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악어
1
날이 저물고, 쓸쓸해졌다.
2
혼자서 영화 《먼 훗날 우리》를 보고는 펑펑 울었다. 잘 참아내고 있었는데 마지막에 결국 무릎을 꿇고 말았다. 제길. 나는 석양이 깔리는 도시가 높은 곳에서 조명되는 장면에 늘 약하다.
무너지는 과정에서 린젠칭이 품었을 마음의 모양에 대해 나는 선연하게 알고 있어서, 다가오지 않을 미래에 대한 헛된 말들을 쌓아나가는 마음과, 그 말들을 견디며 옆을 지켜주는 이를 위해 해줄 것이 없는 스스로를 망연히 바라보는 시선과, 비참함 위에 초라함을 얹고도 부족하여 열등감으로 나를 망치고 너를 망치고 결국 우리를 망치는 궤적에 대한 기억이 흉터처럼 박혀 있어서, 크게 울지 않고는 버틸 수가 없었는데. 보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아파서, 컴퓨터를 끄고 누운 자리에서 또 한 번 쓰게 울지 않고는 잠들 수가 없었다. 꿈을 꿀까 봐 무서운 밤이었다.
3
꿈도 꾸지 않고 잘만 잤다.
정작 꿈은 하루 전에 꾸었다. 편의점에서 비닐 포장된 미니 악어 세 마리를 사왔는데, 봉투를 뜯자마자 얘네들이 싱크대 위로 재빠르게 질주하며 물을 마시더니 자꾸만 커졌다. 나는 얘들을 포획하기 위해 전기 모기채를 들고 왔는데, 그 사이 꽤 큰 녀석들이 싱크대 아래로 들어가는 뒷모습이 보였다. 급하게 달려가 모기채로 싱크대 아래를 주욱 훑었더니 뭐가 턱 걸려 나왔다. 보니까 악어의 하반신이었다. 상반신은 뜯겨나가고 없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싶어서 싱크대 아래를 봤더니 집채만 한 구렁이 한 마리가 똬리를 틀고 앉아서 악어 두 마리하고도 반 마리를 꼴깍 삼키는 중이었다. 아, 옛말에 구렁이는 쫓아내는 게 아니랬어. 나는 웃으며 싱크대 아래쪽 뚜껑을 덮고 삼겹살을 먹으러 출발했다.
개 안 나오는 개꿈 팔아요.
--- 읽은 ---
187. 산시로
나쓰메 소세키 지음 /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4
syo가 나쓰메 소세키에 홀딱 빠진 것은 의외로 장편이 아니라 짧은 이야기들 때문이었다. 『몽십야』라는 책에, 열 개의 꿈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 실려있다. 또 그 책에는 「환영의 방패」라는 단편도 있는데, 지금 내용은 거진 까먹었지만 처음 읽었을 때 아주 지렸던 기억이 생생하다. 좀 더 많은 작품을 내놓고 갔으면 참 좋았을 텐데.
장편 『산시로』에서 짤막한 이야기를 다루는 나쓰메 소세키의 엄청난 실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있다. 조금 길지만 그대로 옮긴다. 문제가 되면 삭제하겠습니다. syo의 똥글로 오염된 안구를 위해 정화의 시간을 가지소서. 그리고 소세키 월드로 오소서. 소쌤 입문에는 아, 『산시로』가 아주 그만입니다용.
"내가 아까 낮잠을 자면서 아주 재미있는 꿈을 꿨네. 그게 말이야, 내가 평생 딱 한 번 만난 여자하고 꿈속에서 갑자기 재회했다는 소설 같은 이야긴데, 신문 기사보다는 이 얘기가 듣기에도 유쾌할 걸세."
"예, 어떤 여자입니까?"
"열두세 살쯤 되는 예쁜 여자아이네. 얼굴에 점이 있지."
산시로는 열두세 살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조금 실망했다.
"언제쯤 만난 겁니까?"
"20년쯤 전이네."
산시로는 깜짝 놀랐다.
"그 여자아이라는 걸 용케 알아보셨네요."
