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몸을 만드는 원자의 역사 - 나를 이루는 원자들의 세계
댄 레빗 지음, 이덕환 옮김 / 까치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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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진짜 재밌다. 누가 읽어도 이 책은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완독은 무리없다. 물론 다 읽었다고 해서 누가 원자가 언제 어떻게 발생했고, 지구는 언제 만들어졌으며, 인간을 이루고 있는 원소의 종류와 갯수는 물론 물리학자와 생화학자, 천문학자 그리고 지질학자들이 어떻게 각자의 분야에서 이를 밝혀낼 수 있었는지, 역사속의 영재들은 얼마나 많고, 1920년대 여성 과학자가 왜 제대로 급여를 받지도 못했는지에 대해 설명하라고 하면 못한다. 다만 어떻왜 왜 재미있었는지를 물어보면 적을 수 있을 것 같아 그 이야기를 서평으로 적어보겠다.

결국 여러분은 이 책을 통해서 우리 몸이 저녁 식탁의 음식을 어떻게 우리 몸으로 변환시키는지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우리 몸의 내부는 얼마나 복잡한지를 정확히 헤아리기도 어려울 정도로 엄청나게 광대하다.(...) 우리 몸에 들어 있는 원자의 수는 지구의 모든 사막에 있는 모래알보다도 10억 배나 더 많다. 13쪽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2가지 생각, '인간이 이렇게 대단한 존재야?', '그런데 나는 왜이렇게 하찮은거야!'였다. 왜냐면 이 책은 제목에서, 그리고 저자가 직접 밝힌 그대로 '우리 몸을 만드는 원자의 역사'에 관한 책인데 이를 밝혀낸 과학자들의 놀라운 능력과 상대적으로 운이 따라주지 않거나 연구결과에 합당치 못한 대접을 받은 안타까운 과학자들에 대한 연민(누가 누구를)등에 자꾸 마음이 가서 책장을 넘기는 속도는 점점 더 빨라졌기 때문이다. 더 재미있는 사실은 어떤 과학자가(혹은 대학원생이)어떤 이론을 발표하면 '끔찍하군'이란 평가를 받다가 긴 시간과 노력끝에 이를 증명해내면 '노벨상 후보가 되거나 수상자가 되는 과정'을 반복하고, 이 과정에서 주변사람 모두에게 능력을 인정받는다고해서 반드시 노벨상을 받거나 부와 명예가 얻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불공정한 인생이란 건 과학자라고 피해갈 수 있는게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신과 과학을 모두 섬겼던 성직자가 있는가 하면 정권에 의해 희생당하지 않기 위해 적당히 아첨을 할 수 있는 처세술에 능한 과학자도 있었고, 물론 양쪽 모두 큰 업적을 남긴 것은 분명하다. 만약 영화로 만든다면 2001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도 빅뱅이론을 부정했던, 그러면서도 큰 기여를 했던 호일의 이야기나 여자라서 그리고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외면당했던 블라우, 실험실의 긴장감이 텍스트로도 느껴졌던 밀러 그리고 아인슈타인.

그리고 본격적으로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먹거야 하는지, 채식의 안정성에 관한 답'을 들을 수 있는 4부로 뛰어 넘어오면 "불같고 충동적이었던" 유스투스 폰 리비히로부터 시작(291쪽)"해야 한다. 그는 몇가지 실험을 통해 인간이 몸을 만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단백질 지방 그리고 탄수화물을 밝혀냈지만 식물성 단백질 그의 엄청난 실수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계속 그의 이름이 언급되는 가장 큰 이유는 '연구대상이 아니었거나, 관심대상이 아니었던 것에 대한 관심과 연구하려는 시도'가 그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모든 내용이 다 중요하고 재미있지만 여기서 연급하고 싶은 것은 '비타민'에 관한 내용이다. 이건 개인적으로 궁금했던 부분이기도 했는데 과연 비타민은 '먹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의 문제다. 역사에서 비타민은 각각 해결하지 못했던 질병(괴혈병, 구루병 등)을 치료해주는 역할을 해왔지만 현대에서는 질병의 치료가 아닌 예방차원에서 비타민을 선택한다. 이에 대한 답을 저자는 간단명료에게 알려주고 친절하게 부연설명을 해준다.

