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프닝 세리머니

  

우선, 차트를 보시죠.

 


, 보니까 어떤 생각이 드세요? 일단 지구력이 참 그지같다, 그죠?

 

환자분, 물론 시작부터 바로 딱 끊어내기는 어려웠을 거예요. 1월과 2월의 독서량을 보면, 그래도 조금씩 줄여나가려는 노력이 보였어요. 이건 칭찬해드릴게요. 그런데 3월 보실까요? 갑자기 무리하게 딱 끊으셨죠? 이제 조금씩 독서량이 줄어드니까 막막 자신감이 뿜뿜했던 거지, 한방에 딱 끊어낼 수 있을 줄 알았던 거라, 그쵸? 맞죠? 그랬더니 봐봐, 4월 어떻게 됐어요? 보이죠? 금단현상 왔죠? 12월 합친 것만큼 한방에 읽었죠? 어휴.....

 

원래 그렇게 다들 그렇게 무너지는 거예요. 12월 추세 맞춰서 조금씩 줄여나가면 좋았잖아, 우리가 괜히 처방해드리겠어요? 환자분, 저 이래봬도 전문가예요. 제가 봤을 때 환자분이 한 방에 책을 딱 끊을 수 있을 사람이었으면 처음부터 그렇게 처방을 해드렸죠. 근데 환자분, 딱 봐도 아닌걸. 누가 봐도 아닌걸. 아니라서 점진적으로 가자고 그렇게 처방한 건데, 멋대로 이렇게 하시면 어떡해요. 자기과신하다가 망한 전형적인 케이스시잖아요......

 

5, 6, 7월 독서량 줄인 게 칭찬받을 일이라고 생각하세요? 그때는 완전히 끊었어야 맞죠. 못해도 6월에 한 자리수 돌입하고 7월에는 무조건 제로 찍었어야죠. 아니, 양심 있는 사람이면 그랬어야지. 남들은 하루 열두 시간씩 공부만 하는데? 남의 돈 벌어먹기가 쉬울까봐? 아놔, 나 화 날라그러네......

죄송해요, 제가 언성이 좀 높았죠? 허허. 프로가 이러면 안 되는 건데.

 

8월은 작정하고 읽으신 거니까 넘어가구요, 9, 10월은 특별한 게 없네요. 보니까 욕심도 안 내셨고, 그렇다고 부러 줄이신 것도 아니고. . 11. 11월은 이해해드려야죠. 아플 때는 많이 먹고 푹 자는 게 좋잖아요. 마음의 상처는 다독 다치킨으로 해결하는 법이지요. , 12월도 별 건 없네요. 후반기는 그냥 그러네요.

 

환자분, 이제 내일부터 내년인데요. 내년은 어쩌시겠어요? 이제 정말 정체성을 정하셔야 되요. 올해처럼 이렇게 하시면,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사셔야 돼요. 그래도 괜찮으시면 뭐 맘대로 하셔도 되는데, 솔직히 그러고 싶진 않으시잖아요, 그쵸? 올해처럼 하면요, 내년도 폭망입니다. 뭘 하실 생각인지는 궁금하지도 않아요, 뭘 하셔도 폭망일테니까요. 아시겠어요? 제가 왠만하면 이렇게 쎄게 말씀 안 드리는데, 환자분은 정말, , 기분 나빠하지 말고 들으세요, 환자분은 정말, 정말 개노답이세요...... 제 커리어의 커다란 오점이세요...... 아니, 환자분, 그렇게까지 말씀하실 건 아니구요..... 제가 뭐 쓰레기라고까지는 말씀 안 드렸는데, 아니, 아니에요, 그 정도는 아니에요, 아니라니까요? 어어, 환자분, 지금 우세요? 아이고, , 환자분 뚝.......

 

 

 

2018 집계

 

01: 022

02: 020

03: 000

04: 044

05: 036

06: 030

07: 016

08: 116

09: 054

10: 047

11: 073

12: 042

----------------------------

: 500권

 

딱 떨어지는 500이라는 숫자 때문에 일부러 맞춰서 저렇게 읽은 걸로 오해하실까 봐 말씀드리는 건데, 정답입니다. 저건 일부러 맞춰서 읽은 거죠. 무심코 저게 되나요. 12월 중순쯤, 갑자기 올해는 몇 권 읽었나 궁금해져서 집계해봤더니 480 살짝 넘더라구요. 29일 오전까지 읽었더니 500권이 딱 떨어져서, 그 순간 바로 올해의 독서를 접었습니다. 딱히 그럴 필요까지 있었나 싶지만, 그땐 왠지 그러고 싶었어요...... 숫자ㅂㅌ......

 

500권은 많은 양일까요? 저는 알라딘을 제외하면 다른 SNS는 물론, 어떤 온-오프라인 커뮤니티에도 속해 있지 않아서 오직 알라딘 공간만이 syo의 판단 기준이 되는데요. , 1년에 1000, 1500권씩 읽고 그 책들의 리뷰를 다 쓰시는 분들이 syo의 서재이웃들 중에서만 해도 세 분이나 계시네요. 책 읽고 닭 먹는 것 말고 딱히 하는 게 없는 백수라는 점도 염두에 두고 보면, 500은 많아 보이긴 해도 입이 떡 벌어질 양은 아닌 것 같아요. 그리고 저 500500인 듯 500아닌 500같은 500이기도 하구요. 만화도 열 몇 권 들어 있고, 전체적으로 100같은 500을 읽었네요. 500같은 100을 읽으신 이웃 분들의 2018 정리 페이퍼들이 속속 올라오는데요, 읽으신 가운데 깊이와 무게를 갖춘 고전의 목록이 즐비하여 syo는 좀 많이 부끄럽습니다.

 

 

 

어쨌거나 2018 syo어워드

 

<< 에세이 >>

1.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 김혼비

2. 황현산의 사소한 부탁 / 황현산

3. 빵 고르듯 살고 싶다 / 임진아


+ 나는 울 때마다 엄마 얼굴이 된다 / 이슬아

+ 그대는 할말을 어디에 두고 왔는가 / 허수경

+ 열다섯 번의 밤 / 신유진

+ 아무튼, 스웨터 / 김현

+ 명치나 맞지 않으면 다행이지 / 이지원

+ 오늘도 가난하고 쓸데없이 바빴지만 / 서영인 지음, 보담 그림

 



<< 에세이라해야할지말아야할지모르겠는 산문 >>

1. 존 치버의 일기 / 존 치버

2. 정확한 사랑의 실험 / 신형철

3. 우리는 이렇게 살겠지 / 신용목


+ 한 글자 사전 / 김소연

+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 베를린 연대기 / 발터 벤야민


 

<< 읽기 / 쓰기 >>

1. 정희진처럼 읽기 / 정희진

2. 아직도 책을 읽는 멸종 직전의 지구인을 위한 단 한 권의 책 / 조 퀴넌

3. 책에 빠져 죽지 않기 / 이현우


+ 무엇이든 쓰게 된다 / 김중혁

+ 죽음을 이기는 독서 / 클라이브 제임스


 

<< 만화 >>

1. 내 이야기! 1~13 / 카와하라 카즈네 지음, 하루코 그림

2. 있으려나 서점 / 요시타케 신스케

 


<< 소설 >>

1. 곰탕 1, 2 / 김영탁

2. 왕을 위한 홀로그램 / 데이브 에거스

3. 여름, 스피드 / 김봉곤


+ / 한강

+ 축복받은 집 / 줌파 라히리

+ 내 이름은 빨강 / 오르한 파묵

 


<< 사회학 >>

1. 리얼리스트를 위한 유토피아 플랜 / 뤼트허르 브레흐만

2. 인생극장 / 노명우

3. 과학 같은 소리 하네 / 데이브 레비턴


+ 실력과 노력으로 성공했다는 당신에게 / 로버트H. 프랭크

+ 잃어버린 임금을 찾아서 / 이민경

+ 이토록 두려운 사랑 / 김신현경

+ 아마추어 / 앤디 메리필드

 


<< 시 >>

1. 가재미 / 문태준

2. 이제는 순수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 유계영

3. 다정한 호칭 / 이은규


+ i에게 / 김소연


 

<< 과학 / 공학 / 수학 >>

1. 수학이 필요한 순간 / 김민형


+ 김상욱의 과학 공부 / 김상욱

+ 교양인을 위한 화학사 강의 / 옌스 죈트겐 지음, 비탈리 콘스탄티노프 그림

 


<< 역사 >>

1. 역사 고전 강의 / 강유원


+ 역사는 재미난 이야기라고 믿는 사람들을 위한 역사책 / 정기문

+ 종횡무진 서양사 1, 2 / 남경태

+ 역사의 역사 / 유시민

 


<< 환경 >>

1. 지구 한계의 경계에서 / 요한 록스트룀 & 마티아스 클룸

2. 아무튼, 딱따구리 / 박규리

3. 어쩌면 가장 중요한 이야기 / 박병상

 


<< 철학 >>

1. 시간은 어떻게 돈이 되었는가 / 류동민

2. 카를 마르크스의 혁명적 사상 / 알렉스 캘리니코스

3. 담론의 질서 / 미셸 푸코


+ 비참한 날엔 스피노자 / 발타자르 토마스

+ 모두를 위한 아리스토텔레스 / 모티머 J. 애들러

+ 닌하오 공자, 짜이찌엔 논어 / 문성환

 


<< 인문학 >>

1. 페터 비에리의 교양 수업 / 페터 비에리

2. 철학은 전쟁이다 / 베르나르 앙리 레비

 


<< 정치 >>

1. 정치철학 / 스티븐 스미스

2. 정치 / 케네스 미노그

 


<< 2018syo를 가장 많이 바꾼 올해의 책 >>

내 이야기! 1~13 / 카와하라 카즈네 지음, 하루코 그림

 

 

 

<< 그리고 읽겠다고 크게 깝쳤으나 다 읽지 못하고 내년으로 건너간 책들 >>


+ 헤겔 / 테리 핀카드

+ 헤겔 / 찰스 테일러

+ 내게 무해한 사람 / 최은영

+ 경애의 마음 / 김금희

+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 / 박상영

+ 국가 / 플라톤


+ 마르크스 전기 1, 2 / 마르크스 레닌주의연구소

+ 정치사상사 / 앨런 라이언

+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 신형철

+ 시는 내가 홀로 있는 방식 / 페르난두 페소아

+ 불안의 책 / 페르난두 페소아

 



클로징 멘트 

 

좋은 책 나쁜 책이 있다고 syo는 생각합니다. 이 책보다 저 책이 더 좋은 책이야, 라고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몇 가지 기본적인 전제만 깔려 있다면요. 예를 들어서, 사람마다 좋은 책 점수를 내기 위한 내부 채점 기준이 다르다는 것, 그래서 내게 좋은 책과 네게 좋은 책은 같지 않을 수 있다는 것, 그러니까 내게 좋은 책을 네게도 좋은 책이라 강요할 수 없다는 것 같은 너무 당연해서 두 번 말하기에 입 아픈 전제들이요. 이상형 월드컵 하듯 토너먼트 식으로 줄을 세워서 좋은 책 랭킹을 매길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물론 개인적인 랭킹일 뿐, 공신력 같은 건 주장할 수도 없고 주장해서도 안 되겠지만요. 하여간, syo의 내부가 가지고 있는 좋은 책 채점표를 놓고 보면 올해는 좋은 책을 별로 많이 읽지 못한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그게 다독과 관련이 없진 않겠지요.

 

매년 하는 약속이고 매번 망해온 다짐이지만, 내년에는 정말 적게 읽고 오래 읽고 다시 읽고 싶어요. 많아야 한 달에 10, 한 해에 100권 정도만 읽으면 좋겠습니다. 매달 두세 권정도, 오래 반복해서 읽어야 될 무겁고 깊은 책을 골라 꼼꼼히 읽을 수 있는 기회가 되면 좋겠어요. 그게 되면 여기가 지금보다는 조금 더 쓸모 있는 글들이 올라오는 공간이 되려나요.

 

하찮고 깊이도 없는 독서의 흔적과 그에 걸맞은 신변잡기 글이나 올라오는 별 거 없는 서재인데다, 누가 원한 것도 아닌 글을 알아서 올리는 syo지만, 항상 과한 칭찬을 받고 그 칭찬이 여러 경로를 통해 적립금으로 변신하면서 매달 두세 권 정도를 공짜로 얻고 있었어요. 감사합니다. 쓰라고 시키지도 않은 글을 쓰듯이, 느끼라고 시키지도 않은 책임감 같은 걸 저 혼자 느끼고 있습니다. 어떤 책임감인가 하면요, ,

 

이웃님들의 글이, 그리고 이웃님들과 나누는 길지 않는 이야기들이 별 거 아닌 syo의 인생에 굉장히 큰 도움이 되고 있거든요. 처음에 알라딘은 syo에게 물에 빠진 사람이 잡는 지푸라기 같은 거였는데, 한 몇 년 여기서 놀았더니 어느덧 그 지푸라기로 물 위에 둥둥 떠다니는 섬을 짓게 되었어요. 그 위에 다시 지푸라기로 집도 지었어요. 그렇게 하루하루 둥둥 아주 잘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쪽에서도 받은 만큼 뭔가를 돌려드리고 싶은데, 가진 게 온통 지푸라기밖에 없어서요. 지푸라기 밖에 없어서 지푸라기를 드려야 되는데, 기왕 드릴 지푸라기라면 양질의 지푸라기를 드려야지, 하는 그런 책임감이요. 생각해 보면, syo가 사는 꼴에 대한 이야기가 그리 훌륭한 지푸라기가 될 것 같지는 않더라구요. 아무래도 여기는 책 읽는 사람들이 책 읽는 공간이니까요. 그래서 2019syosyo를 줄이고 책을 늘리는 syo가 되는 게 목표입니다.

 

어찌되었든 syo2019에도 열심히 읽겠습니다.

 

그리고 이웃님들의 2019년이, 읽고 싶은 책이 생기고, 읽고 싶은 책을 마음껏 읽을 여유가 생기고, 읽고 싶은 책을 읽고 나니 만족과 행복이 생기고, 그러고 났더니 읽고 싶은 책이 또 퐁퐁퐁 생겨나 끝없이 행복한, 그런 행복의 무한루프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while(read) { read++; your_happiness++; }

 

 


방송 사고

 

좀 오글거리지만, 이런 글로 한해를 마무리 하는 것, 한번쯤 꼭 해보고 싶었다니까요

ㅎ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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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겟타 2019-01-01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독을 실천하시고 계신 syo님에 경외를!
역시 유명인은 다르구나를 느끼네요. ^^
18년에도 syo님의 정성스런 글에 저에게도 배울 것이 많았습니다.
올 한해는 작년보다 더 나은 한 해가 되시길 바랄께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syo 2019-01-01 19:33   좋아요 1 | URL
유명인이요?? ㅋㅋㅋㅋㅋㅋ 정말 어색한 단어다.....

