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은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많이 지고 많이 내려놓고 그렇게 패배하는 법과 포기하는 법을 배우면서 여기에 연착륙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아직 추락하는 중일지도 모른다. 빼앗겨도 참을 만한 것들만 빼앗겨 왔기에 버틸 수 있었다는 것도 모르고 무엇을 빼앗겨도 덤덤하게 다음 하루를 자기 방식대로 살아갈 수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고 착각하는 중일지도. 익숙해진다는 것은 고마운 만큼 무서운 일이기도 해서, 아픔이 더는 아픔이 아니게 된 무덤덤한 몸을 자랑하게 되는 일이기도 해서, 어쩌면 그것은 나를 더 자세히 알아가는 과정이라기보다 내가 자세히 모르는 나를 내게서 삭제하는 과정일 수도 있다. 부정否定하여 끝내 부정不定하는 방식. 나는 이것이 아니고, 그것도 아니며, 저것조차 아니면서…… 사람의 정의는 n개의 아니오를 더하는 방식으로만 가능한지, 사람의 삶은 결국 그 n을 무한대로 보내면서 자기를 무한소로 수렴시키는 것과 얼마나 다를 수 있는지, 그런 생각을 품는다는 것이 사실 아무것도 내려놓지 못한 나를 증명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갖고 싶은 것은 없지만 가지고 있고 싶은 것은 있고, 잃을 것은 없지만 잃기 싫은 것은 있는, 무감한 듯 감각하고 무욕한 듯 욕망하는 삶. 나를 속이는 나에게 속는 척 속아 넘어가 주며 속이는 나를 속이는 나와, 속는 내가 실은 속아주는 것임을 모르는 척하며 이중으로 나를 속이는 나의 기기묘묘한 왈츠. 나를 속이고 내가 속일 세상이 내 안에 다 있어서 노래는 안으로 안으로만 흐르고, 춤사위는 무한대로 가는 n의 스텝에 따라 작고 작게만 휘휘 돈다.




 

그렇게 해서 아프게 하면, 고통이 느껴지면 기이한 안도와 충족감이 찾아왔다. 모든 상황이 불행 쪽으로 아귀가 맞추어지고 그것이 온당하며 지금과 다른 삶이란 가능하지 않으리라는 낙담 쪽으로 나 자신을 미는 힘, 그건 무엇이었을까. 그런 것도 생장의 힘이었을까.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게 그저 여여한 성장을 이루는.

_ 김금희, 우리가 가능했던 여름

 

이 사건에서 자네가 저지르고 있는 잘못이 뭔 줄 아나? 복잡한 사건이기를 바라고 있다는 점이야. 자네는 이 사건을 채프먼이 태어난 순간부터 시작된 거대한 음모로 생각하고 있어. 유대인의 똑똑한 머리를 써서 어제 일어난 일을 생각해야 마땅한데, 5년 전에 일어난 일을 걱정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자네가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어제는 채프먼이 피살된 날이고 오늘은 거기에 대해 무언가를 해야 하는 날이야.

_ 폴 오스터, 스퀴즈 플레이

 

그는 그 후로 결코 노래를 부르지 않았지. 친한 사람과도 말을 나누는 것을 피하게 되었다네. 말도 없이 노래도 부르지 않고 웃지도 않으며 세월을 지내다 보면, 그 어느 사람이라도 세상에서 잊히고 마는가 보네. 겐 씨가 배를 젓는 것은 옛날과 다를 바 없었지만, 포구 사람들은 겐 씨의 배에 타도 겐 씨가 세상에 있다는 것을 잊게 되었지. 이렇게 말하는 나도 때때로 겐 씨가 그 둥근 눈을 반쯤 감고 노를 저어 돌아오는 것을 볼 때, 겐 씨가 아직 살아 있구나 생각할 때도 있다네. 그가 누구냐고 물은 사람은 자네가 처음일세.

  그렇군. 불러서 술을 마시게 하면 어느덧 노래도 하게 되지. 그렇지만 그 노래의 뜻은 알기 어려웠어. 아니, 그는 중얼거리지도 않고 똑같은 말을 반복하지도 않고 단지 때때로 큰 한숨만 내쉴 뿐이니 불쌍하다 생각지 않을 수 있겠나…….

_ 구니키다 돗포, 겐 노인

 

 

 

--- 읽은 ---

 


193. 나는 프랑스 책벌레와 결혼했다

이주영 지음 / 나비클럽 / 2020

 

민폐쟁이 프랑스 책벌레 에두아르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많은 우스개 사건이 있고, 그 우스개 사건 속에서 욕과 분노를 삭이기 위해 분투하는 이주영 선생님이 있고, 그 분투 속에서 얻게 된 깨달음들이 있다. 그 깨달음들의 스펙트럼이 폭넓다. 사귈 때는 웃기고 편할지 몰라도 같이 살면 엄청 피곤하고 짜증나는 인간형이란? 잘못을 지적하는 적절한 방식이란? 로마까지 걸어서 가는 가장 아름다운 방법이란? 열등감에 벗어나는 방법이란? 허영심의 효용이란? 적게 알수록 깝치고 많이 알수록 더 많이 침묵하는 인간이란? 배움이란? 모르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이란? 자문화 중심주의/서구 우월주의란?

 

책벌레가 물론 세상 벌레 중에 가장 멋진 벌레고, 벌레 소리를 들어도 그다지 기분 나쁘지 않은 거의 유일한 벌레긴 한데, 그래서 책벌레라면 응당 그럴 거라고 많은 사람들이 예측하는 어떤 성향이나 단점 같은 것들이 용인될 가능성도 더 크긴 한데, 그렇다고 그게 좋은 건 아니다. 두 가지 깨달음을 얻었는데, 에두아르 같은 사람이 책벌레라면 syo는 아직 책벌레가 아니라는 것과, 책벌레가 저런 사람이라면 나는 안 할 거라는 것. 멋짐과 구림이 버무려지면 멋진 구림과 구린 멋짐이 되는 건데, 둘다 썩 내키지 않는다.

 

여기 주목받을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는 에두아르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좋지 않은 머리를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사용하려 드는 고집쟁이이자, 상상을 초월하는 덜렁이 모지리이다. 그가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뛰어난 것이라고는 '끊임없이 읽을 수 있는 능력'밖에 없다. 우리가 생각하는 성공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돈이나 명예로 얻은 성공은 언제 깨질지 모를 아슬아슬함이 있다. 우리는 그래서 불안한지도 모른다. 에두아르는 그저 앉아서 주구장창 읽으며 뭔가를 알아가는 것이 즐겁고,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며 감탄하고 동감하며 울고 웃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풍요롭게 만든다.

스스로의 내면을 풍요롭게 하는 삶.

  이보다 더 성공적인 삶이 있을까? 절대 깨지지 않는 내면의 단단한 풍요로움으로 무장한 에두아르는 진정한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_ 이주영, 나는 프랑스 책벌레와 결혼했다

 

 

 


194. 맨발

문태준 지음 / 창비 / 2004

 

모든 풍경이 정경이다. 광경은 채 몇 발 못 떼고 사람의 방향으로 돌아가고, 이 돌아감이 중심감각으로 시집 전체에 묻어있어, 해질녘과 길어지는 산그림자와 저물어가는 것들의 어우러짐이 성마르지 않고 담담하다. 당하는 사람이 없어 평온하다. 공간을 선명하게 그리자 투명해지는 시간. 마모되는 사람조차 조용히 아름다운.

 

  어두워지는 순간에는 사람도 있고 돌도 있고 풀도 있고 흙덩이도 있고 꽃도 있어서 다 기록할 수 없네

  어두워지는 것은 바람이 불고 불어와서 문에 문구멍을 내는 것보다 더 오래여서 기록할 수 없네

  어두워지는 것은 하늘에 누군가 있어 버무린다는 느낌,

  오래오래 전의 시간과 방금의 시간과 지금의 시간을 버무린다는 느낌,

  시람과 돌과 풀과 흙덩이와 꽃을 한사발에 넣어 부드럽게 때로 억세게 버무린다는 느낌,

  어두워지는 것은 그래서 까무룩하게 잊었던 게 살아나고 구중중하던 게 빛깔을 잊어버리는 아주 황홀한 것,

  오늘은 어머니가 서당골로 산미나리를 얻으러 간 사이 어두워지려 하는데

  어두워지려는 때에는 개도 있고, 멧새도 있고, 아카시아 흰 꽃도 있고, 호미도 있고, 마당에 서 있는 나도 있고…… 그 모든 게 있어서 나는 기록할 수 없네

_ 문태준, 어두워지는 순간」부분

 

 

 


195. 1417, 근대의 탄생

스티븐 그린블랫 지음 / 이혜원 옮김 / 까치 / 2013

 

지금으로부터 약 600년 전에 문제의 변화가 일어났을 때, 결정적인 순간은 한 외딴 장소의 벽 뒤에 처박혀 가만히 숨죽인 채 거의 눈에 띄지도 않게 지나갔다. 어떤 영웅적인 행위도, 이 위대한 변화의 현장을 후세에 증언해줄 영민한 관찰자도 없었다. 천지개벽할 변화의 순간이면 으레 나타나는 기적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느 날, 상냥하지만 약삭빠르고 기민해 보이는 인상의 한 30대 후반의 덩치가 작은 사내가 한 도서관의 서가를 둘러보았다. 그는 그곳에서 매우 오래된 필사본 하나를 발견하고 꺼내들었다. 책을 살펴보고 그는 매우 흥분해서 다른 사람에게 그 책을 필사하도록 지시했다. 이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이것으로 충분했다.

_ 스티븐 그린블랫, 1417, 근대의 탄생

 

흥미진진한 전개로 너를 꼼짝도 못 하게 만들어주겠다는 의지를 잔뜩 드러낸 도입부다. 이 책의 정체는 기원전 1세기경 등장한 루크레티우스의 철학시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의 개론서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러니까 사실 고갱이는 철학 장르의 영역인 것. 그럼에도 저런 도입부라니, 사뭇 도전적이지 않습니까?

 

성공한 도전은 도전이 아니라 성공의 예견처럼 보이듯, 자신의 역량을 처음부터 알았던 그린블랫 자신에게 이건 하나도 도전적이지 않았겠다. 교회의 타락, 수도원의 일상, 에피쿠로스학파의 사상, 기원전후 1세기 로마의 문화 수준 및 정치 상황, 필사가들의 고충, 콘스탄츠 공의회의 막전막후 등, 흥미로운 문화적 구경거리들이 책 사냥꾼 포죠의 이동 경로에 착착 감기면서 맛깔나게 서술된다. ‘OO의 인문학이라는 제목을 단 책들이 이런 재밋거리들을 나열하곤 하는데, 이 책 속 포죠와 같은 인물이 없으면 이야기가 하나의 스토리 라인으로 꿰어진다는 느낌이 약하고 사전적으로 나열된 지식처럼 보이면서 정이 잘 안 가게 된다. 이 책은 이겼다.

 

 

 

 


196. 정의 중독

나카노 노부코 지음 / 김현정 옮김 / 시크릿하우스 / 2021

 

스스로 정의라고 생각하는 인간이 몰고 올 수 있는 부정의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듯, 스스로 정의의 편에 서 있다고 생각하며 을 토벌하는 데서 오는 도파민 쾌락이 이번 세기, 저번 세기의 일이 아니라서, 뇌의 기능과 호르몬의 기전을 토대로 이런 문제를 분석하려는 것은 유효한 시도인 듯.

 

후루룩 읽기는 좋다. 그렇지만 일본에서 건너온 책들이 자주 그러듯 가볍고(미국에서 온 애들은 가벼운 주제에서도 뭔가 그래프며 실험이며 이런 것들을 잔뜩 물고 있다), 조심스러운 척하지만 실은 대놓고 개인 가치관을 투척하는 경향도 없지 않으며(그렇지만 한국에 십수 권이 번역되어 들어오는 유명저자들에 비하면 이 정도는 눈에 띄지도 않는 수준이다), 무엇보다 처방전이 어쩐지 신통치 않다는 느낌. 절대 관심 없는 책도 좀 읽어라, 평소에 가지 않던 길로 좀 가봐라, 그리고 뇌 건강에 좋은 오메가3지방산을 먹어라…….

 

그렇지만 방금 오메가3 한 알 삼켰다. 이제부터 필사적으로 트림을 막아야 한다.