'그러나 균형 잡힌 건강한 식사를 하는 사람이라면 식물과 박테리아를 통해서 필요한 비타민을 충분히 섭취할 수 있다. 비타민을 충분히 섭취하면 건강식품 매장에서 판매하는 비타민을 더 먹는 것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고, 자칫하면 몸(과 지갑)에 해가 될 수도 있다. 324쪽

까치에서 출간한 싯다르타 무케르지의 '세포의 노래'를 먼저 읽었었다. 이 책의 독자라면 지금 읽은 '우리 몸을 만드는 원자의 역사'도 맘에 들거란 책소개는 진짜였다. 그동안 나와 내 가족 그리고 지인들의 생일만 챙기며 살아왔는데 이 책을 읽다보니 이 모든 생일이 있기 위해선 '우주의 생일'이 존재해야만 가능하다. 특히 과학과 신이 같은 목표를 바라보고 걷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길을 걷는다고 생각하라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몇 억우리 인간이 우월한 것이 아니라 이 지구가, 모든 생명체가 존재하기 위해 필요한 여러 이유 중 하나라는 잊지 말아야겠다. 겸그리고 무언가에 의문을 가지는 것, 그 결과와 상관없이 그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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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진정성에 집착하는가 - 진짜와 허상에 관하여
에밀리 부틀 지음, 이진 옮김 / 푸른숲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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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성은 본래 자유를 추구하는데, 그것이 하나의 교리가 될 때 오히려 자유를 빼앗는다는 것이 바로 진정성의 역설이다. 우리가 '자신의 진실에 따라' 살 수 있다면 그것은 분명 좋은 일이겠지만,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는 개념에 나는 이의를 제기한다. 15쪽


진정성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각자의 답변이 다 있을 것이고, 그 답변이 틀리진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또 진정성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저자처럼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좋지 않은 쪽으로. 에밀리 부틀의 '우리는 왜 진정성에 집착하는가'를 읽기 전 후의 내가 바라보는 진정성에 대한 시선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누군가에게 '진정성을 가지고'란 표현을 이전만큼은 자주 사용하지 않을 것 같다. 왜냐면 진정성을 운운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나의 진정성을 의심하거나 상대의 진정성을 의심한 것이기 때문이다.


부어스킨은 셀럽과 영웅을 명확하게 구분했다. 그것을 가짜 우상과 진짜 우상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단순한 이분법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이런 멋진 글을 썼다. '우리는 셀럽을 만들 수 있으나 영웅은 결코 만들 수 없다. (...) '영웅은 그들의 업적으로, 셀럽은 그들의 이미지나 상표로 식별된다. 영웅은 자신을 창조하지만 셀럽은 미디어에 의해 창조된다. 영웅은 큰 사람이고, 셀럽은 큰 이름이다.' 57쪽


셀럽과 관련된 드라마와 영화가 많이 등장한 이후 관심이 없던 사람들도 이젠 셀럽들의 영향력을 알게 된다. 그들이 누군인지는 모르지만 내가 살까 말까 고민하는 제품을 무료로 사용하는 건 당연하고 거액을 받으며 활동하는 것을 알고 난 후 이런 직업이 탄생할거라는 것을 가장 빨리 예견한 사람은 누구일까 하는 궁금증도 생겼다. 어쨌거나 셀럽과 영웅의 비교를 보고 다 동의할 수만은 없었다. 저자 역시 더이상 그의 말이 맞지 않다고 인정하는 데 과연 본인도 그렇게 생각할 지, 영웅들도 동의할 지는 알 수 없다. 


자신의 경험담을 이야기할 권리에 대해서는 누구도 반박할 수 없다. '자전적 소설'이라는 꼬리표 혹은 온라인 기사에 붙는 '사적인 에세이'라는 수식어는 독자와 작가 모두에게 안전망을 제공하며, 작가가 타인의 문화나 정체성에 대해 부적절한 발언을 하는 실수는 없을 거라고 보장한다. 77쪽


