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매三昧
꽃이 피는 것은 내게도 큰 일이다. 벽과 벽과 천장이 만나는 곳에 거미가 집을 짓는 것도, 그 집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도 내게는 다 큰 일이다. 눈을 감지 않아도 시계 가는 소리, 새 우는 소리가 들리는 조용한 시간 속에서, 시끄럽지 않은 눈을 기르는 것이 요즘 내 직업이다. 묵묵한 것이 깊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몸의 균형을 잡는다. 보이는 것을 다 보기 전까지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지 않는다.
맴도는 것들의 소란을 가라앉히고 차분하게 흘러가는 시간의 표정을 들여다보는 연습을 하기 좋은 계절이다. 이 계절 빚은 얼굴로 남은 한 해를 또 꾸려낼 테다. 고단함이 있겠고, 나를 펴고 접고 휘두를 저 바깥의 장난이 있겠고, 마주 앉아 괜찮다 괜찮다 다독이고 어르는 손길도 있겠지만, 모두들 때가 되면 인사를 나누며 지나칠 것이다. 지금 여기는 일단 봄이다.
주초에는 대구에 있었다.
--- 읽은 ---
82. 아무튼, 인기가요
서효인 지음 / 제철소 / 2020
『여수』는 좋은 시집이었다. 나는 그 책을 움직이는 KTX 안에서 읽었다. KTX 창가 자리는 시 읽기 가장 좋은 공간이다. 시 한 편을 읽고 창 너머로 눈을 던지면 이미 달라져 있는 풍경이 계속 달라지고 있다. 산, 들, 물, 구름, 차들, 내가 빠르게 달려서 더욱 천천한 것들을 눈으로 더듬다 다시 고개를 떨구면 달라져 있는 시가 있다. 그렇게 창밖과 창 안에서 다투듯 번갈아 달라지고 반복적으로 달라지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출발지의 나와는 다른 내가 거기 그렇게 있곤 했다. 그렇게 읽기에 『여수』는 특히 좋은 시집이었다.
그래서 나는 서효인 선생님을 굉장히 진지하고 뭔가 끝없이 아련한 사람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듯하다. 역시 책 한두 권 읽고 사람됨을 넘겨짚는 건 위험하다. 아니다, 오히려 이롭다. 그 시와 이 산문이 내게 달리 다가와서, 산뜻한 기분으로 끝까지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칼국수 달인 수제비 이야기는 하기도 지쳤다. 글잘잘-글은 잘 쓰는 사람이 잘 쓴다-도 식상하다. 지치고 식상한 말을 자꾸 하게 만드는 사람들이 널려 있어서 이 세상은 위험하다. 아니다, 오히려 이롭다.
1995년 캠핑은 룰라가 지배했다. 다들 ‘날개 잃은 천사’가 된 듯 굴었다. 어지간한 아이들은 엉덩이를 씰룩대다 박자에 맞춰 골반을 쳤다.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일부러 얼굴 피부를 태웠다. 당시에는 카리스마로 무장한 싱어송라이터이자 개성 있는 래퍼였던 이상민은 시간이 흐른 오늘날에는 ‘미운 우리 새끼’이자 ‘아는 형님’으로 거듭났으며… 다른 남자 멤버들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 편이 낫겠다. 김건모의 <핑계>를 흥얼거리던 친구들도 많았다. 밀리언셀러의 상징과도 같았던 그의 현재 모습은… 역시 언급하지 않는 게 좋겠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가수들이 무슨 연유로 불현듯 사라지는 걸까. 그것은 그들의 사정이다. 가끔은, 이럴 때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하지만 노래는 몸속 이름 붙이지 못한 장기 한구석에 숨어 이따금 등장한다. 하필이면 그때 그를 진정으로 좋아했던 나의 모습이 되어 돌아온다. 그러니까 노래는 기억을 불러오는 주술과 다름없는 것이다. 중학교 2학년은 대체로 용감하고 대책 없고 삐딱하고 뜨거워서 무슨 기억이든 아주 오래 머리와 몸에 남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열다섯 살에게는 실수하지 않는 게 좋다.
