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의 명암과 건축이론 현대철학과 건축이론 시리즈 1
임기택 지음 / 스페이스타임(시공문화사) / 2014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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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래도 이 책은 쓰레기는 아닙니다-라는 말도 저자에게는 이 책은 쓰레기입니다-와 진배없이 들리겠지만, 더 적확한 표현을 찾을 수 없으니 실례를 무릅쓰고 이렇게 말하는 마음도 그리 편치만은 않다. 그래도 이 책은 쓰레기는 아닙니다. 그러나 결코 좋은 책도 아닙니다. 세 가지 정도의 이유를 대려고 하는데,

 

 

2.

      우선, 너무 후려친다.

 

      후려침은 입문서나 개론서 입장에서는 어느 정도 태생적인 단점이므로 독자는 그 점을 고려하여 넓은 마음으로 양해하는 것이 상도의겠으나, 어떤 독자는 마음이 좁다. 좁은 마음은 그 독자 입장에서는 어느 정도 태생적인 단점이므로 저자는 그 점을 고려하여 이 비판을 넓은 마음으로 양해하는 것이 또한 상도의겠다.

 

      본문에 언급된 철학자들의 저작 중 국내 번역된 것은 거의 모두 참고문헌에 이름을 올리고 있으나, 솔직히 입문서 하나씩만 가지고 와도 이 책보다 훨씬 풍성하게 서술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3.

      둘째로, 서술의 난해함이나 압축 정도가 너무 불균질하다.

     

      친절한 곳은 과하게 친절하다. 헤겔의 정반합을 설명하면서 자전거가 자동차로, 자동차가 비행기로 발전해 나가는 그림을 첨부한 것은 의미없는 과잉친절이다. 그 그림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될 만큼 본문이 평이하게 서술되어 있다. 그런가하면 이런 부분도 있다.

 

      (1)가치판단은 지배층의 위계구조를 대변하는 것이다. (2)언어와 의미만 무효화시키면 물질만 남게 된다. (3)'가치구조'는 우리가 만든 것이다. (4)단어를 응시한다고 했을 때, 모든 것을 제거하면 '글자 자체'만 남게 된다. (5)도시 역시 물리적 구조를 제거하고 보면 그 이면의 그림자와 찌꺼기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134쪽, 괄호숫자는 임의로 붙였다)

 

      저 문단은 별거 아닌 것 같으면서도 골치가 아프다. (1)과 (3)이 제 짝이고, (2), (4)가 한 짝, 그리고 (5)가 이어진다. 직 (1)-(3)-(2)-(4)-(5)로 서술했어야 온당할 문단이다. 

 

      내용 서술 또한 부주의하다. 문단 전체의 논지에 의하면 (1)의 '가치판단'과 (3)의 '가치구조'는 무효화 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완전히 동일한 맥락의 단어인데, (1)에서는 '지배층', (3)에서는 '우리'라는 주체를 들이밀다보니 그들의 가치판단-우리의 가치구조처럼 서로 대항하는 개념처럼 느껴진다. 또한 (2)와 (4)는 중언부언이다. 그리고 (2)=(4)와 (5) 사이에는 비약이 느껴진다. (2)에서 '물질'은 남고 (5)에서 '물리'적 구조를 제거하기 때문이다. 이 정도 되면 독자는 작가가 이해와 오해의 개념을 오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의심하게 된다.

 

 

4.

      무엇보다도 내가 용서할 수 없는 것은 한 쪽에서도 몇 개씩 발견되는 엉망진창 문장들이다. '극히' 일부만 옮겨 본다.

 

      - 메시아가 도래하는 순간은 인간세계의 신화적 열정, 감정pathos가 극대화될 때 분출되는 것이다(130) : 주술호응이 맞지 않다. 뭔가 다른 문장을 써놓고 고치다 만 것 같은 느낌이다. 그리고 우리 글에서는 감정'가' 극대화 될 수는 없다.

      - 이렇게 진보적 사고관이 그릇된 윤리의 사고와 결합될 때의 결과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끔찍한 인류의 재앙으로 다가왔음을 인류는 이미 경험했다(131) : 고등학교 1학년의 논술답안지에서나 등장하여 빨간 줄 죽죽 그일 표현이다.

      - 모던시대에 역사적 추동력은 더이상 신이 아닌 인간의 손에 의해 진보한다는 강한 믿음을 가지고 행동으로 이끌어나가는 추동력이었고 그런 것이 우세한 시대였다(131) : 이것은 다름아닌 박근혜의 말이다.