얼마 전 동료와 소설과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면서 '자전적 소설'에 대한 의견이 다르다는 것을 확인한 적이 있다. 내게 자전적 이란 표현은 '안전망'이었지만 동료에게는 '진정성'이었기 때문이다. 해방 이후 한국전쟁을 겪은 소설가들은 '자전적 소설'이란 표현을 그리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안전망이 결코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그런 작은 의심조차 검열에 의해 작품은 물론 삶 자체가 소멸할 수 있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저자가 서두에 밝힌 것처럼 진정성이란 의미는 그렇게 시대에 변화에 따라 변화한다는 것을 한번 더 깨달을 수 있었다. 이런 맥락으로 보면 정체성과 진정성을 비교하는 파트로 흥미롭게 이어진다. (물론 본문에는 두 파트 사이에 제품이 있긴 하지만 여기서는 초반 셀럽과 겹치는 부분이 있어 생략한다)


에릭슨의 경험을 통해 우리는 정체성이 진정성과 어떻게 서로 충돌하고 또 의존하는지 알 수 있다. 사회적 정체성은, 스튜어트 홀이 표현한 것처럼 "집단적인 "하나의 진정한 자아"다. 에릭슨이 둘 중 어느 범주에도 쉽게 들어갈 수 없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130쪽


'정체성의 혼란'이란 표현을 종종 쓰긴 하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과연 내가 혼란스러웠던 것이 '정체성'이었는지, '진정성'이었는지 가만 생각해보니 후자였던 것 같다. 내가 혼자 고독하게 살아가길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를 무기로 공격성을 내보인 적도 없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에 대한 예로 영국의 '브렉시트 국민 투표' 상황을 가져왔고, 이를 찬성했던 사람들이 그려보았던 영국성이 무엇이었는지도 알게 된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옳은 선택이 아닐지언정 선택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낀다. 어쩌면 애초에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라는 사실을 잊기 위해서 그 여정에 집착하는지도 모르겠다. 진정성이 추상적인 목표라는 사실마저 외면하고 나면 우리에겐 단 하나의 질문이 남는다.

어떻게 그곳에 도달할 것인가? 162쪽


서두에 언급한 것처럼 이 책을 읽기 전 후로 달라진 게 하나있다면 '진정성의 언급 빈도'일 것이다. 우리는 지나치게 진정성을 가지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래서 저자는 각 분야별로 나누어 그런 노력이 어떤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결국 진정성을 추구하는 것이 아닌 '집착'한다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그런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그런 상황들이 무엇인지 아는 것부터가 시작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이 그 답을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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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년 집사 백 년 고양이 래빗홀 YA
추정경 지음 / 래빗홀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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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제공 #천년집사백년고양이 #추정경  #래빗홀



"부디, 스스로 격을 갖춘 고양이를 만나길' 대목

사람은 반려동물을 들일 자격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으니까요

격이라는 , 많은 생각이 들게 만드는 말이더라고." 

18쪽


격을 갖추고 반려동물을 받아들인다면 과연 세상의 몇 사람이나 반려동물을 기를 수 있을까. 아니 그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 소설 '천 년 집사 백 년 고양이'에서 가르키는 집사란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집사가 아니다. 앞에 수식어만 보더라도 아무 곳, 아무 때나 만날 수 없다. 이런 집사가 되고 싶단 생각도, 될 자격도 없지만 이 소설에 관심이 갔던 이유는 '동물의 말'을 다루는 부분이었다. 아이처럼 순수하다고 해서 들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쩌면 테오처럼 동물쪽에서 그 능력을 허락하거나 전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얼마전 보았던 영화 '위키드'에선 분열된 사회를 통합하기 위해 동물을 희생시키고, 그러기 위해 더이상 동물들이 말을 후손에게 가르칠 수 없도록 케이지에 가둬버린다. 동물의 말이 별개로 존재하는 것과, 인간과 함께 나누어 사용했다는 전제가 서로 다른 것처럼 느껴지지만 결국 인간의 이기심으로 대화가 단절되었다는 점에선 양쪽 모두 똑같다. 뉴스를 봐도 한 쪽에서는 인간의 권리를 침해하면서 길고양이를 돌보는 사람이 있는가 반면, 누군가는 사람앞에 서 있을때와 동물과 함께 있을 때의 인격이 달라진다. '천 년 집사 백년 고양이'에도 그런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래서 분노가 타오르는 부분도 있지만 그보다는 두섬씽에서 일어나는 훈훈한 일들, 고양이와 집사들간의 대화 그리고 천 년 집사를 향한 각각의 상황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테오와 티그리스와의 만남과 헤어짐이 분노에 해당했다면, 이어지는 고덕이 능력을 얻게 되는 부분은 나라면 어떠할까 하는 상상을 이끌어낸다.


