 한 편의 에세이가 잘 어우러지는데다 한 편 한 편 따로 읽어도 좋았다. 저자의 에세이를 읽었지만 굳이 등장하는 인물을 그녀와 동일시하진 않았다. 동일시 해야할 건 내 자신이었다. 주관적인 입장에서 상대보다 내가 부족하다고 느낄 때, 그러면 안되는 줄 알면서도 상대의 불행을 은근히 반기게 되는 악하지만 악하다고만은 할 수 없는 마음. 서운한 마음이 턱까지 차올랐지만 그 모든 것을 감싸안고도 남을 ‘손맛’ 가득한 음식들. 실제로 책을 읽다가 엄마에 대한 서운함을 부침개로 털어내는 장면에서는 식당에 들어가 부침개를 주문해서 먹기도 했다.

갓 부쳐낸 호박 부침개는 바삭하며 뜨겁고 고소했다. 한 조각을 집어 남동생 입에 넣어주고 큰 조각을 집어 가스불 앞에 서 있는 엄마한테 쫓아갔다. 154쪽

물론 그 맛이 날거라 기대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좋았다. 소설에서 여기저기 배달을 가야할 만큼 넉넉하게 부쳐진 부침개가 내 입에도 살포시 와준 듯한 그런 따뜻함이 조승리 작가의 글에서 느껴져서 에세이에 이어 소설까지 이렇게 연달아 읽고 싶어졌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내가 가지고 있는 부침개 추억을 떠올리면 엄마의 부침개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부침개를 부쳐주면 너무 빠르게 집어먹는 내게 ‘맨 처음 부친 부침개를 먹으면 결혼을 늦게한다’는 말을 매번 하셨는데 빈말은 아니었는지 나와 형제 모두 마흔 직전에 결혼을 했다. 영 근거 없는 말이 아닌 것이 첫 장을 저 혼자 급하게 먹는 다는 것은 타인의 배려가 부족한 것이니 그런 사람이 자신뿐 아니라 배우자와 함께 나누고 배려하는 결혼생활을 사랑에 미치지 않고서야 젊은 나이에 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나이를 먹어가며 배려를 배우고, 인내를 어느 정도 길렀을 때 결혼이 가능해지는 것이 아닐까 혼자 생각하곤 했다. 조승리 작가의 글이 좋았던 또다른 이유는 음식 이야기의 분위기를 지속시켜 비유하면 자장면과 짬뽕을 동시에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화끈하게 슬프고, 몸이 녹아내릴 만큼 달큰함이 한 권의 책에 다 들어있다.

“왜 나만 이 꼴로 살아야 해. 왜 나만.”
억울해 미칠 것만 같았다
“너무 억울해. 다 죽어버려.”
내 안의 새카만 어둠이 긑도 없이 쏟아져 나왔다. 사람들 모두가 지옥에 빠지길 바랐다. 44쪽

첫사랑은 시력을 결코 완전히 잃고 말거란 ‘나’의 고백에 감당할 수 없다는 말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그럴 줄 알았으면서도 혹시나 하는 미련이 깨지는 순간 상대에 대한 원망 뿐 아니라 자신을 원망하고 세상 사람 모두가 다 등을 돌린 듯 느껴진다. 이유는 다 다를테지만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거나 멸망을 잠시나마 바란 적이 있을 것이다. 그때에 입밖으로 쏟아낸 저주스러운 말은 잊지 않고선 견딜 수 없을 만큼 독하고 서늘하다. 다행인 것은 그렇게 분출된 카타르시스가 다시금 살아갈 힘이 되어주고, 그렇게 살다보면 그럭저럭 괜찮은 일, 때로는 감당하기 벅찬 기쁨도 찾아온다. 다만 저자가 다녔던 특수학교의 다른 이들은 어찌 살아가고 있을지 또 다시 의문이 생긴다. 속옷을 잘 챙겨입지 않았던 그녀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타인에게 자식을 부탁하면서도 교만한 태도를 버리지 못하는 가정으로 돌아갔을 그 아이는 또 어떻게 살고 있을지 닿지도 않는 걱정과 물음을 내려놓지도 못한다. ‘캄캄한 눈으로 세상 가장 어두운 곳에 이야기를 밝은 세상에 내놓겠다’는 저자의 바람이 사라지지 않고 어둠을 조금씩 거둬들이는 데 잘 쓰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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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안함의 습격 - 편리와 효율, 멸균과 풍족의 시대가 우리에게서 앗아간 것들에 관하여
마이클 이스터 지음, 김원진 옮김 / 수오서재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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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누리고 있는 당연한 것들을 조금 포기하고 좀 더 불편해지는 것, 무엇보다 따분해질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습격을 피하고 시간의 감각을 되찾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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