      - 그가 생각하기에 자본주의는 착취와 잉여가치를 통해 자본가가 잉여가치를 대부분 빼앗아가는 체계이다(132) : 잉여가치를 '통해' 잉여가치를 빼앗지 않는다. 착취라는 단어는 중언부언이다. 이 짧은 문장에 이게 뭐하는 짓일까.

      - 오늘날 자본주의 시스템 하에서 양극화가 심해지고 있는 것은 이러한 요소들이 과정을 더해 가면서 더욱 심화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132) : 박사까지 받은 사람의 글이 이따위라니 이제는 화가 날 지경이다.

      - 백지와 부여된 의미와 가치체계 대상은 의미가 부정되고 무효화된 것을 의미한다(134) : 저자가 한국사람인데, 왜 구글 번역기가 번역한 글이 나왔지? 

      - 사실과 진리는 같기도 하고 대립하기도 하는데 사실과 진리와 관계가 있을때 symbol이 되고 사실과 진리가 전혀 관계가 없을 때 알레고리가 되기도 한다(139) : 이 책은 만 원이다.

 

      그러니까 글을 쓸 때는, 내용이 중요하니까 일단 문장이 되든 말든 주욱 써 놓고 나중에 고쳐나가자는 마음을 먹어서는 안된다. 그렇게 만들어진 글은 100번의 교정과정을 거쳐도 100% 완벽하게 교정되지 않는다. 그럴진대 심지어 이 책에서는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편집자의 개입이 보이지 않는다. 만약 이게 편집자의 손을 거친 글이라면 그것은 진정한 공포다. 그 사람이 편집자라면 박근혜도 대통령이겠다.

 

 

5.

      장점도 있다. 이 책은 철학적 사고가 건축에 함유되어 드러나는 대목을 꼼꼼하게 알려주고 있다. 약간 어거지같지만, 이 철학사상이 건축으로 표현되면 이런 건물이 튀어나오는구나-하는 감을 조금이나마 얻을 수 있다. 그렇지만 너무 늦었다...

 

 

6.

      총 8권까지 있는 듯하다. 1권을 구매할 때 2권도 같이 구매했다. 낭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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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7-06-01 2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6번 읽고 아이쿠야... 했어요 orz

syo 2017-06-01 23:38   좋아요 0 | URL
이 늦은 밤에 어쩐 일이세요 ㅎㅎ

다락방 2017-06-01 23:39   좋아요 0 | URL
운동하고 집에와서 침대에 누웠고요 ㅋㅋㅋㅋㅋ 스마트폰 ㅋㅋㅋㅋㅋㅋ 세상 편한 스마트폰 ㅋㅋㅋㅋㅋ

cyrus 2017-06-02 0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속권이 너무 늦게 나오는 경우가 있어요. 그럴 때 1권만 산 것이 후회됩니다. 그래서 저는 세트 다 나오면 삽니다. ^^;;

syo 2017-06-02 07:23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세트 다 나온것 같아요. 8권까지 다 샀다면 아마 두 권 산 지금의 4배는 후회했을것 같습니다..
 

1.

      그 전까지 뻔질나게 정치 뉴스를 들락날락거리고, 가끔씩 정치뻘글을 작성하던 syo는 19대 대통령 당선과 동시에 사라졌다. 고담 시티에 악이 사라지면 함께 사라지는 검은 가면 쓴 남자처럼. 비록 그 남자처럼 직접 악을 처단하진 않았지만 어쨌든, 세상이 너무 평온하기 때문에 웃으며 사라진 정치뻘글러 syo의 영전에 한송이 꽃을.

 

      최근은 어찌된 일인지, 박근혜 정부 내내 한번도 읽지 않았던 연애소설을 짬짬이 읽고 있는데, 이것도 호시절의 증거라면 증거겠다.

  

      연애소설의 매력은 추억 돋는다는 데 있다. 심지어 이런 연애를 해 본적도 없으면서 뻔뻔하게 되살아나는 추억들. 야, 이 샥스핀 사진을 보니까, 옛날에 내가 먹었던 자장면이 생각나네- 이런 말도 안되는 연상작용을 불러일으키는 힘이 연애소설에는 분명히 있다.

 

 

2.

      그래도 뭐가 뭐 못 끊는다고, 정치 이야기 비슷한 거 하나.

