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는 여자의 공간 - 여성 작가 35인, 그녀들을 글쓰기로 몰아붙인 창작의 무대들
타니아 슐리 지음, 남기철 옮김 / 이봄 / 2016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담배

 

syo 평생 처음 본 담배 태우는 여자는 이나영이었다. <네 멋대로 해라>였다. 담배 피우는 여자가 적기도 했지만, 담배는 마음만 먹으면 만져 볼 수도 있었으나 여자는 도무지 꿈에서밖에 볼 수 없었으므로 벌어진 일이라고 하겠다. 어딘가에 여자가 존재한다는 소문이야 쉴 새 없이 날아들었지만, 2002년의 syo에게 여자란 그저 TV나 스크린에만 존재하는 환상속의 생물이었고, 남중 남고는 어둡고 미개하며 욕구를 스타크래프트와 디아블로에 몽땅 헌납하는 성무지렁이들만 득시글거리는 공간이었다. 그렇게 처음 접한 담배 피우는 여자는, 정말 끝내주게 멋있었다. syo가 담배를 선망했거나, 여자가 이나영이라서 그런 건 아니었다. 학교 화장실이나 PC방 한 구석에서 몰래 담배를 피우던 친구 놈들에게는 없던 무엇인가가, 그리고 그 이전까지 syo가 알던 이나영에게는 없던 무엇인가가, 그 순간 생겨났다. 담배 태우는 남자와, 담배 태우지 않는 여자에게는 없는 어떤 것. syo의 깜냥에 그것을 말로 설명할 수 없었기에, <네 멋대로 해라>이란 게 바로 이 멋이었구먼, 하고 덮었다. 그때 그 하얀 담배연기 속에서 syo가 어렴풋이 발견한 것이 무엇이었을까. 파괴를 향한 도약? 이중의 반항? 아직도 뚜렷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이제 몇몇 이름들을 통해 에돌아 짐작해 볼 수 있다.

 

프랑수아즈 사강의 탁자는 온통 담뱃불 자국투성이였다고 한다. 탁자 위에 재떨이가 있었는데도 담배를 아무데나 비벼 껐던 흔적이다.(42) 우리는 사강의 소설보다 더 사강의 소설 같은 그녀의 삶을 안다. 엘리자베스 보엔은 1950, 글을 쓸 때 자욱한 담배 연기, 핑크색 종이, 레몬수 한 잔이 필요하다고 언급하기도 했다.(49) 우리는 보엔을 모르는 데도, 어쩐지 이제 보엔을 알 것 같다. 수전 손택은 말보로 담배를 태웠다.(168) 우리는 그녀가 어떻게 인생을 태워 무엇을 환히 밝히고 세상을 떠났는지 안다. 펼쳐진 책을 무릎위에 놓고 생각에 잠긴 버지니아 울프의 손에도 담배가 들려 있다.(225) 그녀가 소리 높여 외치고 떠난 자기만의 방에는 담배도, 언제라도 원한다면 담배를 피울 수 있는 자유도 들어 있었을 것이다.

 

글 쓰고 담배 태우는 여자를 만나 1년을 사랑했다. 입을 맞출 때 넘어오는 담배의 맛이 진하거나 연하거나 어쩐지 좋았다. syo는 담배를 태우지 않았으니, 그런 기분은 아마 허세와 허영의 뒤꽁무니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글 쓰는 여자들이 가느다란 담배를 도화선으로 하여 무엇인가를 불태우고 폭파하려 한다는 사실을 미각으로 느끼는 것은 생각보다 충만한 경험이었다.

 

 

 

타자기

 

syo의 집을 비롯해, 절반 정도의 가정에 이미 컴퓨터가 보급된 시절이었다. 장을 보러 간다던 엄마가 나가자마자 돌아와 핸드카트에서 꺼낸 것은 낡은 타자기였다. 어디서 주워왔냐고 물었지만, 엄마는 들은 건지 만 건지, 대답도 않고 하염없이 걸레로 타자기를 닦기만 했다. 그때 엄마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어린 syo의 눈에도 아련함과 설렘이 읽히는 그 눈빛. 그날까지 syo는 엄마가 타자기가 필요한 사람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다. 솔직하게 말하자. 생각해 보지 못한 것이 아니라 않은 것이라고. 생각해 볼 생각도 하지 않았노라고. 그때 알게 되었지만 어려서 표현할 방법을 몰랐던 한 줌 깨달음을 오늘, 여기서야 적는다. 세상에 타자기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타자기는 구석구석 닦아도 새 것이 되지는 않았다. 타자기를 구석구석 닦을수록 새로워지는 것은 그저 엄마의 마음이었다. 이미 오래전에 단종되어 더는 잉크 리본을 구할 수 없었기에, 그 타자기와 함께했던 엄마의 글쓰기는 몇 장의 연습지와 그보다 더 적은 분량의 일기를 남기고 멈췄다. 키보드와 자판 배열이 똑같으니까 쓰고 싶으면 컴퓨터로 계속 쓸 수 있다고 아들이 권했지만, 엄마는 들은 건지 만 건지, 대답도 않고 하염없이 웃기만 했다. 엄마는 이제 일기를 쓰지 않는다.

 

 

 

 

글 쓰고 담배 태우는 여자를 만나 1년을 사랑하는 동안, 우리는 치열하진 않았으나 경쟁하듯 쓰면서 서로의 글을 다듬고 쓰다듬었다. 글을 쓰기 위해,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그녀의 방이었고, syo에게 필요한 것은 그녀가 있는 방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녀의 좁은 방 작은 침대에 왼쪽 오른쪽 어깨를 맞대고 엎드려 읽고 썼다. 서로가 서로의 아픔이 되지 않기 위해 syo는 시를 고르고 그녀는 소설을 골랐다. 어쨌든 치열하지 않았으므로, 그 기간, 우리는 이룬 것이 아예 없거나 별로 없었다. 그럼에도 그 방이 기억에 남는다. 장난감처럼 자그마한 플라스틱 식기들, 역시 애기 밥상처럼 작고 깜찍했던 접이식 탁자, 겨울이면 방 어딘가에는 반드시 뒹굴고 있는 귤 껍질들, 3단짜리 작은 책꽂이에 꽂혀 있던 그녀의 책들. 무라카미 몇 권, 김연수 몇 권, 그리고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그녀가 말했다. 오늘 이렇게 쓸 수 있다면, 내일 죽어도 좋을 것 같아. syo가 대답했다. 오늘 이렇게 쓸 수 있다면, 내일부터는 절대 죽기 싫을 것 같아.