2019에는 아무래도 블랙겟타님과 몇 권을 함께 읽게 될 모양인데, 저도 많이 배우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구요^-^

2019-01-01 18: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1-01 19: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1-01 19: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1-01 19: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 2019-01-01 2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어쩜 이렇게 맛깔나게 페이퍼를 쓰시는지 ㅋㅋㅋ 찾아읽는 쇼님 글! 올해도 잘 부탁드릴게요 ㅎ~

syo 2019-01-01 22:12   좋아요 1 | URL
여기 찾아오셔도 저는 없을 거예요. 아마 쟝쟝님 서재에 쟝쟝님 글 찾아읽으러 갔을 걸요? ㅎㅎㅎ

로쟈 2019-01-01 21:2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syo님이 직장을 갖게 될까봐 은근히 걱정이 되네요. 새해에도 클리닉은 꾸준히 다니시는 걸로.~^^

syo 2019-01-01 22:20   좋아요 3 | URL
양을 줄이고 줄여나가다 보면 결국 한 권 한 권을 지금보다 훨씬 신중하게 골라야 하겠지요. 그렇게 되면 결국은 로쟈님께 더 많이 기대게 되겠구요.

로쟈님께는 2019년에도 계속 좋은 글 써달라는 말씀을 드리는 게 굉장히 새삼스럽고 외람되는 느낌입니다. 그래서 건강하시길 부탁드릴까 합니다^-^

카알벨루치 2019-01-01 22:25   좋아요 2 | URL
로쟈님 팩트폭격하십니다 이 댓글 알람으로 받고 얼마나 웃었는지 모릅니다 역쉬👍👍👍

독서괭 2019-01-02 0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벌써 이렇게 많은 댓글이 달리다니..! 역시 인기쟁이 syo님.. 제가 늦었군요 크흑 ㅜㅜ
지난 한해 syo님을 알게 되어 좋았습니다. 북플에 님이 계속 글을 쓰시는 한 저도 북플에 계속 접속할 것 같아요. 올해도 잘 부탁드립니다~^^

syo 2019-01-02 10:21   좋아요 0 | URL
독서괭님은 syo의 하이패스 고객님이시라서 늦고 그런 거 없습니다. syo의 글에 아무도 댓글을 달지 않던 시절부터 무플방지위원회로 활동하셨잖아요.ㅎㅎㅎㅎ
올해는 좀 더 자주 뵐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여기 말고 독서괭님 서재에서두요^-^

레삭매냐 2019-01-02 2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독 500권은 되어야 나올 법한
설렉션이었습니다 !!!

역시나 대단하십니다.

syo 2019-01-02 23:07   좋아요 0 | URL
아닙니다. 솔직히 말햐서 레삭매냐님 셀렉션에 비하면 정말 부끄러운 수준입니다..... 보면서 질투랄지 열둥감이랄제 그런 기분이 들었었지요.

여름숲 2019-01-02 2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뒤늦게 북플을 알고 대단하신 분들을 뵙습니다. 어쩜 그리도 멋지신지...요즘은 하루의 시작과 끝을 이곳에서 합니다. 행복합니다. 고맙습니다^^

syo 2019-01-02 23:10   좋아요 1 | URL
하림님 환영합니다. 제가 알라딘의 뭐는 아니지만 환영하구요.

조만간 하림님의 활동으로 다른 분들도 행복을 느끼게 될 날이 오겠지요?^-^

북다이제스터 2019-02-25 2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읽기 힘들 때, 책 읽어서 뭐하나 라고 느낄 때 쓰신 이 글들을 다시 찾아와 다시 읽습니다.
그러면서 다시 힘 얻어 갑니다. 책 읽기 자체의 즐거움을 매번 얻어갑니다. 감사합니다. ^^

syo 2019-02-27 21:30   좋아요 1 | URL
북다님께도 슬럼프가 찾아오곤 하는군요. 워낙 꾸준하셔서 그런 거 없으실 줄 알았는데.....
또 한편으로는 북다님 역시 사람이라는 생각에 친근감(?)도 생기고 그러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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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쓰러울 정도로 줄어든 통장 잔고를 제외하고 2017syo2018syo로 바뀌면서 변한 것은 다음과 같다. 숫자는 변하지 않았으나 부위별 집적도가 달라져 기묘하게 뵈기 싫어진 육신. 이제는 전기방석을 풀 파워로 가동해야 추위를 버틸 수 있게 된 육신. 조금만 잠을 잘못 자도 다음날 목이 뻐근한 육신. 육신. 육신. 야 이 비루한 육신 놈아...... 이런 저런 것들을 죄다 상실의 범주에 밀어 넣고 나니, 과연 얻은 것은 무엇인가, 그런 것이 있기나 한가를 따져보게 되는데, 책이..... 그 와중에 책꽂이에 꽂힌 책의 수가 쬐끔 늘었다..... 하지만 세상의 보편적인 시선은 그것을 상실로 친다. 돈도 없는 놈이 또 책을 샀니. 책이 저렇게 많은데 또 샀니. 그래야만 했던 거니. 왜 대답이 없니...... 그래야만 했던 것일까? 2018syo2017syo보다 더 많은 책을 책꽂이에 꽂아 놓아야만 했던 것일까?

 

울어봐야 글만 길고 축축해진다. 어차피 답 없다. 답 없는 인생이다. 인생은 짧다. 긴 말 않겠다.

 

 

201812 : 42

 


1. 아침의 피아노

벤야민이 말한 역사의 천사에 대해 설명하시던 김진영 선생님의 표정과 목소리가 떠오른다. 5년쯤 된 것 같다. ‘자기가 응시하고 있는 것으로부터 끊임없이 멀어지는’, ‘천사는 머물고 싶고 죽은 자들을 불러일으키고 또 산산이 부서진 것을 모아서 결합하고 싶지만, ‘폭풍은 그가 등을 돌리고 있는 미래 쪽을 향하여 간단없이 그를 떠밀고’ 있는파울 클레의 바로 그 천사가김진영 선생님의 부고를 들은 날 내 머릿속에 떠올랐다선생님은 벤야민을 보듯이 그 천사 그림을 보시는 듯했다그리고 나는 이제 벤야민을 보시는 선생님을 보듯이역사의 천사를 본다이제 폭풍을 피하여 날개를 편히 쉬이시기를.


2. 시민의 물리학

: 시민의 물리학이라는 말은 시민을 위한물리학이라는 뜻이겠으나, 솔직히 말해서 시민이라면 이 정도는 알아야 할물리학이라는 뜻이면 좋겠다는 생각, 그리고 그래서 시민들이 다들 이만큼의 물리학 지식은 알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없진 않다. 과학에 대해 아는 것은 과학 바깥을 보는 눈을 크게 바꾼다. 물론 지나치게 나이브한 생각이겠지만, 어쨌든 상대성이론이나 양자역학에 대한 굉장히 기초적인 개념만 가져도 타인을 보는 방법, 타인의 사상을 받아들이는 방법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다. 객관적인 관찰이 불가능하고 모든 판단이 근본적으로 개입이 될 수밖에 없다는 인식을 받아들이게 되고, 그에 따라 해서는 안 될 짓과 해서는 안 될 말들이 늘어나며, 결과적으로 뭐라도 더 나아진다. 과학 알아서 나빠질 일은 없다.

 

3. 슌킨 이야기

: 혹자는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작품 중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꼽는다고 하지만, 대저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다니자키 준이치로가 그리는 사랑은 늘 지극하면서도 어딘가 기묘하게 뒤틀린 모양새인데, 그 뒤틀림 속에 뒤틀린 아름다움이 숨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너는 이 사랑이 굽고, 꺾이고, 왜곡되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건 네가 소중히 품고 있는 사랑의 이데아가 그야말로 이데아라서 그런 것일 뿐이지. 눈을 크게 뜨고 네 육체를 둘러친 사랑을 세밀히 보라. 많이 다르다고 단언할 수 있는가? 이 사랑이 기괴하다고 할 수 있겠으나, 그건 그저 너 자신이 기괴하다고 인정하는 일에 그칠 것이다. 이런 설득력 있는 윽박지름에 쫓겨 인정하게 되는 그런 아름다움 같은 것.......

 

4. 만화로 배우는 곤충의 진화

: 이런 책은 실력만으로 나올 수 있는 것은 아니고, ‘곤충이라는 희귀하고 널리 인정받지 못하는 장르에 자신의 역량과 애정을 쾌척할 수 있는 참인재가 태어나야 하는 것인데 고맙습니다. 재미있었어요.

 



5. 너무 재밌어서 잠 못 드는 철학 수업

: 과연 그렇게 자신 있단 말이지? 하는 마음으로 굳이 잠들기 전에 침대에 누워서만 읽은 syo의 삐딱함도 삐딱함이지만, 정말 이 너무 재밌어서 잠 못 드는시리즈의 어느 책도 읽다가 잠에 빠지지 않은 적이 없으니, 너희도 참 너희다.

 

6. 단어의 발견

: 이것이 하나의 이야기라면 아마도 전하고 싶은 말이 있었을 텐데 그게 뭔지 알아채지 못하겠다. 이것이 하나의 그림이라면 아마도 보여주고 싶은 모습이 있었을 텐데 그게 뭔지 알아채지 못하겠다. 그저 말하고 싶은, 보여주고 싶은 마음만을 감지하였다. 그건 알 수 있었어요. 당신의 글은 아름답고 당신의 말은 훌륭하네요. 결국 당신이 전하고 싶은 말, 당신이 보여주고 싶었던 모습이 제가 알아 챈 딱 그것이었으면 참 다행이겠네요.

 

7. 인류세

: 인류세를 맞이하여 우리가 무엇을 하자- 이런 걸 기대하고 읽었으나, ‘인류세라는 단어의 정체성을 지정하고, 그 단어의 참된 저작권을 주장하며, 인간이라는 특별한 종의 위대함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데 9/10의 분량을 할애한다. 나머지 1/10은 참고문헌 목록이다. 전혀 설득되지 않았고, 틀린 생각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필요한 생각이라고도 느껴지지 않았다.

: , 은근히 잘 안 읽힌다.

: , 저자는 되게 아는 게 많은 것 같다.

 

8. 하나만의 선택

: 박이문 선생님의 인생 행로를 세밀하게 따라가 볼 수 있는 자서전이다.

: 사실 이건 자서전의 정의를 중언부언한 거나 마찬가지인 셈인데, 왜 이렇게 써야 했을까? 엇흠. 엇흠.

 


9. 나는 회사 다니면서 공부하기로 했다

: 첫째, 인간은 무엇이며, 무엇까지 할 수 있는지를 알게 된다.

: 둘째, 그렇다면 나는 결국 인간이 못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10. 근방에 히어로가 너무 많사오니

: dcdc! dcdc!

 

11. 한국 현대 문학사를 보다 1

12. 한국 현대 문학사를 보다 2

: ‘현대 문학을 좋아라 읽고 역사도 좋아라 읽는데 한국’ ‘현대 문학’ ‘에 대해서는 무지몽매에 가깝다. 그것은 아무래도 현대 문학에 대한 애정이 한국에 대한 감정과 상쇄되면서.....

 


13. 같이 걸어도 나 혼자

: 꼭 두 여주인공의 우정에 관한 소설로 독해할 필요가 없는 것 같다. 그럴 필요가 없는 수준을 넘어서서, 사실 여성의 우정에 대해 유쾌하고 치밀하게 포착해 낸 근사한 소설이라는 정세랑 소설가의 추천사가 붙어있지 않았다면, ‘우정이라는 제재는 syo에게 포착되지 않았을 지도 모르겠다. 그런 것 없이 봐도 여러 모로 읽을 만한 소설이다. 읽어야 할 소설까지는 결코 아니겠으나.

 

14. 10년 동안의 빈 의자

: 오랜만에 시집이나 한 번 읽어볼까, 이러면서 서가에서 뽑아서는 음음 새롭군 새롭도다 그러면서 읽었는데, 다 읽고 북플에 읽은 책으로 등록하려고 보니까 5월에 읽은 책이었음. 5월은 올해 5월이었음...... 과연 이런 것도 한줄평으로 기능할는지......

 

15. 어린 당나귀 곁에서

: 팟캐스트를 진행하시던 시절 들었던 김사인 선생님의 목소리를 들으며, 세상에서 가장 다정하고 정갈하며 물이 깊고 물살이 급하지 않은 시를 생각했다. 아무것도 몰랐던 거지, 그 호수 같은 소리와 말에 이르기까지 시인이 밟아온 길들에 대해서. 어떤 시인은 시를 읽으면 읽을수록 점점 더 알 수 없는 사람이 되어 시 뒤로 숨어드는데, 또 어떤 시인은 시를 읽고 나서야 진짜 이 사람을 알겠구나 하는 외람된 생각을 들도록 하며 시 앞으로 나선다. 다시 한 번 외람되지만, 그렇다면 그 시인은, 혹은 시는 외설적이라 해도 되지 않을까?

 

16. 처음부터 잘 쓰는 사람은 없습니다

: 처음부터 잘 쓰는 사람은 당연히 없을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잘 쓰는 사람이 될 수도 있겠지. 그런데 그게 언젠데? 3년 뒤? 6달 뒤? 다음 주? 이 책을 다 읽고 난 뒤?

: 요런 마음으로 사람들은 쓰기 책을 들여다보는 것 같다. 일단 나보다 잘 쓰는 것이 분명한 이가 쓴 쓰기 책은 뭐라도 건질 게 있을 거라는 희망(으로 위장하였지만 실은 노력을 최대한 아끼면서 실력을 얻고 싶은 도둑놈 마음)으로 syo는 이런 책을 자꾸자꾸 열어본다. 그리고 별 게 없다는 사실을 재확인하면서 아쉬운 동시에 안심한다. 휴우, 최소한 나만 빼놓고 다들 몰래 보고 있는 글쓰기 비급 따위는 없겠구만.

 


17. 전공이 보이는 미분적분학

: 미분적분으로 젊은 시절 아름다운 추억을 되살려 보려는 이를 보통 변태라고 부를 것이다. 그래도 이과 출신에다 한때 공대에 몸을 담았던 사람으로서, 10년도 더 전에 만났던 어떤 난관들을 돌이켜 다시 한 번 젊음을 소환하려는 시도를 한 것인데, 변태라고 손가락질하기 보다는 따뜻한 마음으로 보듬어 주시길. 옛날의 금잔디 동산에 메기 같이 앉아서 놀던 추억을 되살리는 데 쓸 만한, 그 정도의 미분적분학 책이라 하겠다.