 

      물리적 힘에 의한 권리실현이 신속하고 경제적인 수단임에는 틀림없으나, 첫째로 권리자가 힘이 센 강자임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그러한 보장은 없으며, 둘째로 실력에 의한 해결 자체가 사회평화의 교란, 파괴일 뿐만 아니라 '힘에는 힘으로' 식의 맞대결로 '만인 대 만인의 투쟁장'의 악순환을 유발한다. 특히 매스컴 선동이나 직소, 해결사나 조폭 나아가 용역업체의 동원, 집단분쟁에 있어서 광장 데모, 사이버테러, 농성, 폭력 등 집단행동과 광장의 큰 목소리에 의한 해결은 인권침해, 사회혼란 그리고 법치부정, 혼돈(chaos) 천하가 된다.

_이시윤, 『신민사소송법』2쪽

 

      

      탄핵이 인용되던 그날, 기자가 심판을 방청하고 나온 한 노인을 붙잡고 의견을 물은 일이 있었다.

 

 

      "서울 부암동"이라는 소개와 함께, 이름을 올린 이 사람을 기자나 편집국에서는 모를 수도 있었겠지만, 이 뉴스를 보던 전국의 모든 법조인들, 법조인 및 유사직역 워너비들은 뿜거나 밥숟가락을 놓치거나 했을 것이다. 저, 저것은......헌법재판소 초대 상임재판관이었으며 한국 민소법의 거성 이시윤 선생님이시다!!!! 대충 하나 골랐는데 민소왕.

 

      법과목 서술형 고사가 2차 과목으로 존재하는 시험들이 있는데, 그런 시험에서는 통상 특정 사례가 문제로 주어지면 관련된 학설부터, 판례, 자신의 의견을 주욱 서술하는 식으로 답안 작성이 이루어진다. 민사소송법 과목에서는 이시윤 선생님은 단연 독보적인 존재로, 안전한 합격을 원하는 대다수의 수험생이 이 사람의 학설을 채택하여 본인의 의견을 개진하기를 선호한다. 그런 그가, 탄핵심판과 관련하여 이런 저런 눈쌀 찌푸려지는 의견을 내놓았다가 많은 수험생들로 하여금 이시윤 학설의 지지를 철회하도록 하여 학설대립에서 늘상 반대편에 서 있는, 소수설의 대가 호문혁 교수님을 든든하게 만든다는 소문이 고시계에 암암리에 떠돈다.

 

      이런 시대적 상황 속에서 그 분의 저서를 오랜만에 펼쳤는데, 떡하니 2쪽부터 뭔가 엄청난 이야기가...... 어차피 시험에는 이런 거 안나오겠지만, 그냥 한 번 밑줄 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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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29 20: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5-29 21: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5-29 21: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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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29 21: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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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29 21: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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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29 21: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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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29 22: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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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29 22:2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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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29 22: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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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5-29 2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yo님 눈썰미 좋은데요. 저는 처음에 사진을 보자마자 걱정했어요. 예의상 일반인의 얼굴을 가리지 않은 게 신경 쓰였어요. 글을 읽어보니까 제 생각은 기우였어요. 사진 속의 인물이 유명한 분이었군요. ^^

syo 2017-05-29 21:36   좋아요 0 | URL
위상이 장난아닌 분이세요. 합격수기 이런데 보면 다 저분 책 이야기 해요.

북다이제스터 2017-05-29 21: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Syo 님의 잼 있고 뼈있는 글 자주 접하려면 우리나라에 절대 민주주의가 오지 말아야 한다는 말 안 되는 생각이 듭니다. ㅎ
그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글 자주 부탁드립니다. ^^

syo 2017-05-29 21:52   좋아요 1 | URL
아이고 무슨 말씀이세요 ㅎㅎㅎ

북다이제스터님처럼 좋은 리뷰 못 써서 이런 뻘글 쓰는건데요ㅎㅎ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몰리 2017-05-29 21: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야, 이 샥스핀 사진을 보니까, 옛날에 내가 먹었던 자장면이 생각나네-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외우고 있습니다. ; 당장 내일부터 활용할 문장. ;



syo 2017-05-29 21:56   좋아요 1 | URL
그 무시무시한 아이들한테 들려주시는 건가요
.... 도대체 어디서 그딴 이야기를 들었냐고 출처를 물어오면 제 이야기 하지 마시고, 음 복길이 이름 대주세요.

yamoo 2017-05-29 2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민소법은 죽음의 과목이었지요...ㅋㅋㅋ

정말 눈썰미가 좋으시군요!!

syo 2017-05-29 22:17   좋아요 1 | URL
하하하 제가 저 장면을 실제로 목격하긴 했지만, 이시윤을 ˝서울 부암동˝에 사는 어떤 필부로 표현한 저 ‘만행‘에 대해서는 인터넷에 일찌감치 소문이 다 퍼져 있더라구요.