"꿈이야. 꿈이니까 아는 거지. 그리고 꿈이니까 이상해도 되는 거고. 확실히는 모르겠는데 나는 깊은 숲 속을 걷고 있었네. 저기 색 바랜 여름 양복을 입고 저 낡은 모자를 쓰고 말이야. ……그래, 그때는 하여튼 복잡한 일을 생각하고 있었네. 모든 우주의 법칙은 변하지 않지만 법칙에 지배당하는 우주의 모든 것들은 반드시 변한다, 그렇다면 그 법칙은 사물 바깥에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꿈을 깨고 나서 보니까 시시하지만, 꿈속이니까 진지하게 그런 걸 생각하며 숲 아래를 지나다가 돌연 그 여자아이를 만났네. 그냥 가다가 만난 건 아니야. 그 여자아이는 가만히 서 있었거든. 옛날 그대로의 얼굴을 하고 있었지. 옛날 그대로의 차림새로 머리도 옛날 머리 그대로고. 물론 점도 있었지. 다시 말해 20년 전에 봤을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열두세 살짜리 여자아이였지. 내가 그 여자아이한테 넌 조금도 변하지 않았구나, 하니까 그 여자아이는 나한테 무척 나이를 드셨군요, 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너는 왜 그렇게 변하지 않은 거냐고 물으니까 이 얼굴이던 해, 이 복장이던 달, 이 머리를 한 날이 제일 좋으니까 그렇게 하고 있다는 거야. 그건 언제쯤 일이냐고 묻자 20년 전 당신을 만났던 때라는 거야. 그렇다면 나는 왜 이렇게 나이를 먹은 걸까, 하고 스스로 이상해하니까 여자아이가 당신은 그때보다 좀 더 아름다운 쪽으로 옮아가고 싶어 하니까 그런 거라고 가르쳐주었네. 그때 내가 여자아이한테 너는 그림이라고 하자 여자아이가 나한테 당신은 시라고 했네."
"그러고 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산시로가 물었다.
"그러고 나서 자네가 온 거지."
"20년 전에 만났다는 것은 꿈이 아니라 진짜 있었던 일입니까?"
"진짜 있었던 일이니까 재미있지."
"어디서 만났던 겁니까?"
선생의 코는 다시 연기를 내뿜기 시작했다. 선생은 그 연기를 바라보며 한동안 잠자코 있었다. 이윽고 이렇게 말했다.
"헌법이 공포된 게 메이지 22년(1889)이었지? 그때 모리 문부대신이 살해당했네. 자네는 기억하지 못할 걸세. 몇 살이었나, 자넨? 그래, 그렇다면 아직 갓난아기였을 때로군. 난 고등학교 학생이었네. 대신의 장례식에 참석한다면서 여럿이서 총을 메고 나갔지. 묘지에 가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네. 체조 교사가 다케바시(竹橋) 안으로 끌고 가서 길가에 정렬시켰지. 우리는 거기에 서서 대신의 관을 전송하게 된 거야. 말이 전송이지 실은 구경한 거나 다름없었어. 그날은 아주 추운 날이어서 지금도 기억하고 있네. 꼼짝하지 않고 서 있으니까 구두 속의 발이 아프더군. 옆의 학생이 내 코를 보고는 빨갛다고 했지. 드디어 행렬이 왔네. 하여튼 긴 행렬이었어. 추운 가운데 눈앞으로 마차하고 인력거 여러 대가 조용히 지나갔네. 그 안에 내가 말한 그 여자애가 있었지. 지금은 그때의 모습을 떠올리려고 해도 희미하기만 한 것이 도저히 또렷하게 떠오르지가 않아. 다만 그 여자애만은 기억하고 있지. 그것도 해가 지남에 따라 점점 희미해져서 지금은 떠올리는 일도 좀처럼 없어. 오늘 꿈을 꾸기 전까지는 완전히 잊고 있었네. 하지만 그 당시에는 머릿속에 낙인을 찍은 것처럼 뜨거운 인상으로 남았지. ……묘한 일이야."
"그러고 나서 그 여자는 한 번도 못 만났습니까?"
"전혀 못 만났지."
"그럼 어디의 누구인지도 전혀 모르는 겁니까?"
"물론 모르지."
"찾아보지 않았습니까?"
"안 찾아봤네."
"선생님은 그래서……"
이렇게 말하다가 갑자기 가슴이 메어왔다.
"그래서?"
"그래서 결혼을 하지 않는 겁니까?"