 

18. 마르크스의 특별한 눈

: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 우리가 평생을 바친다면 한두 가지, 진짜 천재들은 많이 쳐줘서 다섯 가지 정도의 주제에 관해 전공자가 될 수 있지만 그 대가로 5721582051020개의 분야에 대해서는 기껏해야 문외한만 면할 수 있는 운명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이 필요하다. 강의자. 그들을 축복해야 한다. 개론서 저자. 경외하자. 입문서 저자. 그 축복의 만신전에는 과연 만 개의 이름이 올라가겠지만, 그 가운데는 더욱 신심을 다해 감사해야 할 이가 있으니, 빌자, syo. 고병권 선생님의 불로장생을.

 

19 두 사람 : 마르크스와 다윈의 저녁 식사

: 한때 같은 도시에 살았던 두 사람이, 역사의 바퀴에 돌이킬 수 없는 거대한 충격을 안겨준 걸로 치면 TOP 5 안에 너끈히 들어갈 두 혁명쟁이가 전혀 교류 없이 저마다 살다 저마다 죽은 이유는 다윈의 무지나 오만(혹은 오판) 때문이라고, 마르크스 평전은 말한다(다윈 쪽에서는 신경도 안 쓰는 분위기다.) 만나지 못한 그들을 픽션의 저녁 식탁에 둘러앉혀 보았는데, 결국 그들의 만남은 안 만남과 하나도 다르지 않게 흘러갔다. 아쉬울 건 없지만 뿌듯할 것도 없는 만남이어서, 아쉬울 것도 없지만 뿌듯할 것도 없는 책이 태어났다.

 

20. 백석 평전

: 최고의 시인이 아니고서야 시로 기억되지 못하겠지만, 시로 기억될 수 있는 최고의 시인들 역시 완전한 한 명의 시인으로 기억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시와, 평전, 평전이 필요하다.

 


21. i에게

: 누구에게나 나와 맞춘 듯 잘 맞는 시인이라는 축복의 존재가 하나쯤은 있을 거라고 믿었다. 충분히 찾아보지 않아서 발견하지 못했을 뿐, 세상에 별처럼 넉넉히 뿌려진 저 많은 시인들 가운데 반드시 하나는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열심히 시를 읽었다. 그런데 막상 읽다보니 하나쯤 있을 거라는 생각은 틀렸고, 되게 많았고, 많은데 그들은 저마다 다 달랐고, 그들의 시가 제각각인 것으로 미루어보면 어쩐지 그들 저마다는 서로 사이가 좋지 않을 것도 같았고, 희한했지만 하여간 기뻤고, 기쁜 마음으로 그 시인들의 이름을 마음에다 적어놓았다. 시를 읽으면 마음에 적어놓은 그 이름에 불이 들어온다. 그 불이 이름을 더 깊고 선명하게 새긴다. 더 깊고 선명하게 시를 좋아하게 된다.

 

22. 밥벌이의 미래

: 는 어둡습니다. 어두워요, 여러분. 제가 이런 책을 꽤나 열심히 읽었는데요, 무슨 책을 읽어도 어둡고 어둡고 또 어둡기만 합니다. 우리 모두 어두워질 거예요. 밝은 미래는 오로지 부동산에만 있습니다. 오직 부동산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

: 이 책 이야기를 하자면, 그래도 다른 책들에 비하면 밝은 면을 선명하게 그려주는 좋은 책이다. 예를 들어, 이 책 이전까지의 syo는 읽으면서도 그냥 도로를 싱싱 달리는 자율주행차의 모습만 추상적으로 상상하고 말았었는데, 이 책을 읽고 나니까 차를 타고 목적지로 가는 동안 차 안에서 노래 연습도 하고, 요리도 하고, 섹스도 하는 구체적인 그림을 떠올릴 수 있었다...... 보세요 여러분, 자율주행차가 대중화되면 이제 숙박업도 멸망하는 겁니다......

 

23. 나는 이름이 있었다

: 12년 교육과정이 가르쳐준 시인이라는 놈을 기준으로 생각해 볼 때, 오은이란 사람은 정말 시인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고, 오은의 시는 이게 이긴 한 건지 의심스러울 때가 많다. 그런데 바로 그 알 수 없음과 의심스러움이야말로 오은이 시인이고 오은의 시가 시인 이유를 증명한다.

: 라고 믿으며 넘어가기로 했다. 원래 오래 박힌 생각은 고쳐먹는 데 오래 걸린다.

 

24. 아마추어

: 프로라는 새끼들이 나를 속이고 내 지갑을 털어가고 있으니 마땅히 분개하자! 라는 식의 이야기를 한다기보다 오히려, 프로가 되면 남을 속여 그의 지갑을 털어먹게 되는 것이 순리이므로 마땅히 경계하자! 쪽에 가까운 것 같다. 이러나 저러나 아마 입장에선 참 드러운 세상이 아닐 수 없다.

 


25. 웃기는 과학책

: 부족하다! 웃기는 것도 부족하고 과학도 부족하다!

 

26. 이제는 순수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 솔직히 무슨 말인지는 잘 모르겠다.

: 그럼에도 이렇게 쓰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은 잘 알겠다. 어떤 시는 작품이 아니라 교보재가 되기도 한다. 시를 쓰지 않는 사람에게도. 제일 참신한 시집인가 하면 그건 모르겠다. 이 시집 밖에서는 구할 수 없는 표현들인가 하면 그것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이 이 시들의 말맛을 조금이라도 배워야 할 바로 그 때라는 것은 알겠다.

 

27. 마우나케아의 어떤 밤

: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마음을 지닌 사람이 별을 관측하는 일을 하게 된 것인지, 별을 관측하는 일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일을 사랑하게 되는 것인지 구별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게 별은 아름답다. 사진으로 봐도 아름답다. 거실에서 TV를 보던 엄마에게 이 책을 펼쳐 마우나케아의 밤하늘을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더니 엄마가 TV를 껐다. 집은 조용해졌고, 엄마는 별을 헤는 속도로 조용히 조용히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마우나케아의 밤하늘에 뜬 별이 채 다 들어있지도 않을 그 사진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28. 공격성, 인간의 재능

: 1968년에, ‘공격성이라는 물건의 이로운 기능만큼은 꼭 지키고 싶었나보다. ‘공격성이라는 어휘의 외연을 과하게 키우는 느낌이 없진 않아도, 전체적으로 논조에 설득력이 있다. 그래, 공격성은 꼭 나쁜 것만은 아니지, 좋은 점도 있지, 그건 건질 수 있으면 건져야지.

: 그렇지만 2018년에, 공격성의 나쁜 점이 온 세상에 만연한 2018년에도 공격성의 좋은 점 자체가 없어진 건 아니니까 저자는 똑같은 주장을 계속 하겠고, 계속 해도 되겠지만, 그 주장을 하는 목소리의 크기는 어떻게 변했을까 생각해본다.

 


29. 운동 미니멀리즘 : 짐마일로 클래식

: 운동에 꽂혀서 읽은 게 아닙니다. 미니멀리즘 때문이에요. 안할 수 있을 최대한도로 안한다는 말이잖아요, 미니멀리즘이. 그런데 제가, 미니멀리즘이라는 것이 최소지향이지 소멸지향이 아니라는 사실을 간과했네요......

: 생각보다 집요하게, 그러니까 이게 미니멈이라는 압박을 팍팍 가해오고 있다. 양심을 건드리는 전략을 사용하다니. 똑똑하다.

 

30. 유령

: 이 이야기만이 가지는 대체 불가능한(불가능까지는 아니더라도 대체비용이 막대한) 한 방, 그건 뭘까? 어디 있을까?

 

31. 교양인을 위한 화학사 강의

: 여기서 말하는 화학사는 화학의 정사正史가 아니라 야사野史. 모름지기 정사보다 갑절은 재미있다는 점이 야사의 장점이겠다.

: 단점이라면, 야사만 가지고 행세하기는 쉽지 않다는 점. 그리고 야사의 재미를 오롯이 누리려면 정사를 알아야 한다는 점 등등. 화학사까지는 아니더라도 얼마간의 화학 지식을 갖추고 읽으면 훨씬 더 매력적일 책.

 

32. 나는 울 때마다 엄마 얼굴이 된다

: 마지막 페이지를 읽고 책을 덮으며 제일 먼저 한 일 = 이슬아 수필집 검색 및 주문결제. 눈 한번 깜짝하기도 전에 이슬아가 2만원을 털어갔다. . 루팡.

 


33. 민트의 세계

: 듀나의 발꿈치라도 되고 싶었던 때가 있었다. 그리고 그 열정이 다 사라져 추억으로만 듀나를 기억하는 오늘이 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모르겠는데, 하여튼 변한 것은 듀나가 아니라 syo일 것이고, 어쨌든 이제 syo는 듀나의 책에 크게 요동하진 않는다. 늙어서 그런 것 같다. 하지만 syo가 그러거나 말거나 듀나는 듀나의 일을 한다. 새롭고 신비로운 세계를 만들고 부수고 또 만들고 또 부순다. 이 땅에서 듀나만큼 많이 세계를 짓고 부순 사람이 또 있을까? 열정이 가신 눈으로 보아야 더 경이로운 작가가 있다. 공정한 찬사를 바치고 싶다.

: 뭐야, 나 뭔데 이렇게 진지해.....

 

34. 좋아하는 것을 함부로 말하고 싶어질 때

: 어떻든 당신의 시는 시가 될 수 없겠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아무래도 당신의 시는 나의 시가 될 수 없겠다고 말할 수는 있겠습니다. 당신의 시는 당신의 시로서 가치 있고 그 가치를 나는 나로서 잘 알 것 같습니다만, 어쩐지 함부로 말하고 싶어졌습니다. 좋아하지 않는다고 함부로 말하고 싶어졌습니다.

 

35. 작별

: 의외로 심심했던 한강과, 역시나 불안해 미치게 만드는 강화길과, 분명 누워서 읽기 시작했는데 다 읽고 나면 다소곳하게 앉아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하는 권여선과, ? 하는 사이에 끝나버린 김혜진과, 인문에세이로 문학상을 타 버린 이승우와, 언제나처럼 오늘도 도저히 못 읽겠는 정지돈과, 뭐지? 일곱 명인데 누가 빠졌지? 하고 살펴보니 바로 정이현이었던 정이현과.

 

36. 아무도 알려주지 않은 도서관 사서 실무

: 크리스마스 직전의 어느 저녁, 오래 안 친구 몇을 만나 커피 한잔 때렸는데 걔들은 제 앞가림을 그럭저럭 하며 살고 있었다. 나는 조금 부끄러웠지만 조금도 부끄럽지 않은 척, 물욕 없는 척, 이렇게 사는 게 반쯤은 내 의도인 척, 도서관 사서나 돼서 큰 돈 못 벌어도 책이나 실컷 읽으며 살다가고 싶구나- 라는 식의 말을 했다. 그리고 식은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켜며 상상했다. 도서관 카운터에 앉아 유유히 책장을 넘기며 머그에 든 커피를 마시는 내 모습을. 충만하였다.

: 며칠 후 이 책을 읽었다. 쌈싸다구를 얻어맞는 마음으로 그저 조아리며 읽었다. 그리고 나는 또 하나의 장래희망을 포기당했다. 박탈감이 조금은 있었지만, 주변의 매서운 질타를 받으며 장래 희망 장동건을 포기당했던 초1 시절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이었다. 그것보다 제발 그날 그 카페 그 공간에 사서 노동자가 없었기를 빌 뿐이다...... ‘사서나라니, 명실상부 2018 망언 대상.



37. 차별의 언어

: 따뜻하고 다정한 책이지만 어쩐지 분량에 비해 얻은 게 별로 없는 것 같다. 훌훌 넘어갔지만 어쩐지 훌훌 사라져버릴 것 같은...... 뒤통수를 뽜악 때리고 스스로의 인간성을 반성하게 하는 크리티컬 히트가 없었다. 훌훌.

 

38. 글쓰기가 뭐라고

: 겨냥하는 독자가 명확한 책인데 그게 나는 아니었다...... 이 책에서 가르쳐 주는 방법들을 동원해야 할 글쓰기는 내가 하지 않고 하지 않을 논증과 설득의 글쓰기. 그러면 이 책은 내게 무슨 쓸모인가 생각하다가, 그냥 인생살이 지침서로 받아들이며 읽기 시작했는데, , 의외로 도움이 되었다. 글쓰기는 인생이라더니, 글 잘 쓰는 방법을 살짝 꺾으면 그대로 삶 잘 사는 방법이 되는 것인가.

 

39. 시사IN 588

 

40. 그림으로 설명하는 개념 쏙쏙 통계학

: 평하고 싶은 말이 없으니 평하지 않기로 한다.

 


41. 오늘도 가난하고 쓸데없이 바빴지만

: 앉았다. 읽었다. 끝났다. 일어났다. 우와?

: 망원동은 알지도 가보지도 못하는 곳인데도 작가의 맛 묘사가 사람 마음에 불을 지른다. 방금 저녁 먹은 인간을 배고프게 만들어버린다. 하루키조차 나를 이렇게 대하지 않았는데!! 체포하고 싶은 솜씨가 아닐 수 없다.

: 귀엽고 다정한 "하수구가 막혔다" 꼭지를 널리 알리고 싶다. 통째로 긁어다 올리고 싶었지만, 그래도 되는 건지 몰라서 포기.

 

42. 이토록 두려운 사랑

: 사랑에 관해서라면 시작도 과정도 끝도, 머리도 몸통도 꼬리도, 두렵다고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잘나서 그런 게 아니라, 원래 그런 거니까. 사랑은 조금 불안하긴 해도 두려운 것은 아니고, 조금 겁나는 때가 있어도 역시 두려운 것은 아니고, 조금 아프긴 해도 두려울 만큼 아픈 것은 또 아니니까. 사랑은 그냥, 좋은 거잖아.

: 라고 믿고 살 수 있었던 것 자체가 실은 일종의 특권이었다. 그 특권은 때로는 무지에서, 때로는 무심함에서, 때로는 무분별함이나 무턱대고 밀어 붙일 수 있는 입장에서 나왔던 것인데,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그저 이쪽의 입장일 뿐이었다. 사랑으로 사랑에 역경과 어려움이 없었으므로, 나는 사랑을 알지만 사랑을 잘 모르는 이상한 인간이 되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다양한 두려움이 기본적으로 내장되어 있을 수밖에 없는 형태의 사랑을 할 일이 없었으므로, 나는 내가 하는 사랑을 알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하는 사랑을 모르는 반편이일 뿐인지도 모르겠다. 이제 어디 가서 한 사람 10년 만났다고, 사랑과 연애에 대해 아는 척은 하지 말아야겠다. 나는 내 옆에 있는 사랑, 내 사랑과 엮여 있는 사랑조차 해보지 못했다는(해보지 않아도 되는 입장이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다.

