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쪽만 읽고 쓰는 허무맹랑 푸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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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푸코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 푸코와, 푸코를 설명하는 이런저런 개론서와, 푸코와 관련없는 이런저런 다른 책들과, 혹은 30년 넘게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살아온 syo의 허튼 생각들이 버무려진 이야기라고 보는 게 옳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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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 1장은 채 스무 페이지가 안 되는데도, 서문 역할을 하는 글이 다 그렇듯이 이 부분을 잘만 조지면 뒤는 안 읽어도 읽은 척을 할 수 있게끔 농밀한 내용을 품고 있습니다. 요 20쪽을 정리하면서 드는 걱정은, 남은 수백 쪽에 관한 페이퍼를 쓸 때도 이만한 분량이 나올 것인가, 그리고 이만한 열정이 남아있을 것인가 하는 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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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 또한 그랬던 것 같아요. 듣자니, 1976년 발간된 성의 역사 시리즈 제1권 뒤표지에는, 뒤이어 출간될 나머지 5권의 제목이 쭈욱 적혀 있었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두 권(혹은 세 권)이 더 나오고 말았을 뿐입니다. 심지어 그 두 권 역시 애초의 기획과는 방향이 많이 달라져서, 성의 역사 1권과 2권 사이에 푸코 사상의 주제적 도약이 있었다고 보는 연구자들이 많지요. 푸코가 쓴 책을 주욱 늘어놓고 보면, 『성의 역사1 : 지식의 의지』는 어쩐지 『감시와 처벌 2』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 책은 소위 말하는 ‘권력의 계보학’ 시기를 완결하는 작품으로써 사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의미의 역사책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계보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모든 철학책은 곧 역사책일 수밖에 없고(역사책이어야 하고), 동시에 모든 역사책은 철학책이어야 하는(철학책일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 이 책을 또 역사책이 아니라고 단정하기도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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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이 책은 성에 대한 책이지만 성에 대한 책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니, 무슨 이런 말 같지도 않은 말을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니…….
주제는 권력입니다. 영원한 주제는 권력-지식이죠. 그리고 이 책에서는 특히 권력-담론-쾌락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성이 아니라 다른 뭔가가 푸코의 눈에 띄었다면(이전에 광기가 그랬고 감옥이 그랬듯이), 푸코는 그걸로도 해냈을 겁니다. 성이 아니어도 좋았어요. 그러나 성이어서 좋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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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질문에서 시작합니다.
”내가 제기하려고 하는 물음은 ‘왜 우리가 억압받는가’가 아니라, ‘왜 우리가 우리의 가까운 과거와 현재 그리고 우리 자신에 대해 그토록 커다란 열정과 강렬한 원한을 품고서 스스로 억압받고 있다고 말하는가’이다. (16)
그러니까 푸코가 겨냥하는 건 이런 것들이고, 또 이건 아니네요.
이전까지 자유롭게 행해지고 말해지던 성이 근대에 이르러 억압되었다는 담론의,
- 매력(O)
- 유독성(O)
- 진실 여부(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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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이란 대체 무엇일까요? 우리 사전은 ‘권력’이라는 단어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권력 : 명사. 남을 복종시키거나 지배할 수 있는 공인된 권리와 힘.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권력이라는 말을 쓸 때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주로 ‘남을 억눌러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게 하거나, 하기 싫은 일을 하도록 강제하는 힘’ 정도의 의미로 유통되는 것 같아요. 이런 정의는 최소한 두 가지 맥락에서 권력의 특성을 일부분만 설명하는 한계를 지닙니다. 첫째, 어쨌든 주체의 의사와 반대 방향으로 끌고 가는 것만이 권력인 것처럼 보이게 합니다. 둘째, 권력을 명사적 객체, 그러니까 소유했다가 잃었다가 되찾았다가 할 수 있는 어떤 덩어리처럼 보이게 만듭니다. 권력의 실체가 저 두 가지 시각과 전적으로 다르다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문맥에서만 드러나는 권력의 부분적 특성을 마치 전체상인 것처럼 오해하게 만든다는 거죠. 이런 오해가 낳는 문제점은 실제로 권력인 것을 권력이 아닌 것처럼 보이게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권력을 행사하는 자를 감추어 주는 방식으로 자기도 모르게 권력에 복무하는 결과를 만들 위험도 있구요.