 

정의 중독 상태에 빠지면 나와 다른 것을 모두 악으로 간주한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가졌거나 이해할 수 없는 언행을 보이면 '몰상식한 인간'이라 규정짓고 어떻게 공격할지, 상대에게 최대한 큰 타격을 주기 위해 어떤 말을 할지 고심하게 된다.

  누가 옳고 그른가를 떠나 양측 모두 자신이 정의라고 확신해 공격하기 시작하면 해결점을 찾기가 매우 힘들다.

심지어 참여자들이 그 상황 자체를 하나의 이벤트로 여겨 적극적으로 즐기는 듯 보일 때도 있다. '어쩌면 처음부터 해결할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가만히 지켜보면, 얼마나 능숙하고 효율적으로 상대를 깎아내리는지 그 기술을 겨루는 시함을 보는 것만 같다.

  이는 '매우 심각한' 정의 중독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어려운 상황을 극복해 새로운 답을 찾으려 하기보다는, 스스로의 정의에 취해 상대를 일방적으로 깎아내리는 데 만족감을 느끼는 것이다.

_ 나카노 노부코, 정의 중독

 

 

 

--- 읽는 ---

플라톤 전집 1 / 플라톤

기록하기로 했습니다 / 김신지

집중과 영혼 / 김영민

데리다 입문 / 김보현

소설 제주 / 전석순 외

잘 안다고 믿는 것을 다르게 보는 법, 수학 / 미카엘 로네

안나 카레니나 2 / 레프 톨스토이

당신이 옳다 / 정혜신

젠더 모자이크 / 다프나 조엘, 루바 비칸스키

세계를 향한 의지 / 스티븐 그린블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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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1-06-04 13: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무도 댓글이 없을 때 쇼 님에게 댓글 쓰기는 처음인 듯합니다.
위의 책에서 제가 읽은 건 두 권뿐입니다.
다양한 책의 독서가 님에게 자극을 받고 갑니다.

syo 2021-06-04 14:54   좋아요 2 | URL
페크님 오랜만이네요 ㅎㅎㅎ
서재활동 재개하신 건가요? 그동안도 계속 꾸준하셨는데 제가 발견을 못했던 것뿐이라면 🍎 드리고 ㅎㅎㅎ
다른 사람이 읽은 몇 권을 올렸는데 그 중 두 권을 이미 읽었다면 굉장히 많이 읽은 거죠 ㅎㅎㅎ 페크님이 읽으신 책을 한 10개 올리셔도 과연 제가 그 가운데 2권이나 읽었겠습니까 ㅎㅎ

수이 2021-06-04 13: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데리다 입문 이미 건너뛴 그대가 데리다 입문을 읽고 계시니 저도 데리다 입문 읽고싶지만 이탈리아어 단어 외워야 하니 참겠습니다. 오늘 날 왜 이리 좋아?! 숲 속 바람소리 들으며 낮술 해야하는 날씨입니다 오바

syo 2021-06-04 14:55   좋아요 1 | URL
아니에요. 저는 영원히 입문서의 세계를 방랑하는 입문떠돌이 syo입니다.....
숲 속 바람소리는 콜라죠 제로콜라.

행복한책읽기 2021-06-04 14: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syo님 왈츠 넘 많이 췄나봐요. 머릿속이 어질어질.^^
문태준님 저 표현, 버무린다 는 내거였는데. 뺏겼다요^^;;
이주영님은 이주윤 작가랑 잠시 헷갈렸음요. 말장난. 유머감각. 감성. 수려함. 맛깔남. syo님 또한 터짐^^

syo 2021-06-04 14:56   좋아요 1 | URL
문태준 선생님이 저보다 어렸을 때 저런 걸 막 쓰셨으니, 어른이 된다는 건 거저 되는 게 아니라는 증명이네요.....
읽기님 늘 감사합니당^-^

바람돌이 2021-06-04 16: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근대의 탄생 도입부는 꼭 츠바이크같은 느낌! ㅎㅎ
한해 한해 지나면서 꼭꼭 명심하는 생각이 있습니다. 아 그냥 끝까지 절망하지 않아도 될만큼의 시련이나 고통이었기에 편한 소리 잘하는 내가 있는 것일 터, 그러니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 함부로 나불거리지 말자.
드디어 주말입니다. 오늘 금요일은 아 진짜 피곤해 죽는줄 알았습니다. 좀 있으면 퇴근 시간... 룰루랄라~~~
syo님도 즐거운 주말 되세요. ^^

syo 2021-06-04 23:32   좋아요 0 | URL
제가 아는 직장인들이 다들 이번주는 어쩐지 바빴다고 하더라구요. 무슨 일일까요.....
바쁘고 피곤한 한 주였던만큼, 바람돌이님 책과 행복이 가득한 주말 보내소서^-^

새파랑 2021-06-04 16: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syo님의 저 많은 책 중에 겹치는 책이 1권(안나 카레니나 2) 밖에 없네요 ㅜㅜ 언제나 봐도 놀라게 되는 syo님의 다양한 책의 범위~!!

syo 2021-06-04 23:33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 굵직굵직한 책은 새파랑 님의 독서목록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는군요. 역시 ㅎㅎㅎ
 

 

독난讀難

 

 

 

1

 

드디어 선풍기를 꺼내놓았다. 커피는 무조건 아이스. 식후 산책은 함께해요, 반바지.

 

 

 

2

 

5개월에 190권이라. 450권 페이스긴 한데, 글쎄. syo는 내가 잘 아는데, 걔는 하반기에 더 미친 듯이 읽는다. 모르긴 몰라도 8월에는 한 70권쯤 읽을 거고, 8월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그 탄력이 그대로 남는다면 9월도 어지간하겠지. 예상컨대 올해는 500~600권 사이에서 맺을 듯. 그렇다면 17년 이후 최대량이 될 것으로 보인다. 다시는 이렇게 읽을 일은 없겠거니 했었지만, 작년에 11권 달성에 실패한 반동으로 올해 이러는 모양이다. 그리 잘하는 짓 같지는 않지만 딱히 못할 짓도 아니어서 아무려면 어떤가 싶고 그렇다. 뭐 이런 게 syo고 또 이런 게 syo의 인생이지.

 

 

 

3

 

소설을 기가 막히게 잘 읽고 또 읽은 것들을 오래 기억하는 친구들을 보면서 늘 혀를 내두른다. 읽은 양으로는 나도 어디서 꿀리질 않는데 나는 왜 저런 게 안 되는가. 그것은 오래도록 숙의의 과제였다. 그러다가 최근에서야 문득, , 내가 이래서 안 되는구나- 하고 깨달은 바가 있었다.

 

소설을 잘 읽는 친구들은 등장인물에 이입한다. 그 친구들은 아, 저 기쁨 나도 알지, , 내가 이 상황이었다면 너무 슬펐겠구나, , 떠나! 저 호로새끼를 버리라고 제발! 이렇게 읽는다. 그런데 syo는 작가에 이입한다! , 이 기쁨을 이렇게 표현하다니 대단하다, , 저런 오도 가도 못 할 상황을 만들어내다니 대단하다, , 저런 불세출의 호로새끼를 창조하다니 대단하게 대단하다! 이렇게 읽는 것이다…….

 

그러니까 잘 읽는 친구들이 등장인물들을 따라 다종다양한 감정의 널을 뛰면서 읽기의 직물을 짜나가는 동안, syo는 오로지 감탄의 감정 하나만 가지고 독서를 해나갔던 것. 감탄이란 건 뚜껑 따자마자 원샷으로 들이켠 500ml 콜라처럼, 체감하는 당시에는 온몸이 저릴 정도로 톡 쏘고 목은 따갑고 눈물이 퐁퐁 샘솟을 정도지만, 진정되는 데 긴 시간이 필요 없고, 결국 빈 플라스틱병만 남는 그런 유형의 감정이다. 그래서 syo의 소설 읽기가 시간의 이빨 앞에 그토록 무력했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작가가 될 작정이 1도 없는 인간이 작가의 눈으로 소설을 읽는 것에는 어떤 이점이 있는가. 이제는 이게 질문이구나…….

 

 

 

4

 

나는 소플아(소크라테스-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만 만나면 이상하게 까고 싶어서 손가락이 근질거린다.

 

 

 

 

--- 읽은 ---

 


190. 동급생

프레드 울만 지음 /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17

 

- 일독(17090x)

- 재독(210531)

 

이 아름다운 작품에 흔하고 무딘 찬사를 한 줄 덧붙이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나의 줄기로 만들 수 있는 이야기 가운데 가장 완벽한 작품이다. 그 줄기가 무리 없이 버틸 수 있는 동시에 최고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을 무척이나 적합한 양의 잎과 꽃이 달려 있다. 세밀해야 할 만큼만 세밀하고 아름다워야 할 만큼만 아름다운 글을 쓰기란 정말 어렵다.

 

이것 보소, 또 작가에 이입하고 앉았다. 울만 안 돼, 울만 안 돼…….


그나저나 동명의 야한 게임이 있었다. 원도 있고 투도 있고 리메이크조차 있었다. <동급생>은 그냥 야겜의 대명사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래서 어린 시절 '동급생'은 실수로라도 입에 올리면 안 되는 단어였다. 자칫하면 뭐라고? 동급생이라고? 이새끼 그거 해봤나보네? 이러면서 비릿하게 웃는 하이에나들에 둘러싸인 부시맨 소년이 되고 마는 것. 하지만 과연 그게 안 해본 놈들 입가에서 나올 수 있는 웃음이었나. 어떻게 그 <동급생>은 잘 지내는지 모르겠다. 이 『동급생』은 잘 지내다 못해 완벽하게 아름답다. 그리고 지금 이 문단은 세상에서 제일 미친 놈이 쓴 제일 미친 리뷰의 한 대목 같다.

 

어느 날 밤, 부모는 외출을 하고 가정부는 심부름을 갔을 때, 그 목조 주택이 맹렬하게 타오르는 불길에 휩싸였다. 소방차들이 당도하기도 전에 아이들이 불에 타 죽고 말았다. 나는 불이 난 것을 보지도, 가정부와 어머니의 비명 소리를 듣지도 못했다. 단지 다음 날 시커멓게 그을린 벽과 타버린 인형들, 뒤틀린 나무에 뱀처럼 매달려 있는 숯이 된 그네 줄을 보았을 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었다.

  그 일은 전에 그 어떤 일로도 겪어 보지 못한 엄청난 충격으로 나를 뒤흔들어 놓았다. 나는 수천 명을 빨아들인 지진, 마을들을 묻어 버린 불타는 용암의 흐름, 섬들을 삼켜 버린 대양의 파도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있었다. 황하가 범람해 백만 명의 사람들이 죽었다거나 2백만 명이 양쯔 강에 빠져 죽었다는 이야기를 읽은 적도 있었다. 수많은 군인들이 베르됭 전투에서 전사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추상적인 이야기 숫자, 통계, 정보였다. 한 사람이 백만 명을 위해 고통스러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그 세 명의 아이들, 내가 알고 있었고 내 눈으로 보았던 그 아이들은 완전히 다른 이양기였다. 그 아이들이 무슨 짓을 했기에, 그 가여운 어머니와 아버지가 무슨 짓을 했기에 그런 일을 당해야 했을까?

_ 프레드 울만, 동급생

 

 

 


191. 철학의 태도

아즈마 히로키 지음 / 안천 옮김 / 북노마드 / 2020

 

쌔삥(?) 철학에 대해 비전공자가 공부하러 들어갈 수 있는 구멍은 크지도 않고 잘 발견되지도 않는다. 하려고 들면 하겠지만, 외국어도 필요하겠고, 앞 세대 철학자들에 대한 지식도 필요하겠고…… 그럴 땐 개론서가 좋은데, 개론서도 개론할 만큼 명망 있는 철학자를 대상으로 하지 않으면 팔리지 않으니 그 구멍 역시 좁거나 없다. 결국 철학에 조예도 욕심도 없는 통상의 독자 입장에서 보면 최첨단 철학은 들뢰즈나 데리다, 더 나가면 지젝 정도의 위치에서 형성되는 듯. 잘은 모르지만 들뢰즈 훌륭하고 데리다 못지 않겠지만 5G 인터넷망이 어떤 건지 상상이나 하다가 돌아가신 분들의 철학이 겁나 새롭다는 느낌을 주기는 어렵다. 그 이전 철학자들에 대해 폭넓게 아는 독자라면 준거점이 달라서 비교적 참신해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름을 들어본 철학자라고는 플라톤이랑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뭐 이런 사람들 뿐인 독자, 아는 거라고는 나 자신을 알아야 한다는데, 나는 생각하면 고로 존재해야 한다던데, 뭐 이 정도에 그치는 독자 입장에서는 현대 철학자들의 참신성을 인지하기가 도리어 어렵다. 우편-전신-유선전화-무선전화-시티폰-피쳐폰-스마트폰의 발전사를 따라가는 사람이야 스마트폰의 참신성을 깨닫지, 편지지 보여주고 대뜸 스마트폰 보여주면 그건 참신한 게 아니라 완전 다른 물건일 뿐이다. , 이런 게 다 진짜 최신식 철학을 공부하기 싫은 사람에게 좋은 핑계가 된다.

