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 full revolution
첫 페이지에 벌써 밖은 첫눈이었다. 나리는 것과 나리는 것 사이에서 겨울이 희게 익는 풍경. 겨울의 시작과 한 해의 시작을 맞대어 놓는 이들은 횡단보도를 건너다 아득히 입을 맞춘다. 마음의 어는점 녹는점은 알 수가 없어서 여름에 얼었다 겨울에 녹기도 하는데 그 이치도 아득하다. 눈을 눈으로 완성하는 것은 다름아닌 눈 맞는 이의 마음. 창밖에 하얗게 자맥질치는 저 눈은 완성된 눈일까 완성하는 눈일까. 눈이 어떤 완성이라면 그것은 눈 맞는 이의 마음에 첫눈일까 끝눈일까. 겨울은 멀리 가도 지구가 태양을 도는 거리만큼 가지는 못하고 자꾸만 자꾸만 돌아오겠는데, 눈과 함께 돌아오겠는데, 창밖에도 나리고 창 안에도 나리는, 당신은 첫눈입니까.
오래 참아서 뼈가 다 부서진 말
누군가 어렵게 꺼낸다
끝까지 간 것의 모습은 희고 또 희다
종내 글썽이는 마음아 너는,
_ 이규리, <당신은 첫눈입니까> 부분
--- 읽은 ---
246. 언젠가 설명이 필요한 밤
안녕하신가영 지음 / 빌리버튼 / 2017
‘노래연습장’에 정말 노래 연습하러 다니는 사람처럼, 50번 가면 50번 부르는 노래들이 있었다. 우리의 노래방행은 오늘과 그저께가 비슷하거나 달라도 한두 곡이 다른 ‘차이와 반복’이었다. 그렇게 50번을 불러도 나는 노래 가사를 모른다. 50번을 부르다 보니 나도 모르게 외워졌는데도 그 노래가 어떤 가사인지 몰라서, 흥얼거리다가 내 입에서 나오는 가사를 내가 듣고 와, 이 노래 가사 쩌는데! 하고 놀라는 일이 잦다. 이러니 한두 번 듣고 지나치는 수많은 노래들 속 가사야 오죽할까.
가창력에서 중요한 건 ‘가창’이지 ‘력’이 아니라는 컨셉으로 하는 노래들은 유독 가사가 아름답고 먹먹한데, 가사를 못 듣는 인간은 그런 노래를 충분히 듣지 못하고 서른을 먹었고 곧 마흔 먹게 생겼다. 나이가 드니 이제야 가사가 좀 들린다. 플레이리스트에 ‘안녕하신가영’의 곡 몇 개가 안착했다. 노래로 기억할 것이다.
당시에는 그 사람에게 바보 같은 얼굴이라며 웃어 넘겼지만, 어느 날 내가 그 사람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을 때 비로소 알게 된다. 나를 참 많이 좋아해줬구나.
사랑이 가끔 이어달리기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래도 계속 달려야 하는 거겠지.
_ 안녕하신가영, 『언젠가 설명이 필요한 밤』
247. 혼자 있기 좋은 방
우지현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8
그림에 대해 절대적으로 과문하긴 하지만 상대적으로 많이 아는 애매하고도 어쩐지 구슬픈 입장의 syo. 이 책의 정체가 ‘그림 에세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속에 든 그림 중 4~6할은 아는 녀석들일 거라고(대체로 그랬으므로) 생각했는데 웬걸, 생전 처음 듣는 이름의 작가가 그린 생전 처음 보는 그림이 잔뜩잔뜩 들어 있어서 놀랐고 신났다. 그리고 다시 다 까먹었다. 으하하하, 이 맛에 책 읽지.
꼭지마다 정해진 주제의 에세이와 그에 어울리는 그림들, 그 그림과 그걸 그린 작가들에 대한 이야기가 버무려져 있는데, 어떤 대목은 너무 좋았고 어떤 대목은 밍숭맹숭했다. 지금 내 감정과 그 꼭지 주제의 싱크로율이 어느 정도냐에 따라 감흥의 정도가 달라진 것 같다. 하고보니 당연한 이야기군.