푸코는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권력의 저 좁은 정의가 공식적으로 숨기(려 하)는, 권력의 다른 모습을 드러내는 작업을 오래도록 해왔습니다. 그래서 조금 더 복잡하고, 모호하며, 추상적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투명하다고 할 수 있을 권력관을 주장합니다.
푸코는 권력을 소유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보지 않으며, 사회 속에서 촘촘히 연결된 그물망으로 파악한다.
_ 오생근, 『미셸 푸코와 현대성』
푸코는 권력을 소유물이 아닌 하나의 전략, 즉 특정한 사회적 맥락에서 한 개인(혹은 집단)이 수행하는 행위로 보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 권력이란 획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행해지는 것이다. 따라서 권력은 국가나 정부와 같은 특수한 제도에 의해 점유되어 있다기보다는 사회 전체에 퍼져 있는 관계의 그물망이다.
_ 사라 밀스, 『현재의 역사가 미셸 푸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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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갑자기 장(場, Field)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쇳가루를 올려놓은 책받침 아래에서 자석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면 쇳가루들이 특정한 방향으로 배열되는 꼴을 볼 수 있습니다. 자석 주변에 분포하는 자기의 장이 하는 일입니다. 나침반은 지구가 하나의 커다란 자석이라는 점을 이용한 물건입니다. 북극 가까운 곳에 자북磁北이 있습니다. 정확히 북극과 일치하진 않구요. 자북은 지구라는 막대자석의 S극입니다. 따라서 나침반 바늘의 N극은 서로 다른 극이 당기는 원리에 따라 자북을 가리킵니다. 지구자기장이 하는 일입니다.
지구가 사과를 당겨서 사과가 땅에 떨어집니다. 중력입니다. 중력은 질량을 가진 물체가 질량을 가진 다른 물체를 끌어당기는 힘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 있다고 하면, 그 공간에는 힘이랄 게 없습니다. 그러다 어떤 이유에선지 뿅 하고 공간 한복판에 지구가 나타났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 공간에는 눈에는 보이지 않는 중력장이 함께 뿅 하고 생깁니다. 지구로 인한 중력장은, 그 공간의 특정 위치에 질량을 가진 물체가 들어섰을 때 그 물체가 어느 방향으로 어떤 크기의 힘을 받을지를 써서 그 위치에다 붙여놓은 포스트잇과 유사합니다. 예를 들어, 모눈종이 한복판에 있는 지구에서 북쪽으로 한 칸 떨어진 곳에 질량 “1”의 물체가 놓였을 때, 걔가 받는 힘이 남쪽 방향(지구가 당기니까 지구가 있는 쪽)으로 “4”의 크기라고 한다면, 지구에서 서쪽으로 두 칸 떨어진 곳에 질량 “1“의 물체가 놓이면 걔는 동쪽 방향(역시 지구가 있는 쪽)에서 ”1“ 크기만큼의 힘으로 자기를 당기고 있다고 느낍니다. 그런 식을 모눈종이의 모든 칸에(심지어 칸과 칸 사이에) 그 위치에서 물체가 받을 힘의 방향과 크기가 써진 포스트잇을 붙이는 거죠. 대충 이런 걸 (고전역학에서의) 중력장이라고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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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장이라는 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장 개념으로서의 권력은 설명력이 커서 좋습니다.
권력은 누군가는 때리고 누군가는 얻어맞는 일방적인 힘의 소유관계가 아니라, 주체 간의 상호작용이 본질이라는 점이 쉽게 보입니다. 지구가 가운데 놓인 모눈종이 위의 한 점에 사과 한 알이 나타나면, 그 공간에는 사과로 인한 중력장 역시 형성됩니다. 그 두 중력장이 합쳐져서 그 공간의 새로운 중력지형을 만듭니다. 지구가 사과를 당기는 것처럼 사과도 지구를 당긴다는 사실을 감추지 않아도 되는 그림입니다. 그리고, 힘이 다양한 방향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기 쉽습니다. 중력은 당기기만 하지만 전자기력은 극성에 따라 밀기도 하고 당기기도 하듯, 장에서의 권력은 장 위에 놓인 주체를 밀 수도 있고 당길 수도 있고 어떨 땐 회전시킬 수도 있겠구나- 하는 추측도 해볼 수 있습니다. 검열, 금지, 부인, 침묵의 방향으로 작동하는 것 이외의 여러 현상 속에 숨은 권력의 작용을 엿볼 수 있게 되지요.