 

젊은철학자로 나타나 시대를 풍미하는 사람들이 그래도 일본에는 가끔 있나 보다. 아즈마 히로키도 지금은 차마 젊다고 하기 어려운 나이가 되었지만. 어쨌든, 오래된 생각을 새로운 현상에 적용하는 방법보다 새로운 현상에 맞는 새로운 생각 자체를 배우고 싶을 때가 있다.

 

가령 만화가 있으면 고전적으로 접근하는 연구자는 만화 콘텐츠를 독해할 뿐, 만화 주변에 형성된 관계망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이 만화가 어떤 형태로 소비되는지, 만화를 읽은 오타쿠가 어떤 2차 창작을 하는지를 간과하고 작품을 논한다. 작품만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소비자가 그 작품을 어떻게 활용하는지, 구체적으로 말하면 작품 주변에 어떤 문맥이 생겨나고, 그 문맥을 활용해 소비자가 어떤 행동을 하며, 그것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지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포스트모던 사회의 문화 현상은 작품이 아니라 '작품 소비자의 행위'를 시야에 넣을 때 핵심에 다가갈 수 있다.

_ 아즈마 히로키, 철학의 태도

 

 

 


192. 스스로를 아는 일

앙드레 지드 지음 / 임희근 옮김 / 유유 / 2020

 

몽테뉴의 수상록을 앙드레 지드가 발췌하고 서문 해설을 단 책이다. 수상록은 두꺼운 책이라 그런가, 대부분 다 편역이고, 완역한 것은 동서문화사 판밖에 없는 것 같다. 20대 초반에 그 책을 읽었었는데, 문체가 참 신비롭지만 졸립다는 느낌을 받았던 기억이다. 물론 좋은 말씀은 너무 많았다. 유물론자 공대생이 읽기에는 괜찮았다. 신비롭지만 졸린 게 문제였지. 이것은 곧 신비롭고 졸린 문체로 느껴졌고, 마침내 신비롭게 졸린 문체라는 생각이 들기에 이르렀다. 하루에 한두 꼭지를 침대 위에서 읽다가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나를 깨울 때까지 기절하는 방식의 라이프스타일을 확립하는 데에 큰 도움을 받았다. , 물론 좋은 말씀은 너무나 많았다. 언제 한번 다시 꼼꼼하게 읽어볼 작정이다. 그 몸풀기로 이 작은 책을 집어든 것. 작아도 신비롭(지만//) 졸렸던 것을 보면, 역시 위대한 책은 크나 작으나 자신의 빛나는 특성을 잃지 않는 법인 듯. 다시 한번 말하지만, 좋은 말씀은 너무나 많았다. 짐작건대, 심지어 몽테뉴의 이 문체를 사랑하는 사람도 상상해볼 수 있다. 취존.

 

모든 스포츠와 훈련이 공부의 일환이 될 수 있다. 육상, 레슬링, 음악, 무용, 사냥, 무기와 말 다루기. 학생의 외적 태도나 품위, 그의 사람됨을 마음과 함께 빚어 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형성해 주는 것은 마음도 몸도 아니라 바로 인간이며, 교사는 비단 제자의 몸과 마음만 빚어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몸은 아직 유연하므로 마땅히 모든 유행과 관습에 부응해야 하며 젊은이는 대담하게 모든 국가와 집단에 들어맞을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 필요하다면 모든 무질서와 고통도 맛보아야 한다. 그가 모든 유행에 친숙해지게 하라. 그러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고 칭찬받은 일만 하려 들 것이다.

_ 앙드레 지드, 스스로를 아는 일

 

 

 

 

--- 읽는 ---


나는 프랑스 책벌레와 결혼했다 / 이주영

1417, 근대의 탄생 / 스티븐 그린블랫

플라톤 전집 1 / 플라톤

젠더 모자이크 / 다프나 조엘, 루바 비칸스키

맨발 / 문태준

회계가 직장에서 이토록 쓸모 있을 줄이야 / 한정엽, 권영지

하루 5분의 초록 / 한수정

주디스 버틀러의 철학과 우울 / 사라 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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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21-06-01 19:5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정말 다양하게 읽으세요. 부럽습니다. ^^
책의 진짜 진수는 소설이라고 들었습니다만, 왜 손이 안 가는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ㅠㅠ

syo 2021-06-01 19:58   좋아요 4 | URL
읽기라면 북다님처럼 진하고 깊이 읽기가 부러운 읽기죠.
언제나처럼 권 수만 늘리는 syo의 허랑방탕한 읽기.....

저는 이런 이유로 소설을 더 열심히 읽어보려구요. 이제부터는 의식적으로 등장인물에 이입하면서....

북다이제스터 2021-06-01 20:04   좋아요 3 | URL
별 말씀을... 전 syo 님이 소개해 주신 책 읽기도 벅찬 것 같습니다. 좋은 소설 소개 많이 해 주시는데 읽어야지 하면서도 소설외 다른 소개해 주신 책부터 먼저 읽게 됩니다.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ㅠㅠ

syo 2021-06-01 22:51   좋아요 0 | URL
사실 책은 너무너무 많아서 저절로 손이 가는 것만 읽어도 죽을 때까지 읽을 책 없는 일은 없겠잖아요.
북다님의 독서 스타일이 스스로 다음 책을 지목하는 것이니, 저는 북다님의 독서를 응원합니다 ㅎㅎㅎ

붕붕툐툐 2021-06-01 20:1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syo님 글을 읽으며 생각해 보았어요. 저는 등장인물에 감정이입은 안 되고, 그렇다고 작가한테도 감정이입이 안되고, 그냥 스토리 파악이 주라는 걸.. 어흑~ 저도 작중 인물에 감정이입 해가며 읽도록 노력해 봐야겠어요~ 한꺼번에 다양한 읽기를 하시는게 syo님 읽기의 특장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syo 2021-06-01 22:53   좋아요 2 | URL
저는 스토리 파악을 하긴 하는데 제일 빨리 까먹는 것도 스토리입니다. 사실 재독할 때마다 뭔가 새로운 책 같아서 좋긴 해요 ㅋㅋㅋㅋ 그래서 그 단점은 사실 좋아합니다.

저는 동시에 여러 권 읽으면서 뭔가 하나도 제대로 몰입해서 들어가지 않는 독서로 이번 생을 채우다가 갈 모양입니다. 그건 그거대로 가볍고 팔랑거리는 깨달음이 생겨서 괜찮아요. 양질 전환의 법칙이라잖아요. 많이 읽다보면 뭐 얻어지는 것도 있겠지요^-^

새파랑 2021-06-01 20: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 엄청나게 다양한 분야를 읽으시면서 5개월에 190권이라니 정말 대단하신거 같아요~ 진정한 독서 기계네요~!! 역시 세상은 넓고 엄청난 분들도 많은거 같아요 ^^

syo 2021-06-01 22:55   좋아요 2 | URL
ㅎㅎㅎ대단의 영역이라기보다는 그냥 개인적 특색에 가깝습니다.
권수를 줄이고 오래오래 깊이 읽어도 결국 조금만 시간 지나면 다 똑같이 희미해지더라구요.
그럴 바에야 그냥 치고 달리는 전략입니다^-^

저는 새파랑님의 매일 만보 매번 리뷰가 더 대단해 보입니다.

꼬마요정 2021-06-01 20: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몽테뉴의 문장들이 ‘신비롭지만 졸리다’에 극공감 하고 갑니다. ㅋㅋㅋ 그 문장들 하나하나 의미를 깨닫기엔 전 너무 모자라요ㅜㅜ 머리로는 그런가보다... 해도 그런 상황 속에서 느낄 감정들이 가늠이 잘 안된다고나 할까요. 절망을 이겨내고 희망을 얘기하는 건 쉽지만 직접 희망을 가지기란 쉽지 않은 것처럼 말이죠.

그나저나... 속독이라도 배우신 건가요?? 쉽게 읽히는 책들은 없어보이는걸요. 언제나 감탄만 합니다^^

syo 2021-06-01 22:59   좋아요 2 | URL
좋을 때는 또 좋은데, 약간만 피곤하거나 정신적 여유가 없어도 잘 읽히지 않더라구요, 몽테뉴의 문장이. 저는 늘 정신이 산만한 인간이어서, 그렇게 고도의 집중을 요하는 독서에 늘 실패하곤 합니다 ㅎㅎ 머리로도 생각하고 감정적 가늠도 시도해 보시는 꼬마요정님의 독서는 한 권을 읽으셔도 syo의 열 권만한 얻음이 있겠네요.

ㅎㅎㅎ 속독은 아니옵고, 직장생활이나 가정 건사하시는 다른 분들에 비해 책 읽을 시간이 많은 것뿐이랍니다^-^

레삭매냐 2021-06-01 21:3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그렇습니다.... 선풍기의 계절이
돌아왔습니다.

작년부터 당근으로 하나 장만해
야지 하면서도 못하고 있습니다.

올해는 반다시 만원 짜리 선풍
기를 득템하겠습니다.

<동급생> 엔딩의 강력한 한 방의
추억이 돋습니다.
부담이 없으니 저도 다시 한 번
만나 보고 싶네요.

syo 2021-06-01 23:00   좋아요 3 | URL
ㅋㅋㅋㅋㅋㅋ 응원합니다.
특템하시면 인증샷 첨부한 페이퍼 작성해주시기를 ㅎㅎ

저는 동급생 재독인데, 놀랍게도 그 강력한 한 방의 엔딩을 까먹은 상태였습니다.
엔딩이 강력했다는 사실은 남았고, 뭔가 죽음과 관련이 있다는 기억은 있었는데, 그 강력한 파트를 까먹었더라구요. 그래서 즐겁게 읽었습니다. 멍청해서 행복해요 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1-06-01 21: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제 만화책 빼고 55권인데…절반도 안 되네…저도 소설 열심히 읽을래요!!!그리고 맨발도 집에 있는데 볼까…(의욕만 있고 오늘은 어쩌다보니 단편소설 한 편조차 못 봤네요…)

syo 2021-06-01 23:02   좋아요 2 | URL
만화책을 빼다니, 그런 양심적인 일을..... 저는 결코 만화책을 빼지 않습니다.
<맨발>은 마음의 여유가 있고 한 줄을 오래 읽을 시간적 여유도 있을 때 읽으시길.
어쩌다보니 단편 소설 한 편도 보기 어려울 만큼 이래저래 분주하실 때에는 읽기 좋은 시집이 아니라서요 ㅎㅎ

han22598 2021-06-02 0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슨 머슨 일입니까? 이렇게나 많이 읽는 사람이 있긴 있나봅니다. 저의 현실세계에서는 처음 보는 사람입니다.(실은 실물을 본적은 없지만 ㅎㅎㅎ) 머슨 사람입니까? ㅋㅋㅋㅋㅋ 싱기하고 놀랍네요.

syo 2021-06-02 12:26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 이제부터 이 정도 사람은 그냥 사람이구나 싶을 정도로 더 괴물같은 사람들이 조금씩 눈에 띄실 거예요 ㅎㅎㅎ 저는 쪼오끔 많이 읽는 수준이죠. 알라딘은 그런 곳ㅎㅎ

공쟝쟝 2021-06-02 1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도 시궁창에서 연꽃을 피워볼까…? (꺄🤣)
어떻게 읽을 것인가… 혹은 나는 어떤 읽는 스타일을 가지고 있는가? 라는 질문이 없는 독서는 아무리 많이 읽더라도 좋은 독서일 수는 없다는 나름의 생각들을 요즘 하고 있어요. 거기에 대한 메타적인 인식이 없이 지식으로 누군가를 내리누르거나 자기합리화에 골몰하는 읽고 쓰는 사람들을 발견할 때 책 금지령 먹이고 싶을 때도 있고.
또 생각해보니 바쁜 하루 속에서 틈틈히 그리워하며 책을 읽을때 읽기의 인식론 따위는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이제부터 남는 두달.. 어떻게 읽을 것인지를 고민하게쒀요… 오늘부터 커피 탈땜 무조건 아이스. 읽다 지쳐하는 산책은 반바지 고고!

syo 2021-06-02 12:29   좋아요 1 | URL
요즘 알차게 생각하고 알차게 읽고 쓰는 중인 쟝님이시로군요.
저는 뭐, 예전부터 저한테 워낙 관심이 많아놔서 어떻게 읽는가 어떻게 쓰는가 늘상 주시하고 있었지요.
그런다고 뭐 많이 훌륭해진 것 같지는 않지만, 쟝님의 말을 듣고 나니,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다면 얼마나 더 그지같았을까를 생각하게 되네요 ㅋㅋㅋㅋㅋㅋ

왜 남는 두달이야 근데? 두달 뒤에 어디 가요?