 

 

 

 

아직 신에게는 이틀이 남아있사옵니다만 여기서 일찌감치 12월의 독서를, 그리고 2018년의 독서를 접는 데는 사실 하찮은 이유가 있는데, 그 하찮은 이유는 다음 이 시간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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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2-29 21: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율주행차............. 미국에서는 택배도 드론이 나른다던데.. (물론 한국은 인건비가 더싸니까.. 한동안은 그럴리 없겠지만..)... 그 생각만 하면 아득해져요. 퇴직하고 택시기사한다는 제가 만난 그 많은 분들의, 노년은 어떻게 되는 건가 하고.. 또르르... 정말 부동산만이 답인건가요? // 이슬아 수필집은 제가 먼저 읽고 있습니다만! ㅋㅋ 2만원 안아깝사옵니다 // 줄어든 잔고 만큼 차오른 책장, (그리고 아마도 책 땜에 좁아졌을 집까지) 저와 같은 syo님 연말 소식에 어쩐지 동류으식을 느껴버리며..// 저 페미사이드 읽으러갈게여.. 쿨럭!

syo 2018-12-30 11:16   좋아요 0 | URL
1. 그런 옛 말씀이 있잖아요.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다˝ 인걸 다 필요없어요. 4차건 40차건 부동산만 의구하다......
2. 보물이지요, 이슬아. 그거 곧 인터넷 서점에도 풀린다는 이야기가 돌던데요
3. 이 짠한 동류의식..... 아, 쟝쟝님과 syo의 2019는 어떻게 될 것인가!!
4. 힘내세요!! 여성주의 책읽기 동아리 항상 응원합니다.

반유행열반인 2018-12-30 0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찮은 이유가 하찮지 않을 것 같은 이 기분은...뭐지요. 올 한해도 정말 열심히 읽으셨네요. 리스펙트!

syo 2018-12-30 11:17   좋아요 1 | URL
정말 하찮게 하찮은 이유라ㅎㅎㅎㅎ

전 그냥 읽어‘제끼는‘ 수준이지만, 알라딘에는 1년에 1500권을 읽고 하나 하나 리뷰를 남기는 무서운 분들도 많으니 리스펙트는 그분들을 위해 아껴두심이^-^

bookholic 2018-12-30 1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늘 엄청나십니다..^^ 행복한 연말 되세요~~~

syo 2018-12-30 15:30   좋아요 1 | URL
아닙니다. 제겐 북홀릭님의 다정하고 따뜻한 독서편지들이야말로 엄청나 보입니다 ㅎㅎㅎㅎ
내년에도 북홀릭님 글 꾸준하게 읽고 배우겠습니다^-^

목나무 2018-12-30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찮은 이유 빨리 알고 싶어요! ㅎㅎ
올 하해 syo님의 글을 읽을 수 있어 여러모로 제겐 기쁨이었어요. ^^
내년에도 좋은 글 많이 많이 써주셔요. ^--^

syo 2018-12-30 15:33   좋아요 1 | URL
말씀 덕분에 올 한해 완전 헛짓거리만 하고 산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이 좋아라 ㅎㅎㅎㅎㅎㅎ

모쪼록 내년에도 뚜벅뚜벅 읽고 쓰시는 설해목님 되시어, syo의 하찮은 독서생활에도 지금처럼 영향력을 미쳐주소서^-^

독서괭 2018-12-30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입니다 syo님! 올해의 댓글왕 축하드려요. 둘째 임신으로 인한 입덧과 졸음으로 좀비같이 회사와 집- 그러니까 업무와 육아를 오가느라 정신이 없어서 그동안 댓글도 못 달았네요 ㅜㅠ 그래도 syo님 글은 최대한 챙겨 읽고 있었답니다.
새해에도 맛깔나는 글 많이 부탁드려요~^^

syo 2018-12-30 18:07   좋아요 0 | URL
독서괭님이 뜸하셔서 뭔가 일이 생긴 것은 아닐지 염려했었는데, 일은 일인데 경사가 있으셨던 것이로군요! 늦었지만 축하드립니다 ㅎㅎㅎ

그렇다면 독서괭님과 복중아기씨의 정신건강에 해롭지 않은 글들만 썼어야 하는 건데, 돌이켜보니 그랬다는 자신이 없네요......

syo에게나 독서괭님과 독서괭님 패밀리에게나 신명나는 2019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레삭매냐 2018-12-30 2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어마어마한 독서량이란 당최...

게다가 올해의 댓글왕까지 !!!

새해에도 멋진 모습 기대해 보겠삽니다.

syo 2018-12-30 20:35   좋아요 0 | URL
열심히 따라가겠습니다 ㅎㅎㅎ 레삭매냐님께서 앞서서 훨훨 달려나가주세요^-^

transient-guest 2018-12-31 0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의 세상이 참 신기해요. 제가 매년 꽤 많은 양의 책을 삽니다. 당장 12월에만 해도 다섯 건이나 주문을 넣었어요. 근데 님께서 주문하신 위의 책과 겹치는 것이 한 권도 없습니다. 정말 많은 책이 매년 나오고, 쌓이니 그런 것이겠지만, 참 신기합니다.ㅎㅎ 주머니는 가벼워지고 책을 둘 곳은 점점 없어지니 이 고민은 책을 사들이는 걸 즐기는 한 계속될 것 같습니다. ㅎ

syo 2018-12-31 09:05   좋아요 1 | URL
신기하면서도 바람직하기도 하고 일견 아름답기조차 한 일인 것 같아요. transient-guest님의 글을 읽을 때마다 전혀 읽지 않은 책에 대해 잠시나마 생각해보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ㅎ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제 주머니는 더 많이 가벼워지고 공간은 더 협소해졌겠지요?? ㅎㅎㅎ

페크pek0501 2018-12-31 1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길다 길어...ㅋㅋ
좋은 책 많이 소개받은 한 해로 기록될 것 같습니다. 님 덕분입니다.
좋은 글도 재밌는 글도 많이 봤습니다. 글을 이렇게도 쓸 수 있구나, 하며 읽었죠.

물론 새해에도 좋은 이웃으로 왕래하겠습니다. 굿데이...

syo 2018-12-31 15:43   좋아요 1 | URL
ㅎㅎㅎ 칭찬 말씀에 스스로도 고개가 끄덕여질만큼 만족스러운 한 해였다면 좋았겠지만, 그저 부끄러울 뿐입니다. 페크님과의 왕래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2019를 기대합니다^-^

카알벨루치 2019-01-07 0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엔 나도 페이퍼 많이 썼는데 요즘은 내가 보지 못한 글이 막 있군요 허참!!!!

syo 2019-01-07 09:23   좋아요 0 | URL
으하하하 카알님의 시야를 벗어났다!! 모든 글을 다 발견하고 읽기란 어렵잖아요. 알라딘에 좋은 글이 얼마나 많이 올라오는데요 ㅎㅎㅎ

카알벨루치 2019-01-07 10:26   좋아요 0 | URL
다 찾아낼꺼임!!!! 오홋!!!
 

 

1992, 산격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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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길을 벗어나기를 좋아하고내가 아는 것 너머로 나가보기를 좋아하고아마 몇 킬로미터쯤 더 걸어야 하겠지만 다른 길을 통해서지도와 다투는 나침반에 의지하여도중에 만난 낯선 사람들이 알려준 천차만별의 방향 지시에 의지하여 돌아오기를 좋아한다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서부의 외딴 마을에서내가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도 아무도 없는 채 홀로 모텔에서 보내는 밤들괴상한 그림과 꽃무늬 이불과 케이블 텔레비전과 함께하기에 나 자신의 인생으로부터 잠시 벗어나는 시간이 되어주는 그 밤들베냐민의 말을 빌리자면 내가 스스로 어디 있는지 알기는 해도 사실 길을 잃은 것이나 다름없는 그 시간들걸어서 혹은 차로 어떤 산마루를 넘거나 어떤 굽이를 돌자마자 '여기는 난생 처음 보는 장소인걸.' 하는 혼잣말이 튀어나오는 순간들어째서인지 그동안 내 눈길을 벗어났던 건축의 어떤 세부적인 면이나 어떤 경관이 문득 내게 말을 걸어와서그동안 내가 집에 있기는 했어도 사실 내가 있는 곳을 모르는 것이나 다름없었다고 알려주는 순간들낯익은 것을 낯설게 만들어주는 이야기들이를테면 내가 사는 곳에서 지금은 사라진 풍경과 사라진 묘지와 사라진 동식물을 알려주는 이야기들대화하는 사람들만을 남긴 채 주변의 다른 모든 것을 사라지게끔 만드는 대화들온 종일 잊고 있다가 늦게서야 그날 나의 모든 느낌과 행동에 영향을 미쳤음을 깨닫게 되는 간밤의 꿈들...... 이런 길 잃기들은 원래의 길이나 아예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는 시작이다이 밖에도 물론 다른 길 잃기의 방법들이 무수히 더 많지만.

리베카 솔닛길 잃기 안내서, 28-29

 

어느새 밤이었다. 아이들은 하나둘 걱정을 시작했다. 만화 하기 전에는 집에 갈 수 있을 거라며. 제일 작은 아이가 울먹거렸다. 앞서 걷는 아이는 아무런 말도 없이 걸었다. 마른 흙과 바스라지는 돌멩이들이 잔뜩 깔린 길은 짐승의 길인지 사람의 길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좁았다. 계속 내려가 보자. 내리막길로만 가면 곧 산이 끝나고 집들이 나올 거야. 키 큰 아이의 위로하는 목소리조차 나뭇가지에 걸려 멀리 퍼져나가지 못하는 어두운 숲이었다. 내리막이 다른 오르막으로 이어지진 않을지, 그 끝에 마을은 나올지, 그 마을이 엄마 아빠가 기다리는 우리 마을일지, 누구도 확신이 없었다. 소풍 때 와 봤던 산이라며, 좋은 곳이 있다며 함께 오르기를 종용했던 아이를 원망하는 마음으로, 다른 아이들은 묵묵히 뒤따랐다. 앞서 걷는 아이는 무슨 생각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지금 제일 보고 싶은 것들을 떠올렸다. 벌써 퇴근하여 집에 돌아왔을 아빠와, 저녁상을 보고 기다릴 엄마와, 어제 엄마가 시장에서 사 와 냉장고에 넣어 놓은 소시지와, 칠이 다 벗겨져 녹슨 대문과, 주말에는 대문에 페인트를 칠해야겠다던 아빠의 말이 생각났다. 집에 가고 싶어요. 제발 집에만 가게 해 주세요. 그렇게만 해 주시면 페인트도 마실 수 있어요. 제가 누구를 찾는지도 모르고 아이는 누군가를 찾았고 빌었다. 그러다 금방 빨강색 페인트는 딸기 맛, 녹색 페인트는 메론 맛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도 딸기 맛이면 좋겠어. 유독 빨강색을 좋아하는 아이였다.

 

매일 보던 도시의 밤은 푸른색이었지만 산의 밤은 검정색이었다. 검은 산 속에 일렬로 걷는 아이들의 발소리만 저벅거리고 있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아이들은 앞뒤로 손을 잡고 걸었다. 불편했지만 불안보다는 불편을 선택하고 걸어 나갔다. 앞서 걷는 아이는 한 손이나마 자유로웠지만 누구보다 자유롭지 않은 마음이었다. 키 큰 아이가 만화주제가를 흥얼거렸다. 선택하지 않은 불안이지만 불안은 선택하지 않아도 스며드는 것이어서 키 큰 아이는 노래를 선택했다. 노래를 선택하지 않았다면 남은 선택지는 울음이었을 것이다. 울음 같기도 하고 불안 같기도 한 노래가 금방 끝났다. 산에는 다시 아이들의 지친 발이 내리막을 지치는 소리, 양손이 다 잡힌 아이가 세게 코를 들이마시는 소리, 초여름이 밤을 몸에 발라 열 식히는 소리만 낮게 울렸다. 그 흔한 풀벌레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형아, 만화 동산 친구들 불러 줘. 작은 아이의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았다. 키 큰 아이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노래를 시작했다. 우리 모두 친구, 만화 동산 친구, 만화는 신나는 우리들의 세상, 다른 아이도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우리 모두 친구, 만화 동산 친구. 작은 아이도 뒤질세라 따라 불렀다. 만화는 신나는 우리들의 세상. 앞서 걷는 아이는 갑자기 이 모든 게 만화 같고, 이 무서운 산이 동산 같았다. 밤과 친구가 된 것만 같았고, 밤과 친구가 된 세상은 신나는 우리들의 세상만 같았다. 우리 모두 친구! 만화 동산 친구! 아이들은 모두 만화동산 친구가 되어 외쳤다. 산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왁자지껄한 소리로 떠들썩해졌다. 노래를 부르는 아이들의 눈에 나무의 윤곽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 높은 나무들이 아니었다. 귀에는 풀벌레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리 조용한 밤이 아니었다. 우리 모두 친구! 만화 동산 친구! 만화는 신나는 우리들의 세상!

 

몇 개의 합창이 끝났다. 아이들이 걸은 내리막은 오르막으로 바뀌지 않는 순하고 착한 내리막이었다. 길이 점차 넓어지다 콘크리트로 거칠게 마감한 길과 맞붙었다. 가로등이 환했다. 도착한 곳은 아이들이 사는 동네는 아니었지만 앞서 걷는 아이가 잘 아는 동네였다. 아이들은 노래를 그치고, 손을 놓고, 자신 있게 콘크리트 내리막을 걸어 내려갔다. 더러 웃는 소리도 들렸다. 앞서 걷는 아이는 나란히 걷는 아이 중 하나가 되었다. 높은 산동네 가파른 내리막이라 정면에 하늘이 있었다. 살짝만 고개를 들어도 별이 보였다. 그제야 하늘도 별도 보였다. 나란히 걷는 아이는 집에 돌아가 아빠에게 혼날 생각을 했다. 회초리가 없었으면 좋겠어. 그리고 빨강 페인트도 없었으면 좋겠어. 페인트는 맛이 없을 텐데. 아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렇지만 딸기는 먹고 싶었다. 소시지도 먹고 싶었다.

 

 

 

2



한국인은 왜 이렇게 '틀리다'와 '다르다'를 혼용할까요이 두 단어를 동의어로 여기기 때문입니다이는 언어적 오용을 넘어서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언어가 인간의 사고와 존재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말했습니다인간은 언어를 통해서 사고하고 존재합니다언어를 잘못 쓰면 잘못된 사고를 할 수 있지요즉 '틀리다'와 '다르다'를 동의어로 사용하면 차이를 다양성으로 인정하지 못하고 틀린 것으로 여기게 됩니다자신과 피부색이나 종교가 다른 사람을 틀린 사람처럼 여긴다는 것입니다.