"내가 미친 건가?"고덕의 혼잣말에 고양이가 혀를 차듯 그르렁거렸다

"미쳤다기보다 상상력이 부족한 쪽이지." 

"정말 고양이랑 말을 하고 고양이가 환생한다는 , 이게 사실이란 거야?" 

145쪽


고덕과 같은 상황에 놓였을 때, 나는 과연 별다른 의심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이따금 지나가는 고양이를 보면서 그 날의 날씨에 맞는 안부를 전하긴 하지만 실제로 그 고양이가 내 말을 알아들었을거라고 생각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렇다보니 아마 고덕처럼 고양이에게 머저리라는 소리를 들을 확률이 높을 것 같다. 이렇듯 재미나게 읽으면서도 앞서 언급한것처럼 분노가 타오를 만한 사건도 세상 어딘가에서 여전히 일어나고 있었다. 그런점에서 이 소설은 동물 유기 및 학대 그리고 인간의 폭력성이라는 무거운 메세지를 다룬다는 점에서 결코 가볍기만 한 소설은 아니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청소년 또래의 아이들과 토론을 해봐도 좋을 책이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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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드리엔 폰 슈파이어와의 첫 만남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 지음, 윤주현 옮김 / 가톨릭출판사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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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타사르가 전하는 아드리엔 폰 슈파이어와의 만남을 담은 이 책은 아드리엔의 생애는 물론 그녀가 남긴 저작물에 대한 안내서이기도 하다. 특히 책에 수록된 기도문은 아드리엔의 신심을 짐작하기에 더없이 좋은 내용이기도 하다. 우선 아드리엔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1902년 스위스에서 태어났으며 그녀의 아버지는 의사였고, 어머니는 성공한 상업가의 집안에서 태어난 여성이었다. 아드리엔이 당시 시대에 걸맞게 좋은 직업의 남편을 만나 결혼하는 것을 바랐던 어머니는 아드리엔이 의사가 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는 것을 못마땅해 했을 뿐 아니라 훼방을 놓기 까지 했다는 내용을 보면서 올바른 믿을 가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새삼 반성하기도 했다. 그런 방해속에서도 아드리엔은 열 살이 되기 전부터 가난한 이웃을 도왔을 뿐 아니라 학교에서 다른 아이의 잘못을 자신이 한 것처럼 선생님께 말하여 대신 혼나기도 했다고 한다. 이정도면 그녀가 대속하려는 정도가 어느정도 였는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녀가 보여준 순명의 자세 중 가장 마음에 와닿았던 것은 '예'의 자세였다. 가톨릭 신자들이 성모님을 통해 배우려는 것, 반드시 가져야 할 자세가 다름 아닌 순명이다. 이 순명의 '예'를 보여준 것은 성모님 이전에 예수님께서 먼저 인간이 되어 대속해야 하는 '잔'을 받아들이셨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아드리엔이 체험한 신비는 성모님의 발현이나 천사와 성인들과의 만남만이 아니었다. 대속, 성 토요일마다 반복되던 실재하던 고통이었다. 그녀가 '예'한다는 것은 그런 죽음과 같은, 죽음 그 자체였다. 죽음이 두렵지 않았던 것은 주님께로 가는 가장 완벽한 행복이었기 때문이다. 아드리엔의 삶은 그 어떤 성인들의 삶보다 내게는 너무 먼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1900년대 성공한 의사이자 주변으로부터 신뢰받는 여성이었던 그녀가 다소 늦게 개종한 이후 그토록 열정적으로 하느님의 일을 한다는 것이 너무 극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신부님 말씀대로입니다. 정말로 이제야 이해가 되네요. 성모님은 아드님의 운명을 예견하셨기 때문에 울부짖으셨던 거예요. 그분은 진통 때문에 울부짖은 것이 아니라 아드님의 고통을 분명히 인식하며 그렇게 하신 거예요. 성모님은 진통을 겪으면서도 아드님의 고통의 일부를 미리 체험하셨던 거죠." 141쪽