에세이 내용과 그림이 얼마나 착 달라붙는지에 대한 평가는 독자마다 다를 수 있겠다. 그렇지만 전체적으로 썩 좋은 책 같았고, 그림 에세이라는 유형의 글쓰기에 도전해보고 싶은 욕심도 생겼다. 그리고 그 욕심조차 다시 다 까먹을 것이다. 으하하하, 이 맛에…….
슬픔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따라 한 인간의 삶이 결정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혼자, 마음의 방에 머물 때에만 해결될 수 있는 일이 있다. 구겨진 마음을 펴고, 슬픔을 처리하고, 억압으로부터 벗어나는 일. 내 삶의 가치를 재고하고, 의미를 묻고, 또 내면을 견고하게 구축하는 일.
혼자를 택한다는 건 슬픔을 외면하지 않고 마주하겠다는 용기이다. 하나의 독립된 인간으로서 내 인생을 책임지겠다는 각오이며, 스스로를 이해하고 용서하고 사랑하며 살아가겠다는 선언이다. 혹여 주변인들을 챙기느라 자기 자신을 외롭게 한 것은 아닌지, 세상의 눈치를 살피느라 정작 나를 불편하게 만든 것은 아닌지 진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에게는 자신의 내면을 탐색하고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그 과정이 분명하고 뚜렷하지 않을지라도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고 불안해하지 말고 혼자 있어볼 것. 삶의 진실은 거기 있으니 말이다. 모든 사람과 잘 지내는 것보다 나와 잘 지내는 게 중요하다.
_ 우지현, 『혼자 있기 좋은 방』
248. 엄마의 뜰
김살로메 지음 / 문학의문학 / 2020
나는 아름다운 문장을 믿는다. 아름다움이란 별처럼 많고 별자리처럼 각자의 이야기가 있으니 나는 많고 각자인 것들을 믿는 셈이다. 김살로메 작가는 주제가 글의 본질이라 하지만 그것들에 수없이 속아 넘어가 본 나는 차라리 아름다움을 믿는다. 사람의 삶이라는 게 많이 다를 것 같으면서도 어슷비슷해서, 우리는 큰 틀에서 다들 비슷하게 살며 비슷하게 울고 웃다가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해서 톨스토이처럼 말해 보자면, 사연과 경험은 서로 닮았지만 문장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아름답다. 내가 이 책을 읽고, 나도 나도 했다면 그것은 우리가 닮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나와 닮은 수많은 책 가운데서 이 책이 내게 특별한 울림을 안겼다면 그것은 이 책의 문장이 자기만의 이유로 아름다웠기 때문이겠지.
꽃 진 그 시간을 최상의 것으로 추억하기 위해 저마다 길을 냅니다. 구구절절 말을 잇긴 했지만, 실상 떨어진 꽃잎은 해석이 필요치 않습니다. 이해되기 전에 전달되는 그 무엇이기 때문입니다. 실존의 상처로 단련된 꽃 무덤은 그 자체가 사유의 통로가 됩니다. 필연으로 떨어져 꽃길을 내고, 깊이 내려가 진물을 이루는 모든 것은 생의 이면입니다. 견고한 잉태와 단단한 도약을 위한 전초전입니다. 절절하게 떨어져 본 꽃잎일수록 절실하게 꽃 피우는 자양분이 됩니다. 꽃 진 자리는 그렇게 자신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추락 없는 꽃잎이 어디 있으면 짓무름 없는 성장이 가당키나 할까요.
_ 김살로메, 『엄마의 뜰』
249. 사랑의 기술
에리히 프롬 지음 / 문예출판사 / 2006
왕년에는 이 책 참 좋아했는데 이젠 이걸로 사랑의 기술을 배웠다가는 큰일나겠다.
문제 1. 잘 나가다가 핵심에만 도착하면 갑작스레 뜬구름을 잡는다. 사랑을 제외한 다른 이야기들은 콘크리트로 반석을 만들듯이 단단하게 마련해놓고는, 정작 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흐물거려서 결국 콘크리트 위에 쏟아놓은 달걀 같다.
문제 2. 이분법적 사고방식에 찌들어서 도무지 헤어나오지를 못한다.
문제 3. ‘모성애’에 대해 말할라치면 반드시 그 문장 앞에 ‘오오오,’랄지, ‘거룩하도다,’ 를 붙여줘야 할 것만 같은 어투가 된다.