장한업차별의 언어 


이 대목에 관하여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먼저, 고민 없이 남발하는 예쁜 말이 고민을 없앤다는 것이다.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닙니다.” 라는 주장은 너무 옳고, 자신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인간임을, 다양성을 깨친 인간임을 어필하는데 쓰면 상당히 적은 비용으로 괜찮은 효과를 볼 수 있는 말이다. 하지만 비용에 비해 편익이 큰 말이다 보니 누구나 기꺼이 사용하고, 결국 실제로는 다른 것을 틀린 것이라 생각하는 이들의 입에서도 저 말은 어렵지 않게 나온다. 마치 공유지의 비극을 맞이한 것처럼, 저 말은 마침내 껍데기가 되었다. 이런 말을 듣게 되는 것이다. 우리도 안다. 다른 게 틀린 게 아니라는 걸. 근데 저건 다른 게 아니라 틀린 거다.

 

중요한 것은 뭐가 다르고 뭐가 틀린지에 대한 각자의 견해가 다르거나 틀리다는 것이고, 더 중요한 것은 실제로 틀린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동성애는 다른 것이 아니라 틀린 것이라는 주장하는 이에게 동성애는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것이라고 되돌려주는 것은 당신의 주장이 틀렸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내 주장(동성애는 틀렸다)은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다- 라는 역습을 만나면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니다라는 말에만 기대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게 된다. 각자가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이 틀린 것인지 아닌지는 알기 어렵다. 하지만 우리는 확실히 안다. 각자가 틀리다고 생각하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요는 말싸움이 아니라 힘싸움이다. 어떤 가치를 신봉하는 이들의 경제적/사회적/정치적 힘이 반대편을 압도할 때, 그들의 가치가 정의도 되고 상식도 되는 것이다. 그런 싸움에서는 전선을 잘 긋는 것이 중요하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예쁘고 헛된 말은 밀고 나가는 힘이 없다. 그 말과 반대로 행동하는 스스로를 속이는 데 쓰이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이들을 위한 자위도구로 쓰일 뿐이다.

 

두 번째로, 저 말 자체가 남발되면 멍청한 자기모순에 빠진다는 점이다. 요즘은 대구 사람들도 다르다는 말을 의식적으로 쓰지만, syo보다 어른들이 쓰는 대구 사투리에는 다르다가 없다시피 하다. 대구 어르신들은 다른 것도 틀리다고 하고 틀린 것도 틀리다고 한다. ‘다른은 있다. 보통 ’으로 쓴다. 하지만 다르다는 여지없이 틀리다가 대신한다. syo는 스무 살이 되어 서울에서 대학 생활을 하기 전까지는 단 한번도 쟤는 너와 다르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만약 대구 사투리의 어휘 체계에 다르다가 존재하지 않고, 그러므로 대구에서만큼은 더는 틀리다다르다의 오용이 아니게 되었다면, 어휘 체계에 다르다를 갖춘 말이 표준어라는 이유만으로 대구 사람들의 어휘 사용은 비난받아야 할까? 사투리는 틀린 것이 아니라, 표준어와 다른 것이다. 표준어 구사자에게 다르다는 말을 써야 할 곳이라는 이유로 대구 사투리 구사자에게도 틀리다대신 다르다는 말을 쓰라고 종용하는 일은,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니라는 말을 이용해 다른 것을 틀리다고 주장하는 셈이 아닐까?

 

마지막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구건 어디건 구분할 수 있는 사람들은 다르다틀리다를 구분하여 쓰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말은 틀린 데가 없다는 것이다. 언어는 변하는 것이고, 변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그 안에 차별이나 혐오를 품지 않는 방향으로 변해가야 한다. 멍청하게 있다가 저도 모르게 무의식이 시키는 대로 빻은 말을 내뱉는 꼴을 보면 말은 무의식의 호구인가 싶지만, 그 무의식을 형성하는 것 역시 말, 남의 입에서 나와서 내 귀가 듣는 말, 내 입에서 나와서 내가 듣는 말, 듣는 말이다. 한 번 뱉고 마는 말은 힘이 없지만, 백 번 반복되는 말은 사람을 움직이고, 만 번 반복되는 말은 산을 옮긴다. 다른 것과 틀린 것을 구분할 줄 아는 마음은 사실 소통의 기본기고, 모두가 무의식에 그 기본기를 장착하는 날이면 더 이상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니다라는 당연하고 약한 말은 새삼스러워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이니까.

 

 


3



안타깝게도 우리는 지칠 줄 모르고 타인을 이해하려 든다대부분의 사람들은 타인을 대하는 데 어느 정도의 마조히즘즉 자학적 성향을 지니고 있다우리의 관심을 끌고우리가 어떤 이유에서든 매력적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그만큼 우리를 좌절시킬 수도 있다그런데도 우리는 그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기를 포기하지 않는다그들이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든 아니면 우리를 무시하거나 감정을 상하게 하든 상관없이 우리는 계속 매달린다우리를 끊임없이 똑같은 인간관계의 함정과 궁지에 빠지게 만드는 것은 인간을 더 깊이 있게 이해하려는 희망과 좌절 사이의 경계 지점인지 모른다.

외른 회프너카트 읽는 남자, 20-21 


내가 방금 한 말만으로 나를 다 알 수는 없는 거라고 대꾸하는 목소리가 거셀수록, 역설적으로 그 말이야말로 나에 대해 정말 많이 알려주는 말이라는 걸 거세게 자백하는 꼴이었다. 돌이켜보면, 그건 내 진심이 아니었다는 말로 사과한 일이 실은 제일 크게 미안해야할 일이었고, 부끄러움으로 오래 남는 일이었다. 반면, 나를 알려주기 위해 내가 건넨 말들을 모아보면 지금의 내가 아니라 되고 싶은 나를 가리키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건 세상에 없는 나였다. 나의 이데아 같은 것.

 

나를 알려주는 일은 이렇게 어렵고 부끄럽고 빗나가는 일이서, 다른 사람을 아는 일은 좀 수월할까 했지만, 세상엔 쉬운 일이 하나 없다.

 

사람에 대해 많이 알고 싶은 욕심은 끊을 수가 없다. 사랑이 크면 클수록 사랑하는 사람을 알고 싶고 미움이 크면 클수록 미운 사람을 알고 싶다. 내게 주어진 파편들을 그러모으고 지성이니 상상력 같은 것들을 접착제로 사용해 나는 그 사람을 내 안에 만든다. 매우 조잡하게. 내 안의 그 사람은 내 밖의 그 사람과 만나면 여지없이 깨어지고 그러면 나는 다시 파편을 주워 모아야 한다. 그 사람이 그대로 내 안에 퐁당 들어오면 좋겠지만 그것은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일이라 일찌감치 포기하고, 나는 또 모자이크를 시작한다. 다시 박살날 조각을 맞춘다.

 

이 과정에 너무 지쳐서 사람을 알고 싶은 마음이 점점 줄어드는 것이 늙는 일이라고 나는 해석한다. 이제는 큰 덩어리만 대충 모으고, 대충 밑그림을 그리고, 언제 부서져도 상처 나지 않도록 모서리가 둥글둥글한 사람들만 만들어 마음 안에 들여놓고 싶다. 그러면 피곤할 일이 없겠다.

 

그렇지만 늙는 일은 곧바로 죽는 일은 아니라서, 아무리 지치고 속상해도 온전한 전부를 마음에 들여놓고 싶은 사람은 생기게 되어 있다. 그 사람의 지나는 말 한마디를 그저 지나지 못하고, 뿌리는 눈빛 한 줌을 그저 뿌리치지 못하고, 흘리는 웃음 한 조각을 그저 흘려보내지 못하게 되어 있다. 인간이 마음을 채우는 가장 쉬운 방법은 내가 아니라 남으로 채우는 것이므로, 그 피곤하고 날카로운 일을 인간은 끝없이 반복할 밖에.

 

 

 

 -- 읽은 --



한강 외, 작별

강민선, 아무도 알려주지 않은 도서관 사서 실무

장한업, 차별의 언어

강준만, 글쓰기가 뭐라고

시사IN 편집국, 시사IN 588

 

 

-- 읽는 --



리베카 솔닛, 길 잃기 안내서

외른 회프너, 카트 읽는 남자

김영민, 동무론

데니스 C. 라스무센, 무신론자와 교수

오선영, 모두의 내력

김신현경, 이토록 두려운 사랑

서영은, 보담, 오늘도 가난하고 쓸데없이 바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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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8-12-28 1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들은 다 타인에 대해 퍼즐맞추기를 하나 봅니다 나도 쇼님에 대해 퍼즐 맞추고 모자이크 만든다오~ㅎ

syo 2018-12-28 18:30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ㅎㅎ 만나면 한 방에 다 허물어질 부질없는 모자이크입니다....

카알벨루치 2018-12-28 18:39   좋아요 0 | URL
다 똑같지요 ㅎ

2018-12-29 13: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2-29 14: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18-12-29 1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트 읽는 남자』의 인용문을 읽고 느낌 :
타인을 통해 인간을 이해하기보다 저 자신을 통해 인간을 이해할 때가 더 많았던 것 같아요. 타인보다 소설 속 주인공을 통해
인간을 이해하게 될 때가 더 많고요. 뭐 이건 작가의 솜씨, 통찰력에 기인한 것이겠지만요.
저 자신도 이해하기 힘들 때가 많은데 내가 누굴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겠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자식의 속마음도 저는 잘 모르겠더라고요. ㅋ
좋은 밤 되시길...

syo 2018-12-29 19:30   좋아요 0 | URL
음, 저는 저를 통해서는 저밖에 모르겠더라구요 ㅎㅎㅎㅎ 이런 저밖에 모르는 놈.....
타인을 통해 인간을 이해하는 것도 사실은 포기했어요. 타인에 대해 알면 알수록 세상에 ‘인간‘이라는 것이 사실은 없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인간이라는 게 있다면 참 편할 텐데, 그거 알면 되게 많이 아는 거니까 하는 생각도 들면서...... 역시 저밖에 모르는 놈 ㅋㅋㅋㅋ

페크님도 따뜻한 밤 보내시기를. 날이 많이 춥습니다.
 

 

syo홀로 집에

 

 

1

 

스물 이전의 syo는 연애를 글로 배웠고, 실은 배움에 썩 의욕적인 학생도 아니었다. 카더라 통신교육을 통해 연애학 개론을 이수하고 났더니, 1다음에 2, 2다음에 3이 온다는 건 외워서 알겠는데 그 다음이 도통 깜깜했다. 기출문제만 보고 시험장에 들어가면 대체로 그런 신세가 되는 법이다. 그런 이유로 첫사랑인지 풋사랑인지 망할 놈의 그 사랑은 시작과 동시에 이미 망하고 있었는데 난 또 그걸 몰랐지, 100일도 버티지 못하고 와르르 무너져 버린 400km 장거리 연애는, 여자는 남자의 마음을 찢고 남자는 여자의 증명사진을 찢으면서 쌤쌤에 똔똔으로 소각되었다(고 우기는 거지.) 원래 근육이란 찢어진 근섬유가 초과회복 되며 자라는 법, 석 달 가까이 바보 등신 쪼다처럼 지내고 났더니 찢어진 마음이 초과회복 되면서 빵빵한 연애 근육이 생겨났다. 20년 동안 글로 배운 연애는 다 똥이었고 역시 연애는 이별로 배우는 법이지. 그리고 다시 석 달이 지난 어느 겨울, 여기서부턴 '진짜' 연애라 불러도 남부끄럽진 않겠다 싶은 그런 연애가 시작되었고, 그날 이후 지금까지 한 손에 꼽힐 만큼의 사람을 만나왔는데, 만으로 13년을 꽉꽉 채운 그 기간 동안, 어찌된 일인지 공식적으로 애인이 없었던 날은 모두 합쳐 채 열흘이 되지 않는다...... 아무래도 이게 다 첫 연애를 훌륭하게 잘 망친 덕이 아닐까 싶네요. 아이고, 아주 고오오맙습니다아아.

 

사랑하는 사람이 너무 바쁜 관계로 혼자 침대에 누워 크리스마스를 보내면서, 지난 12개의 크리스마스들이 어땠던가 생각해보는 조용한 시간을 가졌다. 그 크리스마스 모두를 여친과 함께 보내지는 않았음이 명백하긴 한데(feat. 군대), 그렇다면 혼자서 보낸 것이 몇 개인지 정확히 떠오르진 않았다. 사실, 같이 보낸 크리스마스들도 딱히 떠오르진 않았다. 이렇게 무심한 인간이 어떻게 햇수로 14년 동안 쉬지도 않고 연애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역시 첫 연애를 그럴싸하게 망친 덕이 아닐까. , 고오오오맙습니다아아아.

 

syo를 만났던 여인들은 제각기 다 잘 살고 있다고 한다. 그녀들은 모두 결혼하여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는(듯 보이는), syo는 그 소식을, 서재에 남긴 아이디를 보고 검색하여 알게 되거나, 본인에게 직접 들어 알게 되거나, 친구의 전 여자친구의 현 남자친구(였으나 지금은 아닌 걸로)를 통해 듣고 알게 되었고, 그 모든 소식을 syo의 현 여친과 공유하였다. 반면 syo 이전에 여친을 만났던 남자들은 의외로 잘 풀리지 않은 것으로 밝혀지고......

 

이것이 참 슬픈 부분이다. 어쩐지 syo를 만났던 여인들은 syo를 만나는 동안 온갖 고초와 환난을 겪으며 인생의 최고난이도 지점을 통과했는데, 그러다 탈syo하면 슬그머니 운이 트이곤 했다. 그 중 한 여인은 syo와 만나는 중에는 뭐 하나 되는 게 없더니 헤어지고 나서는 기다렸다는 듯이 만사가 형통하였다. 그랬는데 굳이 syo를 다시 만나 뚫렸던 운세가 턱 막히면서 syo의 저주를 실증적으로 증명하였는데...... 두 번이나 정말 죄송했습니다.

 

그렇다면 진짜 사죄해야 할 곳은 바로 현 여친인 것이다. 13년 연애사의 7할에 가까운 긴 기간 동안 이렇다 할 다툼 한 번 없이 굳건하게 syo와 함께한 그녀는 짧고 아름다운 청춘을 syo에게 낭비하느라 남들 다 누리는 소소한 기쁨들조차 제대로 챙겨 가지지를 못했는데, 오늘날에도 아무런 죄 없이 장기간 인생의 터널에 들어서 고군분투하는 중이다. 저 모든 괴로움의 뒤에, 앞에, 아래에, 위에, 사방팔방에 다 내가 있는 것 같다. 세상 누구보다 완벽한 사람이 세상 누구보다 후진 사람을 만나서 자꾸만 다치고 작아지고 바스라지고 슬퍼지고 지는 것만 같다. 당신의 인생이 내 인생을 닮아가는 것만 같습니다. syo는 침대에 홀로 누워, 이 휴일에도, 온천지에 사랑이 범람하는 이 휴일에도 사랑하는 사람의 옆자리에 편히 누워있지를 못하고 마모되어야만 하는 사람을 생각하며 시간을 보냈다. 다음 크리스마스를 어떤 크리스마스로 만들어야 할지 생각했고, 그러기 위해서 팔아야 할 것이 있다면 당신 말고는 다 내다 팔아버리겠다고 생각했다. 그랬더니 크리스마스가 끝났다. 슬픈 크리스마스가 영영 끝났으면 좋겠다.