 

크리스타 볼프의 방은 사방 벽이 책들로 가득하고 가구도 거의 없다.(52) 사회체제를 고민하고 개혁을 부르짖었던 그녀는 읽어야 할 것이 많았을 것이다. 거투루드 스타인은 글을 쓰기 전에 그림을 보는 습관이 있었다. 현대 화가들의 걸작으로 둘러싸인 공간에서 작품을 쓴다.(61) 글보다 천재를 알아보는 눈으로 더 기억되는 스타인의 방답다. 보부아르는 공공장소를 주된 생활공간으로 삼았으며, 카페에 앉아 책을 쓰거나 식사를 하고 친구들을 만났다.(78) 현재의 눈으로 보면 그녀의 이야말로 가장 선구적이다. 그녀에게 노트북이라도 하나 있었더라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조금 더 빨리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글 쓰는 여자의 방이라면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를 이야기하지 않고 지나갈 수가 없다. 울프는 정원 구석에 목재로 된 오두막 집필실을 지었다. 그녀는 침대에 앉아 아침식사를 마치고 나면 930분경에 이 오두막으로 들어가 오후 1시까지 글을 썼다. 오후 시간의 대부분도 그곳에서 보냈다.(221)

 

오늘 우리의 방은 어디인가. 책을 만들거나 글로 밥을 지어 먹는 사람이 아니어서, syo에겐 모든 공간이 방이겠다. 오늘의 우리는 뮤즈가 찾아온다면 그곳이 어디든 그 자리에서 바로 뮤즈와 풀코스 디너파티를 갖고 23차까지 거하게 마친 뒤, 대리를 불러서 영감의 에덴동산으로 뮤즈를 안전하게 귀가시킬 수 있는 장비들을 항시 장착하고 다니니까. 하지만 그 수많은 방 가운데 syo가 가장 사랑하는 방. syo의 글이 syo의 똥이 되지 않도록 스스로 경계하여 한 줄 한 줄을 되새기게 만드는 방, 모자란 글로 징징거리는 중2syo의 어깨를 두드려, 부족하나마 한 번 더 글을 쓰게 만드는 방, 냉정한 사람들은 친목 도모와 좋아요구걸로 부실한 자아를 채우려 안달하는 사람의 모임이라며 못된 말로 도끼질을 하지만, 읽고, 배우고, 읽는 자신을 조금 더 사랑하는 법을 아는 따뜻한 사람들이 모여 복작복작하는 분주한 공간. 서로를 더 사랑하는 법을 탐색하는 사람들의 공간. 여기 이 방. 자기만의 방을 가진 사람들이 사는 우리들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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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17-10-16 19: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지금껏 읽은 syo님 글 중에 제가 가장 좋아하는 글이 될 것 같습니다. 오늘 이렇게 쓸 수 있다면, 내일부터는 절대 죽기 싫을 것 같아- 공감입니다ㅎㅎ
저도 전동타자기 중고로 구해서 갖고 있어요. 그 소리랑 타격감, 활자 모양이 좋아서 산 건데.. 지금은.. 어디 처박혀 있지..? ㅠㅠ

syo 2017-10-16 19:15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저 책을 읽다 보니 슬럼프에서 조금 회복된 것 같아요. 이유는 모르겠지만요ㅎㅎㅎ

타자기를 쳐 본 적이 없어서, 그게 어떤 기분일지 상상만 하고 있습니다. 타자기의 타격감이 나는 키보드도 있다고 들었는데요.

2017-10-16 19: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0-16 19: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sprenown 2017-10-16 1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는 추천 못하지만, 단편소설은 한편 추천해 드리고 싶네요.. 좀 오래된 소설이긴 하지만, 김형경의 ‘담배 피우는 여자‘ 우리 사회의 현실이 반영되었지요.. 저도 아직까지 담배를 끊지 못하고 있지만, 아마 김형경 작가도 골초일(였을) 거예요.

syo 2017-10-16 19:59   좋아요 1 | URL
김형경 작가 책은 정말 옛날에 장편 한 권 읽고 말았네요. 엄청 감명깊게 읽었던 것 같은데.

추천하신 책은 꼭 읽어보겠습니다.

2017-10-16 19: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0-16 20: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sprenown 2017-10-16 20: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 장편은 아마 새들은 제이름을 부르며 운다가 아닐런지..산해경에 나오는 이야기를 제목으로 뽑았더라구요..

syo 2017-10-16 20:04   좋아요 1 | URL
앗, sprenown님 땡이십니다 ㅎㅎ
그 책은 <꽃피는 고래> 였습니다. 얼추 10년 정도 되어서 옛날이라고 말씀드렸는데 죄송합니다. 저 책은 오히려 근작 수준이네요;;

sprenown 2017-10-16 20: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런가요? 저는 아직 ‘꽃피는 고래‘는 읽어보지 못해서...기회되면 읽어 볼게요. 근데, ‘새들은~‘ 이 더 오래된 소설 아닌가요?.

syo 2017-10-16 20:11   좋아요 1 | URL
네, sprenown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제가 근작이라고 표현한 ˝저책˝이 <꽃피는 고래>였습니다.

뭐 저렇게 써놨을까요. 누가 봐도 sprenown님처럼 읽겠네요.

sprenown 2017-10-16 20: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와 저의 차이이겠죠.. 그래서 우리말과 글이 어렵나 봅니다.