그런 점에서 ‘억압의 가설’은 비록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외치지만, 그 주장 자체가 억압-해방이라는 하나의 담론을 이루면서, 억압 이외의 방식으로 작동하는 기존 권력을 유지하는 하나의 장치로 작동할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성을 긍정하는가 부정하는가, 금기를 내세우는가 허용을 명확히 표명하는가, 성의 중요성을 인정하는가 성의 효력을 부인하는가, 성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하는 말을 억제하는가 그렇지 않은가를 아는 것이라기보다는, 성에 관해 말한다는 사실, 성에 관해 말하는 사람, 성에 관해 말하는 장소와 관점, 성에 관해 말하기를 부추기고 말한 내용을 수집하고 유포시키는 여러 제도, 요컨대 성에 관한 전반적 "담론현상"과 "담론화"를 고찰하는 것이 (적어도 최초의 논의에서는) 요점이다. 또한 어떤 형태로, 어떤 경로를 통해, 어떤 담론을 따라 권력이 가장 미묘하고 가장 개인적인 행동에까지 이르는가, 어떤 노정을 통해 권력이 희귀하거나 거의 감지할 수 없는 욕망의 형태에 도달하는가, 어떻게 권력이 일상의 쾌락에 침투하여 일상의 쾌락을 통제하는가 ― 거부, 봉쇄, 자격 박탈뿐만 아니라 선동과 강화일 수도 있는 결과와 함께 이 모든 것을, 요컨대 "권력의 다형적 기술"을 아는 것이 중요한 쟁점으로 떠오르게 된다. (18-19)
거부, 봉쇄, 박탈이 아니라 선동과 강화의 방식으로 권력이 일상에 침투하는 예를 뒤따르는 장들에서 확인할 수 있겠습니다. 성이 억압된 적이 없다는 것도 아니고, 권력에 억압적인 특성이 없다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권력 = 억압’이라는 마음속 등식은 생각보다 큰 힘이 있습니다. 다양한 담론 영역에서 내 표적으로 쏟아지는 권력의 다양한 촉수를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물론이고, 내가 하는 행위 역시 권력적 행동임을 눈치채지 못하게 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몇 개 이상의 미시권력장 안에 발을 들여놓은 채 살아야 하고, 그 안에서 우리가 의식하건 그렇지 않건 권력행동을 하게 되며, 때로 인간이 이기적인 유전자의 숙주에 불과해 보이는 것처럼, 주체는 권력-지식의 목적을 위해 동작하는 기계가 되기도 합니다. 그 무시무시한 일을 위해, 권력은 단지 부정적 양태의 기술만을 제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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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내가 "억압의 가설"이라고 부르게 될 것과 관련하여 세 가지 주목할 만한 의혹이 생겨날 수 있다. 첫 번째 의혹. 성의 억압은 정말로 자명한 역사적 사실일까? 맨 먼저 시선에 드러나고 따라서 하나의 가설을 출발점으로 제시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바로 성에 대한 억압체제의 강조일까, 아니면 17세기부터 이루어진 그러한 체제의 확립일까? 이것은 본질적으로 역사와 관계가 있는 문제이다. 두 번째 의혹. 권력의 메커니즘, 특히 우리 사회와 같은 곳에서 작용하는 권력의 메커니즘은 요컨대 억압의 범주에 속하는 것일까? 금지, 검열, 부인은 아마 모든 사회에서, 그리고 확실히 우리 사회에서 권력이 일반적으로 행사되는 양상일까? 이것은 역사-이론적 문제이다. 끝으로 세 번째 의혹. 억압을 겨냥하는 비판적 담론은 그때까지 이의없이 가능한 권력 메커니즘의 통로를 차단하게 되는 것일까, 아니면 "억압"이라고 부르면서 비난하는 (그리고 아마 왜곡할) 것과 동일한 역사적 망(網)의 일부분을 이루는 것일까? 억압의 시대와 억압의 비판적 분석 사이에 정말로 역사적 단절이 존재하는 것일까? 이것은 역사-정치적 문제이다. (17-18쪽)
이후에 이어지는 여러 장들에서, 푸코는 스스로 제기한 이 세 가지 질문에 대답하려 합니다.
