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탕소년(중년)
1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누구에게나 24시간인 하루를 어떻게 쪼개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도저히 도망칠 수 없는 수면욕에게 6시간을, 그 이외의 욕구들을 뭉뚱그려 2시간을 배급한다. 그러고 나면 16시간이(나) 주어지는지라, 공부에 12시간을 꼬라박는다 쳐도 4시간이 남는다. 무려 4시간씩이나 독서에 투자할 수 있다! 와, 완벽한 계획이다. 똭. 끝.
원래 수능 만점 받는 방법은 간단하다 못해 간결하다. 만점 받을 때까지 ‘열심히’ 공부할 것. 성공하는 방법이라는 것이 늘 그랬던 것 같다. 그 방법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사람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게 나는 아닌 그런. 그러니까 방법만 알면 뭐해. 그 방법을 실행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방법을 모르는데...... 결국 완벽한 방법을 고안해 낸 인간이 완벽하지 못하여 완벽하게 망하는 법이라.
세상에는 독서욕이라는 것이 수면욕, 식욕, 성욕에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인간이 있는데, 특히 독서에 잠시도 시간을 낭비하면 안 되는 국면, 예를 들면 중간고사 기간이랄지, 한 달 뒤에 필기시험을 치러야 하는 공시생 입장이랄지, 하는 상황에 이르면 독서욕은 대차게 팽창하야 책이라면 성경 창세기마저 박진감 넘치는 지경에 이르고 마는 것이다. 아담이 셋을 낳고 셋이 에노스를 낳고 에노스가 게난을 낳고 게난이 마할랄렐을..... 우오와아아아 너무 재밌어, 소오오름.....
이게 다 무슨 말인가 하면, 월요일 화요일을 책으로 꼴딱 말아 드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으하하하.....
2

1971년 미술사학자 린다 노클린은 위대한 여성 미술가가 없는 이유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그녀는 특히 '무엇이든 존재하는 것은 자연스럽다'는 전제에 도전하며, 미술가로 성공하기 위한 제도적 조건에 대해 조사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19세기에는 미술가가 되기 위한 훈련과정에 '누드모델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가 필수'였다는 사실을 검토했다. 그러나 19세기 여성 미술가들에게는 어떤 누드모델을 그리는 것도 금지되어 있었다. 노클린은 다음과 같이 썼다. "권리를 박탈당한 이 한 가지 불합리한 예-여성 미술도들이 누드모델을 대하지 못한다는 사실-만 보아도, 여성의 재능과 천재성이 남성과 같은 기반에서 성공을 거두기란 제도적으로 절대 불가능함을 알 수 있다." 그녀는 이 근본적 의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그 책임은 우리의 제도와 교육-인간이 의미 가득한 상징, 기호와 신호들의 세계로 진입하는 순간부터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넓은 의미에서의 교육-에 있는 것이다."
_ 메리 앤 스타니스제프스키,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
어느 날 저녁에 집주인 노파가 곁에서 한담을 나누다가 갑자기 물었습니다. "선생은 책을 읽은 사람이니 이런 뜻을 아시는지요? 아버지와 어머니의 은혜는 똑같고 더구나 어머니가 오히려 더 애쓰시는데도, 성인들이 교훈을 세우기를 아버지를 중히 여기고 어머니는 가벼이 하며 성씨도 아버지를 따르게 하였고 복(服)을 입을 경우에도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한 등급 낮게 하였습니다. 아버지의 혈통으로 집안을 이루게 해놓고 어머니 집안은 도외시하였으니 이건 너무도 편파적이 아닌가요?" 그래서 저는 "아버지께서 나를 낳으셨다, 라고 했기 때문에 옛날 책에는 아버지가 자기를 처음 태어나게 하신 분으로 나와 있소. 어머니의 은혜도 무척 깊기는 하지만, 하늘의 으뜸, 탄생되게 하는 근본의 은혜가 더 중요한 탓일 겁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노파는 "선생의 말은 옳지 않습니다. 내가 생각해보니 그렇지 않습니다. 풀이나 나무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아버지는 나무나 풀의 종자입니다. 어머니는 나무나 풀로 보면 토양입니다. 종자가 땅에 떨어지는 것은 그 베풂이 지극히 미미한 것이지만, 부드러운 흙의 자양분으로 길러내는 토양의 은공은 대단히 큽니다. 밤의 종자가 밤나무가 되고 벼의 종자가 벼가 되는데 그 몸 전체를 이루는 것은 모두가 땅기운입니다. 그러나 결국 나무나 풀의 종류는 본래의 씨를 따라서 나뉘게 되는 것이니, 옛날 성인들이 교훈을 세워 예를 제정한 것은 이러한 이유인 것으로 생각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노파의 말을 듣고 흠칫 크게 깨달아 공경하는 마음이 일었습니다. 천지간에 지극히 정밀하고 오묘한 진리가 이렇게 밥 파는 노파에게서 나올 줄이냐 누가 알았겠습니까? 기특하고 기특한 일입니다.