잠자냥 2017-10-17 12: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세상에 타자기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공감합니다. ㅎㅎ 이 책을 사두기만 하고 아직 안 읽었는데, 이제 읽어볼 때가 되었나봅니다! ㅎㅎ syo 님의 이 글은 한 편의 단편소설처럼 잘 읽었습니다.

syo 2017-10-17 12:41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사실 책 자체가 훌륭하다고 할 만한 것은 아니었지만, 개인적 소회를 불러 일으키더라구요. 모쪼록 잠자냥님께도 의미 있는 독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큰일이다. 임얼젼시Emergency. 아무것도 하기 싫다. 읽을 것은 많고 많은데, 쓸 것은 산더민데, 산은 산이요 syo는 syo로다 하고 만다. 산이 거기 있기 때문에, 나는 산을 피해 간다 하는 심정이다. 마음을 다잡고 책을 펼쳐 보지만, 다섯 페이지 읽고 이내 책을 집어 던진다. 침대 끄트머리에 걸치고 앉아 좀 씩씩거리다가 머쓱한 표정을 하고 던진 책을 주으러 간다. 다시 다섯 페이지 읽고 책을 집어 던지려다가 또 주으러 가기 귀찮아서 곱게 놓아둔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역경과 고난의 행군 속에서도 손에서 책을 놓치 않더니 결국 ㅇㅇ이 되었다, 하는 위대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떠올리며 스스로를 다잡으려 하지만, 답은 하나다. 위인은 그래서 위인이요 syo는 그래서 syo로다. 이럴 때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난 메달 같은 거 받아 본 적 한 번도 없어. 난 시합에 완전 쥐약이거든. 나는 있는 힘껏 노력해야 하는 결정적인 순간에.... 최선을 다 해본 적이 한 번도 없어.

_ 바스티앙 비베스,『염소의 맛』



자그맣게 빈둥빈둥 지내고 싶다.

밝은 게 좋다. 따스한 게 좋다. 
_ 나쓰메 소세키,『유리문 안에서』



순간마다 새로운 과제가 나타나서, 그것은 그를 또 새로운 과업쪽으로 돌려 휴식이라곤 없게 된다. 절대로 끝나지 않는다면 무엇하러 시작할 것인가? 

_ 시몬 드 보부아르,『모든 사람은 혼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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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7-10-15 2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럴땐 여행 어떠세요?
여행 관련 책 두세 권 읽고 며칠 다녀오시면 혹시...?

syo 2017-10-15 20:33   좋아요 1 | URL
ㅠㅠ 북다님 조언 감사합니다. 징징거리는 거 다 받아주시고 ㅠ

사실 저도 평소 같았음 여행 생각 했겠는데요, 사실 이 슬럼프가 1박 2일로 여행 다녀 왔다가 생겼어요.....흙.

북다이제스터 2017-10-15 20:43   좋아요 1 | URL
ㅋㅋ 바람나셨네요, 여행바람...ㅎㅎ
바람은 바람으로 잡아야 한다고 하던데요. ^^

syo 2017-10-15 20:39   좋아요 2 | URL
바람은 바람으로 잡지만,
바람을 잡은 바람을 또 바람으로 잡고,
바람을 잡은 바람을 잡은 바람을 또 바람으로....

그렇게 syo는 영영 돌아오지 못할 여행을 떠나는데......

ㅎㅎ

독서괭 2017-10-15 2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자본론 후유증인가요?;;; 머리 비우고 며칠 쉬시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syo님 페이퍼를 못 읽는 건 아쉽겠지만..^^

syo 2017-10-15 20:37   좋아요 0 | URL
자본론 별로 읽지도 않았는걸요 ㅎㅎ 재채기 한 번 했다고 폐결핵 후유증이라고 할 수는 없겠어요.

가을 타나 본데요??

sprenown 2017-10-15 2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 탄다 싶을때는 시집을 읽으세요.. 감성에 몰입되는.

syo 2017-10-15 21:09   좋아요 0 | URL
sprenown님께서 추천 좀 해주세요. 어떤 시집을 읽어볼까요?

sprenown 2017-10-15 21: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쎄요.. 저보다 더 잘 아실텐데요! 나 집어달라고 손들고 있는 시집. 그냥 뽑아보시죠.그리고 눈을감고 펼쳐보세요.

다락방 2017-10-16 0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위에 댓글 읽다보니 ‘나 김이듬 시집 샀지!!!‘ 하는 생각이 불쑥 드네요.

저야말로 ㅠㅠ 최근 2주간 책이라곤 [나나] 한 권 읽었어요. 어휴... ㅠㅠ 어쩌죠 ㅠㅠㅠ

syo 2017-10-16 08:29   좋아요 0 | URL
그것은 지난 일이고, 저는 앞으로 2주간 그럴지도 모르는데요.... ㅠ
 


중2


절대 읽지 않을 걸 알면서 왜 쓰는 것일까요, 어쩌면 절대 읽지 않을 걸 알기 때문에 쓰는 것일까요, 언젠가 부끄러울 걸 알면서 왜 쓰는 것일까요, 혹시 언젠가 부끄러울 줄 알기 때문에 쓰는 것일까요, 어째서 슬프지 않은데 슬픈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요, 슬프지 않아서 슬픈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슬픈 이야기를 하여서 슬픈 것입니까? 사랑하는 마음이 현실이고 사랑했던 마음이 추억이라면, 현실이 충만한 가운데 충만하지 않은 추억을 헤집으며 일부러 슬퍼지려 하는 마음은 현실의 추억입니까, 추억의 현실입니까.





상대에게 유일한 존재가 되고 싶은 감정을 '사랑'이라 부를 수도 있겠으나, 내가 나에게 유일해지고 싶은 감정은 '사랑'이라는 말이 아니라면 부를 방법이 없다. 

_박준, 『운다고 다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그들이 첫번째 나무에 이르렀을 때, 비용은 교수형을 당한 사람이 가지에 매달려 있는 것을 보았다. 혀가 밖으로 나와 있었고, 달이 시체를 창백하게 비추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었다. 비용은 앞으로 나아갔다. 근처 나무에도 교수형을 당한 사람이 매달려 있었지만, 역시 모르는 사람이었다. 비용은 주위를 둘러보았고 나무에 늘어뜨린 시체로 가득한 숲을 보았다. 그는 시체를 하나하나 바라보았다, 차분하게, 미풍에 흔들거리는 다리들 사이를 헤매면서. 그러다 그의 형을 발견했다. 그는 목에 매인 줄을 단검으로 잘라내 형을 풀밭 위에 내려놓았다. 시체는 죽음과 추위로 굳어 있었다. 비용은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 순간 형의 시체가 말을 했다. 여기의 삶은 널 기다리는 하얀 나비로 가득해, 내 동생아, 시체가 말했다. 다 애벌레들이야.

