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즈와퍼주니어
1
가장 추운 하늘은 모서리가 익는 중. 몇 번을 미끄러지면서도 끝내 넘어지지 않는 사람들. 퇴근하는 그림자로 축축하게 젖은 마을버스 정류장. 검은 눈, 회색 입김, 하얀 분위기. 입 있는 사람들이 말을 아끼는 저녁에, 흔들리고 흔들리며 돌아오는 저녁에, 되돌아가는 마음에, 혼자 먹는 저녁 식사에. 지나치게 넓은 테이블이 있을 작은 집으로 들어가면서도 서둘러 작아지지 않는 마음들. 가장 추운 날을 가장 추운 날로 기억하지 않겠다며 조금 더 안타까운 형용사들을 찾으려는 연약한 습관에 지지 않도록, 더러 미끄러지면서도 끝내는 넘어지지 않도록, 작아지지 않는 마음들, 작아지지 않는 마음을,
이를테면 아침이 다가올 때 어쩔 수 없이 품게 되는 기대 같은 것, 어제보다는 낫지 않겠어, 하고 식빵처럼 부푸는 마음 같은 것. 하지만 경애는 그러다가도 왠지 자기가 그런 것에 속아 넘어갈까봐, 그래서 또다시 무언가를 바라고 실망하게 될까봐 마음을 붙들곤 했다.
_ 김금희, 『경애의 마음』
녀석이 다섯 살 무렵이었는데 어선이 들어오는 거 구경하려고 같이 라쿠르비에르로 걸어가던 중이었어요. 길 한복판에 캔버스 천으로 된 낡은 해수욕 신발 한 짝이 놓여 있었습니다. 엘리 녀석은 신발을 유심히 보며 그 옆으로 걸어가더니 이렇게 말하더군요.
"저 신발은 혼자예요, 할아버지."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어요. 녀석은 신발을 한동안 더 바라보고는 그냥 지나쳐 갔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녀석이 "할아버지, 나는 결코 저렇게 안 돼요"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물었지요.
"저렇게라니?"
그러자 아이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마음이 외로운 사람."
_ 메리 앤 섀퍼,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제주에 부는 바람 때문에 깃털이 다 뽑혔어요,
발전에 끝이 없죠
매일 김포로 도망가는 상상을 해요
김포를 훔치는 상상을 해요
그렇다고 도망가진 않을 거예요
그렇다고 훔치진 않을 거예요
_ 이원하,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부분
2
결과로만 놓고 보면 2020년에는 푸코에 패배했다. 정확히 말하면, 푸코에 패배한 건지 푸코 입문서에 패배한 건지 모르겠다. 『성의 역사』를 읽기 전에, 사라 밀스의 『현재의 역사가 미셸 푸코』, 박정수 선생님의 『‘장판’에서 푸코 읽기』, 오생근 선생님의 『미셸 푸코와 현대성』, 양운덕 선생님의 『푸코』를 미리 읽고 시작했더니, 목적지로 출발하기도 전에 거기가 어떤 곳인지 ‘지나치게’ 많이 알아버린 것이다.
먼지같이 미미한 syo의 독서력으로 『성의 역사』를 읽은들, 어차피 저 뛰어난 선생님들이 낚아챈 것들 이상의 뭔가를 건지기는 어려울 것 같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랬다. 『성의 역사 1: 지식의 의지』를 읽는 내내 나는 푸코의 그 기이함을 넘어 기괴한 문장들이 겨냥하는 바가 뭔지 이해하기가 ‘지나치게’ 쉬웠다. 그리고 정말 수월하게 1권을 완독하고 책을 딱 덮으며 느꼈다. 아, 망했구나. 내가 입문서를 너무 많이 읽어서, 입문서를 통과한 부분은 해답을 알고 푸는 문제처럼 쉽고 의미 없이 지나갔고, 입문서가 조명하지 않은 부분은 아예 시야에 포착조차 하지 않고 지나쳤구나. 그 사실을 알고 나자 도무지 다음 권을 펼칠 수가 없었다. 독을 빼야 해, 입문서 독을.
