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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것도 없는 풍족한 섬
사키야마 가즈히코 지음, 이윤희.다카하시 유키 옮김 / 콤마 / 2015년 4월
평점 :
품절
꼭 읽으려던 책이 아니었고, 반드시 보려고 했던 영화가 아니었는데 우연하게 만나 깊은 감동을 받을 때가 있다. 마치 당시의 내 상황과
고민을 다 알고 있는 것 처럼 느껴질 때 소위말하는 '연'이 아니었는가 싶다. 책, [아무 것도 없는 풍족한 섬]의 저자는 대학 졸업 후 입사한
출판사가 연이었다고 말하고, 유학을 다녀 온뒤 일본 내에 출간하는 책을 해외로 알리는 중요한 작업을 즐겁게 할 수 있었던 것도, 하지만 한계를
느끼고 평생 나이들어 할 수 있는 일을 원할 때 섬, 카오하간을 만난 것도 모두 '연'이라고 말한다. 누군가 '연'이라고 말할 때는 단순히 그
행동이나 결과가 만족스러울 때를 뜻하지 않는다. 부족함이 없는 상태, 그야말로 더 뺄것도 더할 것도 없이 '풍족한'상태를 뜻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제목도 아마 '아무 것도 없는 풍족한 섬'이 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생활을 위해 돈을 버는 일이 아니더라도 자기가 하고 싶은 일.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얻은 경험으로 이것 만큼은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여겼던
일. 영리 사업이 아닌 일. 모두가 즐겁게 하는 일. 미래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일. 25쪽
알고 지낸 변호사를 통해 필리핀의 사유지를 구매하려고 나섰을 때 확인해보니 이전 소유자는 제대로 된 채무와 법적권리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저자는 차분하게 일을 처리해나갔고 주변의 도움을 받아 1988년 드이어 완전하게 섬 카오하간에 주인이 된다. 그곳에 이미 살고
있던 섬주민 300여명의 문제도 그가 오로지 영리목적이나 휴양의 목적이었다면 지인들의 조언대로 내보냈겠지만 그가 원하는 것은 자연과 더불어 사는
것, 누군가를 해치거나 상처주는 일이 아니었기에 주민들과 함께 사는 방법을 고려했다. 자신도 즐겁고, 주민도 삶의 영토를 잃지 않으면서 지인들도
와서 편안하게 쉴 수 있는 섬을 만드려고 노력하는 과정은 2장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우리나라에도 사유지로 등록된 섬이 있는 데 책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비교가 되었다. 어느쪽이 좋은 행정이라고 섣불리 말할 수는 없는 상황이지만 떠올려지는 것은 문자 그대로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제주에 유명한 세가지 중 한가지가 바람이듯, 카오하간도 바람이 늘 머무는 섬이다. 그래서인지 바람을 이용해 움직이는 작은 돛단배 사카양이
교통수단이다. 바람을 이용하는 이동수단은 섬에 가본적도 없는 데 여유가 느껴지게 하는 부분이다. 바람을 이용할 줄 아는 사람들, 자연을
거스리거나 기술이라는 명목으로 망치지 않고 그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는 섬주민들을 내쫓았다면 저자가 과연 섬에서 지금처럼 평안을 얻기는
어려웠을 것 같다. 심신이 더울 때 한 자락의 바람이 위로와 위안이 되어주기도 하지만 섬인 만큼 태풍의 위협도 만만치 않았다고 한다.
태풍의 무서움을 경험을 통해서 잘 알고 있는 섬 주민들은 쓸데없이 태풍에 맞서려고 하지 않는다. 태풍에 날아가지 않는 집을 건축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제 뜻대로 할 수 없는 이기지 못할 적에게는 헛된 저항을 하지 않고, 부서져 버리면 다시 고쳐 짓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33쪽
바람과 태풍의 이치를 거스리지 않고 살아가는 것 처럼 식수와 관련된 부분도 섬주민들은 지혜를 발휘한다. 비가 내릴 때 허둥지둥 하지 않고
빗물을 모아 마시기도 하고 요리에 사용하기도 한다. 벌레가 이따금 떠 있을 때도 신경쓰지 않는다. 물론 저자는 요리용으로는 그대로 사용하지만
식수는 끓여마신다고 하고 외부에서 온 손님들은 세부에서 사온 생수를 마신다고 한다. 놀라운 사실은 섬의 빗물과 외부인들이 사온 생수의 오염도를
측정했을 때 빗물이 훨씬 깨끗했다는 사실이다. 섬을 산 이후에도 지인에게 기존에 하던 업무와 유사한 일을 부탁받았을 만큼 저자는 아에 일을 놓고
섬에만 거주하는 것은 아니었다. 평생할 수 있는 일과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모두 수용할 수 있는 저자의 일복이 참 탐나기도 했다. 일본에
돌아왔을 때 서점에 들려 섬에 가져갈 책을 고르는 행복은 활자로만 읽는데도 행복한 기운이 전해졌다. 섬에 돌아가면 이내 저자는 섬주민들의 일상을
옅보고 좋은 점과 일본사회에 다른 점을 독자에게 알려준다. 자연을 거스리지 않는 삶은 끝도 없고 흥미롭기만 했다. 심지어 섬의 사는 개는 도시의
고양이처럼 누군가에게 길들여지기 보다는 자기만의 삶을 사는 동등한 입장이라는 부분은 웃음이 났다. 도시의 유약하고 주인만 바라보는 주인바라기
개들이 카오하간으로 간다면 더 행복하지 않을까 싶다.
인도에는 이런 철학이 있다. "인생에는 배울 시기, 사회 속에서 살아갈 시기, 사회에서 배운 것을 사회로 돌려주는 시기가 있다. 그리하여
그것들을 통과한 다음에는 자신만의 세상에 다다르기 위해 숲으로 들어간다." 219쪽
저자는 아직 자신이 현세를 떠나 숲으로 갈 시기는 아니라고 말한다. 배운 것을 사회에 돌려주는 시기, 어쩌면 현세를 떠나는 마지막
시기직전이 가장 어려운 시기인지도 모른다. 최근 화두가 되고 있는 것 중 하나가 '나눔'과 '공유'다. SNS가 자기과시와 타인과의 끊임없는
비교, 정보의 홍수의 대표라고 말하지만 순기능적인 면을 보면 그것은 단연 공유였다. 카문기 섬의 주인처럼 오로지 평화를 위해 섬을 꾸려나가진
않지만 섬에서 전해져 오는 방식 그대로를 수용하는 저자의 카오하간 운영방식이 내 입장에서는 훨씬 '공유'에 가깝게 느껴졌다. 그것이 저자가
말하는 카오하간의 특징이자 진정한 의미에서 '풍족할 수 있는'방법인 것이다. 섬을 통해 교류가 늘어나고 동반자를 만날 수도 있었던 만큼
카오하간은 저자에게서나 그 섬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연'이다. 그 연은 두 역자에게도 이어진 듯 했다. 늘 불어오던 바람과 더불어
살아숨쉬는 '젊은 바람'이 불어주길 기대한다고 저자는 말했다. 책을 읽는 내내 이런 섬을 만나면 어떤 기분일까 싶다가도 내가 젊은 바람인지에
대한 확신은 서지 않았다. 혹 책을 읽고 마음이 동하거나 '연'이라고 느끼는 사람들이 생긴다면 저자가 그토록 기다리는 젊은 바람이 되어
카오하간으로 날아가도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