 

읽지 않거나, 읽어도 울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러라고 횡설수설을 가져다 앞에 붙였다. 울지 않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와 나에게 오래 슬퍼할 만한 일이 일어난다면그때 그곳에 우리가 꼭 함께 있었으면 한다그 일이 다른 한 사람을 피해 가는 행운을 전혀 바라지 않는다같이 겪지 않은 일에 같은 슬픔을 느낄 수는 없기 때문이고서로의 슬픔을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우리는 견딜 수 없을 것이므로.

신형철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오늘은 종수와 함께 밥을 먹는데 식당에서 '일기예보'의 노래가 나왔다.

  '네가 좋아 너무 좋아 내 모든 걸 주고 싶어'

  나는 가만 듣고 있다가 종수에게 "노래가 어쩜 이렇게 예쁘냐"하고는 울어버렸다종수는 내게 "왜 우느냐"고 했고 나는 "이렇게 예쁜 노래를 만들지 못하는 사실이 너무 슬퍼서 운다"고 했다종수는 내가 실력이 안 되어서 노래를 못 만드는 게 아니라고 했다이렇게 예쁜 노래가 저절로 나올 수 있게 자기가 더 많이 사랑해주었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해서 그렇다고자기가 더 잘하겠다고 했다.

 

  가끔 종수는엄마 같다.

요조오늘도무사

 

  내가 책을 읽을 수 있게 된 건 유치원에 다니기 조금 전부터였다집에는 몇 권의 동화책이 있었는데처음엔 글자를 알아볼 수 없어서 그림만 봤다그러다가 한글을 깨우치면서 문장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문장을 읽는 것은 꽤 어려운 일이어서 꼭 엄마의 도움을 받아야 했는데엄마는 항상 부엌에 있었으므로 나는 부엌 가까이에서 책을 읽곤 했다. "엄마. '고난'이 무슨 뜻이야?" "... 너무너무 힘든 걸 말하는 거야."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무슨 뜻이야?" "으음... 뭔가 어려운데도 지지 않고 계속 할 때 쓰는 말이야.

이슬아나는 울 때마다 엄마 얼굴이 된다



 

2


 

사주명리학자 조용헌 선생에 의하면초기 불교 경전에 수입의 5분의 1만 자기 돈이고 나머지 5분의 4는 이런저런 이유로 손아귀를 빠져나가는데 그 5분의 1은 질병의 몫이라는 가르침이 있다고 합니다세상에 아픈 것보다 돈 드는 일은 없습니다. _ 22 23

 

200년 전 여든 살까지 살았던 랠프 월도 애머슨은 "재산 1호는 건강"이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_ 24

 

워런 버핏은 투자결정을 할 때마다 "지불하는 것은 가격이지만 얻는 것은 가치다"라는 스승 벤저민 그레이엄의 가르침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고 합니다. _ 26

 

현대 건축의 거장 루이스 설리번은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고 통찰했습니다우리의 몸 역시 모양이 기능을 따라갑니다. _ 46

 

현대 건축의 거장 미스 반 데어 로에의 '적은 것이 많은 것이다'라는 말로 대표되는 미니멀리즘은 핵심만 남기고 불필요한 요소를 제거하는 예술 사조입니다. _ 63

 

자신의 몸을 귀하게 여기는 것을 귀생괴롭히는 것을 섭생이라고 하는데, <도덕경>에서는 귀생을 하면 오히려 생이 위태로워진다고 가르칩니다몸은 편안함을 추구할수록 더 나빠진다며 오히려 "섭생을 잘하는 자는 죽음의 땅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하여 스트레스와 고초에 노출될 것을 장려합니다. _ 72

 

통계학에서는 상관관계와 인과관계를 혼동하지 않을 것을 가장 먼저 가르칩니다. _ 165

 

하버드대 총장을 지낸 데릭 보크는 "교욱이 비싸다고 생각하면 무지를 체험해보라"고 말했습니다. _ 214

 

맹자의 말입니다그는 이어 "사람은 항상 잘못을 저지른 뒤에야 고칠 수 있고마음이 괴롭고 자꾸 생각에 걸려야 분발하며남의 안색에서 확인하고 남의 목소리에서 드러나야만 깨닫는다안으로는 법도 있는 대신과 보필하는 선비가 없고밖으로는 적국과 외환이 없으면이런 나라는 항상 망하게 되어 있다이로 미루어 사람은 우환에 살고안락에서 죽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_ 242

_ 이기원, 『운동 미니멀리즘』

 

와, 이 양반 정말 엄청 읽었나 보다. 운동 책이 이렇다. 운동 책을 읽었는데 책을 읽고 싶다니, 이런 운동 책은 처음이다. 사실 운동 책 자체가 처음이나 매한가지지만.....

 

 

 

3



  스물 몇 살 때였는지 데런은 굳이 기억을 더듬어 헤아리지 않았다디엔도 데런도 까마득히 젊었던 시절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봐도 활기보다는 깊은 우울에 사로잡혀 있던 시절이었다점심시간이 막 지난 한낮이었고 데런과 디엔은 학생식당 뒤편 벤치에 앉아 무슨 이야기인가를 나누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검은 구름이 지나가듯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는 걸 느꼈고 둘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을 때 낯모르는 남학생이 그들 앞에 버티고 서 있었다복학생처럼 짧은 머리였던 것은 기억나는데 안경을 썼는지 안 썼는지는 기억나지 않았고 어느 쪽이라고 해도 좋을 얼굴이었다남학생이 그들에게 끄라고 했다데런과 디엔 둘 중 누군가가 왜 그러냐고 물었던 것 같고 둘 중 누군가가 묵묵히 담배를 빨았던 것 같다남학생이 다시 끄라고 했다못 끄겠다는 디엔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학생은 끄라고끄라고끄라고소리치며 팔을 들어올려 디엔의 뺨을 내리쳤다손바닥으로 쥐어박듯이 후려치는 바람에 디엔이 균형을 잃고 옆으로 쓰러졌다그리고 그 대목에서 믿기 힘들 정도로 깨끗이 데런의 기억도 끊겼다그때 데런이 남학생에게 뭐라고 했는지 그 남학생은 뭐라고 대꾸했는지 주변에 사람들이 있었는지 그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한참이 지나 전혀 다른 장소에서 디엔이 울고 있었고 우는 디엔을 달래며 데런도 울었던 것만 어렴풋이 기억에 남아 있다그 후로 그들 중 누구도 그 일에 관해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으므로 데런은 자신의 기억이 끊긴 부분에서 디엔의 기억도 끊겼는지아니면 그 뒤의 일을 디엔은 모두 기억하고 있었는지 이제는 알 수 없게 되었다.

  데런은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오싹하면서 불구덩이에 들어앉은 듯 후끈한 기운을 느꼈다끄라고데런은 그때였다고 생각한다디엔의 꿈속에서 오래전에 죽은 걸로 등장한 자신이 오래전에 죽은 순간은 바로 그때였을 거라고끄라고디엔이 얻어맞은 직후에 자신의 기억이 모조리 사라진 건 그때 자신이 아무 말도아무 행동도 하지 못했다는 걸완전무결하게 무력했다는 걸 의미한다고끄라고그 주문은 담뱃불을 향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영혼그들의 사랑을 향한 것이었다고끄라고그때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던 자신의 내부에서 고요히 작열하던 무력감이 정신의 어떤 연결 퓨즈를 태워버렸을 거라고끄라고그 분노와 절망과 공포가 그들의 삶을 돌이킬 수 없이 응결시켰으리라고끄라고못 끄겠다고 말한 건 디엔이었지만 아직도 꺼지지 않는 그것이 자신의 내부에 남아 있다고끄라고끄라고끄라고꺼지지 않는 그것이 어둠 속에서 발을 구르고 소리를 지르고 팔을 휘두르는 거라고!

권여선희박한 마음

 

할 수 있다면 전부 옮겨놓고 싶었다. 알라딘에는 권여선을 읽지 않은 사람이 많지 않겠지만, 그래도 혹시, 오히려 너무 많이 읽느라 여력이 없어 아직 권여선까지 손이 닿지 못한 분들이 계실까 봐, 이만큼이라도 옮겨 놓는다. 이만큼이라도 옮겨 놓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권여선을 읽었으니까 그래야한다고 생각했다.

 


 

4



  얼마 뒤 관장이 또 연락을 했다.

  "혹시 지역신문에 칼럼을 연재해보는 게 어때요강선생이 좋아하는 글도 쓰고 도서관 이름도 알리고신문사에서도 좋아할 거고."

  그렇게 시작된 칼럼은 한 달에 두 차례씩 지금까지 열여섯 차례 연재되었다원고료 같은 건 받아본 적 없지만 그것 역시 내 업무이고 내가 받는 워급에 포함된 일이라 간주하고 있다글의 내용이나 쓰는 방식은 내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어서 편했다하지만 돗관 이름을 내걸고 쓰는 글이니 100퍼센트 자유로운 것은 물론 아니다.

  신문사 사장과 함께한 식사 자리에서 내가 쓴 칼럼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딱 봐도 한 번도 안 읽어본 사장이 내게 말했다.

  "신문에 실린 거 잘 스크랩 해 놔요나중에 아이한테 보여주면서 엄마가 이런 거 썼다고 하면 자식이 얼마나 자랑스럽겠어."

  첫 번째와 두 번째 신문은 오려서 보관해두긴 했는데 신문에 내 이름과 얼굴이 나온 게 신기해서 그런 거였지 나중에 아이한테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고아직은 아이가 없었고방금 전에 사장이 아이 안 낳는 여자들은 세금 더 내야한다는 발언을 한 다음이었기에 너무 짜증이 났다모아 둔 신문은 청소할 때 갖다 버렸다.

강민선아무도 알려주지 않은 도서관 사서 실무, 92-93

 

제목이 독자를 잡아끌지 밀어낼지 모르겠지만, 저자는 아마 제목을 포기하기 어려웠을 것 같다. 정말 실무를 기대했을 일부 독자를 실망시키거나, 실무에 관한 실용서일까 봐 이 책을 꺼려했을 대부분의 독자에게 예상 밖의 재미와 깨달음을 주었을 저 실무들이, 실무 같지도 않고 실무여서도 안 될 것 같은 저 실무들이 실무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말하는 것이 자신의 일이라고 저자는 생각했을 것이다. 같은 이유에서, 진짜 사서의 실무를 알고 싶은 독자에게나, 그저 상징적인 제목이길 예상했을 독자에게나, 이 책은 좋은 책이다.

 

 

 

5



  이 책의 본문에 있는 "인용은 강준만처럼 많이 하지 마라"는 제목의 글을 쓰면서 하게 된 생각이다. "나는 반면교사를 위한 산 증인이다"라는 말을 하면서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 반면교사가 이런 책은 왜 쓰지왜 나는 남에게 권할 수 없는 걸 하지?" 나는 그간 내 나름으론 '과잉 인용'에 대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지만그 의문 하나에 새삼 내 글쓰기를 돌아보게 되었다.

  오래전부터 '과잉 인용'이라는 비판을 받으면서도 내가 그걸 바꾸지 않은 이유는 "인용 없이 쓰는 게 내겐 훨씬 쉽고 '싸게먹힌다"는 자신감이었지만그걸 누가 알아주나아니 독자에게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나는 독자들이 주는 인세 덕분에 책을 많이 사볼 수 있는 특권을 누리면서 살아간다. "독자들이 이 많은 책을 다 읽을 수는 없을 테니내가 대신 읽고 핵심 메시지만 전해주겠다"는 뜻으로 부지런히 인용을 해댔지만독자들이 원한 건 그게 아니었다.

강준만글쓰기가 뭐라고, 9 

 

이 책을 손꼽아 기다렸던 가장 큰 이유는 강준만 선생님의 글쓰기를, 그러니까 평소 선생님이 구사하는 인용의 태풍을 흠모하였던지라, 그 태풍을 구성하는 물방울 알갱이들을 과연 어떻게 모으고 관리하며 구조화하시는지에 관한 비법이 쓰여 있지나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서였다. 그런데 서문부터 대뜸, 선생님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게다가 앞으로는 이런 식의 글을 쓰지 않겠다는 뉘앙스로 읽히기까지 하니, 아니되옵니다, 선생님. 통촉하시옵소서......

 

 

 

 

-- 읽은 --


듀나, 민트의 세계

이슬아, 나는 울 때마다 엄마 얼굴이 된다

이기원, 운동 미니멀리즘

김기형 외, 좋아하는 것을 함부로 말하고 싶을 때

 

 

 

-- 읽는 --



한강 외, 작별

와쿠이 요시유키, 와쿠이 사다미, 그림으로 설명하는 개념 쏙쏙 통계학

리베카 솔닛, 길 잃기 안내서

강민선, 아무도 알려주지 않은 도서관 사서 실무

강준만, 글쓰기가 뭐라고

장한업, 차별의 언어

최태섭, 한국,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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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붕툐툐 2018-12-26 2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탈syo‘라는 말이 왜이렇게 웃기죠? 최고 멋진 알라디너남친을 두어 syo님의 여친은 행복하실 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syo 2018-12-26 23:34   좋아요 0 | URL
툐툐님 말씀에 힘을 냅니다. 이 힘을 모아서 그 사람한테 전해줄 수 있으면 참 좋겠는데요. ㅎㅎㅎ

2018-12-26 23: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2-26 23: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얄라알라 2018-12-26 2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밤에 syo님의 위트 넘치는 글에 웃고 갑니다. ˝운동 미니멀리즘˝도 한번 둘러보러 가야겠네요

syo 2018-12-26 23:36   좋아요 0 | URL
희한한 책입니다. 운동 뽐뿌도 꽤 되는 책 같습니다. 저는 syo라서 저한테는 안 통했지만요 ㅎㅎ

단발머리 2018-12-27 0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yo님 여친이 알라딘서재 syo님 글을 읽는지 어쩌지는 모르겠네요. 읽지 않는다면 제게 번호 좀 가르쳐 주세요.
이 글을 좀.... 보내드리고 싶어요.
이 아름다운 사랑의 세레나데..... 세상 누구보다 행복해하실 듯해요.
부러우면 지는건데 부럽당.............*^^*

syo 2018-12-27 09:32   좋아요 0 | URL
단발님은 다정한 사람ㅎㅎㅎㅎㅎ
저는 이게 다예요 ㅎ 실질적으로 뭐 해주는 게 없어.......

