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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의 역사 - 피아노가 사랑한 음악, 피아노를 사랑한 음악가
스튜어트 아이자코프 지음, 임선근 옮김 / 포노(PHONO) / 2015년 5월
평점 :
A Natural History of the Piano 피아노의 역사
피아노가 발명되었을 때 지금처럼 이렇게 모든 음악에 어울리는 악기가 될 것이라 확신하지 못했다. 당시에는 하프시코드가 음악가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을 뜯는 것이 아니라 해머로 두드리면서 강하고 여린 음역대까지 소화해 내는 피아노에 관심이 쏠리자 그 이전부터 연구했던 하프시코드의 단점을 개선하려는 노력이 점차 활발해졌다. 이런 까닭으로 18세기 프랑스 중산층에서는 하프시코드와 피아노를 함께 보유하는 가정도 많았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1970년 대 이후 중산층을 중심으로 피아노를 가정에 들여놓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런 움직임이 유럽에서는 100여년 전 부터였다. 피아노가 악기의 중심으로 자리잡기 까지 걸린 세월은 그리 길지 않았다. 당시에도 그리고 현재까지 최고의 작곡가로 손꼽히는 모차르트도 피아노의 진가를 일찍이 알아보았지만 아쉽게도 그가 피아노를 직접 만져본 것은 피아노가 처음 만들어지고 어느정도 세월이 흘러서였다.
마페이는 순식간에 소음으로 전락하는 하프시코드의 챙챙거리는 소리와 콧소리 같은 잔향보다 새 발명품의 소리가 월등하다고 반박했다. 35쪽
피아노가 가정으로 들어오면서 독학을 위한 악보집도 많이 팔리게 되었고 어떤 관련 출판업자는 잡지에 실린 쿠폰을 일정기간 모아서 가져오면 피아노를 경품으로 주는 마케팅도 했었다고 한다. 너무 비싸서 피아노를 살 수 없는 이들을 대상으로 한 마케팅은 이 외에도 '할부'제도도 있었다. 3년 동안 피아노 대금을 나눠서 내는 방식이었다. 이렇게까지 피아노를 사려고 했던 까닭은 단순히 중산층의 허세로 봐서는 안되는 듯하다. 그때는 여성들을 위한 책이나 언론인들도 당연하게 피아노 연주가 여성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독서, 바느질 수준으로 강조했었다. 우울하거나 화가 났을 때 즐거운 피아노 곡을 연주하면서 타인에게 분풀이를 하는 대신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좋은 친구라고까지 소개했다. 이 부분에서 재미난 사실을 한 가지 알게되었는데 플루트는 침을 너무 많이 소비하기 때문에 소화능력 및 식욕을 떨어뜨리는 악기라 여성에게 어울리지 않는 악기라는 비판을 한 사람도 있었다는 것이다. 1980년대 이후에 가녀린 소녀가 플루트를 연주하는 모습이 로망처럼 각인된 우리세대와는 전혀 다른 평이라고 볼 수 있다.
이윽고 피아노는 그녀의 벗이자 의지할 상대이자 애인이 된다. 그녀에게 그 누구도 감히 꺼내지 못하는 이야기를 들려주며, 아무도 받아줄 수 없는 그녀의 열정, 희롱, 변덕에 반응해준다. 85쪽
피아노의 역사를 담은 책이지만 현재 우리가 마주하는 피아노의 형태를 누가 발명했는지 정확하게 명시하고 있지는 않다. 다만 메디치 가문의 대작과 크리스토포리가 고안한 만들어낸 피아노 장치의 액션원리를 설명해주었고 부유층이 처음에 사용했던 만큼 요즘 흔히 하는 말로 커스터마이징 피아노에 대한 정보가 담겨 있어 흥미로웠다. 피아노 상판에 바느질 도구를 수납할 수 있는 피아노는 지금 생각해도 낯설 뿐 아니라 심지어 고양이나 돼지를 현과 해머가 들어가는 위치에 넣어 '살아있는 동물'들의 소리를 내는 피아노까지 개발했었다는데 지금 동물보호단체는 물론 일반사람들이 들어도 분개할 노릇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이것이 큰 비난이 일지 않았던 모양이다. 비슷한 불평등한 예를 들자면 18세기 옥스퍼드 대학에서는 수업과 연주시험을 통과한 한 여성의 학위수여를 학교에서 거절한 사례도 있었다. 단순히 피아노가 처음 개발된 시기나 사용된 기술 뿐 아니라 최초의 슈퍼피아니스트로 알려진 모차르트, 그와 늘 비교대상으로 오르지만 비평가들에 의해 패배자가 된 베토벤의 이야기까지 자세하게 들려준다.
오늘날에는 보통 튼튼한 목재의 긴 의자나, 조정이 가능한 가죽 커버 의자나, 등받이와 팔걸이가 없는 회전의자를 사용한다. 당신이 글렌 굴드가 아니라면, 가장 중요한 것은 타건에 가장 적합한 지레 효과를 주는 높이에 자리 잡는 일일 것이다. 395쪽
원제가 [피아노의 역사]가 아닌 [피아노의 자연사]였던 것이 납득이 되었다. 오히려 국내 출판제목도 역사 대신 자연사로 그대로 두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클래식 피아니스트가 아닌 클래식으로 시작해서 재즈피아니스트로도 유명한 오스카 피터슨의 마지막 연주실황을 시작으로 한 만큼 피아노 하면 당연히 '클래식'만 떠오르는 편협함을 갖지 않겠다는 저자의 의지가 느껴졌다. 덕분에 피아노가 재즈나 록음악처럼 클래식이 아닌 장르에서도 어느정도의 영향을 미치는지도 실려있고 좋게 말해서 악동인 글렌 굴드와 이 책을 읽고 싶게 만들었던 '호로비츠'와 관련된 이야기도 담겨있다. 심지어 1930년대 이후 전자피아노가 도입한 이후 클래식 피아노 시장이 축소되지 않고 오히려 전자피아노가 여전히 보조적인 위치에 머무르는 상황도 놓치지 않았다. 서문에 인용된 토마스만의 파우스트 박사를 비롯한 아직 국내에 번역되지 않은 책에 실린 피아노와 피아니스트와 관련된 일화 등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않고 친근한 피아노의 자연사를 궁금해 하는 이들에게는 소설처럼 흥미롭고 역사책처럼 지식이 가득한 좋은 책이다.
원제는 '피아노의 자연사'이다. 피아노 300년의 이야기를 박물지 형식으로 풀어나갔다는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역사 대신 자연사라는 단어를 사용했을 것이다. 44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