다행히 syo는 머리에 쑤셔 넣은 걸 잊어버리는 데 채 닷새 이상이 필요치 않은 Hi-Class Mersery Brain의 소유자이므로, 1월이 1/3 지난 이 시점에 벌써 뇌가 충분히 청순해졌다. 그래서 푸코 평전이나 다시 읽으며, 평전 속 푸코가 한 권씩 책을 내는 족족 평전 밖의 syo가 그 책을 읽는 전략을 수립했다. 그래서 오늘의 푸코.
푸코 가문이 아버지에서 아들로 대를 이어 모든 아들들에게 폴이라는 똑같은 이름을 붙인 것은 아마도 세월을 거역하기 위한 것인 듯하다. 할아버지 폴 푸코, 아버지 폴 푸코, 아들 폴 푸코……. 그러나 푸코 부인은 이 전통에 완전히 굴복하기를 원치 않았다. 그의 아들 이름은 폴 푸코이어야만 한다. 그건 좋다! 그러나 그녀는 거기에 짧은 줄을 하나 긋고 두번째 이름인 미셸을 집어넣었다. 호적이나 학적부에는 폴이라고 적힐 것이다. 그녀는 그정도에서 만족했다. 정작 이해당사자는 어떻게 생각했는가? 행정서류와는 정반대로 그는 미셸 하나만을 선택했다. 푸코 부인에게 있어서 그는 항상 폴-미셸이었다. 죽기 얼마 전에 아들의 어린 시절을 회상할 때에도 그녀가 부른 것은 언제나 폴-미셸이었다. 오늘날까지도 그의 가족들은 아직 그를 폴-미셸이라고 부른다. 왜 그는 이름을 바꿨을까? "그의 이니셜이 P-M F로 되어서 '피에르 망데스 프랑스'(1907~1982. 프랑스의 좌파 정치인. 총리 겸 외무장관을 지냄)와 혼동될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라고 푸코 부인은 말했다. 그녀의 아들이 그렇게 설명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친구들에게 그는 전혀 다르게 설명했다. 청소년 시절에 자신이 그토록 증오했던 아버지의 이름을 물려받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다.
_ 디디에 에리봉, 『미셸 푸코, 1926~1984』, 12-13쪽
어려서부터 푸코는 아버지가 싫었다. 그런 푸코가 아버지도 싫었다. 장남 녀석이 자기 뒤를 이어(그리고 자기 아버지와 장인의 뒤를 이어) 의사가 되기를 바랐지만, 장래 대머리가 될 아들 녀석은 의사의 길은 거들떠도 보지 않고 역사학인지 철학인지 문과애들이나 하는 걸 하겠다고 설쳐댄다. 옛말에 어른 말씀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고 그랬거늘, 내 말을 들었으면 버젓이 의사가 되었을 텐데 끝내 지 맘대로 하니까 고작 생전에는 전 세계적으로 유명했고 사후에는 철학사에서 이름이 삭제되지 않을 전설적인 인물이 되어 후대까지 칭송이나 받고야 만 것이지! 푸코도 만만치 않았다. 가족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이름 폴(할아버지도 폴 푸코, 아버지도 폴 푸코, 하마터면 그도 역시 폴 푸코)을 버리고, 엄마가 만들어준 이름 ‘폴-미셸’ 중 미셸만을 추출하여 미셸 푸코로서의 삶을 선택한다.
현재 푸코는 프랑스를 떠나 스웨덴으로 갈 준비를 하고 있다. 푸코의 다음 소식은 다음 이 시간에…….
--- 읽은 ---
8. 한동일의 공부법
한동일 지음 / EBS BOOKS / 2020
사실 공부를 잘하는 비법은 이미 다 밝혀졌다. 키보드만 몇 번 뚱땅뚱땅 두드리면 우리는 즉시 그 비법들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에, 이제는 비법秘法이라고 부르기조차 민망하다. 그러니까 학이시습지, 혹은 그 이전부터 시작되어 세상에 전개된 무수한 공부법 책들은 거진 다 같은 이야기들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이것들을 굵직한 몇 개만 남겨놓고 다 죽여야 하는가? 뭐 그래도 좋겠지만 그러지 않아도 나쁠 것은 없다. 비슷한 영양소를 함유한 요리의 종류가 다양해지는 건, 맛의 스펙트럼이 넓어져 먹는 이 각자의 취향을 바투 겨냥하는 건, 널리 인간에게 이로운 일이니까. 그리고 이 책은 따뜻한 라틴어 맛이 난다. 처음 먹어보는 맛이다.