그보다 양수기함의 기적은 일어났나요??

단발머리 2018-12-27 12:09   좋아요 0 | URL
사랑사랑사랑~~~~^^

산타 할아버지가 예전같지 않으시대요. 대표 없이 과세 없다고...결제 없는 선물 없다고 하네요. 슬프당 ㅠㅠ

syo 2018-12-27 12:46   좋아요 0 | URL
산타할아버지도 경기 타는 직종이구나. 하긴 자영업이 다 그렇죠......

내년에는 양수기통이 푸짐한 크리스마스가 될 거예요^-^

목나무 2018-12-27 0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글을 쓰는 syo님 곁에 오래 한결같이 계시는 걸 보니 여친은 분명 사람을 제대로 볼 줄 아는 뛰어난 안목을 가지신 분이네요. ^^
syo님 내년 크리스마스 글은 어떨지 벌써부터 기다려집니다! ㅎㅎ

syo 2018-12-27 09:34   좋아요 0 | URL
설해목님 다정하다.....^-^

그 사람 안목은 훌륭한 사람인데 syo를 만난 것은 인생 최대의 미스터리ㅎㅎㅎㅎ

내년 크리스마스는 달큰한 글이 올라올 수 있도록 아등바등 살아보겠습니다^^

2018-12-27 09: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2-27 09: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책읽는나무 2018-12-27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나 다정한 syo님!!!
전여친님들은 ‘탈syo‘를 해서 운세가 풀리신게 아니고...그러한? 사랑을 받아봐서 그러한? 사랑을 또 받을 수 있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리라 믿습니다.
현여친님은 그러한? 사랑을 받고 있고,이런 사랑을 놓치지 않고, 그 운세를 직접 잡으실.....??!!!!

글을 읽으면서 너무나 애틋하여서 말이죠^^
따뜻한 마음이 묻어 나네요!!
이런 사람은 놓치면 안되는뎅~~여친님 전화번호 어찌됩니까??
저는 놓치면 안된다고 협박하고 싶습니다만^^
결혼생활을 해보니까,서로에게 다정함이 가장 큰 용기가 되기도 하고,위로가 되기도 해서 웬만한 일이 닥쳐도 잘 극복할 수 있게 되더라구요!!
저흰 그걸 이제사 깨닫고 다정해지려 노력중입니다ㅋㅋ
그래서 더욱 여친님이 syo님을 놓치면 안될터인데....^^

syo 2018-12-27 12:44   좋아요 0 | URL
원체 남자들 무뚝뚝한 경상도에서 다정함이란 게 없다시피한 아버지를 보고 자라면서 항상 다정한 남친 다정한 남편이 되는 것이 꿈이었는데요, 돌이켜 생각해보면 탈syo한 전 여친들에게는 조금 다정하고 많이 개자식이었던 것 같아요. 그런 과정을 거쳐서 지금 만나는 사람한테는 조금 더 다정해질 수 있었구요. 그런데 다정을 못 주던 시기에는 이제 다정만 주면 다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다정을 줄 수 있게 되자 다정 말고는 줄 게 없어서 미안하니 이것 참 사람 일은 알 수가 없지요? ㅎㅎㅎㅎㅎ

그나저나 책나무님을 비롯해서 서재이웃님들이야말로 다정하기 이를 데가 없네요. 전 너무 사적인 얘기라서 댓글이 하나도 달리지 않겠구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제가 이웃님들의 다정함을 얕봤네요 ㅎ 감사합니다, 책나무님^-^


카알벨루치 2018-12-27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쇼님 글이 올라올까 알라딘에 들어왔더니 역쉬나! 마음쓰는게 참 장난이 아니다!

여친은 일을 하고 남친은 혼자서 책을 보고. 마음 한켠에 미안한 맘이 있어도 버티는 거지뭐. 하루하루 버티는 거고 그런거지 뭐.

안되믄 하루에 페이퍼를 10개씩 쓰는거야. 아 책읽어야하지 ㅜㅜ. 책은 내 모든 걱정의 무거운 짐과 삶의 굴레를 뒤로 잠시 제켜두고 그곳에 내가 오롯이 머물면서 울컥하면 한번 울어버리는지. 찌질하다고? 아무도 안 보는데서 우는거지. 근데 우는건 쇼님하고 안 어울린다 유쾌상쾌통쾌한 쇼님이니.

나도 한 15년만 젊어서 알라딘 왔으면 좋겠다 싶다는 생각을 해보네요. 근데 뭐 어쩌라고. 다 부질없는 짓이라.

언제나 쇼님을 응원하는 알라딘호구가 별소릴 다 적어봅니다 ^^

syo 2018-12-27 12:56   좋아요 1 | URL
카알님이 제 행동 패턴을 다 파악하신 것 같아서 한번 변칙적으로 조금 일찍 올려보았습니다. 후후후후.

저는 눈물이 많은 편인데 희한하게 제 일에 관해서는 눈물이 메마른지가 오랜지라 아무도 안 보는데서 혼자 우는 일은 없습니다 으하하하하.

카알님 굉장히 나이 있으신 척 하시는데 민증 나이가 무슨 상관이겠어요. 꾸준한 축구활동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신체 나이는 무조건 syo이하일 것이고, 쓰기에 대한 열정이나 활발한 댓글 소통으로 미루어 보아 감성적 연령도 syo랑 엇비슷한 것 같으니, 이러다 syo한테 반말 듣게 생기셨습니다? ㅋㅋㅋㅋㅋ

응원 말씀 덕에 항상 든든합니다. 감사합니당^-^

카알벨루치 2018-12-27 15:59   좋아요 1 | URL
나도 내 나이를 보면서 놀랩니다 아뿔사!!!...제가 철이 없어서 그런거임~ ㅎㅎ바람이 매섭네요 감기조심하시고 paper 10개 고고고~

stella.K 2018-12-27 16:2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13년 연애라. 그 정도면 결혼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결혼해! 결혼해! 결혼해! ㅋㅋㅋ

카알벨루치 2018-12-27 16:43   좋아요 1 | URL
결혼하는걸로 쇼님! 올해는 안되니 내년에???

syo 2018-12-27 17:23   좋아요 0 | URL
아니 이분들이 여기서 왜 이러실깤ㅋㅋㅋㅋㅋㅋㅋㅋ

그렇게혜윰 2018-12-27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정이 몽글몽글한데요?^^

syo 2018-12-27 17:24   좋아요 1 | URL
다정한 눈으로 읽으시니 몽글몽글하게 보이는 게 아닐까요ㅎㅎ ^-^

감은빛 2018-12-27 1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운동 미니멀리즘]이란 책이 왠지 익숙해서 잠시 살펴보니 서점에서 앞 부분을 읽었던 책이네요.
당시 제가 훑은 기억으론 운동 책으로서는 그닥 매력적이지 않다 느꼈는데,
쇼님이 발췌한 부분들을 살피고 나니, 지금 보면 또 다를지도 모르겠다 싶어요.

아니 근데 어떻게 13년 동안 애인이 없었던 날이 열흘이 채 되지 않는다니!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몹시 궁금하네요! ^^

syo 2018-12-27 19:07   좋아요 0 | URL
운동 책으로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다는 말씀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실제로 저도 읽고 나서 운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1도 들지 않았으니.....ㅎㅎㅎㅎ

살다 보니 그렇게 되었네요. 연애에도 상도덕이 있는 건데, 그런 규정을 올바르게 준수하지는 않았던 어린 시절...... 이제라도 똑바로 살려구요^-^

프리즘메이커 2018-12-28 03: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번 글은 정말 부러운 글이네요 syo님 한해 마무리 잘하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syo 2018-12-28 09:14   좋아요 0 | URL
프메님도요!! 2019에는 좀 더 종종 뵈었으면 좋겠으나, 역시 어렵겠지요?? ㅠㅠ 통촉하소서.
 


모름을 아는 것은 아는 것입니까 모르는 것입니까

 

 

1



철학하기는 삶과 공동생활에서의 의심스러운 전제와 주장들에 대해 우리의 머리를 깨운다그 목표도 더는 예전처럼 진리가 아니다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진리를 가질 수 있다는 환상에 빠지지 않는다그 목표란 우리의 생각과 삶의 틀을 넓히는 것이다철학하기란 우리 인간의 유한한 시간을 좀 더 생동감 있게 체험하려는 희망 속에서 우리의 사고 기관을 날카롭게 벼리는 것이다그게 단지 우리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기 위한 것일지라도.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세상을 알라』 , 20-21 

 

많이 알수록 점점 더 내가 잘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말을 우리는 종종 듣고 또 한다. 그 말을 하는 syo의 모습은 때로 트로피를 높이 든 운동선수처럼 보인다. 잘 모르는데, 잘 모르는 걸 알았는데 어떻게 계속 말을 하지?

 

제가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이라는 말을 쓰는 일도 많다. 써보니 저건 의미는 없고 의도만 있는 말인 것 같다. 겸손해 보이고 싶은 의도. 일단 뱉고 나중에 틀렸다는 게 밝혀질 때 면피하고 싶은 의도. 자체 모순의 말 같기도 하다. ‘아니지만이라는 역접의 말끝은 이제부터 내 주장을 끌어 붙이겠다는 뜻이니까. 어쩌면 모순 없이 가능한 말은 오직 제가 잘 아는 것은 아니라서뿐인 것은 아닐까? 이제부터 당신의 의견을 경청하겠다는 말끝.

 

살며 많은 딜레마를 만나왔지만 그 중 무엇 하나도 돌파하지 못했다. 세상에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없다는 말이 절대적으로 옳을 수 있는지 없는지 가려내지 못했고, 모든 것은 옳고 그름이 아니라 주장하는 이가 얼마나 강한지에 달렸다는 주장이 얼마나 강한지 파악하지 못했으며,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는 없다는 말에 모든 사람이 만족해야 하는지 아직 잘 모르겠다.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는 것보다 해야 할 말을 하지 않는 쪽이 더 나쁜 결과를 빚어내는 국면이 있다는 건 아는데, 간혹 그 국면에 들어설 때면 이 국면이 바로 그 국면인지를 잘 알아채지 못한다.

 

이런 나를 위해 철학이 무엇인가를 해 줬으면 좋겠는데 철학이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를 모른다. 그걸 알려면 철학을 알아야 하는데 철학이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를 모르니 철학을 못하겠다. 그걸 알려면 철학을 해야 하는데..... 대충 그런 이유로 우리는 철학에 손을 대지 못하는 것 같다. 물론 어렵기도 하지만, 아무리 어려워도 철학이 우리에게 무언가를 해 준다는 확신만 있으면 우리도 기어이 철학을 할 것인데 말이다.

 

단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는 달라지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조차 아는 사람이 된 스스로를 뿌듯해했고,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1일 따름이었다. , 인간이란 뭘까, 철학이란 뭘까, 철학하는 인간은 뭘까.


계몽이 자기파괴를 일삼는다는 것은 계몽이 내세우는 '발전'이 진보로서가 아니라 '퇴행'으로 귀착되었음을 뜻한다계몽의 이상이 삶의 해방을 가져다 준 것이 아니라또 다른 이데올로기로 변질되어 버린 것이다계몽의 정신은 계몽의 이데올로기로 퇴보하였다이 이데올로기는 속박을 초래한다그것은 생산적이기보다는 파괴적이다이데올로기적 이성은 또 다른 속박의 이름이다그리하여 계몽된 문명은 자기파괴적 이성 아래 야만 상태와 크게 다르지 않다.

문광훈스스로 생각하기의 전통 


사유의 폭과 깊이는 한 인간의 경험치를 넘어서지 못한다.

이진우니체 

 

사실 모든 사람은 역사의 파편 속에서 작은 맥락을 일구고 살아갈 뿐입니다거시적인 방향성을 설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당면한 현실 가운데 맥락을 일구지 못하면 모두가 공허한 말장난에 불과할 뿐입니다.

심용환단박에 한국사 근대편

 

 

 

2



2001년 우리가 살던 작은 아파트 단지에서는 5일에 한 번씩 장이 열렸다여러 상인들이 천막을 치고 자리를 깐 뒤 채소나 과일이나 접시나 안데르센 동화전집 같은 걸 팔았는데 그 중에 청바지를 파는 천막도 있었다엄마는 장날이면 그 천막에서 싸고 예쁜 청바지를 고르곤 했다부츠컷 청바지가 유행하던 때였다청바지 가게 아저씨는 눈썹이 진했고 말이 많지는 않았지만 친절했다엄마와 아저씨가 계산을 하는 동안 나는 주로 코딱지를 파며 서 있었다계산을 마친 엄마는 아저씨에게 상냥하게 인사한 뒤 천막을 빠져나왔고 아저씨도 반가워하는 얼굴로 인사를 받아주었지만 어느 날부턴가 어딘지 모르게 괴로워 보였다얼마 후에도 엄마와 나는 장에 들러 이것저것 구경하고 있었는데청바지 파는 천막을 지날 때쯤 굳은 표정으로 서 있던 아저씨가 다가와 엄마에게 말했다. "제발 이 앞으로 지나다니지 좀 마요...... 미치겠으니까." 그때 봤던 청바지 아저씨의 이글거리는 눈동자를 나는 먼 훗날까지 잊지 못했다엄마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인 뒤 나를 데리고 집에 가서 저녁을 차렸다청바지를 팔던 아저씨는 얼마 후부터 장에 나타나지 않았다바야흐로 스키니진의 유행이 도래하고 있었다.

이슬아나는 울 때마다 엄마 얼굴이 된다, 17-20

 

이건 완벽하지 않나? 이만큼으로 할 수 있는 최고지 않나?

 

안데르센 동화전집주로 코딱지를 파며 서 있었다라는 도구의 효율적인 역할과 적확한 자리. 그 이후부터는 이야기가 달음질치므로 저런 장치를 추가하면 사족에 불과하거나 몰입에 방해가 되었을 것이다.

 

부츠컷과 스키니진. syo라면 부츠컷 청바지가 유행하던 때였다를 맨 앞줄에 넣었겠다. 그랬다면 조금 더 시선을 잡아끄는 첫 문장을 가진 글이 되고, 글의 첫머리와 꼬리가 대응하여 맺히는 글이 될 수 있었겠지만, 동시에 전체 구조가 좀 작위적이고 기교적이라는 느낌을 주었을 것 같다. 그랬다면 그 작위와 기교가 청바지 아저씨와 엄마의 이미지에 조금은 물들 것이며, 전체 이야기가 주는 감흥은 그만큼 줄었을 것 같다. 천천히 생각해보면 이슬아의 선택이(선택인지 감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옳은 것 같다. 멋져.