_안토니오 타부키, 『꿈의 꿈』



중2병 2학기


말하면 모든 일이 나빠질 거라는 생각에, 모든 나쁜 생각을 말하지 않았다. 말이 이룰 수 있는 게 없었기에, 말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지만 행복한 시간들을,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지나가고 싶었다. 내가 말하지 않아도 네가 알 것임을 네가 말하지 않았는데 내가 알았다. 틀렸다. 그것도 나쁜 생각이었다. 생각만으로 일이 나빠지고 있었다. 내가 나빠지고 있었다. 그저 아무 말도 못하고 마음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날 내가 거칠게 열어본 너의 마음이 비어 있었다는 사실을 오늘 말하는 것이 무참한 폭력일 수 있듯, 그날 네가 손도 대지 않았던 나의 마음이 너로 가득 차 있었다고 오늘 추억하는 것이 오만일 수 있음을 알았다. 나는 아직 시인이 되지 못하여 시월이 오면 고작 이런 글을 쓸 수밖에 없다. 나는 그때 네 사람이 되지 못하여 고작 이런 글을 쓰지 않고는 가을을 날 수가 없다.





먼 곳은 늘 먼 것의 아우라로 인해 동경의 빛으로 빛난다.

_장석주, 『가만히 혼자 웃고 싶은 오후』



역설적이게도 잊으려고 하면 잊히지 않고 오히려 기억하려 하면 잊게 된다. 사라짐을 잊을 수 있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것을 흔적으로 남겨놓을 때다. 흔적으로 기록하고 그 흔적을 중심으로 언어의 탑을 쌓으면 우리는 그만큼 충격적인 현실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게 된다. 반대로 무조건 잊기 위해 눈을 감으면 어떻게 될까? 오히려 현실의 무게가 더욱 우리를 짓누른다. 

_맹정현, 『트라우마 이후의 삶』



"전 여전히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가드너 씨. 당신과 부인의 출발점은 이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과 그리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가드너 씨, 당신이 그동안 불러 온 이 노래들이 전 세계 사람들에게 호소력이 있었던 겁니다. 심지어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도 말입니다. 그런데 그 노래들이 모두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연인들이 사랑을 잃고 헤어져야만 한다면, 그건 슬픈 일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서로 사랑하고 있다면 영원히 함께해야 마땅합니다. 그 노래들이 이야기하는 바가 이런 거 아닌지요."

_가즈오 이시구로, 「크루너」, 『녹턴』




고3병


바람 부는 언덕에 조용히 앉아 잎 떨구는 나무를 보았다. 흰 바람을 몸에 감고 있었다. 갑자기 가을이었다. 사람들은 사진 속에 가을을 담아 가져가려고 분주하다. 나는 마음의 주둥이를 열고 그저 가을이 주는 만큼 담아 왔지만 마음이 얕아 넉넉히 챙기진 못했다. 모자란대로 아껴 먹으며 이 시간을 날 것이다. 겨울이 오기를 빈 공간으로 기다리겠다.



도시 사람들은 자연을 그리워한다. 그러나 자연보다 더 두려워하는 것도 없다. 도시민들은 늘 '자연산'을 구하지만 벌레 먹은 소채에 손을 내밀지는 않는다. 자연에는 삶과 함께 죽음이 깃들어 있다. 도시민들은 그 죽음을 견디지 못한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거처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철저하게 막아내려 한다. 그러나 죽음을 끌어안지 않는 삶은 없기에, 죽음을 막다보면 결과적으로 삶까지도 막아버린다. 죽음을 견디지 못하는 곳에는 죽음만 남는다. ...... 살아 있는 삶, 다시 말해서 죽음이 함께 깃들어 있는 삶을 고르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_ 황현산, 『밤이 선생이다』



고요를 만나면 고요 속에 가만히 서 있는다. 고요의 세계 안에서 빛은 사물의 색들을 선명하게 살려 내고 사물은 사물대로 그 확고한 형태를 되찾아 빛난다. 고요는 곧 질서요 투명함이다. 

_ 장석주, 『일요일의 인문학』



도처에 시계 아닌 것이 없다. 물은 흐르는 시계고 꽃은 피어나는 시계고 사람은 늙어가는 시계고 철새는 날아가는 시계고 바람은 불어가는 시계다. 생명들도 생명 아닌 것들도 다 무엇인가의 시계이며 거대한 우주라는 시계의 부품이다. 

함민복 <시계>, 강정 외, 『시인의 사물들』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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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7-10-14 2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빠른 성장중이시군요.^^

syo 2017-10-14 20:48   좋아요 1 | URL
그러나 중2병은 영원히 회귀하는 불치병입니다...... 고3이 되어도 33이 되어도 때가 되면 산란기 연어마냥 다시 중2가 되는 것입니다.

서니데이 2017-10-14 20:50   좋아요 1 | URL
그럼 ...언제까지나 계속해서 젊다는 말씀이잖아요. 부러워지고 있어요!!

syo 2017-10-14 20:51   좋아요 2 | URL
서니데이님, 그것이...... 중2병 안 앓아보셔서 모르시는 것 같은데,

중2는 인생에서 제일 늙은 나이입니다. 세상 모든 슬픔과 고통을 지 혼자 다 짊어지는(짊어진다고 생각하는) 나이거든요 ㅋㅋㅋㅋ

독서괭 2017-10-15 20: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soon애보 syo님의 아픈 시월이군요.. 그날 내가 거칠게 열어본 너의 마음은 비어 있었고 그날 네가 손도 대지 않았던 나의 마음은 너로 가득 차 있었다- 참 마음 아픈 글입니다.
 



아미엥에서의 주장

루이 알튀세르 지음 / 솔출판사 / 1991



넓고 깊은 알라딘 세상. 뭐 이 정도 책 가지고 엄살이지, 하시는 분들 분명 계시겠지만, 읽다 중간에 서른 번 정도 포기하고 싶었다. 평소의 syo라면 분명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철학 듣는 밤>에서 이르기를, 이 책이 알튀세르 책 중에 제일 쉽다고 했는데, 이번에도 포기하면 syo는 사람 아니다, 배추다, 배추. 그런 마음으로 서른 번을 꾹 참고 읽어나갔다! 거의 다 읽었다! 마침내 마지막 논문인 <아미엥에서의 주장>이 나타났을 때, 서른한 번째로 포기하고 싶었고, 마침내 불굴의 의지로 포기했다. 그래서 여러분, 안녕하세요, 배추입니다.