곰곰생각하는발 2017-06-01 0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이걸 발견한 게 언론이 아니라 쇼 님이시군요.. 깜놀....

syo 2017-06-01 09:31   좋아요 0 | URL
최초에 저걸 보도한 언론은 무조건 몰랐을 겁니다. 그랬으면 서울 부암동이 아니라, 전 헌법재판관 뭐 이런 설명이 붙었겠지요.

그런데 저게 방송되는 순간 많은 사람들이 알아챘을 거예요. 전 치킨 먹는 중이었는데 다 먹고 어떤 커뮤니티에 들어갔더니 벌써 ‘야 그거 봤냨ㅋㅋ‘식의 글들이 올라와있더라구요
 

 

1.

      처음 보는 순간 벼락처럼, 내가 이 사람을 사랑하는구나, 혹은 내가 이 사람을 사랑하겠구나 단번에 알게 되는 사랑이 있다. 한편, 어느 날 문득 거울을 보다가, 비 듣는 소리를 듣다가, 찌개에 넣어먹을 감자를 타박타박 썰다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슬며시 알게 되는, 그런 사랑도 있다.

 

 

2.

      당신은 어떤 경험이 더 많았습니까? 

 

 

3.

      고종석은 마르크스주의가 망한 이유로, 그 이론 속에 인간의 마음, 정서, 욕망 같은 것들이 들어있지 않다는 점을 짚는다. 완전 동의하지는 않지만, 일리 있는 말이다. 마르크스가 말하는 공산사회가 오면, 과연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서 축적의 욕망, 타인보다 더 많이 가지고 싶은 욕망이 일거에 사라질까? 이론적으로 가능한 그 세상이 정서적으로도 가능할까?

 

      거의 같은 이유로, 나는 내 연애관을 공산주의 연애관이라고 즐겨 부르는데, 연애사에 펼쳐질 수 있는 굵직큼직한 사건들에 대해 이론적 대처방안이 거의 완비되어 있으나, 실제로 그런 상황들이 벌어지면 남들과 똑같이 시기, 질투, 실망, 분노, 지랄, 발광할 것이 예상되기 때문이며, 또 <공산당선언>처럼 몇 개의 강령이 실제로 존재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4.

      공산주의 연애강령 1 : 너 아닌 다른 것들을 향한 모든 우호적 감정은 죄다 사랑이다

      공산주의 연애강령 2 : 모든 사랑은 복합감정이다

      공산주의 연애강령 3 : 네가 하는 모든 사랑은 제각기 다 다른 사랑이다

      .......

      공산주의 연애강령 부칙 : 이 강령을 상대방에게 강요하는 순간 니 사랑은 그대로 폭망이다

 

 

5.

      늘 타던 가락이 무서운 가락이고, 놀던 물에 물드는 것이 인간이라,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우리는 새로운 사랑을 새롭게 하기보다 하던대로 하기를 선호한다. 사랑할 때 익숙한 방식을 선호하는 일은 때론 운 좋게 괜찮은 결과를 낳기도 하지만, 대체로 망하거나, 불필요하게 파손된 상태로 사랑을 시작하게 한다.

 

      연애를 망하게 하는 여러가지 태도는 새롭게 사랑하는 것을 귀찮아하거나 두려워하는 데서 시작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가장 초보적인 수준은 <옛날걔는나한테안그랬는데>. 지난 사랑의 그림자에 직접적으로 묶여 있는 경우 되시겠다. 더 나아가, 꼭 깨지고 나서 아, 그게 다 내 욕심이었어, 나도 노력했어야 했는데, 하는 부질없는 후회로 귀결되기 마련인 <있는그대로의나를받아들여주는게진짜사랑아니야?>도 있다. 이런 경우,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있는 그대로의 너'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가 되어 결국 잘 해봐야 쌍방과실이다.

 

 

6.