1) 성의 억압이 자명한가?
2) 금지, 검열, 부인과 같은 억압적 방식이 권력의 일반적 메커니즘이라 할 수 있는가?
3) 억압을 비판하는 담론에 권력을 위해 복무하는 지점이 있지는 않은가?
차차 알아보겠습니다. 이 장에서는 저기 위에서 최초로 언급한 질문, ”왜 우리가 스스로 억압받고 있다고 말하는가“에 대한 답을 제시합니다. 아래와 같습니다.
근대에 이르러 성이 억압되었다는 담론은 분명히 계속되고 있다. 이는 아마 주장하기가 쉽기 때문일 것이다. 이 담론은 역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엄숙하게 보증되고, 누구나 수백 년에 걸친 대담하고 자유로운 표현의 시기에 뒤이어 17세기에 억압의 시대가 출현했다고 하면서 이 담론이 자본주의의 발전과 시기를 같이한다고 생각한다. 이 담론은 부르주아 질서와 일체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성과 성에 관한 타박의 짧은 역사가 곧장 생산양식의 엄숙한 역사로 변하고, 성에 대한 경시 현상이 사라져 버린다. 성을 설명하려는 논리가 이 사실 자체로부터 점점 구체화되어 간다. 즉, 성을 그토록 엄격하게 억압하는 이유는 성이 전반적이고 집약적인 노동력의 동원과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노동력이 조직적으로 착취되는 시대에 노동력의 재생산을 허용하는 최소한으로 한정된 쾌락 이외에 다른 쾌락 때문에 노동력이 허비되는 것을 용인할 수 있었을까? 성과 성의 영향은 아마 읽어내기가 쉽지 않을 터인 반면에, 이것들에 대한 억압은 이처럼 표현될 수 있는 만큼 쉽게 분석된다. 그리고 성에 관한 명분, 가령 성의 자유뿐만 아니라 성에 관한 인식과 성에 관해 말할 권리라는 명분은 아주 당연히 정치적 명분의 존중과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성 또한 미래의 전망 속으로 이끌려 들어간다. 아마 성에 관한 이야기를 그토록 막강한 대부와도 같은 것으로 만들려는 그토록 많은 대비책에는 성을 부끄러워하는 아주 오랜 태도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을까 자문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마치 그러한 담론이 말해지거나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이와 같이 서로의 가치를 높이기라도 해야 하는 듯하다.
그러나 성과 권력의 관계를 억압적인 것으로 말하는 것이 우리에게 그토록 만족감을 주게 되는 데에는 아마 또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인데, 그것은 그렇게 주장함으로써 이익이라고 할 만한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이다. 성이 억압된다면, 다시 말해서 금지와 부재와 침묵에 귀착할 수밖에 없다면, 성에 관해 말하고 성의 억압에 관해 말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대단한 위반의 몸짓이 될 수 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어느 정도 권력에 대항하여 권력 밖에서 법을 위반하고 미래의 자유를 어느 정도 예견하는 입장에 놓이게 된다. 오늘날 성에 관해 말할 때의 엄숙함은 이로부터 연유된다. 최초의 인구통계학자들과 19세기의 정신의학자들은 성을 환기할 필요가 있을 때, 몹시 저급하고 쓸데없는 주제에 독자의 관심을 붙잡아두는 것에 대해 용서를 구해야 했다. 이와는 정반대로 우리는 수십 년 전부터 성에 관해 이야기할 때 거의 언제나 약간 당당한 태도, 즉 기존의 질서에 도전한다는 의식, 스스로 전복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을 표시하는 어조, 현재를 넘어서서 미래를 앞당기려는 조급한 열정을 내보인다. 반항, 약속된 자유, 가까이 다가온 또 다른 법의 시대와 같은 말이 성의 억압에 관한 담론으로 쉽게 넘어간다. (12-13쪽)
요약하자면, ‘억압의 가설’을 채택하고, 성이 억압되었으니 해방하자고 주장하면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은 세 가지입니다.