어제의 무와 오늘의 배추


 

<철학 듣는 밤>에서 알튀세르의 저작 가운데 <아미엥에서의 주장>이 처음으로 읽을 만하다고 추천한 뜻은 알 것 같다. 이 책이 알튀세르가 자신의 철학을 포괄적으로 설명하는 저작이기 때문이겠지. 그러나 당신들처럼 철학에 기본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게 먹히겠지만, 배추 같은 문외한에게는 포괄적이니 읽어보란 말은, 구름 떴으니 뜬구름 잡아보라는 말과 같다. 배추라면 이 책을 권하지 않을 것이다. 더 친절하고도 알차게 뽑힌 책 <루이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를 권하겠다.



루이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루크 페레터 지음, 심세광 옮김 / 앨피 / 2014


그러나 서른 번을 참으면서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를 읽어낸 것은 확실히 소득이다. 마르크스도 이데올로기 이야기를 하긴 하지만, 이데올로기 하면 알튀세르지. 구구절절 감동 받았다. 내용이 알고 싶으신 분들께 다시 한 번 입문서인 <루이 알튀세르의 이데올로>를 권한다. 우린 일반사람이잖아요. 둘 다 읽어보니, 최소한 이데올로기에 관해서는 그 책 정도면 충분하고 충실합니다. 배추 올림.

 

 



우리는 모두 저자가 되어야 한다

한기호 지음 / 북바이북 / 2017


 

그렇다, 우리는 모두 저자가 되고 싶다! 그렇지만 실상 누군가 저자가 되는 사이 누군가는 독자가 된다. 도대체 왜, 왜 나는 안 되고 저 사람들은 되는 건데. 뭐가 그리 잘나서. 사실 읽어 보면 잘났다. 반드시 어디 한 군데라도 잘난 구석이 있다. 책 역시 하나의 상품인데, 이놈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저 영리한 자본가들이 안 나가겠다 싶은 상품을 내 놓겠냐고. 결과적으로 잘 팔리는 데는 하늘의 뜻이 조금은 필요하지만, 시장에 나온 책은 최소 한끝은 있다. 배추한테 부족한 그 한끝. 아니다 두끝. 잘 생각해보니 세끝.....네끝? , 뭐 부족한 게 계속 나와. 아무리 배추라지만, 있는 건 부족하고 부족한 것만 있나.

 

저 자가 저자가 되는 비결. 한기호 선생님이 알려드립니다. 그 비결도 막 던지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여럿 저자로 만들면서(만들고 나서) 깨우친 아주 뜨끈뜨끈한 고급 정보. 그러나 막상 읽어보면, 저자가 된 저 자들이 원래부터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는 의혹을 감출 수 없고, 양자리 A형 무지렁이 배추는 읽는 내내 무지렁무지렁 수심만 가득해진다. 그렇게 울기 직전까지 갈 때쯤 그 모든 것을 이미 예측했다는 듯 한기호 선생님이 던져주는 7가지 고급진 알짜 정보. 이 자리에서 배추가 알려드리진 않을 거예요. 나 혼자 다 먹고 나 혼자 용 될 거야. 배추용. 추드래곤.

 

 



글 잘쓰는 독종이 살아남는다

사이토 다카시 지음, 장현주 옮김 / 더모던 / 2016


 

안녕하세요. 알라딘 공인 사이토 다카시 까는 남자, sy....아니지 배추가 돌아왔습니다.

 

, 시종일관 읽는 사람을 고려하여 쓰라고 하는데, 그건 정말 예쁜 헛소리다. 모두가 이미 알고 있다. 사람은 서로 도와가며 살아야 하고, 상대를 배려해야 하고, 차별은 하면 안 되고, 해는 동쪽에서 뜨고, 누나는 나보다 연상이고..... 또 뭐가 있지?

 

중요한 건 읽는 사람을 얼마나”, “어떻게고려하여 쓰는가이다.

 

다시 말하면 글쓰기의 제 1원칙은 3자가 읽었을 때 어떻게 생각할까를 늘 생각하는 것이다바로 읽는 사람의 시점으로 글을 쓰는 것이다. (12)

 

이게 왜 의미없는 말인지 증명해 볼까? 사이토 다카시가 과연 이 글을 읽는 배추의 머릿속에 뭐야, 이 공장에서 찍어낸 듯한 매력도 특징도 없는 공산품 같은 문장은. 이런 글 아니면 못 읽는다고 생각하나? 배추 개무시하네?” 하는 생각이 들었다는 사실을 예측할 수 있었을까? , 알고 일부러 이렇게 쓴 거면, 인정.

 

물론, 글은 독자가 읽을 수 있게는 써야 한다. 그렇다고 독자가 읽을 수 있게만 쓰면 되는 건 아니다. 그건 그냥 당연한 말이고 기본 조건이다. 내가 맘에 안 드는 것은, 그렇게 글 잘 쓰는 법을 설명하는 당신의 문장이다. 당신의 방법을 열심히 따랐을 때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경지라는 것이 기껏해야 당신의 수십 권 책 속에 일관적으로 들어있는 이 무미건조하고 복사기로 찍어냈대도 믿을법한 양산형 문장들일 뿐이라면, 당신은 최소 글쓰기 책을 낼 자격은 없다. 그러니까, 선생님이나 잘 하시라구요.

 

나의 경우는 실제 글을 쓸 때 이것을 염두에 두고 쓰면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겠구나하고 독자들의 읽기를 의식하며 시작된다. (16)

 

시작된다? 어휴..... 제발 번역자의 실수길, 당신의 경우 실제 글을 쓸 때 그 읽기를 의식했다는 독자들이 저 어색한 문장에도 이상함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멍청한 사람들은 아니었길 빈다. 빡치니까.

 

 

그나저나 배추가 요즘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 문장론.

