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은 syo, 읽는 syo, 그리고 읽을 syo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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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읽은 사람’이라는 사실엔 별다른 흥이 나지 않지만 ‘읽는 사람’이라 늘 뿌듯하고 ‘읽을 사람’이라 생각하면 들썩들썩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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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관점에서 보면 또 이렇기도 하다. 나는 내가 ‘읽은 사람’이라는 사실에 대해 별다른 걱정을 하고 있지 않지만, ‘읽는 사람’이라 늘 조바심치고 ‘읽을 사람’이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면 가끔씩 덜컥 겁을 집어먹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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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읽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읽기는 신비롭다. 신비로운 것을 다룰 때는 조심에 조심을 아무리 더해도 조심이 모자라지 않는 법이다. 읽기가 궤도에 오르면 오늘의 책이 내일의 책을 가리키고, 나는 별자리를 짚어 이야기를 더듬는 순례자처럼 그저 읽기가 시키는 대로 척척 읽어나가기만 하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조금씩 조심성 있는 눈이 생겨나기에 들여다보니, 책이 다음 책을 가리키고 있다는 생각은 내 순진한 오해였다는 아픈 진실이 관측되었다. 책이 가리키고 있는 것은 다음 책이 아니라 그저 이 책과 그다음 책 사이에 있는 ‘공간’이었다. 별과 별 사이에 있는 광막한 우주였다.
책은 자비롭지 않다. 책은 사람을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주지 않는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더 나은 사람을 만들어 주는 것, 그런 ‘것’은 없다. 오직 그런 ‘것들’만이 있다. 책은 의지가 없고 사람은 힘이 없다. 그래서 사람을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기 위하여 책에겐 사람이, 사람에겐 책이 필요한가보다. 책과 책 사이의 허허로운 어둠 속에 내가 있다. 뿌듯하고 조심스럽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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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책과 나쁜 책은 있다. 그러나 내가 당신을 위해 말을 꺼내서 좋은 책을 좋다고, 나쁜 책을 나쁘다고 가리키는 순간 좋은 책과 나쁜 책은 즉시 사라지곤 했다. 아니, 반대다. 두 책이 동시에, 중첩되어 존재했다. 마치 상자를 열기 전까지 죽음과 삶이 중첩되어 있는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 하나의 책은 좋은 책과 나쁜 책으로 중첩되어 당신이 상자를 열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내게 좋은 책은 내게 좋은 책이고, 당신에게 좋은 책은 당신에게 좋은 책이다. 김연수가 줌파 라히리에 감동하고, 줌파 라히리가 안토니오 타부키를 숭배해 그의 언어를 배우고, 안토니오 타부키가 페르난두 페소아의 모든 것을 섬겨도, 당신이 감동받거나 숭배하거나 섬기지 않는다면 그 계보 속에 이름을 올린 별들은 모두 거대한 북니버스 속 한 픽셀 빛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설령 반백년을 연구한 학자가 그 별들에 ‘고전’이라고 적힌 번쩍번쩍 빛나는 이름표를 달아놓았다 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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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마지막 페이지가 넘어가는 순간까지 어떤 책이 끝내 내게 좋은 책이 되지 못하고 창백한 뒷표지, 쇠창살 같은 바코드와 부질없는 ISBN을 드러내며 부끄럽게 물러가고 말았더라도, 나는 인정해야만 했다. 이 만남이 처음부터 사기였고 그 결과 죄 없는 내 시간의 변사체가 끔찍한 몰골로 발견되는데, 이 기막힌 형사사건에서 나는 피해자인 동시에 공범(때로는 주범, 가끔은 심지어 단독범)이기도 하다는 것을.
우리가 양자역학의 영역에서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완벽하게 관측할 수 없는 이유는, 우리의 관측 자체가 입자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상자를 열기 전까지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는 차원을 넘어서 죽은 동시에 살아 있는 기이한 상태로 우리를 기다린다. 그러나 우리 중 누군가 상자를 열면, 그 즉시 고양이는 죽은 고양이가 되거나 산 고양이가 된다. 만약 상자를 열고 꺼내보니 내 손에 죽은 고양이가 들려 있었다면, 이 가엾은 아이를 기어이 죽은 고양이로 만든 것은 이 빌어먹을 슈뢰딩거 상자를 만들어 고양이를 집어넣은 미치광이 과학자의 단독 범행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 식이라면 내가 알라딘에 들어와 이것조차 아깝지만 별 반 개가 없으니 어쩔 수가 없다며 별 한 개를 매기고, 영구 동토의 서릿발 같은 리뷰를 올려 책을 고소하려 안간힘을 쓰는 동안, 책 역시 이쪽을 맞고소하기 위해 변호사를 방문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책의 경우, 이게 처음 있는 일이 아니어서 이미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다. 책이 자신의 변호사 책상 위에 올려놓은 두꺼운 서류 뭉치에는, 자신이 출간된 이후 자신을 통해 인생의 한줄기 빛을 발견한 세상 수없이 많은 독자들의 간증 사례가 낱낱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내 입장은 점점 불리해져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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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읽은 syo’에게 좋았던 책, ‘읽을 syo’에게 좋을 책은 어떤 책일까? 이것은 죽는 날까지 멈추기 어려운 고민이고, 내려놓은 답도 저절로 모습이 변하는 기묘한 질문이다.
