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열쇠 : 을지로로 가시오
출발지를 통과해도 20만원을 받지 않습니다.
지난 토요일에 있었던 시끌벅적왁자지껄깔깔깔호호호한 6인용 식탁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으려 했다. 호일에 싸서 구운 고구마마냥 마음속에 묻어놓고 그 온기를 겨울 나는데 이용하려 했던 것인데, 이렇게 3일이 다 지나서 언급하는 것은 그날에 벌어졌던 몇몇 사건들을 오늘에서야 인식했기 때문이다.
나는 주사를 몇 개 발견했다.
그날 syo는 주량이 소주 세 잔이라 아직 괜찮다며, 지금 이게 세 번째 잔이라고 말하며 열세 번째 잔을 들이키는 식의 깜/끔찍한 컨셉을 선보였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내 의식과 무의식의 간격이 턱없이 좁아졌고, 뒤이어 자아와 이드의 봉기로 인해 초자아의 목이 단두대 위에서 대롱대는 비상상태에 돌입했다. 모임의 좌장이라 할 수 있는 다람쥐님은 syo의 빈약한 주량을 익히 알고 있었던 바, 괜찮다고 말하지만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는 syo에게 정말 괜찮냐고 자꾸 물어오셨다. 그 다정함은 2차 자리까지 이어졌고, 다시 한 번 괜찮냐고 물어 오신 그분께 syo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왜 나를 아껴요?” 그러나 저런 정황이 조금도 기억나지 않는다(주사 1. 부분적 기억상실). 그래서 오늘 단체방에서 나한테 왜 나를 아끼냐고 물었던 거 기억하냐셨던 그 말씀, 당연히 농담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분노한 목격담이 속출했고, syo는 운신의 폭이 자꾸만 줄어든다. 결국 내가 그랬던 것으로.
그리하여 주사 2. 왜 나를 아껴요? 라고 묻는다.
그걸로 끝이 아니다. 역시 기억나지 않는 가운데 저지른 제2의 만행이야말로 놀랍다. 멤버 중 한 분은 알라딘 서재도 운영하시지만, 따로 N포탈 블로그에도 기록을 남기신다. 그쪽 기록 역시 놀랍도록 재밌지만, 훨씬 더 사적인 편이라 소수의 서로이웃에게만 공개되고 있다. 그랬는데, 그날 2차를 마치고 헤어지는 길에 그분이 갑자기 단체방에 N포탈 블로그 링크를 띡 올리시는 것이다(우리 모두가 익히 아는 알라딘 서재 링크를 먼저 올렸던 귀여운 실수는 우리만의 비밀로 하자). syo는 생각했다. 뜬금없이 이렇게? 아니, 술자리에서 뭐 네이버 블로그 이야기가 나온 것도 아닌 마당에 이렇게 대뜸? 아놔, 거기 나 포함 소수만 알고 즐기는 숨은 맛집이었잖아… 이렇게 단골 고객 의향도 묻지 않고 대뜸 새 손님 받기 있기 없기…. 그러나 어찌됐든 그것은 그의 자유. syo는 곧 잊고 다른 멤버들과 함께 종로를 휘휘 돌아 광화문으로 향했다.
그런데, 오늘 그분의 N포탈 블로그에 들어갔다가 다음과 같은 요지의 글을 발견했다.
2차 자리에서, 술에 취한 멤버 1이 사람들에게 내가 네이버에서도 블로그를 하고 있는 것을 아느냐고 물어봤다. 사람들은 모르는 눈치였다. 그러자 멤버 1, 브론즈 등급들을 깔보는 플래티넘 클래스의 표정으로 말했다. “네이버가 찐이야.”
그러니까 그분이 단체방에 네이버 블로그 링크를 올린 것은, 커밍아웃이 아니라 아웃팅이었던 셈이다. 물론 syo는 저런 정황이 조금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어쩐지 저 멤버 1이라는 작자의 한심한 작태가 몹시도 낯이 익었다. 뭐지, 한 35년쯤 비슷한 짓들을 봐온 것만 같은 이 뼛속 깊은 친숙함… 그래서 여쭸다. 저 멤버 1말인데요. 혹시… 저예요? 그러자 그분이 말했다. 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라고. 그렇지, 그럼. 그래야 니가 syo지. 와. 인간아….
그리하여 주사 3. 남의 네이버 블로그를 만천하에 공개한다.
기억하지 못하는 것들 말고, 기억나는 것들 중에서도 재미난 일이 엄청 많았다. 다른 멤버들의 허락 없이도 기록에 남길 만한 것은 아무래도 그날의 동선이라 할 수 있겠는데, 약속 장소인 더덕집은 광화문이었는데도 멍청하게 을지로에 있는 지점에 도착했던 syo(와 그런 syo만 믿고 아무 생각 없이 따라 걸었던 착하고 불쌍한 부산남자)는 을지로에서 광화문까지 걸어서 1차 장소에 도착했다. 1차가 파하고, 광화문에서 을지로까지 걸어서 2차 장소에 도착했다. 2차가 파하고, 을지로에서 광화문까지 걸어서 24시간 카페에 들어섰다. 심지어 이 길은 직선으로 가면 한 큐에 갈 것이었는데, 정신 놓은 1인과 아는 거 없는 1인과 정신 없는 1인이 함께 걸은 길이라, 뜻밖에 조계사 찍고 레알 광화문 찍고 세종대왕 이순신 장군님 찍고 가는 관광객 맞춤형 우회로를 걸었던 것이다. 그리고 광화문에서 다시 을지로까지 걸어 찜질방으로 갔다. 날이 밝자 부산남자를 버스에 실어 보낸 syo는 다시 광화문 교보에서 친구를 만나 을지로 버거킹에 갔다가 서울역까지 걸어가는데….
그리하여 동선 요약.
명동 –> 을지로 -> 광화문 -> 을지로 -> 광화문(한껏 우회) -> 을지로 -> 광화문 -> 을지로 -> 서울역
을지로에 환장했거나 땅이라도 한 뙈기 갖고 있는 인간 같아 보이기도 하는데, 그러니까 저 모든 게 세 잔을 빙자한 열 세잔 때문에 벌어진 일이고, 일부는 기억에 있고 일부는 기억에 없다. 아, 다시는 오랑캐처럼 마시지 않으리라.
오늘도 책 이야기는 없군. 역시 syo. 명불허전 허허허.
- 읽은 -


+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 피터 애덤슨 : 194 ~ 315
+ 제2의 성 / 시몬 드 보부아르 : 926 ~ 1048
- 읽는 -




- 마키아벨리 / 김경희 : 87 ~ 173
- 농담 / 밀란 쿤데라 : 242 ~ 372
- 가능세계 / 백은선 : 73 ~ 150
- 어느 칠레 선생님의 물리학 산책 / 안드레스 곰베로프 : ~ 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