공쟝쟝 2021-06-02 12:48   좋아요 0 | URL
두달 뒤부터 백수 때려치고 돈벌거야ㅋㅋ

공쟝쟝 2021-06-02 12:49   좋아요 0 | URL
그때까지 우리 함께 읽기에 대한 읽기를 읽기하자!!! 아 맞다 쇼님 공부해야지? ㅋㅋㅋ 열공열공 ^ㅡ^

바람돌이 2021-06-02 11: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말 근사했던 syo님의 그 상금받은 리뷰가 어디서 나왔는지를 방금 알게 되었네요. 작가의 눈으로 책을 읽는다. 확실히 특이한거 같아요. 작가가 아닌 사람으로서는....
저의 경우 전형적인 등장인물 공감 대입형이거든요. ㅎㅎ
아 근데 책을 저렇게 많이 읽고도 일상생활이 가능하세요?????

syo 2021-06-02 12:31   좋아요 1 | URL
저도 등장인물에 공감하고 싶어요.
아주 가끔 자동으로 그렇게 되는 책이나 영화가 나오면 펑펑 울고 막 그러는데, 막상 그런 작품들이 또 작품 자체만으로 놓고 보면 크게 훌륭한 것은 아니었다는......

저는 지금 이게 일상생활이랍니다^-^ㅎㅎㅎㅎ

독서괭 2021-06-04 1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syo님은 언젠가는 작가가 될 것이라는 결론. 음. 끄덕끄덕(만족)

syo 2021-06-04 12:48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만족)˝에서 빵 터졌음
 


그대의 탄생

 

 

 

윤곽이 둥그런 연못 있어서 귀여운 붕어도 살고 어여쁜 잉어도 몇 마리쯤 이리저리 헤엄치며 노는 연못이 있어서 물방개도 소금쟁이도 버들 그림자 일렁이는 수면 위로 미끄러지고 긴 풀이 서로를 스치며 바람을 연주하면 연잎 위에 올라앉은 조그만 청개구리 그 음악을 듣는 둥그렇고 윤곽이 부드러운 연못이 있어서

 

거센 빗방울이 얼굴을 두드리면 비가 지나갈 날을 기다리고 꽁꽁 살얼음이 얼어붙으면 눈이 지나갈 날을 기다리며 영원처럼 반복되는 계절 속에서 자신의 윤곽을 힘있게 지켜나가는 연못이 있어서 어떤 침범 속에서도 넘치지도 둑을 무너뜨리지도 않는 단단한 연못이 있어서

 

그런 연못이 아름다워서 누군가 물가에 크고 빛나는 바위 하나 내려놓았더니 연못의 윤곽은 살짜기 안으로 말려 들어가고 윤곽은 이제 연못만의 윤곽이 아니고 바위와 연못의 접경지대고 그 어둡고 따뜻한 틈새에 처음 보는 물풀이 돋고 도마뱀이 알을 숨기고 비늘에 무지갯빛을 두른 물뱀도 한 마리 자리를 잡고 새봄 연못에서 나는 생명들의 합창곡이 달라졌고 여름 빗방울에 퍼져나가는 물무늬가 달라졌고 가을볕에 몸을 뒤척이는 윤슬의 생김생김이 달라졌고 겨울 얼음이 얼고 녹는 시작점과 끝점이 달라졌고

 

마치 비가 지나가길 기다리듯이 눈이 지나가길 기다리듯이 연못은 바위가 지나가길 기다리면서 윤곽이 돌아오길 기다리면서 영원의 반복이 자신의 편이길 기대하면서 넘치지도 무너지지도 않으면서 모든 것이 변하여도 끝내 변하지 않을 무언가를 지키면서 웅크리고 웅크린 빛으로 바람이 불어야 겨우 이는 여린 물살로 풀의 노래로 붕어와 잉어의 헤엄으로 바위를 톡톡 두드리면서 연못은 시간 속에서 버텨내면서 자기 자신을 믿으면서 최선을 다해 버텨내면서 연못은

 

새벽 바람에 쿵쾅거리는 발소리 몇 달려들어 바위를 다시 실어 간 어느 날부터 연못은 다시 둥그런 윤곽을 만들기 위해 바위의 흔적 쪽으로 느린 물살을 밀어내면서 연못은 오래지 않아 다시 둥그런 윤곽이 만들어지고 그 안에 끝내 연못이 연못이기 위하여 지켜냈던 뭔가를 풀어놓을 날이 오기를 기대하며 연못은 모든 것이 원래의 모습을 되찾기를 바라면서 연못은 열심히 열심히 무언가를 더듬고 쓰다듬고 들었다가 내려놓고 껴안았다 풀어주고 매듭을 고쳐 묶고 울고 또 웃고 무심한 계절 속에 자신의 표면을 마모시키면서 가는 길인지 돌아가는 길인지를 끝없이 헤아리면서 연못은

 

어느 날 문득 생각했던 것입니다. 빗방울에 얻어맞으며 이 비가 그치면 돌아올 진짜 나를 기다렸던 내가 그날의 진짜 나였구나. 바위를 만졌던 나도 그 만짐으로써 나였고 나였음으로써 만졌구나. 바위를 만지면서 그 만짐으로 나를 만졌구나. 나는 끝없이 나를 만짐으로써 나를 만들고 나를 만듦으로써 나를 지켰구나. 나의 윤곽은 내 만짐의 윤곽이었구나. 나는 한 번도 진짜 나였던 적이 없었구나, 그리고 그럼으로써 모든 순간의 내가 다 진짜 나였구나.

 

그리고 연못은 문득 바위가 그리워지고 어느 먼 곳에서 바위 또한 자기 생각을 할지 궁금해졌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나는 비처럼 눈처럼 바위처럼 여기 왔습니다. 당신의 오늘을 만들어 오늘의 당신을 만들기 위해 오늘 당신에게 왔습니다. 당신은 연못처럼 여린 물살로 내게 와서 나를 스치고 톡톡 두드리며 오늘의 당신을 만들면서 나의 오늘을 만들어주세요. 나는 나를 굴려 당신의 윤곽을 내 윤곽과 닮도록 만들지 않습니다. 당신은 나를 닮아가지 않고 나를 만지는 당신의 만짐을 닮아갑니다. 나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닮아가기 바쁩니다. 그저 그렇게 하는데 서로가 필요할 뿐입니다.




박이문은 인간이 살아가면서 구축하는 나름의 세계를 '둥지'라는 소박한 표현으로 나타낸다. 조금 어려운 말로 풀면 그 중심엔 '존재-의미 매트릭스'가 있다. 그것은 인간이 생물학적으로, 또 문화적으로 짜내어 그 속에 몸담고 살아가는 세계다. 새가 둥지를 짓는 것처럼, 인간도 나름의 삶의 틀을 마련한다. 새의 둥지가 다양하듯 인간의 둥지도 다양하며, 새의 둥지가 종종 허물어지고 다시 다듬어지듯 인간의 삶의 틀도 파손과 갱신의 변화 과정을 겪는다. 둥지의 바깥은 이 둥지에 영향을 주지만, 우리는 우리의 거처인 둥지를 통해 그것과 관계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둥지를 통해 세계를 인식하고 변형시킨다. 이 둥지와 거기에서 비롯하는 변화 또한 둥지의 존재-의미 매트릭스에 귀속된다.

  우리가 파악하는 세계는 우리 자신의 자리를 포함한다. 그 자리로부터 우리는 세계와 관계한다.

_ 문성원, 철학의 슬픔

 

무언가가 ''를 나타내기 이전부터 ''''입니다. ''는 이미 ''로써 ''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임으로써 그 역할과 기능을 완벽히 수행하고 있는 겁니다. 바꿔 말해, 인간은 인간입니다. 어떤 행위를 해서 인간이 아니고, 날 때부터 인간이기에 인간입니다. 그러니 이제 진짜 ''와 가짜 ''를 구분하지 맙시다. 의미 없는 구분입니다. 누군가에게 지시를 내릴 땐 근엄한 모습, 누군가에게 부탁할 땐 아부하는 모습, 누군가를 싫어하지만 필요에 의해 곁에 둬야 할 땐 가식적인 모습. 이런 것들을 소위 '가면'이라고 표현하는데, 이것 또한 선생님이고 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진짜 나''가짜 나'를 애써 구분하려다 보니 가면을 쓴 내 모습에 괴리감을 느끼고, 종국에는 그런 자신을 싫어하는 양상을 띠게 됩니다. 이런 괴로움들이 뭉쳐저 우울증을 만들어내고 정신적인 병리 증세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무엇이 되엇든 결국 ''가 행하는 모든 것이 ''의 발자취이고 ''의 생이며 ''의 존재입니다.

_ 김불꽃, 이제 꿈에서 깰 시간입니다

 

"부모나 자식, 또는 친구와 지인 그밖에 은혜를 입은 선생님과 선배 같은 사람은 한마디로 말해 단순히 잊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지. 잊어서는 아니 되는 사람이라고 말해야지. 그런데 그런 은혜와 사랑의 인연도 없고 의리도 없는 전혀 모르는 타인 중에서 솔직히 말해 잊어버린다고 해서 인정이나 의리를 모른다고 할 수도 없지만, 이상하게 끝끝내 잊을 수 없는 사람이 있지. 세상 모든 사람에게 그런 사람이 있다고는 할 수 없으나, 적어도 내게는 있어. 아마 자네에게도 있을걸.“

_ 구니키다 돗포, 잊을 수 없는 사람들

 

 

 

--- 읽은 ---

 


185. 왜 세계의 가난은 사라지지 않는가

장 지글러 지음 / 양영란 옮김 / 시공사 / 2019

 

- 일독(190710)

- 재독(210530)

 

인간은 말이다, 자기가 원하지 않는 건 확실하게 알아. 이 할아버지는 5초마다 10세 미만 어린이 1명이 배가 고파서 혹은 배고플 때 제대로 먹지 못해서 걸린 병 때문에 죽어가는 곳에서는 살고 싶지 않아. 게다가 우리 별 지구는, 식량의 분배만 공정하게 이루어진다면 현재 인구의 2배 정도도 아무 문제 없이 먹여 살릴 수 있는데 말이야. 재산의 살인적인 불평등, 가난한 사람들을 상대로 벌이는 부자들의 영구적인 전쟁에 화가 나서 눈이 뒤집힐 지경이지. 나는 반계몽주의,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 시장의 힘을 자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기, 소비자들에 대한 조롱 행위 등을 인간의 이성에 대한 모욕이라고 받아들인단다. 환경 파괴, 천연자원의 과도한 개발, 서서히 진행되는 지구의 죽음 등은 한마디로 잔학함의 끝이지.

_ 장 지글러, 왜 세계의 가난은 사라지지 않는가

 

나도 없이 살아봐서 아는데, 라는 말머리는 대체로 적절하지 않다. 한때 없이 살아봤으나 지금은 나쁘지 않게 가지고 사는 사람의 자기 성취를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슬쩍 드러나는 거라고 보는 쪽이 옳다. 그런 말 없이도 북돋고 돕는 사람은 북돋고 돕는다. 그런 도움에는 없이 살아본 경험이 딱히 필요한 것 같지는 않다.