_ 서효인, 『아무튼 인기가요』
83. 흐름으로 읽는 프랑스 현대사상사
오카모토 유이치로 지음 / 차은정 옮김 / 포도밭출판사 / 2016
2회독이다.
그 때문에 영어권의 철학(아카데믹하고 분석적인)이나 독일어권의 철학(분석적이지는 않지만 아카데믹한)에서 보면 프랑스 현대사상은 마치 현대미술이나 현대시처럼 난해하다. 제대로 독해해내지 않으면 의미 불명의 문장들뿐이지만 기본적으로는 스타일의 문제와 떼려야 뗄 수 없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 에크리튀르야말로 일반 사람들까지 끌어들여 사상의 유행을 만들어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에 프랑스 현대사상이 아카데믹한 스타일로 쓰였다면 이 정도로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열광적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_ 오카모토 유이치로, 『흐름으로 읽는 프랑스 현대사상사』
이 책의 주제가 되는 곳은 아니지만 이 대목에서 제일 오래 머물렀던 게 사실이다. 근본 없는 무국적 뜨내기가 철학 나라에 입국 한 번 해보겠다고 맨바닥 먼지 구덩이에 뒹굴며 울고 울었던 나날들이 주마등 같다. 어려워서 어려운 게 아니라 어렵게 해서 어려운 것 같은 책들, 아니 이걸 이렇게까지 한다고 싶던 문장들, 괜히 과학처럼 굴고 싶었는지 택도 없는 공식에 도식을 차용하는 바람에 진짜 과학과 공학에 익숙한 사람에게 끝도 없는 혼란을 초래하던 그 기호들…….
이 책이 그 모든 난해한 겉옷들을 풀어 헤치고 프랑스 현대 사상을 쉽게 쉽게 설명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사실 무슨 책을 가져와도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개론서/입문서를 오래 읽으며 얻은 지혜라고는 딱 그거 하나다. 누가 설명을 해도, 심지어 사상가 본인이 본인의 사상을 설명할 때도, 이해가능성과 설명가능성 사이에는 반드시 trade-off가 존재한다. 거두절미한 생선은 먹기는 좋지만, 머리와 꼬리가 없는 물고기가 바다를 헤엄치는 일은 결코 없다.
84. 아직도 책을 읽는 멸종 직전의 지구인을 위한 단 한 권의 책
조 퀴넌 지음 / 이세진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8
2회독이다.
웃기면서 신랄한 독후감을 읽고 싶은 욕망이 정기적으로 나를 찾아온다. 그저 웃긴 독후감도, 신랄하기만 한 독후감도 안 된다. 신랄하게 웃긴, 혹은 웃기게 신랄한 것들만 이 욕망의 불길을 잠재울 수 있다. 왜 때문에 이러는지 여태 모르고 살았지만 최근 들어 조금씩 알아가는 것도 같다. 그건 가슴 속에 화가 많아서 그래. 웃기면서 신랄한 글의 기저에 깔린 정서는 근본적으로 ‘분노’다. 뜨겁거나 차갑거나 그것은 분노다. 심지어 미지근할 때도. 그 감정의 방향이 타인을 향해 있건 나를 향해 있건 어쨌든 그것은 분노다. 심지어 온 세상이 다 똥같다 싶을 때도. 웃김은 그 분노의 몸매고, 신랄함은 분노가 걸친 옷이다. 그리고 문체는 그 분노의 얼굴이다. 그래서 이런 욕망의 시간이 찾아오면, 얼굴, 몸매, 입성의 삼박자가 고루 취향에 맞는 몇몇 책들을 찾아 도서관 서가를 기웃거리는데, 그렇게 열심히 뒤졌으나 실제로 찾아낸 작가는 몇 안 된다. 닉 혼비, 금정연, 그리고 조 퀴넌.