      우리는 모두 나 아닌 다른 사람에 대해 장님이다. 새롭게 시작되는 모든 관계는 우리가 한 번도 보지 못한 코끼리다. 더듬어야 한다. 더듬는 것 말고는 이 코끼리가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놈인지 알 길이 없으므로, 적극적으로 혹은 전략적으로 더듬어야 한다. 그러다 내 손끝이 마주 더듬어 오고 있는 다른 장님의 손끝과 맞닿아 찌릿-하는 순간 우리는 이 코끼리가 어제까지의 모든 코끼리와 다른 오늘의, 오늘만의 코끼리임을 직감한다.

 

 

7.

      남자와 여자는 메일을 주고 받으며 조금씩 드러나는 자신들의 새로운 코끼리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전혀 모른다. 그리하여 그들 사이에 과거의 코끼리들이, 혹은 사회가 입력하는 표준 양식 코끼리들이 끼어든다. 이 책을 읽으며 내가 찾고 싶었던 부분은, 처음에는 새로운 형태였던 그들의 관계가 진부한, 그러니까 절절하긴 해도 결국은 기존의 사랑의 문법에 매인 예측가능한 형식의 사랑으로 바뀐 그 지점이었다.

 

      사랑한다면 당연히 만나야 해. 사랑이라면 당연히 그녀가 고개를 돌릴 때 머릿결이 일으키는 바람을 실제로 느낄 수 있어야 해. 어쩌면 그 모든 "당연히"는 어제까지의 사랑에만 통용되는 문법일 수도 있는데? 

 

      사실 잠깐이나마 그들에게도 실제로 만나지 않고도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부분을 채워주고, 필요한 감정을 충만하게 채워주던 지점이 있었다. 서로를 궁금해하긴 했지만 서로의 실체를 교환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고, 서로를 잃기는 싫었지만 서로를 가지고 싶은 생각은 없었던 그런 지점이. 그 때 만약 그들이, 그들의 코끼리가 완전히 새로운 코끼리이며, 그 코끼리를 위해 완전히 새로운 언어를 만들고 완전히 새로운 집을 지을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어땠을까. 그들이 이미 만들어 놓은 "당연한" 사랑의 자리에 새로운 사람만을 가져다 놓는 사랑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틀을 짜는데 합의했다면 어땠을까. 기존의 사랑은 기존의 사랑의 자리에 맞추어 따로 운영하면서, 그들은 딱 처음의 좋았던 시절에 멈추어 한발 나가지도 물러나지도 않고 선을 지키며 그들만의 독특하고 유익한 사랑을 유지한다면,

 

 

8.

      그랬으면 이 책은 아마 망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 또한 언젠가 무너졌을 것이다. 사랑이 무슨 알파고 바둑 두는 것도 아니고, 뭔 수로 선을 지키냐고. 다른 사람을 향해 치닫는 마음이 조절이 되면 우리는 그를 사람이라 부르지 않는다. 붓다라고 부르지.

 

 

9.

      그들의 마음이 선을 넘고 서로를 향해 걷잡을 수 없이 내달리는 그 한순간이 어딘지 우리는 결코 짚어낼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무지개의 한쪽 끝부터 짚어가며 연두색의 정확한 위치를 찾는 일처럼 알쏭달쏭하다. 그래서 우리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을 만났을 때처럼, 그런 사랑의 그라데이션에다 기적이나 운명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그렇지만, 운명은 그저 사랑을 설명하는 하나의 방식이거나 지난한 시련을 통과하기 위한 부적, 메마른 사랑에 부어주는 영양제일 뿐이다. 사랑은 운명으로부터 오지 않는다. 운명이 사랑으로부터 온다. 그리고 이 글을 쓴 지금 이 순간 격하게, 

 

      내 손발이 오그라들고 있다.......우주의 모든 중2의 기운이 이곳으로 모여들고 있다.....

 

 

10.

      그들의 이 다음 순간을 읽기를 즐거이 기다리고 있다. 손발이 마침내 없어지기 전에 어서 등록하기 버튼을 누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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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7-05-29 14: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싸~ (올라와서 읽을 수 있다는 기쁨에서 오는 환호 ㅋㅋㅋㅋㅋ)


‘이론적 대처방안이 거의 완비되어 있으나, 실제로 그런 상황들이 벌어지면 남들과 똑같이 시기, 질투, 실망, 분노, 지랄, 발광할 것이 예상되기 때문‘ -> 오, 현명하십니다. 저는 몰랐어요. 저는 제가 남들과 똑같이 시기, 질투, 실망, 분노, 지랄, 발광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남들은 다 그래도 저는 안그럴 줄 알았어요. 그래서 제가 그런 모습을 보인다는 걸 알았을 때 얼마나 당황스럽고 스스로에게 실망하고 화가 나던지요. 저는 무슨 제가 강철로 만들어진 인간인줄로만 알았어요. 저도 그냥, 보통 사람인데 말입니다. 쇼님은 그런데, 이미 알고 계셨군요. 그런 감정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현명하십니다.