_ 정약용 지음, 박석무 엮음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딱히 엮으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어떤 이의 지혜와 재능이 발현되어 인정받는 과정에서 교육이나 사회 일반의 제도적 문화적 제약이 작용한다는 사실과, 그런 압박 속에서도 피어날 지혜는 피어난다는 것을 큰 눈으로 묶어 보는 것도 완전 억지는 아닐 것이다.
정약용이 형에게 보낸 저 편지를 옮겨 놓은 엮은이는 각주의 짧은 해설을 통해 밥 파는 노파에게서도 배우는 다산 선생의 태도를 칭찬하였다. 물론 다산의 태도에 찬사할 여지가 있긴 하지만, 저 글의 내용으로 미루어보건대 저건 그냥 다산 선생이 배울 만해서 배운 것이다. 다산의 입을 틀어막은 저 말을 밥 파는 노파가 아니라 이름난 유학자가 똑같이 했다면 누구에게서나 배움을 찾는 다산의 태도 운운했을까.
아랫사람에게도 배울 것이 있다는 말, 불치하문不恥下問의 말은 훌륭한 듯 보이나, 배움과 별개로 두 사람의 고정된 관계를 더욱 견고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배울 게 있어서 배우긴 했지만 배움이 끝나도 낮은 이는 낮은 이다. 그러므로 가르침을 준 이가 지니고 있던 지혜가 훌륭한 게 아니라, 배운 이의 인품이 훌륭한 것이다. 그는 이제 모든 걸 가졌다. 지혜를 얻었고, 덕성을 인정받았고, 권력은 그대로 지켰다.
아랫사람이라 하여 아예 묻지 않는 이가 하급이라 하겠으나, 불치하문의 옛 인식을 고수하는 이도 상급에 도달하기는 어렵다. 최소한 난 인정 못 해. 흥.
3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_ 가와바타 야스나리, 『설국』
어느 겨울 당신과 친구는 함께 일본 여행을 떠났고, 이틀을 묵은 온천장을 나와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기념품으로 머그컵 한 쌍을 사서 나누어 가졌다. 그 컵에는 너무도 유명한 저 설국의 도입부 첫 두 문장이 세련된 흘림체로 각각 하나씩 새겨져 있었다. 두 사람은 고민 없이 각자 좋아하는 문장을 골랐고, 겹치지 않았으므로 다툼 없이 자기가 원하는 머그컵을 챙길 수 있었다,
고 한다면, 어느 컵을 챙기시겠어요?
자체로 더 아름다운 것은 두 번째 문장이지만 저 홀로 설국의 문장임을 주장할 수 있는 문장은 첫 번째 문장이다. 첫 번째 문장 없이 두 번째 문장만 툭 주어진다면 우린 저게 설국의 두 번째 문장임을 알아채기 어려울 것 같다. 첫 번째 문장 속 ‘설국’ 즉, ‘눈의 고장’이라는 말이 앞서지 않으면, 밤의 밑바닥이 하얘진다는 표현도 영문을 알 수 없는 문구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아아, 이것은 딜레마.....