그러나 그 질문의 대답은 조금 더 고민해 보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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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 시간이 벌써 이렇게.
어쨌든 지금 syo는 다시 [한국/조선/대한] + [광복/독립/혁명/국민] + [단/군/회/협회] 등을 절묘하게 조합하다보니 제각각 다르긴 한데 또 너무도 유사하여 후손들의 골치를 썩게 만드는 위대한 독립운동 단체들의 이름과 구성원과 업적과 변천사를 외우러 떠나야만 합니다. 이동녕/이동휘 선생님, 이상설/이상재 선생님, 신규식/김규식 선생님, 김원봉/김두봉 선생님, 이런 한 글자씩만 다른 무수히 많은 훌륭한 선생님들의 함자를 찾아 떠나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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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도 써야만 할 것 같은 희한한 압박감 탓에 굉장히 흔하고 뻔한 이야기를 참 길게도 써놨군요. 한 줄 요약은 다음과 같겠네요.
‘내 탓이오’
두괄식이 못 돼서 죄송합니다.




나는 좋은 책(양서)이란 세상의 진실을 이해하도록 도와 독자를 창의적으로 각성시켜 주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범주의 좋은 책에는 시대의 한계 속에서 불건전하거나 비상식적이라고 배척받는(받았던) 내용도 얼마든지 담길 수 있다. 역사적으로 수없이 반복돼온 숙명적 사연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각성은 물론 독자의 개인적 여건에 따라 제각각 다르게 찾아올 것이다.
_ 김욱, 『책혐 시대의 책읽기』
독서는 사회적이면서 동시에 개인적인 현상이다. 독서의 수행은 사람마다의 몸과 뇌(지력)를 통해 일어나는 구체적인 일이다. 독서는 적당한 체력과 선행 지적 훈련, 그리고 독서를 위한 시간과 공간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TV 보기 같은 일과는 달리 매우 의식적이고 집약적인 지적 활동이다. 그런데 책의 선택과 구입, 독서 과정과 독서 후 인식과 행동의 변화에 이르는 모든 일은, 개인이 속한 당대의 이런저런 문화적 정황에 의해 주어지는 집합적 행위의 일부다. 이 집합적 행위와 인식을 '독서문화'라 지칭하고자 하는데, 그 안에서 개인은 어떤 책을 택하고 읽는(또는 택하지 않거나 읽지 않는) 자유를 가진다.
_ 천정환, 정종현, 『대한민국 독서사』
우리에게 다소 위안이 되는 이야기일지 모르겠지만 독서를 많이 한다고 해서 더 훌륭한 인격을 갖게 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유대인 학살을 자행한 나치의 수용소에서도 독일군 사령관은 틈나는 대로 괴테를 읽고 있었다고 하니 독서의 효과는 분명 제한적일 것이다.
_ 이현우, 『책에 빠져 죽지 않기』
책은 좋은 것이라 현자가 읽으면 더 현명해지고 어리석은 자라도 읽으면 설령 도움이 안 되더라도 해롭지는 않다. 책을 일만 권을 읽어도 일 하나 제대로 못 하는 사람이 있으니 독서가 무슨 소용이냐고 하는데, 그렇다면 그런 사람이 책을 읽지 않으면 오히려 일을 잘하는가? 하지만 두 종류의 사람은 책을 읽으면 안 된다. 교활한 자와 고집불통인 자. 교활한 자는 더욱 교활해져 세상에 해를 끼치고 자기 자신도 망친다. 고집불통인 자는 지식까지 겸비하니 더욱 완고해져 남의 말을 일절 듣지 않게 되어 설령 자신을 망치지는 않아도 평생 발전이 없다.
_ 이인호, 『책벌레의 공부』
--- 읽은 ---


연을 쫓는 아이 /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 왕은철 옮김
베를린에서 있었던 베를린과는 상관없는 이야기들 / 김인철 지음
--- 읽는 ---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 / 서중석, 김덕련 지음
소설을 쓰고 싶다면 / 제임스 설터 지음 / 서창렬 옮김
인간이란 무엇인가 / 백종현 지음
임정로드 4000km / 김종훈 외 지음
3·1 혁명과 임시정부 / 김삼웅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