아무 저의 없이 책을 읽는 사람은 거의 없다. 몇 년 전 나는 필리핀에 거주하는 이블린이라는 여자에게 책을 보내기 시작했다. 이블린은 내 친구와 평생 펜팔을 했는데, 그녀가 운영하는 가게는 늘 자리가 잡힐 만하면 태풍에 싹 쓸려갔다. 그녀는 내가 보내는 거라면 뭐든지, 소설, 전기, 스포츠 서적, 잡지를 가리지 않고 읽을 것이다. 나는 가장 마지막 소포를 보내고 18개월이 지나서야 책이 드디어 도착했다는 기쁨에 찬 편지를 받았다. 소포는 1년 반이나 어딘가에 처박혀 있었고, 그제야 우체국에서 일하는 도적놈들은 어차피 값나가는 물건도 없으니 원래 수신인에게 보내주자고 결정한 것이었다. 필리핀에 있는 내 친구, 내가 만난 적 없는 그 친구는 책을 재미로 읽기도 하지만 가게가 태풍에 쓸려가는 현실을 잊으려고 책을 읽는다. 자신이 까막눈 도적놈들이 우글대는 나라에서 살고 있다는 현실을 잊으려고 책을 읽는다.
_ 조 퀴넌, 『아직도 책을 읽는 멸종 직전의 지구인을 위한 단 한 권의 책』
85. 공부의 철학
지바 마사야 지음 / 박제이 옮김 / 책세상 / 2018
2회독이다.
이건 공부법을 알려주겠다는 의도에서 쓴 책이라기보다, 나라는 철학자는 철학적 개념을 활용해 응용의 최전방인 공부법조차 만들어낼 수 있을 정도로 똑똑한 인간임을 보여주겠다는 결의로 쓴 책 같다는 느낌이다. 프랑스 현대철학에 대해 입문서 수준의 지식을 지니고 있다면 이 사람이 누구의 뭘 가져와서 어떻게 비비고 있는지 알아챌 수 있다. 즉, 저자가 이 책에서 드러내고 있는 철학적 지식의 수준 자체는 그리 높지 않다는 것이다. 저자의 수준이 낮다는 게 아니다. 사이토 다카시나 오가와 히토시 같은 일군의 저자들 손에서 창조되어 바다를 건너온 철학-응용도서가 대체로 그렇듯, 그냥 그런 수준이다. 그리고 눈곱만큼 들어 있는 공부 방법론 역시 추상적이거나 피상적이고, 공부법만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자기계발서에 비해서도 훨씬 모자란다. 즉 이 짬짜면은 한 그릇에 두 가지 요리가 있다는 장점은 있지만 짜장면은 집에서도 해 먹을 수 있는 수준이고 짬뽕은 맛이 없다.
깊이 있는 공부를 하면 기존의 동조가 빚어낸 ‘바보 같은 짓’이 일단 불가능해진다. ‘옛날에는 참 바보였구나’라는 깨달음과 함께 이전의 동조 능력이 자취를 감출 것이다. 전체적으로 인생의 에너지가 사그라지는 시기에 돌입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을 견디면 이내 ‘다가올 바보’로 변신할 가능성이 열리리라. 이 책은 바로 그곳으로 가는 길을 제시하는 안내자다.
_ 지바 마사야, 『공부의 철학』
과연, 프랑스 현대철학 전공자답게, 문체에서 사짜 냄새 비슷한 것이 난다. 라캉, 들뢰즈에게서 그런냄새를 좀 맡았다. 깊이 생각해 보면 맞는 말도 희한하게 사짜처럼 하는.
86. 세상을 읽는 새로운 언어, 빅데이터
조성준 지음 / 21세기북스 / 2019
이것이 데이터고, 이렇게 분석하면 나오는 이것이 인사이트이다- 하는 리듬을 시종일관 유지하면서 빅데이터를 통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고 얻을 수 있는지를 예시적으로 보여주는 데 열중하는 책이다. 기술적인 내용은 기술적인 책에서 배워야 하겠고, ‘빅 데이터는 겁나 빅한 데이터를 말하는 거 아니냐?’ 하는 수준의 이해만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읽어보면 좋을 책이다. 이다음 단계는, 빅데이터로 직접 밥벌이하지는 않더라도, 빅데이터를 사용해 우리를 밥벌이의 대상으로 삼는 이들에게 코 베이고 혀 짤리는 일은 피해야겠다 싶은 사주경계형 교양독자들을 위한 책 되겠다. 찾아봐야지.