4
각각의 모든 인간 조건에는 영혼이 있습니다. 이건 당신이 무조건 들어야 하고, 내가 무조건 당신에게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가난하고 초라하지만 그래도 나 자신을 존중합니다. 타인에 대한 질투는 무조건 어리석습니다. 질투는 일종의 망상입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처지를 존중해야 합니다. 그래야 모든 이들에게 이롭습니다. 그런 점에서 나는 당신이 나에게 미칠지도 모르는 영향 또한 두렵습니다. 그 의미는 당신의 영향력으로부터 나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행해져야만 하는 내면의 불필요한 노동이 두렵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을 만나러 달려가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달려갈 수가 없습니다. 새로운 사람을 사귀는 일, 그건 어떤 의미에서건 어느 정도는 노동입니다. 그리고 이미 당신에게 밝혔듯이, 나는 전적으로 편한 것이 좋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당신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요? 하지만 그런 건 내게 상관이 없습니다. 나는 그런 일을 상관하지 않는 삶을 원합니다. 또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당신에게 굳이 사과를 늘어놓지도 않겠습니다. 어차피 입에 발린 사과일 테니까요. 누구나 진실을 말할 때는 정중할 수 없는 법입니다.
_ 로베르트 발저, 「한 시인이 한 남자에게 보내는 편지」
실패가 쌓이면 사람이 두려워진다. 아예 모르는 사람보다 조금 아는 사람을 피하게 되는 것이 먼저다. 그 다음은 새로운 사람을 만들지 않는 단계, 그리고 실패의 탑 꼭대기가 점점 높아짐에 따라 마침내 소중한 사람들을 하나씩 거리끼게 된다. 오래 머물면 결국 모든 사람을 잃어버리는 탑, 나라는 사람마저 녹아내리는 높고 뾰족한 탑이 잔뜩 지어진 세상이다. 달도 가려진 새벽 신림동 고시원 옥상에서 나는 보았다. 사방에서 빛나는 교회당 붉은 십자가들 사이사이로, 저마다의 모양과 높이로 자라고 있는 회색 탑의 바다를. 그들은 이른 점심을 먹는다.
무릎 나온 회색 트레이닝복에 슬리퍼를 꿰어 신고 거리에 나와, 직장인들이 점심을 먹으러 나오기 전에 밥집에 들러 후다닥 한 끼를 해결한다. 하나의 테이블엔 한 사람만 앉아 있다. 어제 내가 앉은 테이블에 오늘 앉은 이가 어제 앉은 테이블에 오늘 내가 앉는다. 그럼에도 서로 말을 하지 않는다. 서로의 탑을 맞대어 높이를 재지 않는다. 그래봐야 그것은 진 사람과 진 사람의 지는 싸움일 뿐이다.
문제는 그렇게도 살아진다는 것이다. 조금 비참하고 가끔 슬프고 문득 외롭고 항상 지치면서도, 어떻게 숨은 쉬어진다는 것이다. 적응이 된다는 이야기, 무뎌진다는 이야기, 내가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미련이 조금씩 줄어들고, 없이도 살아지는 것을 보니 인간에게 인간이란 그다지 필요 없는 것이로구나, 하루에 한 움큼씩 딱딱해진다는 이야기다.
꼭 실패하지 않은 인간에게도 인간과 엮이는 일 자체가 하나의 노동인 세상이라고 한다. 오랫동안 그 노동 하는 법을 잊고 살았다. 완전히 다 까먹기 전에, 관계를 만드는 장치의 엔진이 완전히 꺼지기 전에, 이제 슬슬 다시 시작하면 좋겠다.
백수 생활 5년이면, 야근이 소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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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금 잠적을 시도하자. 자꾸 시도해서 쪽팔리긴 한데, 일단 시도는 하자.
--- 읽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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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6 / 박시백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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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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