 

그렇지만 이해의 차원에서 보면, 사람은 자기가 가난해 본 딱 그만큼만 타인의 가난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가난을 폭넓게 이해하는 게 무슨 벼슬이라는 것은 아니지만,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범위 안으로 우겨넣어 재단하는 짓은 하고 싶지 않다. 조금 길게 생각하고 판단하지 왜 눈앞의 상황만 보고 결정하느냐는 말 같은 건 나는 너만큼 가난해 본 적이 없어서 너를 이해하지 못하노라 하는 고백이나 다름없다. 가난한 사람은 앞날 같은 거 잘 생각하지 못하는 게 통상적이다.

 

그러나 가난도 어떤 영역 안의 일이다. “5초마다 10세 미만 어린이 1명이 배가 고파서 혹은 배고플 때 제대로 먹지 못해서 걸린 병 때문에 죽어가는 곳에서 사는 사람들의 삶이 가난이라는 단어에 수용될 수 있을까. 그들이 우리는 왜 가난할까?’라고 생각할 것인지를 떠올려봤다. ‘먹을 것을 어디서 구할 수 있을까’ ‘이 아픔은 어떻게 해야 사라질까’ ‘옆집 아이는 죽었을까같은 생존과 실존에 대한 질문들이 거대하고 무겁겠다. 이 모든 게 우리가 가난하기 때문이고 우리가 가난한 이유는 가난한 사람들을 상대로 벌이는 부자들의 영구적인 전쟁때문이라는 생각까지 도달하기 위해서 숨쉴 만큼의 여유는 필요할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이 생각할 여력이 있을 때까지 우리는 돕고, 그때까지 생각은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라는 물건을 만들고 살 여유가 있는 사회에 사는, “을 쓰고 읽을 줄 아는 여유를 가진 사람들이.

 

물론 이조차 내가 겪어본 가난의 범위 안에서의 이해에 그칠 것이다. 확실히 내 경험의 범위 안에서는, 우리 집은 왜 가난하고 엄마는 왜 아프며 아버지라는 사람은 어디에 있고 나는 지금부터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치열한 생각보다, 나는 생판 모르는 사람들이 우리 집 사정을 어떻게 알았는지 돕겠노라며 집안에 들여놓은 쌀, 김치, 라면, 반찬 같은 것들이 훨씬 이로웠다. 엄마가 퇴원할 때까지 일단 월세는 내지 말고 그냥 살라던 자본가 집주인 할아버지의 통 큰 자선이 훨씬 실질적이었다. 생각은 당장의 배고픔을 줄여주지 않고, 당장의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급한 일을 하는 동안 내가 되고자 하는 나는 한 발 더 멀어지기 때문에.

 

신자유주의는 금방 무너질 것 같지 않다. 하지만 그걸 무너뜨리기 위해 나설 수 있는 이는 그 체제의 가장 밑바닥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보다는 조금 여유가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아이들에게 깨끗한 물과 필수적인 예방주사를 제공한다는 단체에 약간의 돈을 보내는 좋은 일을 했다면, 동시에 생각을 자꾸 해야 한다. 무엇을 해야 할까. 무엇을 해야 할까.

 

 

 


186. 정선

최은미 지음 / 최지욱 그림 / 미메시스 / 2018

 

- 일독(1810xx)

- 재독(210530)


슬픈 사연을 이고 어른으로 자라난 아이를 만들거나, 서울에서 치이고 치이다 끝내 고향을 찾아온 사기꾼을 만들거나, 조금씩 조금씩 멸망의 방향으로 스스로를 슬며시 밀어가는 망가진 사람을 만들어내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러나 땅을 팠더니 숟가락이 나오고, 그 숟가락을 갈고 갈아 무기로 바꾸는 사람을 만드는 것, 그 숟가락의 유래가 어디까지 거꾸로 거슬러 올라갈지 모른다는 이야기를 던지면서 우리 모두를 숟가락을 쥔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쉽지 않다. 물크러지고 비릿한 것들을 내내 둘러쳐 문장 위를 걷는 독자를 끝없이 취하게 만드는 일은 어렵기까지 하다.

 

좋았던 글을 다시 읽었는데 역시 좋았고, 이제 최은미 선생님의 모든 책을 읽으러 갈 것이다.

 

밥은 먹지 않았다. 썩기 직전의 과일도 먹지 않았다. 동창이 까만 봉지에 담아 준 복숭아와 자두는 실온에서 하룻밤이 지나자 들큼한 냄새를 풍겼다. 손으로 살짝만 쥐어도 물크러질 것 같은 상태였다. 그런 상태에 있는 것들에선 무언가 사람을 미치게 하는 냄새가 났다. 자귀꽃에서도 그런 종류의 냄새가 났다. 달콤하면서 메슥거리고, 설레면서도 허전한 냄새. 누군가를 만나게 될 것 같은 냄새. 금세 망가질 것 같은 냄새. 어쩌면 여름 냄새가 대체로 그런 건지도 몰랐다.

_ 최은미, 최지욱, 정선

 

 


187. 나의 첫 투자 수업 1 : 마인드편

김정환, 김이안 지음 / 트러스트북스 / 2021


188. 세상 친절한 경제싱식

토리텔러 지음 / 미래의창 / 2019

 

 

 


189. 인문교양책 만드는 법

이진 지음 / 유유 / 2021

 

책 만드는 사람이 될 건 아니지만 책 만드는 사람의 이야기를 자꾸만 찾아 읽는 것은 책 읽는 사람의 습벽 같은 것일까. 유유는 늘 재미있는 기획으로 syo의 눈길을 붙잡는데, 요즘 줄줄이 나오는 ‘~책 만드는 법시리즈 역시 딱히 그 일에 궁금한 게 있는 것도 아니면서 그냥 지나치지를 못하겠다. 책이라고 쓰지만 그게 다 같은 책이 아니어서, 에세이 만드는 편집자의 글과 인문교양책 만드는 편집자의 글은 중식요리와 일식요리처럼 제각각이다. 몇 권 더 찾아 읽어도 될 것 같다.

 

서로의 영역과 의견을 존중하고, 자신의 판단이 섣부르거나 부족할 수 있음을, 자신의 감각이 낡았거나 후퇴했을 수도 있음을 인정하는 연습을 하는 길밖에 없다. 나는 경력이 많은 사람이 반드시 책을 잘 만드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내 경력의 반도 안 되는 편집자들이 매력적인 콘셉트의 눈에 띄는 책을 척척 만들어 내는 모습을 SNS를 통해 많이 본다. 사람들이 읽고 싶어 하는 이야기, 우리 사회에 필요한 이야기를 잘 찾아내 감각적인 편집으로 선보이는 모습이 얼마나 당당하고 멋진지 모른다. [] 그러니 경력이 많다고 해서, 직급이 높다고 해서 의사 결정 과정에서 주도권을 가지려고 해서는 안 된다. 어느새 내 감각이 낡았을 수도 있고, 내가 쥔 작은 권력이 내 눈을 가리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경계심을 늘 가져야 한다.

_ 이진, 인문교양책 만드는 법

 

 

 

--- 읽는 ---


1417, 근대의 탄생 / 스티븐 그린블랫

다시는 그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 권김현영

소설 제주 / 전석순 외

동급생 / 프레드 울만

맨발 / 문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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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1-05-31 14: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두권 있네요
지글러, 그린블랫
그린블랫은 다른 책으로 좋았어서 사놨는데 아직 못읽었습니다.^^
재독하시는 것도 있으신걸 보니 부끄럽네요.ㅠ

syo 2021-05-31 14:31   좋아요 3 | URL
저는 그린블랫 처음 읽는데, 다른 책도 벌써 읽으셨군요. 부끄럽네요 ㅎㅎㅎㅎ
읽고 좋으셨다는 그린블랫의 다른 책 저도 조만간 읽게 될 것 같습니다. 너무 좋네요^-^

그레이스 2021-05-31 14:34   좋아요 2 | URL
<세계를 향한 의지>였어요.
세익스피어에 관한.
좋았어요.^^

syo 2021-05-31 14:36   좋아요 4 | URL
아, <세계를 향한 의지> 출간되었을 때 읽었었는데, 그게 그린블랫 책이었군요!
사실 내용도 거의 다 까먹어서 ㅎㅎㅎㅎㅎ
제 재독 이유가 이렇게 들통나버렸네요 ㅋㅋ

붕붕툐툐 2021-05-31 21:3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앗, syo님 전업 투자자로 변신하시는 거 아니죠? 요즘 주식, 코인 광풍이다 보니 경제 관련 책을 보고 혹시나....ㅎㅎ

syo 2021-06-01 16:57   좋아요 0 | URL
전혀 아닙니다 ㅋㅋㅋㅋ
요즘 대화할 때 꿀먹고 앉았기가 너무 서러워서 개론서 몇 권 들춰보려구요 ㅎㅎ

독서괭 2021-06-01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많이 읽으시는 와중에 재독까지 하시는 게 정말 놀랍네요. 그대의탄생 글도 너무 좋습니다. 운율에 많이 신경 쓰셔서 시인지 산문인지 헷갈리네요. 뭐든간에 좋은 거^^

syo 2021-06-01 16:57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ㅎㅎㅎ 역시 독서괭님 뭘해도 syo편^-^

공쟝쟝 2021-06-01 15: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연못이야기는 어린이용 그림책으로 만들어도 좋을만치 이쁘고 따땃하네요.
이를테면 이런 문장 ˝그러니까 그들이 생각할 여력이 있을 때까지 우리는 돕고, 그때까지 생각은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책”이라는 물건을 만들고 살 여유가 있는 사회에 사는, “글”을 쓰고 읽을 줄 아는 여유를 가진 사람들이.˝ 은 저 자신을 돌아보게 만듭니다.
글을 읽고 쓰는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든 여유있는 것 맞아요. 정말 그래요. 돌아보니 그랬던 것 같아요.
아직은 저 자신을 돌보는 데 더 열중해야 하는 것 아닐까 고민했었는 데, 제가 가진 것들을 한번 더 생각하게 되네요.

syo 2021-06-01 17:02   좋아요 0 | URL
우리가 그냥 하는 것들을 너무 그냥 하다 보니까 남들도 그냥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일이 많잖아요.
사실 무슨 일이든 어느 정도의 여유는 필요한 법인데, 필요한 수준의 여유를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바로 어떤 문제에 대처해나가려다 보면, 그 여유 없는 상태가 대처 방법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고 그러니까....

그나저나 뭐죠 이, 무슨 교훈을 얻은 것만 같은 댓글은? ㅋㅋㅋㅋㅋㅋ
syo의 글에서 뭔가를 얻어내다니 시궁창에서 꽃을 피우시는군요 ㅋㅋㅋㅋ

공쟝쟝 2021-06-01 17:41   좋아요 0 | URL
역시 시궁창에서 피는 꽃이 아름다운 법이죠.. 저는 깨닫는자. 아 깨닫도다.

syo 2021-06-01 19:16   좋아요 0 | URL
잘 깨닫네. 그렇게 자꾸자꾸 깨닫다가 붓다 되는 거야. 깨우친 자 붓다.
참, 붓다 이마에 있는 그 점 그거 점 아니고 털뭉치다?

공쟝쟝 2021-06-01 20:08   좋아요 0 | URL
뭬..뭬야…?

유부만두 2021-06-08 0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쟝 지글러 책은 ... 큰애 때 부터 십몇 년 간 계속 제 주위를 맴돌고 있고 세계는 계속 싸우고 배고프고 엉망이라 이젠 힘들어요. ㅜ ㅜ

syo 2021-06-08 12:48   좋아요 0 | URL
계속 싸우고 배고프고 엉망진창.....ㅠㅠ
저는 시간이 지날 때마다 반복해서 읽으려고 생각중이에요.....
 

 

--- 읽은 ---

 


179. 오늘부터 부러움에 지지 않고 살기로 했다

지그리트 엥겔브레히트 지음 / 이동준, 나유신 옮김 / 팬덤북스 / 2018

 

우리가 누구이든, 무엇을 할 수 있거나 갖고 있는 것과 관계없이 다양한 관점에서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비교하는 습성을 끊으려면 산 속에 들어가 혼자 살아야 한다. 물론, 우리는 거기서도 산 속에 들어오지 않은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할 것이다. 현실적으로는 비교를 멈출 수 없다. 그러니 근본적으로 비교하기를 '금지'하는 것도 소용없는 일이다. 그보다는 비교를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정확히 살펴보고, 종전과는 다른 비교 사용법을 고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_ 지그리트 엥겔브레히트, 오늘부터 부러움에 지지 않고 살기로 했다

 

이 책이 태어난 의미를 저보다 잘 설명하기는 어렵겠다. 핵심은 저기에 다 있다. 부러움은 피할 수 없다. 피할 수 없으면 이용하라. 말은 쉽다만.

