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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집만 보면 사족을 못쓰는 못쓸 인간이라, 요즘 가장 사고 싶은 녀석은 새 옷으로 갈아입은 10권짜리 카프카 전집이다. 다 갖추려면 살림살이에 비바람이 몰아치겠지만, 책장에는 광명들겠다. 많은 알라디너들이 그렇듯, 사실 사 놓고 다 읽지도 않는다. <기사단장 죽이기>는 그저께 도착했지만 아직 띠지를 두른 채 정수리에 먼지만 조금씩 쌓아나가고 있다.
노는 건 아니고, 읽기는 뭔가 계속 읽고 있다. 도서관에서 하루에도 몇 권씩 빌려다 읽는다. 그런데, 음, 스택Stack이라는 것이 있고 힙Heap이라는 것이 있는데, 스택은 접시 위에 접시 쌓는 방식이라 맨 마지막에 들어간 접시를 가장 먼저 꺼내야 하고, 힙은 먼저 들어간 놈을 먼저 꺼낸다. 힙 방식으로 책을 읽으면 참 좋을텐데, 이런 스택, 어찌된 일인지 맨날 스택, 스택이다. 제일 먼저 빌린 책은 반납날이 빚쟁이 구두소리마냥 하루하루 가까워지는데, 타는 똥줄 부여잡고 오늘 빌린 책을 먼저 읽는 그런 변태. 과거를 잊은 남자. 좋다고 빌릴 떈 언제고, 새 책이 꼬신다고 그걸 그냥 홀라당 넘어가서 헌 책을 내동댕이치는 지조없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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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을 이리저리 거닐며 살피다 보면 숨어있는 재야의 고수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영어 사전을 펴 놓고 중국어 공부 하는 사십 대 남성은 눈빛이 차분하지 못한 걸 보니 아직 내면의 끓는 불을 다스리지 못하고 있군. 속세에 미련이 많이 남은 게지.
논어 베끼시던 할아버지는 내게 이면지 한 장만 달래서 이면지를 드렸는데, 이면지의 이면을 확인하시더니 내가 드린 이면지가 명실상부 진짜 이면지라는 사실에 꽤 실망하는 눈치셨다. 아니, 이면지를 달라셔서 이면지를 드렸는데, 이면지를 달라니까 왜 이면지를 주냐는 표정이면.....
며칠 전부터 내 왼쪽에 앉는 아저씨는 무슨 건설 관련 법규를 외우고 있는데, 에어컨이 가동 되는데도 등 뒤의 창문을 반 정도 열어둔다. 한 번은 내가 닫았는데, 뭐야 이 근본없는 상놈은-하는 표정으로 날 스윽 쳐다보더니 다시 창문을 여는 것이다. 이 구역의 온도 지배자는 나여. 그러나 그런 그도 팔뚝이 허벅지만하고 온 몸에 털이 부숭부숭 난 밀리터리 나시남이 나타나 창문을 닫을 때는 건설 법규책에서 눈조차 떼지 않는 미친 집중력을 발휘했다. 뭔진 모르겠지만 빠른 합격을 기원한다.
지난 주 데이비드 흄을 읽고 있던 반 대머리 아저씨는 어제부터 헤겔의 정신현상학 1권을 읽고 있다. 마주보고 앉아 있는 내게 자기가 뭘 읽는지 보여주려는 심산인지, 자꾸 책을 들었다 놨다 한다. 훗, 이쪽을 호락호락하게 보았군. 나 또한 들뢰즈를 들었다 놨다 하며 반격을 시도한다. 변증법을 생성하는 쓸데없는 만남이 이어지고. 화장실 가다 복도에서 마주치기라도 하면 아저씨는 걸출한 녀석이군, 하는 표정으로 은근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면 나 또한 당신도 비범함이 보통이 넘는군요, 하는 미소로 답하며 유유히 옆을 스쳐 지나가는 것이다.
읽은 책 170701-170715
인문 일반 3권
1. 이상한 나라의 뇌과학
: 내가 뭘 하는 사람이든, 일단 두루두루 넓게 알면 책 쓰기에 좋다! 저자의 능력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솔직히 이 책 꾸려내는게 그리 어렵지는 않았을 것 같다.
2. 사피엔스의 미래
: 따라가기만 해도 벅찬 말들의 향연. 우리는 누구나 축구를 할 수 있지만, 대부분 챔피언스 리그를 보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귀찮고 땀흘리기도 싫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사실은 아름다움의 문제다. 알랭 드 보통 같은 말을 할 수 있지만, 알랭 드 보통처럼 말을 할 수는 없으니까.