앞으로 20년간 무엇을 할까요? 가난했던 소년 시절 제 기도는 ‘하느님, 제게 하루 세끼의 정갈한 식사를 주십시오’였습니다. 지금은 여러 면에서 부유한 사람이 됐습니다. 요즘 기도는 ‘그렇게 가난한 사람을 이렇게 부유한 사람으로 만들어주셨으니 이제 제가 무엇을 해야 할지 가르쳐주십시오’입니다. 앞으로 얼마나 살지 모르지만, 살아 있는 동안 제가 해야 할 일을 하려 합니다. 모든 인간은 ‘자기 나름대로 삽니다suo more vivere, 수오 모레 비베레.’ 저도 저의 길을 가려고 합니다. 이제까지 해왔던 공부는 긴 인생에서 최선을 다한 하나의 매듭이었고, 저의 진짜 공부는 지금부터 시작입니다. 다시 공부하는 노동자로 살고자 합니다.
_ 한동일, 『한동일의 공부법』
9. 여행이 은유하는 순간들
김윤성 지음 / 푸른향기 / 2020
제목보다 아름다운 꼭지는 없었다. 여행으로 은유할 여력이 없어 은유로 여행하는 사람은 배가 아프다.
여행에서 만나는 예기치 못한 색깔은 작은 팔레트에 머물고 있는 내가 가진 색깔의 한계를 자주 넘어서곤 했다. 그때마다 왜 여행을 해야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여행을 통해 색깔의 한계뿐만 아니라, 스스로 알지 못했던 한계들이 하나하나 무너지는 경험을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_ 김윤성, 『여행이 은유하는 순간들』
10. 아무튼, 떡볶이
요조 (Yozoh) 지음 / 위고 / 2019
머나먼 하늘 저 높은 곳 어딘가에 영혼의 커다란 바위가 있어서 위대한 누군가가 그 바위를 쪼아 돌멩이를 만들어 세상에 뿌린다고 상상해보았다. 아마도 요조 선생님과 syo는 같은 정을 맞고 튕겨나간 돌조각 몇 개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다른 책에서, 미루고 미루다 겨우 써냈으나 이게 독후감이냐는 평을 받는 글쓰기의 슬픔을 토로했을 때, syo는 처음 그것을 느꼈다. 그 순간, 쓴 사람이 이 사람이고 읽는 사람이 나라면, 뭐든 읽기에 괜찮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했고, 꾸준히 그 생각을 실천하고 있다. 그리고 이 책을 통해 귀여움을 대하는 요조 선생님의 마음가짐을 접하며, syo는 다시금 영혼의 안정감을 느낀다. 아, 귀여움, 그것을 빼 버린다면 우리 우주는 그냥 한 줌만 남는 것이다.
이렇게 작은 인간의 눈동자와 입술과 손가락을 보면서 나는 귀여움의 공포에 대해서 생각했다. 나는 진짜 무서운 것은 귀여움이라고 생각한다. 그걸 이길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악마가 시커멓고 꼬리가 길고 눈알이 빨갛고 이빨이 뾰족하기 때문에 세상이 아직 안전한 것이다. 제하 같은 애가 악마였다면 세상은 진즉에 끝났어,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맥주를 벌컥벌컥 마셨다.