 

이런 좋은 글은 항상 양면적인 기분이 들게 한다. 잘 쓴 글이 주는 기쁨은 예쁜 조각 같지만, 그 조각의 밑면에는 항상 ㅋㅋㅋㅋ넌 이거 안 되지 메롱이라고 쓰여 있다. 특히 이슬아 작가의 경우처럼, 그 예쁜 조각을 만든 이가 syo보다 10살 가까이 어리면 그 놀림은 더욱 크게 쓰여 있다! 게다가 여기에는 옮길 수가 없었지만 저 글에는 syo가 결코 손댈 수 없는 영역인 그림까지 부착되어 있다! 이러면 도리 없이 또 사랑해야지. , 세상엔 사랑할 사람이 너무 많아. 자꾸자꾸 생겨나는 사랑, 이 헤픈 사랑.

 

 

 

 

3



  인도적 차원에서 우리는 서구 의약품의 전파를 억제하지 않을 것이다우리는 질병 치료도굶주린 사람들에게 식량을 공급하는 것도 거부할 수 없다그러나 우리는 사회적 개선과 함께 출생률 조절이 이루어져야 함을 명심해야 한다삶의 질을 개선하는 만큼 가족 인구의 제한이 뒤따라야 한다사망률과 출생률을 함께 조절하지 않으면 우리의 운명은 어두워질 것이다어쩌면 이미 너무 늦었는지도 모른다가톨릭교도가 가장 많은 국가그리고 현대 의학이 등장하는 국가에서 23년 후면 인구가 두 배로 늘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국가가 지난 20년간 출생률을 반으로 줄인 일본처럼 효율적인 방침을 택한다면문제를 합리적인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다그러나 비극적이게도 수소폭탄이 최종 해결책이 될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

앤서니 스토공격성인간의 재능, 240

 

인간의 일은 참 알 수 없는 것 같다. 앤서니 스토가 이 책을 냈던 1960년대 말엽에 일본의 출생아 수는 최고점을 찍었던 2차대전 종전 직후(약 270만명)에 비해 절반 가까이 떨어졌다. 그러나 이내 상승하여 75년경에는 210만 명의 새로운 고점을 찍었다. 그리고 그 시기 사망자 수는 역대 최저에 가까웠다. 그 장면을 보면서 앤서니 스토는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일본인의 합리성이 금방 무너졌다고 여겼을까? 그러나 이내 일본은 다시 합리적인 기조로 돌아섰고, 현재는 사망자 수가 출생아 수를 훌쩍 넘기고 있다. 앤서니 스토가 아직 살아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광경을 보면 무슨 말을 할까?

 

출생율을 낮추는 일이건 높이는 일이건, ‘효율적 방침합리적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 이들의 오만한 성정은 맬서스 이후로도 그 명맥을 튼튼하게 이어오고 있지만, 인류는 자신들이 원하는 시점에 딱 변곡점을 만들어 낼 수 있을 정도로 효율적이고 합리적이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지나치게 과밀해지고 나서야 기기괴괴한 정책들을 동원하여 출산율을 억지로 떨어뜨렸다. 출산율에 구멍이 나고 그 구멍으로 국가의 미래가 줄줄 새어나오는 것을 보고서도 시종일관 멍청한 방식으로 대응하더니, 이제야 일부 선진국에서나마 약발이 좀 서는 신약을 찾아내 임상실험에 들어간 것 같은 모양새다.

 

오늘날 공격성은 인간의 재능일 수도 있겠지만, ‘인류의 재능인 것 같지는 않다. 더는 아닌 것 같다.




우리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들은 언제든지 폐허가 될 수 있다우리가 겸손해지고 서로를 돌보는 법을 배우지 못한다면삶은 언젠가 뿌리 뽑혀 버릴지도 모른다.

최태섭억울한 사람들의 나라 

 

 

 

4



 요즘 나의 대화에는 많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나와 딸과 남편으로 무더기다

 

 문이 열려서 문을 열고

 열어야만 닫히는 것이 문이기 때문에

 누군가 그리울 수 있어 좋은 나의 집

 

 남편의 목을 조른 손으로 바구미를 골라냈다

 같은 손으로 쌀을 씻고 흰살생선을 구웠다

 

 새벽에 나 혼자 맛이 좋았다

 손이 벌인 일이나 나의 전체가 낳은

 

 딸이 연속극을 보다가 중얼거렸다

 사랑은 사랑이 바닥나기 전에 끝장나게 하시라......

 사랑이 아직 사랑일 때 바닥나게 하시라......

 죽은 생선을 움켜쥐어본 적도 없이 끝날

 딸의 볼륨 없는 사랑

 

 따뜻했다

 숟가락 위에 올린 흰살생선의 살점

 양손으로 움켜쥐었을 때 딱 들어맞는 인간의 목

 

 밝은 시그널 뮤직으로 시작했다가

 슬픈 사운드 트랙으로 끝나는 16회 차였는데

 사람이 사람 구실하며 사는 바람에 극은 탄력을 잃고

 

 폐장 이후의 회전목마처럼

 어둠의 선분을 팽팽히 잡아당기며

 나와 딸과 남편이 한집에 잠들었다

 

 개미가 더 큰 죽은 개미를 물고 지나가는 장면이

 꿈속에서 반복되었다

유계영버닝 후프」 전문

 

의미라고도 의도라고도 부를 수 있는 무엇, 혹은 그 둘 사이의 어느 지점에 무엇인가가 있고, 시가, 넓게는 문학이, 더 넓게는 모든 예술이 그 무엇인가를 담지하고 있다는 생각이 일반적이다. 그 일반적 생각에 기반하여 예술의 독자들은 생각하고 추리한다. 그리고 저마다 결론을 내린다. 그 결론은 시인의, 작가의, 예술가의 결론과 0으로부터 100까지 펼쳐진 닮음의 스펙트럼을 만든다.

 

독자와 작가의 결론 닮음이 0100 중 어느 쪽에 가까운가 하는 것보다 훨씬 더 흥미롭게 지켜봐야 할 부분은, 작가가 독자를 0100 중 어느 방향으로 끌고 가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가이다. 현대에 가까워질수록 독자의 견해가 어느 한 방향으로 수렴하는 사태를 일부러 막으려는 작품이 많이 등장한다. 독자의 머릿속에 확정적이고 단정한 이미지가 아니라 생동하고 흩어지는 이미지를 던져 넣으려 하는 작품이 있다. 독자는 전체를 보고 어떤 느낌을 받지만 그것이 과연 어떤 느낌인지 정확히결론짓는 일을 한없이 보류해야 하는 입장에 처한다. 마치 원자핵 주변의 전체적 전자분포를 확률적으로 어림하여 구름 같은 모형을 그릴 수는 있지만 전자가 어디에 있는지를 정확하게꿰뚫기는 난망한 것처럼, 어떤 이야기를 중심으로 구름처럼 번져 있음을 느끼지만 정확히 어떤 의미의 몸통을 꿰뚫고 있는지는 단정하기 어려운 시, 단정하기 어렵게 만드는시가 있다. 마치 한 편의 시에서 짝수 번째 행을 지워버리고 홀수 번째 행만 뽑아놓은 것처럼 행과 행 사이에 간격이 큰 시가 있고, 같은 방식으로 이미지와 이미지의 간격을 벌려 놓은 시가 있다. 그 간격 속에서 독자는 헤맨다. 시와 친하지 않은 독자일수록 더 격렬히 헤맨다. 달리 생각하면 그것은 축복일 수 있다. 시는 알고 읽을 때와 알려고 읽을 때 각각 다른 무언가를 알려주는 희한한 장르다.

 

 

 

 

 

5



아름다움과 건강이 하나라면 아름다운 몸매가 건강한 몸매와 무관할 리 없습니다적자생존survival of the fittest의 법칙에 따르면 우리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몸매는 원시시대의 생존과 번식에 적합fit했던 몸매입니다남성은 강인해야 했고여성은 건강해야 했습니다그렇게 환경에 적응했던 남성과 여성이 생존과 번식에 성공했고그들은 그 적합함fitness에 대한 선호까지 후세에 물려주었습니다그래서 여성은 '든든한남성을 좋아하고 남성은 '섹시한여성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그리고 그러한 몸매는 오늘날 우리가 '피트니스fitness'를 통해 추구하는 몸매와 다르지 않습니다적합함이라는 뜻의 'fitness'가 체형 개선을 위한 운동을 뜻하기도 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이기원운동 미니멀리즘, 50 

 

이런 글은 취지는 알겠지만 입장이 애매모호하다.

 

적자생존의 법칙에 따르면 오늘날의 생존과 번식에 가장 적합한 몸매는 재벌총수의 몸매나, 하다못해 건물주의 몸매 정도가 되겠다. 거기까지 가지 않더라도,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결혼 상대자로 가장 선호되는 이들의 직업으로 미루어 짐작해보면, 이제 적자생존의 법칙에 가장 들어맞는 몸매는 공무원, 공기업 직원, 교사, 금융직, 의사, 약사 등등의 사회적 지위를 가진 이들의 몸매일텐데, 그 몸매는 어떤 몸매일까?

 

아 물론 몸까지 좋으면 승률이 더 높긴 하겠지. 하지만 핏한몸매가 오랜 옛날 환경에 적응하여 번식에 성공했던 이들의 몸매와 일치한다는 말을 100퍼센트 인정해도, 그 몸매는 오늘날의 결혼 적자생존의 법칙에서는 부수적, 장식적, 옵션 기능에 가깝다. ‘적합함fitness’에 따라야 한다면, 우리는 원시시대의 피트니스와 자본주의 시대의 피트니스 가운데 어디에 맞춰 핏해져야 할까? 그러니까 syo는 지금 돈이 없어서 결혼을 못하고 있지 근육이 없어서 결혼을 못하고 있는 게 아니라고.....

 

 

 

 

-- 읽은 --



앤서니 스토, 공격성, 인간의 재능

유계영, 이제는 순수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트린 주안 투안, 마우나케아의 어떤 밤

정용준, 유령

옌스 죈트겐, 비탈리 콘스탄티노프, 교양인을 위한 화학사 강의

 

 


-- 읽는 --



이기원, 운동 미니멀리즘

이슬아, 나는 울 때마다 엄마 얼굴이 된다

듀나, 민트의 세계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 세상을 알라

김기형 외, 좋아하는 것을 함부로 말하고 싶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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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24 16: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2-24 16: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카알벨루치 2018-12-24 1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저만치 달려가는 쇼님, 따라갈수가 없네 그냥 맛좋은 커피나마시면서 쉬어가야겠다! 맛난다 ㅋㅋ

카알벨루치 2018-12-24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사가 빠졌다요 이때쯤이면 쇼님 글이 올라오지 않을까했는데 역쉬나~메리 클스마스 쇼님! 젊은 친구로 알게되서 감사하고 늘 행복하소서^^

syo 2018-12-24 17:01   좋아요 2 | URL
과연 제가 젊은 친구일까요?!! 이렇게 삭신이 안 쑤신 데가 없는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카알님도 끝장나는 메리크리스마스 되시구요^-^

카알벨루치 2018-12-24 17:32   좋아요 0 | URL
끝장나믄 안되유, 딸린 식구가 많아서 아직 좀 더 살아야하는디유 ^^

syo 2018-12-24 17:34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끝장나게 웃기시다ㅋㅋ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18-12-24 1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단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는 달라지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넌 이거 안 되지 메롱” 공시적이고 통시적인 공감의 울림에(허접하네요. 그냥 쉽게 쓰자-저도 딱 그런 기분 느끼는데, 느낀 적 많은데) 무릎 탁 치며 따옴표 치고 갑니다.ㅋㅋ

syo 2018-12-24 17:10   좋아요 1 | URL
˝넌 이거 안 되지 메롱˝ 이게, 안 느끼거나 못 느끼는 사람들 입장에서 느끼는 쪽을 보면 저게 무슨 쓸데없는 열폭이냐 하겠지만, 쓸데 없는 열폭도 열폭은 열폭이라 슬프잖아요..... 열반인님도 아신다니, 진짜 그렇잖아요 저게 ㅋㅋㅋㅋㅋ

syo 2018-12-24 19:54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ㅎ ‘매번 폐가 많습니다‘ 이거 너무 재미집니다..... 앞으로의 댓글 소통이 너무 기대되곻ㅎㅎ

반유행열반인 2018-12-24 1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김영하 소설 보면 자꾸 눈 앞에 메롱메롱 하는 작가의 얼굴이 어른거리곤 했는데 포기하니 편해유...그래 이 분도 대문호야 하면서 다 대문호로 승격시키면 됨....이슬아님 책은 안 봤지만 이슬아님도 마음 속 명예의 전당에 올리시면...그래도 메롱메롱은 슬프네요 ㅠㅠ내 속엔 대문호가 너무도 많아...

syo 2018-12-24 17:37   좋아요 1 | URL
저랑 정말 비슷하시네요! 저는 마음 속에 명예의 전당을 넘어서 아예 판테온을 만들어 놨거든요 ㅋ
어차피 안 될 거 포기를 넘어 숭배하기로 하자......

흥미로운 지점은 제 만신전에는 김영하 작가가 없다는 건데 ㅎㅎㅎㅎㅎ 역시 인간의 다양성이란.

반유행열반인 2018-12-24 18:26   좋아요 0 | URL
만신전쯤 차리려면 독서량이 syo님쯤 되어야...마지막 줄은 ‘난 저 정도는 되지 메롱’의 반증으로 멋대로 해석하는 오독을 하겠습니다...매번 폐가 많습니다. ㅎㅎㅎ

서니데이 2018-12-24 2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yo님, 즐거운 크리스마스 보내세요.^^
날씨가 차갑지만, 따뜻하고 좋은 일들 가득한 성탄절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메리크리스마스.^^

syo 2018-12-25 08:59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님도 즐거운 크리스마스, 이어지는 행복한 연말, 또 이어지는 희망한 새해 되시길^-^

cyrus 2018-12-25 0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리 크리스마스~ 내년에도 서부도서관을 애용해주시고(응?), 열독하시고 건필하세요. ^^

syo 2018-12-25 09:00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 내년에는 어쩐지 서부도서관에서 한 번쯤 마주칠 것 같은 시루스박사님 메리크리스마스^-^

페크pek0501 2018-12-25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유의 폭과 깊이는 한 인간의 경험치를 넘어서지 못한다.˝ - 그렇다면 저는 힘빠집니다. 제 경험치 이상의 글을 쓰고 싶은데 말이죠. 독서로 보충이 되려나요?

syo 2018-12-25 15:33   좋아요 0 | URL
독서로 될랑가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전 경험한 것은 쥐뿔도 없지만 쥐뿔로도 어떻게든 써나가고 있는데요 ㅎㅎ
뭔가 알록달록한 경험이 있으면 더 좋겠다는 생각은 항상 하고 있어요.