3. 악의 시대를 건너는 힘
: 공허와 공동이 원인이라는 진단도, 그 빈 공간을 관계의 언대와 사랑으로 채우자는 처방도 새 것은 아니지만, 틀린 것도 아니다. 나같은 소인은 그저 오늘 하루도 소소한 것들을 눈치채며 살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철학 4권
4. 들뢰즈 유동의 철학
: 검색해보니, 이 책을 이해하지 못하면 한국어로 쓰인 어떤 들뢰즈 책(들뢰즈가 쓰지 않은 것들도 포함)도 이해할 수 없을 거라는 분위기가 감지되어서 읽었는데, 이해하지 못했다. 이걸 이해하지 못하면 다른 것도 이해하지 못할 거라는 그 말조차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빡치기 시작했다.
5. 혁명의 거리에서 들뢰즈를 읽자
: 그래서 이번에는 우리 글로 쓰인 책을 한번 들어 보았다. 이 책은 저자의 주관이 선명하게 드러나는데, 옳은지 그른지는 나는 잘 모르겠고, 다만 그 주관의 사용법이 난폭하다. 학계 돌아가는 바는 1도 알지 못하지만, 날카롭게 갈아놓은 이빨을 번뜩이며 먼저 출발한 자들을 노리는 후발 유망주같은 느낌이랄지.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스탠스는 아니다. 이렇게 딴 이야기를 계속 하는 것은 여전히 들뢰즈와는 의미있는 사이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6. 질 들뢰즈
: 그래도 한 세권쯤 읽으니까 더 나아졌다는 느낌은 들었다. 그렇지만 나아진 거라는 확신이 든 것은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이 괜찮았는데, 그것이 앞의 두 권을 통해 삽질하다 단련된 덕인지 아니면 책이 객관적으로 괜찮기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원서를 구했고 추후 재독할 생각이 있다.
7. 나꼼수로 철학하기
: 들뢰즈와 나는 잠시 각자의 시간을 가지며 차분히 생각해 보기로 했다. 그래서일까, 들뢰즈와는 완전 다른 스타일의 철학책을 만나보고 싶은 욕구가 생겨 이 책을 골랐다. 그러나 아직도 가끔 눈을 감으면 들뢰즈가 생각나고, 멍하니 혼자 콜라잔을 기울이는 밤이면, 책장에 꽂혀있는 다른 들뢰즈 책을 괜히 뺐다 꽂았다 하며, 자니?...... 이 책이 작위적이라는 느낌이어서 들뢰즈가 더 그리웠던 걸까? 끼워맞추느라 고생했겠다는 느낌. 그리고 하려고 들면 어떻게든 끼워맞춰지는 신통방통함.
수학 / 과학 / 기술 3권
8. 한권으로 충분한 양자론
: 이 책을 볼 필요가 없을만큼 많이 아는 사람에게만 이 한권으로 충분하다.
9. 과학철학
: 과학이 어렵나, 과학 철학이 어렵나...... 과학은 그나마 재미있는 구석이라도 있지만 과학 철학은 어느 부분에서 신나야 할지 도저히 모르겠다. 그러나 과학이 그렇듯 유익하기는 하다.
10. 통계적으로 생각하기
: 이런 귀여운 책이라면 얇고 가벼워도 통과. 나는 얇고 가벼운 책이 지녀야 할 미덕이 귀여움이라고 생각하는 미친 귀염성애자며, 믿는다. 언젠가 귀여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정치 / 사회 / 문화 5권
11. 소설에서 만난 사회학
: 살짝 집요하지만 억지는 부리지 않고 꿋꿋이, 그리고 흥미롭게 사회학, 사회학 연구방법, 사회학자에 대해 조곤조곤 알려준다.
12. 모던 러브
: 나 같은 사랑머저리가 또 있을까 싶을 때 읽어보면, 세상 아직 살아볼만하다고 느끼게 된다.
13. 서민적 정치
: 뭐 이렇게 빨리 넘어가. 펼치자 덮는 느낌.
14. 촘스키, 점령하라 시위를 말하다
: 우리는 정말 조금씩이나마 나아지고는 있는 걸까? 만약 그렇다면, 누가 그렇게 만들고 있는 것일까? 만약 그런 누군가가 있다면, 나는 여기서 이러고 가만히 있어도 되는 걸까?
15. 허기사회
: 분석도 있고 대안에 대한 설계도도 있지만, 대안을 구동할 동력원은 미궁 속에. 그리고 현실적으로 그것은 결코 흠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애니팡이 퇴행이라니...... 그것만은 동의할 수가 없다...... 그 귀여운 것들을 어떻게.
인권 / 젠더 / 노동 3권
16. 낯선 시선
: 가지고 싶은 눈, 가지고 싶은 손.
