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교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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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교는 사랑 애愛에 아리따울(사랑스러울) 교嬌를 쓴다. 이렇게 사랑스럽고 아리따운 단어가 없다.
표준국어대사전은 애교를 ‘남에게 귀엽게 보이는 태도’를 일컫는 말이라 알려준다. 귀여움이 세상을 구원한다. 애교는 구원의 작업이다.
친구들 사이에선 세상 무뚝뚝하며 말로 세상을 도륙내기라도 할 듯 입에 욕을 매달고 사는 경쌍도 썅남자 syo는 뜻밖에도 단 한 사람, 여친 앞에서는 젖도 못 뗀 애기 강아지가 된다. 말인지 멍뭉인지 알 수 없는 말투, 쌍시옷 대신 쌍디귿이 출몰하는 하이-톤의 뭉개진 발음에, 자기를 3인칭으로 부르는 건 말할 것도 없이 당연하고 심지어 그게 자기 이름도 아니라 무슨 주황색 아기공룡 이름이다.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종류의 ‘총량의 법칙’이나 ‘보존의 법칙’ 같은 것이 존재하는데, 그 중 ‘애교총량의 법칙’ 혹은 ‘애교량 보존의 법칙’의 살아 숨 쉬는 증거라도 되어볼 요량인지, 밖에서 망아지 짓을 할수록 안에 와서 강아지가 되는 모양새다.
알고 보면 애교의 본거지는 DNA다. 좋은 짝을 만나 만개하는가 아니면 내 안에 그런 기가 막힌 물건이 있는지도 모르는 채 삭막하고 척박한 인생을 살다가 가는가의 차이는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유전자에 애교가 없는 인간의 애교는 마치 서울말이 되지 않는 사람의 끝만 올리는 서울말처럼 발각되기 십상이다. 어느 날 갑자기 해 봤다, 그런데 잘 됐다, 상대가 좋아한다, 그렇다면 깨달아야 한다. 나라는 인간은 그저 애교가 자신의 형질을 다음 세대로 전달하기 위해 고른 미미한 탈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거부하지 마세요. 부인도 하지 말고. 최선을 다하여, 부립시다, 애교를. 그게 세상을 사랑스럽고 아리땁게 만드는 길입니다.
말끝에 스미는 쌍디귿을 참지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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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애교량 보존은 자연법칙이므로, 애교를 바칠 한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인간들에게 조금 더 쓰레기가 되는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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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친이라는 존재가 없었던 시절에는 어땠을까.
아, 그때는 망나니와 강아지 사이의 어떤 개차반 정도의 성품으로 온 세상 사람을 고루 평등하게 대하던 황금시절이었다.
그럼에도 유전자에 박힌 애교의 발현 욕구는 인간의 힘으로 막을 수가 없었던 것이라, 단 한 사람, 애교인 듯 애교 아닌 애교 같은 뭔가를 떨 대상이 있긴 있었는데, 곰J라 부르겠다. 그때의 그것은 조악하기 짝이 없어서, 실은 무슨 이상한 짐승 소리에 가까웠고, 그러면 곰J도 비슷한 소리를 내며 다가와 괜히 syo의 볼을 꼬집어대는 식으로 마무리되곤 했다. 그러니까 그것은 두 마리의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린 짐승들이 자기들만의 사운드로 교신하는 일종의 폐쇄형 정보통신시스템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곰J : 으아아아아(밥 먹었냐?)
syo : 으아아(응)
곰J : 으아아아아?(맛없었지?)
syo : 으아(내말이)
곰J : (syo의 볼을 쪼물딱거린다)
syo : 으아우아오아(조리사 쌤들 요즘 좀 나태해진 거 같지 않냐?)
곰J : (syo의 볼을 쪼물딱거린다)
syo : 으우아오아오아(동지여, 혁명의 때가 다가온 것 같소. 모두들 식판을 들고 일어나자……)
대체 저게 뭐가 귀엽냐, 저게 무슨 애교냐는 의문이 든다면, 그것이야말로 저게 애교파티의 한 장면이라는 굳센 증거가 된다. 원래 애교란, 둘 사이만 귀엽다. 남이 볼 땐 난해하거나 가끔씩 역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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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그들은 서로가 귀엽긴 했다. 그리고 둘 다 귀여운 것들을 몸서리치게 좋아했다.
때는 2006년, 어떻게저떻게 서울에 안착한 두 사람은 대학로의 한 조개구이 무한리필 집에서 조개를 열심히 뒤집고 있었다. 당시 syo는 눈물 나게 짧은 첫 연애를 조지고 다음 연애에 안착, 평생 처음으로 커플링이라는 것을 하고 다니던 중이었다. 곰J는 뜻밖에 누굴 좋아하는 족족 까이고 선 그이고, 소개팅한 여자와는 두 번 만나는 일이 없고, 따라서 외로워 사무쳐 술이 달아 술이 들어간다 쭉쭉쭉 그런 상태였다. 만나면 어디로 가서 무얼 먹을 것인가 무얼 할 것인가 같은 그림이 항상 그려져 있던 곰J는 선택장애 syo의 눈에 더할 나위 없이 남자답고 멋진 남자였는데, 대체 왜 빙충맞은 syo는 되는 연애가 곰J는 안 되는 걸까. 연애판이란, 남자가 볼 때 참 괜찮은 남자는 여친이 없고, 여자가 볼 때 참 괜찮은 여자는 남친이 없는 이상하고 야릇한 도깨비 나라였다. 언제까지 어깨춤을 추게 하지 않고 자꾸자꾸 술을 들이켜는 곰J에게 syo가 말했다.
syo : 야, 정말 여자들 이해가 안 된다.
곰J : (한 잔 들이켜고) 그치?
syo : (잔을 채워주며) 내가 여자였으면 너랑 바로 사귄다.
곰J : (한 잔 들이켜고) 나도.
syo : (잔을 채워주며) ㅋㅋ 그래도 니가 니 입으로 그런 말하는 건 좀 웃기지 않냐?
곰J : (한 잔 들이켜고) 아니, 나도 네가 여자였으면 너랑 바로 사귄다고.
BGM : 뚜 뚜루 뚜뚜♪ 뚜루 뚜뚜♬……
……아, 이걸 확 자빠뜨려,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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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빠뜨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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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들은 각자의 연애를 꾸준히 이어나갔다. 그러다 가끔 만나 술이나 마시고, 노래방 가서 3시간 내리 발라드나 부르고, 또 술을 마시고, 잘 안 되는 syo의 인생사와 역시 잘 안 되는 곰J의 연애사를 안주로 또 마시고, 마시고, 그러다 가끔 걔네 집에서 자고 가긴 했지만 역시 잠만 잤다. 손도 안 잡고 잘 잤다. 다음 날이면 해장국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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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다 아직 미혼이다.
둘 다 결혼은 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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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가면 봐야지.