데이터는 신대륙과도 같다. 그 존재를 모를 때는 좁은 구대륙에서 치열하게 경쟁하고 싸웠지만, 이제 바다 건너 신대륙의 존재를 알게 됨으로써 경쟁 없는 그곳에 가서 새로이 원하는 만큼 땅을 확보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생성되는 데이터뿐만 아니라 전 세계 데이터를 대상으로도 가능한 일이다.
빅데이터는 정부나 대기업을 위한 혁신의 수단이기도 하지만 일반 소비자이자 데이터 생산자인 우리에게도 직접적인 도움이 될 수 있다. 빅데이터는 잘 쓰면 약이요 못 쓰면 독이 된다. 우리가 항상 봐야 하는 관점은 이익과 비용이다. 빅데이터로부터 우리가 얻는 이익이 무엇이고 그에 따른 비용이 무엇인지를 이해해야만 정확히 그 실익을 저울질할 수 있다.
_ 조성준, 『세상을 읽는 새로운 언어, 빅데이터』
87. 폴리나
바스티앙 비베스 지음 / 임순정 옮김 / 미메시스 / 2011
표지를 보고서, 저 수염 난 아저씨가 저 애기한테 설마? 했다. 도대체 나는 뭘 보고 들으며 어떤 세상을 살아왔는가. 그런 거 전혀 없고, 겁나 아름다웠다. 마치 먹으로 그린 그림을 보는 것처럼, 선 속에, 공백 속에, 뭔가 있다!
동작이 더 가벼워야지. 힘들어 보이면 안 돼. 힘들어 <보이지 않는> 게 중요한 거야. 관객들은 네가 전달하는 감정 이외에 그 어떤 것도 봐서는 안 돼. 잊지 말아라, 폴리나. 우아하고 유연해 보이지 않으면 관중들에겐 네게 힘들어하고 고통스러워하는 모습만 보일 거야.
_ 바스티앙 비베스, 『폴리나』
88. 책 Chaeg 2021. 1. 2
(주)책(월간지) 편집부 지음 / (주)책(잡지) / 2021
월간지는 사랑이 없으면 꼼꼼히 읽기가 어렵다. 한 번이라도 꼼꼼히 읽어봐야 사랑에 빠진다. 한번 궤도에 올라타면 오래도록 이어질 이 사랑과 열중의 닭-달걀 나선으로의 최초 진입은 우연의 작품일 때가 많다. 그런 우연은 소중하다.
그리고 전지윤 선생님은 소중하다.
그래도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자기 자신과 서로의 삶을 바라보는 진실한 이야기에 집중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마음의 근육을 단련시켜주는 글을 읽고, 서로간 격려의 말을 주고 받고, 이를 곰곰이 되새기며 명상이나 수행을 하려는 움직임도 많아지고 있는 요즘입니다. 화면 속 이야기들도 모두를 구해내는 수퍼히어로가 아닌 우리의 시선이 미처 닿지 않는 곳에서 피어나는 작고 아름다운 이야기에 더욱 집중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기술의 발달로 이제는 누구나 그럴싸한 사진과 영상을 제법 잘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어쨌거나 이 모든 것들을 만들어내는 동력은 결국 진심과 진실이라 생각합니다. 따뜻한 온기를 가진 사람의 어여뿐 마음 같은 것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수많은 서사를 진실하게 담고 있는 책이 더욱 소중하게 여겨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_ (주)책(월간지) 편집부, 『책 Chaeg 2021. 1. 2』
--- 읽는 ---
잘생긴 개자식 / 크리스티나 로런
연쇄 살인마 개구리 남자 / 나카야마 시치리
너무 재밌어서 잠 못 드는 세계사 / 우야마 다쿠에이
정적을 제거하는 비책 / 마수취안
헤겔과 그의 시대 / 곤자 다케시
알수록 쓸모 있는 요즘 과학 이야기 / 이민환
을의 민주주의 / 진태원
애덤 스미스 구하기 / 조나단 B. 와이트
대멸종 / 시아란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