17. 잠깐 애덤 스미스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
: 그 놈이 태어나면서부터 많은 것들이 시작되었다. 호모 이코노미쿠스. 죽여도 죽지 않는 자. 페미니즘은 그 놈의 목을 벨 칼을 가지러 떠난다. 가는 길에 들러야 할 곳이 많다.
18. 저속과 과속의 부조화, 페미니즘
: 읽는 데 필요하다기보다는 쓰는 데 필요할 것 같은 책. 같은 시리즈의 다른 역사책들이 절판임에 비해 아직 살아남아 있다는 것은 무얼 시사하는 걸까? 중요함? 안 팔림? 마지막 부분의 논쟁 파트는 주옥 같다.
문학 5권
19. 무엇보다 소설을
: 세상엔 읽을 책 이야기가 많고, 읽은 책 이야기도 많다. 내가 살아 어느 쪽에 얼만큼 보탤 수 있을까?
20. 세상의 모든 아침
: 음악을, 언어를, 아니 음악을, 아니 아니 다시 생각해보니 역시 언어를...... 난 과연 무엇을 만난 것일까?
21. 주저하는 근본주의자
: 작은 것이 큰 것을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하지 말자. 개인사가 거대담론을 위해 복무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하지 말자. 비록 그렇게 읽히기 쉽더라도.
22. 방귀의 예술
: 웃기게 더러운 것은 더럽게 웃긴다. 18세기풍 병맛. 병맛의 시조새.
23. 우정, 나의 종교
: 늙어도 낡지 않는 언어가 있다. 고루해도 고고한 언어가 있다. 인물을 휘감아 도는 이야기를 위한 언어가 한 편에 있다면, 이야기를 휘감은 인물을 위한 언어도 있다. 그 언어는 슈테판 츠바이크의 손에 있다.
예술 5권
24. 현대철학의 예술적 사용
: 알고 있는 범위와 그보다 한발쯤 더 나간 범위 안에서는 매우 유익했다. 대체로 그 범위 바깥이었지만. 밑줄을 많이 그었고, 더 미루지 말고 들뢰즈를 공부해 볼 마음을 품었다. 들뢰즈와의 썸이 여기서 시작된 것이다.
25. 현대미술 강의
: 내가 읽을 수 있는 한계를 아슬아슬하게 초과하는 범위 내에서 최고의 책이다. 재독은 성장을 확인할 수 있는 척도가 될 것이므로, 구매할 뜻을 품었다.
26. 역사는 디자인된다
: (디자인의) 역사를 디자인화하는 방식이 참신하지만, 도식화 과정에서 잘려나간 것들은 있기 마련이고, 그 결과 몇몇 도식들은 이해가 어려워 그저 도식을 위한 도식으로 보이기도 한다.
27. 이 그림 정말 잘 그린 걸까?
: 가볍기 하지만, 최소한 머리 아프지 않고 읽을 수 있다. 그것은 어마어마한 득점포인트.
28. 이연식의 서양미술사 산책
: 산책하기 좋은 책으로 좋은 산책 마쳤으니 앞으로는 산책보다 최소한 여행이랄지, 탐구랄지 하는 책들을 많이 읽어 보겠다.
그 외 주마간산식 독서 7권
29. 사회주의 ABC
30. 이주헌의 서양미술 특강
31. 플루언트 포에버
32. 닐스 보어
33. 생각을 여는 그림
34. 단어의 배신
35. 들뢰즈의 <니체와 철학> 읽기
총평
들뢰즈는 제일 쉽다 쉽다 하는 걸로 4권 읽었지만, 그것도 진짜 지난한 일이었다. 하루에 많이 읽어야 50쪽 밖에 못 읽는데, 80쪽씩 잊어버리는 느낌이었다. 엉엉. 정신 좀 차려야지.
페미니즘 관련 책을 좀 더 많이 읽을 작정이었는데, 어쩌다보니 3권밖에는 읽지 못했다.아 진짜 정신 좀 차려야지.
예상보다 미술책을 많이 읽었는데, 아무래도 그림이 있어 휙휙 넘어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아 진짜 제발 정신 좀 차려야지.
이제 빌리기보다는, 가지고 있는 책을 좀 읽고 싶다. 며칠째 먼지만 쌓고 있는 <기사단장 죽이기>와 그 옆에서 니들 마음 나도 다 안다는 듯이 검은 미소를 지으며 서 있는 <호모 데우스>와, 난 이미 100년 전부터 세계 곳곳에서 그런 취급을 당하고 있었다며 그들을 위로하는 카프카의 책들과...... 아 진짜 제발 부탁이니까 정신 좀 차려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