 



문장을 쓰는 비결은 바로 문장을 쓰지 않는 것이다-이렇게 말해봐야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렵겠지만요컨대 '지나치게 쓰지 말라'는 뜻이다.


문장이란 것은, '이제 쓰자.'고 해서 마음대로 써지는 것이 아니다우선 '무엇을 쓸 것인가'하는 내용이 필요하고, '어떤 식으로 쓸 것인가'하는 스타일이 필요하다.


그런데 젊은 시절부터 자신에게 어울리는 내용이나 스타일을 찾을 수 있는가 하면그건 천재가 아닌 한 힘든 일이다그래서 어딘가에 이미 있는 내용이나 스타일을 빌려와 적당히 헤쳐나가게 된다.


이미 있는 것은 다른 사람들도 받아들이기 쉬운 법이라재주가 있는 사람 같으면 주위에서 "제법인데"라는 등의 소리를 심심찮게 듣게 된다당사자도 그런 기분에 젖는다그러나 좀더 칭찬을 들으려다가 영 그르친 사람을 난 몇 명이나 보았다분명 문장이란 많이 쓰면 능숙해지기는 한다그러나 스스로에게 분명한 방향감각이 없는 한그 능숙함의 대부분은 그냥 '재주'로 끝나고 만다.


_무라카미 하루키 『발렌타인데이의 무말랭이』


 

 


언어 공부

롬브 커토 지음, 신견식 옮김 / 바다출판사 / 2017


 

배추는 여기서 말하는 언어가 외국어인줄 알고 책을 펼쳤는데, 그리고 그건 외국어가 맞는데, 책을 덮고 나면 희한하게도 언어가 아니라 개그를 배웠다는 생각이 든다. 배추는 내용이나 문장도 따지지만, 빵 터뜨리거나 엉엉 울리면 무조건 별 다섯 개 매기는데, 세상에 도서관 열람실에서 빵 터져서 얻어터질 뻔 했다. 외국어 책이 이러면 곤란한데. 긴 설명 필요 없고, 예문 몇 개를 제시합니다.


확실하고 고통없이 독일어를 배우려면 독일인으로 태어나는 수밖에 없다. 음, 그러기엔 조금 늦었다. 어떤 사람은 10년, 어떤 사람은 20년이나 30년 정도 늦었는데, 어쨌거나 우리 모두 일생일대의 기회를 놓친 것이다. (51)


따분한 말동무는 외국어로 말할 때도 재미가 없다. 내가 일본에 갔을 때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적은 적이 있는데 일본인들 모두가 나와 영어를 연습하려 하다 보니 내가 일본어로 한 질문에 아무리 일본어로 대답을 들으려고 해도 들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에는 어떤 사람이 나를 안타까이 여기고는 이런 슬픈 처지를 이해해줄 사람으로 마쓰모토 씨를 추천했다. 나와 일본어로 대화하려고 오후에 기꺼이 짬을 내준 사람이었다.

마쓰모토씨는 알고 보니 불교 승려였다. 진심으로 일본어로 이야기를 나눌 준비가 된 사람이었지만 안타깝게도 그 사람의 유일한 얘깃거리는 불교였다. 특히 불교의 12개 종파 중에 11개 종파는 완전히 잘못된 시각을 갖고 있으며, 그가 따르는 종파만이 진실하다고 했다. 그 사람이 법화 사상의 유일하고도 올바른 해석이 무엇인지를 세 시간째 설명할 때 나는 자리를 뜨고 말았다. (74 75)


발음은 어휘와 문법지식이 상당하지 않다면 별다른 값어치가 없을지라도 처음 입을 열 때는 지식 판단의 기준이 된다. 이것은 외모와 비슷하다. 첫 선을 보일 때는 예쁜 외모가 정답이다. 나중애 알고 보니 멍청하고 따분히고 심지어 못된 성격일지라도. 어쨌거나 첫 싸움은 이긴 것이다.(106)


수십 년 전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벌어진 전투의 세세한 내용까지 기억하는 할아버지를 만나는 일은 드물지 않다. 그분이 유일하게 잊어버리는 것은 반 시간 전에 그 얘기를 했다는 사실 뿐이다.(214)


어떠십니까. 별거 아닌 것 같으시다구요. 으하하하, 얘네들은 에이스가 아니라는 거. 이 책에서 제일 웃긴 글을 10이라고 했을 때 0.023에서 2.175 사이의 애들로 한번 소소하게 준비해 보았습니다. 진짜 아롱사태는 251쪽부터 시작되는 외국어와 함께 여행을챕터에 수록되어 있으니, 궁금하면 직접 읽어보세요. 배추는 지금 바쁩니다. 아까 잃어버린 배꼽을 찾아야 돼서요.


마지막으로 언어 공부에 힘쓰는 이웃분들께 배추가 저자의 따뜻한 충고 한 마디를 전합니다. 꼭 언어 공부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겠습니까.


스스로를 언어 천재라고 믿어라. 실은 그 반대라는 게 드러난다면 통달하려는 그 성가신 언어나 여러분의 사전들 혹은 이 책에 불만을 쌓아두라. 스스로를 탓하지 마라. (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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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renown 2017-10-13 1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yo님은 언어천재인거 같아요.. 어쩜 이리 맛깔나게 글을 잘 쓰시는지? 게다가 자본론도 열심히 읽으시고... 자본론 리뷰는 언제 올라올려나 기대됩니다. 쪼꼼만 읽었더라도.. 님의 리뷰를 기대하면서 북플만 누르고, 기다리는 알라디너를 위해서라도..

syo 2017-10-13 20:28   좋아요 0 | URL
안 믿어요 그런 말씀ㅎㅎㅎ

그리고 sprenown님께서 그렇게 기대하실만한 퀄리티의 글이 올라오지 않아요. 기대하지 마시라고 제목에 ˝꼬꼬마˝라고 붙여놓은 건데.....