1. 억압 메커니즘은 선명해서 주장하기도 쉽고 타격 목표를 정하기도 쉽다.
2. 억압된 ‘성’의 해방은 억압된 ‘자유와 권리’의 해방이라는 좀 더 거대하고 정치적인 작업과 관련되어 있다. -> 폼 난다.
3. 억압된 성에 대해 말하는 것 자체만으로 깨어 있는 인간이라는 느낌, 기존 질서에 도전하는 투사라는 느낌, 내가 좀 전복적이라는 느낌을 줄 수 있다. -> 개 폼 난다.
결론은 그러니까, 쉽고, 있어 보여서 그런다는 것이네요. 예나 지금이나 있어빌리티는 사람을 미치게 하는 경향이 있죠. 사랑받고 추앙받고 싶은 욕심에 남들보다 빨리 소수자들의 선봉에 섰다가 다수자들의 막강한 돌팔매질에 못 이겨 은근슬쩍 그쪽으로 기어들어가면서, 자기 변절의 이유를 소수자 탓으로 돌리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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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에 다정하진 않은 번역입니다. 예를 들면, ”따라서 억눌린 성의 관념은 이론의 문제일 뿐만이 아니다.“(15) 라는 문장은 문맥상 ”따라서 성이 억눌려 있다는 관념은 이론의 문제일 뿐만이 아니다.“로 옮기면 오해의 소지가 덜합니다. 영어판에서 ‘The notion of repressed sex is ~”로 쓰인 문장이라 의미구조가 선명한데, 번역문은 ’성이 억눌렸다는 관념‘을 말하는지 ’성에 대한 억눌린 관념‘을 말하는지 모호합니다.
하나만 더 볼까요. 위에서 인용한 억압 가설에 관한 푸코의 첫 번째 의문, 그러니까 성의 억압이 정말로 자명한 역사적 사실일까? 하는 질문에 뒤따르는 문장을 보겠습니다.
“맨 먼저 시선에 드러나고 따라서 하나의 가설을 출발점으로 제시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바로 성에 대한 억압체제의 강조일까, 아니면 17세기부터 이루어진 그러한 체제의 확립일까?”(17)
일단 전체적으로 뭔가 어색하고 우리말 같지 않은 모양은 차치하구요. 후반부의 ’성에 대한 억압체제의 강조일까, ‘아니면’ 17세기부터 이루어진 그러한 체제의 확립일까?‘ 하는 대목은, ’하나의 가설을 출발점으로 제시할 수 있게 하는 것‘이 1)강조 2)그러한 체제의 확립 중 어느 쪽일지를 묻는 것처럼 보여요다. 그런데 실제로 ’억압 가설‘에 이의를 제기하는 푸코의 관점으로 보면, 1)과 2)는 택일의 문제가 아니고 강약의 문제에 가깝지 않을까 싶어요. 강조하다 못해 확립까지 했던 그것- 이런 뉘앙스랄까요. 영문판은 “Is what first comes into view-and consequently permits one to advance an initial hypothesis-really the accentuation or even the establishment of a regime of sexual repression beginning in the seventeenth century?” 로 번역해놓았네요. 제 눈에는 or를 중심으로 the accentuation과 the establishment가 서로 싸우는 것 같아보이진 않는데. even이 한 몫 거들기도 하구요.
사실 영어 겁나 못해서 조심스럽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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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지간에 계속 읽어나가겠습니다.
--- 읽은 ---
213. 폭죽무덤
김엄지 지음 / 현대문학 / 2020
소설과 시의 국경이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이 세상에 있을까? 나는 더 모르게 되었어…….
한순간에도 몇 번씩 인간의 머릿속에 켜졌다 꺼졌다 하는 생각들과 문학의 경계가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은 또 어디에 있을까? 난 진짜 아무것도 모르게 되었어…….
--- 읽는 ---
미셸 푸코와 현대성 / 오생근
성의 역사 1 : 지식의 의지 / 미셸 푸코
방구석 미술관 / 조원재
클래식 가이드 / 세실리아
말장난 / 유병재
다시 미분 적분 / 나가노 히로유키
습관의 말들 / 김은경
내가 예민한게 아니라 네가 너무한 거야 / 유은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