아드리엔 역시 첫 남편과 아버지의 죽음을 예견했다. 또 그들 외에 다른 이들의 죽음과 고통 역시 앞서 언급한 것처럼 체험했기에 성모님의 울음이 어떤 것인지 잘 알았을 것이다. 성모님께서 그녀에게 처음 발현하셨을 때 무릎을 꿇고 앉아 '예'하며 받아들였을 때 그녀는 어렸고, 개종하지 않은 상태였는데도 가능했었던 것은 그야말로 그녀가 성모님처럼 선택받았기 때문이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저는 이 책을 통해 무언가 널리 알리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알아야 할 내용을 개관적으로 제시하고자 합니다. 머릿말 5쪽

아드리엔과의 대화와 그녀의 주해를 읽다보면 '귀 있는 자들은 들어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의 무게가 느껴진다. 동시에 잘못된 주해를 받아들이며 하느님을 오해하고 사랑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울부짖게 만들 수 있음도 깨닫게 된다. '사람들이 알아야 할 내용'을 알게 하는 것. 특히 세례를 받고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지 못했다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그런 의미로 꼭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또 무엇을 어떻게 기도해야 할 지 모를 때, 주님의 기도가 자꾸만 멀게 느껴질 때, 이 책을 꼭 권하고 싶다. 우리가 했던 그 고민은 물론 경험하지 못했던 고행까지 자발적으로 '예'했던 아드리엔을 통해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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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자신의 훌륭한 보호자입니까? - 읽고 걷고 쓰며 스스로를 지켜내다
권수민 지음 / 책과나무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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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틀을 처음 본 순간 가슴이 쿵 했다. 그동안 아이의 좋은 보호자가 될 생각만 하고 책만 찾았지 내 자신의 보호자가 될 생각은 못했기 때문이다. 28년간 교육자로 살아온 저자가 팬데믹 시대를 거쳐 ‘에세이 쓰기’를 결심한 까닭은 명상하고 산책하고 좋아하는 공부하는 것이 끝이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나누고, 이를 통해 무언가 삶의 해답을 찾아가는 데 도움을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저자는 팬데믹을 견뎌온 누구라도 글을 쓸 자격이 있다고 말해준다. 책을 읽으면서 저자의 바람대로 다음의 세 가지에 집중하며 읽었다. 저자의 경험으로 내 과거를 올바르게 해석할 것, 조언을 참고할 것 그리고 산책과 명상에 집중할 것.

같은 시기에 읽었던 책 세 권 모두 내게 명상과 산책을 권한다는 건 그저 웃고 밑줄치고 넘어갈 수 없었다. 저자가 헬스장에서 만난 그녀들의 이야기를 통해 나를 반추해보면 지나치게 ‘좋은 엄마’ 혹은 ‘완벽한 아내’를 생각하며 무리하고 있진 않은지 생각해보았다. 안타깝게도 살림 능력이 턱없이
부족한 스스로를 탓할 뿐 저자의 말처럼 내 자신을 격려하고 응원해주지 못했음을 새삼 깨달았다. 나부터 자신을 격려해주지 못하면서 아이에게는 세상에 널 사랑하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아도 네 자신은 너를 끝까지 사랑해줘야 한다는 지키지도 못할 얘길 해왔다. 그런가하면 저자는 공부를 시작할 때도, 또 멈춰야 할 때 역시 단호했다. 타의에 의한 공부는 즐겁지도 않고 성적을 맞춰야 한다는 생각으로 부담만 커질텐데 다른 건 몰라도 공부만큼은 나이탓을 하지 않기로 결심할 수 있게 해주었다.
책을 읽으면서 특히 와닿았던 부분은 내가 아직은 경험할 수 없는 ‘노년’에 대한 부분이었다. 부모님이 70대가 되신 해에 70세 부모를 둔 자녀가 읽어야 한다는 건강, 보호 관련 책을 형제와 한 권씩 사서 읽었다. 아이와 함께 내가 보호해야 할 대상이 늘어만 났다고 생각했는데 저자의 글을 보면 인생의 황금기를 아직 살고 계시는 중이며 무엇보다 칠순, 언제 위험한 상황이 다가와도 이상하지 않을 수 있지만 여전히 많은 것을 충분히 잘 해나갈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책에서 불안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하지만 문장의 마무리는 항상 희망과 긍정으로 맺어지는 저자의 문체만으로도 마음의 평안을 원하는 독자에게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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