‘이 강령을 상대방에게 강요하는 순간 니 사랑은 그대로 폭망이다‘ (끄덕끄덕)
아, 제가 뭔가 이 나이에 연애에 대해 또 새롭게 배우는 기분입니다.


우주의 모든 중2의 기운이 모여들었습니까? ㅋㅋㅋㅋㅋ 좋은데요? ㅋㅋㅋㅋㅋㅋㅋㅋ 아무튼지간에 곧! 다음 순간을 읽도록 합시다. 딱 대기하고 있어요!!

syo 2017-05-29 15:09   좋아요 0 | URL
스스로도 손발이 좀 오그라드는 이런 글 쓰면, 지금은 연락이 끊겼지만 옛날에 제 글 읽어주던 친구놈이 생각나요. 저한테 그랬거든요. ˝양산형 알랭 드 보통˝같은 글 쓰지 말라고. 그 대머리가 지만 할수 있는 글 가지고 깜냥도 안 되는 사람 여럿 버려 놨다고. 사실 저도 그 친구 말이 맞다고 생각해요. 1년 뒤쯤 다시 읽으면 사라지고 싶을거에요, 아마.

그나저나, 지금은 어디서 뭐하고 사는지 모르겠네요, 그 개새끼는ㅋㅋㅋㅋ

2017-05-29 15: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syo 2017-05-29 15:59   좋아요 2 | URL
맞아요 맞아요.
어느 상대방을 몰라서 그렇다기보다는, 나를 잘 모르는 것과 다른 사람을 잘 모르는 것이 뒤섞여 가지고 관계가 안드로메다시궁창으로 가는 일이 허다하지요.

2017-05-29 17: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5-29 17: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5-29 17: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5-29 17: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5-29 18: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7-05-29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파멜라 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

다락방 2017-05-29 18:07   좋아요 0 | URL
심장 아파요 ㅠㅠ

2017-05-29 18: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5-29 19: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5-29 19: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5-29 19: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1.

      유레카님의 글에 장난처럼 댓글을 달고 나니 진짜 궁금해졌다. 정말 알라디너들의 매체를 만들 수는 없는 것일까? 이곳 알라딘 서재 공간은 가입에 특별한 자격이 필요하지 않은 온라인 커뮤니티 중에서 회원들의 지적/지각적 역량이 가장 훌륭한 곳임에 틀림이 없는데? 책은 결국 모든 것이니 이곳에는 어떤 분야라도 논프로패셔널 전문가가 최소 한 명 씩은 있을 것인데? 이웃분들의 무릎을 탁 칠만한 글들을 하도 읽다보니 나는 무릎이 나갈 지경인데? 심지어 저 바깥 세상에는 주옷같은 것들의 주옷같은 글들이 난무하는 마당인데도?? 4대강 소식 듣고 낙동강 미꾸라지 걱정하는 1급수 버들치같은 기분이다. 최소한 좋은 글들을 이슈별로 묶어서 제공해 주는 시스템이라도 만들어 주면 안 되냐는 말입니다.

 

 

2.

      딱 오늘까지만, 미친 놈처럼 읽는 것은 딱 오늘까지만. 내일부터는 다시 본분으로 돌아가야 한다.

 

 

3.