 

이런저런 수단을 동원하면 지금 내 머리를 점령하고 있는 부러움 한 개를 제낄 수는 있겠다. 하지만 부러움이라는 것은 파이널 스테이지가 없는 슈팅 게임 속 외계 비행체처럼 무한한 총알을 난사하며 무한히 밀려온다. 내 몸과 내 감정이라는 조막만 한 전투기 조종사에 불과한 우리는 신들린 컨트롤과 기기묘묘할 정도의 미세조정을 동원해 부러움의 폭격을 요리조리 피해 보겠지만, 무한 앞에서 영원한 것은 없는 법, 부러움의 탄환은 시시때때로 가슴에 박히고, 행복한 삶을 위해 우리는 될 수 있는 한 빨리 그 감정을 적출해야 한다. 가까스로 그것에 성공하거나 혹은 그냥 제거할 수 없는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면서 겨우 한숨 돌리고 고개를 들면, 저기 저 앞에서 부러움 폭격단이 무한의 군세로 다시 진군해오는 모습이 보인다. 이번 감기를 이겨도 우리는 다음 감기를 또 이겨야 한다. 부러움도 그렇다. 그러니까 결국 이것은 영원히 회귀하는 삶을 앞에 두고, ‘어차피그럴수록 더욱가운데 뭘 고를 것인가의 문제 비슷하다. 이 책은 후자를 선택한 사람들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게 다소 허망해 보이거나 말은 쉽다만으로 수렴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나도 노력은 해봐야 한다. 내 부러움이니까. 최소한 이 책만큼은 노력해보자는 것.

 

 

 


180. 유괴의 날

정해연 지음 / 시공사 / 2019

 

약간 특이한 캐릭터들이 있고, 그들의 조합이 가져다주는 약간의 재미가 있다. 약간이다. 이 장르의 책이 필수적으로 가져야 할 반전이 있다. 약간 놀랍다. 그 외에는 별 게 없었다. 메시지 투척이 없을 거라면 더 재미있거나 더 아름답거나 순간의 마음을 더 잘 그려내거나 했으면 좋았을 텐데. 페이지는 정말 빨리 넘어갔는데, 최근 다른 어떤 책에서 페이지가 빠르게 넘어간다는 말을 칭송처럼 쓰고 또 받아들이는 태도에 대해 슬쩍 조롱하는 듯한 글을 읽고 어느 정도 동의했다. 그래서 페이지가 빨리 넘어가요, 라고 말하기가 참 애매하고 애매한 만큼 조심스럽긴 하다.

 

 

 

 


181. 이까짓,

윰토끼 지음 / 봄름 / 2021

 

얼굴에 털이 꽤 나는 편이다. 코 아래 솜털이 나기 시작한 게 중학교 때였는데, 면도하면 두꺼워진다는 무서운 소리를 들어서 정말 손 한번 대지 않고 오냐오냐 해줬건만, 그 버릇없는 털은 고등학교 때쯤 벌써 털이라고 부르기에 민망할 정도로 자기주장이 강했다. 숨 쉴 때마다 부르르 떨릴 정도의 존재감을 갖췄으니 차라리 털이라고 부르는 게 나았겠다. 거기만큼 선명하지는 않았지만 볼따구에도 털은 있었다. 걔도 어느 순간부터는 무시하기 어려울 수준에 이르렀고, 결국 면도를 시작하던 무렵부터 바로 제초 대상 지역으로 선정되었다. 나이가 들면서 면도 부위의 털들은 더 두껍고 더 격렬하게 자라기 시작했다. 현재는 아침에 면도해도 점심때쯤 얼굴이 거뭇거뭇해지고, 오후에는 면도 좀 하고 다니라는 말을 반드시 한 번은 듣는 수준에 도달했다. , 이놈의 털들 다 죽었으면.

 

그렇지만 이놈의 털들을 이까짓 털들로 여기며 살려고 들면 그럴 수는 있었다. 그냥 내 내면의 털가치평가위원회와 협상만 잘 하면 되는 문제니까. 하지만 이놈의 털들을 이까짓 털로 만들기 위해 그 이상의 것들과 싸워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내 몸의 털이 사회적 심지어 도덕적 문제가 되기도 하는 경우들. 외부의 시선이 몸에 침투하고 몸을 강제하는 것은 모든 몸에 공히 벌어지는 일이지만, 몸의 주인에 따라서 그 강도, 기준, ‘위반시 처벌 수위가 다르다.

 

그녀들은 어떤 생각을 하면서 속눈썹을 뽑아내는 아찔한 고통을 참았을까(겨드랑이털 뽑는 것보다 더 아팠을 것 같은데). 내가 그 시절의 그녀들을 떠올리듯 자신보다 과거의 아름답다 칭송받았던 다른 여자들을 떠올렸을까. 아름다움을 외면하며 살 수 없었던 수많은 여자들을 떠올리며 그래도 지금이 낫다, 그렇게 자위했을까.

  이제는 매끈한 때보다 수북할 더 관심을 받는다. 낮에도 하늘에 별이 떠 있지만 누구도 말하지 않는 것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건 말하지 않지만 그게 보이는 순간은 또 귀신같이 짚어낸다. 그렇다면 내 몸의 털들은 별과 동급인가. 별도 밤에는 당당히 빛을 발하는데, 나의 털들에게는 그런 밤이 찾아올 수 있을까.

_ 윰토끼, 이까짓,

 

사실 얼굴 말고도 전체적으로 털이 좀 강세다. 체감 통계상 얼굴 털로는 상위 10% 정도에 들 것 같고, 여기저기의 털들도 대충 중윗값 이상은 칠 듯. 근데 그럴 거면 도의상 머리숱도 그래야 하잖아? 하여간 지 맘대로야 이 털새끼들…….

 

 

 


182. 철학사 아는 척하기

데이브 로빈슨 지음 / 주디 그로브스 그림 / 양영철 옮김 / 이병창 감수 / 팬덤북스 / 2021

 

완독에 20분쯤 걸렸다. 10분 남짓 읽었더니 절반이더라. 오히려 내가 놀라 멈춘 케이스. 뭐지? 내가 미쳤나? 다음 날, 남은 절반도 앞쪽 절반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확인하고 나서야 내가 미친 것이 아닌걸로.

 

그나저나 감수자 이병창 선생님은 같은 출판사에서 내신 선생님 저서 제목에도 아는 척하기라는 말을 다셨는데, 이건 출판사의 취향인 건가? 이 책과 그 책을 놓고 보면 척하기에 더 가까운 건 이 책이겠다. 진짜 이 책으로는 척할 수만 있다. 뭔가 더 할 수가 없다. 그럴 수 있었다면 30분도 안 돼서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183. 메리, 마리아, 마틸다

메리 을스턴크래프트, 메리 셸리 지음 / 이나경 옮김 / 한국문화사 / 2018

 

혹스 모클리J. W. Mauchil와 에커트J. P. Eckert를 아십니까. 혹은 조금 더 유명한 사람으로 폰 노이만Von Neumann은 아시는지?

 

모클리와 에커트는 에니악ENIAC이라는 30톤짜리 공학용 계산기를 만들었는데, 프로그래밍이 가능했던 에니악은 최초의 컴퓨터로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그 방식은 스위칭 소자를 배선으로 연결하는 방식이어서 지금의 컴퓨터 구조와는 약간 다르다. 현재는 프로그램 내장 방식이라는 구조를 사용하는데, 이를 제시한 것이 폰 노이만이라는 유명한 천재였다(프로그램 내장 방식의 실제 창시자를 에커트로 볼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니까 거칠게 말하면 오늘날 우리가 쓰는 컴퓨터(및 핸드폰을 비롯한 프로그램 구동이 가능한 거의 모든 전자기기)의 육신과 영혼의 구조를 처음 세운 사람들로 저 세 할아버지를 언급해도 틀리지는 않는다는 것. 그러나 오늘날 태평양 건너편의 창고에 쌓인 물건을 직접 구매하고 결제하기 위해 엄지 두 개로 아이폰의 액정을 두드리면서, 우리 중 누구도 모클리와 애커트와 폰 노이만을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일을 조금이라도 퇴근을 앞당기기 위해 엑셀을 공부하고, 4차산업 혁명이라는 알 수 없는 놈의 협박에 굴복해 코딩을 공부하고, 남들 다 하는 것들을 못하고 뒤쳐지는 인간이 되기 싫어서 새롭게 등장하는 SNS며 메타버스며 기기묘묘한 플랫폼에 대해서 공부하지만, 그 모든 것의 시발점에 있는 모클리와 에커트와 폰 노이만에 대해서 공부하지 않는다. 시초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폰 노이만이 컴퓨터의 구조에 대해 쓴 책이나 논문은 당시에는 기술적 의미가 있었지만 이제는 역사적 의미가 있다. 그 두 가지는 완전히 다르다.

 

이 책 속의 세 작품은 역사적 의미가 있을 수 있다. 계보학적 위치가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나는 그게 다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메리들은 용감했고 명민했다. 시대와 맞섰고 후대를 위한 초석을 닦았다. 기록할 만하고 칭송할 만하다. 하지만 그것은 이 책을 읽지 않고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들이 이 책 속의 작품을 쓰지 않았더라도 그 칭송의 크기는 조금의 변화도 없었을 것이다. 솔직히 이 책은 그들이 대표작으로 남긴 작품들의 아우라를 일부 걷어냈다.

 

 

 


184. 스퀴즈 플레이

폴 오스터 지음 / 김석희 옮김 / 열린책들 / 2000

 

- 일독(long long time ago……)

- 재독(210527)

 

기량의 절정기에서 끔찍한 교통사고로 장애를 얻게 되어 은퇴한 천재 야구선수가, 장애를 극복하는 과정을 계기로 사람들의 사랑을 얻었고 그 힘으로 정치에 뛰어들 예정이다. 그런 그에게 영문을 알 수 없는 협박 편지가 날아들고 그는 탐정을 찾아온다. 조사가 시작되면서 조금씩 밝혀지는 과거사와 주변 인물들, 숨겨진 사건들, 그리고 반전들……. 뭐 익숙한 그림이다.

 

탐정소설이라고 해야 하나? 레이먼드 챈들러의 빅 슬립도 그랬지만, 왜 이 장르 속 등장인물들은 다들 이렇게 말솜씨 한번 대단할까? 이렇게 웃기게 비꼬려면 사람이 얼마나 비비 꼬여야 하는 걸까.

 

길게 한 대목 뽑아 보겠다.

 

<아주 큰 녀석>은 스테레오 전축이 놓여 있는 방구석에서 내가 아까 틀었던 레코드를 살펴보고 있었다. 그가 레코드판을 집어들고 커버에 찍힌 모차르트 초상을 바라보면서 물었다.

  「이 친구가 누구지? 징그러운 호모 색시처럼 보이는데.

  「그 친구는 2백 년 전에 죽었어. 세 살 때 이미 당신의 그 고릴라 같은 대갈통 속에 들어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지성이 그 친구의 무릎뼈 속에 들어 있었지.

  「망할 자식. 말솜씨 한번 대단하군.

  <아주 큰 녀석>이 말했다. 레코드를 재킷에서 꺼내어 양면을 유심히 살펴 보더니 둘로 딱 쪼개 버려싸. 그리고는 레코드 조각을 마룻바닥에다 내던졌다.

  「당신 말야, 그 짓을 한 벌로 천 년 동안 불지옥에서 고통받게 될 거야.

  「미안해. 손이 미끄러졌나 봐.

  그는 당황한 체하면서 두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나는 녀석을 무시하고 <그냥 큰 녀석>한테 말했다.

  「, 이젠 저 친구랑 꺼지는 게 어때? 메시지도 전했으니, 더 이상 얘기하고 자실 것도 없잖아?

  「천만에. 나는 당신한테 메시지를 전했지만, 당신은 나한테 대답을 주지 않았어.

  <그냥 큰 녀석>이 말했다.

  <아주 큰 녀석>은 책장으로 다가가더니 책 몇 권을 마룻바닥에 내던진 다음, 긴 팔을 선반 속으로 집어넣어 나머지 책을 쓸어 버렸다. 책은 와르르 굴러 떨어지면서 레코드 플레이어의 투명한 플라스틱 덮개에 부딪혔다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냥 큰 녀석>은 시큰둥한 채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즐거워하지도, 화를 내지도 않았다. 그한테는 그가 해야 할 일이 었었고, 짝패도 마찬가지였다.