별로 내용도 없는데 생각보다 분량이 많아져서 내일 올려야겠다 하고 있었습니다^^

cyrus 2017-10-13 2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음 글에 나올 채소는 당근인가요? ^^

syo 2017-10-13 20:29   좋아요 0 | URL
모르겠어요.....
쓰다 보니 저렇게 된 거지, 식단표가 나와 있는 것은 아니랍니다ㅠ

독서괭 2017-10-13 2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에 이어 배추까지 ㅋㅋㅋㅋㅋ 총각네 야채가게 차리실 기세네요ㅋㅋㅋ 빵 터뜨리게 하면 별 다섯개- 그렇다면 syo님 글도 별 다섯개!!

syo 2017-10-13 21:05   좋아요 0 | URL
막상 syo는 자기 글 보면 입꼬리도 올라가지 않으니 별 세개.... 내일은 또 뭐가 될려나요.

sprenown 2017-10-13 2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이,기본 퀄리티는 되잖아요? 저는 자본론 서문도 제대로 읽어보지 못했는데..이번기회에 님의 리뷰를 읽으면서 워밍업 하려던 참이었어요. 추워서 목욕재계는 못하겠지만, 이번달 안으로는 첫 빠따 기대하겠습니다!

syo 2017-10-13 21:06   좋아요 0 | URL
서문이 열라 어렵습니다.... 서문만 읽었는데 이래저래 후비적거리다보니 A4 네 바닥이네요...

psyche 2017-10-13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양자리 a형 무지렁이라고 하셔서 절 부르시는줄 ㅋ 그건 그렇고 ‘언어공부‘이거 땡기네요. 0.023에서 2.175 사이의 아이들인데도 이렇단 말이죠!

syo 2017-10-14 09:14   좋아요 0 | URL
그러나 막상 언어 공부에는 큰 도움 될지 의문이에요....

단발머리 2017-10-13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It‘s syo time!!
바야흐로 syo님 시대가 열렸어요.
아니 배추님, 아니 배추용님 ㅎㅎㅎㅎㅎ
재미있게 잘 읽고 가요.
언어공부, 빨리 읽어야지 결심하면서^^

syo 2017-10-14 09:15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syo의 시대라니, 암담한 시대가 열리고 말았네요.... 이런.

잠자냥 2017-10-14 1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어공부>는 선물용으로 샀는데 인용하신 빵터지는 문장을 보니, 저도 한 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재미난 할머니네요. ㅎㅎ

syo 2017-10-14 11:46   좋아요 0 | URL
16개 언어를 하는 웃긴 할머니셨습니다. 역자도 15개 정도 한다는군요.

페크pek0501 2017-10-14 1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유익한 책기록이구나, 하고 읽었습니다.

syo 2017-10-14 18:40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피식 웃기는 책기록이 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는데, 유익할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습니다.
 


집 나간 책

서민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5

 

어느 햇살 좋은 날, 읽는 거 양으로 치면 나도 어디서 꿀리진 않는다는 오만과, 많이 읽으면 알아서 잘 쓰게 될 거라는 편견이 만났다. 오만과 편견은 첫 눈에 서로가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가 없는 운명임을 감지했고, 온 세상이 그 결합 반댈세를 외치는데도 못들은 척 고집스럽게 서로의 사랑을 키워나가다 마침내 아무도 찾지 않는 어두운 골방에서 뜨거운 사랑을 나누었다. 그 사랑의 결과로 syo가 태어났다. 30권을 읽어도 3권을 읽은 것보다 아는 게 없는 허망한 독서인. 30권을 읽어도 1개의 리뷰를 채 못 쓰는 실속 없는 독서인. syo. 독서계의 속빈 강정, 바람 든 무.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뭅니다. 무예요.





보통의 독자들은 서민 작가님의 책을 읽으면 촌철살인의 재치와 해학에만 눈길을 빼앗기는 경향이 있는데, 무는 그 뒤에 가려진 그의 피나는 노력을 읽는다. 그는 타고나기를 금 혓바닥을 물고 태어나 입만 열면 침 흐르듯 웃긴 말이 좔좔좔 흐르는 그런 개그천재는 아니다. 뼈를 깎는 노력과, 자기의 사지육신 오장육부(무엇보다도 얼굴)을 다 팔아서라도 웃음을 사려는 그의 욕심이 무의 눈에는 선연히 보인다. 이것은 비록 수준은 뒤처지지만 욕심에서는 뒤지지 않는 무의 동병상련의 정이라 하겠다.

 

그러니까, 이런 말이 하고 싶다. 아는 사람은 아는,


내가 요즘 서민을 읽고 있는데, 느낀 게, 욜로 열심히 안 하면 안 될 것 같애..... 근데 나는 열심히 안하잖아. 난 안될 거야. 아마.”

 




 

시인의 사물들

강정 외 지음, 허정 사진 / 한겨레출판 / 2014

 

어쩐지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무는 한때 시인을 꿈꾼 적이 있다. 애기 무 시절이었다. 애기 무가 매운 법이다. 당시 만나던 사람에게 당차게 , 서른 정도 되면 등단하지 않을까?” 이러면서 미친 호기를 다 부렸더랬다. , 세상에. 충격 고백.

 

서른 애저녁에 지났고 이제 늙은 무가 되어 생각해볼 때, 서른에 시인이 되지는 못했으나 아무래도 시인이 될 수 없겠다는, 세상 다 알고 무만 모르던 냉혹한 진실을 똑바로 깨달은 것도 서른쯤이었던 듯하다. 이만하면, 뭐라도 하나 건진 거나 마찬가지 아닌가.

 

그리하여 무는 시인이 되지 못하고 시집을 읽는 사람이 되어, 한없이 시인을 동경한다. 시인이라 하면, 표절이나 성추행 사건을 일으키지만 않았다면 일단 무조건 빨고 본다. 이제 무보다 어린 시인도 수없이 많다. 처음엔 충격이었지만, 한낱 무 주제에 지가 뭐라고 저보다 어린 시인이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나 싶기도 하다. 그러나 깔끔하게 인정하면 내가 무가 아니지. 그리하여, 어디서 주워들은 풍문, “잘 생기면 오빠다를 변주한 잘 하면 형아다를 기치로 내걸게 되었다. 여기서 하다는 보통 읽다쓰다를 가리키는 바, 그러니까 이 책은 온통 미친 형아 누나들의 대향연이다. 만족. 그런데 어쩐지, 어린 형아 어린 누나들이 선배들보다 더 화려하고 현학적인 글로 촥촥뿜뿜 실력을 뽐내고 있네. 힘도 바짝 들어갔고. 아이고, 시인도 얄짤 없이 사람인 거라.