_ 요조, 『아무튼, 떡볶이』
11. 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
오연호 지음 / 오마이북 / 2014
행복은 사적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적 개념을 형성하는 것이 사적인 것들만은 아니다. 어떤 것이 행복인지를 정의하는 것은 개인의 영역이지만, 그가 정의한 것들을 제공할 능력과 의무가 있는 것들은 공공의 영역에 속할 수도 있다. 그래서 논의의 장은 여러 곳에서 펼쳐져야 한다. 행복이 무엇인지를 정의하는 개인의 공간, 개인이 정의한 행복을 위해 사회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정하는 공적 공간, 그리고 그렇게 정해진 것들을 서로에게 주고받기 위해 노력해야 할 개인과 사회 가운데 쯤에 있는 제3의 공간. 길은 멀고, 날은 춥다.
당신도 행복하고 싶습니까? 그러면 당신의 나라를, 당신이 속한 공동체를 기본이 되어 있는 사회로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까. 대한민국을 행복사회로 만들기 위해, 동창회에 나가 "나는 웨이터다, 우리 아들은 열쇠 수리공이다"라고 당당하게 말하기 위해, 부당한 실직과 불안한 노후에 대한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우리는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까.
_ 오연호, 『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
12. 도쿄에 왔지만
타카기 나오코 지음 / 고현진 옮김 / artePOP(아르테팝) / 2017
작정하고 도쿄에 왔지만 제대로 되는 일은 없었어요.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건가 후회한 적도 있었어요. 하지만 제가 도쿄에 온 것으로 제 인생도, 저와 인연을 맺은 사람의 인생도, 이렇게 조금씩 함께 변해가는 거겠죠….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조금 더 이 도시에서 열심히 살아 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_ 타카기 나오코, 『도쿄에 왔지만』
서울에 오는데 어떤 작정 같은 것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겨냥하던 학교가 대전에 있거나 포항에 있거나 했기 때문에, 대학을 가면 대구를 떠날 거라는 건 당연했지만 도착지가 서울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었다. 대전과 포항을 차례로 실패하자 syo는 재수에 뜻을 품었고, 모교의 현수막을 위해 가지도 않을 서울의 어느 학교, 가장 만만하다 싶었던 과에 뜻없이 지원했다. 그때였다. 그러니까 이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겠는데, 그때 서울에 처음 간 것은 아니었지만, 그때 서울에 처음 간 것이었다. 2004년 이맘때였던 것 같고, 그 학교 기숙사는 이상하게 추웠지만 그래도 나는 서울이 그냥 좋았다.
붙어도 가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때문인지 편하게 마음먹은 면접은 잘 진행되었고 결과도 좋았다. syo는 학교 현수막에 한 줄을 추가했고(공부 못하는 학교라 두 줄이 다였다), 그 공로로 100만원을 받으며 졸업했다. 그리고 재수학원에 들어갔고, 실패했다. 결국은 대전도 포항도 가지 못했다. 뜻밖의 서울행이었다. 기숙사가 추웠던 그 학교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는 서울에 간다는 게 그냥 좋았다.
작정하고 서울에 오지 않은 syo는 별로 작정하고 살지 않았다. 그냥 살아지는 대로 살았고, 읽고 싶은 것을 읽었으며,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을 다 사랑했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건가 후회한 적은 없었고, 그렇게 살지 말았어야 했는데 후회하는 대목은 적지 않다. 나는 서울을 좋아하지만, 서울에서 고생한 어떤 사람들처럼 차가운 도시의 이면을 핥아본 적도 없고, 개인들이 싸락눈처럼 저마다 흩날리며 외로워한다는 서울의 인간관계에 허망해 해본 적도 없다. 어디서 살았건 높은 확률로 나는 지금처럼 이렇게 살았을 것이지만, 나는 서울이 그냥 좋았고, 지금도 서울이 그냥 좋다. 이유는 아직도 잘 모른다. 그냥 점점 넓어지는 서울의 어느 한 귀퉁이에서, 불안과 무덤덤함 사이에서 널을 뛰면서,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다.
--- 읽는 ---
미셸 푸코, 1926~1984 / 디디에 에리봉
나를 위한 현대철학 사용법 / 다카다 아키노리
지금, 또 혐오하셨네요 / 박민영
베르그송 / 황수영
정희진처럼 읽기 / 정희진
홍차, 너무나 영국적인 / 박영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