  「제기랄. 오늘 내가 왜 이러지? 이런 실수를 하다니, 탈이 나도 단단히 났나 봐.

  <아주 큰 녀석>이 말했다. 녀석은 실내 장식가가 되는 게 꿈인 모양이었다. 한가한 저녁에는 기발한 착상을 얻기 위해 아름다운 집최신호를 뒤적이며 시간을 보내지 않을까. 몇 분도 지나기 전에 그는 내 거실을 온통 새로 설계하다시피 했고, 일을 다 끝냈을 때쯤이면 내 거실은 그가 의도한 대로 새로운 모양을 갖추게 될 터였다. 그의 수법은 물건을 사방에 흩뜨려 놓는 이른바 분산식이었고, 방은 최고로 멋진 집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파격적인 매력을 갖게 될 터였다.

_ 폴 오스터, 스퀴즈 플레이

 

스퀴즈 플레이는 폴 오스터의 출세작이 나오기 전에, 심지어 폴 오스터가 아닌 다른 이름으로 쓴 탐정 소설이라고 한다. 비슷한 장르라고 할 수 있는 유괴의 날과 나란히 읽게 된 건 우연인데, 그 덕에 어떤 책은 더 훌륭해 보였고 또 어떤 책은 상대적으로 부족해 보였다. 확실히 폴 오스터는 글을 잘 써. 내 청춘의 한 시대를 함께 했던 나의 폴 아저씨.

 

그렇지만 빅 슬립을 떠올려 보면 웬만해선 다 고만고만해지는 슬픔.

 

 

 

--- 읽는 ---

인문교양책 만드는 법 / 이진

세상 친절한 경제상식 / 토리텔러

철학의 태도 / 아즈마 히로키

1417, 근대의 탄생 / 스티븐 그린블랫

시민의 물리학 / 유상균

나의 첫 투자수업 1 : 마인드 편 / 김정환, 김이안

스스로를 아는 일 / 앙드레 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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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1-05-29 13:4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곱슬거리는 머리털 고민 말고는 별로 해 본 적이 없지만 왠지 느껴지는 슬픔…그래도 털 수북한 사람들이 대개 속눈썹이나 눈썹 같이 미모에 영향 주는 털도 예쁘게 풍성한 경향이 있으니 그걸로 위안을…(그런데 진짜 이상하게도 머리털만 예외란 말입니다… 수염 풍성한 털보 대머리는 왜다지도 많은가…레닌이여 마르크스여 엥겔스는 그래도 머리숱이 많네용)

syo 2021-05-31 13:34   좋아요 2 | URL
그렇지만 머리를 잃는다면 다른 털들은 큰 의미가 없는 것이 이 지독하게 못돼 처먹은 사회......
수염 풍성한 털보 대머리는 캐릭터로 만들면 귀엽긴 한데, 그렇게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으아아아

2021-05-29 14: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5-31 13: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21-05-29 18: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 저도 색계에서 탕웨이던가요? 겨털보고 좀 놀랐는데...
근데 말에 의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유난히 털에 민감하단 얘기를 들었어요.
작가는 뭐라고 했을지 궁금하군요.
여자도 가끔 턱 밑에 가서 하나 둘씩 툭 비어져 나오곤 하죠.
그거 뽑으면서 남자로 태어나지 않은 게 다행이다 싶기도 하더군요.
나만 이런가?ㅋㅋ

syo 2021-05-31 13:40   좋아요 0 | URL
매일 면도하고 어떨 땐 하루에 두 번씩 면도하는 게 귀찮긴 한데, 여성들 화장에 비하면 꿀이죠 뭐.

저는 그 영화를 나이 지긋이 먹고 봐서 그런가 탕웨이 겨털을 보고 아무렇지도 않았어요 ㅎㅎㅎㅎ
겨털 그거 뭐 특별한 건가요. 팔을 들고 고개를 약간 돌리면 언제라도 만날 수 있는 그런 친숙한 물건인데, 으하하하.

stella.K 2021-05-31 14:51   좋아요 0 | URL
아차, 하정우와 공효진이 나왔던 <러브 픽션>이란
영화는 겨털을 하정우가 언급을 하죠.
그러니까 공효진이 약간 쌔하죠.
기회되면 한 번 보세요. 재밌어요.

그래도 화장은 분장의 효과가 있잖아요.
남자들도 많이하고.ㅋㅋ
 

 

tunnel effect

 

 

 

늦게까지 자고 일어났다. 어쩐지 온몸이 땡땡 부어 있어서 눈도 둥글 턱도 둥글 손가락도 둥글거렸다. 머리가 조금 아팠고 그래서일까 커피가 썼다. 친구 남친이랑 꽁냥거려서 친구 열 받게 만드는 유튜브 영상 보면서 3분쯤 낄낄거리다가 아무 맥락 없이 도서관으로 출발했다. 일곱 권을 빌려왔는데 집에 오자마자 제일 먼저 본 건 뜬금없는 플라톤. 심지어 그건 빌려온 책도 아니다.

 

김치찌개를 만들려고 했는데 돼지고기가 없어서 스팸 반 통을 넣었더니 왠지 부대찌개가 되었다. 부대찌개의 그 맛이 스팸에서 나온 거였구나. 부대에서 나온 건 줄 알았는데. 어디서 나오면 어때, 맛만 있으면 됐지.

 

배 두드리면서 누워 있었는데 예고에 없던 비가 잠깐 지나갔다. 후두두두둑. 불현듯 빨래를 돌렸다. 바람이 무진장 세게 불어서 창문이 흔들흔들했고, 나는 애꿎은 냉장고를 구석구석 닦고 식재료를 정리했다. 조금씩 물러지는 토마토를 믹서기에 넣고 요거트, 꿀을 첨가해서 갈았다. 위잉위잉. 20초만에 깔끔하게 다 갈렸고, 나는 콜라를 마셨다.

 

슬픈 발라드가 듣고 싶어 검색하다가 30분 동안 스도쿠를 했다. 잎이 조금씩 말라가는 대파를 썰어서 얼려놓으려고 꺼내놓고는 의자 바퀴를 닦았다. 박스 가지러 옥상 창고에 올라갔는데 하늘을 쳐다보며 20분 빙빙 돌다가 그냥 내려왔다. 박스는 왜 필요했던 걸까. 영양제를 사려고 검색하다 감자 5kg을 샀고, 화분에 물을 주러 가다가 가스레인지를 닦았고, 턱걸이를 하러 작은 방에 들어가서 겨울옷 정리를 하고 나왔다.

 

하려 했던 것들을 하지 않았고, 한 것들은 하려 한 것들이 아니었다. 작은 집에서 일없이 작게 작게 사는 삶이라는 건 늘 이렇게 어쩐지, 맥락 없이, 뜬금없이, 뜻밖에, 불현듯, 애꿎게 같은 부사가 어울리는 방식으로 이런저런 일들을 하며 살고 있다는 뜻이다. 작아서 그렇게도 돌아가고, 그렇게 돌아가서 작은 삶이다. 아름답지도 간결하지도 않지만, 에두르고 에둘러도 금방 내 방향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생활.

 

자갈이 깔린 바닷가에 나란히 앉아서 수평선을 구경하는 생각을 해야지-하고 마음먹고서, 눈을 감고 20분쯤 그런 생각을 했다. 오늘 내가 해야지 하고 한 일은 그거 딱 하나뿐이다.

 

 

 

--- 읽은 ---

 


175. 이제 꿈에서 깰 시간입니다

김불꽃 지음 / 봄름 / 2021

 

김불꽃 선생님의 전작 가운데 예의 없는 새끼들 때문에 열받아서 쓴 생활예절이 나름 파란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예의 없는 새끼들을 향한 일종의 미러링이랄까, 예의 없는 새끼들에게 생활예절을 가르치면서 예의를 차릴 이유가 없다는 결기랄까, 하여간 그런 태도가 강력한 호불호의 양극화를 이끌어 낸 작품이었다. syo는 쏘쏘하게 봤었는데, 그냥 SNS 같은 데서 한 꼭지씩 읽었다면 순전히 극찬으로 마무리될 만남이었지만, 한 권을 연속으로 읽다 보니 쎈 표현의 중첩과 반복 때문에 후반부쯤 가니까 미각에 마비가 오긴 했다. 그 이후로 다시 김불꽃 선생님의 책을 읽을 일이 있을까 했었는데,

 

이후로도 선생님의 책은 꾸준하게 발매된 듯. ~한 새끼들을 대상으로 쓴 책이 아닌 바, 어른의 말투와 공무원의 대민 호칭(선생님)을 장착하고 돌아온 김불꽃 선생님이 이번에는 인간의 틈바구니에서 상처받지 않는 법에 대해 매서운 지혜를 알려주신다. 그러나 말투는 말투고 불꽃은 불꽃. 이글거리는 마그마의 마음은 살얼음 아래 그곳에 여전히 있다.

 

이제 김불꽃의 불꽃 튀는 성인식 성 상식 없는 새끼들 때문에 열 뻗쳐서 쓴하나 남았다. syo는 제일 맛있어 보이는 음식은 맨 나중에 먹는 쪽입니다.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되, 그 노력이 오롯이 나만의 것은 아닐 것. 관계를 발전하기 위해 배려하되, 그 배려가 오롯이 나만의 것은 아닐 것.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시도하되, 그 시도가 오롯이 나만의 것은 아닐 것.

  이것만이 선생님의 관계를 지킬 수 있습니다. 이것이 관계의 진짜 본질이며 속성입니다, 선생님.

_ 김불꽃, 이제 꿈에서 깰 시간입니다

 

 

 


176. 하루 15분 명상

혜거 지음 / 책으로여는세상 / 2020

 

중학교 때였던 것 같다. 점심시간이 끝날 때쯤이면 명상의 시간이라는 코너가 찾아왔다. 삐이- 하는 소리와 함께 스피커가 켜지면서 명사앙의 시간-시간-시가-ㅅㄱ하는 아련한 페이드아웃 인트로로 시작해서 조용한 음악을 동반한 좋은 말씀이 흘러나오는 그런 프로그램이었다. 그만하면 되었으니 이제 그만 놀고 교실로 들어가서 책상 앞에 단정하게 앉거라-하는 의도였을 것이지만, 아이들의 마음은 하나도 단정해지지 않았고 되려 분노로 차오르기만 했다. 뭔데, 벌써 점심시간이 끝나 간다고? 매점에 명상의 시간에는 먹을 것을 팔지 않습니다. 포켓몬 빵도 안 팜이라는 안내문이 붙을 정도니, 명상의 시간은 이제 천국의 문을 닫고 지옥의 아가리를 벌릴 시간이라는 뜻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스피커 속 남성은 어쩐지 성욕 같은 게 하나도 없을 것 같은 목소리로, 마음을 비우고 오늘 있었던 일들을 반성해 보세요, 부모님을 생각하세요, 욕심을 버리고 이웃에게 베푸세요, 뭐 이런 식의 각종 선량한 제안을 거듭했지만 우리들에게 큰 어필은 없었다. 그렇게 명상의 시간은 폭압과 억제의 상징이 되어 좋지 않은 이미지만 축적했고, syo가 중학교와 같은 이름을 단 고등학교에 입학하자 금방 없어졌다. 애들 공부하는 데 방해된다는 항의가 있었다고.

 

syo의 사전 속 명상에게 제자리를 찾아주고 싶었다. 어른이 되면서 생각할 것은 점점 많아졌고, 생각할 것이 많아지면서 똑바로 생각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었다. 생각의 방법을 둘러싼 꽤 많은 길들이 명상 쪽으로 향했으니, 언젠가 한 번은 관심을 가지고 보게 될 것 같다는 예감도 있었다.

 

명상은 결국 삶의 태도가 되겠지만, 첫걸음에서는 방법론이고 기술이다. 모든 기술은 습관이 될 때까지는 학습이 필요하고, 배우고 익히는 사람에게 학습 과정은 늘 매끄럽지 못하고 불편하다. 예를 들어, 초심자에게 가부좌는 명상을 방해하는 고통 공급처일 뿐인데, 대체 이 자세를 통과하는 길이 어떻게 선정禪定에 이른다는 말인가? 그래서 syo는 늘 이런 책을 읽는다. 철학에서도, 과학에서도, 심지어 이제는 명상에서도. 습관이 되기 전에 읽는 책. 습관이 되는 순간 의미가 없어지는 책. 올라가면 치워버려야 하는 사다리. 치움으로써 다시는 저 밑으로 내려갈 필요가 없는 나 자신의 위치에너지를 증명해주는 사다리.