나는 그에게 다른 것도 물어보았다. 남자 고등학교에서는 남학생끼리 사랑을 고백하거나 사귀는 일이 없었는지 궁금했다. 그는 껄껄 웃으며 딱 잘라 말했다.
"자기야, 남자들은 안 그래."
어쩌면 그가 잘못 알았을 수도 있다. 그를 둘러싼 무리에서만 그랬던 것일 수도 있으니까. 그는 10대 남학생들이란 치고 박고, 상대를 제압하려 들고, 욕하고 침을 뱉으며 허세를 부린다고 했다. 친구끼리도? 응. 친구끼리도 그 안에서 서열 같은 게 있어. 가엾다. 그런가?
_ 김세희, 『항구의 사랑』
지금 생각하면 20년 전의 일들은 무슨 전생의 일들처럼 까마득해요. 혼자 앉아서 가만히 생각해야 그때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떠오를 정도예요. 옛날 종로서적이 있던 곳을 지나가다가, 혹은 김광석의 노래를 듣다가 비로소 생각나는 기억들도 있고요. 그런데 그때 괴롭고 힘들고 고민스러웠던 일들은 정말 흔적도 없이 사라졌어요. 물론 뭐가 힘들고 고통스러웠는지는 기억나지만, 고통이라는 건 실제적인 아픔이지 머릿속 기억이 아니잖아요. 그래서인지 되살아나는 감각들은 모두 좋았던 것들뿐이에요. 감각적으로 우리는 고통에 훨씬 더 쉽게 몰입하는 경향이 있지만, 당시에는 세상 전부인 것처럼 나를 괴롭히던 그 고통은 하루만 지나도 사라지는 경우가 많죠. 온몸과 마음을 다 바쳐 즐긴 것들은 평생을 가니까, 가능하면 그런 일들을 더 많이 해야죠.
_ 김연수, 『청춘의 문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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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참, 오늘 도서관에서 요런 아이들을 데려왔다.



크기도 쪼꼬민데 다들 200쪽이 채 안 되니, 보통 판형의 책이라면 100쪽 남짓할 꼬마들이다. 사실은 이제 이런 건 안 읽어도 되고 심지어 읽어도 안 되는 수준인데, 그럼에도 표지가 너무 귀여워서 그냥 지나치려니 손이 덜덜 떨렸다. 마르크스 캐릭터에 페티시 있는 거 인정. 가운데 저 똥글이도 대책없이 귀엽잖아.
--- 읽은 ---



+ 묵묵 / 고병권 : 132 ~ 235
+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 옌롄커 : 210 ~ 319
+ 화서의 꿈 / 오노 후유미 : 191 ~ 362
--- 읽는 ---





= 데리다 입문 / 김보현 : ~ 158
= 카르마의 바다 / 문정희 : ~ 98
= 인물로 읽는 중국 근대사 / 신동준 : ~ 90
= 옥상에서 만나요 / 정세랑 : ~ 90
= 제2의 성 I / 시몬 드 보부아르 : ~ 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