선생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 정도로 로맨틱한 사람이 아니네. 난 자네보다 훨씬 산문적으로 생겨먹은 사람이야."
"하지만 만약 그 여자가 왔다면 아내로 맞이하셨겠지요?"
"글쎄." 잠깐 생각한 뒤에 말했다. "맞이했겠지."
산시로는 가엾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선생이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때문에 독신으로 있을 수밖에 없다면 내가 그 여자 때문에 불구자가 된 거나 마찬가지가 되지. 하지만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결혼을 할 수 없는 불구자도 있고, 그 외에 여러 가지로 결혼하기 어려운 사정을 가진 사람도 있네."
"결혼을 방해하는 사정이 세상에 그렇게 많은 걸까요?"
선생은 연기 사이로 가만히 산시로를 보고 있었다.
"햄릿은 결혼하고 싶지 않았을 거야. 햄릿은 한 사람인지 모르겠지만 그와 비슷한 사람은 많지."
"예를 들면 어떤 사람입니까?"
"예를 들면." 이렇게 말해놓고 선생은 입을 다물었다. 연기가 끊임없이 나온다. "예컨대, 여기에 한 남자가 있다고 하세.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고 홀어머니를 의지해서 자랐다고 치세. 그 어머니가 또 병이 들어 곧 숨이 끊어지기 직전에 자신이 죽으면 아무개의 도움을 받으라고 하지. 그 아이가 만난 적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지명하는 거야. 이유를 물은즉 어머니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아. 자꾸 물으니까 희미한 목소리로 실은 아무개가 친아버지라고 말하는 거야. ……뭐 그냥 이야기지만 그런 어머니를 가진 아이가 있다고 하자고. 그러면 그 아이가 결혼을 믿지 않게 되는 것은 당연하겠지."
"그런 사람은 좀처럼 없겠지요."
"좀처럼 없겠지만 있기는 하지."
"하지만 선생님 같은 경우는 그런 게 아니잖습니까?"
선생은 하하하하 하고 웃었다.
"자네는 분명히 어머님이 계셨지?"
"예."
"아버님은?"
"돌아가셨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헌법이 공포된 이듬해에 돌아가셨네."
_ 나쓰메 소세키, 『산시로』, 305-309
188. 희다
이향 지음 / 문학동네 / 2013
흘러간 사랑에 대해 말하는 것도 좋아하지만, 듣는 것도 좋아한다. 애틋하거나 슬픈 사연이면 더욱 좋다. 슬픈 사랑의 경험담을 말하며 자신의 색깔을 속일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믿는다. 내가 뭐, 젖은 눈을 하고 거짓말을 만들어서라도 자빠뜨려볼 만한 사람도 아닌데, 굳이 그렇게까지 하겠어- 하고 생각하고 만다. 그래서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 나는 집중하여 말하는 이의 주름을 더듬어본다. 이야기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표정이나 태도, 흐려지는 말꼬리, ‘음’ ‘그냥’ ‘어차피’ ‘아니’처럼 뜻 없는 말들이 반복되는 모양, 술잔의 테두리를 훑는 손가락의 미세한 떨림이랄지, 멀리 보는 것처럼 아무것도 보지 않는 투명하고 축축한 시선이랄지, 그런 것들이 중요하다. 사람은 그런 것들로 시를 쓴다. 사랑할 때는 말로, 사랑이 끝나면 그런 것들로 사람은 시인이 된다. 나는 시 읽기가 좋다.
189.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
하완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8
베스트셀러 에세이를 만드는 힘은 어디에서 오나. 기본적으로 글을 잘 써야 하겠고, 센스가 있어야 하겠고, 공감을 얻을 수 있어야 하겠고, 제목도 잘 뽑아야 하겠고, 하겠고 하겠고로 이러다 한 페이지를 채우겠고, 하여튼 그런데, 결국은 다 결과론인 듯. 잘 되는 애들은 잘 돼서 잘 됐고, 잘 못된 애들도 잘 된 애들만큼이나 갖출 만큼 갖췄고.
--- 읽는 ---
코스모스 / 칼 세이건
사람, 장소, 환대 / 김현경
영어독서가 취미입니다 / 권대익
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 2020 / 최윤 외
지리의 힘 / 팀 마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