 

무엇보다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려면 반드시 멈춰야 합니다. 멈추는 것만으로도 부족하고, 아주 고요한 상태에서 가만히 앉아 자신의 내면을 감싸고 있는 모든 것들이 가라앉아 깊은 내면의 세계가 보일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이는 탁한 연못 속에서 진주 구슬을 찾는 것과 비슷합니다. 연못 속에 빠진 진주 구슬을 찾으려면 마땅히 물결을 고요하게 해야 합니다. 구슬을 찾겠다고 연못을 휘저으면 물은 점점 탁해지고 구슬을 찾기는 더욱 어려워집니다. 이럴 때는 연못의 물이 고요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물이 고요해지면 구슬은 절로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_ 혜거 스님, 하루 15분 명상

 


 


177. 번은 경제 공부

로버트 하일브로너, 러스터 서로우 지음 / 조윤수 옮김 / 부키 / 2018

 

고만고만했다. 이런 컨셉 이런 레벨의 경제학 책은 잔뜩 있고, 실은 그중 한 권이면 된다. 한 권을 골라 두 번 읽는 것과, 두 권을 골라 한 번씩 읽는 게 거의 차이가 없는 영역이 이런 경제학 이론의 발전사를 쉽게 다룬 교양서 영역이다. 그래서 여러 권을 한 번씩 읽으면서 한 권을 여러 번 읽는 효과를 만끽하는 중.

 

결국 대규모 변화에 필요한 것은 자본주의의 혁명성에 대한 적응만이 아니다. 국민적 기질이라든가 지도자의 통찰과 같은 제도 밖의 존재들이 기여하는, 뭐라고 정의하기 어려운 것들도 필요하다. 그런 만큼 경제학을 이해할 필요는 있지만, 이는 바람직한 사회를 이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경제학을 이해한 뒤에도 여전히 부딪치게 될 지극히 까다로운 문제들에 대처하기 위해서라는 충고로 이 책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_ 로버트 하일브로너, 러스터 서로우, 한번은 경제 공부

 

 

 


178. 민주주의는 실패했는가?

니이에르 다산디 지음 / 이혜경 옮김 / 자유의길 / 2019

 

모든 단어가 다 그렇긴 하지만, 모두의 입에 올라오면서도 모두가 다른 뜻으로 쓰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가장 강한 단어 중 하나가 민주주의. 그도 그럴 게, 민주주의란 민이 주가 되는 주의主義이므로 각각의 민마다 민주주의에 대한 실감각이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민주주의는 실패하는가?

 

민이 모두 주가 될 수는 없다. 한 사람이 모든 것을 가질 수 없고, 모든 사람이 하나의 것을 가질 수도 없다. 따라서 민주는 기필코 실패한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실패하지 않는다. 그것은 주의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누가 민이고, 무엇을 가져야 주이며, 민과 주를 어떻게 엮고 배치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주의다. 당연히 그것은 정치고 권력이다. 그러므로 개별 체제로서의 민주주의는 실패할 수 있지만 추상적 체제로서의 민주주의는 절대로 실패할 수 없다. 실패한 개별적 민주주의를 민주주의의 경계 바깥으로 밀어내면 그만인 것이다. 그런 게 주의가 하는 일이고 해야 하는 일이다. 진정한 공산주의는 실패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런 나라는 아직 한 번도 온 적이 없기 때문에- 라고 말하는 게 가능한 것은 그것이 주의이기 때문이다. 같은 방식으로 민주주의는 영원히 성공한다. 성공한 자들의 민주주의가 성공한 민주주의가 되는 일이 영원히 반복되기 때문이다.

 

어차피 성공할 수밖에 없는 민주주의를 연구할 것인가, 실패할 게 뻔하더라도 더 낫게 더 낫게 반복적으로 실패하며 민주를 밀고 갈 것인가. 실은 이 질문은 말장난이다. 주의가 아닌 민주는 없기 때문이다. 실패하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니라, 모든 정치개념은 어차피 다 주의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저 질문은 어차피 만들어지고 변형되며 경합할 수많은 민주주의 가운데 가장 성공적인 민주주의가 어떤 것일지를 정하는 민주주의-주의를 고안할 때, 민주에서 출발해 주의로 갈 것이냐 주의에서 출발해 민주로 갈 것이냐를 생각하자는 질문으로 치환할 수도 있겠다. 영원히 성공하는 것에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는 영원히 실패하는 것에 대한 성공적인 고찰이 필요하다.

 

민주주의가 과연 질서와 안전을 제공할 수 있는가라는 우려 또한 오랫동안 제기되어 온 문제다. 민주주의에는 다원주의가 내재하기 때문에 다양한 신념들이 공존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다양성이 개인의 권리 강조와 결합하면서, 사회적 결속을 약화시키고 불만을 증폭시킨다고 지적되기도 한다. 문제는 권리가 본래부터 경쟁적인 성격을 지닌다는 점이다. 자신의 신념을 주장하는 누군가의 권리는 다른 누군가의 권리와 충돌할 수 있다.

_ 니이에르 다산디, 민주주의는 실패했는가?

 


 

--- 읽는 ---


유괴의 날 / 정해연

스퀴즈 플레이 / 폴 오스터

이까짓, / 윰토끼

왜 세계의 가난은 사라지지 않는가 / 장 지글러

오늘부터 부러움에 지지 않고 살기로 했다 / 지그리트 엥겔브레히트

법화경 마음공부 / 페이융

철학사 아는 척하기 / 데이브 로빈슨

필요의 탄생 / 헬렌 피빗

플라톤 전집 1 / 플라톤

영어를 틀리지 않고 쓰는 법 / 최승철

일상적이지만 절대적인 과학철학 지식 50 / 개러스 사우스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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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그만 메모수첩 2021-05-26 18: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수평선을 구경할 수 있는, 자갈이 깔린 바닷가 : 얼마 전 제가 비교적 한적한 요런 작은 바닷가를 발견했습니다. 조용해서 책 읽기도 딱 좋고 근처에 카페도 있지요. 너무 작은 해변이라 이름도 모르겠지만 거기를 ‘뫄뫄(제 이름)독서용바닷가’라고 이름 붙이고 제 마음대로 점령해버렸습니다. 다만 좀 멉니다.. 꼬박 운전해서 왕복 세 시간..😢 작은 삶에 대한 적어주신 글을 읽다가 슬픔도 기쁨도 아닌 무슨 감정인지 모를 아련한 느낌이 들어 코끝이 시큰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syo 2021-05-26 19:08   좋아요 1 | URL
아, 수첩님 서재에서 사진 봤는데, 조그마한 등대 있던 그, 거긴가요? 😀
왕복 세 시간이면 뭐 양호한 편이지요. 삼면이 바다인 쪼꼬만 나라에 사는 게 이럴 땐 좋네요 ㅎ 어느 방향으로 달려도 하루만에 다녀올 수 있는 바다가 있는 ㅎㅎㅎ
들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청아 2021-05-26 18: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책 주문 해놓고 도서관 책 빌려오고 정작 집에 있던 다른 책 읽는거 슬슬 내가 이상해지는건가 생각했는데 감사합니다ㅋㅋㅋㅋ
8시전 책 도착할꺼란 문자확인 후 다른 책 시작해놓고 들어와 북플 보다가...@.@

syo 2021-05-26 19:10   좋아요 3 | URL
응? 무슨 말씀 하시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배고프면 밥 먹고, 목마르면 물 마시고, 졸리면 자고, 책 주문해놓고 도서관 책 빌려오고 정작 집에 있던 다른 책 읽고, 여기 어디에 이상할 구석이 있단 말입니까? ㅋㅋㅋㅋㅋㅋ

북다이제스터 2021-05-26 19: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터널 증후군 말씀이세요?
맞다면 저와 같은 질병 앓고 계십니다. ㅎㅎ

syo 2021-05-26 19:12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ㅋㅋㅋ 아 빵터졌다 ㅋㅋㅋㅋ
그 양자역학에서의 터널 효과입니다. 고전역학 관점에서 보면 입자가 통과할 수 없는 고에너지 장벽을 훌쩍 넘어가지고 다른 데서 뿅 하고 나타나는.... 북다님도 아시잖아요 ㅎㅎㅎ

우리 동병상련의 정은 조만간 나누기로 하고.....

북다이제스터 2021-05-26 19:15   좋아요 1 | URL
터널증후군 아니네요. ㅠㅠ
제가 말씀드린 건 (맨날 비슷한 책만 읽어) 시야가 좁아지는 현상을 말한거 였습니다. 오해해서 죄송합니다. ㅠㅠ
제가 좀 짧습니다. ㅠㅠ

syo 2021-05-26 19:19   좋아요 2 | URL
응? 저는 북다님이 손목터널증후군 같은거 말씀하시는 줄 알았어요 ㅋㅋㅋㅋㅋ
저도 짧고 오해했네요 으하하하하 😆

stella.K 2021-05-26 19: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제목 한 번 찰집니다. <예의 없는 새끼들 때문에 열받아서 쓴 생활예절이라니>!
김불꽃이 청학동에 사는 사람인가요?
요즘은 하도 줄임말이 많아 도무지 따라가기가 쉽지 않네요. 현타가 그 뜻이었군요.

스요님은 맛있는 걸 확실히 즐길 줄 아는 사람 같습니다.
하지만 형제 많은 집에 살면 그런 게 어딨습니까?
먹는 게 남는 거고, 입 하나 더는 게 사는 겁니다.ㅋㅋ

syo 2021-05-26 19:17   좋아요 2 | URL
줄임말 꼭 안 따라가셔도 되요 ㅎㅎㅎ 마주칠 때마다 물어보면 되지요^-^
줄임말 잘 아는 사람들은 자기가 남들이 잘 모르는 최신 줄임말 알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다소간의 즐거움을 느끼는지, 그게 뭔데 물어보면 흔쾌히 알려주더라구요 ㅎㅎㅎ

형제 많은 집 아우들의 슬픈 성장기.... 저는 장남에 아래로 터울 꽤 나는 어린 여동생만 하나 있어서 먹는 걸로 부딪히는 일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ㅋㅋㅋㅋ 그치만 막입이라 비싼 거 맛난 거 감별도 못하고 막 먹는 타입입니다 막.

수이 2021-05-26 19: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친구야 우리 나중에 다 같이 아말피 가자. 좀만 기다려. 라고 조증에 사로잡혀 댓글을 답니다.

syo 2021-05-26 19:38   좋아요 1 | URL
조수연 선생님 감사합니다 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1-05-26 19: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요즘은 왠일인지 이거 해야지 하고 일어나서 저거 하고 그거 해야지 하고 움직이다 요거 하고 자꾸 다른데 주의가 빼앗기는 나날입니다. 일해야지 하고 컴 켰는데 동료가 살 집을 검색하고 있고…

syo 2021-05-29 12:39   좋아요 2 | URL
저는 요즘 왠일인지 컴퓨터 앞에 앉기가 귀찮은 날이 이어집니다.
생각해보면 그건 좀 좋은 일 같기도 하고.....

붕붕툐툐 2021-05-26 23: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syo님은 하려던 걸 하지 못했지만, 더 중요하고 필요한 걸 하신 거예요. 그런건 생각이 아니라 몸이 아는 거니까요. 역시 음료는 콜라라는 그런 진리같은 것들이요.
명상이란 단어만큼 오염이 심한 말이 또 있을까 싶은데, 하루에 15분씩 꾸준히 명상하시면 한달이면 저랑 같은 천상계에서 눈물도 콧물도 없이 포켓몬 빵을 먹을 수 있습니다.

syo 2021-05-29 12:40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툐툐님은 정말이지 범접하기 어려운 댓글 센스를 지니고 계시는 것 같아요.
천상계에서 눈물도 콧물도 없이 포켓몬 빵을 먹다니, 감탄.

Angela 2021-05-27 19: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수요일에 이 많은일을? 요즘 재택하세요? 부럽부럽

syo 2021-05-29 12:41   좋아요 1 | URL
재택은 재택인데 재택근무가 아니라 재택백수입니다.
그래도 부러우실까요?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