문제 4. 이런 대목을 보면,
아마도 프로이트의 극단적인 가부장주의 때문에 그는 성욕을 본질적으로 남성적이라고 가정하게 되었고 따라서 독특한 여성의 성욕을 무시하게 되었다.
그는 <성의 이론에 대한 세 가지 공헌>에서 이 사상을 전개하면서 리비도(libido)는 남성 안에 있는 리비도든 여성 안에 있는 리비도든 관계없이 원칙적으로 '남성적 성격'을 가졌다고 말하기도 한다. 어린 소년 또한 거세된 '남성적 성격'을 가졌다고 말한다. 또한 소년은 거세된 남성으로서 여성을 경험하고, 여성 자신은 남성 성기의 상실에 대해 여러 가지 보상을 구하고 있다는 프로이트의 이론에서도 똑같은 사상이 합리적 형태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여성은 거세된 남성이 아니며 여자의 성욕은 '남성적 성질'을 가진 것이 아니라 여성 특유의 것이다.
양성 간의 성적 매력은 부분적으로 긴장을 제거하려는 욕구에 그 동기가 있다. 중요한 것은 이성의 극과 합일하려는 욕구이다. 사실상 색정적 매력은 결코 성적 매력에 의해서만 표현되지는 않는다. '성적 기능'과 마찬가지로 '성격'에도 남자다움과 여자다움이 있다. 남성적 성격은 침투, 지도, 활동, 훈련, 모험이라는 성질을 가진 것으로 정의된다. 여성적 성격은 생산적인 수용성, 보호, 현실주의, 인내력, 어머니다움으로 정의된다. (각 개인에게는 두 성격이 혼합되어 있으나 '남성' 또는 '여성'의 성과 관련된 것이 우위를 차지하고 있을 뿐임을 항상 명심해야 한다.)
_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56-57쪽
마치 ‘노예제를 주장한 사람은 노예는 거세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주인들에게만 인간성이 있고 노예는 인간이 아니라고 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틀렸다. 그는 ’인종‘의 차이를 무시한 것이다. 노예는 인간성이 거세된 것이 아니며, 단지 노예성은 어떤 인종이 지닌 특수한 성격일 뿐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는 그 두 성격이 혼합되어 있는 것이다.’ 라는 말을 듣고 있는 것 같다. 표범의 흉폭함을 고발하는 늑대를 보는 기분이다.
이 책은 이제 버려도 될 것 같다. 바로 아래에 등장하는 이런 대목을 보면 프롬 역시 그렇게 생각하는 듯하다.
실제로 그의 시대에는 프로이트의 이론은 도전적이고 혁명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1900년대에 타당한 것이라도 50년 이상이 지난 후에까지 타당한 것일 수는 없다. 성적인 관습이 매우 변했기 때문에 프로이트의 이론은 서양의 중류 계급에는 이미 충격적인 것이 아니며, 전통적인 분석가가 오늘날도 프로이트의 성 이론을 옹호하는 것을 용감하게 급진적인 일로 생각한다면, 이것은 돈키호테적 급진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_ 같은 책, 57-58쪽
그러니까 이건 자기실현적 예언 뭐 그런 건가.
250. 성의 역사 1 : 지식의 의지
미셸 푸코 지음 / 이규현 옮김 / 2010
아직 12월은 많이 남았고, 내가 무섭게 마음만 먹는다면.
내가 제기하려고 하는 물음은 '왜 우리가 억압받는가'가 아니라, '왜 우리가 우리의 가까운 과거와 현재 그리고 우리 자신에 대해 그토록 커다란 열정과 강렬한 원한을 품고서 스스로 억압받고 있다고 말하는가'이다. 어떤 나선형 경로를 통해 우리는 성을 명확한 말로 표명하고 성의 가장 적나라한 실체를 드러내려 애쓰고 성의 힘과 영향을 적극적으로 확언하면서도, 성이 부정된다고 단언하고 우리가 성을 감춘다는 것을 보란 듯이 지적하고 우리가 성을 침묵으로 몰아간다고 말하기에 이르렀을까?
_ 미셸 푸코, 『성의 역사1 : 지식의 의지』
--- 읽는 ---
성호사설을 읽다 / 설흔
물리의 정석: 고전 역학 편 / 레너드 서스킨드, 조지 라보프스키
당신은 첫눈입니까 / 이규리
다정한 매일매일 / 백수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