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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퍼 엘레지 - 감탄과 애도로 쓴 종이의 문화사
이언 샌섬 지음, 홍한별 옮김 / 반비 / 2014년 9월
평점 :
절판
감탄과 애도로 쓴 종이의 문화사.
부제가 저러하니 엄청나게 두껍고 빡빡한 줄간격을 기대했으나 생각만큼 두껍지 않아서 첫 느낌이 좋았다. 적당히 손에 잡히는 두께와 내가 좋아하는 하드커버! 문체역시 자신만의 생각을 쏟아내고 비평가들이 풀어줘야 하는 픽션작가라기 보다 쉽게 쓰는 시리즈를 쓴 작가인 만큼 술술 잘 읽힌다. 심지어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데도 잘 읽힌다. 그래서 진짜 이해했나 정리해보면 그건 또 아니라서 이 쉬운문체가 장점이자 단점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제목에 적은 것 처럼 이 책은 1-2 장에서 열심히 공부하다 3장부터 재밌어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종이와 사랑에 빠지게 만드는 책이다. 한마디로 진짜 재밌다.
1장은 이전에 서지학 공부할 때를 쉼없이 상기시켰다. 제지법이 중국과 일본을 비롯 아시아에서 서양으로 넘어가는 과정(책에서는 기계가 탄생하는 배경을 좀 더 자세하게 서술했다)을 토대로 서지학은 종이 그자체와 판본과 활자를 중심으로 공부했다면 이 책은 일단 '종이'가 주제이기 때문에 집요하게 종이가 대중화가 된 역사를 설명해준다. 그래서 처음으로 종이기계를 발명한 사람들의 이름도 접하게 되고 그 사람이 어찌 살았다가 망해가는지도 알게되었다. 하지만 역시나 공부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2장의 제목은 숲이 종이를 구했다인데 이게 무슨말인가 하면 종이는 쉽게 찢어지고 망가져 종국에는 소멸할 것 같은 재료다. 양피지에 익숙했던 이들은 그때문에 종이에 대한 신뢰가 깊지 않았을 뿐 아니라 종이의 재료를 구하는 것도 쉽지가 않았다. 가격과 희소성의 문제로 종이의 역할이 쇠락할 즘 나무로 종이를 만들게 되었을 때의 경제성과 효용성이 알려지면서 그야말로 종이의 시대가 도래하게 된다.
그 덕분에 19세기 중반에는 눈앞에 닥친 듯했던 서구의 종이 위기를 가뿐히 넘어설 수 있었다. 원료 가격이 떨어졌고 생산량은 증가했고 수요는 전 세계적으로 폭발했다. 종이의 시대가 진짜 제대로 시작된 것이다. 숲이 종이를 구했다.
종이가 본격적으로 생활밀착형 존재가 되는 과정이 3장부터 펼쳐진다. 여기서 잠깐, 매 챕터마다 책에서 유명인사들이 언급했던 종이와 관련된 구절 혹은 명언이 한페이지씩 등장하는데 처음 몇 번은 열거된 책과 인물을 메모하느라 바빴다. 물론 뒤에 별도의 주석과 해설이 있는 걸 몰라서가 아니라 찾아보기 위함이었는데 별도의 추천리스트가 없다면 시도해봄직 하다.
3장의 지도이야기로 돌아가 살펴보면 종이탄생 이전에도 물론 지도를 여기저기에 그리기는 했었다. 쉽게 떠올릴 수 있는 나무는 물론 순은판에 새기기도 했다는데 무게도 무게지만 가격도 만만치 않았을 것 같다. 그치만 소장하고 싶다는 생각은 든다. 별도의 장식품이랄 것도 없이 거실이나 방에 세계지도 현판을 걸어두는 기분, 정말 상상만 해도 좋다. 하지만 대량생산을 위해서라면 역시 지도는 종이에 그리는게 가장 좋은 방법이다. 책에서는 단순히 종이에 지도를 그리게 된 과정뿐 아니라 종이지도가 측량과 토지관리 등 실생활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도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어 지금의 리서치 혹은 연구조사에서 쓰이는 방법들이 실제 19세기 런던 빈민 구제운동시에 적용되었다는 사실도 알게 해준다. 3장을 지나면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종이와 '책'이다. 가장 흥미로운 이 부분은 과감하게 리뷰에서는 생략, 해당 파트 맨 첫페이지에 실린 아포리즘으로 대신한다.
우리는 이제 탐서벽에 빠진 사람들의 명단을 만들겠습니다.
-토머스 프로그널 딥딘 목사, 비블리오마니아 혹은 탐서벽
종이와 책 편보다 개인적으로는 더 흥미로웠던 파트 5장은 종이와 돈이다. 돈은 물론 동전과 지폐로 나뉘지만 일단 돈이라고 했을 때 동전보다는 후자를 먼저 떠올리기 마련이다. 두툼한 돈뭉치라던가, 내 마음대로 '0'을 늘려서 쓸 수 있는 백지수표 등 종이와 돈은 그야말로 책 이상으로 한몸이라는 생각이 든다. 간단하게 돈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묘사한 뒤 본격적인 '지폐'의 역사가 등장한다. 책을 통해 처음 알게된 중국이 처음으로 종이를 통화로 사용했다는 내용과 과연 이게 종이의 이야긴가 싶은 다양한 금융의 역사가 이어진다. 마지막 12장 종이와 영화, 그리고 그 밖의 것들에 이르기 까지 서문에 언급한 저자의 말은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종이로 만들어졌다면 그야말로 뭐든 다 등장하고 역사적 배경에 현재에 이르기까지 '종이 박물관'임에 틀림없다. 책을 편 순간 독자는 지하에서부터 지상까지 총 12층 건물로 이뤄진 종이박물관에 들어선 셈이며 그 어느 층도 소홀하거나 지루할 틈 없이 저자는 이야기를 이어가고 또 이어간다. 물론 사실에 의거하여.
종이는 폭군이자 압제자이지만, 또한 구세주이자 증인이기도 하다. 이게 종이의 가장 큰 역설일 것이다.
이런 류의 책은 한번에 다 읽어내기란 결코 쉽지 않다. 쉬운문체라고는 해도 다루는 내용이 방대한데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추가적으로 메모하거나 살펴보고싶은 2차 자료가 등장하기 때문인데 이 책은 기존의 그런 통념을 깨트린 책이되었다. 그냥 다 읽게 된다. 메모하던것을 멈출지언정 책읽기를 멈추진 않게 한다. 이런저런 지식을 쌓게된 것(벌써 기억안나는 것이 대부분일지언정)은 기쁘지만 참 많은 것을 모르고 살아왔구나 싶은 한탄스러움과 종이책의 미래는 어떠할까요? 하는 어리숙한 질문은 더이상 하지 않아도 된다는 확신이 생겨 기쁜 마음도 들었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잠들때까지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 했지만 이 책을 읽고 난 지금 스마트폰이 새로운 습관을 만든 것은 분명하지만 종이는 늘 우리주변에 머물러 있음도 깨닫게 된 셈이다. 미래에도 마찬가지다. 스마트폰을 대체할 다른 무언가가 생겨나더라도 종이란 존재가 아에 사라지는 날이 오진 않을 것 같다.
따라서 40명이 1만 5000자루에 들어 있는 내용을 복원하는 데에는....대략 375년이 걸린다. 끝이 없는 작업이다.
우리 개인은 물론, 시민이건 이민자이건 난민이건 이주 노동자건 여행자건 관광객이건 그만한 시간이 없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종이로 조그만 기억의 전당을 세우는 데에 골몰하는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