      오늘 어떤  의미있는 대화 끝에 우연찮게 근 10년 전에 읽었던 책 『새벽 세 시, 바람이 부나요?』을 다시 읽게 되었는데, 처음 읽었을 때는 만나지 못했던, 오늘에서야 처음 열린 작지만 새로운 시선을 얻을 수 있었다. 이 새로운 시선은 아마도 다양한 것을 보고 읽는 데는 그리 유용하게 쓰이지는 못할 것이다. 고작 과거에 있었던 작은(그때는 거대하다고 믿었던) 몇몇 사건들을 다르게 읽는 데만 쓰이고는 말 것이다. 오늘까지 맞다고 믿어 왔던 과거의 어떤 일이 틀렸거나 혹은 맞고 틀리는 문제가 아니었을 수 있다는, 아닐 수 있었다는, 그저그런 깨달음. 살면서 한 번 겪었던 상황과 다시 한 번 맞닥뜨리고, 그때는 틀렸지만 지금은 맞는 선택을 하는 그런 일은 거의 없으니, 결국 이 책은 내 추억의 한 귀퉁이를 채색하는 데 그치고 만다. 그렇지만 이렇게 덧칠된, 그래서 오히려 한꺼풀 벗겨진 추억을 때로 다시 곱씹고, 그날 그 사람의 마음을 윤곽이나마 다시 한 번 어림해보는 과정에서, 익숙한 나에서 낯선 나로 조금이나마 변할 수 있지 않을까.

 

 

오늘 읽은 글들

 

      문학은 삶의 순간을 포착하고 미미한 것들을 소환해내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에 대한 관념 자체를 흔들어 놓는다. 비슷비슷한 하루의 반복은 그저 의미 없는 것이 아니다. 표상된 외면을 찢고 들여다 볼 때 거대한 새로움이 있다. 문학은 우리의 머릿속에 짧게 스쳐가는 단상이나 눈앞에 빠르게 지나가는 파편적인 모습들을 정밀하고 미묘하게 묘사해 내서 결코 인식할 수 없었던 시간에 대한, 현상에 대한, 기억에 대한 문을 열어놓는 것이다.

_최은주,『책들의 그림자』23쪽

 

      익숙한 표상 과정을 거치지 않고 어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일은 우리에게 낯설다. 하지만 표상과 재현에 익숙한 시선으로는 늘 보이는 것만 볼 수 있을 뿐이다.

_권용선,『세계의 역사와 몽타주,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78쪽

 

      그가 말하는 일관성이란 단일한 서사적 구성이나 완결된 전체를 염두에 둔 통일체적 구성과는 무관한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각각의 부분들이 자율적으로 자기 가치를 가지면서도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는 방식, 각각의 부분들이 각자 자기 안에 다른 부분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다른 것의 일부로 기능하는 그런 관계들의 일관성이다.

_같은 책, 81쪽

      -무슨 말인지 참 알듯 말듯하지만, 이건 알겠다. 벤야민의 이 방식 내적으로 잘 체현하면 좋은 시인이 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이 방식을 외적으로 잘 체현하면 좋은 사회가 될 수 있다는 것.

 

      "지어낸 이야기 안에만 담을 수 있는 마음도 있는 거예요. 만일 세상 모든 게 현실이라면, 이야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 인생은 너무나 쓸쓸할 거예요......"

_미카미 옌, 『비블리오 고서당 사건수첩 5』1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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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7-05-26 1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새벽 세시 읽으면서 퇴근중이에요. 씐나서 읽다가 레오가 전여친이랑 ‘잘뻔‘ 했다고 해서 지금 저 빡쳤어요 --^

syo 2017-05-26 19:44   좋아요 0 | URL
이번에도 새삼 또 다시 빡칠 수 있는 다락방님의 그 능력이 저는 더 놀라워요ㅎㅎ

2017-05-27 11: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syo 2017-05-27 13:34   좋아요 0 | URL
그쵸? ㅎㅎㅎㅎ

다락방 2017-05-27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다 읽었고, 지금 지하철 안이에요! 이 뒷이야기를 누구 빌려줬는데 누구인지 생각이 안나 받을 수가 없어서 초조해요. 다시 사야겠어요. 지금 제 마음은 이 뒷이야기를 꼭 읽어야해요! 흙흙 ㅜㅜ

syo 2017-05-27 13:35   좋아요 0 | URL
저도 지금 뒷이야기 어떡해야 하나 하고 있어요. 저는 심지어 안 읽었거든요..... 궁금해 죽겄어요.