 

새벽 2시, 페소아를 만나다

김운하 지음 / 필로소픽 / 2016


무는 처음 읽는 작가. 유명한가? 본문에 나는 전작 <카프카의 서재>에서 ......”, “나는 다른 책에서 ....... 한 바 있다.” 이런 글귀들이 계속 눈에 보이네. 전체적으로 잘 쓰는 알라디너 서재를 들여다보고 나온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책이다. 이게 빠는 걸까요, 까는 걸까요.

 

무가 개인적으로 마음에 안 드는 곳 두 군데. 무가 한번 따집니다.

 

첫째,

다른 모든 소설을 읽는 것처럼 개츠비를 읽는다는 건바로 를 만나고 읽는다는 것이다더구나 그 만남이 문학이라는 아름다운 정원에서 이루어지는 만남일면더할 나위 없이 즐거운 만남이 아니겠는가.(19) 


이건 아니라고 무는 생각합니다. 무의 개인적 견해입니다. 우리는 이제 소설을 통해 를 만날 게 아니라 를 만나야 합니다. ‘는 이제 그만 좀 만나야 해요. 우린 지나치게 만 생각하며 살고 있잖아요. 소설 속에서도 닮은 모습을 만나고 읽을 정도로, 아직도 가 부족한가요? 생각해 주세요. ‘만 알고 를 몰라서 벌어지는 아프고 슬픈 일들이 세상에 얼마나 많습니까. ‘’와 만나는 소설 즐길 버릇을 하다 보면, ‘’와 만나는 소설 읽는 법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나와 닮지 않은 사람, 나와 닮지 않은 생각, 내가 공감할 수 없는 이야기를 손쉽게 비난하거나 무시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소설은 무지막지 많고, 나와 닮은 사람의 나와 닮은 생각에 내가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들은 줄을 서서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이미 나와 닮은 사람을 소설 속에서 만나면 순간 기쁨을 느낄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때뿐입니다. 덮고 나면요. 감정은 기억보다 빨리 약해집니다. 나중에는 감정이 아니라 감정의 기억만 남습니다. 굳이 소설을 통해 를 만나고 싶다면, 이미 만들어진 나를 거울처럼 비추어 볼 것이 아니라, 나를 소설 속에 집어넣으며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나를 빚어나가야 합니다. 나라면 저 자식의 뺨을 후려쳤을 텐데. 나라면 아마 벌벌 떨고 있느라 아무 말도 못했을 텐데. 그럴 수도 있는 거였다. 그때 난 그러면 안 되는 거였다. 이렇게 읽는 것이 소설을 읽는 좋은 방법이라고 무는 생각합니다. 어떻게, 시종일관 저런 방식으로 소설을 읽는 좋은 책 두 권 소개해드려요?





솔직히 첫 번째는 그냥 무의 무 같은 견해일 뿐이지만,


둘째, 검색해보니 이미 이 문제를 제기한 분도 있던데, <위대한 개츠비> 끝부분에서 개츠비의 차를 몰다가 사람을 치어 죽인 것은 톰이 아니라 데이지입니다. 개츠비가 그 일로 오해를 사 목숨까지 잃었으니 사소한 사건도 아니고, 거기서 차를 몬 것이 데이지라는 사실은 맥락상 무시할만한 일도 아닌데, 떡하니 톰이 죽였다고 써 놓으시면 어떡합니까. 이 책이 무슨 인생의 책이라도 되는 것 마냥 온몸으로 칭찬하셨잖아요. 개츠비를 읽는다는 건 바로 를 만나고 읽는다는 거라면서요. 이제 무가 그 말을 어떻게 믿겠어요. 챕터 1부터 이런 실수(?)를 하시면, 그 뒷부분은 제가 무슨 마음으로 어떻게 읽어야 되겠어요. 말씀을 좀 해 보시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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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17-10-12 1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아!!!! 리뷰를 요렇게 재밌어하며 읽어보기도 오랫만. 등단만 안하셨지 작가이신데요^^

syo 2017-10-12 17:30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그렇지만 작가는 무립니다.
syo는 그냥 무입니다^^

라임 쩔었다....(뿌듯)

다락방 2017-10-12 17: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름다운 책 두 권 링크 해주셨네요. 워낙에 아름다운 페이퍼인데 아름다운 책이 두 권 떠억- 얹혀 있으니 아름다움이 극에 달합니다. 아름다움이 절정을 이루는 초특급 아름다운 페이퍼에요, 쇼님.

syo 2017-10-12 17:48   좋아요 0 | URL
저 아름다운 책 두 권을 다 읽고 나면, 이 정도 페이퍼는 껌으로 작성하게 됩니다. 훗.

짜라투스트라 2017-10-12 1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역시 재미있어요 ㅎㅎㅎ

syo 2017-10-12 18:3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ㅎㅎㅎㅎ 맨 아래 두 권 추천이요.

독서괭 2017-10-12 1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 납득하기 어려운 실수네요. 어떻게 책을 만드는 전 과정에서 아무도 그걸 잡아내지 못했을까요? 저자와 책에 대한 신뢰를 확 떨어뜨리는군요.
무 사진 올려주신 거에 빵 터졌습니다ㅋㅋ

syo 2017-10-12 19:23   좋아요 0 | URL
고르고 고른 무입니다. 독서괭님이 만족하셨다니, 저도 만족스럽네요.

프리즘메이커 2017-10-12 2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먹기 좋은 syo 북카페에 오신 걸 스스로 환영하겠습니다 ㅎㅎ

syo 2017-10-12 21:38   좋아요 0 | URL
막상 먹을라치면 먹을 거 없어서 입맛만 다시고 돌아서야 하는 syo 북카페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ㅎㅎ

psyche 2017-10-13 0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쏙쏙 내 맘에 들어오는 글을 쓰시는 분이 무라니요... 진짜 바람 든 무는 어쩌라고.

syo 2017-10-13 06:43   좋아요 1 | URL
무 이미지를 검색하다 알게 된 건데, 바람든 무로 만들 수 있는 것도 많더라구요. 거대한 희망을 얻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