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열정을 경영하라
진대제 지음 / 김영사 / 2006년 3월
평점 :
절판
선거철에 나온 책이라 내용이 그리 신통치 않을 것으로 짐작했다.
진대제 장관에 대해서 그보다 전에 나온 책은 그냥 훑어 보아도 되는 수준이었기에 더욱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다 이번에 집어들었는데 꽤 재미있고 유용한 내용들이 많아서 기분 좋은 독서가 되었다.
책도 괄목상대해야 하는구나, 하나를 보았다고 선입견을 고집해서는 안되겠구나 하는 느낌을 가졌다.
진장관의 약력을 보면 화려하다.
서울대 2등으로 입학, MIT를 거쳐 스탠포드 박사를 마치고 IBM에서 일하다가 한국으로 들어옴.
35세에 삼성 최연소 임원이 되어 화제를 뿌렸고 전무,사장 등을 거치다 장관으로 발탁되어 활약했다.
타워팰리스에 살고 재산이 수백억에 이르며 영주권을 쉽게 포기하지 않고 자식을 해외에 두고 있는
그가 장관이 되어야 하냐고 질책하는 소리도 많았다.
맞다. 진대제는 개인을 철저하게 희생하고 공공에 봉사하며 겸손하고 청빈하게 살아온 사람은 절대 아니다.
그보다 장관 제의 받자 개인이 사정이 있는데 다시 이야기하면 안되냐고 청와대 인사수석에게 전화통에
대고 말 붙이는 사람이었다. 그 사정은 바로 1주일만 지나면 행사할 수 있는 수백억대의 스톡옵션이었다.
미국에서 귀국할 때도 삼성말고 현대에도 접촉을 해 고 정몽헌 회장과 직접 면담했는데
다시 삼성에서 붙들려고 하자 임원을 달아달라고 카드를 제시한다. 아무도 감히 35세의 박사를 바로
임원에 달아준다고 의사결정할 수 없었기에 이 건은 이병철 회장의 독대로 올라가게 된다.
한국의 전통적 기준은 선비정신이다. 이를 통해 보면 자기 잘난체 하고 자리 욕심내고 돈 많이 버는 것 마다 하지 않는 진대제의 행보는 제 사리사욕 챙기는 욕심쟁이로 보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우리가 한번 돌아볼 것이 있다. 왜 월가에는 연봉 천만불이 넘는 금융전문가가 수두룩하고 실리콘밸리에는 젊어서 수백,수천만불의 재산을 모으는 IT 산업의 천재들이 존재할까?
그들이 그만큼 큰 돈을 받아가는 것은 더 크게 돈을 벌어주기 때문이다.
더 대우해주고 더 많이 벌면 되는 것 아닐까?
삼성의 반도체 사업은 95년만 해도 1조원의 이익을 냈다고 한다. 최근에 보면 이익은 몇배로 늘어났다.
지금이야 삼성의 1위가 당연한 듯 이야기하지만 80년대 말로 시선을 돌려보면 삼성그룹 자체가
반도체 사업의 적자로 휘청대는 상황이었다. 잘나가는 IBM의 연구원으로 편안한 미국생활을 버리고
될지 안될지도 모르는 사업에 뛰어드는 것은 분명 벤처 정신이었다.
왜 너는 애국심이 부족하냐고 물어보는 것은 절대 현명하지 않다. 진대제의 의사결정 기준은 애국심이
절대 아니다. IBM에서 남아 있었다면 편안한 길은 되지만 CEO는 커녕 임원도 되기 어려울 것이다.
이민 1세대에게 보이지 않는 장벽은 많았을 것이고 지금 IBM에 반도체 산업 자체가 남아있지 않다.
진대제의 결단은 먼저 세계 산업의 트렌드를 읽어서 나온 것으로 일본이 하면 한국도 할 수 있다,
아직 초창기인 회사에서 자신의 리더십이 훨씬 발휘되기 쉬울 것이다라는 계산에서 나온 것이다.
다음 임원을 베팅한 것은 한국기업에서의 일은 지위에서 나오는 권위가 필요하다는 현실인식이 작용
한 것이다.
시키는대로 열심히 일해서 회사가 주는 은전을 받는 한국,일본 모델이 아니라 자신이 가능성을 계산해 회사를 선택하고 산업 자체를 일으켜 그 성과를 나누어 받는다는 미국식 모델로 자신의 커리어를 자리매김한 것이다.
내가 볼 때는 한국에서의 앞으로의 인재상은 이런식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그 첫 모델을 진대제가 끊었고 성공의 모습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렇게 미래를 계산하고 꿈을 그려낸다고 누구에게나 성취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진대제의 삶에서의 핵심은 열정이 놓여 있다.
지금 부의 상징인 타워팰리스에 살고 있지만 출신은 경남 의령이라는 꽤 깡촌에서 가난한 집에 태어나 학비도 고민한 그였다. 고교,대학,유학시절에 닥치는 곤란에 대해서 그는 자신을 철저히 던져 이를 해결하는 열정을 가지고 살아왔다. 그 과정은 책의 여러 곳에 잘 나타나 있다.
삼성에서의 성취도 그가 받은 대우가 아깝지 않게 충분히 이루어내었다고 생각된다.
읽다보면 삶의 장면 하나 하나에 대한 묘사가 꽤 뛰어나다는 생각이 든다. 선거 앞둔 바쁜 진장관이 직접 이 책을 썼을리는 만무하고 대필작가를 썼을 것인데 누군지는 몰라도 정말 열심히 만들어내주었다.
미국 가전쇼에서 기조발표를 하는 것도 재미있었다. 스티브잡스의 프리제테이션이 유명한데 진장관도 제법 비슷하게 일종의 쇼 형식의 발표를 잘 수행했다. 이제 반도체와 같은 부품에서 핸드폰, TV와 같은 완제품을 홍보하려고 하다 보니 소비자에게 교감을 이루어야 한다. 잡스가 발표를 잘하듯 진장관도 흉내를 내었고 나아가 이름 붙이기에도 일가견을 이루었다고 한다. 나중에 나온 IT389, 와이브로 등이 그의 작품이라고 한다.
잡스의 애플이 아이맥, 아이포드 등 이름과 광고에 뛰어난 것과도 대비된다.
참고로 그가 사람의 심리를 읽어내는 솜씨는 꽤 뛰어나다. 스탠포드의 은사를 만나러 갔다가
IBM을 그만두었다는 말을 전하자 얼굴이 별로 안좋게 변하는 것을 보았다.
이를 제자인 자신을 매개로 IBM에서 연구비 끌어내기 쉬웠을 것인데 하는 아쉬움이 무산된 것으로
읽어낸다.
그런 심리읽기는 작게는 포커판에서 크게는 기업의 사업부 하나 하나를 놓고 벌이는 승부에서
많이 효과적으로 발휘된다.
책 곳곳에 반도체 산업의 발전과정에서 있었던 일화들이 소개되는데 전자산업에서 공부하고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꽤 유용한 자료라고 생각된다. 우리 사회에 부족한 것이 역할 모델인데 진대제는 충분히 많은 공대생들에게 꿈을 심어줄 수 있는 삶을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