카알벨루치 2018-12-25 1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쇼님 이거지 이거 ㅋㅋㅋ찾았넹

syo 2018-12-25 18:54   좋아요 0 | URL
아닌데요?? ㅋㅋㅋㅋ
 

오늘 읽은 글

 

      비평의 과정이 '구원의 한 형식'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은 비평 혹은 해석하는 자와 대상 텍스트가 만나서 본래의 자기를 지우고 하나의 새로운 시공간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카프카와 만날 때 벤야민은 그 자신만이 카프카의 천재성과 교감할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하고, 프루스트와 만날 때 그는 그 자신의 잃어버린 베를린에서의 유년시절을 찾아서 떠나며, 보들레르와 만날 때 그는 그 자신이 산책자가 되어 제2제정기의 파리를 배회한다. 그의 비평 작업은 자신 안에 있던 카프카와 프루스트와 보들레르를 발견하는 것, 철저하게 그들이 되어 보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자기 안에 있는 수천 수만의 작가들, 작품들, 언어들을 발견하고 해석하고 평가하고 위치시킴으로써 자신을 객관화한다. 그는 그것들을 자기화함으로써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대상들에게로 '이동'시킴으로써 그 자신만의 내재적 표상과 그것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해 나간다. 때문에 그에게 있어 1인칭의 표상 형식은 무엇보다도 경계해야 할 대상이 된다.

      1인칭 형식으로부터 스스로를 탈각시켰다는 것은, 그 자신이 주체의 자의식적 관념으로부터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고자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가 어떤 작가 혹은 작품을 자신의 내재적 기준에 의해 표상하는 작업을 수행했다고 했을 때, 그것은 벤야민이라는 개인의 주관적 취향이나 기준과는 무관한 것이다. 그는 말한다. "글을 쓰는 자들은 '나'라는 작은 단어를 자신의 비상식량처럼 여기는 일에 익숙해야 한다"라고. 그가 경계했던 것은 지극히 주관적인 개인의 자의식과 1인칭 속에 숨어 있는 무비판적 자기 확신이었다. 벤야민이 1인칭의 글쓰기를 거절했을 때, 그는 자신 안에 있는 무수한 인칭들과 대면한다. 그것들은 그가 만나는 작가와 작품, 그리고 세계 전체이다. 때문에 그의 문체는 매번 다른 것이 되고, '그들'의 문체가 된다. 그는 혼자 쓰지만 그의 글쓰기는 '집합적'이다.

_권용선,『세계와 역사의 몽타주,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37~39쪽

 

     

      우린 모두 여러 가지 색깔로 이루어진 누더기. 헐겁고 느슨하게 연결되어 언제든지 자신이 원하는 대로 펄럭인다. 그러므로 우리와 우리 자신 사이에도, 우리와 다른 사람들 사이만큼이나 많은 다양성이 존재한다.

_미셸 에켐 몽테뉴,『수상록』제 2권 I

__파스칼 메르시어,『리스본행 야간열차』에서 재인용

 

      우린 모두 여럿, 자기 자신의 과잉. 그러므로 주변을 경멸할 때의 어떤 사람은 주변과 친근한 관계를 맺고 있거나 주변 때문에 괴로워할 때의 그와 동일한 인물이 아니다. 우리 존재라는 넓은 식민지 안에는,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느끼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_페르난두 페소아,『불안의 책』

__파스칼 메르시어,『리스본행 야간열차』에서 재인용

     

       

      페소아는 페소아가 되었다가 카이에루나 소아르스가 되기도 하며 수많은 얼터에고를 전전하며 살았지만 어쨌든 매 순간, 그 순간의 자신을 인식하며 살았을 것이다. 페소아는 페소아의 글이 자기의 글이라고 생각했을 것이고, 소아르스는 자기가 써서 페소아에게 전했으니『불안의 책』의 진짜 저자는 페소아가 아니라 자기라고 주장할 것이다. 페소아는 한 개의 붓놀림으로 n개의 획을 그리고 있다. 

      반면 인용문에 따르면 벤야민의 글은 매 순간 벤야민의 글이 아니다. 카프카, 프루스트, 보들레르, 또 어떤 누군가의 글이라 한다. 실제로 인용으로만 된 책을 벤야민은 꿈꾸었다. 지우개로 글을 쓰고 있다. 벤야민은 쓰면서 지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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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샘 2017-05-29 0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읽고 있는데 관련 글들을 찾아들어오다가 이곳에 도착했습니다.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보러 왔다가 벤야민을 만났네요. 벤야민에 대한 글을 읽으니 다시 보르헤스가 떠오릅니다.

좋은 글 읽고, 더 읽고 싶어 친구 신청하고 갑니다^^

syo 2017-05-29 07:52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길샘님.
이 글에서 막상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제목밖에 못 보셨겠어요ㅎㅎㅎ 딱 한 페이지 읽고 멈춰버렸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